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민족역사2016. 8. 30. 14:16


동명은 신라의 옛 땅

 




삼성기전 상편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옛 땅은 부여의 옛 도읍이다.

고두막한이 을미년 한나라 소왕昭王시에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고 나라이름을 동명이라 일컬었는데 이 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삼성기전 상편>”

 

 

여기서 부여의 옛 도읍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백악산 아사달이다. 삼신오제본기에 의하면 삼신혹설에 은 백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 있어 신라는 그 단어의 머리가 백악산白岳山과 일치한다. 백악산이란 광명이 비추는 산을 의미한다. 더불어 신라는 광명이 환히 펼쳐지는 것을 뜻한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삼한의 민중들이 한수 이남으로 몰려든 때가 바로 도적 위만이 번한을 점령하면서부터다. 이 때 본국은 북부여 해모수 사후 모수리 단군 때의 일이다. 이 때로부터 진한의 백성도 또한 점차로 한수 이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들이 모여 새로이 나라를 이룬 것이 곧 남쪽의 진한이다. 이 때 남삼한은 번한의 유장 상장 탁이 세운 중마한의 명령을 따랐다.

 

다시 말해 남진한의 백성들은 원래 그 중심이 백악산에서 온 이들이다. 진한은 원래 옛 조선의 만주 일대를 가리키니, 고스란히 북부여가 되었고, 이제 그 북부여의 도읍은 백악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백악산 아사달은 신라의 옛 땅이 되니 부여의 옛 도읍지였던 것이다. 신라의 초기 국명이 진한辰韓 또는 사로斯盧. 그리고 그 땅에서 왕이 된 이는 박혁거세다. 원래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파소다.

 

박혁거세가 진한辰韓을 개국한 것이 갑자년이니 이 때 나이가 13세였다. 반면에 고구려의 고주몽은 23세 때는 계해년에 개국하였으니 갑자년이면 24세가 된다.

고주몽의 부인은 소서노이니 고무서의 딸이고, 고주몽이 장가든 나이인 22세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겠다. 실제 나이로 보았을 때 박혁거세는 고주몽보다 10살 정도 어리므로 혁거세의 어머니는 소서노의 고모뻘이 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성도산 성모로 잘 알려진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두막 단군의 딸이자 고무서 단군의 여동생이 된다.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거는 고구려국본기에 파소는 부여 帝室의 딸이었다.”는 기록이다. 이 시기 부여 제실은 곧 동명부여 밖에는 없다.

 

또한 이를 제외하고도 가장 유력한 심증을 낳게 하는 것은 삼성기상편의 기록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고 국명을 동명이라 일컬었는데, 이곳은 신라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음으로, 이는 동명부여에서 신라가 나왔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신라 건국의 주역은 부여 제실의 딸인 파소다.

대진국본기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안라安羅에는 본래 졸본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은 진한 일대에 라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더러 있었음을 뜻한다.

 

더불어 신시본기에 시라尸羅라는 관경이 보이니 고리국의 곁에는 신라新羅가 있었다.

처음 나라를 칭하여 조선朝鮮이라 하고 혹은 삼한三韓이라고 했는데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와 맥이 모두 그 관경이었다. 신시본기>

위 신시본기에 나열된 나라들은 모두가 한반도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고례를 제외한 조선, 마한, 진한, 번한, 고리, 시라, 옥저, 예맥은 모두가 한반도 안으로 들어온 국명들이다. 지명을 더듬어 보면 옛 고리국의 수도는 지금의 서요하 위에 있는 임황이니 지금의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

그리고 주몽 평락 11년 갑오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북옥저는 해성의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동부여는 통하 가섭 연안에 있는 분릉 땅에 있고, 북부여는 웅심산 근처 서란에 있다. 은 서융과 섞여 살던 동이족을 일컬음이고, 는 원래 구려하 서쪽의 좌원坐原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시라尸羅의 지명이 동요하 동쪽 일대의 땅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시라尸羅가 신라新羅일 가능성은 크지만 역사 속에서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파소婆蘇는 눈수嫩水에서 도망쳐 지금의 함흥인 동옥저에 이르고 다시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奈乙村으로 도망갔으니 이곳이 훗날 신라의 수도가 된 금성金城이다.

혹 반론反論으로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徐羅伐은 북부여의 도읍지였던 서란舒蘭의 벌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전북부여前北夫餘의 도읍은 모두가 서란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 외 중론中論으로 나을촌 奈乙村의 나을奈乙이란 단군세기에 판적을 주관하는 이를 那乙이라 하였음으로, 이 나을촌은 나을의 후예들의 촌락으로 진한의 후예가 옳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미 정론으로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중론은 정론에 반하지 않은 것이며, 반론만이 필자의 의견과 배치된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북부여의 역사가 그 만큼 소략되고 멸실됨이 심함이니 존중하고자 하며, 훗날 우리 민족이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내몽골 일대를 모두 되찾았을 때 반드시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돌이켜 보면 파소가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은 그가 삼한을 호령하는 고두막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 힘으로 그의 아들 박혁거세는 남진한왕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곧 신라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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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민족역사2016. 8. 28. 18:08


