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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1.16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인간의 소외 마르크스의 철학
  2. 2018.01.10 한국과 싱가포르의 관계
  3. 2018.01.06 싱가포르의 교육시스템
  4. 2018.01.05 싱가포르의 문화적 특성
  5. 2018.01.04 싱가포르 사회구성
  6. 2018.01.03 싱가포르의 경제 동향과 전망
  7. 2017.12.26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8. 2017.12.25 싱가포르의 외교정책
  9. 2017.12.24 싱가포르의 입법부와 사법부
  10. 2017.12.23 싱가포르의 정치 및 행정
  11. 2017.12.12 싱가포르 현대역사의 시작 리콴유총리
  12. 2017.12.11 싱가폴의 근대역사
  13. 2017.12.10 싱가포르의 초기역사
  14. 2017.12.09 가장 유럽적인 아시아 국가, 싱가포르 Singapore
  15. 2017.12.04 칭기스칸의 인연들
  16. 2017.12.03 테무친시대 몽골고원의 세력권
  17. 2017.11.28 칭기즈칸의 군사조직
  18. 2017.11.27 세계 최강 칭기즈칸 몽골군의 무기들
  19. 2017.11.26 세계 최강 칭기즈칸 몽골군의 비밀
  20. 2017.11.13 칭기즈칸의 사람들 4구四狗
  21. 2017.11.12 칭기즈칸의 사람들 4준四駿
  22. 2017.11.11 칭기즈칸의 인품과 미덕
  23. 2017.11.10 동서통일제국을 건설한 최초의 세계인 칭기즈칸의 성장과정
  24. 2017.11.06 영국 사람들의 사랑방, 펍(Pub. Public House)
  25. 2017.11.05 영국의 국교, 성공회( 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
  26. 2017.11.01 영국인의 문화 특성
  27. 2017.10.31 영국 경제와 한국과의 관계
  28. 2017.10.18 영국 인종의 분포
  29. 2017.10.17 프랑스의 자부심 그랑제콜
  30. 2017.10.15 영국의 인구와 민족
세계정보2018. 1. 16. 18:00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인간의 소외

마르크스 철학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소외를 일으키는 근원과 그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데서 인간의 소외가 비롯된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한다. 자본주의에서 돈의 가치는 소유주에게 무한한 힘을 부여하는 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돈의 가치는 모든 가치를 지배하여 전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실을 불성실로 불성실을 성실로 전도시킬 수 있다든가, 미덕을 죄악으로 죄악을 미덕으로 바꿀 수 있다든가, 무지를 지성으로 지성을 무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든가, 노예를 주인으로 주인을 노예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이 바로 돈이라는 얘기다. 이와 같이 가치의 정상에 군림하는 돈의 위력은 인간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유를 박탈당하며, 비인간화로 전락한다. 이와 같이 돈의 가치에 대한 숭배는 소외의 토대이자 근원이 된다.

 

둘째로, 임금노동자는 노동의 이윤으로부터 소외가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계급은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양분될 수 있는데, 자본가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 된다. 특히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합리적으로 배치하려고 한다면, 임금노동자나 새로운 기계의 도입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만일 임금노동자를 선택하였을 경우 자본가는 생산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노동자에게 지불하고 잉여분을 챙긴다. 임금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노동을 하지만, 잉여가치는 결국 자본가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는 노동을 하면 할수록 이윤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내면적인 가치가 더욱 빈약해지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셋째로, 임금노동 자체가 소외의 원천이 된다. 사실 노동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임금노동자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노동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고역이고, 자발적으로 행하는 창조적인 노동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기계적이고 즐거움이 없는 반복적인 작업의 연속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에게 자유로움과 보람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강요된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과 무관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이런 노동자는 동물처럼 단지 먹고 마시고 번식하는 기능을 할 때만 오히려 편안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넷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산출해낸 상품은 노동자 자신과 전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려 소비되기 때문에, 임금노동자는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는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생산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는 자기와 같은 종족을 생산해내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임금을 받아 생존해 나갈 뿐이다.

 

다섯째, 임금노동자는 생산 활동과 자신의 본질로부터 소외되고, 결국엔 본질이 속하는 유적존재(類的存在)로부터 소외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고립된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 간의 유대관계를 통해 사회적인 유(類)를 반영하는 유적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은 노동을 통한 생산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본질을 실현시키게 되지만,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창조적인 자기 활동성과 자유로운 활동성이 사라지고, 오직 삶을 위한 노동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된다. 결국 그러한 인간은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분리되어 사회적 관계인 유적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여섯째, 유적존재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동료들로부터 소외된다. 특히 노동의 분업은 노동자들의 소외를 더욱 가속화시키기 마련이다. 즉 노동의 분업으로 인하여 개인의 이익은 공동체의 이익으로부터 분리되고, 개인들의 관계는 이기적인 타산의 관계로 변질되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간행위로부터 소외되어 결국 인간은 서로서로 이방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방인으로 전락한 인간들 간의 관계는 인격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맺어지게 마련이다.

 

일곱째, 인간의 소외는 노동자만의 특권이 아니고 노동자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자본가도 마찬가지이다. 임금노동자는 노동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외되고, 자본가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소외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자기 소외는 결국 인간이 자주성을 상실하는 데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즉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창조활동이나 자기 본질의 표현으로서 노동해야 하는데, 노동으로부터 산출된 상품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고, 인간의 본질이 유적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인간들로부터의 소외가 초래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을 폐기하여 노동자와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10. 02:52




 

 

 

한국과 싱가포르의 관계

 

 




 

한국은 1970년 11월 5일 주駐싱가포르 통상 대표부를 설치하고 1972년 7월 5일 대표부를 총영사관으로 승격시켰으며 1975년 8월 8일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싱가포르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어 1978년 11월 9일 당시 도쿄에 주재하던 주한 싱가포르 대사의 신임장을 제정했다. 1990년 10월부터 주한 싱가포르 상주 대사가 부임했다.

 

한국은 싱가포르와 1975년 8월 수교 이래 긴밀한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정상 및 고위 인사가 상호 빈번하게 방문하며 2006년 3월 한국·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발효 이후 양국 교역이 매년 25% 증가했으며 양국 투자도 확대되었다. 양국의 인적 교류를 살펴보면 2009 기준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한 한국인이 27만 2000명, 한국을 방문한 싱가포르인이 약 9만 7000명으로 총 약 37만 명이 교류했다. 양국은 각각 동북아 및 동북아의 중견 국가로서 서로 상대 지역 진출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 및 지역·국제 협력 동반자로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1981년 7월 전두환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996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방문했으며 2000년 1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국빈 방문 및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Nations)+3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아세안(ASEAN)+3정상회의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대한민국, 일본, 중국 3개 국가를 포함시킨 정상회의이다. 이후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빈 방문했으며 2007년 11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아세안+3 및 동아시아정상(EAS, East Asia Summit) 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2009년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했고, 2010년 6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공식 방문하고 샹그릴라 대화 기조 연설을 하였다. 2015년 3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리콴유 전 총리 장례식에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하였다.

 

싱가포르 인사의 한국 방문은 1979년 10월 리콴유李光耀 총리의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리콴유 총리는 그 이후 1986년 7월, 1988년 7월에도 한국을 방문했으며 1993년 11월에는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1999년 6월에는 정상회담을 위해 고촉통 총리가 방한했으며 2000년 10월에 고촉통 총리가 샨무감 자야쿠마르Shanmugam Jayakumar 외무장관과 함께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Asia EuropeMeeting)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으며 2002년 4월에는 셀라판 라마 나단Sellapan Rama Nathan 대통령이 국빈 방문했다. 2005년 11월에는 리셴룽李顯龍 총리가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 참석했으며 2009년 6월에는 리셴룽 총리가 한·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 정상회의 참석차 공식 방한했다. 이밖에도 리셴룽 총리는 2010 11 서울 G20 정상회의 참석차, 2012 3월에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2013년 12월에는 한-싱 정상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1972년 2월 항공 협정을 체결하고 1979년 11월 이중과세 방지 협정을 체결했다. 1981년 5월에는 해운 협정을 체결하고 1982년 11월에 비자 면제 협정을 체결했다. 1995년 8월 예술·문화·체육 협력 협정을 체결했으며 1995 5 통신 협력 양해 각서에 서명했다. 1997 2 과학·기술 협정을 체결했고 1997 6 체육 교류 약정을 맺었다. 2000 11 중소기업 협력 약정과 표준 협력 약정을 맺었으며 2006년 3월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체결했다.

 

2010년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 수는 약 1만 6000명으로 이 가운데 시민권 및 영주권자가 2,000명이며 6개월 이상 장기 체류자가 1만 4000명이다. 2010년 4월 기준으로 싱가포르 내에 있는 한국 기관 및 지·상사는 정부 유관 기관 5, 금융 회사 10, 해운·조선 10, 종합상사 7, 항공 2, 건설·중공업 6, 정유 4, 전자·전기 7, 일반 무역 및 기타 9개이다. 싱가포르 내 동포 단체로는 동포 사회 특성상 지·상사 주재원이 다수 회원으로 있으며 1963년에 창립된 ‘재싱가포르 한인회’, 1997년 10월 한국경제인협회가 창립한 뒤 2002년 9월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로 개편한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가 있다.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학교는 1993년 3월 개교하였다.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으며 1973년에 설립된 부설 토요한글학교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2010년 현재 학생 수는 1학년~6학년까지 108명이고 토요한글학교의 학생 수는 초등 270명, 중등 40명으로 총 310명, 한국어 강좌 수강생 수는 180명이다.

 




경제문화 관계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중동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라는 특성을 바탕으로 동남아의 교역 중심지로 발전해왔으며, 한국은 싱가포르와 교역, 투자, 건설 부문에서 긴밀한 경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5년 기준, 한국의 對싱가포르 수출은 150억 달러, 수입은 79억 달러로 전년 대비 각각 36.8%, 29.7% 줄어들어 그동안 꾸준히 증가했던 전체 교역규모가 34.5% 축소되었다. 우리나라의 對싱가포르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직접회로반도체, 선박류이고 주요 수입 품목은 직접회로반도체, 석유화학중간원료, 반도체 제조용 장비 등이다.

 

싱가포르는 일찍이 전문한 부존자원을 타계하고 지역적 이점을 활용하여 개방경제정책을 지향해 왔으며, 이에 따라 안정되고 일관된 정부 정책, 친기업 정책을 펼침으로써 글로벌 기업들을 싱가포르로 유치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2015년 기준 기업하기 좋은 국가 1위인 싱가포르는 경제개발청EDB(Economic Development Board)을 중심으로 외국 기업 유인 수단으로서 우수한 비즈니스 인프라를 건설하는 등 친기업 정책뿐만 아니라, 원활한 기업 활동 여건을 위해 각종 인센티브를 부여해 왔다. 외국자본을 자국자본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안정적인 투자처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자본이동에 제한이 없어 외국인 투자가의 송금이 자유롭다. 평균 3일 이내에 법인 설립이 가능하고, 최소 자본금 1싱가포르 달러, 현지 거주 이사 최소 1인 등 설립 요건이 최소화되어 있는 것도 장점이다. 고급인력이 풍부하며 탄력적인 인사가 가능한 동시에 노사 분규가 적어 안정적인 노동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강점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싱가포르 투자 진출 규모는 1968년부터 2015년 누적 기준 총 76.4억 달러(US$)로 투자 진출국 11위 규모에 해당한다. 연도별 투자금액은 2012년부터 매년 크게 증가해 2015년 약 14억 달러(US$)로 최대 투자규모를 기록했다. 일반 종합상사 분야에서는 삼성물산, LG상사, 현대상사, 포스코대우, 건설 분야에서는 현대건설, 쌍용건설, GS건설, 선박 분야에서는 SK해운, 한진해운, 현대상선, 정유 분야에서는 SK에너지, GS칼텍스, S오일, 식품 분야에서는 CJ 등이 진출해 대기업 대다수가 여러 분야에 걸쳐 진출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6. 02:30




 

 

싱가포르의 교육시스템

 

 




싱가포르는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를 지양하기 위해 언론출판법(Newspapers and Printing Press Act)에 의거, 자유롭지만 책임 있는 기사를 쓰도록 하는 통제된 언론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내 언론의 수준 향상 및 경쟁 도입을 위해 2000년 6월 신문 분야를 관리하는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ingapore Press Holdings)와 방송 분야를 관리하는 싱가포르 미디어 코퍼레이션MCS(Media Corporation of Singapore)이 서로 상대 분야에 진출하여 제한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신문은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ingapore Press Holdings) Ltd.가 싱가포르 내 신문을 전부 소유하여 통합 관리하고 있다. 주요 신문으로는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비즈니스 타임스The Business Times, 리엔허 자오빠오Lianhe Zaobao(聯合朝報), 베리타 하리안Berita Harian 등이 있다.

 

텔레비전 방송은 싱가포르 미디어 코퍼레이션MCS이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을 통합 관리하고 있는데, 주요 TV 채널은 채널(Channel) 5, 채널 뉴스 아시아(Channel News Asia), 수리아(Suria), 채널(Channel) U 등이 있다. 라디오는 1936년에 방송을 개시한 싱가포르 라디오 코퍼레이션(Radio Corporation of Singapore)이 12개 국내 채널로서 영어 5개, 말레이어 2개, 중국어 3개, 타밀어 1개 등으로 시작했고 3개 국제 채널로는 싱가포르 국내 뉴스, 시사 등을 방송했다. 기타 방송 3개사로는 문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라디퓨전(Radiffusion), 예술 전문 방송인 국가예술위원회NAC(National Arts Counsil) 아트 라디오 스테이션(Arts Radio Station), 일반 뉴스와 국방 및 스포츠 뉴스, 대중가요를 방송하는 사프라 라디오(SAFRA Radio)가 있다.

