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프랑스 식민지배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대였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욕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알제리 태수와 프랑스 영사의 외교적 마찰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알제리를 점령하였다(1830). 당시 알제리는 오토만 투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제 300여년간의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대신하여 프랑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점령에 이어 프랑스인들을 위시한 유럽 이민자들이 알제리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토지를 많이 차지함에 따라 많은 알제리 원주민들이 고향에서 떠나야 하였다. 회교도 알제리인들은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에 비해 법적인 차별을 받았다. 알제리인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가 알제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알제리전쟁은 프랑스 내부에도 큰 갈등을 불러일으켜 알제리 독립 허용을 반대하는 프랑스 장군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프랑스 정부(제4공화국)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의 투쟁과 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여 1962년에 독립을 허용하였다.
19세기에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도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말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였으나 차츰 영토획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월남에서 영토와 큰 영항력을 획득한 프랑스는 월남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불전쟁(1884~1885)이 그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월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었다.
인도차이나인들의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투쟁은 영불전쟁 직후부터 있었으나 2차대전 이전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인도차이나는 2차대전시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프랑스의 수중에서 잠시 벗어났으나 일본이 패전한 후 프랑스가 다시 인도차이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호치민의 베트민 세력과 힘든 싸움을 벌이다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 군대가 참패함으로써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