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에 해당되는 글 116건

  1. 2018.01.18 사회철학(Social Philosophy)
  2. 2018.01.17 인류의 정의사회구현은 가능한 것인가 롤스의 정의관
  3. 2018.01.16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분석한 마르크스
  4. 2018.01.09 실증주의 선구자 프랑스 철학자 꽁트
  5. 2018.01.08 비엔나 학단의 논리적 실증주의
  6. 2017.12.30 일상 언어학파의 대표자 비트겐슈타인
  7. 2017.12.29 논리적 원자론을 제창한 러셀
  8. 2017.12.28 분석철학의 효시라 불리는 영국철학자 조지무어
  9. 2017.12.20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에 응답하는 철학자
  10. 2017.12.19 마틴 하이데거의 무(無)를 꿰뚫어가는 탈존자(脫存者)
  11. 2017.12.18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의 실존론적 분석
  12. 2017.12.17 변종 존재론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
  13. 2017.12.01 현상학(Phänomenologie)을 완성한 막스 셀러
  14. 2017.11.30 본질을 알기위해서는 현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철학자 후설
  15. 2017.11.29 본질보다 실존을 우선시한 철학자 사르트르
  16. 2017.11.22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
  17. 2017.11.21 니체의 실존철학(Existential Philosophy)
  18. 2017.11.19 서구의 몰락을 예견한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19. 2017.11.18 해석학의 선구자 빌헬름 딜타이
  20. 2017.11.17 삶의 근원을 우주적으로 파악한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
  21. 2017.11.16 생의 약동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22. 2017.11.15 세기의 기업 경영인 잭 웰치Jack Welch
  23. 2017.11.14 20세기의 전설적인 주식투자가 워렌 버핏Warren Buffett
  24. 2017.11.07 조선조말 천주교유입에 대한 우려
  25. 2017.11.04 최수운의 시대 조선조 말의 내우외환內憂外患
  26. 2017.10.16 TED강의 다이애나 윈스턴의 명상의 과학
  27. 2017.10.13 막달라 마리아의 전설과 다빈치코드
  28. 2017.10.09 나라의 가장 큰 명절 개천절開天節
  29. 2017.10.09 개천절은 왜 10월3일인가
  30. 2017.09.30 TED강의 스트레스가 당신의 뇌에 미치는 영향
잡학2018. 1. 18. 03:00






 

 

사회철학(Social Philosophy)

 

 

 



 

1997년대에 우리는 IMF 관리체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사회 각 부분의 구조조정으로 말미암아 직장인들이 일터에서 쫓겨나야 하는 수난을 겪은 바 있다. 최근에는 일터로 뛰어들어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젊은 청년들이 직업난으로 말미암아 또 한 번 고충을 겪고 있다. 외연을 확장해 보면 지구촌에는 인종갈등, 이념의 대립, 산업화에 따른 기술과 무역경쟁 등으로 말미암아 전란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배후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와 공정하지 못한 생업활동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의 분과는 사회철학의 범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역사를 조망해볼 때 사회철학의 발단은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을 밝혀, 줄기차게 실현하려고 노력해온 한 가지 주제에서 시작한다. 그 주제는 바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궁극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정의로운 인간, 정의로운 사회 혹은 정의로운 국가 건설에서 보는 “정의”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어떻게 하면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규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에 충족되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인간 삶의 생존권 보장, 다양한 인간에게서 표출되는 적절한 욕구충족, 각자에게 부여되는 자아실현의 기회를 보장받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을 본질적이고도 통합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경제적 가치의 공정한 분배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면 누구나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욕구와 각자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물질적 가치가 기본적으로 확보되어야 하고, 이를 근간으로 해서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얘기다.

 

경제의 물질적 가치에 대한 분배문제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한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정책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대표적인 학자는 사회철학자이자 고전경제학자로 불리는 스미스Adam Smith(1723~1790)이다. 그는 1776년에 출간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최초로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했다. 자유시장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인은 각자 사익을 추구하고, 자원 또한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이로부터 사회전체 또한 생산성이 높아져 이익이 증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 사회정책은 결국 ‘가난한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자본가는 더욱 부자가 되는’[貧益貧 富益富] 기형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극단적으로 반대적인 평등주의 사회정책이 출현하게 된다.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사회정책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정책도 결국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최근에는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수정자유주의 사회정책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롤즈John Rawls(1921~2002)이다. 그는 1971년에 출간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빈부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소득 재분배 정책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여러 국가에서 검토되고 있는 편이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사회철학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산업사회에서 노동의 문제와 물질적인 재화의 재분배 문제로 집약된다. 사유재산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노동과 관련된 허점을 날카롭게 파헤치면서 마르크스K. Marx(1818~1883)는 “소외疏外”(Entfremdung)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재화의 분배문제를 다룬 롤스는 『정의론』에서 어떻게 하면 공정한 재분배가 실현될 수 있는가를 제기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17. 02:00




 

 

인류의 정의사회구현은 가능한 것인가

존 롤스의 의관

 

 

 


어떻게 하면 정의로운 사회(국가)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일찍이 세심하게 분석한 최초의 인물이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다. 그는 『국가론』(Politeia)에서 ‘누가 정의로운 사람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성의 분별력이 달리는 사람은 ‘정의’를 알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정의를 쉽게 알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플라톤은 우선 덩치가 커서 식별하기 쉬운 정의로운 국가를 논리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생산자 계급, 무사 계급, 통치자 계급이 맡은 바 업무를 질서 있고 통일적인 조화로서 수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롤스의 정의관은 플라톤의 입장과 다르다. 롤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정의가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실질적인 기회평등을 보장하여 각자가 최선의 자아실현을 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본 것이다. 그러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의 기본구조가 공정한 원칙에 입각해서 짜여져야 하고, 다음으로는 모든 제도가 공정한 원칙에 따라서 정립돼야 한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는 학자는 사회의 기본구조를 위한 규범을 밝힐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여야 한다. 정의의 원칙이란 규범체계에 있어서 직위와 직책이 규정되고, 그에 대한 책임과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방식으로 여러 제한사항을 정식화하는 것이다.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은 인간의 삶에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보지 않고, 인간이 주체적으로 구성해야 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사회의 기본구조에 대한 정의사회의 원칙은 원초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합의로부터 나온다. 즉 정의사회의 원칙은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대표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입장에서 공정하고 타당성이 있는 공동체의 기본조건을 규정하기 위해 채택하는 원칙들이다. 사회정의의 원칙은 두 측면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 그것이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시민의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의 기본적인 자유란 요컨대 정치적 자유(선거권과 피선거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사유재산 및 신체의 자유, 그리고 법의 테두리로 규정되어 있는 바 부당한 체포 및 구금을 당하지 않을 자유 등이다. 정의로운 사회의 시민들은 누구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둘째, ‘차등의 원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사회적 내지 경제적 불평들을 규정하는 체계를 말하는데, 소득 및 재산의 분배와 권한, 책임과 명령계통 등에서 차등을 두는 규정이다. 롤스는 첫 번째의 기본적인 자유에 관한 평등의 원칙을 설정하였지만,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분배문제에 있어서는 차등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의 차등은 직위와 직책상의 차별이 아니라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결부되는 특권이나 부, 혹은 과세에 대한 부담, 강제적 봉사 등의 이득과 부담을 달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등이 적용됨으로써 사회적 경제적 배분에 있어서 더 많은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차등의 원칙’은 다시 “기회균등의 원칙”과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으로 세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기회균등의 원칙’은 일률적인 분배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에게 공정한 게임이 되도록 정당한 경쟁조건을 마련하여 실질적인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특수한 이익을 가져오는 직책에 오르는 것을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실행될 수 있도록 한다든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함에 있어서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불평등이 초래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의한 것이므로 문제될 것은 없다.

 

다음으로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은 사회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하고, 이들의 처지가 개선될 수 있도록 실제적인 기회균등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원칙에 근거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개선하기 힘든 빈민이나 실업자, 노령이나 장애인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역차별적(逆差別的)인 분배를 실시할 수 있게 된다. 역차별적 분배란 이들에게 무상교육이라든가, 각종 연금을 통한 생계유지라든가, 최대한의 의료보장 등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정의의 원칙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런 원칙들이 요구하는 것 간에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느냐이다. 이에 대해서 롤스는 충돌을 해결하기에 필요한 우선순위의 규칙을 마련한다.

 

첫 번째의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두 번째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분배에 있어서 ‘차등의 원칙’에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이는 부와 소득의 분배 및 권력의 계층화는 반드시 동등한 시민권의 자유와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한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정의사회 구현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유는 사회적 경제적 이익과 교환될 수 없다는 얘기다. 두 번째의 ‘차등의 원칙’은 효율성이나 이익의 극대화를 동반하는 어떠한 원칙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또한 ‘차등의 원칙’에서 ‘기회 균등의 원칙’은 ‘최소 수혜자 최대이익의 원칙’에 우선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롤스의 정의론은 평등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 모두가 행복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를 토대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을 비롯하여 불공정한 사회문제들이 우후죽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여 수정자유주의를 옹호하게 됐던 것이다. 특히 사회구성원의 기본적인 자유가 평등하게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게 되고, 국가의 업무란 누진세, 상속세, 직접세를 늘려 경제적 자본을 확보하여 이를 사회구성원들의 복리증진에 힘쓰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정한 정의사회구현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 롤스의 입장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16. 00:00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분석한

마르크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소비의 만능시대다. 자본가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상품을 창출하여 소비자의 구매를 유혹하고 있고,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소비자는 원하는 대로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기호 가치를 표현하면서 자유를 누린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상품들은 소비자에게 자아실현의 물질적 조건으로 여겨지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상품소비의 자유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에게만 허용된다. 그런 물질적 조건을 충족함으로써 자아실현의 추구라고 믿는 소비자는 결국 시장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돈이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자아실현의 물질적 조건이 되는 금전의 사익추구는 인간본연의 의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이기심과 탐욕을 더욱 부추기게 되고, 이기심과 탐욕에 물든 인간은 순수한 사랑, 고귀한 명예심, 꺼림칙한 마음을 일으키는 양심, 지극히 존귀한 사람의 가치조차도 오직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된다.



자본가는 경제주의 입장에 충실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 인정사정을 두지 않으며, 이윤 증식을 위해서는 무엇이 바람직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지 않고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한다. 반면에 무한한 물질적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한다고 믿는 소비자는 돈벌이에 동분서주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간의 “소외”(疏外)라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소외”란 어떤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소원(疏遠)해진 것을 일컫는다. 인간의 소외란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의 소외에 대해 헤겔G. W. Hegel(1770~1831)은 대자태(對自態)인 자연으로 외화(外化)된 의식을 말했고, 포이에르바흐L. Feuerbach(1804~1872)는 소외를 종교(宗敎)에서 찾았으며, 프롬E. Fromm(1900~1980)은 인간의 우상숭배에서 소외를 언급했고, 마르크스K. Marx(1813~1883)는 노동자가 겪는 산업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소외를 통찰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9. 01:00







 

증주의 선구자

프랑스 철학자 꽁

 




실증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출신 꽁트Auguste Comte(1798~1857)는 경험될 수 있는 실증적인 사실들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하려 했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단숨에 거부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형이상학적인 주제가 사변적이거나 초경험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에, 인식론적으로 전혀 무의미하여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음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정의적인”(emotive) 명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들에 의하면, 언어로 표현되는 진술이 의미가 있으려면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명제여야 하는데, 이러한 명제는 자연과학에서 추구하는 ‘종합명제’(綜合命題)와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다루는 ‘분석명제’(分析命題)뿐이다. 이외의 다른 명제들은 형이상학적인 명제이거나 단순한 정의적인 감정표현에 불과하므로 모두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진술이라는 얘기다.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종합명제와 의미 있는 분석명제이다. “철수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진술은 종합명제의 예이다. 이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철수가 과연 청바지를 입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다. 분석명제는 그 진술에 사용된 개념의 정의(definition)에 의해서 타당성이 증명될 수 있다.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진 다각형이다”는 진술이 그 예이다. 이 진술의 진위 여부는 ‘삼’, ‘선분’, ‘다각’의 개념 정의로 인식되는 명제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종합명제도 아니고 분석명제도 아닌 명제란 인식론적으로 무의미한 사이비 진술들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저 여자는 정말 아름답다”와 같은 미학적 진술, “저 여자는 참으로 착하다”와 같은 윤리적 진술, “전지전능한 신은 인류에게 전적으로 자애롭다”와 같은 종교적 진술 등은 모두 그 타당성이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주장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의미 있는 진술은 오직 자연과학의 언어들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이 밝혀야 할 탐구주제는 오직 과학적 언어의 용법에 나타나는 개념을 분석하여 명료하게 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논리실증주의는 철학이란 단지 과학의 논리학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카르납은 “과학의 명제 이외에 철학만의 고유한 명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탐구한다는 것은 과학의 개념 및 명제를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명확하게 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한 도구가 새로운 기호 논리학이다.”(『Erkenntnis』)라고 주장한다.