 



싱가포르는 1998년 2월 CNBC(Consumer News and Business Channel)와 아시아 비즈니스 뉴스(Asia BusinessNews)가 제휴하여 아시아 지역에 최신 경제 정보를 제공하려는 취지로 CNBC 아시아를 설립, 싱가포르에 본부를 설치했다. 2010년 현재 CNBC 아시아는 아시아 1,800만 가구에 24시간 텔레비전 경제 정보 등을 전달하고 있다. 그 외 통신사, 신문, 잡지사, 방송사 등 70여 개 외신사에 300여 명의 언론인이 주재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로 구성된 복합 사회인 점을 고려하여 교육을 통한 국민 통합 의식 양성을 국가 존립 기반의 근본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세계화 및 지식 기반 경제에 적응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 실용주의적 교육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교과 과정은 2개 언어와 수리 과목에 치중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과정부터 대학까지 매 과정마다 경쟁을 통해 소수 정예만이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는 능력주의 교육을 실시한다.

 

싱가포르는 1970년대 중반부터 노동력 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제조업 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연차적으로 대학의 이공 계열과 한국의 전문대학 격인 ‘폴리테크닉(Polytechnic)’을 증설하였다. 이후 국민의 소득 수준 향상과 높은 교육열로 인해 대학 진학 실패자들의 외국 유학 선호 현상이 급증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의 해외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싱가포르의 학제는 유아교육(유치원)-초등교육(초등학교 6년)-중등교육(중학교 4년~5년)-고등교육[주니어 칼리지(Junior College) 2년, 심화 학교(Centralized Institute) 3년] 또는 한국의 전문대학 격인 폴리테크닉[Polytechnic(3년)]-대학교로 이루어진다. 싱가포르에는 1980년 8월에 싱가포르대학교와 난양Nanyang(南陽)대학교가 합병되어 설립된 국립 싱가포르대학교와 1991년 설립된 난양기술대학교NTU(Nanyang Technological University, 南陽理工大學)가 있고, 그 외 싱가포르 경영대학교가 있다.

 

사회보장 연금제도

싱가포르의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원칙은 ‘자조’로서 일반 국민의 노후 생활, 주택 구입, 의료비 지출 등을 기본적으로 국민 각자의 저축을 통해 대비토록 함으로써 국가의 공적 부조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회보장제도는 중앙적립기금CPF(Central Provident Fund)으로 근로자 및 고용주가 임금의 일정 비율을 매월 강제 적립하여 정년퇴직 또는 노동 불능 상태가 되었을 경우 지급하거나, 근로자의 주택 구입 등 재산 형성 또는 입원비 등 의료비에 대한 지출을 허용하는 등 노후 연금, 의료비 보조, 재산 형성 저축 등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

 

싱가포르의 의료저축계좌는 가입자의 입원비 등 의료비 지출을 위한 용도로 쓰이나 고가의 치료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너무 미약하다는 평가에 따라 임의적 의료보험 제도인 메디실드Medishield 제도를 1990년에 도입했다. 정부가 정한 수가에 따른 진료비에서 기초 비용(일반 병원 등급에서 수술할 경우는 1,000싱가포르 달러)을 공제한 잔액의 80%를 메디실드 계좌에서 보전해주며, 나머지를 수혜 가입자가 부담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근로자와 고용주가 봉급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게 함으로써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며 연금 기금의 파산, 연금률의 정치적 결정 등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지나치게 높은 저축 강제로 소득이 낮은 근로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5. 02:00






 

 

싱가포르 문화적 특성

 

 





싱가포르는 다민족국가라는 특성상 각 민족의 고유 문화를 존중하며 다양성 속에 조화를 추구하며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 각 민족의 문화 행사를 장려하고 있다. 도교, 힌두교, 불교 및 회교 사원이 있으나 역사적인 문화유적은 많지 않다.

 

싱가포르는 다양한 문화의 유지와 우수한 예술 증진을 위한 환경 조성에 기본 목표를 두고 있으나, 대학에 예술학부가 없는 등 실용주의에 따른 통제, 자제된 예술 정책을 실시해왔다. 그러다 2000년부터 경제 발전과 문화 예술 증진을 연계하여 싱가포르를 경제와 관광, 문화의 국제 중심지로 복합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마련하고 “예술을 위한 글로벌 도시(Global City for the Arts)”, “르네상스 도시(Renaissance City)”, “국제적인 재능을 위한 역동적인 자성磁性(A Vibrant Magnetic for International Talent)” 등 장기적인 비전을 통해 싱가포르를 세계 유수의 문화 도시로 발전시키려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중이다.

 



싱가포르의 주요 문화 행사인 싱가포르 예술 축제(Singapore Arts Festival)는 1977년 이후 격년제로, 1999년 이후 연례 국제 예술 행사로 세계의 다양한 예술 단체를 초청하여 공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중국어 문화 축제(Chinese Cultural Festival), 연극을 담당하는 시어터워크스(TheatreWorks) Ltd., 싱가포르 무용 극장(Singapore Dance Theatre), 싱가포르 교향악단(Singapore Symphony Orchestra), 싱가포르 차이니즈 오케스트라(Singapore Chinese Orchestra) 등 다양한 행사, 예술 단체 등이 존재한다.

 

싱가포르의 주요 문화 시설인 에스플러네이드 해변 예술관(Esplanade-Theatre on the Bay)은 예산이 3억 5000만 미국달러에 달하는 세계적 수준의 복합 공연장으로, 2002년 10월 완공되었다. 그 밖에 공연장으로는 1만 2000석 규모의 싱가포르 인도어 스타디움(Singapore Indoor Stadium), 1만 2600석 규모의 싱가포르 국제 컨벤션 및 전시 센터(Singapore International Convention & Exhibition Centre), 6,000석 규모의 세계무역센터 하버 파빌리온(World Trade Centre Harbour Pavilion), 3,200석 규모의 래플즈 볼룸(Raffles Ballroom), 1,744석 규모의 칼랑 극장(Kallang Theatre), 940석 규모의 빅토리아 콘서트홀(Victoria Concert Hall) 등이 있다.

 

싱가포르는 오랜 기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국의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오늘날 아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모습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통체제 역시 영국식으로 도로에서 차량은 좌측 운행을 하며 운전석도 차량의 오른쪽에 있다. 뿐만 아니라 Beach Road, South Bridge Road, Coleman Street, Thomson Road 등 오늘날 싱가포르의 주요 도로명은 식민 시절 당시 영국에서 유래한 것이거나 싱가포르를 통치했던 저명한 주지사, 혹은 기타 유명 인사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만으로도 마치 영국 도시의 거리와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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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8. 1. 4. 01:00






 

싱가포르 사회구성

 






 

싱가포르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통합을 위하여 종교(불교, 회교, 기독교, 힌두교)에 따라 상이한 사회 관습을 존중하고 있다. 공동 질서 유지를 위하여 중벌금 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도시국가, 정원 국가를 표방하며 ‘동남아의 별’로 부르고 있다. 주택 자가 점유율은 2009년 말 88.8%로, 주택의 84%가 공공 아파트HDB(Housing and Development Board)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 구성과 인구

싱가포르는 국민의 74.7%가 중국계이고 말레이계 13.6%, 인도계 8.9%, 기타 2.8%로 이루어져 있다. 싱가포르는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로 구성된 복잡 사회인 점을 고려하여 국민을 통합하고자 1991년 ‘공유가치(Shared Values)’에 대한 백서를 발표하여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이라는 생태적 종족 명칭을 쓰기보다 ‘싱가포리언Singaporean’이라는 통합된 의미의 국민 정체성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2016년 7월 추정치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총 인구는 영주권자와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578만 명이다. 인종 구성은 중국계 74.7%, 말레이계 13.6%, 인도계 8.9%, 기타 2.8%이다. 싱가포르는 1987년 전까지 경쟁력 있는 국가 창출을 위해 고학력·고소득층에 대하여는 출산을 권장하고, 저학력·저소득층에 대하여는 출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1987년 이후 경제력에 따라 세 자녀 이상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출산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점차 낮아지자 2000년부터는 자녀 수에 따라 국가에서 장려금을 지급하고 출산휴가를 부여하는 등의 정책을 적극 시행하고 있다.

 

언어와 종교

싱가포르는 헌법으로 각 인종 간 평등주의를 규정하므로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Tamil)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언어 교육을 매우 중시하므로 각 인종의 고유한 언어 외에 영어를 필수 언어로 하여 반드시 2개 언어를 이수해야 하는 2중 언어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특히 1997년 홍콩이 중국 본토로 반환된 뒤로는 중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표준어 배우기를 권장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다민족국가로서 각 인종의 전통적 종교를 존중하면서 인종 간의 화합을 추구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국교는 없으나 각 종교별로 최소한 1개 이상의 법정 공휴일을 지정하고 있으며 전 국민의 85% 정도가 종교를 갖고 있다. 종교 구성비는 2009년 기준으로 불교·도교가 51%, 이슬람교(주로 말레이계) 14.9%, 기독교(주로 중국계) 14.6%, 힌두교(주로 인도계) 4.0%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3. 22:47




 

 

싱가포르의

경제 동향과 전망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Information Technology) 거품(bubble)과 사스SARS(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영향으로 극심한 부진을 보였던 싱가포르 경제는 2004년 이후 세계 경제 호조에 따른 수출 증대와 각종 서비스 산업의 호조로 상승세를 탔고, 2008년 들어 경기가 하강 국면으로 진입하는 가운데 하반기에 발생한 국제 금융시장 불안이 세계경제 위기로 연결되면서 2008년 성장률이 1.1%로 크게 하락하기도 했다. 2009년에도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되었으나 정부의 확대 재정 정책과 세계경제의 회복 추세에 힘입어 하반기에는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하였다. 최근 싱가포르의 경제성장률은 2014년 3.6%, 2015년 1.9%, 2016년에는 2.0%를 기록했다.

 

2017년 일사(1/4)분기 중 싱가포르 경제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2.7%로 전前 분기(2.9%)에 이어 경기 회복세가 지속되고 있다. 이는 반도체 및 반도체 관련 정밀기계, 운수창고업이 수출 증가에 힘입어 호조를 보인 데 주로 기인한 것이다. 산업별로는 건설업이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였으나, 제조업이 높은 성장을 보이고 서비스업도 다소 회복된 상태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올해 미국과 ASEAN 경제 성장률이 내수를 중심으로 상승하면서 글로벌 경제가 2016년보다 다소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반면 중국 경제는 중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성장세가 소폭 둔화되고 유로 지역은 민간소비 부진으로 완만한(modest)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내 경제는 글로벌 경제 회복에 따른 반도체 수출 증가 등으로 반도체 및 관련 정밀기계 부문과 운수창고업을 중심으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는 반면, 건설업은 민간 부문을 중심으로 부진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노동시장 부진에 따른 민간소비 제약으로 음식 및 소매업도 어려움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2017년 싱가포르의 경제성장률은 2016년 경제성장률인 2.0%를 다소 웃돌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반反세계화 확산에 따른 글로벌 무역 위축 가능성,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및 트럼프 미대통령 관련 정치적 불확실성, 긴축적 통화정책 시행에 따른 중국 경제 경착륙 가능성을 하방리스크로 지목하고 있다. 특히 반세계화로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될 경우 글로벌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중국이 금융 부문 레버리지 및 위험 축소를 위해 긴축적 통화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민간신용(credit)이 급격히 감소할 경우 중국 경제 성장률이 예상보다 급격히 둔화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2016년 싱가포르의 총 교역은 8,702억 달러(싱가포르 달러 기준)로 전년 동기 대비 4.9%가 하락했다. 그중 수출은 4,669억 달러, 수입은 4,033억 달러를 기록했다. 싱가포르는 2017년 일사(1/4)분기 중 수출 및 수입 증가율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7.0% 및 15.6%로서 전 분기(2.1% 및 6.1%)에 비해 크게 상승하였다. 일사분기 중 종합수지 또한 경상수지 흑자 폭이 확대되고 자본수지 적자 폭은 축소되면서 166억 달러 흑자로 전환되었다. 2017년 IMF 기준 싱가포르의 명목 GDP(국내총생산)는 2,919억 달러(US$)로 세계 40위 규모이고, 1인당 GDP는 51,431달러로 세계 11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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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26. 01:30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싱가포르는 국토가 좁고 부존자원이 거의 전무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대외 개방형 경제를 추구함으로써 세계적인 비즈니스 중심지로 발전하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1970년대에 외자를 이용한 수출 주도형 공업화를 추진하여 높은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1980년대에 들어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전자·기계·제약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구조 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제조업과 금융, 물류, 통신 제반 서비스가 통합된 국제적 비즈니스 도시가 있도록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공동 발전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식 기반 위주의 경제 구조 전환을 추진하여 미래 산업 개척 전략을 마련하고 있으며 연구 개발, 교육, 의료 분야에서의 허브를 추진하고 있고 복합 리조트 건설을 통한 관광 산업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싱가포르 경제의 주요 특징

