모악산 청련암에서
증산상제님의 행적
『도전』 성구
* 계묘癸卯(道紀 33, 1903)년 4월에 상제님께서 모악산 안양동安養洞 청련암靑蓮庵에 머무르시며 공사를 보시니 이때 박금곡이 수종 드니라. 상제님께서 11일 해 돋기 전에 공사를 마치시고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에 ‘용봉龍鳳’ 두 글자를 상하上下로 대응시켜 크게 쓰신 뒤에, 그 왼편에 작은 글씨로 ‘독존석가불獨尊釋迦佛’이라 써서 금곡에게 주시니, 금곡이 상제님의 친필을 공손히 받아 먼저 깨끗한 종이로 싸고 다시 비단으로 고이 감아 보물처럼 보관해 두니라. (6:8:1~4)
계묘癸卯년(1903년) 4월 초에 상제님이 여기 청련암에 오셔서 공사를 보셨다. 4월 11일 새벽에 공사를 보시고서 해가 떠오를 때 두 글자를 쓰셨다. 아래에다 용龍 자를 쓰시고, 그 다음 봉鳳 자는 뒤집어 가지고 거꾸로 쓰셨다. 용과 봉이 서로 머리를 맞대는 모습으로 그리셨는데 용과 봉은 누가 높다 누가 낮다 할 수가 없다. 용봉龍鳳 두 글자를 쓰셔서 대원사 주지 박금곡에게 주셨다. 그런데 왼쪽에 다섯 글자가 더 있다. 조금 작은 글자로 ‘독존석가불獨尊釋迦佛’ 다섯 글자를 쓰셨다. 선천 부처와 후천 대불大佛이 있다. 상제님의 도통을 전수받으신 태모님께서 후천 대불도수를 보셨지 않나. 선천의 지존이신 석가불보다도 더 큰 부처님, 우주의 지존이신 상제님이 미륵불의 도를 여는 것을 말한다. 용봉은 미륵님의 도법정신을 상징하고 또 미륵불의 도를 여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가 안양동安養洞인데 안양은 안양安養 양신養神에서 왔다. 평안한 마음을 기르고, 몸을 새롭게 하고 불멸의 몸을 길러 낸다는 의미다. 그래서 안양동은 바로 천지의 조화로운 생명의 마음, 부처의 마음을 기른다는 뜻이 있다. 안양동은 직접적으로 종통하고도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용봉도수는 상제님 태모님의 대행자를 상징한다. 용은 천지의 물을 맡아 다스리고, 봉황은 천지의 불새, 태양새라고 해서 태양의 불기운을 맡는다. 용과 봉은 이 세상에서는 없지만 영적인 4차원 세계에서는 자연신으로 있다. 용이 중간 하늘에서 바닷물을 끌어올려 비를 내려 준다. 용과 봉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 천지부모의 대행자이다. 순수 양, 하늘을 대행하는 것은 감坎괘다. 감괘는 중앙에 양이 있고 천지의 물을 상징한다. 불이라는 것은 땅 어머니의 순수 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용문화, 용토템은 태호 복희씨가 처음 가지고 오셨다. 태호 복희씨는 바람 풍風가로 인류 최초의 성씨다. 봉의 문화를 처음 가지고 오신 분은 바로 염제 신농씨다. 신농씨는 강姜가로서 인류 성씨의 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미륵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강姜씨로 오셨다. 강씨는 그 문화가 봉황이다. 중국의 염제신농씨 사당에 가보면 봉황새가 꽉 차 있다.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 인류 성씨의 뿌리 족속의 상징이 용과 봉이다.
여기서 보면 제비산이 보이고 제비산 뒤에 구성산이 보이고 오른쪽에 계룡봉이 보인다. 계룡봉에서 상제님의 친구, 영원한 인간 세상의 친구, 안필성 성도가 저기서 살았다. 그 아래 조금 내려가다 보면 용화동인데 그 왼쪽 환평에서 김형렬 성도가 살았다. 위아래 마을에서 그렇게 두 양반이 친구처럼 살았다. 김형렬 성도가 안필성 성도보다 여덟 살이 많다.
여기 청련암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셨는데 아미타불은 무량광, 무량수불이다. 수명이 제한이 없고 광명이 경계가 없는 온 우주의 광명 부처님이다. 불가에서는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 해서 아미타불의 정토낙원을 말한다. 아미타불은 미륵님과 함께 이 세상에 오셔서 미륵님의 지상선경 용화낙원을 건설하시는 그런 부처님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에서 나무라는 것은 돌아간다는 의미다. 아미타 부처님에게 돌아간다 말이다. 결국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아미타 부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아미타불이 된다. 우리는 아미타불이다! (복창) 이 아미타불은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그 부처 세상을 완성하는 부처님이다. 그럼 모든 걸 완성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상제님의 일꾼들 초립동草笠童이다. 우리 초립동이들이 바로 이 태을주 조화주문을 받아가지고 태을선, 태을 부처가 된다. 이번에 1만 2천 명의 도통 부처들이 나온다.
저 하늘을 봐. 하늘은 동서남북, 위아래 아무것도 없어. 하늘은 어떤 성질이 있는 게 아니다. 불교는 하늘 마음, 하늘의 도를 근본으로 해서 생겨났다. 그래서 괴로울 때, 자기 한계를 느낄 때, 자기가 어리석다고 느껴질 때 맑은 하늘을 보라. 이것이 바로 본래 자연의 마음이고 부처의 마음이고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들 생명의 본성은 나이가 많고 적고,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키가 작거나 크거나에 전혀 관계없다. 우리 마음이 본래 우주의 마음이고 우리는 우주 자체다. 나는 살아 있는 우주다. 나는 살아 있는 천지다! 여기 안양동에서는 이걸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