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7. 26. 06:30




 한자이야기

안제미擧案齊眉

 

 

 

 

 

금주의 한자 ‘擧案齊眉거안제미’에서,

 

‘擧거’는 ‘들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받쳐 들다’는 뜻을 갖는다. 우리가 자주 쓰는 ‘擧手敬禮거수경례’라는 말은 ‘오른손을 오른쪽 눈썹까지 올려서 하는 경례’를 이른다. ‘손 수手’, ‘공경할 경敬’, ‘예도 례禮’자를 쓴다.

 

‘案안’은 ‘밥상’ 혹은 ‘소반’이라고 해석하는데, 음식을 받쳐 들고 갈 때 쓰는 다리 짧은 나무 탁반을 말한다. 또 ‘책상’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지금과는 달리 좁고 긴 탁자를 지칭하며, ‘문서’나 ‘안건’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齊제’는 ‘가지런하다’, ‘같다’는 뜻이다. 동의어인 ‘가지런할 정整’자와 결합된 ‘整齊정제’는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다’는 뜻인데, 이 말은 ‘옷을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다’는 뜻으로도 써서 보통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다’라고 표현한다.

 

‘眉미’는 ‘눈썹’을 말한다. ‘두 눈썹 사이’를 ‘사이 간間’자를 써서 ‘眉間미간’이라 하는데, 여기에다 ‘두 량兩’자를 넣어 ‘兩眉間양미간’이라고도 한다.

 

이 ‘거안제미’는 ‘밥상을 눈썹 높이로 받쳐 올린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거나 또는 부부가 서로 간에 공경하고 사랑함을 형용한 말이다. 이를 줄여서 ‘齊眉제미’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동관한기東觀漢記》〈양홍전梁鴻傳〉과 《후한서後漢書》〈양홍전梁鴻傳〉에 나온다.

 

‘동관東觀’은 중국 후한 때 수도 낙양의 황궁에 있는 전각 이름인데, 황실의 도서가 보관돼 있었고 역사를 편찬하는 곳이었다.

 

《동관한기》는 초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서기전5-서기57)부터 제12대 영제靈帝 유굉劉宏(156-189)까지의 후한 왕조 역사를 《사기史記》의 경우처럼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 중국 최초의 관찬 사서인데,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황제의 사0관을 거쳐 완성되었다. 총 1백4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삼국시대와 양진 시대까지는 《한기》라고 불렸다가 남북조 때에 와서야 《동관한기》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 ‘세 가지 역사책’이라는 뜻의 ‘삼사三史’라고 하면 전한 사마천司馬遷(약 서기전145-약 서기전90)의 《사기》, 후한 반고班固(32-92)의 《한서漢書》 그리고 이 《동관한기》를 꼽았다. 그러다가 남조南朝 때 범엽范曄(398-445)의 《후한서後漢書》가 편찬되자 《동관한기》는 ‘삼사’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후한서》보다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록이 훨씬 자세하며, 《후한서》에 없는 내용도 기록돼 있어 후한 왕조를 연구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문헌이다.

 

그럼 양홍과 그의 아내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때는 후한 초, 부풍扶風 평릉현平陵縣(지금의 섬서성 함양咸陽)에 양홍梁鴻(자는 백란伯鸞)이라고 하는 가난한 서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부지런히 노력해서 당시의 최고학부인 태학太學에 당당히 들어갔다.

 

양홍은 학업을 마친 후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은 그의 품격이 높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수도인 낙양에서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모두들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태학생 출신이라는 티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농사꾼과 마찬가지로 밭에 나가서 농사일을 했다.

 

이렇게 수년 동안 생활하자, 마을 가까이 사는 사람이든 멀리 사는 사람이든 모두 양홍이 학식이 있는 농사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양홍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같은 현縣에 맹孟 대인이라는 갑부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딸이 시집을 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맹 대인이 화를 내며 딸에게 물었다.

 

“네 나이 이미 서른 인데 아직도 여기도 시집 안 간다, 저기도 시집 안 간다고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쩔 셈이냐? 설마 평생 시집 안 가고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

 

딸이 대답했다.

 

“양홍 같은 사람이라야 시집 갈 거예요.”

 

맹 대인은 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사람을 보내 양홍에게 딸의 마음을 전달했다. 양홍은 맹 소저小姐가 자신에 맞는 배필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통해 구혼을 하였고 맹씨 집에서는 자연히 즉각 수락을 하였다.