 

논리실증주의의 두 번째 작업은 검증의 원리(the verification principle)를 확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진술을 안다는 것은 그 진술이 참이 될 조건과 거짓된 조건을 아는 것이며, 그것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약은 달콤하지만 생명을 죽이는 독약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이를 검증해보면 된다는 것이다. 검증은 바로 경험을 통한 실험 관찰이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진술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검증할 방법이 없다. 경험으로 검증될 수 없는 이러한 명제는 언제 참이고 언제 거짓이 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명제는 분석해보면 ‘신’과 ‘존재한다’라는 단순한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논리실증주가 제시하는 의미 있는 진술과 무의미한 진술의 구분,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실험 관찰을 통한 검증원리는 후대의 사상과 학문적 탐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오늘날 철학적 활동에 있어서 검증될 수 없는 주장이란 무의미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는데, 이는 바로 논리실증주의 사고방식에 기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8. 20:38




 

 

비엔나 학단의

논리적 실증주의

 

 

 



금세기에 내적으로 단단하게 짜여진 하나의 학파를 이루어 철학적 운동을 새롭게 전개한 단체가 있다. 바로 비엔나 학단의 논리적 실증주의가 그것이다. 이 단체는 1929년 비엔나에서 『과학적 세계관』(Wissenschaftliche Weltanschauung)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일군의 철학자들이 동참하면서 논리적 실증주의가 출범하게 된다. 자칭 비엔나 학단이라 칭하는 이 단체는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프레게와 러셀의 논리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그 학단의 중심에는 세미나를 주재해가던 저명한 학자 슐리크Moritz Schulick(1882~1936)가 있었다. 슐리크는 독일에서 출생하여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귀납적 과학철학의 교수로 활동한 인물이다.

 


비엔나 학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학자는 카르납Rudolf Carnap(1891~1970)이다. 이 학단은 1930년부터 『인식』(Erkenntnis)이라는 정기간행물을 기관지로 삼고 있었지만, 그 간행물은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히틀러 정권 치하로 병합되면서 중단되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비엔나 학파의 저명인사들은 각국으로 흩어져서 활동하게 된다. 카르납은 1931년부터 프라하에 정착하여 그곳의 독일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난경에 처하자 1935년에 유럽을 떠나 미국 시카고로 이주하여 교수생활을 새로 시작하였다. 1954년 이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생을 마감했다.

 

비엔나 학단을 중심으로 활동한 논리실증주의의 철학적 주요 업무는 어떤 웅장한 이론체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진술되는 사상의 의미를 보다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하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 언어라는 것은 다의적이어서 애매하게 표현되어 사유에 많은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 실증주의는 이런 애매한 언어로 표현된 철학적 명제를 논리적으로 정밀한 언어로 환원함으로써 명제의 논리적 구조를 명확하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논리실증주의의 첫 번째 작업은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일언지하에 폐기처분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 우주의 존재 목적, 절대적인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 등 초감성적인 영역을 탐구대상으로 삼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30. 02:00






 

 

 

일상 언어학파의 대표자

비트겐슈타인

 

 

 




1889년 4월 오스트리아 수도인 비엔나(Wien)의 명문가에서 언어분석철학의 천재가 탄생했다.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2년 동안 베를린에서 기계공학도 공부했다. 그는 1908년에 항공공학 연구소에 잠깐 있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Manchester)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에 엄청나게 어려운 러셀의 『수학의 원리』(1903)를 읽고서 감명을 받아 1911년에 공학을 포기하고 러셀이 교수로 재임하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에 들어갔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운명적인 만남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 러셀은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배우는 학생의 신분이었다. 고대 아테네시대에 플라톤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소크라테스를 운명적으로 만나 제자가 되었듯이, 러셀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적 모험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이라고 극찬할 만큼, 철학의 천재를 제자로 삼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가르쳐야 할 모든 것을 금방 알아버렸다”고 러셀이 술회했을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천재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수제자로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독일로 건너가 예나(Jena) 대학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그는 수학자이며 논리학자였던 프레게F. L. G. Frege(1848~1925)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프레게는 명제논리와 술어논리의 기호화 및 공리화를 이룩하여 근대 수리철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조국인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였고, 이탈리아 군의 포로로 수감되었을 때 그 유명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를 저술하여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자신은 더 이상 분석철학을 할 것이 없다”고 선언한 후 고향 오스트리아 시골마을로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초등학생들과 생활하면서 그는 새로운 언어세계를 체득하고, 지금까지 자신의 철학이 오류가 있음을 깨닫게 되자 1929년에 다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그는 1947년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분석철학의 장을 열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후기 사상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1951년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후기 사상은 사후 1953년에 출간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 집약돼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철학에 대한 논의는 크게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으로 나뉜다. 전기 사상은 그가 전쟁터에서 작성하여 출간한 『논리철학논고』에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스승의 논리적 원자론을 토대로 나온 “언어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 of language)이 핵심이다. 후기 사상은, 그가 오스트리아 시골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과 어울리면서 깨달은 것인데, 논리적 원자론을 토대로 하여 전개된 자신의 언어분석철학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언어의 “의미 용도론”(use theory of meaning)을 토대로 하여 새롭게 전개되는 “언어게임”(language game) 이론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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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2. 29. 01:00



 

 

논리적 원자론을 제창한

러셀

 

 

오늘날까지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자는 단연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러셀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원래 수학자로서 출발했으나 수학의 근본 원리가 흔들리게 된 후로 새로운 기초 정립에 진력하면서 철학적 문제들을 아주 간명하고 명쾌하게 서술한 자로서 그 명성을 날리게 된 인물이다.

 

러셀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자연언어는 애매모호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세계의 구조에 대해 추리했을 경우 누구나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지만 자연언어가 애매할지라도 조심스럽게 분석하면 세계에 대응하는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입장이다.

 

논리적 분석을 통해 자연언어의 올바른 구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주장은 러셀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것은 자연언어의 구조를 인공(人工)언어로 이루어진 기호논리 체계로 환원하는 방식이다. 러셀은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와 함께 저술하여 1913년에 펴낸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그들은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에 대한 파악이 수학적인 논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러셀은 단연코 영국 경험주의 전통을 기저에 깔고서 무어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사유로 뛰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인 것이란 보편적 관념이 아니라 오직 개별적인 “감각사실”(sense-data)들 뿐이다. 이들 각각은 서로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도 없다. 어떤 고정적인 물질이나 절대적인 정신 또는 자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감각사실만이 존재한다고 여긴 러셀은 흄의 경험론적 입장을 연상시킨다. 이로부터 그는 객관적인 감각세계가 상호 독립적인 원자적 사실들과 그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이에 대응하는 언어체계의 구조를 분석하게 된다.

 

러셀의 분석철학은 논리적 원자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논리적 원자론의 기본체계는 원자적 사실들과 그 결합이 언어로 진술될 수 있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언어적 진술의 최소 단위는 “원자적 명제”(atomic Proposition) 혹은 “요소명제”(elementary Proposition)들이다. 원자적 명제는 언어체계이고 원자적 사실은 객관적인 세계인데, 양자는 일대일 대응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원자적 사실들의 결합에 대응하는 명제는 복합명제이고, 복합명제는 원자적 명제들이 ‘그리고’, ‘또한’, ‘혹은’ 등의 연결사에 의해 결합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실재의 세계가 서로 대응관계라는 것은, 대상의 세계와 언어세계의 구조가 같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대상의 실재세계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밝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실재세계가 아무리 복합적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복합명제는 논리적인 분석을 통해 원자명제로 분해될 수 있고, 원자명제의 참과 거짓에 따라 그 진위(眞僞)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만일 “홍길동과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p·q) 복합명제가 있다고 하자. 명제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일단 원자명제로 분해해야 한다. “홍길동은 요술을 부린다”(p)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q)라는 원자명제가 그것이다. 원자명제인 “홍길동은 요술을 부린다”(p)와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q)가 모두 참이라면 복합명제의 진술은 참이다. 만일 한쪽만 참일 경우, 즉 “홍길동은 요술을 부린다”(p)는 참이지만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q)가 거짓이든가, 아니면 (p)는 거짓이고 (q)가 참일 경우, 혹은 양쪽 모두가 거짓일 경우에 복합명제의 진술은 거짓이 된다.

 

러셀에 의하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복잡한 사실들은 상호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원자적 사실들로 환원될 수 있고, 언어적 표현은 최소한의 의미체인 원자적 명제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원자적 사실은 원자적 명제로 진술될 수 있다. 따라서 러셀은 철학의 과제가 이러한 원자적 명제들 간의 관계와 구조를 밝힘으로써 이로부터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에 대해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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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2. 28. 21:53






 

분석철학의 효시라 불리는

영국철학 조지 무어

 




 

분석철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철학자는 영국 출신의 무어일 것이다. 그의 철학적 동기는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형이상학적인 명제들, 즉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의 오묘한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논리적인 언어분석을 통해서 그 명제들이 터무니없음을 지적하여 시정하고자 함이었다. 그가 헤겔을 비롯하여 관념론의 기본전제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1903년에 발표한 “관념론 반박”(The Refutation of Idealism)은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요컨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말한 버클리G. Berkeley(1685~1753)의 주장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검토해 보자. 이 명제는 논리적으로 말해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가 그 존재의 ‘의미를 안다’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버클리는 존재하는 대상을 의식 속에 병합함으로써 대상과 지각을 혼동하고 있다고 무어는 비판한다.

 

우리가 무엇을 지각한다는 것은 의식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대상이 존재하고 이것을 경험하여 안다는 뜻이다. 이를 무어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증명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요컨대 “이것이 나의 한쪽 손이고, 이것이 또 다른 한쪽 손이다”라는 진술은 직접 경험함으로써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사례들은 지극히 상식에 맞는 명제들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무어는 영국 경험주의 전통에서 관념론을 분석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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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2. 20. 01:30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에 응답하는 철학자

 






철학이 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논리학에서처럼 정확성이나 사리(事理)에 일치하는 것만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학문만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돌이켜 사유하는 “추념”(Andenken)이란 뜻에서 존재의 가르침과 그의 부름에 충실하려는 사유(Denken)를 철학이라고 말한다.