싱가포르 경제의 주요한 특징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무역 자유화 및 외자 유치를 통한 세계적 비즈니스 센터 수립이다. 싱가포르는 중개 무역항이라는 입지 조건을 활용하기 위해 무역 자유화에 나서는 한편,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지속적인 투자 환경 개선과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무역액은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의 3.5배로, 40% 이상이 중개무역이며, 주류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한 모든 물품이 무관세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싱가포르가 세계적인 교통, 물류, 금융, 원유 거래의 중심지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총 5개 컨테이너 터미널과 45개 선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항으로 세계 환적량의 5분의 1 이상을 처리하고 있다. 2009년에 2,587만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s)의 컨테이너를 처리하여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창이Changi 공항은 85개 항공사가 주 5,000회 이상의 정기 항공편을 운항하는 세계 항공 허브로서 60개국, 200개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외환 거래 및 자산 운용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국제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2010년 런던 금융 특구 발표에 따르면 세계 제4위를 기록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외환 시장은 런던, 뉴욕, 취리히, 도쿄에 이은 세계 5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009년 말을 기준으로 110개 외국 은행이 소재하여 외국 은행 기준으로는 세계 4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자산 운용 규모는 1조 싱가포르 달러(670억 미국 달러) 내외이며, 이슬람 금융 등 새로운 금융 영역으로 확장 전략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 싱가포르는 뉴욕, 런던에 이은 세계 3대 원유 거래 시장이며, 세계 최대의 선박용 석유(bunkering oil) 거래 시장이고, 아시아 최대의 석유제품 공급 센터(아시아 지역 석유제품 가격 설정 시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셸Shell, 에소Esso, 칼텍스Caltex, 브리티시 페트롤륨BP(British Petroleum), 모빌Mobil 등 세계 메이저 석유 회사가 진출해 있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두 배가 넘는 1,0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 대국으로 적극적인 관광객 유치를 하며 연중 각종 국제회의, 전시·박람회가 개최된다. 의료 허브 교육 허브 육성 정책을 통해 외국인 유치를 도모하며 지속적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 리조트를 건설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서비스 중심의 산업구조이면서 제조업도 높은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 기준으로 싱가포르는 서비스업이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의 68.9%로 산업의 주종을 이루며, 그 외 제조업이 18.2%, 건설업 6.2% 순으로 비중이 높으며, 농림·어업이나 광업은 거의 전무하다. 서비스산업은 싱가포르 경제의 중심이며 정부는 인프라를 확충하고 자유화 조치 및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서비스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제조업은 다국적기업의 유치 및 국내 기업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다국적기업의 판매망 이용 등을 통해 발전하고 있다. 석유화학과 전기·전자가 제조업의 중심이었으나 2009년 들어 바이오 허브, 항공 허브 육성에 중점을 두면서 기계류 및 생의학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2009년 총 산출액을 기준으로 한 제조업 업종별 비중을 살펴보면 화학이 27.4%(이 가운데 원유 제품은 14.9%, 화학제품이 12.4%를 차지), 전기·전자 31.5%( 가운데 반도체가 17.8% 차지), 생의학 10.0%( 가운데 제약이 8.5% 차지), 정밀 기계 9.1%, 운송 기계 13.4%, 일반 기계 8.8% 차지한다.

 

네 번째로 국영기업과 다국적기업이 경제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싱가포르는 정부 투자회사인 테마섹 홀딩스Temasek Holdings가 주요 기간산업의 최대 주주이며, 순수 민간 기업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즉, 항만에 싱가포르 항만공사PSA(Port of Singapore Authority), 통신에 싱텔SingTel(Singapore Telecommunications), 항공에 싱가포르 항공(Singapore International Air Line), 금융에 싱가포르 개발은행DBS(Development Bank of Singapore), 방송에 미디어코프MediaCorpia 등 이들 기업의 최대 주주가 테마섹 홀딩스이며 이 기업들은 많은 자회사들을 거느리고 있어 정부 연관 기업GLS(Government Linked Companies)이 1,000여 개가 넘는다. 그러나 정부 연관 기업 등도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 전문 경영인이 경영하고 있으며,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외국 자본, 기술, 고급 인력의 유입 정책으로 7,000여 개 이상의 다국적기업이 진출하면서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의 40% 이상이 외국 기업 및 외국인으로부터 발생하고 총 투자의 90% 가까이가 외국인 투자로 구성되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25. 02:00




 

 

싱가포르 외교정책

 

 

 

싱가포르는 ASEAN 국가와의 선린 우호관계 유지를 골자로 하는 중립과 균형의 현실주의 외교를 추구하며 외교정책을 뒷받침하는 신뢰성 있고 억지력을 갖춘 국방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아세안ASEAN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지역 통합 강화를 통한 대외 발언권을 확보하며, 동남아시아 및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 평화로운 환경 조성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제 무역체제 구축을 통한 싱가포르의 경제발전과 지속적 번영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 외교정책의 결과로 유엔, 77그룹 등 다자무대에서도 국가 규모를 넘어선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고 있고 유엔에서 소규모 국가그룹인 3G(Global Governance Group)의 리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제기구에서의 확고한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동아시아-라틴아메리카협력포럼(FEALAC)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국제적 주요 이슈별 의제 설정 시 주도권 확보를 통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소국으로서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제의 세계화 전략을 추진함으로써 다자기구를 통한 경제관계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국제기구 유치 노력을 지속하며 미국, 일본, 한국, 호주, 뉴질랜드, 중국, 인도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체결 및 중국의 WTO 가입 지원 등을 통하여 세계의 주요 경제국과의 양자 경제 협력관계 증진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에 유리한 국내 환경을 조성하여 싱가포르가 국제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도록 노력한 결과 7,000여 개의 다국적 기업이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다(60% 이상이 지역본부 역할).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24. 01:00




 

 

싱가포르의

입법부 사법부

 




싱가포르는 인종 간 화합과 공동체 의식 고양을 위해 국민협회PA(Peoples Association), 시민 자문위원회CCC(Citizen’s Consultative Committee), 커뮤니티클럽 관리위원회CCMC(Community Club Management Committee) 등과 같은 일선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국민협회PA는 1800여 개의 민간조직 등에 대한 행정을 지원하며 2010년 6월 현재 의장은 리셴룽李顯龍 총리이다. 시민 자문위원회CCC는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수렴하여 정부에 전달하는 기능을 맡고 있으며, 커뮤니티클럽 관리위원회CCMC는 문화, 스포츠, 교육 등을 관할한다.

 


입법부

싱가포르의 입법부는 1955년 제정된 랜들헌법(Rendel Constitution)에 따라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회는 21세 이상 유권자의 직접 비밀투표에 의해 선출된 임기 5년의 국회의원(현 84석), 무선거구 의원(1석), 대통령이 임명하는 임기 2년 6개월의 지명 국회의원(9석) 등 총 94명으로 구성된다. 입법부의 기능은 법률안 및 예산안 심의·의결 주요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며 특징은 장관(Minister), 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정무차관(Parliamentary Secretary) 등으로 임명된 국회의원 이외의 의원은 일반 직업의 겸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의 직위를 가지지 않은 국회의원(backbencher)에게는 수당만 지급한다.

 

싱가포르 입법부의 특이한 점은 무선거구 의원NCMP(Non-Constituency Member of Parliament) 제도로 야당이 총선에서 3석 미만의 의석을 획득했을 때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한 야당 입후보자를 의원으로 추천하는 제도이다. 싱가포르 입법부는 특권 위원회, 선출 위원회 등 7개의 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싱가포르의 주요 정당은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 노동자당WP(The Worker’s Party), 싱가포르인민당(Singapore People’s Party)이다. 인민행동당은 1961년에 창당했으며 2010년 6월 현재 82석을 차지하고 있다. 인민행동당은 평상시에는 활동도 없고 별도의 사무국 조직도 없다. 노동자당은 1961년에 창당했으며 의석은 하나이다. 싱가포르인민당은 1993년에 싱가포르민주당SDP(Singapore Democratic Party)에서 탈퇴하여 창당했으며 마찬가지로 의석은 하나이다.

 

사법부

싱가포르의 사법부는 대법원과 하급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고등법원과 항소법원이며, 하급법원은 지방법원·치안법원·소년법원·검시법원(Coroners Court) ·소액청구사건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장은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여타 대법원 판사는 총리가 대법원장과 협의를 거쳐 제청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23. 23:38




 

싱가포르의

정치 및 행정

 

 




싱가포르는 영국 의회정치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의회주의식 공화제 정부 구조를 취하고 있는 바, 대통령 직선제하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는 단원제이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1991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했으며 의회 의원 선거법 개정을 통해 복수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투표로 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고 대통령이 다수당 소속 국회의원 가운데서 임명하는데, 총리는 실질적인 정권을 위임받은 내각의 대표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위치에 있다.

 

정치체제의 특징

싱가포르는 집권당인 인민행동당PAP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인민행동당은 리콴유 전 총리가 “인민행동당은 곧 정부이고, 정부는 곧 싱가포르”라고 언급할 정도로 1959년 이래 의회 내에서 압도적 다수의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장기 집권을 유지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인민행동당에 대응할 만한 정치적인 대안 세력이 없을 뿐 아니라, 인민행동당이 집권 여당으로서 주택, 취업, 사회복지와 같은 일반 대중의 현실적 요구를 적기에 파악해 정책에 반영시키고 있어 전폭적인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인민행동당이 장기 집권을 함으로써 싱가포르는 과도한 정치 과정에 따른 사회적 비용 지출이라는 단점을 해소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또한 집권당에 유리한 선거 구조 및 언론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선거구는 의원 2인 이상 선출의 집단선거구(GRC, Group Representation Constituency) 및 1인 선출의 단독선거구(Single-seat Wards)로 구분되나, 집단선거구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동일 정당에서 1개 집단선거구 선출 의원 수인 5 내지 6명과 동일한 수의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도록 제한하고 있어 군소 정당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언론출판법(Newspaper and Printing Press Act)에 따라 신문 및 방송 분야를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PH(Singapore Press Holdings) 및 싱가포르 미디어 코퍼레이션MCS(Media Corporation of Singapore)을 통해 정부가 관장함으로써 통제된 언론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행정부

대통령 싱가포르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지만 상징적이거나 실질적 권한이 없는 직책이었다가, 1991년 헌법 개정에 따라 권한이 대폭 확대되었다. 헌법 제22조를 통해 대법원장 및 대법원 판사, 검찰총장, 군 참모총장, 경찰청장, 부패행위조사국장 등 주요 공직자의 임명에 대한 거부권과 정부의 예산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권한을 보장받았다. 부패행위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이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청렴한 사회를 만들고자 총리실 직속의 부서로 설치된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한 직선제로 선출되고 임기는 6년이다. 2017년 8월 현재 싱가포르의 대통령은 2011년 8월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9월 1일에 취임한 토니 탄 켕 얌Tony Tan Keng Yam(陳慶炎)이다. 싱가포르는 2017년 9월에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내각 싱가포르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며 행정부의 구성원인 총리와 각 부처의 구성원들은 의회 의원이어야 한다. 총리는 대통령이 다수당 소속 국회의원 가운데 임명하며, 총리는 정치 및 행정 각 분야에 대해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이다. 그러나 헌법에는 총리의 자격에 관한 어떠한 조항도 없으며 임무와 권한도 상당히 제한적으로 명시되어있다. 총리는 내각회의를 주재主宰하고, 내각의 어떠한 행정부처의 장관직을 유지할 수 있다. 내각은 총리실과 14개 부로 구성되며 장관은 대통령이 총리의 추천에 따라 임명한다. 2017년 현재 싱가포르의 총리는 2004년 8월 12일에 취임한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이다. 총리실의 기능은 각 부처의 활동과 정부 일반 정책에 대한 조정과 주요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공무원 채용과 임용·보수·교육 훈련 공무원 관련 업무와 국기와 국가, 선거 관련 업무도 총리실 관할이다.

 

지방행정 싱가포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국가여서 별도의 도시 개념보다는 여러 개의 ‘도시계획구역’을 정해 관리하는 방식으로 행정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라는 하나의 큰 도시 안에서 여러 마을 단위로 분할하여 구역을 나누고 행정을 집행한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는 크게 서부, 북부, 북동부, 동부, 중부의 5개 지역으로 나뉘며, 베독Bedok, 주롱웨스트Jurong West, 퀸즈타운Queenstown 등 55개의 도시 계획 구역으로 분할되어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정 여건상 좁은 면적, 적은 인구의 도시국가로서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치 개념이 부재하다. 따라서 시·구청,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행정 조직은 없으며, 주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결정 과정에서 의견 수렴 등을 목적으로 지역개발 협의회를 설치하여 자치 서비스와 주민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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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12. 02:00






 

싱가포르 현대역사의 시작

리콴유총리

 

 




 

리콴유 시대(1965~1990)

독립 국가로 재출범하면서 리콴유李光耀 자치정부 총리는 다시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26년간 재임을 했다. 리콴유는 확고한 신념과 냉철한 현실 감각, 그리고 유연한 정치 감각을 갖춘 지도자로서 싱가포르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해 나가는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아시아는 물론 세계 수준의 금융과 물류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고, 싱가포르가 세계 최고의 깨끗한 정부로 발돋움하는 데에도 절대적 역할을 한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1965년 9월 21일에 국제연합UN(United Nations)에 가입했고 같은 해 10월 15일에는 영국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 가입했다. 곧이어 12월 22일에는 헌법을 개정해 국명을 싱가포르공화국(The Republic of Singapore)으로 바꾸고 국가 원수를 대통령으로 개정하여 유소프 빈 이샥Yusof bin Ishak 초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67년 8월 13일 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결성했으며 1968 4 13 총선거를 실시해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 58 의석을 차지했다. 1970 11 23 유소프 이샥 대통령이 사망하고 1971 1 2 벤저민 시어스Benjamin Henry Sheares 제2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71년 10월 31일 영국 극동사령부가 폐쇄됨에 따라 1972년 9월 2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인민행동당이 65석 전全 의석을 차지했다. 이후 1976년과 1980년 총선에서도 인민행동당이 전 의석을 차지함으로서 패권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화하였으며, 1981년 안손Anson 선거구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노동자당WP(Workers’s Party) 사무총장인 조슈아 벤저민 제야레트남Joshua Benjamin Jeyaretnam이 당선됨으로서 최초로 야당의원이 원내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1년 5월 12일 벤저민 시어스 대통령이 사망하고 10월 24일 챙가라 비틸 드반 나이르C. V. Devan Nair 제3대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나 1985년 3월 29일 알코올 중독으로 사임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9월 2일 위킴위Wee Kim Wee(金辉, 黃金輝) 4 대통령이 취임했다. 1986 국내 문제에 간섭하는 외국 언론의 싱가포르 배포 부수를 제한하기 위한 ‘언론출판법(Newspaper and Printing Press Act)’ 개정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같은 해 10월, 법무전문직법(Legal Profession Act)을 개정하여 자격정지 전력이 있는 자의 변호사협회 간부직 취임을 제한함으로써 변호사협회 회장인 프란시스 소우Francis Seow(添寿) 자동 해임되었으며, 11 10 제야레트남 의원이 노동자당 회계 허위 신고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7년 5월 21일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가톨릭 활동가, 전문 직업 종사자 등 16명을 공산주의 활동 혐의로 구금했고, 6월에 20명을 추가 구금하였다가 12월까지 순차로 주동자 빈센트 챙Vincent Cheng(鄭海泉)을 제외한 21명을 석방했다. 1988년 5월 7일 싱가포르 정부는 주駐싱가포르 미국 대사관 핸드릭슨E. M. Hendrickson 1등 서기관을 국내 정치에 간섭한다는 이유로 추방했고, 전날인 5월 6일에는 프랜시스 소우 전前 변호사협회 회장을 핸드릭슨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구금했다. 이어 5월 18일 연대 출마 방식의 집단 선거구 제도에 관한 헌법 및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9월 3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81석 중 인민행동당이 80석을 차지하고 치암시통Chiam See Tong(詹) 싱가포르민주당SDP(Singapore Democratic Party) 사무총장이 재선에 성공했다.

