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

불가리아의 슬라브화와 기독교화

천연감성 2016. 3. 24. 15:30





불가리아의 슬라브화와 기독교화





불가리아에는 슬라브Slav족의 수가 꾸준히 늘어갔다. 슬라브족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슬라브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언어도 슬라브어가 주된 언어가 되었다. 지배층인 불가르 귀족들(볼리야르Bolyar)은 전통적인 천신(텐기르) 신앙을 하였지만 슬라브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소수 지배층인 불가르족의 통치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수용이 불가피하였다. 861년 보리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불리한 전세를 벗어나기 위해 비잔틴 황제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는 몇 년 뒤 자신의 가족들 및 일부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양에서는 기독교권 내부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틴 정교회 간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보리스Boris 1세는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적 지위를 얻어내었다. 기독교의 도입으로 불가리아 칸의 권력은 일층 강화되었다. 예전에는 칸은 불가리아 부족 연합의 우두머리 성격을 띠었으나 이제는 신의 지상 대리자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을 하나의 불가리아 인민으로 통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927년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는데 이는 세르비아 정교회 독립보다 300년 앞선 것이며 러시아 정교회보다는 600년 앞선 것이다. 그리하여 불가리아 총주교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 이은 여섯 번째 총주교좌가 되었다. 




보리스 칸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종교를 통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한 그리스 성직자들이 불가리아의 성직자 양성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보리스 칸은 모라비아 왕국으로부터 추방된 키릴Cyrill과 메토디우스Methodios의 제자들을 적극 환영하고 그들에게 불가리아 성직자들의 교육을 맡겼다.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는 그리스 출신으로서 슬라브 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에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사후에 그 제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모라비아로부터 추방되었던 것이다.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슈카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오리드에 각각 학교를 세워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칸의 명에 따라 그리스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교육을 하였다. 또 불가리아의 공식문자도 그리스어가 아닌 키릴문자Cyrillic alphabet를 채택하였다. 키릴문자는 855년 키릴이 슬라브어로 된 기도문을 적고 바이블을 번역하기 위해 만든 글라골릭 문자를 개량하여 만든 문자로 피레슬라브 학교에서 창안된 것이다. 프레슬라브 학교는 예전에 플리슈카에 있던 학교로 보리스 1세가 귀족의 반란 때문에 수도를 플리슈카에서 프레슬라브로 옮기면서 따라 이전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몽골에서 사용하는 키릴문자는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