 

존재의 가르침이나 부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가르침이나 부름을 받는 탈존자는 사유를 전제한다. 탈존자의 사유란 무엇이고, 무엇이 사유하도록 하는 것일까? 사유는 “이성”(Vernunft)이 한다. ‘이성’은 “귀담아듣는다"(Vernehmen)라는 뜻에서 나왔다. 무엇을 귀담아듣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眞理)에 대한 것이다. 진리는 바로 스스로를 은폐하면서도 동시에 살짝 드러내 보이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유는 ‘존재에 대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역으로 본다면 존재가 그 진리를 이성으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한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이라는 두 방식으로 구분하여 의미를 해석해볼 수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사유가 존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에로 귀속될 수밖에 없는 사유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유가 존재에 귀속되어 있으면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존재가 걸어오는 말에 대한 사유다. 가르침과 부름은 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이나 교제의 수단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의 집이다. 존재의 집은 탈존자가 몸담고 있는 집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말을 하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탈존자의 사유란 오직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에 응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경모하는 사유이다. 만일 사유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존재의 말이 일상적인 언어적 표현으로 형용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시(詩)의 세계로 접근해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독일의 시인 휄더린Friedrich Hoelderin(1770~1843)의 시어(詩語)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다양한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위대한 시인들 중에서도 휄더린을 동양의 도연명陶淵明(365~427)만큼이나 최고로 위대한 시성(詩聖)으로 여겼고, 휄더린이 존재자체가 걸어오는 말을 가장 순수하게 시어로 표현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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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2. 19. 02:00






 

 

마틴 하이데거의

무(無)를 꿰뚫어가는 탈존자(脫存者)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존재자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엔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럼에도 실존적인 인간만은 어디론가 사라지게 될 대상이 없는 불안 속에서 마침내 텅 빈 ‘무’와 마주치게 된다. 텅 빈 ‘무’의 상태와 마주한 현존재는 일체의 존재자를 벗어나 초탈(超脫)한 상태일 것이다. ‘무’를 향해 초탈한 현존재의 실존은 스스로 ‘무’ 속으로 함몰해 있다는 의미에서 “탈존자”(Ek-sistenz)라고 할 수 있다. 탈존자는 일체의 존재자에게서 초연(超然)한 상태로 있으면서 존재자의 근원을 묻는 자로 임하게 된다.

 

존재자의 근원에 대한 탈존자의 물음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신(神)’의 존재로 귀착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마저도 사유를 통해 대상화되는 ‘존재자’에 속하며, 신도 결국 ‘무’에 근원하는 존재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존자는 신의 존재 근원에 대해서도 같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이데거는 무신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는 정말 무신론자였을까?

 



어쨌든 탈존자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을 묻는 상태에서 ‘무’를 꿰뚫어나가는 과정에 처할 것이고, 이럴 때 비로소 ‘존재’ 그 자체를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무’는 존재자에 대한 무화(無化)로서의 ‘무’이고, 일체의 존재자와 전적으로 상이한 극단적인 타자(他者)를 뜻한다는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면사포”(der Schleier des Sein)라고 표현했다. ‘존재의 면사포’란 탈존자가 ‘무’를 꿰뚫어가는 과정에서 존재가 스스로 참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는 단면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면사포에 감춰진 ‘존재자체’는 대상화될 수도 없을뿐더러 존재자로 규정되는 여하한 개념이나 표상적인 사유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없다. 하지만 ‘존재자체’는 모든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밑받침하는 지주(支柱)이며, 만유 속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존재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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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2. 18. 01:00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의 실존론적 분석

 






‘존재론적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서에서 ‘존재’의 참뜻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를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존재자를 찾아낸다. 그런 존재자를 그는 “현존재(Dasein)”라 불렀다. 현존재란 ‘거기(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인간을 뜻한다.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물론 책상, 집, 고양이, 나무 등과 같은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존재자들 중에서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명확하게 대답하기란 어렵지만 어렴풋이나마 조금 알고 있기에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은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현존재’라 하지 않고 ‘도구적 존재’라 불렀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어떤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이거나 논리적이고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그런 보편적인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개별인간을 지칭한다. 개별적인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와는 달리 자신의 존재를 언제나 문제 삼고 그것에 관심을 쏟는다. 이런 현존재를 하이데거는 실존(Existenz)이라 부른다.

 

존재론의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 즉 인간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제시한 ‘존재범주(Category)’에서가 아니라 “실존범주(Existenzialien)”에서 다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현존재의 존재이해 방식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는 존재이해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분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밝히는 실존분석만이 존재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존재론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고 본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첫째, 실존론적 분석에서 볼 때,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Being-in-the-world)이다. 이는 인간이 세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이 세계에는 다양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인간은 이것들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에 관심을 갖고, 이것들을 유용한 도구(Zeug)로 간주하여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또한 인간은 사물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공동세계존재(Mitweltsein)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사물에 대한 배려(Besorge)이건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Fürsorge)이건 결국 “관심(Sorge)”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관심”을 세계 내에 있어서의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라고 규정한다.

 

둘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실존자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적인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세상 사람”(das Man)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는, 어느 누구도 아닌,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표적으로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고 그저 풍문이나 잡담에 귀를 기울이며, 유행이나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인을 가리킨다. 이런 일상적인 세상 사람으로서의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가 가리워져 있는 존재방식으로 퇴락(頹落)한 사람이다. 퇴락한 사람은 비본래적인 자기로부터 본래적인 자기로의 실존을 회복하여야 하는데, 실존을 회복하거나 비본래적인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Angst)이다.

 

셋째, 불안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恐怖)와 다르다. 공포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만 불안은 아무런 대상이 없다. 그럼에도 불안이 생기는 까닭은 현존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 즉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외부로부터 현존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현존재에게 붙어 있다. 인간의 생존은 죽음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부서짐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불안은 인간에게 숙명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세상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락, 스포츠 등의 즐거움에 탐닉하기 마련이다. 즉 죽음에 대한 불안이 현존재로 하여금 비본래적인 일상의 존재로 타락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깊이 통찰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결국 죽는다”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피를 통하여 세상 사람은 불안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라도 초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넷째, 인생의 시작과 종말은 무(無)에 놓여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Nichts)’에서 수동적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이다.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는 완전히 ‘무’이다. 무위에 떠 있는 유한한 존재는 죽음에의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능동적으로 미래를 향해 자신을 설계하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기투”(Entwurf)라 한다. 던져져 있음이 필연적이라면 기투는 미래를 향하여 기획하고 계획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무’에서 그냥 던져진 채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얘기다. 미래를 기획하는 인간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소위 “양심”(Gewissen)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하다. 양심이란 세상 사람의 일상성 속에 잊혀져 있던 본래의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는 부르짖음이다.

 

다섯째, 현존재는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거나 죽음의 불안을 도피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앞질러 죽음을 결의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죽음의 가능성을 앞당기는 것은 인간의 존재를 그 전체성에서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양심의 결단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깨우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이 죽음에의 선구(先驅)와 일상적인 자기의 비본래적인 모습을 버리고 자신의 본래성을 되찾으려는 결단성을 합친 것이 “선구적 결단”(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이다. 이러한 태도는 현존재의 근거가 ‘무’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와 같이 현존재의 실존은 유한성의 자각을 토대로 하여 죽음에의 선구를 결의함으로써 본래적인 자기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17. 20:52





 

변종 존재론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

 




 

20세기에 동서양에 걸쳐 너무도 잘 알려진 사상가를 한 분 꼽으라 하면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4)가 단연 선두를 점유할 것이다. 그의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는 저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념에 대한 조어(造語)로 말미암아 논쟁의 여지가 더러 등장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존재론자인가를 가름할 때, 후대의 사상가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1927년부터 연재되었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만으로 그의 사상을 평가하게 되면, 실존범주의 개념들이 등장하면서 실존문제에 대한 해석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는 명백히 실존철학자로 불리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초지일관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존재란 무엇인가”하는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1929년에 출간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주제는 그가 실존철학자라기보다는 존재론자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통적인 의미의 존재론자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아마 사상의 핵심주제가 다소 생소하게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

고대 서양에서 철학적인 사유가 시작된 이래 탐구의 중심과제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존재론(Ontology)이었다.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Thales)로부터 시작하여 고대 자연철학자들은 역동적으로 생장하는 자연(physis)에 대한 존재를 물었고,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이성에 의한 고도의 추리를 통해 탐구해낸 추상적인 수(數)를 존재로 보았고, 아테네 시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은 문명사적인 규범(nomos), 즉 윤리적인, 정치적(사회적)인 규범에 대한 존재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에는 신의 존재에 대해 체계적으로 탐구했고, 근대 이후부터는 인간의 삶에 관련된 존재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전통적인 존재론의 역사를 뒤집어 관점의 전환을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도대체 왜 존재자는 있고 오히려 무(無)는 없는가? 이를 묻는 것이 철학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연구과제가 존재에 대한 탐구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어서 그는 유럽전통의 철학이 ‘존재자’에 대한 탐구였지 ‘존재’에 관한 사유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존재론의 역사가 모두 존재망각(存在忘却)의 길을 걸었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존재일반이 자명하고 명석하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존재’에 대한 물음은 한 번도 올바르게 제기된 일이 없었기에 존재망각의 역사 속에 내버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존재론을 파괴하고, 존재자체의 의미를 물어 새롭게 밝히려 시도하게 되는데, 우선 “존재(das Sein)”와 “존재자(das Seiende)”를 명백히 구분 짓는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존재론은 모두 ‘존재자’에 대한 물음이었지만, 자신이 새롭게 제기하는 존재론은 존재자가 ‘무(無)’ 가운데서 개시되는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서 ‘존재자’는 사물의 현상이나 존재양식을 말하는 것으로, 하늘, 땅, 바다, 책상, 나무, 행위 등,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에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것’을 ‘존재’로 규정한다면, ‘존재’는 종래의 철학이 추구했던 전체적인 근원으로서 ‘신(神)’을 말하는 것일까? 하이데거에 의하면 ‘신’도 한낱 ‘존재자’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개념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단지 ‘존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고의 존재자인 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자가 어떻게 참다운 존재자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 즉 존재자의 근원이 되는 의미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존재 자체를 묻는 그러한 ‘존재’는, 단순히 객관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거나 일상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과 구별되기 때문에, 개념화된 대상으로 객관화될 수 없는 공허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언제나 간과되어 왔고 망각의 역사로 떨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망각의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존재론적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란 이성적 사유의 영역으로 들어와 개념화된 일상적인 존재자와 근원적인 의미의 존재자체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본질적인 차이를 뜻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1. 01:30




 

 

현상학(Phänomenologie) 완성한

막스 셀러Max Scheler

 

 

 

 

20세기 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인식론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운동이 일어난다. 바로 객관과 본질에로의 전환을 문제 삼은 현상학現象學(Phänomenologie) 그것이다. 현상학의 모토, “사태 자체에로 돌아가라(Zurück zu den Sachen selbst)!”는 구호는 이를 말해 주고 있다.

 

현상학은 본래 탐구 방법일 뿐이다. 이는 현상들이 본래 갖고 있는 본질, 즉 현상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럼 현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 한마디로 체험(Erlebnis)이다. 이렇듯 현상학은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을 철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태에 충실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직관과 발견의 도움을 받아 사태 그 자체의 본질 내용을 기술하는 처방이 바로 현상학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의미의 현상학은 진리인식의 명증적인 지반을 찾고, 이 지반이 모든 인식의 최종적인 원천임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원동력이 된 철학자는 독일 출신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Gustave Albrecht Husserl(1859~1938)이고, 그가 제시한 내재적인 의식 현상의 영역을 넘어서 가치, 인간, 세계, 신(하나님) 등의 커다란 주제에로까지 확대하여 현상학을 완성한 철학자는 막스 셸러Max Scheler(1874~1928)이다.