 

고촉통 시대(1991~2004)

1990년 11월 28일 리콴유 총리가 사임하고 고촉통Goh Chok Tong(吳作棟) 부총리가 총리에 취임했다. 1991년 1월 3일 헌법을 개정하여 6년 임기의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하고 같은 해 8월 31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81석 중 인민행동당이 77석, 싱가포르민주당 3석, 노동당이 1석을 차지했다. 9월 7일에는 고촉통 총리 내각이 출범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선임장관(Senior Minister)에, 리콴유 전 총리의 장남인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은 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93년 8월 28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옹텡청Ong Teng Cheong(王鼎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9월 1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7년 1월 2일 총선거를 실시해 총 83석 중 인민행동당이 81석, 노동자당이 1석, 싱가포르인민당SPP(Singapore People’s Party)이 1석을 차지했다. 1999년 8월 2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셀라판 라마 나단Sellapan Rama Nathan이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9월 1일에 취임했다. 2001년 11월 3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총 84석 중 인민행동당 82석, 노동자당 1석, 싱가포르인민당이 1석을 차지했다. 무선거구 의원은 국민단결당NSP(National Solidarity Party)이 1석이고 지명 국회의원은 9석이었다. 2002년 3월 25일 제 10대 국회가 개원하였고 국회의장으로 압둘라 타르무지Abdullah Tarmugi를 선출했다.

 

2003년 5월 6일 싱가포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에 서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4일 말레이시아와 페드라 브랑카Pedra Branca 섬 영유권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공동 회부했다.

 

리셴룽 시대(2004 ~ 현재)

2004년 8월 12일에는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이 총리에 취임했다. 리콴유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에, 고촉통 전 총리는 선임장관에 임명되었다. 2005년 8월 1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 나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2007년 8월 2일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의장국을 수임했고 2009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의장국을 수임해 그해 11월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2011년 5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승리하여(총 87석 중 인민행동당 81석, 노동자당 6석) 5월 20일 리센룽 내각이 출범하였고, 리콴유 고문장관과 고촉통 선임장관은 내각에서 공식 퇴진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토니 탄Tony Tan Keng Yam(陳慶炎)이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9월 1일 취임하였다. 이후 2012년과 2013년 실시된 2차례의 보궐선거에서 여당인 인민행동당이 노동자당 후보에게 패배하였고, 2012년 11월 버스노동자 파업, 2013년 2월 정부의 인구정책에 대한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하였다. 가장 최근인 2015년 9월 싱가포르 총선에서는 리센룽 총리의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이 70%에 육박하는 69.9%의 지지율로(2011년 총선보다 10% 포인트 가량 지지율 상승) 89개 의석 중 83개 의석을 차지하며 승리함으로써 앞으로 5년 동안 더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선거는 싱가포르 총선 사상 처음으로 야권이 모든 선거구에 입후보하면서 여야간 사상 최대의 접전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야권의 선두두자였던 노동자당WP의 득표율은 지난 선거보다 6.8% 하락한 39.8%를 기록해 6개 의석을 얻는 데 그친 반면, 여당은 독립 이래 역대 최저를 기록했던 2011년 때의 득표율(60.1%)을 10% 가까이 회복(69.9%)시키면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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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11. 02:00






 

 

가폴의 근대역사

 

 




자치정부 시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함에 따라 싱가포르는 1946년 총독이 지배하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환원되었으며, 영국은 크리스마스Christmas 섬과 코코스Cocos 섬을 관할하였다. 이후 싱가포르 주민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태동함에 따라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단계적으로 자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형태의 식민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948년 최초의 선거가 실시되어 22명의 입법 의원 중 6명을 직선제로 선출하였고(나머지는 총독 또는 상업회의소가 임명), 1951년에는 25명의 입법 의원 중 직선 선출 의원 수를 9명으로 증원하였는데 진보 정당(Progressive Party)에서 6명, 노동당(Labour Party)에서 2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되었다. 1955년에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32명의 입법 의원 중 직선 선출 의원 수를 25명으로 선출하기로 결정(코코스 섬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관할권 이전)하였다.

 

1957년 런던에서 개최된 헌법 회의는 원칙적으로 싱가포르가 독립국가가 된다는 데 동의하고 싱가포르에 대해 완전한 국내 자치권을 인정하되, 외교 국방 및 헌법 정지에 관한 권한만 영국 정부가 보유하기로 결정하였다. 1958년 싱가포르 국가 법(The State of Singapore Act)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싱가포르 국가 성립 및 싱가포르 시민권 부여 등에 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며 크리스마스 섬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관할권이 이전되었다. 1959년 5월 30일에는 전체 입법 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어 총 51석 중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이 43석을 차지하여 자치 정부를 구성하였고 같은 해 6월 5일에는 8선 국회의원인 리콴유Lee Kuan Yew(李光耀)가 자치 정부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말레이시아 연방 시대

1961년 5월 27일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man 말레이 총리는 말라야Malaya 연방, 싱가포르Singapore, 사라왁Sarawak, 브루나이Brunei 및 북보르네오北Borneo(현 사바Sabah)로 구성된 말레이시아 연방 설립을 제의하였고 싱가포르 정부는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1962년 8월 1일 영국과 말라야 연방은 1962년 8월 말까지 말레이시아 연방을 설립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싱가포르는 이에 대한 국민투표를 1962년 9월 1일에 실시하였다. 투표 결과 73%가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원이 되는 데 찬성하여, 1963년 7월 9일 말레이시아 협정 서명으로 인해 같은 해 9월 16일에 말레이시아 연방이 성립됨으로써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연방 창설 이후 연방정부와 싱가포르 주정부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정책에 대해 이견을 보였으며, 1964년에는 인종 문제로 인한 폭동이 싱가포르에서 발생하였다. 결국 싱가포르는 인종 정책에 관한 갈등과 이념적인 차이로 인해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하여 독립국가로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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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10. 01:00




 

 

가포르의 초기역사

 

 




 

싱가포르에 관한 역사적 기술로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경 중국 문헌의 기록 ‘파라주婆(Pu Luo Chung)’이다. 이는 ‘반도 끝의 섬’이라는 뜻으로 말레이어의 플라우 우종Pulau Ujong(섬 끝의 땅)에서 음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3세기에 싱가포르 국명에 대한 기록이 중국 문헌에 나오는데, 수마르다 지역 스리위자야 왕국Srivijaya Kingdom의 트리부아나 왕이 표류하여 지금의 싱가포르에 상륙한 후 사자獅子Lion를 목격하고는 싱가푸라Singapura(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고 명명한 것이 싱가포르 국명의 유래이다. 싱가포르의 플러톤 로드에 위치한 관광 명소인 머라이언 공원에 가 보면 머리는 사자, 몸은 물고기 형상을 한 높이 8.6m의 ‘머라이언Merlion’ 동상이 입에서 분수처럼 물을 내뿜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 동상은 싱가포르의 국가적 상징물처럼 여겨지고 있다.

 

1365년에는 자바인의 문헌에 싱가포르를 테마섹Temasek(sea town, 항구도시)으로 기록한 것이 나타난다. 테마섹은 다양한 나라의 선박이 기항하면서 중요한 무역도시로 떠올랐으나 14세기경에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14세기 후반경에는 싱가푸라Singapura라는 표현이 통칭적으로 사용되었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레이반도 서쪽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 말라카Malacca를 점령하자 말레이 제독이 싱가푸라로 도망한 후 조호르 라마Johor Lama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싱가푸라에는 별도의 관헌을 유지했다. 그러다 1587년 포르투갈이 조호르 라마를 멸망시키고 이어 1613년 싱가푸라를 불태워 싱가포르에 관한 모든 자료와 기록이 소실되었다. 이후 싱가포르는 16세기 동안에는 포르투갈Portugal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네덜란드Netherlands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영국식민지 시대(1819~1941)

1818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총독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남서쪽에 있는 벵쿨루Bengkulu 주 부총독인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경에게 지금의 싱가포르 지역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가했다. 래플스 경은 1819년 조호르Johor 왕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싱가포르를 국제무역항으로 개발했으며, 이때부터 싱가포르는 크게 성장하였다.

 

1824년 조호르 국왕은 싱가포르를 영국 동인도회사에 영구 할양했고 1826년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서쪽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믈라카Malacca 및 말레이시아 서북부에 있는 항구도시 페낭Penang에 흡수되어 동인도회사 지배하의 해협식민지(The Straits Settlements)를 구성했다. 해협 식민지의 관할권은 1830년 인도의 뱅갈Bengal 총독에게 이전되었다가 1851년 인도 총독의 직속 관할이 되었으나, 이후 싱가포르가 지속 성장함에 따라 인도 총독의 행정력 부족 등으로 인해 1867년 싱가포르의 관할은 영국 식민지청으로 이관되어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Crown Colony)로 편입되었다.

 

1820년대 이후 싱가포르는 말라야 반도에서 생산되는 고무와 주석의 교역항으로서 발전하였고, 1842년 난징조약 체결로 인한 중국과의 통상 확대,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 등을 계기로 싱가포르는 국제무역항으로서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일본 점령 시대(1942~1945)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싱가포르는 ‘동방의 지브롤터Gibraltar’로 불리면서 동남아 주둔 영국군의 주요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나, 영국군이 싱가포르 전투(Battle of Sinagpore)에서 패배함에 따라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경험하였다.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은 1942년 중국 국민당을 지원하는 싱가포르의 중국계 주민들을 반反일본 성향으로 간주하고, 약 5만~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학살(숙칭肅淸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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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9. 14:40




 

 

가장 유럽적인 아시아 국가,

싱가포르 Singapore

 

 



싱가포르는 중국 문헌에 3세기경 파라주婆(Pu Luo Chung)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고,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사자獅子의 도시라는 뜻의 ‘싱가푸라Singapura’라는 국명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싱가포르는 14세기에 무역도시로 떠올랐으며 16세기에 포르투갈,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조약에 의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942년 일본에 의해 강점되기 전까지의 118년과 2차대전 이후부터 1959년 자치정부 수립까지 14년간 영국의 통치를 받았으며,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와의 다툼 끝에 연방을 탈퇴하고 마침내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동안 싱가포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국의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오늘날 아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모습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독립 이후 다인종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국제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린 정부의 결단과 강한 추진력으로 강력한 국가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영토와 자연환경

싱가포르Republic of Singapore는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섬나라이자 도시국가, 경찰국가, 기업국가이다. 북쪽의 조호르Johor 해협과 남쪽의 싱가포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각각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약간 분리되어 위치해 있으며, 싱가포르 섬과 60여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섬의 3분의 2 가까이가 해발 15m 미만의 낮은 언덕으로 되어 있고 영토의 2%만이 경작이 가능하나 생산성은 매우 높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조호르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북쪽은 조호르-싱가포르 코즈웨이Causeway 다리를 통해, 서쪽은 투아스Tuas 제2 연결점에 연결되어 있다. 주롱Jurong 섬, 풀라우 테콩Pulau Tekong, 풀라우 우빈Pulau Ubin, 센토사Sentosa가 주요 섬이며, 가장 높은 산은 부킷 티마 힐Bukit Timah Hill로 해발 166m이다. 본섬의 중심에 위치한 싱가포르 강의 남쪽이 원래 도시의 발단이었으며 현재 이곳은 금융 중심 지역인 다운타운 코어Downtown Core로 불린다. 이전에 그 외 지역은 농장과 열대우림이었으나 현재는 새로운 도시의 확장과 함께 거주와 쇼핑 그리고 산업 단지로 바뀌었다.

 

싱가포르는 계속적인 간척 사업으로 1960년대에는 국토 면적이 581.5㎢에서 현재는 719.1㎢로 확장되었다. 이는 서울(605.25㎢)보다 약간 큰 면적이다. 2030년까지 100㎢를 더 확장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작은 섬이 본섬과 연결되었는데, 주롱 섬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기후는 고온 다습한 열대성 기후로 연중 무더운 날씨가 지속된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여 매년 11월~1월까지는 북동몬순 시기, 6월~9월까지는 남서몬순 시기이다. 몬순 시기에는 비가 자주 오며 북동몬순 때는 기온이 2℃~3℃ 정도 낮아진다. 연평균 최고 기온은 31.0℃, 최저 기온은 24.1℃이고 연평균 강우량은 2,346㎜, 평균 습도는 오후 2 기준으로 84.2%이다.