신라건국 과정에서의 삼국유사의 왜곡




<삼국유사>의 사대적 혈통 왜곡

 

[삼국유사]<감통感通>에는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 황실帝室(나라 8세 소제昭帝9세 선제宣帝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라고 하였고, 또 사소가 처음 중국에서 진한辰韓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파소와 박혁거세의 혈통을 중국 한족 혈통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 유민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 파소와 박혁거세는 부여 황실의 혈통이다. 이러 한 사실은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라고 한 데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삼국사기]<신라본기>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그러므로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辰韓 유민이다. 중화 한족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다면, ‘나라의 유망민, 진시황의 혹독한 동이족 탄압 정책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와 경주 지방에 정착한 유민이라 할 수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동이 조선족인 것이다.

 

경주시 서북쪽에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인에게는 더없이 신성한 산으로 존숭되었다. 선도산 정상 바로 밑,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유적지와 함께 성모의 위패를 모신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310일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드린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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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민족역사2016. 8. 26. 17:06



신라의 건국과정의 오해



중국 <양서梁書>의 견강부회

종래에는 사대주의 사관의 왜곡날조에 의해 중국 진나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인식돼 왔다. 중국의 [양서梁書]<신라기>에 이렇게 나온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 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

 


신라의 선계는 본래 진한종辰韓種인데, 나라의 유망민이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의 전신前身인 중삼한 중의 진한辰韓을 건설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한은 분명 고조선의 전삼한 중의 진辰韓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전신인 중삼한의 진한을 세운 주체 세력을, 단군조선의 진한 유민이 아니라 중국 진나라의 유망민으로 억지 부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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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민족역사2016. 8. 23. 13:41




북삼한(전삼한)이 내려와 남삼한(후삼한)되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삼한은 소한사관(남삼한)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은 이렇습니다. 한강 이남의 소국가 연맹체인 삼한. 그러니까 가야, 신라, 백제의 전신으로서 마한, 진한, 변한을 우리는 삼한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삼한에 대한 엄청난 오해입니다. 바로 이 오해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축소시키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태껏 배워온 역사가 공간적으로는 한반도로, 시간적으로는 기원전 10세기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삼한에 대한 잘못된 관념 때문입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축소된 역사를 `소한小韓주의 반도사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단군조선의 삼한시대 (대한사관,북삼한)


이러한 삼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대한大韓주의 대륙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평생을 다바친 위대한 역사학자가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입니다. 단재는 직접 맨몸으로 만주를 누비며 한반도의 남쪽 삼한 시대 이전에 만주, 요서, 한반도에 걸쳐 광대하게 뻗어 있었던 단군조선의 삼한시대가 실재했음을 입증했습니다.[조선상고사, 신채호]



삼한의 유민들이 이주하여 재건한 남삼한

고조선이 망한 후 이 본래의 삼한의 유민들이 한반도 이남으로 이주하여 소규모로 재건한 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삼한입니다. 또한 단재는 고조선의 대륙 삼한을 `북삼한`으로 그 이후 반도 삼한을 `남삼한`으로 확연하게 구분지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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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민족역사2016. 8. 22. 13:39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辰韓 유민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부여황실의 딸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부여 황실의 딸이라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신라가 부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 주는 획기적인 내용이다.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有夫餘帝室之女婆蘇不夫而孕하니 爲人所疑하야

自嫩水逃至東沃沮하고 又泛舟而南下하야

抵至辰韓奈乙村하니

有蘇伐都利者하야 聞之하고 往收養於家러니

而及年十三岐嶷夙成하야 有聖德이라

於是辰韓六部共尊하야 爲居世干하니

立都徐羅伐하고 稱國辰韓이오 亦曰斯盧.


사로의 첫 임금(박혁거세)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흑룡강성 눈강)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주 나정蘿井)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중국 <양서梁書>의 견강부회


종래에는 사대주의 사관의 왜곡날조에 의해 중국 진나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인식돼 왔다. 중국의 [양서梁書]<신라기>에 이렇게 나온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 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

 

신라의 선계는 본래 진한종辰韓種인데, 나라의 유망민이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의 전신前身인 중삼한 중의 진한辰韓을 건설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한은 분명 고조선의 전삼한 중의 진辰韓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전신인 중삼한의 진한을 세운 주체 세력을, 단군조선의 진한 유민이 아니라 중국 진나라의 유망민으로 억지 부회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대적 혈통 왜곡

 

[삼국유사]<감통感通>에는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 황실帝室(나라 8세 소제昭帝9세 선제宣帝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라고 하였고, 또 사소가 처음 중국에서 진한辰韓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파소와 박혁거세의 혈통을 중국 한족 혈통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 유민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 파소와 박혁거세는 부여 황실의 혈통이다. 이러 한 사실은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라고 한 데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삼국사기]<신라본기>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그러므로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辰韓 유민이다. 중화 한족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다면, ‘나라의 유망민, 진시황의 혹독한 동이족 탄압 정책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와 경주 지방에 정착한 유민이라 할 수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동이 조선족인 것이다.