 

“삼신 하나님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一神降衷] 사람의 성품은 삼신 하나님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性通光明] 삼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弘益人間].”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극대로 확대하여 현상학을 완성한 철학자는 막스 셸러Max Scheler이다. 왜냐하면 그는 후설이 의식 내부로 들어와 사태의 본질을 밝히는 내재적 철학을 가치, 인간, 세계, 절대자(신)의 영역에까지 넓혀 나갔기 때문이다.

 


셸러가 수행한 철학적 주요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가치의 영역을 발견하여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점이다. 그에 의하면 원천적으로 낡은 가치도 새로운 가치도 없고, 그저 가치들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치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직 발견되는 것이다. 이는 문화와 역사의 진보에 따라 인간의 시야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가치라는 얘기다.

 

그저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쳐다보더라도 가치를 볼 눈이 없는 사람은 가치를 알지 못한다. 요컨대 유물론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은 가치를 보는 눈이 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형식에 얽매여 있어도 가치를 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형식주의 때문에 윤리적인 선善의 가치 내용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셜러가 칸트Kant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셸러에 의하면 사물은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오로지 그 내용을 통해서 그 가치가 정당화된다. 요컨대 인간의 어떤 행위가 윤리적으로 가치 있게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사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경우에나 부모님께 효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로부터 후설이 말한 현상학적 본질직관은 셸러에게 있어서 가치직관으로 전환이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가치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을까? 셸러는 감각적인 사물이란 지각되는(wahrnehmen) 것이고, 그 개념이란 생각되는(denken) 것이고, 그 가치란 느껴진다(fühlen) 말한다. 가치를 느끼는 것은 바로 가치들을 냄새 맡는 지향적인 작용 때문이다. 이것을 셸러는 가치감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치를 느끼는 그러한 감각을 갖게 된다. 이는 심리학에서 즐거움[快]이나 즐겁지 않은[不快] 것을 느끼는 심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양의 유가儒家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사단지심四端之心이 발현되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가치감각에 가깝다.

 

가치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은 인간다움이 형성된다. 인간다움에서 인격人格이 나온다. 인간은 여러 사물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인격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사물들과 현격하게 구분이 된다. 그러한 인격은 타고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인격이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인격은 심리적인 작용의 총화와 같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심리적인 작용이란 인격이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은 가치감각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형성될 수 있고, 끊임없는 행위로 그 전모가 드러난다. 인격을 드러내는 행위는 다른 사물들처럼 인과적 결정이나 유전인자나 어떤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인격은 자유로움 속에서 가치들을 실현해 감으로써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행위만이 마음의 내적인 질서와 부합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가치의 세계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고, 결국 최고의 가치존재인 근원의 인격적 존재, 즉 절대적인 신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셸러가 제시한 인격주의는 우주 전체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를 굳히는 학설이 되는데, 이는 인간이 가치감각과 본질에 대한 앎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정신(Geist)이 되고, 이 정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타의 동물은 비록 생각하고 목적을 헤아리는 성향을 가질지라도 진리와 가치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본질과 가치를 직관하는 정신을 통해서만 인격적인 인간으로 되어 가는 존재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신은 세계의 과정 전체에 관여하고 있다. 헤겔이 말한 이념과 마찬가지로 정신은 세계에서 생겨나는 것을 순화하게 함으로써 세계화 과정이 완성된다. 그런 세계화 과정을 이루는 한 단체團體가 인간이다. 우주적인 삶이 세차게 발전해 가는 시간적인 지속 중에서 인간은 신적인 것 자체가 되어 가는 과정에 짜 넣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신적인 것이 아직도 진행 중인 한,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 속에서 가치실현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것이 완성되는 날 모든 가치실현 또한 완성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30. 01:00




 

본질을 알기위해서는

현상을 정확 파악해야 한다는 철학자 후설

 








철학자로서 후설의 고민은 우리가 의식 밖의 대상을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가 제창한 철학적 사유의 중심은 무엇이 참된 지식의 근거를 제공하는가 하는 인식認識에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사실과 사실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후설은 인식에 있어서 먼저 경험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임을 받아들인다. 이는 영국의 경험주의 입장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 의해 경험되는 사물에 집중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본질개념(Wesensbegriff)”에 대한 인식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서의 본질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서 추구했던 그런 불변하는 실재, 즉 현상의 배후에 근원으로 실재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띤 객관적인 의미 요소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 요소는 바로 현상의 사태(Sache)와 짝이 되는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으로 드러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만일 의식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태는 없을 것이고, 현상 또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에 주어져 있는 사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명하면 되는 방법론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상학의 목표는 사태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할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이다. 이것을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식의 대상은 우리의 의식과 독립하여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식에 없는 대상은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사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천인 의식의 내부로 돌아가야 한다.

 

의식 내부로 돌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인식론에 있어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주관으로 전환하는 선험적 태도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선험적’이란 인식을 형성하는 궁극의 원천, 즉 주관으로 되물어 가려는 동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이라 부른다. 방법을 통해 우리는 의식 내부로 돌아가 사태 자체, 사물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환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상적 환원(eidetishe Reduktion)”과 “선험적 환원(transzendental Reduktion)”이 그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사물을 인식비판적으로 검토함이 없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인데, 세 가지 태도로 구분된다. 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그것이다. 자연적 태도는 대상을 자명한 존재로 확신하여 지각하지만, 지각의 주체인 인격을 아주 도외시하는 태도이고, 인격주의적 태도는 지각주체인 인격을 중심으로 사물을 지각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확신하는 태도이고, 자연과학적 태도는 모든 대상을 일정한 방법이나 기구를 매개로 하여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성질이나 구조를 설명하는 태도이다. 이들 세 가지 태도는 경험적인 대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확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 인식에 중요한 것은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은 자연적 태도의 일반 정립을 비판하고, 모든 인식의 형성과 인식하는 자기 자신과 인식 생활에 관한 자기 반성의 최종 근거를 반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후설은 철학을 엄밀한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태도를 비판하고 선험적 태도로 돌아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판단중지(Epoche)이다. 여기에서 판단중지는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자(피론Pyrrhon, 기원전 360~270년 경)가 말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론의 회의론은 모든 사물에 대해 단지 속견俗見만을 가질 뿐 진리 인식이란 불가하기 때문에 단정적인 판단을 중지하고 진리 탐구를 체념함으로써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설이 제안한 판단중지는 객관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낯선 사람이 지나간다,’ ‘호랑이가 개에게 접근하고 있다’, ‘개가 배가 몹시 고프다’, ‘누군가 개를 괴롭히고 있다’는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의식 내부로 들어가 그 본질을 직시해 보라는 뜻이다.

 

후설의 판단중지는 앞서 말한 “형상적 태도(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취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배제하고 괄호 침(주체와 대상의 ‘한데 묶기’)을 의미한다. 판단을 중지해야 일종의 사유 실험을 통한 자유로운 변경이 가능하며,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 같은 성질을 가진 요소들을 분류하여 이것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도록 정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현상학적 잔여(Residium)”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판단중지를 통해 얻어 낸 불변하는 본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형상적 환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판단중지, 자유로운 변경, 기술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이기 때문에 본질적 환원이라 불린다.

 

“형상적 환원”을 통해 얻어낸 본질을 다시 의식내재로 환원하는 절차가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이란 무엇인가? “형상적 환원”은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 현실성을 넘어서 초월적인 것이 되기 쉽다. 여기에서 후설은 초월적 존재를 순수의식으로 내재화하는 절차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선험적 환원”이라 하는데, 이는 ‘현상학적 잔여’들을 순수의식으로 직관하여 사상 자체, 즉 순수의식의 보편적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고 현상에 대한 참된 본질 인식이 산출된 것은 아니다. 순수의식은 각 개인의 주관적인 것이므로, 그 체험 내용의 객관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설은 이런 문제점을 ‘상호주관성’과 ‘생활세계의 이론’으로 보완하고 있다. ‘상호주관성’이란 사회공동체적 의식을 말한다. 즉 우리의 인식 주체는 순수한 개인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호주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인정된다면, 이는 진리임이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공동체적 사회인식에 의해 결정됨을 말한다.

 

후설은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호주관성’을 내세웠고, 그 기반이 되는 것을 ‘생활세계Lebenswelt’에서 찾고 있다. 생활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우리의 판단의 근원적 토대는 개별적 대상이고, 개별적 대상이란 언제나 어떤 전체 속에 있는 개체인데, 개별적인 대상을 파악할 때는 그 대상이 이미 생활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한 생활세계는 무질서하거나 막연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활세계는 지평구조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개체는 생활세계 속에서 부각되어 개인에게 촉발되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은 이렇게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활세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활세계 속의 동형으로서 파악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식의 명증적 토대를 찾고자 하는 현상학자는 모든 개별적 경험의 보편적 기반으로서 우리 눈앞에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로 귀환하여야 한다. 본질에 대한 진리 인식은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29. 02:00






 

본질보 실존을 우선시한

철학자 사르트르

 

 






독일의 실존철학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까지 크게 유행하다가 1933년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9월에 프랑스 출신의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자 이때부터 실존철학은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럽게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실존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출범하게 된다. 그의 실존사상은 1943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책에서 사르트르는, 1940 나치의 침공으로 패망한 프랑스인들이 적의 침략 앞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기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 대해 불신과 울분과 회의에 젖게 됐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는 그들이 적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항쟁심抗爭心에 불타 융합된 저항의 힘을 보여 주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철학이 부정적 사고를 적극적인 행동의 가능성과 융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철학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극단적으로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러한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다소 난해한 면이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평생 동안 “계약결혼”을 시작하여 끝을 맺었고, 1945년에 그와 함께 『탕 모데른(Le Temps Modernes)』라는 월간지를 편집하였으며, 실존주의에 대한 주요 주제를 해설했던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의 소설 『초대받은 여자(L’nvitée)』를 통독하면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어떻게 출범하게 되는가에 대한 기본 토대를 잠깐 들여다보자. 그는 인간의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구분하고 있는데,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즉자卽自(en-soi)”라 하고,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대자對自(pour-soi)”라고 말한다.

 

‘즉자’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사르트르에게서 ‘즉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潛勢態(dynamis), 신의 합목적성과 같은 어떤 존재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체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창조되거나 다른 존재와 관계된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진리, 신적인 것, 최고의 초월자 같은 것도 아니다. 그는 이러한 ‘즉자’를 무의미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는데, 자신의 저서인 『구토(La Nausee)』에서 주인공을 통해 표현한 구토증으로 기술되고 있다.

 

‘대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의 특성을 지칭한다. 의식이란 항상 무엇에 대한 것으로 지향적 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원래 자기 자신을 벗어나 자기가 아닌 것을 향하기 때문에 탈자적인 초월적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못되고 언제나 즉자와의 관계에서 그의 존재성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의식의 성격을 사르트르는 ‘대자’라 했다.