 

싱가포르는 대체적으로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다. 재해 등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 체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자연재해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단,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자주 오며 이에 따라 낙뢰로 인한 인명피해가 종종 발생하므로 야외 활동을 할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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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4. 01:00





 

 

칭기스칸의 인연들

 

 

 



그가 세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 인연은 크게 셋이 있다.

 

첫 번째는 부인 보르테의 아버지 ‘데이 세첸’으로 테무친의 역량을 꿰뚫어 보고 정혼의 약속과 의리를 지켰다.

 


두 번째는 아버지 예수게이의 안다(의형제)인 케레이트 부족의 ‘옹 칸’이었다. 옹칸은 <삼국지>의 원소 같은 인물로 몽골을 통합하려는 야심도, 세력도 있었지만 우유부단했고, 손해를 보려 하지 않고 앉아서 이익을 챙기려 했다. 테무친의 곤경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다가 테무친이 결혼으로 얻은 지참금과 어느 정도 확보된 세력을 데리고 보호를 요청하자 비로소 그를 받아 주었다. 아무튼 그는 테무친이 성장하는 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세 번째는 테무친의 안다이자 최강의 적수가 되는 ‘자무카’이다. 자무카는 지략을 겸비한 인물로 출발선상에서 이미 테무친보다 앞서 있었다. 테무친의 아내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의 습격으로 약탈당했을 때, 이를 탈환하는 동맹군에 자무카가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3. 23:21




 

테무친시대

몽골고원의 세력권

 

 




칭기스칸 당시 몽골고원은 크게 다섯 개의 주요 세력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동쪽의 야생의 사냥개 타타르족은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졌고, 사나웠기 때문에 주변 부족들과 척을 진 상태였다. 중앙의 사나운 늑대 케레이트족은 기독교의 네스트리우스교(景敎)를 받아들인 부족으로 일찍이 중앙집권이 이루어져 있었다.

 


서몽골 고원의 하이에나 나이만족은 유목 제국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잘 정비된 군사 행정 체제를 갖추었다. 이들은 옆 케레이트족이 타타르 등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빠지면 어김없이 습격하는 집단이었다. 북쪽의 여우 메르키트족은 결집력이 강하고 주변 부족들이 위기에 처하면 서슴지 않고 공격하는 기회주의적인 족속으로 칭기즈칸의 아내를 빼앗아 오기도 했다. 생존을 위한 이런 영악함은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칭기즈칸이 메르키트족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부족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굶주린 푸른 늑대 몽골족. 그들은 늘 굶주렸다. 과거 흉노제국의 3분의 1정도인 영토 안에서 사분오열해 있는 민족과 그 안에서 작은 부족별로 나뉜 채 전개되는 무서운 대립 갈등 배신의 참상. 몽골은 그 혼돈의 중심에 서 있었다.

 

본래 헤이룽 강(아무르 강; 흑룡강黑龍江) 중, 상류 유역에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몽골족은 8세기 중엽부터 역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의 어원은 ‘영원한 불’을 뜻하는 ‘몽고르’로 당대 기록에 ‘실위室韋’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라 불린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집단이 오늘날 우리가 몽골족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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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28. 01:00




 

 

기즈칸의

군사조직

 

 

 

 

군사 조직

여기에 더해 칭기즈칸은 기존 부대를 개편하였다. 애초의 친족 위주 구성을 해체하여 10진법에 근거한 군사 조직을 만들어 냈다.

 

우선 10명으로 이루어진 ‘아르반’(십호)이라는 분대를 만들었다. 호칭은 분대지만 기병의 전투력은 보병의 5배에서 15배 이상이다. 전투력만으로는 최소 중대 이상이었다. 바투르라는 무관이 지휘했다. 대원 중 한 사람이 포로가 되면 반드시 구출해 내야 했다. 그래서 아르반은 한 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종교와 언어 정도는 공유해야 한다. 이들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고 내왕한 지인들로 구성된다.

 

10개 아르반을 모아 ‘자군’이라는 100명 단위의 중대를 만들었다. 이 자군을 지휘하는 대장부터가 전투 전문가다. 출신 계급과 종족에 상관없이 능력 순으로 선발된다. 자군 10개를 모아 1,000명의 ‘밍간’을 두었고, 밍간 10개를 모아 10,000명의 ‘투멘’을 두었다. 투멘이 우리가 아는 만호萬戶이다. 투멘의 지휘관부터 장군이다.

 

하나 이상의 투멘을 관장하면 대장군을 뜻하는 ‘노얀’의 칭호가 붙는다. 칸이 관장하는 쿠릴타이에 노얀이 참석하여 각 단위 지휘관에 전술을 전달하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이면 충분했다.

 

이 투멘이 몽골군의 한 전략 단위였다. 이런 체제는 기동전을 펼치는 기병에게 주효한 편제 단위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칸의 명령이 그대로 십호장에게 전달되는 일사불란한 명령 전달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통제되는 10여 개의 투멘으로 전혀 적이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과 방법, 방향에서 기습을 하는 현대적인 전격전을 몽골군은 구사하였다.

 

여기에 몽골군 조직은 기존 부족 관계를 해체하고 모든 부족을 서로 섞어 놓았다. 모든 부족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였으며, 공동체 속에선 승리한 부족과 패배한 부족의 구별이 없었다. 패배자들에게도 동등한 시민권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투를 거듭하면서 칭기즈칸의 군대는 줄어들지 않았다.

 

 



정보 통신망

또 하나의 강점은 뛰어난 정보 전달력이었다. 13세기의 세계에는 몽골제국에 의한 평화가 존재했다. 유라시아대륙 거의 전부가 하나의 정치 권력에 의해 통일되어 반세기 이상 평화를 유지하였다. 평화가 지속되자 동서양 교류가 역사상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동의 안전 보장과 더불어 엄청난 물자가 동서로 이동하였다.

 

이 교류를 확대시킨 획기적인 수단이 바로 잠jam(역참)이었다. 본래 잠은 체계화된 릴레이 시스템이었다. 1,000km 밖의 군대를 통제 지휘가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50km마다 역참을 설치하고 약 400마리의 말을 대기시켰다. 제국의 끝과 끝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일종의 #통신 우편망#이었다.

 

대칸 직할령에만 60,000km의 도로에 1,400개 이상의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다. 칸의 파발꾼은 수도 #카라코룸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일주일 만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6,00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일주일에 완주하려면 하루에 거의 1,000km 가까이 달려야 했다. 요즘에는 전파를 이용하거나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동차로 달린다면 가능할까? 하지만 교통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에 이는 상당한 모험을 안고 있다. 지금 우리가 유라시아 횡단을 하려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체첸, 우크라이나 같은 분쟁 지역을 지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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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27.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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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칭기즈칸

몽골군의 무기들

 

 




몽골 활

몽골 활은 우리나라 각궁처럼 복합 재질로 되어 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다. 300m의 최대 사거리로 150m에서 실전 사용하였고, 50m로 근접해서는 어떤 갑옷도 관통하였다. 몽골군 기병 1인당 활 2~3개와 60발의 화살을 보유하였다. 화살은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여기에 최소한의 보급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능력으로 보급 문제가 거의 없었다.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 능력을 지닌 이들에게 약점은 경기병이 지닌 약한 방어력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면충돌보다는 활을 이용한 사냥 원진을 활용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효율적으로 공격해도 결국 정면 공격과 백병전으로 승패를 가늠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몽골군은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유연성 있게 대처했다. 즉 이민족 출신의 중기병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래도 희생이 클 수 있는 정면 돌격에서 핵심 전력인 몽골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자신이 잘할 수 없는 분야에서 거리낌 없이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는,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거나 자기들끼리의 힘만으로 해결하겠다는 태도는 몽골인들과는 가장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몽골인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피정복민들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였다.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정하면서 이들에게 그에 적합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인, 아랍인 공병대의 활약이다. 이들은 공성 무기를 끌고 다니지 않고 적의 요새 근처에서 주변 재료를 활용해 공성 무기를 제작해 냈다. 이런 몽골인들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1258년 몽골군의 바그다드 포위 공격(티그리스강 도하 다리 설치, 초대형 투석기)이나 남송 정벌전(기병 중심 기동전에서 보병과 수군 위주로 전투 방식 변경, 회회포라 불린 투석기와 공성 무기와 고려 수군들)이었다.

 



 

몽골 말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몽골 기병의 힘의 근원은 몽골 말이다. 몽골군에게 말은 생사를 결정하는 존재로 영원한 동반자였다. 말 중 제일 멋있고 빠른 말은 오늘날 아랍종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 계통의 말이다.

 

이에 비해 몽골 말은 우리 조랑말과 비슷하다. 조랑말보다 체격이 약간 클 뿐, 머리는 크고 몸은 펑퍼짐해서 둔하고 느려 보인다. 몽골 말은 순간 속도는 처지지만, 뛰어난 지구력을 자랑한다. 말은 의외로 까다롭고 참을성이 부족한 동물이다. 하지만 몽골 말은 혹서와 혹한을 모두 견디며 산과 평지, 정글과 사막을 횡단한다. 몽골군은 이 말을 타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후대와 모든 지형을 정복했다(산악, 평원, 사막, 정글, 초원).

 

몽골 말의 이런 장점은 천성만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엄격한 훈련으로 길러진 것이다. 몽골인은 말에게 어려서부터 강한 인내심과 복종을 요구했다. 어미로부터 떼어 낸 새끼 말을 밤새 초원에 혼자 묶어 두어 공포감을 이겨 내게 하고, 언 땅을 파서 풀뿌리와 물을 찾게 하는 훈련을 시킨다. 추위와 더위를 이겨 내는 훈련, 굶주림을 참아 내는 훈련,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소리를 내지 않는 훈련이다. 춥다고 무섭다고 짜증난다고 울면 돌아오는 건 무시무시한 체벌이다. 칭기즈칸은 말이 더 빠르고 강하게 멀리 갈 수 있게 마구를 최대한 가볍게 했고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 재갈을 물리지 않는 건 폐활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장거리를 달리다 멈춘 말에게 곧바로 물과 풀을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방금까지 뛴 말의 앞발과 뒷발을 묶어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 말의 숨이 가라앉고 나서야 물과 풀을 먹였다. 격렬한 운동 뒤 몸을 잠시 긴장하게 하여 근육이 제자리에 잡히도록 하는 것이다. 말에게는 지옥이었다. 피나는 훈련과 노력으로 전투에 적응하고 기수에 복종하게 했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식을 엄한 명령으로 시행하며 지침을 강요했다. 말은 건강하고 빠르고 유연해졌으며 말 자신이 전사가 되어 갔다.

 

몽골군은 1인당 3마리 말을 데리고 다녔고, 암말을 선호했다. 말의 젖을 발효시켜 음료 쿠미스kumis를 얻었다. 언제나 말과 교감하며 살았고 자신의 말을 지극히 사랑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뒤 화가에게 자신과 말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뛰어난 말의 두개골을 유품으로 간직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몽골군은 말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칭기즈칸은 말의 기본권을 배려했다. 군용마 퇴역 제도였다. 일정 기간 전쟁을 겪거나 한 번 이상 장거리 원정에 참여한 말은 초원으로 보내 버렸다. 말 그대로 ‘전역’한 것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군용의 삶이 끝나면 고기와 가죽의 재료가 되었는데, 칭기즈칸은 자신의 울루스에 태어난 죄로 갖은 고생을 한 말을 예우한 것이다. 훈련과 전쟁에서 해방돼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여생을 살게 해 준 것이다. 초원에서 가장 중요하고 한정된 자원인 풀을 복지 차원에서 퇴역마에게 내어 준 것이다. 그것도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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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26. 22:51




 

 

세계 최강 칭기즈칸

몽골군의 비밀

 

 

 

13세기 세계 정복에 나섰던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으로만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켰다. 순수 몽골인뿐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들이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다.

 

 

경기병

몽골군의 주력군은 경기병輕騎兵이다. 이들은 몽골 초원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한 이들이다. 몽골 경기병들은 적의 화살을 달리는 말 두 마리의 틈이나 말의 옆, 배에 붙음으로써 피한다. 심지어 적의 창과 도끼 공격도 이런 방식으로 피한 뒤, 말의 배나 꼬리로 나와 적을 찔러 쓰러뜨린다.

 


몽골군은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려 쏘는 배사背射, 즉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였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 자세가 눈에 익지만, 당시 서양 기사들에게는 공포이자 경이였다. 몽골군은 경기병을 보내 무질서하고 조잡한 전투를 벌이다가 퇴각하는 척하며 적군을 끌어내곤 했다. 그들은 이런 퍼포먼스를 위해 ‘망구다이’(위장 공격과 도망을 겸한 겁에 질린 공격이란 의미 또는 신의 소유물이라는 의미)라는 특수부대를 양성했다.


망구다이는 원래 정예 기병으로 이들의 역할은 형편없는 전투 능력을 보여 적이 방심하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오른 부대가 추격에 나서면 몽골 기병은 말 위에서 뒤로 돌아 화살을 날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추격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적군은 몽골 본대를 만나게 된다. 몽골 본대는 적군을 에워싸면서 섬멸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돌격하지 않고 초원에서 사냥법을 응용하여 적중률 높은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몽골군은 개개인을 쏘지 않고, 특정 장소를 목표로 살상구역(kill zone)을 정했다. 모든 화살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모든 사람을 마치 사냥감처럼 가운데에 몰아넣고 학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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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13. 01:30




 

 

칭기즈칸의 사람들

4구四

 

 

 

 

네 마리의 개는 싸움개의 이미지가 강한데, 신임하는 부하를 개라고 하다니 하겠지만, 몽골에서 개는 욕설이 아니다. 애정 가득한 표현으로 개는 인간을 따르는 늑대이다. 몽골에서 늑대는 존경받는 토템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늑대는 소속과 주군이 생기면 개가 된다.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끈질긴 이들. 사납기도 하고 머리도 좋은 이들이다. 네 마리 개는 대장군으로 젤메 고아, 제베, 코빌라이 그리고 수부타이이다.

