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7. 20. 02:30

 

 

 재미있는 한자

武陵桃源무릉도원

 

 

 

 

금주의 한자 武陵桃源무릉도원에서,

 

‘武무’는 ‘文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병기와 전쟁에 관한 일을 가리킨다. 이 글자를 보통 ‘호반 무’ 자로 훈을 하는데, ‘호반虎班’이란 무관의 반열을 말한다. ‘범 호虎’ 자는 ‘용맹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무인武人’을 가리킨다. 옛날에 임금이 조회朝會할 때 관원들은 문관과 무관이 각기 동서 두 열로 나뉘었는데 이것을 양반兩班이라고 부른다. 즉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인 양반이라는 말은 원래 이 문무관원을 가리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武器무기’, ‘武人무인’, ‘武士무사’, ‘武藝무예’란 말에 이 ‘호반 무武’ 자가 들어 있다.

 

‘陵릉’은 ‘높은 언덕’을 말한다. ‘陵谷之變능곡지변’이란 말이 있는데, ‘골짜기 곡谷’, 구조조사 ‘지之’, ‘변할 변變’ 자로 구성된 이 말은 ‘언덕과 골짜기의 변화’, 즉 높은 언덕이 깊은 골짜기로 바뀌고 깊은 골짜기가 높은 언덕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심하게 바뀌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桃도’는 ‘복숭아나무’를 말한다. ‘꽃 화花’ 자를 붙인 ‘桃花도화’는 ‘복숭아꽃’을 말한다. ‘하늘 천天’ 자를 쓰는 ‘天桃천도 복숭아’는 하늘나라에서 나는 복숭아를 말하고, ‘누를 황黃’ 자를 쓰는 ‘黃桃황도’는 속살이 노란 복숭아를, ‘흰 백白’ 자를 쓰는 ‘白桃백도’는 흰 복숭아를 말한다.

 

‘源원’은 ‘물의 근원’ 즉 물의 흐름이 처음 시작되는 곳을 말하는데, 원래는 ‘삼수변’이 없는 ‘原원’자를 쓰다가 물을 강조하기 위해 ‘삼수변’을 덧붙였다. ‘물 수水’ 자를 붙여 ‘水源수원’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경기도 수원시는 ‘삼수변’이 없는 ‘水原수원’을 쓴다.

 

그래서 ‘무릉도원’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 혹은 이상 속의 아름다운 곳을 비유할 때 쓰인다. ‘桃源境도원경’ 또는 ‘武陵源무릉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릉도원’은 ‘무릉의 도원’이라는 뜻인데, ‘무릉’은 지금의 호남성 상덕시常德市 부근에 있던 군郡 이름이며, ‘도원’은 ‘도화원桃花源’의 줄임말로서 도연명陶淵明의 명문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복숭아꽃 숲이 수원에서 끝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도화원은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곳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상향을 가리키기도 하며, 지금의 호남성 도원현 서남쪽의 도원산 아래에 도원 또는 도원동桃源洞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도연명이 기록한 도화원의 유적지라고 한다.

 

이 말은 또 ‘세상 밖의 도원’이라는 뜻으로 ‘世外桃源세외도원’이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중국 동진東晉 때의 대문학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에서 나왔다.

 

도연명(365-427)은 이름이 잠潛, 자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이며, 집 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호를 ‘다섯 오五’, ‘버들 류柳’ 자를 써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했다. 벼슬이 팽택령彭澤令에 이르렀을 때 봉급인 오두미五斗米 즉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히길 원치 않아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갔는데, 이 때 그의 심경을 읊은 글이 바로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농촌에 간 후 그는 직접 밭갈이를 하고, 시와 술을 즐겼다. 그의 시는 진솔하고 자연스러우며 대부분 산수와 전원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또 그가 지은 산문이나 사부詞賦 등도 질박하고 유창하다. 죽은 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으며, 후세 시인들의 창작에 매우 큰 영향을 줬던 인물이다.

 

도연명은 57세 때 〈도화원기〉라는 유명한 글을 한 편 썼는데, ‘기記’는 문체의 한 종류로서 사물을 서술한 문장을 이른다. 원래는 〈도화원시〉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에 있어 이 시의 서문에 해당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호남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겪은 기이한 일을 적고 있다.