 

앞서 밝혔듯이 의식은 의식 밖에 있는 ‘즉자존재’에 관계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가 만일 의식만을 떼어내서 생각해 본다면 의식은 자체로 ‘없는 것[無]’이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 ‘무無’는 중요한 의미를 점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작용은 자신이 간직한 ‘무’를 즉자 존재에 침투시켜 존재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의 무화작용(의식작용)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가 규정됨을 뜻한다. 이러한 의식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있다. 하나는 대상을 지각하는 의식과 다른 하나는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자신을 향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즉자’인 존재는 충실充實이지만, 분열된 의식은 존재의 충실을 결여하고 있다. 이는 ‘대자’인 의식이 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의 결여이고, 그러한 결여(공허)를 메꾸기 위해 욕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한 ‘즉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대자’로 있으면서 ‘즉자’로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즉자’로서의 충실성을 누리면서 의식적인 ‘대자’의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그러나 ‘즉자’이면서 ‘대자’인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즉자-대자(en-soi-pour-soi)”는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절대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즉자’라면 신은 존재의 충만성을 소유하게 되겠지만 의식이 없으므로 선善의 실행이나 어떤 합목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신이 ‘대자’라면 신은 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무’가 침투하여 결여를 메꾸고자 활동할 것이다. 이러한 신은 완전성과 합목적적인 인격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순된 측면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완전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트르는 창조주로서의 충만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실존사상을 전개한다.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이 설계한 세계도 없고, 신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여 인간에게 부여한 고정된 본질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L’homme n’est rien d’autre que ce qu il se fait).” 따라서 ‘대자’로서의 인간은 실존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초월해 가는 자각적 주체로서 언제나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밖으로 자기를 내던져 미래를 향해 현재를 뛰어넘는 기획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 미리 내던진 가능태를 향해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계획하여 자기를 실현해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입장을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표현을 쓴다. 인간의 의식은 ‘무’를 간직하고 있어서 빈 공허를 메꾸려는 욕구가 있고, 이러한 욕구는 곧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유다.

 

운명적으로 타고난 자유는 맹목적이거나 방종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오히려 행동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는 각자의 실존이 스스로가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의 존재 방식에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이러한 책임과 관련하여 실존자는 각자의 선택과 동시에 전 인류의 존재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선택은 선택되는 것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전제하고, 이러한 가치 평가는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는 언제나 인류 전체의 선택이라는 귀결이 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22. 01:00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

 




 

 

“중은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상잡相雜하야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하야 타생장소병몰墮生長消病歿의 고苦하고 철哲은 지감止感하며 조식調息하며 금촉禁觸하야 일의화행一意化行하고 개망즉진改妄卽眞하야 발대신기發大神機하나니 성통공완性通功完이 시是니라.” -『桓檀古記』 「蘇塗經典本訓」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1960년대 초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 기간 중에 그는 교토에 있는 일본의 국보 제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친견하고서 “이것은 지상의 모든 시간적인 것, 속박을 넘어 달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영원한 평화와 이상을 실로 아낌없이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야스퍼스는 그 불상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까? 그것은 불상이 바로 인간 실존(Existenz)의 최고 경지를 조금의 미혹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해 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3년에 독일의 나치Nazi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독일에는 야스퍼스를 중심으로 하는 실존철학이 풍미를 이룬 바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이 인기가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현존재(Dasein)의 인간이 참다운 자아로 돌아가 일체一切의 존재 양식을 초월超越하여“포괄자(Das Umgreifende)”에 다다름으로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초월성이란 말은 비대상적非對象的으로 완전히 은폐되어 있어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실존자의 경지에 다다른 경우에만 상징적인 시사示唆를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괄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포괄자는 존재의 모든 대상을 안에 포괄하는 무한한 지평地坪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사유를 통해 그런 무한한 지평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언제나 새삼스럽게 우리를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포괄자의 의미란 얘기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절대적 존재인 포괄자는 결국 매듭지어질 수 없는 무애无涯의 상태로 세계에 노정露呈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영구히 완결된 전체로서의 그런 존재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현존재現存在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존재가 궁극의 절대적인 포괄자에 의해 감싸인 상태에서 그 참뜻이 밝혀질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초월성이다. 결국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에서 포괄자는 실존적인 인간이 그 경계에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현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실존자가 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실존을 삶과 정신에 합쳐진 작용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포괄자의 모든 방식 안에서 현존재는 양극성을 갖고 있는데, 이성이 없는 실존(vernunftlose Existenz)과 실존이 없는 이성(existenzlose Vernunft)이 그것이다. 만일 이성이 없는 실존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감정과 느낌, 본능과 충동에 충실하게 되지만 맹목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실존이 없는 이성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지성적인 보편자, 도식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을지언정 인격을 잃고 역사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공허하고 자의적이 될 수 있다.

 

이성과 실존은 분리될 수가 없다. 이성이 무너지면 실존이 상실되고, 실존이 없으면 이성이 무너진다. 이성은 기존의 것을 고집하여 관철하기 위해 실존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되고, 실존은 스스로를 투명성으로 이끌기 위해 이성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실존은 이성에 의해 밝혀지고, 이성은 실존에 의해 내용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실존이란 한편으로 체험된 것, 삶으로부터 결단으로 받아들여진 것, 자유와 역사적인 일회성 속에서 개인적으로 얻어낸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적인 것, 정신적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 학문적인 의식으로 높여진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실존조명(Existenzerhellung)”의 길로 나아가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는 실존이란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존인식’이라 하지 않고 ‘실존조명’이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실존을 조명한다는 뜻은 “실존이 자기 자신이 된다(sich selbst werden)”,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sich selbst bewußt werden)”는 뜻이다. 결국 실존이란 삶과 정신이 합쳐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밝혀감으로써 참된 자기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완결된 체계 내에서 활용되는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오직 실존철학에 고유한 범주를 통해서 실존이 “조명”될 수 있을 뿐이다. 야스퍼스에게서 실존범주란 바로 ‘자유(Freiheit)’, ‘상호관계(Kommunikation)’, ‘역사성(Geschichtlichkeit)’으로 집약된다.

 

실존은 고정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되어가는 가능적 존재이다. 이는 실존적인 인간이 자기 상실과 자기 보존을 겪으면서 끊임없는 선택의 도정道程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결단을 재촉받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실존은 자유로운 선택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원천으로부터의 자기창조自己創造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자유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또한 실존적인 인간은 어떤 독단적인 진리나 개념, 체계 등을 고집하지 않고 타인에게 항상 마음을 열어 두어 배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실존이 타자他者의 자아와 진솔한 유대 관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상호관계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리고 실존은 언제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즉 역사성을 안고 있는 특수자로서의 자기존재를 의미한다. 역사성 안에 있다는 뜻은 단순히 시간성으로서의 역사성(필연적 계열을 의미함)만이 아니라 실존적 현존재가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의미한다. 역사성으로서의 실존적인 인간은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의 순간에 대한 충실充實에, 즉 영원한 현재로 초월에 직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성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럼 이와 같은 실존은 어떻게 자각되고 실현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에 의하면 그것은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 에 대한 자각에서 출범한다. ‘한계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재인 인간은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시대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변경할 수도 회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다. 다름 아닌 죽음, 고뇌, 싸움, 죄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다. 이것을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 부른다.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有限性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유한적임을 깨달은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동시에 포괄자가 주재하는 현실에 눈을 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식을 변혁시켜 본래의 자기 존재에로 회생回生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상황’은 인간의 실존을 각성하게 하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할 때 모든 것은 초월자를 지시하는 암호暗號로 나타난다. 암호란 실존이 청취할 수 있는 초월자의 언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종류는 무수하게 많다. 모든 현존재, 자연과 역사, 세계와 인간의 통일, 인간의 자유 등은 모두 초월자의 암호일 수 있다.

 

초월자를 지시하는 이런 암호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기술될 수도 없고, 논증될 수도 없고, 오직 실존의 참된 좌절에서 체험되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암호 해독은 어디까지나 실존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체험하는 실존에 따라 다양하면서도 독특하게 내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실존은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을 통해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초월자의 절대적인 현실을 확인하게 되고, 본래적인 자기 존재로 회생回生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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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1. 21. 23:16

 




 

체의

실존철학(Existential Philosophy)

 

 

 




“실존(實存, Existence)”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라틴어의 “existentia”에서 유래한다. 이는 원래 ‘밖이란 뜻’을 가진 ‘ex’와 ‘나타나다’란 뜻을 가진 ‘sistere’의 합성어로 ‘밖에 나와 있는 것’, ‘밖으로 나타나 있는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를 뜻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는 유한하며,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항상 변화의 도정에 있다. 이러한 현실적 존재와 대립하여 있는 말은 바로 “본질(essentia)” 개념이다. ‘본질’이란 개개의 구체적인 사물에 앞서서 영원히 존재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본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재성격만을 “실존”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실존을 중심으로 사상을 전개한 학문을 일컫는다. 이러한 실존철학은 전통적으로 사유를 지배해 온 합리주의(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지만, 결국 불안과 허무에 허덕이는 인간을 위한 사상으로 귀착한다. 이러한 실존철학은 19세기에 “신 앞에 선 단독자”를 제창한 유신론적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무신론적 실존철학자 니체Nietzsche에 의해 형성이 되어 유럽의 지성들을 사로잡은 바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실존을 강조하는 철학이 새롭게 정리되어 다시 한 번 유럽의 지성사를 장식하게 된다. 실존철학은 왜 반복해서 또다시 등장하게 됐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유럽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상황은 인간성 상실과 삶의 위기 의식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성 상실과 위기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유럽인들은 대중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존재에 대한 눈을 뜨게 되고, 자기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진정한 본질과 구조를 밝혀 보고자 출현하게 된 것이 실존철학인 것이다.

 

실존철학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첫째, 실존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한 존재 양식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인간의 실존’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동양의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깔려 있다. 둘째, 실존은 개별적인 인간의 고유한 존재 양식이므로 ‘개인의 실존’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실존철학은 지극히 ‘주관주의’라 볼 수 있다. 셋째, 실존철학은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개인 중심적이 아니라 ‘상호주관적相互主觀的’인 측면을 다룬다. 왜냐하면 인간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언제나 타자他者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넷째, 실존철학은 사물을 기준으로 인간의 실존을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물은 이미 확정된 성질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존재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이룩하기 위해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실존철학은 역동적(力動的)이다. 왜냐하면 실존이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실존철학은 구체적인 ‘체험體驗’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실존철학자들은 ‘실존적 체험’을 자신의 철학적 동기로 삼기 때문이다. 실존적 체험으로 거론되는 것은 죽음, 고뇌, 투쟁, 한계상황, 혐오감 등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범하는 20세기의 실존사상은 실존문학, 실존예술, 실존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전개된다. 실존철학의 분야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징적으로 두 철학자를 꼽아 볼 수 있는데, 키에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현존’을 말한 칼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와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선상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가 대표적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9. 01:00




 

 

서구 몰락을 예견한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해와 달이 나의 명(命)을 받들어 운행하나니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느니라. 천지개벽(天地開闢)도 음양이 사시(四時)로 순환하는 이치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천지의 모든 이치가 역(易)에 들어 있느니라.”

-『도전道典』2:20:1~5

 

슈펭글러는 2차 세계대전 후에 지은 『서구의 몰락(Untergang des Abendlandes)』으로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다. 이 책에 의하면 역사는 삶의 현상이다. 삶의 현상은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그러한 전형적인 형식은 식물의 생장과정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봄철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터서 잎들과 가지들이 돋아나고, 여름철이 되면 무성하게 성장하고 꽃이 피며, 가을철이 되면 꽃이 지고 열매가 무르익으며 잎이 떨어지고, 겨울철이 되면 열매를 저장하고 휴식으로 들어가 다음 해를 준비한다. 식물의 경우에서 생명의 현상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순환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고 본 것이 슈펭글러의 입장이다. 요컨대 삶의 현상은 어떤 일정한 형식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이 형식들은 서로 비교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같은 과정으로 진행되는 순환 법칙이 발견될 수 있다. 순환 법칙은 인간의 생명이 탄생하면[生] 유아기를 거쳐 청년으로 성장하고[長], 청년기의 정점에 이르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장년이 되고[斂], 그 이후에는 반드시 쇠퇴의 길로 접어 노년에 이른다[藏].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이런 순환 형식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슈펭글러의 입장인 셈이다.

