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辰韓 유민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부여황실의 딸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부여 황실의 딸이라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신라가 부여에서 나왔다’ 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 주는 획기적인 내용이다.
斯盧始王은 仙桃山聖母之子也라
昔에 有夫餘帝室之女婆蘇가 不夫而孕하니 爲人所疑하야
自嫩水로 逃至東沃沮하고 又泛舟而南下하야
抵至辰韓奈乙村하니
時에 有蘇伐都利者하야 聞之하고 往收養於家러니
而及年十三에 岐嶷夙成하야 有聖德이라
於是에 辰韓六部가 共尊하야 爲居世干하니
立都徐羅伐하고 稱國辰韓이오 亦曰斯盧라.
사로의 첫 임금(박혁거세)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흑룡강성 눈강)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 나정蘿井)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중국 <양서梁書>의 견강부회
종래에는 사대주의 사관의 왜곡날조에 의해 중국 진秦나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인식돼 왔다. 중국의 [양서梁書]<신라기>에 이렇게 나온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 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
신라의 선계는 본래 진한종辰韓種인데, 진秦나라의 유망민이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의 전신前身인 중삼한 중의 진한辰韓을 건설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한은 분명 고조선의 ‘전삼한 중의 진辰韓’ 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전신인 ‘중삼한의 진한’ 을 세운 주체 세력을, 단군조선의 진한 유민이 아니라 중국 진秦나라의 유망민으로 억지 부회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대적 혈통 왜곡
또 [삼국유사]<감통感通>에는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 황실帝室(한漢나라 8세 소제昭帝나 9세 선제宣帝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라고 하였고, 또 사소가 처음 중국에서 진한辰韓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파소와 박혁거세의 혈통을 중국 한漢족 혈통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 유민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 파소와 박혁거세는 부여 황실의 혈통이다. 이러 한 사실은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라고 한 데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삼국사기]<신라본기>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辰韓 유민이다. 중화 한족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다면, ‘진秦나라의 유망민’은, 진시황의 혹독한 동이족 탄압 정책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와 경주 지방에 정착한 유민이라 할 수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동이 조선족인 것이다.
경주 선도산 성모사
경주시 서북쪽에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인에게는 더없이 신성한 산으로 존숭되었다. 선도산 정상 바로 밑,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유적지와 함께 성모의 위패를 모신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0일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드린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6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