 

[젤메 고아]는 몽골 사람들 가슴에 충용의 상징이다.

‘고아’는 ‘기이한 능력을 갖고 있는 아름다운 무당’이라는 뜻이다. 젤메의 아버지 차르치오다이(대장장이 일도 하였다)는 대 샤먼으로 대를 이어 칭기즈칸 집안에 충성을 다했다. 칭기즈칸 가족이 보르칸 산에 숨어 있을 때 젤메를 칭기즈칸에게 맡겼다. 그는 1204년 나이만족의 타양 칸과 벌인 ‘알타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 전쟁에서 ‘4맹견’이란 호칭이 탄생한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임기응변이 능해 다양한 군사 작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칭기즈칸의 전략과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칭기즈칸의 ‘아바타’였다. 평시에는 칭기즈칸의 케식Kheshig(왕실친위대)을 지휘했다. 수도방위사령관과 청와대 경호실을 겸했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나고, 자랄 때 함께 자랐다”며 친형제처럼 지내던 그는 대몽골 제국이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전사한다. 수부타이의 친형이다.

 


[제베] 전투에 관한 한 프로 중 프로였다.

활을 잘 쏘는 몽골족 사이에서도 명사수였다. 원래 칭기즈칸의 적일 때, 활로 칭기즈칸 목을 꿰뚫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목을 관통한 화살촉은 훗날 유라시아 전역을 휩쓴다. 적군이었던 그를 받아들여 ‘화살촉 또는 날 끝’이라는 뜻으로 제베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속도전의 대가로 빠르고 정확한 행동과 이동으로 지구상에 따라올 장수가 없었다.

 

서역 정벌에서 맹활약을 한다. 호라즘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함락시키고 술탄 무하마드를 추격한다. 추격전은 1만km 가까이 계속되었고, 무하마드는 카스피해 작은 섬으로 숨어들어 걸칠 옷도 없이 죽는다. 제베는 무하마드의 목을 들고 초원으로 귀환하던 1224년 삶을 마쳤다.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로, 전투에서 보여준 집요함은 ‘개’라는 별명에 딱 맞는다.

 

[코빌라이] 가장 덜 알려진 인물로 원 세조 쿠빌라이와 동명이인이다.

칭기즈칸이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공동 유목을 하다 갈라섰을 때, 칭기즈칸을 따랐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없지만 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와 함께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임무를 받았다. 부여한 임무를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실현하였기에 건물의 뼈대처럼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1211년 금나라 정벌전에서 전사하였다.

 

[수부타이] 최고의 전략가이자 장군이다.

전쟁의 신이라 불렸다. 전차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의 철제 전차 부대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다(또는 이 철제 전차 부대는 철제 무기와 갑옷, 도구 수리를 위한 이동식 대장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정통 몽골 부족이 아닌 삼림지대 부족원이었기 때문에 말을 타거나 활쏘기에 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젤메를 비롯한 칭기즈칸 수하 최고 지휘관들이 벌이는 토론과 거기서 오고 가는 질문들을 직접 보고 들었다. 10년 동안 지휘관들의 전투 계획과 그에 따른 수행 능력에 대한 사후 보고, 분석을 둘러싼 논의 과정을 통해 탁월하고 매우 실용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다. 전쟁 계획을 구체화하고 대규모로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 셈이었다. 외부 문화나 기술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고 이를 즉시 군사 전략과 전술에 반영하여 몽골군이 더 강해지는데 기여했다(이런 태도는 수부타이뿐만 아니라 몽골 지도층의 기본 태도였다).

 

제베의 부관이었다가 금세 제베와 같은 등급의 대장군으로 성장했다. 제베와는 전설적인 콤비를 이뤘다. 제베는 기동전의 명수였고, 수부타이는 회전(회전會戰은 두 군대가 적당한 장소에 결집해 총력 대결을 펼치는 전투로, 특성상 국운을 건 모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명장이라도 일생 5회 이상 회전을 경험하기 힘들다)의 천재였다. 결정적인 대전투의 설계자로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현실화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칭기즈칸 사후 유럽 정벌의 실질적인 사령관이었다. 1221년부터 러시아 정복을 주장하고 추진한 인물로 단 2만 병력으로 쉴 새 없는 기습전을 통해 러시아를 단기간에 초토화시켰다. 1236년 마침내 12만 명이 동원된 러시아 본 원정에서 3년 만에 러시아를 정복하였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실패한 러시아 정복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정복한 나라는 32개국에 달하고, 61번 회전에서 승리한다. 그가 이룬 제국의 영토는 헝가리 국경부터 동해까지, 노브고로드 외곽으로부터 페르시아만까지, 바이칼호부터 양쯔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당대 중국인들은 그를 ‘신의와 불변의 장수’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는 대몽골제국의 3대에 걸친 칸-칭기즈칸, 오고타이칸, 구육 칸-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특히 수부타이는 제베와 함께 호라즘 술탄 무하마드 추격전을 통해 몽골의 복수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그는 칭기즈칸에게는 더없이 충직한 부하였는데, 서역을 정벌하던 그에게 칸이 귀환 명령을 내렸다. 뚱뚱한 수부타이는 1주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칸에게 돌아왔다. 말의 반동을 견뎌 내려고 자기 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였다. 72세로 다뉴브 강가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12. 01:00




 

칭기즈칸의 사람들

4준四駿

 




칭기즈칸은 희대의 영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이룬 개척의 역사를 혼자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에게는 함께 열망을 품고 온몸을 불사른 동지들이 있었다. 칭기즈칸은 남의 재능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데 어떤 편견도 없었다. 출신과 계급에 관계없이 오직 능력 순으로 선발했다. 여기에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칭기즈칸의 성격 덕분에, 그의 부하들은 빨리 결과를 보여 줘야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실력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칭기즈칸은 유달리 너커르(평생동지), 안다(평생친구)가 많았다. 칭기즈칸에게 너커르는 부하나 참모가 아니라 동지였다. 동지들끼리 뭉쳐서 일하지만 그래도 단일 창구가 필요한데, 칭기즈칸은 그런 유형의 리더가 되기를 희망했다. 오갈 데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 꿈은 품고 있지만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칭기즈칸의 제국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칭기즈칸 곁에는 전설로 기록되는 ‘네 마리의 준마駿馬’ 와 ‘네 마리의 개’라는 여덟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이 이름은 칭기즈칸과 싸웠던 적들이 붙여 준 것이다.

 

네 마리 준마는 참모를 겸한 장군이다. 보르추, 무칼리, 칠라온, 보로쿨을 말한다.

 


<보르추>

는 칭기즈칸이 말을 잃어 버렸을 때 그를 도와 말을 찾아준 부잣집 막내아들 출신이다. 칭기즈칸은 신세를 진 대가로 말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보르추는 단호히 거절했다. “벗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벗의 의무다. 도움의 대가로 말을 받는다면 그가 무슨 벗이겠는가.”

 

물질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만남이며, 거짓과 배신이 춤추는 땅에서 믿음과 의리가 깃발을 올리는 첫 발자국이었다. 10대 칭기즈칸은 그 관계를 신성하게 여겨 다음과 같이 속마음을 전했다. “그림자 말고는 다른 친구가 없을 때 친구가 되어, 나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꼬리 말고 다른 채찍이 없을 때 채찍이 되어 나의 심장을 편안케 했다.”

 

칭기즈칸 최초의 너커르로 제국의 공동 2인자이자 최고 개국공신이다. 젤메와 마찬가지로 칭기즈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사적으로는 격의 없는 친구 사이였다. 칭기즈칸은 보르추에게 위험한 임무를 맡길 때 자신이 끔찍이 아끼는 애마를 내어 줄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칭기즈칸은 몽골 통일 후 의리의 사나이 보르추에게 알타이 부근 만호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고, 보르추는 칸 옆에서 거침없는 충고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무칼리>

는 노예 씨족인 잘라이르 출신으로 주르킨족 노예로 살다가 칭기즈칸이 주르킨을 정벌하자 부하가 되었다.

 

프랑스 학자 펠리오와 앙비스는 그가 고려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전투에 뛰어난 재능도 없고 성과를 내는 데도 느렸지만, 정밀하게 사고하는 능력이 있었다. 신중하고 끈기가 있어서 장기적인 전략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몽골초원 통일의 분수령이 된 옹칸과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 서서 돌격해 들어갔다. 대몽골제국 총사령관이 되었고, 칭기즈칸이 내린 결정도 바꿀 수 있고, 9가지 죄 말고는 어떤 죄도 물을 수 없는 공신 중의 공신이 되었다.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정벌한 뒤 그에게 권權 황제라는 칭호를 내려 황하 이북을 통치하게 했는데, 고려 사람이라면 권씨였을지도 모른다. 무칼리는 너무 열심히 싸우다 탈진하여 1223년 봄, 53세에 풍운의 삶을 접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과로사 할 정도로 충성을 다했다.

 

<칠라온>

칭기즈칸이 타이치우드족에 포로로 있을 때 그를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아들이며 사적으로는 친구 사이이다. 형제 칠바이도 칭기즈칸의 중요한 부하였다. 용맹한 칠라온은 한번 문 목표물은 절대 놓지 않았다. 한번은 전투 중 낙마하자 적들이 덤벼들었다. 초원 전투에서 낙마하고 보병으로 싸운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칠라온이 창을 고쳐 잡고 적 기병과 맞서 싸우니 기세에 밀려 적들이 달아났다고 한다.

 

금나라 정벌에 참가했다가 죽었다. 훗날 칭기즈칸이 포상할 때, 칠라운의 아버지 소르칸 시라가 아들들을 대신해 천호장을 제수받는다.

 

<보로쿨>

4준마 중 가장 젊다. 칭기즈칸이 주르킨족을 정벌할 때 적진에서 거둬들인 전쟁고아였다. 칭기즈칸은 어머니 후엘룬이 그를 거둬 양자로 삼게 했다. 즉 칭기즈칸과 의붓형제가 된 것이다. 방패를 들고 칭기즈칸을 호위하는 측근 중 측근이다. 칭기즈칸은 그를 동생처럼 여겼다. 그는 칸의 음식을 맛보는 사람(부케울)과 요리사(바우르치)역할을 했다. 전투 이상으로 중요한 임무로, 급한 원정 중에도 비오는 밤에도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도 늘 음식을 제공해 칸의 속을 든든하게 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와 절친한 사이였다.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만 요절하였다. 그의 딸 우시진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아내가 됐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11. 01:00




 

 

기즈칸의 인품과 미덕

 

 




 

칭기즈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제국을 건설한 삶의 과정을 통관해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대업을 이뤄 냈는지 그려볼 수 있다. 칭기즈칸의 인품과 자질, 상황에 대응하는 자세와 미덕 등에 대해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련을 견디고 이겨내는 강인함이다. 칭기즈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 시절의 고난을 겪으며 몸에 밴 테무친의 고독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어진 모든 악조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사람으로 그가 지닌 미덕을 말이다.

 

그는 드넓게 트인 대지 같은 마음을 지녔다. 개방적 성격과 행동은 그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내 보르테가 약탈당했을 때 자신의 힘없음을 원통해하며 참담한 현실을 슬퍼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력 확장의 천재일우 기회로 활용하고,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적의 아이를 낳았을 때도 운명을 감수한다. 그리고 나그네라는 뜻의 몽골어 ‘주치!’라고 맏아들 이름을 지어 준다. 적의 아이조차 자신의 아내의 뜨거운 자궁에서 나왔기에 신이 주신 손님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위기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정신은 불행을 완벽하게 뒤엎는 기능을 한다. 그는 불행 앞에서 분노나 복수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았다. 좌절에 빠져 넋을 놓지 않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힘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명을 직시하고 운명과 싸운 진정한 영웅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신에게 무엇이 없고, 무엇이 필요하며 어디를 향해 가고 어떻게 그 길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였다. 인내, 포용력, 냉정함을 가슴에 길렀다. 모친인 후엘룬은 테무친의 장점을 “테무친은 가슴에 재능이 있다”고 했다. 소박하지만 확고한 장점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이는 다정한 사람,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가 외유내강 형 지도자였음을 말해 준다.

 

둘째, 부족의 운명을 사랑하여 구원해 내는 모습이다. 칭기즈칸의 보르치긴 씨족은 가련하고 위기에 처한 굶주린 늑대와 같은 부족이었다. 언제라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가혹한 환경 속에 내버려진 채 지도자도 없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이 연약하고 분열된 부족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과정, 그게 바로 테무친이 칭기즈칸이 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칭기즈칸은 시련의 악순환을 끝매듭 짓고 평화를 가져온 왕 중의 왕이었다.

 

셋째, 평화를 위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어야 했다. 칭기즈칸은 유목민 사회를 통합하고 정착민의 성벽을 무너뜨린 대전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로 활용하는 집단이 승리하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효율적인 군사 제도와 행정 제도를 중시하였다. 유연한 자세로 정복지 포로들을 언제라도 끌어들여 보충하였다. 군대는 표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토와 인구가 확장되어도 전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대와 전쟁의 역사는 칭기즈칸 이후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넷째, 제국을 건설한 후 위대한 정치인이 되었다. 지도자 칭기즈칸은 유목민의 틀 안에서 벗어나 사려 깊은 심성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균형 잡힌 사람이자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행정가의 자질도 보여, 법령을 선포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이끌어 냈다. 또한 세종대왕처럼, 위구르어를 약간 수정하여 몽골인의 민족 문자가 되게 했다. 칭기즈칸 일가 3대에 걸친 통치로 유라시아는 보기 드물게 안정을 누렸다. 상업을 진흥시켰고, 역참제를 통해 문서와 서신, 물자들이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하여 진정한 동서양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했다. 이로 인해 14세기에는 위대한 여행가들의 대륙 여행이 가능해졌다.