 


이런 생물학적인 태도는 삶의 역사 현상이나 문화 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슈펭글러는 문화라는 것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집트 문화, 그리스의 문화, 로마의 문화, 이슬람 문화, 기독교의 문화 등이 그 예이다. 요컨대 맨 처음에 종교와 신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게 되면, 탄생한 문화에 대한 정신적 각성이 일어남으로써 개혁이 되고, 계몽주의 시대와 같은 문화의 성숙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정신적인 창조성 고갈의 단계에 이르러 쇠퇴하는 주기를 반드시 거친다는 것이다.

 

슈펭글러는 새롭게 탄생하고 성장하여 전성기를 지나 몰락해 버린 문화에다 오늘날의 서구 문화를 적용함으로써 ‘서구의 몰락’을 예언한다. 그것은 그가 몰락한 문화에서 볼 수 있었던 몰락현상(Verfallserscheinung)이 서구 문화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몰락현상으로 그는 합리주의와 기술의 우위를 들고 있다. 몰락한 문화에서 최후에 오는 것은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의 문화가 지금 반성과 물질적 안락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민주주의, 세계시민주의, 휴머니즘사상, 평화주의, 인권과 동포애 등이 새롭게 생겨남으로써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서구의 몰락을 촉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슈펭글러가 밝히는 삶의 철학은 오직 ‘흐르는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헤겔의 철학에서처럼 하나의 절대자 안에서 모두 지양되는 삶도 아니고, 마르크스의 철학에서처럼 모든 사회적 · 역사적인 삶이 오직 하나의 유물변증법에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슈펭글러의 삶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인 태도에 바탕을 두고서 역사의 과정을 추진해 나가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삶은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도 아니고, 베르그송이 말한 ‘삶의 약동’ 또한 아니고, 오직 생물학적인 생명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문제도 아니고, 영원한 진리의 발견도 아니라는 것이 슈펭글러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는 항상 보다 더 강하고, 보다 풍족하고, 보다 더 자신 있는 삶에게 권리를 부여해 왔기 때문이다. 이때의 권리는 생존의 권리이다.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는 생존을 위해 진리와 정의를 권력과 종족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삶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원초적인 삶이며, 언제나 종족과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의 개진凱陣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8. 02:00




 

 

해석학의 선구자

빌헬 딜타이

 

 

 




딜타이는 베르그송처럼 “지속持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일회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거나 블롱델처럼 이를 우주적인 넓은 의미에까지 확장하여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현실적인 삶에만 한정하여 그 자체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딜타이는 삶이란 현실적인 삶 자체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과정은 시간에 따른 순간순간의 흐름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실적인 모든 것은 반복되지 않고 일회적으로 지나가 버린다. 현실적인 삶은 그러한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로 이루어지게 마련인 셈이다. 이러한 일회적인 삶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논리적인 지성에 의거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딜타이에 있어서 현실적인 삶은 전체와 부분이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그런 것이다. 전체 없이 부분은 없고, 부분 없이 전체는 없다는 논리가 현실적인 삶에 적용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전체를 이루는 부분적인 삶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늘 새롭게 체험하게 되는 삶이다. 이러한 체험적인 삶의 바탕에는 실제로 무엇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삶에는 새로운 체험에 스며들어 개별적인 특징을 이루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의식상태(Bewußtseinsstand)이다. 그래서 딜타이는 삶의 체험과 이해를 전개해감에 있어서 먼저 인간의 심리적 구조(Struktur)의 분석으로 눈을 돌린다.

 

인간의 의식상태는 두 측면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의식의 횡적구조橫的構造인데,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생각의 내용을 체험하는가 하는 체험 내용을 받아들이는 의식상태이다. 다른 하나는 의식의 종적구조縱的構造인데, 내가 나의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여 체험하는가(나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장차 행위하게 된다) 하는 총체적인 바탕으로서의 의식상태이다. 이 의식의 상태도 일정한 의지의 태도 또는 특별한 감정의 상태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의식의 구조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심리적(영혼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영혼적)인 이해는 지성의 힘으로는 부족하고 심성心性이 송두리째 투입된 체험에서 체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 삶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법은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삶에 대한 이해는 바로 삶에서 삶에로의 운동이고, 삶의 과정은 곧 역사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삶은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심정적 힘의 협동과 그 연관에 의거해서 삶에서[정신과학의 역사] 삶에로의 운동이고, 이를 통해 이해된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 방식을 토대로 하여 통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딜타이의 해석학(Hermeneutik)은 바로 이러한 정신과학과 특히 인간의 자기성찰이 요구되는 역사의 영역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본다.

 

이러한 정신과학의 역사에서 심리적 구조에 적합한 것은 정신사적인 유형(Typus)이다. 유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 자체의 형식이다. 인간의 삶이란 이러한 형식(유형)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주의,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등의 여러 유형이 있는데, 정신사의 여러 현상은 이러한 유형들에 적용하여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들은 개별적인 삶의 과정을 꿰뚫고 있고, 개별적인 정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딜타이는 정신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간파하려고 했으나 결국 개별적인 유형들과 다양한 입장들만 발견해 내는 데에 그쳤다. 그는 이런 다양한 개별적인 유형들에서 정신적인 삶의 풍부함을 드러냈으나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뜻을 밝혀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요컨대 헤겔은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하나의 절대자를 드러냈으나 딜타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상대주의적 입장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딜타이는 ‘이해’와 ‘유형’에 관한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정신과학적 방법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밝혀졌으나 상대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전형적인 역사주의자로 머물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은 삶이고, 삶이란 오직 시간에 따라서 흘러가는 일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새로운 개별적인 것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 딜타이의 입장이다. 이는 삶이란 보편적이고 구속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를 더해주는 그런 것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7. 01:00





 

삶의 근원을 우주적으로 파악한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

 

 

 



“하나는 시작이나 무에서 비롯된 하나요(一始無始一), 하나가 삼극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析三極無盡本) … 하나가 오묘하게 뻗어 나가 우주만유가 오고 가고(一 萬來), 작용이 부동의 근본으로 변화하나니라(用變不動本). 근본은 밝고 밝은 태양에 바탕을 둔 마음이니(本心本太陽昻明), 사람이 천지 가운데 태일이 된 하나(人中天地一)이니라. 하나는 끝이로되 무에서 마무리 된 하나이다(一終無終一)”

-「天符經」

 

블롱델은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지속’과 ‘창조적 진화’에 반대하고, 삶의 근원을 밝히는 쪽으로 사유하기에 이른다. 그의 삶의 철학은 우선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러한 ‘행위’는 급진적인 삶의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행위’는 맹목적인 것도 아니고, 순수한 의지도 아니고, 이성에 대해 항거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정신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블롱델에 의하면 인식은 행위의 한 부분이요, 사고의 진보는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에서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이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문제는 그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사고의 정체가 무엇인가이다. 사고는 근원의 존재도 아니다. 사고는 단순히 힘이며 정신적인 삶의 동력 안에서 무엇을 밀어내고 끌어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블롱델은 사고의 근원이 바로 정신적인 삶의 전체요 모든 부분들에 앞서서 ‘밀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삶의 철학은 사고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사고의 근원이 되는 ‘밀고 나아간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행위’ 속에 나타나는 그런躍動 밀고 나아감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도했던 의미와 유사할 것이다. 즉 플라톤의 철학에서 ‘모든 것이 이데아를 닮으려고 노력한다’고 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질료가 형상을 실현하기 위해 형상을 그리워한다.’고 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최고의 진리요 모든 형상들 중의 형상인으로 신神에게로 나아가려는 본성적인 욕구’라고 했을 때, 그런 의미의 밀고 나아감이라고 보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밀고 나감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그것은 근원이요 완성이라는 “하나”를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세계는 하나다. 하나의 통일된 틀은 우주세계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 놓고 있다. 이 틀은 결국 우주세계를 이루는 여러 형상들의 형상[神]에 뿌리내리고 있는 질서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주세계는 고정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되어 감에 따라 완성의 진리는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완성에 대한 동경이고, 완성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神)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주체는 우주적인 존재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가고, 생명으로부터 밀고 나가 정신으로, 정신으로부터 신(神)으로 밀고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즉 정신은 자기 밑에 있는 불분명하고 혼란된 여러 단계를 벗어나 광명의 빛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행위의 철학적 과제는 정신과 가치 질서의 원천을 자연 안에서 밝히는 것이고, 타당한 질서라 불리는 행위와 사고의 관계, 즉 행위에는 사고가, 사고에는 행위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6. 01:30

 

 



생의 약동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삶의 철학자로는 생의 약동을 주장한 프랑스 출신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1859~1941)과 우주적인 삶으로 파악한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1861~1949), 해석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독일 출신의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1833~1911), 서구의 몰락을 예견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1880~1936)를 대표적으로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사유는 현상적인 물질에 근거하는 유물론적인 사유나 기계론적이며 결정론적인 사유를 반대하는 삶의 철학이다. 그는 존재를 “삶의 약동(élan vital)”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실증주의나 현상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오직 텅 빈 공간과 물질적인 연장을 바탕으로 해서 드러나는 외부적인 것, 즉 사물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탐구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명과 내면에서 비롯되는 의식생활, 자유와 자발성 등이 본래의 빛을 찾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장되어 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철학의 의미에서 볼 때 공간은 한결같이 동질적이다. 동질적인 무한한 공간 안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존재는 정적이고, 비연속성이며, 전체적으로 도식적이 된다. 마치 원자들의 인과적 운동과 기계적인 필연성만이 되풀이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삶의 내적인 존재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즉 삶에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른 시간이 있고, 의식의 흐름은 절대로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에 내면적인 시간 또한 언제나 이질적으로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것들에게서의 시간은 자유를 내포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창의적인 발전이 있을 뿐이다.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베르그송은 ‘진정한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이고, 인간의 시간이란 지속(durée)’이라고 하여 삶의 철학을 전개한다.

 

‘지속’이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 또한 계속적인 흐름 속에 있고, 흐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란 이미 있는 것과 함께 규정되어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일회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살아 움직이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지속’이다.

 

우리의 이성은 도식적이며 언제나 개념화하여 고착화시킨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은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 속에 감정이 이입移入되어 유동적으로 지속한다. 이렇게 되면 현실적인 삶은 고착화된 보편적인 개념의 옷을 입지 않고 오직 유동적인 실재에 대한 직관(intuition)으로만 드러나게 마련이다. 직관이란 관조적인 입장에서 인식행위에만 주력하는 지적인 것이다. 이것이 체험體驗이고,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지속을 올바르게 파악하게 된다. 철학은 삶에 이러한 직관을 부여하기 때문에, 도식화된 표면을 꿰뚫고 나아가 내적이고 일회적인 삶의 지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보편적인 인과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일회성과 자유를 되찾으려한다. 왜냐하면 직관으로서의 의식은 곧 자유요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모든 존재는 의식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이성적인 것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삶과 체험, 충동, 지속, 자유, 창의적인 에너지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생성과 행위와 행동이고, 우리는 세계를 채우고 있는 물질과 삶의 모든 것 안에서 창조하는 힘들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삶의 약동(élan vital)”이라는 것이다. 삶의 약동이야말로 존재의 핵이요 삶의 정수精髓이다.