경주 선도산 성모사


경주시 서북쪽에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인에게는 더없이 신성한 산으로 존숭되었다. 선도산 정상 바로 밑,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유적지와 함께 성모의 위패를 모신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310일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드린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634>

Posted by 천연감성
우리 한민족역사2016. 8. 21. 13:37

광개토 대왕비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다




 

광개토 대왕비와 모두루비는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모두루 묘지는 광개토왕(廣開土王) 때의 북부여 수사(守事)인 모두루의 묘지(墓誌). 193510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서 발견되었다. 광개토대왕비와 모두루 비에 모두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왔음(出自)을 밝히고 있다.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의 아들이며.. (광개토대왕비) “하박(河泊)의 손자(孫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鄒牟) 성왕(聖王)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알지니...”(모두루 묘비)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가 개창되었다. 해모수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인 고리국 출신으로 단기 2095년에 웅심산에서 기두하였다(삼성기 상, 북부여기)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47세 고열가 단군의 빈자리를대신하여 오가 부족장의 6년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해모수를 단순으로 추대함으로써 북부여 역사가 시작되었다 (BCE 232)

 

북부여는 ()고구려라고도 불렸다.


고구려는 해모수께서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세기)

고구려의 본래 이름은 고리’,‘구려이다 [삼성기]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해모수를 시조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해모수가 태어난 곳이 서압록의 고리이므로 후에 북부여를 고구려라고도 불렀는데 주몽이 그 이름을 계승하여 고구려라 한 것이다. 고구려는 해모수의 북부여(원고구려)와 주몽의 고구려(본 고구려), 대중상의 대진국까지 합쳐서 1165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후에 왕건이 고구려의 맥을 계승하여 고려라 하였으니 고구려(고리,구려,고려)의 정신은 1631(BCE 239~ CE 1392)을 이어온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우리 한민족역사2016. 8. 20. 12:35




북부여의 건국




대단군의 통치권이 약화되고 부단군과 지방 군장들의 목소리가 커지던 고조선 말기에 한민족의 새 역사를 개창한 분이 바로 북부여의 건국 시조 해모수이다.

그는 요하 상류에 위치한 고조선의 제후국, 고리국 출신으로 BCE 239년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에서 기두하였다. 그 후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당시 고열가단군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오가五加 부족장들의 공화정을 철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그를 단군으로 추대하여, 북부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BCE 232)

 


북부여북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제3왕조 시대인 대부여의 북녘 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열었기 때문에, ‘자를 자로 바꾸어 북부여라 정하였다. 그것은 망해가던 대부여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해모수단군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북부여의 구국 영웅, 고두막한


북부여는 4세 단군에 이르러 역사적인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BCE 109, 한무제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만조선으로 쳐들어왔다. 한나라는 초기에 연신 패하였으나 이간책으로 위만정권 지도층을 분열시켜 결국 우거를 죽이고 왕검성을 점령하였다(BCE 108). 이때 한무제는 새로운 점령지에 한나라의 군현(漢四郡)’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고조선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그쳐야 했다.

위만정권을 무너뜨린 한무제는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해 왔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세 고우루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이를 지켜보던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였다. 그러고는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어(BCE108)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하였다.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자칫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한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동명왕은 구국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의 5세 단군으로 즉위하였다(BCE 86).

원래 북부여의 4세 단군을 계승하여 잠시 보위에 있었던 해부루는 동쪽의 차릉(가섭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이로써 부여는 동서로 나뉘게 되고 후기 북부여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두막한의 등장으로 전기 북부여 시대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북부여는 고두막한의 다음 대에 이르러 180(BCE 230~ BCE 58)의 짧은 역사를 끝내게 된다.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핵심 요체이다. 그런데 강단 사학자들은 위만정권을 고조선의 계승자로 앉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로 설정하였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 하여, 해모수와 주몽을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다. 206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왜 북부여사는 이렇게 난도질되었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한무제가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것에서 비롯된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졌으며,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결과이다.

 

<후한서>, <삼국지> 등의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부여사는 모두 서부여의 역사이다. 서부여는 동부여가 망한 후 [삼국지] <동이전>에 나와 있는 울구태, 간위거, 마여, 으려 등은 모두 서부여의 왕이다. 이러하건만 강단사학계에서 나오는 책과 논문들은 서부여를 부여의 원래 모습인 양 그리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부여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는 중국 사서의 기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부여의 원형이 처참히 파괴도면서 한국사의 허리가 잘려 버렸다. 한국사의 국통 맥이 어지러워지고 뿌리 역사가 소멸되었다. 북부여라는 잃어버린 고리가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에 제대로 연결되는 그 날이 바로 동방 배달민족사의 9천 년 국통 맥이 온전하게 똑 바로 서는 역사 광복의 날이 될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