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소피아와 플로브디브
세르디카는 447년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한 세기 뒤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 시대에는 근 4세기 동안 루멜리아 총독관구의 수도였다.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의 지배 하에서 소피아는 오스만 풍의 도시가 되어갔다. 성소피아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모스크로 탈바꿈하여 17세기에는 100 개 이상의 모스크를 헤아리게 되었다.
1878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불가리아를 오스만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소피아 시내에 있는 큰 성당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은 바로 투르크와의 이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라는 이름은 키에프 시대에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러시아를 지킨 인물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반열에 오른 러시아의 영웅 이름이다. 이 성당은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성당으로 불가리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꼽힌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성당이 성소피아 성당이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당과 비슷한 시기인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지어졌다. 소피아는 그리스 말로 지혜라는 뜻으로 지혜를 신격화하여 숭배한 초기 기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소피아 성당은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래서 내부 건축도 이슬람 양식으로 개조되었는데 그 자취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에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20세기에 복원한 것이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걸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면 대통령 궁이 나온다. 대통령 궁 근처에는 국립고고학 박물관이 있는데 청동기시대 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고고학 발굴을 통해 얻은 로마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피아 교외 비토샤 산 밑에는 또 국립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시내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는 달리 널찍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가리아의 최고 명문대학 소피아 국립대학이 있다. 1888년에 설립되었지만 이 대학의 정식 명칭에는 중세 때의 인물인 ‘성클리멘트 오리드스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성 클리멘트 오리드스키’는 오리드의 성클리멘트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보리스 칸 때에 성직자 양성을 맡았던 두 개의 학교 가운데 하나인 오리드 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오리드는 지금은 인접 국가인 마케도니아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불가리아에 속했던 도시로 한 때는 365개의 성당이 있어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도시이다. 오리드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 뿐 아니라 중세 불가리아 시대의 성벽과 성당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는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소피아 대학교는 처음에는 규모가 아주 작아서 일곱 명의 교수와 49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역사문헌학부와 수학물리학부로 출발하여 법학부, 의학부 등이 추가되어 현재는 16개 학부가 있으며 24,000 명 이상의 학생이 여기서 학문을 연마하고 있다.
수도 소피아가 인구가 122만에 달하는 도시라면 불가리아 제2의 도시인 플로브디프는 인구가 34만 정도의 도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소피아에 뒤지지 않는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이다. BCE 4천년의 신석기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이 도시는 트라키아인들의 도시였는데 BCE 6세기 말에는 다리우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어 페르시아의 지배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트라키아인들은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 필리포스 대왕이 이 도시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필리포폴리스’라고 부른 것이다. 플로브디프라는 현재의 이름은 필리포폴리스의 트라키아식 지명인 ‘풀푸데바’에서 왔다.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의하면 이 도시는 필리포스 대왕에 의해 추방된 범죄자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트라키아 인들 마케도니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위에서 실질적으로 이 도시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1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트리몬티움’(세 언덕의 도시)이라고 불리게 된 플로브디프는 트라키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세운 공공건축물들이 즐비한 도시가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구시가지에는 극장, 경기장, 수로 등 다양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로마시대에는 교역도 매우 번창하였는데 노예무역이 번창하여 ‘노예들의 도시’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이다. 많은 고대 유적지들을 가진 유수한 역사의 도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플로브디프는 번영을 구가하는 주요한 상공업 도시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상공업의 번영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유입된 해외자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