 

삶의 약동은 자유롭게 흘러간다. 삶의 약동은 기계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흘러가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은 비약飛躍이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낳는다. 따라서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곳에서는 삶이 만들어 내는 자유와 활동과 약동躍動(Elan)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곳에는 언제나 퇴락만이 있을 뿐이다. 미래의 보다 높은 발전을 위한 시작과 근원 또한 기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약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계 전체를 조망해 보자면, 삶은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파도처럼 생각되는 전진이다. 삶은 충동이요, 그 충동은 자유롭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삶의 의식이 인간에게서만 그 운동을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식물의 경우는 모호한 의식과 물질의 세계를 겸하고 있어서 경직성이 있고, 동물의 경우는 많은 움직임과 의식이 있으나 종種과 환경의 습성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식은 자유롭고 무한히 자발적이고, 인간의 입지를 드높이게 마련이다. 이러한 의식은 인간에게 무한한 지평이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베르그송은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의 진화론을 뒤집고 바로 #“창조적 진화”#의 문제로 나아간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5. 01:00




 

 

세기의 기업 경영인

잭 웰치Jack Welch

 

 




 

 

프로필

‘경영의 달인’, ‘경영의 귀재’, ‘세기의 경영인’ 등으로 불리는 미국의 기업인. 매사추세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mpany, GE)에 입사하였다. 33세에 GE 역사상 가장 젊은 사업담당 총괄관리자가 되었으며 부회장을 거쳐 1981년 45세의 나이로 GE의 8대 회장이 되었다. 2001년 퇴임할 때까지 1,700여 건에 달하는 기업의 인수합병을 추진하였으며 회사의 가치는 부임 당시 120억 달러에서 4500억 달러로 40배 성장하였다. 세계 최정상만을 고집해 온 잭 웰치의 독특하면서도 탁월한 경영철학과 지속적인 경영혁신운동으로 세계 초일류 기업의 모범을 보인 GE는 현재까지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001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인’으로 선정하였으며, GE 역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출생 1935년 11월 19일, 미국

직업 전직 기업인

학력 ~1960 일리노이 대학교 화공학 박사

~1957 매사추세츠 대학교 앰허스트 캠퍼스

경력 1985 NBC 방송국 인수

1981~2001 GE 회장, 최고경영자

1960 제너럴일렉트릭GE 플라스틱비즈니스담당 총책임자

 



조직경영 명언

-자발적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비록 잠시 동안 회사의 상당 부분을 총체적인 혼란 속에 몰아넣는 것을 뜻할지라도 강력한 것이다.

-변화의 힘을 활용하라. 변화를 적으로 인식하는 지도자는 조직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학습하는 지도자가 되라. 끊임없이 학습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해 노력하라. 실패를 통한 학습은 성공의 환희보다 훨씬 중요하다.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는 조직의 능력이야말로 궁극적인 경쟁의 이점이다.

-‘S’비법을 통해 생산성을 촉진해야 한다. 빠른 결정, 단순화된 조직 구조, 그리고 자신감이 그 비법이다. (Speed, Simplicity, and Self-Confidence.)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자원을 분배하라. 그리고 간섭하지 마라.

-비전을 제시하라. 그 다음 구성원들이 조직의 비전을 자기 스스로 실천하도록 하라.

-사람에게 투자하라.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신과 일하는 사람이며, 그들의 능력을 개발하면서 함께 일해 나갈 수 있는 자질이다.

-기업이 잘 될 때 개혁을 하는 것이 지혜이다. 사실 꿈꾸던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경우 조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너무 사소해서 땀 흘릴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현되길 바라기엔 너무 큰 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하라! 열정은 천재의 재능보다 낫다. 열정은 당신의 최고의 경쟁력이다.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1등이나 2등이 될 수 없다면 그 사업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세계 최고를 하고 있거나, 세계 최고를 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을 빼고는 모두 버려라.

 

잭 웰치의 인사 정책

1.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인지 파악한다. 인재와 직무의 조화에 포커스를 맞춘다.

2. 여러 후보 중에 선택함으로써 인사 정책에 소모되는 시간을 줄인다.

3. 인사 결정에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

4.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살펴본다.

5. 개인의 특징을 관찰한다.

6.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파악한다.

 

잭웰치의 4E 리더십

Energy(에너지) Energize(동기부여) Edge(결단) Execute(실행)

자신의 팀과 구성원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말고 소신껏 결단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든 실행으로 옮길 줄 알아야 한다. 4E는 하나인 ‘P’에 묶여 있다. 그것은 바로 ‘Passion(열정)’이다. 열정이 있어야 그 위에 4E가 존재하고 성립할 수 있다.

 

잭웰치의 2:7:1 시스템

전 조직원을 능력과 실적에 따라 상위 20%, 중간 70% ,하위 10%로 나눠 관리하는 인력관리 시스템이다. 여기서 20%의 조직원은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반면 하위 10%의 조직원은 조직에서 탈락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10% 조직원이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부족한 점을 개선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지 솎아 내는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잭 웰치가 중요하게 생각한 그룹은 바로 70%의 중간 그룹이다. 이들이 바로 조직의 심장, 핵심이라는 것이다. 20%의 상위 그룹처럼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묵묵히 직무를 수행한다. 훌륭한 수장이라면 이 중간 그룹을 20%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4. 21:57




 

 

20세기의 전설적인 주식투자가

워렌 버핏Warren Buffett

 



 

 

 

프로필

20세기의 대표적인 미국 기업인이자 전설적인 주식투자가. 26세 이후 고향 오마하를 벗어나지 않고 활동하며 주식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는 눈을 가졌다 하여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이라고 불린다.

 

사업가이자 투자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고 모으는 데 관심이 많았다. 11살 때 100달러의 자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으며, 17살부터 21살 때까지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 비즈니스 스쿨, 네브래스카-링컨대학,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1894~1976)의 가치투자(단기적 시세차익이 아닌, 기업의 내재가치와 성장률에 근거한 주식투자)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1965년 인수한 방직회사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의 최고경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재산의 85%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약정하는 등 적극적인 기부활동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지가 2006년 세계재력가 1위(재산 58조 8천억 원)로 선정했다.

 

출생 1930년 08월 30일, 미국 오마하

소속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

학력 1951 컬럼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제학 석사

1950 네브래스카 대학교 경제학과

1947~1949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졸업

경력 1996~2011 워싱턴 포스트 이사

1987 코카콜라 이사

1965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

1956 버핏 투자회사 설립

수상 2012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2011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시상식 자유훈장

2010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명언

-아기들이 배고프면 손가락을 빨며 ‘밥 달라’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그런 나이가 지났다. 기회와 성공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말라. 그 기회와 성공을 찾고 직접 만들어야 한다.

-습관의 고리는 도저히 깰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기 전까지 너무 가벼워서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과 행복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 어떤 성공은 그 사람에게 성공이었을지 모르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행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투자에 있어서 본인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된다.

-평소에 큰돈이 나가는 것은 신경 쓰면서 사소하게 작은 돈이 나가는 것들은 신경을 덜 쓴다. 하지만 이게 반복되면 크나큰 지출로 이어진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같은 물건을 똑같이 만들어 낸다면, 남들과 똑같은 서비스를 한다면 현재로서는 통할지 모르나 결국에는 밀려나게 된다.

-위험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데서 온다.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나를 사랑하면 성공한 삶이 될 것이다.

-남을 움직이게 하려면 나부터 움직여라.

-정직은 아주 비싼 선물이다. 싸구려 같은 사람한테서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려라.

-스스로 기회를 찾아서 쟁취해야 한다. 만약 결정하였다면 우유부단하게 있지 말고 신속히 결단해야 한다.

-성공한 사람은 모두 끈기가 있다. 한 가지 일을 할 때,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끝까지 밀어붙여라. 끈기 없이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끊임없는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상황도 이겨 낼 수 있다.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은 잘 할 필요가 없다.

-잠자는 시간에도 돈이 들어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당신은 죽기 전까지 일을 해야만 할 것이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

투자의 황제,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는 매년 경매에 붙여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전액 기부된다. 1999년부터 웨렌 버핏이 스스로 시작한 이 행사는 올해에는 30억 원에 낙찰되었다. 경매 시작 2분 만에 11억 원을 써낸 입찰자가 나왔다고 하는데, 낙찰가는 최종 267만 9001달러(원화 30억 원)를 써낸 사람에게 돌아갔다. 세계의 부호들은 그와의 대화만으로 수업이 된다고 느끼고 그 가치를 매겨 경매에 참석하는데, 경매 사상 최고가는 345만 달러로 원화로 환산하면 40억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7. 03:00




 

 

선조말

천주교유입에 대한 우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민중들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금수와 같은 삶으로 전락하게 된 조선사회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학의 유입이 그것이다. 천주학은 조선왕조의 윤리의식을 근본부터 어지럽히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천주학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이다. 당시 천주학은 서학의 가톨릭을 지칭하는데, 천주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천주학은 로마 가톨릭의 예수교 선교자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1552-16010)가 중국에 들어와 서교西敎를 포교하게 되었고, 포교의 일환으로 리치가 중국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를 펴낸 데서 연유한다. 조선 선조 말년(1608년)부터 『천주실의』를 비롯한 많은 서양 책들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오면서 천주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천주학이 퍼지기 시작하자 1783(정조 7년)에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사신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게 됐으며,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천주교회로 찾아가 교리를 익히고(1784년), 그 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됐다.

 


천주교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실제적으로 중국에서 선교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천주 개념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후 재주 있는 많은 젊은이들은 천주교를 믿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조선왕조를 지태해온 유교의 사회질서 체제를 위협하고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1860년(경신)에 글을 지을 당시에 수운은 서학을 표방하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이 무력으로 동양을 침범하고 강제로 국권을 침탈하는 것을 보고 천주학에 대한 위력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주교가 세상을 구할 올바른 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깨닫게 된다. “지난 경신년에 이르러 전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천주의 뜻으로 부귀는 바라지 않고 온 세상을 처서 빼앗아 (서학을 믿는) 교당을 세워 서도를 행한다고 하더라. 나는 또한 ‘그럴 수 있을까 어찌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글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천주학에 대한 수운의 두려움은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운은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칭하고, 학을 천주라 칭하며, 교를 성교라 하니, 이는 천시를 알고 천명을 수용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를 하나하나 열거해 보아도(그들이 펼치는 서학의 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알 수 없는 까닭에(그들이 이렇듯 강성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나 역시 두려워하여 늦게 태어난 것이 한스러울 즈음에”라고 그는 말한다.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는 천주학의 도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으나 천주학 또한 서양인들이 천시에 따라 천명을 받아 나온 것이므로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그가 “서양 사람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 그 조화를 부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언급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4. 02:00

 






최수운의 시대

조선말의 내우외환內憂外患

 






수운은 유명한 유학자의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은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단봇짐으로 떠들어온 과부를 만나 수운을 낳았던 것이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과 기백이 비상했던 것은 물론이고, 비범한 안광을 가진 남다른 용모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자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부의 사랑과 귀염을 받으면서 유년시절부터 선비로 자랐고 상당한 학식도 쌓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통정할 수 없는 번민과 고독한 심정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유소시절인 7세 때쯤에 생모를 여읜 후, 16세 때에 부친인 근암공도 별세하여 3년 상을 마치자 18세에 집을 나가 호협들과 교류하면서 활도 쏘고, 술도 마시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21세(1844년)부터 31세(1854년)까지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을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게 된다.

 

수운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세태를 직접 목도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가 전국을 주유周遊했다는 사실은 천주의 가르침에 대한 화답和答을 노래한 시詩, 즉 「화결시和訣詩」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다 돌아보니 물이면 물, 산이면 산 모두를 다 알겠더라”. 그리고 그가 세태를 목도하게 됐다는 사실은 「권학가」의 “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을 「도원기서」에서는 ‘주유팔로周遊八路’라는 말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세태를 둘러보면서 민중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무엇을 깨닫게 되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많은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했던 질서 체제의 붕괴와 열강 제국주의 침탈에 의한 국권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이었을 것이다. 우선 이러한 문제를 수운이 얼마나 심각하게 통감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수운의 정신을 에워싸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수운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수운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내적으로는 말 그대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유교적 이념이 무너져 인심과 풍속이 없어진 사회였다. 「권학가」에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있지마는 인심풍속人心風俗 괴이怪異하다. 세상世上구경 못한인생人生 출생이후 첨이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강요와 유교적 사회질서로 유지해왔던 윤리적인 가치체제의 기강이 무너져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평생平生에 하는근심 효박淆薄한 이세상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과 부불부父不父 자부자子不子를 주소간晝宵間 탄식歎息하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누구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을 따르지도 않고 돌보지 않으며 각기 제 맘대로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로부터 조선사회는 지배계급의 탐학과 부패로 물들어 있었고, 그로 인해 어느 성현 군자가 나와도 구제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몽중노소문답가」의 “매관매작賣官賣爵 세도자勢道者”, “전곡錢穀쌓인 부첨지富僉知”, “유리걸식流離乞食 패가자敗家者” 등이나 “아서라 이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不足施요 공맹지덕孔孟之德이라도 부족언不足言이라”는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궁핍과 핍박을 받아 왔으며, 유리걸식이 일상이었고, 일반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운이 살았던 조선사회의 민초들은 그야말로 금수禽獸 같은 삶 자체였다.

