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은 신라의 옛 땅
삼성기전 상편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옛 땅은 부여의 옛 도읍이다.
“고두막한이 을미년 한나라 소왕昭王시에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고 나라이름을 동명이라 일컬었는데 이 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삼성기전 상편>”
여기서 부여의 옛 도읍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백악산 아사달이다. 삼신오제본기에 의하면 삼신혹설에 “신新은 백白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 있어 신라는 그 단어의 머리가 백악산白岳山과 일치한다. 백악산이란 광명이 비추는 산을 의미한다. 더불어 신라는 광명이 환히 펼쳐지는 것을 뜻한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삼한의 민중들이 한수 이남으로 몰려든 때가 바로 도적 위만이 번한을 점령하면서부터다. 이 때 본국은 북부여 해모수 사후 모수리 단군 때의 일이다. 이 때로부터 진한의 백성도 또한 점차로 한수 이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들이 모여 새로이 나라를 이룬 것이 곧 남쪽의 진한이다. 이 때 남삼한은 번한의 유장 상장 탁이 세운 중마한의 명령을 따랐다.
다시 말해 남진한의 백성들은 원래 그 중심이 백악산에서 온 이들이다. 진한은 원래 옛 조선의 만주 일대를 가리키니, 고스란히 북부여가 되었고, 이제 그 북부여의 도읍은 백악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백악산 아사달은 신라의 옛 땅이 되니 부여의 옛 도읍지였던 것이다. 신라의 초기 국명이 진한辰韓 또는 사로斯盧다. 그리고 그 땅에서 왕이 된 이는 박혁거세다. 원래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파소다.
박혁거세가 진한辰韓을 개국한 것이 갑자년이니 이 때 나이가 13세였다. 반면에 고구려의 고주몽은 23세 때는 계해년에 개국하였으니 갑자년이면 24세가 된다.
고주몽의 부인은 소서노이니 고무서의 딸이고, 고주몽이 장가든 나이인 22세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겠다. 실제 나이로 보았을 때 박혁거세는 고주몽보다 10살 정도 어리므로 혁거세의 어머니는 소서노의 고모뻘이 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성도산 성모로 잘 알려진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두막 단군의 딸이자 고무서 단군의 여동생이 된다.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거는 고구려국본기에 “파소는 부여 帝室의 딸이었다.”는 기록이다. 이 시기 부여 제실은 곧 동명부여 밖에는 없다.
또한 이를 제외하고도 가장 유력한 심증을 낳게 하는 것은 삼성기상편의 기록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고 국명을 동명이라 일컬었는데, 이곳은 신라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음으로, 이는 동명부여에서 신라가 나왔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신라 건국의 주역은 부여 제실의 딸인 파소다.
대진국본기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안라安羅에는 본래 졸본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은 진한 일대에 라羅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더러 있었음을 뜻한다.
더불어 신시본기에 시라尸羅라는 관경이 보이니 고리국의 곁에는 신라新羅가 있었다.
처음 나라를 칭하여 조선朝鮮이라 하고 혹은 삼한三韓이라고 했는데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경이었다. 신시본기>
위 신시본기에 나열된 나라들은 모두가 한반도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고례를 제외한 조선, 마한, 진한, 번한, 고리, 시라, 옥저, 예맥은 모두가 한반도 안으로 들어온 국명들이다. 지명을 더듬어 보면 옛 고리국의 수도는 지금의 서요하 위에 있는 임황이니 지금의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다.
그리고 주몽 평락 11년 갑오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북옥저는 해성의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동부여는 통하 가섭 연안에 있는 분릉 땅에 있고, 북부여는 웅심산 근처 서란에 있다. 맥貊은 서융과 섞여 살던 동이족을 일컬음이고, 예濊는 원래 구려하 서쪽의 좌원坐原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시라尸羅의 지명이 동요하 동쪽 일대의 땅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시라尸羅가 신라新羅일 가능성은 크지만 역사 속에서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파소婆蘇는 눈수嫩水에서 도망쳐 지금의 함흥인 동옥저에 이르고 다시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奈乙村으로 도망갔으니 이곳이 훗날 신라의 수도가 된 금성金城이다.
혹 반론反論으로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徐羅伐은 북부여의 도읍지였던 서란舒蘭의 벌伐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전북부여前北夫餘의 도읍은 모두가 서란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 외 중론中論으로 나을촌 奈乙村의 나을奈乙이란 단군세기에 판적을 주관하는 이를 那乙이라 하였음으로, 이 나을촌은 나을의 후예들의 촌락으로 진한의 후예가 옳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미 정론으로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중론은 정론에 반하지 않은 것이며, 반론만이 필자의 의견과 배치된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북부여의 역사가 그 만큼 소략되고 멸실됨이 심함이니 존중하고자 하며, 훗날 우리 민족이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내몽골 일대를 모두 되찾았을 때 반드시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돌이켜 보면 파소가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은 그가 삼한을 호령하는 고두막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 힘으로 그의 아들 박혁거세는 남진한왕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곧 신라의 기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