 

 

 

태원太元(376-396) 연간에 있었던 일이

다.

 

어느 날 어부가 나룻배를 타고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갑자기 시내의 양쪽 푸르른 풀밭 옆에 다른 나무들은 일절 없고 복숭아나무들로만 꽉 찬 수백 보 넓이의 숲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향내 나는 꽃들은 곱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꽃들이 분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어부는, 계속 배를 저어 이 숲의 끝까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숭아꽃 숲은 물이 처음 흘러나오는 곳에서 끝났는데, 좀 더 들어가니 얼마 가지 않아 앞에 산이 나왔고 산허리에 작은 동굴 입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동굴 입구는 마치 빛이 있는 듯 보였는데, 어부는 호기심이 생겨나 배에서 내려 동굴로 올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부가 막 동굴 입구로 들어서니 안이 너무 어둡고 좁아서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였지만, 다시 수십 걸음을 걸었더니 길이 갑자기 확 넓어지면서 밝아졌다.

 

그곳은 땅이 평평하고 넓었으며, 한 줄 한 줄 집들이 매우 가지런히 배열돼 있고 비옥한 들판과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많은 뽕나무와 대나무가 있었다. 밭 사이의 길은 동서남북으로 나 있어 사통팔달하였고 닭울음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판에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경작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고 남자와 여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바깥사람들과 같았으며, 노인과 아이들은 매우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 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어부를 발견하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어부는 하나하나 상세하게 그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어부를 자기 집으로 가자고 청해서 술을 내오고 닭을 잡아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달려와서 바깥소식을 물었다. 아울러 자기네 조상이 진秦 나라 때의 전란을 피하기 위해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이 외부와 단절된 곳으로 왔으며 그 후로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아 마침내 바깥사람들과 왕래가 끊어졌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어부에게 지금이 어느 왕조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시기가 비교적 먼, 삼국시대 조조曹操(155-220)의 아들 조비曹丕(187-226)가 세운 위魏 나라와 사마염司馬炎(236-290)이 세운 진晉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시기가 가까운 유방劉邦(서기전 221-서기전 189)이 세운 한漢 나라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어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음을 말해줬더니 그들은 모두 매우 놀라며 탄식했다.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모두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며칠 후에 어부는 서운해 하면서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 마을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곳 상황을 외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소이다.”

 

어부는 그곳을 나와서 자신의 배를 찾아 타고서 왔던 길을 따라 돌아오며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무릉군의 집으로 돌아온 어부는 태수를 알현하여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알렸다. 어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태수가 즉시 사람을 보내 어부를 따라서 그곳을 찾아가게 했지만, 전에 해 놓은 표시를 찾다가 그만 방향을 잃어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남 남양군南陽郡에 사는 유자기劉子驥(이름은 인지驎之, 자는 자기子驥)라는 고상한 명사가 있었는데 이 일을 전해 듣고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찾아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실행을 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일도 있었다. 그 이후로 마침내 이 도화원을 찾는 길을 묻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데, 도연명은 여기서 인간이 갈 수 없는 이상향인 무릉도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Utopia)도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단어】

 

武무: 무인. /止(그칠지)부, 총8획, wǔ/

 

陵릉: 언덕. /(좌부변)부, 11획, líng/

 

桃도: 복숭아나무. /木(나무목)부, 총10획, táo/

 

源원: 근원. /(삼수변)부, 총13획, yuán/

 

 

 

【출전】

 

晉太元中, 武陵人, 捕魚爲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逢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美, 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林盡水源, 便得一山. 山有小口, 髣髴若有光, 便捨船, 從口入.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美池竹之屬, 阡陌交通, 雞犬相聞.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黃髮垂髫, 並怡然自樂.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雞作食.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訊. 自云, “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來此絶境, 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問今是何世, 乃不知有漢, 無論魏晉. 此人一一爲具言所聞, 皆歎惋.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後遂無問津者.

 

- 도연명陶淵明, 〈도화원기桃花源記〉.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