 

조선 왕조는 대외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당시 지구촌의 세태는 서양의 몇몇 열강 제국주의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상황이었다. 서양 제국주의는 18세기경에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갖추면서 탄생한다. 몇몇 국가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정교한 기계를 발명하고, 신무기로 무장한 채 중상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특히 서양의 제국주의는 동양을 넘보기 시작하면서 극동에까지 들어와 무력으로 국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840-1842년에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은 그 시발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중국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7년에 광저우를 점령하여 텐진조약을 강요했고, 1860년에 청조가 조약의 비준을 반대하자 북경을 점령하기도 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그러하자 이어 조선왕조의 상황도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832년에는 영국 상선이 서해안에 들어와 통상조약을 체결을 요구하였고, 1845년에는 영국 군함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하였으며, 1850-53년에는 미국과 러시아 배들이 조선 연안에 출몰하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왕조를 위협하는 서양 제국주의는 수운에게 국권이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겨주게 됐다. 이에 대한 수운의 생각은 “괴이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세간에 흉흉하게 떠도는데, 서양 사람들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져서 그 조화의 힘을 부리는 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고, 또 무기로써 공격하여 싸움을 하면 그 앞에 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니, (이와 같이 강성한 서양의 힘에) 중국이 망해버리면 어찌 우리나라도 따라 화를 당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수운은 조선의 정세가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국권이 풍전등하에 몰릴 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0. 16. 02:00






TED강의

다이애나 윈스턴의 명상의 과학

 






20년 이상 마음챙김 연구와 훈련을 해온 다이애나는,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어 현재에 머무는 연습이 일상생활과 인간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명상은 면역체계를 향상시킬 수 있으며, 특히 스트레스에 효과적이다.

 

*명상 연습과 치료를 병행한 건선(피부병)환자들이 명상을 하지 않고 치료만 받은 사람들보다 3배 빨리 치유되었다.

 

*장기간 수행을 한 사람들의 경우 노화로 인한 뇌 피질 축소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8주간 매일 27분씩 명상 연습을 한 사람들의 뇌에서 집행기능과 관련 있는 전두엽피질, 의사결정 및 유연한 사고와 관련된 뇌의 부위들에서 미세한 구조적 변화가 나타났다.

 

*깨어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타고난 권리다.

 

약 20년 전에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던 중 저는 그곳의 수도원에 가서 명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거 좋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었죠.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으로 앉거나 걸으면서 한 번에 여러 시간 동안 명상 훈련을 하였습니다. 명상을 할 때 제 마음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제멋대로였죠. 저는 온갖 신경증과 걱정, 두려움, 공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내면적으로 뭔가 바뀌었음을 알았습니다.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삶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든 상관없이 저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명상에 대한 대중 인식의 변화

그것은 수 년 전이었고, 저는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돌아와서도 저는 명상을 계속했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마음챙김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20~25년 동안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마음챙김이 문화에 등장하는 것을 보았고 지금 우리는 학교,기업,의료계,법률,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마음챙김이 도입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훈련은 당신의 배경, 출신지,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명상에 관한 연구

마음챙김은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챙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상에 대해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학자들은 마음챙김을 지난 10년 간 연구했고 그전에 100개의 연구가 있었다면 지금은 1000개가 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마음챙김이 육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그리고 주의집중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선환자 명상연구

건선(피부병)에 대한 일반적 치료법 중 하나는 태닝 부스와 같은 곳에 넣어서 UVB(ultraviolet B,중中파장 자외선) 광선을 쏘이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전형적인 치료를 받게 하고, 다른 한 그룹은 그와 동시에 명상 CD를 듣게 하였습니다.

 

CD를 들으며 명상 연습을 한 사람들은 나중에 결과를 보았을 때 명상을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3배나 빨리 치유되었습니다.

 

 

휴대폰 앱을 사용한 행복과 마음챙김의 상관관계 조사

연구팀은 전 세계 2,500명의 사람들에게 하루 중 아무 때나 휴대폰으로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세요?"  "지금 뭐하고 있나요? 거기 집중하고 있나요? 기분이 어떠세요?

 

사람들이 집중하지 않을 때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때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머무를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챙김은 불안, 우울증, 온갖 종류의 정신 건강 문제, 또는 21세기 인간의 정신 건강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명상과 연구

연구팀은 20년 또는 30년 동안 명상을 해온 사람들의 뇌를 조사했습니다.  그들의 뇌를 같은 연령대의 일반인의 뇌와 비교했는데 명상가들의 두뇌는 피질이 얇아지지 않았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두뇌의 피질 두께가 얇아집니다. 노화로 인한 피질 축소 현상입니다.

 

명상가들, 장기간의 명상가들의 뇌에서는 전두엽피질과 뇌섬엽피질이 얇아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대단하군, 난 명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하지만 연구팀은 단 8주 동안만 명상을 한 사람들의 뇌 구조도 살펴보았습니다.

 

결과는 8주간 매일 27분씩 명상 연습을 하자 사람들의 뇌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집행기능과 관련 있는 전두엽피질, 의사결정 및 유연한 사고와 관련된 뇌의 부위들에서 미세한 구조적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명상은 신체와 뇌에서 정보를 통합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 인식과 연민과 관련돼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발견됐습니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온전히 함께할 때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활력을 얻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지인들, 지역사회, 직장, 그리고 더 큰 세상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명상의 맛보기를 소개해드리고 실제 많은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이것은 그냥 몇분 동안만 하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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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0. 13. 02:00


 

 

막달라 마리아의 전설과

다빈치코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여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 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갈 때도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 고 가까이서 지켜 보았으며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도한 사람이 라고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 막달라 마리 아에 대한 오랜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는 그 오라비 나사로를 비롯하여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단의 제자들 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 근처의 해안에 도달하였다. 그녀는 그곳 주민들에게 예수를 전 파하여 개종시켰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르세유 근처의 한 동굴 에서 30년 동안 고행의 삶을 살다 죽었는데 그 유해가 생막시 맹 마을 교회에 있다고 한다.

 



1279년에 도미니크 수도회가 그 곳에 수도원을 짓다가 석관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이 석관을 사 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것으로 믿었다. 그로부터 십수년 후 그녀를 기리는 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이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의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 전설에 여러 가지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졌다. 막 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사랑하던 여인으로서 예수와 결혼해서 자 식을 낳았으며 아이를 데리고 프랑스 땅으로 왔다고 한다. 프랑 스 왕가의 혈통은 이 자손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이 그 대표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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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0. 9. 21:00




 

 

나라의 가장 큰 명절

개천절開天節

 




 

개천절 노래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개천절이 되면 개천절 노래를 부르곤 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개천절 노래, 정인보 작사·김성태 작곡)

 

하늘이 열린다

‘하늘이 열린다’는 뜻을 가진 개천절이란 공휴일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주와 하늘을 숭상하면서,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살고자 했던 민족이었습니다. (천문학자 박석재 박사)

 

개천開天이란?

 <삼성기 하>에 환웅천황이  무리 3천명을 이끌로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웠다(개천입교開天立敎)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개천이란 개국의 의미이다. 또 <신시본기>를 보면 성인聖人을 보내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개천이라 한다(遣往理世之謂開天)고 하여 개천開天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그 밖에도 개천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더 있는데 ‘神市開天之道 亦以神施敎’(단군세기),  ‘神市開天 以土爲治’(삼한관경본기), ‘桓雄開天 主祭天神’(소도경전본훈) 등이다.  즉 개천은 환웅천황이 신도(神道, 삼신의 도)로써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께 제사를 지내고,  토土의 중정中正의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상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개천절이 개천이란 말도 이런 의미이다.

 

개천절 제정의 유래

1909년 1월 15일 나철羅喆에 의해 대종교大倧敎가 중광中光(다시 교문敎門을 염)되면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하였습니다. 음력 10월 3일은 3월 16일과 함께 신시 배달 이래로 우리 민족이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던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음력 10월 3일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0월 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천사상 나는 대한민국이 컴퓨터라면 다시 포맷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개천사상을 바탕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용이 승천하는 그날이 오면 ‘개천가’는 드높게 울려 퍼질 것이다. (박석재 전 한국천문연구원장)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0. 9. 00:04







 

개천절은 왜 10월3일인가 

 

 

 

 

개천절은 BCE 2333년 음력 10월 3일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여 제정한 국경일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가람문고본에 조선시대 무당에 대한 기록을 한 <무당내력(巫黨來歷)>이란 책이 있다. 19세기 ‘무당내력(巫堂來歷)’은 “상원갑자 10월3일에 신인(神人) 단군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교를 세우고 백성을 가르쳤다”고 썼다.

 


구한말 대종교 중광의 근거가 되는 ‘단군교포명서’의 서두에는 “오늘은 우리 대황조단군성신(大皇祖檀君聖神)의 4237회 개극입도지경절야(開極立道之慶節也)라. 우형(愚兄) 등 13인이 백두산 대숭전에서 … 우리 동포형제자매에게 삼가 고하노니”라고 적혀 있다. 포명일자를 ‘단군개극입도 4237년(1904) 10월3일’이라고 끝에 명기했다.

 


 10월 3일은 단군왕검이 개국 천제를 올린 날

<단군세기>를 보면 “배달 신시 개천 1565(단기 원년, BCE 2333)년 10월(上月) 3일에, 신인왕검께서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셨다(至開天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하야 有神人王儉者가 五加之魁로 率徒八百하시고 來御于檀木之墟하사 與衆으로 奉祭于三神하시니)는 구절이 있다.  10월3일에 단군왕검이 천제를 올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30. 01:00






 

 

TED강의

스트레스가 당신의 뇌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경쟁 스포츠를 하거나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와 같이 여분의 에너지와 집중력이 필요할 때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되는 스트레스는 실제로 우리의 두뇌를 바꾸기 시작한다. 이 영상은 만성 스트레스가 어떻게 뇌의 크기, 구조 및 기능, 심지어 유전자 수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만성 스트레스는 뇌의 크기와 뇌의 구조, 뇌의 기능, 그리고 유전자 수준까지도 바꾼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편도체 내의 신경망 수가 증가하고 활성화되어 정서적(특히 공포와 잠재적 두려움에) 과잉반응을 보인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학습과 기억, 스트레스 조절과 관련된 뇌 영역인 해마의 기능이 저하되고 해마에서 만들어지는 새 뇌세포의 수도 감소한다.

 

또 뇌의 크기가 줄어들고, 뉴런 사이 시냅스 연결이 손상된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집중, 의사결정, 사회적 상호작용 등의 행동을 조절하는 전전두엽피질이 줄어든다.

어릴 때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평생 동안 스트레스에 더 민감한 유전자를 갖게 된다.


이러한 후생적(epigenetic) 변화는 후세에 유전될 수 있다.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해마의 크기를 증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과 명상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