 

다섯째, 신앙인으로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들 자신은 유일신인 천신을 숭배하였다. 천신을 텡그리라 하였다. 유일신을 믿었다고 해서 다른 하위의 신들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신과 접해서 그 뜻을 알아내는 샤먼을 두었는데, 그중 우두머리는 ‘천상에 가까운 자’란 의미로 텝 텡그리라 하였다. 칭기즈칸은 그의 곁에 자신이 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 코코추라는 샤먼을 두어 의견을 경청하였다. (그를 따랐던 뭉릭의 넷째 아들은 무당이며 이름이 텝 텡그리로, 텡그리의 메신저가 칭기즈칸 옆에 있다는 의미로 당시 사람들은 인식했다)

 

칭기즈칸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의지를 받드는 샤머니즘이란 의미로 ‘텡그리즘’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언제나 텝 텡그리, ‘푸른 하늘’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푸른색靑色을 숭상하였고 연관을 짓기도 하였다. 쫓기던 아이 시절, 숨어 지낸 호수는 푸른 호수였고, 그의 군대는 푸른 군대, 모두 푸른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그 푸른 하늘의 뜻으로부터 그의 성품과 기질이 나온다. 우주 삼라만상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우열의 층차가 없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모두 푸른 하늘의 뜻이니…. 이런 종교적 인식에 영향을 받아 칭기즈칸은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관용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칭기즈칸은 세상 사람 누구나가 각자의 신을 알아서 믿을 수 있도록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그의 통치 아래서 모든 종교는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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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10. 15:50




 

 

 

동서통일제국을 건설한 최초의 세계인

칭기즈칸의 장과정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 -몽골비사

 

수많은 별을 가진 하늘도 돌고 있었다. 모든 나라는 우리를 배반하였다. 편안히 침대위로 들어가 자지도 못하고 서로 노략질했다. 푸른 풀로 덮인 대지도 구르고 있었다. 온 나라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편안히 이불 속에 들어가 눕지도 못하고 서로 공격했다. - 몽골비사

 

단기 197년 서력기원 BCE 2137년, 갑신 단군조선 4세 오사구 단군 재위 원년에 아우皇弟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는데, 혹자는 지금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

 

 

칭기즈칸Chingiz Khan(成吉思汗, 1162~1227)

1162년 - 오논 강 유역 숲에서 탄생, 보르치긴족으로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1171년 9세 - 아버지 예수게이 사망, 두 엄마와 7형제가 떠돌이 신세가 됨

1178년 16세 - 부르테와 결혼

1189년 27세 - 씨족, 부족 회의인 쿠릴타이를 소집해 칸의 칭호를 얻음

1196년 34세 -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둠

1204년 42세 - 몽골 고원 통일

1207년 45세 - 서하(탕구트) 복속시킴

1219년 57세 - 호라즘 원정

1223년 61세 -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 건설

 


12세기 초 몽골 고원은 언제나 흉흉한 긴장의 바람 속에 놓여 있었다. 땅에서 생산된 것으로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것을 뺏어야 했고, 뺏기 위해 죽여야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해서만 겨우 살아가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기 위한 싸움은 한층 더 치열해져 갔다. 당시 몽골 고원 절반은 광활한 대초원 지대였지만, 나머지는 원시림과 호수, 그리고 반半 사막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유목 부족들 간에 거주 지역에 따라 사육하는 가축의 종류와 생활양식에 차이가 있었다.

 

몽골족은 칭기즈칸의 증조부인 카불칸 때 몽골 울루스ulus라는 정치적 독립체를 결성하여 인근 타타르와 금나라 변방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결국 몽골족은 금나라와 타타르족의 집중 견제로 2대 칸인 암바가이(보르치긴 씨족이 아닌 타이치우드 씨족 전사)가 사로잡혀 당나귀 형틀에 못 박혀 죽는 사건이 있었다. 뒤를 이은 키야트 씨족 출신 괴력의 용사 코톨라는 13번에 걸쳐 타타르족과 싸웠지만 패배하고 몽골 울루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때 몽골고원에 개입한 중원의 금金나라 세종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잔인한 대북방 정책을 감행한다. 몽골 남자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는 금나라의 감정減丁 정책은 몽골족들에게 골수에 박힌 원한을 심어 주었다. 이는 금나라 여진족이 자신들의 확고한 세력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3년마다 어김없이 벌인 유목민 학살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냉혹한 부족 궤멸 위기의 와중에 몽골족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자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강철은 시련 속에서 단단해진다

1203년 테무친(鐵木眞)이라는 키는 작고 눈은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몸에서는 말과 낙타의 노린내가 배어 있는 중년의 사나이가 몽골 동부지역에서 최강 케레이트 부족을 꺾고 패자가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테무친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테무친은 몽골부 보르치긴 씨족의 수장인 예수게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테무친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직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쥔 채였는데, 주먹 안에는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그것도 새끼 양의 복사뼈만 한 핏덩이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용기, 전투, 그리고 승리의 표시로 해석되었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족 족장인, 테무친(바다나 호수처럼 ‘넓게 퍼진 상태’를 뜻하는 중세 몽골어)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인간 테무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타고난 두뇌는 그저 평균치 정도였고, 어린 시절 개를 무서워하기도 하는 소심한 겁쟁이였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지 못했고,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평생을 생활했으면서도 외국어는 구사하지 못했고, 최고 수준의 학자에게 집중 과외를 받았지만 문맹이었다. 그의 가족은 문맹에서 벗어났는데도 말이다. 무쇠처럼 단단한 성품의 남자도 아니었다. 자주 울었고, 특히 여자들의 호통에 정신을 번쩍 차리기도 하고 판단력도 뛰어나지 못했다. 때로는 의심하고 화내기도 하였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주변 타타르족과 대립한 용사였다. 예수게이는 테무친이 9살 무렵(혹은 13세라고도 한다) 혼인을 위해 옹기라트족인 보수쿠르의 데이 세첸을 방문하고 그의 딸 보르테와 혼인을 약속하고 돌아오는 도중 숙적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당했다.

 

부친의 죽음은 테무친에게 닥친 역경의 시발점이었다. 초원에서 정치적 권력이란 어떤 확립된 제도에서 발생하기보다는 개별적 지도자들의 인물 됨됨이에서 나온다. 즉 강한 자 아래에 모이게 되어 있는 구조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들은 분열하였다. 친족들은 테무친의 가족들을 버리면서 재산인 가축들도 모두 빼앗아 갔다. 이는 다가올 겨울에 굶어죽으라는 것이었다. 오논 강

(★)

가는 초원에서도 북쪽 끝에 위치한 곳이다. 추위는 더 혹독하고 먹거리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 가족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테무친 일가는 강철 같은 여인 후엘룬

(★)

을 중심으로, 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유목민의 일상 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했고 풀뿌리와 생선, 들쥐 등으로 연명하였다.

 

테무친은 연이어 지옥 같은 포로 생활에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가 하면 화살에 목이 꿰어 죽기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는 몇 번의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절대적인 위기에 몰렸을 때는 불과 19명의 동지만 살아남았고 그들은 초원 끝 흙탕물로 갈증을 풀며 테무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부족은 이미 와해되었기에 테무친은 부족을 따지지 않고 조금씩 세력을 모으며 성장해야 했다. 그러면서 혈연과 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능력과 인망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인재를 평가하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이런 경험들은 테무친에게 씨족 중심 사회가 아닌 동료들의 충성심과 우정을 더 믿게 만들었다.

 

극렬한 고난을 겪고 나면 그 고난이 트라우마로 남아 나쁘게 작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난이 더 큰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테무친은 후자의 전형이었다. 그는 믿을 사람과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친구들과의 우정에 주목했고, 진정 의지해야 할 가치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한 우정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믿음은 혈연이나 지연, 종교 같은 선천적이거나 이념적인 진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마련이다. 건강한 개방성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부족의 분열과 배신 사건으로 테무친은 조직 내부에서 불화와 불만이 있는 자, 이탈자를 탐지해 내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역경은 테무친에게 배신하는 자와 의리를 지키는 자가 있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많이 얻어야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래서였는지 테무친은 이후 한 번도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 더불어 실제 조직 경영에 있어 칭기즈칸이 등용한 전투 지휘관의 조건은 용맹함, 두뇌, 인내심과 현장판단력 등의 능력 위주였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6. 02:00




 

 

영국 사람들의 사랑방,

펍(Pub. Public House)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영국 어디에서나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펍Pub이다.

펍을 우리나라의 것으로 말하면 선술집 정 도라고 할 수 있다. 말이 술집이지 펍은 단 지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다. 영국 사람들 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비즈니스를 위해, 쉬기 위해, 때로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펍 을 찾기도 한다. 특히 시골의 펍은 마을의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영국에서는 신문을 배달하지 않기 때문에 신문을 사기 위해 서는 매일 주변 가게에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펍을 통해 온갖 소식을 접할 수 있 다. 펍은 여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야 말로 펍은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하나로 묶는 일상적 생활공간이다. 펍을 중심으 로 생활문화가 소통된다.

 


펍에서는 맥주는 물론 와인이나 쥬스 및 탄산음료, 그리고 몇 가지 음식도 판다. 그 러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것은 맥 주이다. 맥주는 비터, 라거, 스타우트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영국 사람들은 쓴 맛 이 강하고 약간 진한 색깔인 비터를 가장 즐긴다. 맥주는 대개 안주 없이 서서, 또는 둥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마시는 경우 가 많다. 우리나라 술집과 달리 웨이터가 없기 때문에 팁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날 씨가 좋을 때 펍 밖에서 마시는 맥주는 또 다른 맛을 낸다.

 

500cc 조금 넘는 맥주 한 잔을 들고, 안주 없이 이따금은 싼 감자튀 김을 안주로 삼아, 날씨를 시작으로 축구 나 정치 얘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영국식 당구인 스누커를 치거나 스카이 채널을 통해 축구를 보기 도 한다. 특히 라이벌 축구팀과 경기가 있 을 때면 펍은 온갖 응원의 고함소리로 들 끓는다.

 

펍에서 가장 많이 보는 음식은 피쉬 앤 칩 스Fish and Chips이다. 피쉬 앤 칩스는 대구나 가자미 등 흰살 생선을 기름에 튀겨서 소 금과 식초를 뿌린 피쉬와 다소 굵게 썰어 튀긴 감자를 곁들인, 영국의 가장 대표적 이고 싼 서민 음식이다. 어느 펍을 가더라 도 이 메뉴는, 가격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만,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영국에서 서민들을 많이 만나려면 펍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펍의 출입이 누구 에게나 항상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14살 이하의 청소년은 펍에 갈 수 없으며, 주로 남자들로 붐빈다. 개방 시간은 대체 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그 리고 잠시 문을 닫았다가 오후 5시 30분 부터 저녁 10시 30분 또는 11시까지 문을 연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5. 17:33




 

 

영국의 국교, 성공회

(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

 

 

 

영국에서는 두 가지 기독교파가 국교로 인 정되고 있다. 성공회와 스코틀랜드의 스코 틀랜드 장로교가 그것이다. 국교가 있다고 해서 여타 종교를 배타시하는 것은 아니 다. 영국은 현재 모든 사람이 종교의 자유 를 누릴 권리를 가진 다종교 사회이다.

영국의 주된 종교는 기독교이지만 세계 종 교 대부분이 있다.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 교를 믿는 다소 규모가 큰 공동체도 있고, 유대교나 불교와 같은 소규모 공동체도 있 으며, 신종교 추종자들도 있다. 또한 종교 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모든 형태의 종교적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잉 글 랜 드- 웨일 즈 에 는 기 독 교 도 가 33,243,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9%를 차 지하여 가장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지난 10년 사이에 신도가 준 유일한 종교이며, 무려 12.4%, 약 4,095,000명이나 줄어들 었다. 그 뒤를 잇는 종교 인구를 보면, 무 슬림 2,706,000명, 힌두교, 시크교, 유대 교, 불교 순이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무종교 인구가 14,097,000명으로, 2001년 에 비해 6,388,000명, 비율로는 10.3% 증 가하였다는 점이다.

 

기독교도를 지역적으로 보면 노스 이스트 지역에 가장 많고 런던에 가장 적게 산다. 그러나 런던에는 시크를 제외한 무슬림 (1,000,000명), 힌두(411,000명), 유대교(149,000명), 불 교(82,000명) 등 대부분의 개별 종교인구가 가 장 많이 살고 있다. 시크교도는 약 30,000 명이 사는 웨스트 미들랜즈에 가장 많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가장 많은 지역은 웨 일즈, 사우스 웨스트, 이스트, 사우스 이 스트, 이스트 미들랜즈의 순이다.

 

기독교 내의 신도 수 변화 양상을 보면 이런 경향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보아 국교인 성공회 교도가 지 배적이고,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순이다. 또 특징적인 점은 기독교가 점차 세속화 경향 을 보인다는 것이다. 총인구에서 종교 인 구가 차지하는 비율,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 교 회 참여자들은 나이든 여성들이 많다.

 

 


영국 국교회라고도 하는 성공회는 1534년 헨리 8세가 가톨릭 교회와 손을 끊고 스 스로 성공회 수장이 됨으로써 영국의 국 교가 되었다. 한때 열렬한 로마 교황의 추 종자였던 헨리 8세는 결혼을 6번이나 하 였는데, 자신의 결혼과 이혼 문제에 로마 가톨릭이 개입하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되 자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만들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인 첫 왕비 커서린의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광신적인 가 톨릭교도여서 아버지가 세운 성공회를 부 정하고 교황권을 재확인하여 잉글 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고 했 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와 신교도들을 무 차별 학살하였다.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558년에 메리 여 왕이 자녀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것은 헨 리 8세와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사이에서 난 딸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녀는 다시 성 공회 부활을 선언하고 가톨릭과 신교도를 박해했다. 성공회는 헨리 8세에 의해 시작 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고, 지리한 종교 분쟁도 막을 내렸다.


헨리 8세의 이혼 소송과 성공회의 탄생은 명목상으로는 바람둥이 군주의 이혼 문제 때문에 불거진 분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시의 최강 스페인과 교황의 간섭에서 벗 어나기 위한 영국의 정치적인 종교 독립이 었다. 성공회는 구교와 신교 사이의 극 단적인 것을 지양하고 서로의 장점을 포용하려고 한다. 또한 최초의 교회 분열인 동서교회(로마교회와 정교회)의 분 열 이전의 초대교회의 신앙 을 지킨다. 성공회는 성서 의 최상성, 근본적 교리 와 신조를 강조하면서 가톨릭적 의례와 직 제 등을 유지한다.


영국국교회는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특정 의무를 지니면서 동시에 특권 또한 부여받 는다. 영국의 왕은 반드시 성공회 교인이어 야 하고, 교리를 준수할 것을 약속하며, 모 든 성직자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는 30개의 주교 구 역을 관장하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14개의 주교 구역을 관장하는 요크 대주교이며, 그 밖에 런던, 더럼, 윈체스터 등을 관할하 는 24명의 주교가 있다. 대주교를 포함한 주교들은 모두 총리의 제청으로 국왕에 의 해 임명되며 상원 의원을 겸직한다.


성공회 신도는 2000년 현재 세계 166개 국가에서 약 9,960만 명에 이른다. 1990 년에 비하면 약 1,145만 명이 늘어났다. 2) 우리나라에는 1890년부터 선교가 시작되 었으며, 현재 전국에 100여개 교회, 약 5 만 명의 신도가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1. 20:49





영국인의 문화 특성






영국인들은 기독교Protestantism 사상을 바탕 으로 하는 근면성과 정직성이 있고 실용 적이며 매우 검소한 모습을 보인다는 평 을 받는다. 오래된 것도 잘 보전하고 아껴 쓰며 허례허식이나 명분에 얽매어 쓸데없 는 낭비를 하지 않는다. 기존의 전통과 연 속성을 중시하는 보수적 성향Conservatism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혁명보다는 점진적 변화를 선호하고 참을성이 강하며 냉정하 고 과묵한 감정의 억제Inhibitions 성향도 특징 으로 꼽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영국의 상징들로는 흔히 버버리 코 트, 패딩턴 맥주, 얼 그레이 차, 런던 택시, 웨그우드Josiah Wedgwood 등을 든다. 여왕의 경우 현재 머리 스타일을 50년 간 유지하 고 있고 찰스 왕세자는 한번도 청바지 차 림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 영국 통신업체 BT가 기존의 붉은색 공중전화 박스를 노란색으로 교환하려고 했을 때 조직적인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친 것도 그 러한 국민성에 기인한다.




또한 방어적인 프라이버시Privacy 중시 풍토 가 강해서 남에게 쉽게 자신의 집 방문을 허용치 않으므로 영국사람의 집은 하나의 성城(castle)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영국인을 대체로 거만하고 차갑고 쉽게 사귀어지지 않는다고 평하는 말은 이러한 특징들 때 문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질서의 규칙을 잘 지키는 장점을 갖고 있 으며, 문학 분야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 아서 코난 도일, 조앤 롤링 등의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한 예술적 성향 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보수적 성향과는 다른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외향성Outwardness 도 갖고 있어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힐러리 경, 남극을 탐험한 아문젠 등이 모 두 영국인이었으며 대영제국 건설의 과거 역사도 이러한 외향성이 바탕이 되어 이룩 된 것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영국인들은 규칙적인 성향Idiosyncratic이 강하다. 약속을 정할 때는 미리 상당한 시간을 두고 정하며, 휴가도 보통 1년 전쯤에 계획을 잡고 매년 같은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매 주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식사하는 습관, 비가 오더라도 매주 수요일에 세탁 을 하는 습관 등이 그런 유형에 속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31. 20:49






영국 경제와 한국과의 관계





영국은 세계에서 두 손 안에 드는 경제대 국이다. 비록 지금은 해가 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도 금융산업을 비 롯한 일부 산업은 세계 어떤 국가보다 경 쟁력이 강하다. 영국의 GDP는 2조 4,526 억 달러(2012 IMF 기준)로 세계 6위이다. 1조 1,635억 달러로 세계 15위를 차지하는 우 리나라와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다. 1인당 GDP는 38,891달러(2012 IMF 기준, 세계 24위)이다. 『포츈』지에서 선정한 2012년 세계 500대 글로벌 기업 보유 현황을 보면, 영국은 26 개 기업이 포함되어 6위를 차지하였다. 이 는 13개가 포함되어 8위를 차지한 우리나 라와 비교된다.


2011년 기준 교역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는 무선전화기, 선박, 승용차, 집적회로 반 도체, 금 등을 49.69억 달러 수출하였고, 강반제품, 의약품, 주류, 합성수지 등을 38.18억 달러 수입하였다. 영국은 우리나 라에게 수출입에 있어 대략 20-30위권의 교역국이다.



우리나라와 영국의 첫 만남은 19세기 말 이었다. 외세의 개방 강요와 조선의 개화 정책에 따라 조선은 여러 국가들과 조약 을 맺는데, 그 하나로 두 나라는 1883에 한-영 우호통상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어 진 영국과 우리의 만남도 결코 아름다운 만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계 각지에 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 의 조선 진출에 위기를 느껴 함대를 앞세 워 전라도에 있는 거문도를 강제적으로 점 령(1885년)하였기 때문이다. 교역이 거의 없 었던 두 나라가 가까워지게 된 것은 일제 로부터 해방된 이후 1949년에 양국이 수 교를 맺고, 영국이 한국전쟁에 유엔군으 로 참여한 이후부터였다. 영국은 북한과 도 2000년 말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 데, 2001년 7월에는 주 북한 영국대사관 이, 2003년 4월에는 주 영국 북한대사관 이 개설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8. 03:00






 

영국 인종의 구성

 

 

 




영국은 땅덩어리가 한반도의 1.1배로 약 244,000㎢이다. 브리튼 섬의 남부를 차 지하는 잉글랜드가 약 130,400㎢로 가장 넓고, 그 다음이 스코틀랜드 78,800㎢, 웨일즈 20,800㎢, 북아일랜드 13,600㎢ 순이다. 국토의 동서의 길이는 약 500km, 남북 연장은 1,000km 정도이다.

 

남부와 동부는 주로 저지의 농경지이고, 북부는 남부나 동부보다 산이 더 많다. 잉 글랜드의 척추라 할 수 있는 페나인 산맥 이 브리튼 섬 중부에 있지만 그리 높은 산 은 별로 없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1,343m의 벤 네비스 산이다.

 


잉글랜드 북서부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많 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는 가장 큰 윈더 미어 호수를 비롯하여 열 댓 개의 크고 작 은 호수들이 있는데, 해질녘에 바라보는 호수 경치는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민족이나 인 종, 국적이 매우 다양하다. 2011년 센서스에 의 하면 잉글랜드-웨일즈에 사는 사람의 86%, 48,200,000명은 백인이다. 기타 민족 구성을 보면, 인도 2.5%, 파키스탄 2.0%, 방글라데시 0.8%, 중국 0.7%, 기타 아시아인 1.5%, 아프리 카 1.8%, 카리브인 1.1%, 기타 흑인 0.5%, 흑백 카리브인 0.8%, 백인 아시아인 0.6%, 기타 혼혈 인 0.5%, 흑백 아프리카인 0.3%, 아랍 0.4%, 기 타 0.6%이다. 특히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지난날의 정치 적 배경에 기인한다.

 

2011년 현재 잉글랜드-웨일즈에 사는 사람 중 영국에서 출생하지 않은, 즉 외국에서 출생한 사 람은 인도(694,000명), 폴란드(579,000명), 파 키스탄(482,000명), 아일랜드(407,000명), 독 일(274,000명), 방글라데시(212,000명), 나이 지리아(191,000명), 남아공(191,000명), 미국 (177,000명), 자메이카(160,000명)의 순이다. 세 계 여러 나라에서 이민온 사람들은 런던, 맨체스 터, 버밍엄, 리버풀, 슬라우, 레스터, 울버햄튼 등 에 많이 살고 있다.

 

2011년 현재 영국에는 우리 교민이 약 46,829 명 살고 있다. 시민권자 및 영주권자가 13,009명 에 이르며, 체류자가 약 33,820명이다. 주로 런던 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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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0. 17. 02:30






 

프랑스의 자부

그랑제콜

 

 




프랑스 공교육제도는 중등학교 과정까지는 우리나라와 비슷 하다. 6세부터 들어가는 초등학교가 5년인 반면 중학교(콜레주) 는 4년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점이다. 고등학교(리쎄)는 우리 와 같은 3년이다. 그런데 고등교육 과정은 우리와 상당히 차이 가 난다. 대학은 일반대학과 ‘그랑제콜’(grandes ecoles)이라고 불리 는 특수대학으로 나뉜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그랑제콜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랑제콜은 프랑스 엘리트 배출 기관이 되어 있다. 프랑스혁명기에 만들어진 에콜 폴리테크닉 과 국립기술대학(CNAM)을 비롯하여 그랑제콜은 대부분 국가 에서 필요로 하는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학교들이며 문과계통 학교로는 역시 프랑스혁명 때 세워진 고등사범학교를 비롯한 몇몇 학교들이 있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는 장 폴 사르트르가 재수해서 들어간 학교로 프랑스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일반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보는 학력검증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면 되는데 합격자 비율은 80% 정 도이다. 바칼로레아 합격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원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학생들도 많 은 편이다. 반면 그랑제콜의 입학 정원은 보통 수백명에 불과 하고 입학생들에게는 국가에서 월급을 주고 공무원과 비슷한 대우를 해주기 때문에 입학경쟁이 치열하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면 바로 그랑제콜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고교 성적을 토대 로 선발하는 그랑제콜 예비반에 들어가야 한다. 그랑제콜 예비 반은 2년 과정인데 학습량이 엄청날 뿐 아니라 매주 시험을 치 르기 때문에 힘든 과정이다. 그랑제콜 예비반은 그랑제콜이 아 니라 고등학교 내에 설치되어 있다.

 

고등사범학교는 리용에 한 곳, 파리에 두 곳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앞에서 말한 파리의 울므 가에 위치한 고등사범학교이다. 고등사범학 교 학생은 공무원으로서 월급을 받는 대신 학교생활을 포함해 서 10년간 국가기관에서 복무할 의무가 주어진다. 국가에서 필 요로 하는 고급인재를 일반대학과 달리 그랑제콜을 통해 확보 하는 프랑스 교육제도가 엘리트 위주의 교육제도로서 민주주 의적 가치와 배치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5. 01:30




 

 

영국의 인구와 민족

 





영국을 이루는 네 나라는 비록 정치적 으로 단일 주권하에 있고, 영어를 공용 어로 하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구분된 다. 잉글랜드가 앵글로색슨족이 주를 이 룬다면 나머지 홈 네이션인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켈트족의 후예가 주류를 이룬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2010년 추정 영국 총인구는 62,262,000명이다.

잉글랜드는 크게 9개 지역(region)으로 나뉜 다. 2010년 잉글랜드 인구는 52,234,000 명인데, 9개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브라이 튼과 같은 도시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아 주 발전한 사우스 이스트 지역에 가장 많 이 거주하고, 약 800만에 가까운 사람들 은 런던에, 그 다음에는 맨체스터와 리버 풀을 중요 도시로 하는 노스 웨스트 지역 에 많이 산다.



그런데 2011년 센서스 1) 에 의하면 2011년 3월 현재 잉글랜드 인구는 53,107,200명, 웨일즈 인구가 3,063,800명이다. 두 지역 총인구는 56,171,000명으로, 2010년에 비 해 1년 사이에 931,200명이 증가하였다.

 

특징적인 것은 65세가 넘는 노인 인구가 920만 명으로, 16%, 즉 6명 중 1명이 노 인이라는 점이다. 영국은 65세 이상 인구 가 총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전형적 인 고령사회(Aged Society)이다.


스코틀랜드의 현재 행정 구역은 32개 주 (council area)로 구분되어 있다. 북서쪽 고원 지대는 하이랜드(Highland), 남동쪽 평야 지 대는 로우랜드(Lowland)라고 하는데, 큰 도 시들은 주로 로우랜드에 있고, 하이랜드 지역에는 애버딘을 제외하면 큰 도시가 없다. 2010년 추정 스코틀랜드 총인구는 5,222,000명이며, 그 중 가장 큰 도시인 서부의 글래스고에 1,800,000명 이상이 살고, 이어 수도인 에딘버러에 60만 명 이 상이, 에버딘에 20만 이상이 거주한다.


웨일즈의 행정 구역은 22개 주로 구성되 어 있다. 웨일즈의 2010년 추정 인구는 3,006,000명인데, 수도인 카디프가 60만 이상이 거주하는 가장 큰 도시이다.


북아일랜드는 26개 구(district)로 이루어졌 다. 북아일랜드의 2010년 추정 인구는 1,799,000명인데,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항구 도시 벨파스트에는 7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