 

얼마 후, 양홍은 맹 소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결혼 첫날부터 이레가 될 때까지 양홍은 신부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맹 소저는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어째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 당신은 품격이 고상하며 아내를 고르는 것도 퍽 신중하여 일찍이 여러 사람이 혼담을 꺼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비록 얼굴이 예쁜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혼담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당신과 의기투합하여 부부가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레가 되었는데도 당신은 저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저에게 틀림없이 어떤 잘못이 있을 터이니 당신에게 용서를 빕니다!”

 

양홍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어서 이윽고 아내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결혼하려고 생각했던 사람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검소한 아내요. 그래야 나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은거 생활을 할 수 있소.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것은 능라주단綾羅綢緞이요, 머리에 하고 있는 것은 금은보화金銀寶貨이니, 이게 어디 내가 바라던 바이겠소?”

 

맹 소저는 남편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 몸에 입고 있는 것은 혼례복입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뜻을 알았다면 진작부터 평범한 옷과 신발을 준비했을 텐데, 당신은 어째서 이 때문에 마음을 쓰고 계셨습니까?”

 

양 소저는 그때까지 초야를 치르지 않아 미처 혼례복을 갈아입지 못했던 것이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맹 소저는 내실로 들어가더니 머리장식을 빼버리고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채소바구니를 팔에 걸고 나왔다.

 

양홍은 이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서 말했다.

 

“이제야 진정한 양홍의 아내로서, 나를 받들어 줄 수 있소!”

 

말을 마치고 그는 아주 흔쾌히 아내에게 이름과 자를 지어주었는데, 이름은 ‘빛 광光’자를 써서 맹광이라 하고, 자는 덕요德曜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 부부는 패릉覇陵이라는 곳의 산속으로 이사를 했다. 부부는 농사와 길쌈으로 생활을 했고 시간을 내서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비파琵琶도 탔다. 시간이 오래 되지 않아서 그들은 패릉에서도 이름이 나게 되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양홍이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친구들에게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중에 황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그것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그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한동안 제齊와 노魯 지방에 가서 머물렀다가 맨 끝에는 오吳 지방에 가서 일부러 고백통皐伯通이라는 부자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의탁하여 방 한 칸을 빌려 머물렀다. 양홍은 매일 밖에 나가서 남의 집 쌀을 찧어주거나 밭갈이를 하였고, 맹광은 집에서 실을 뽑아서 베를 짰다.

 

매일같이 양홍이 집에 돌아올 때면 맹광은 밥과 반찬을 올려놓은 소반을 받쳐 들고 아주 공경스럽게 양홍의 면전으로 다가왔다. 남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맹광은 양홍을 쳐다보지 않았고 게다가 매번 소반을 눈썹 높이까지 받쳐 들고 건넸다. 양홍도 언제나 매우 예의 있게 두 손으로 소반을 받았다.

 

어느 날 고백통은 그들 부부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광경을 보고 양홍이 예사 농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곧 그의 일가를 자기 집으로 오게 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서 양홍이 마음 편하게 글을 읽고 글을 짓게 했다. 후에 자식들도 낳고 잘 살다가 양홍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때야 비로소 맹광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 맹광의 고사에서 ‘가시나무 비녀와 무명 치마’라는 뜻의 ‘형차포군荊釵布裙’이라는 말이 생겼다. ‘가시나무 형荊’, ‘비녀 차釵’, ‘베 포布’, ‘치마 군裙’의 ‘형차포군’은 부녀자의 소박한 옷차림을 말한다. 또 ‘아내 처妻’자를 쓰는 ‘형처荊妻’라는 말도 생겼는데, 이것은 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단어】

 

擧거: 들다. /手(손수)부, 총18획, jǔ/

 

案안: 밥상. 책상. /木(나무목)부, 총10획; àn/

 

齊제: 가지런하다. /齊(가지런할제)부, 총14획, qí/

 

眉미: 눈썹. /目(눈목)부, 총9획, méi/

 

【출전】

 

里孟氏女, 容貌醜而有節操, 多求之不肯. 父母問其所欲, 曰: “得賢婿如梁鴻者.” 鴻聞乃求之. 女椎髻, 著布衣, 操作具而前. 鴻大喜, 曰: “此梁鴻妻也, 能奉我矣.” 字之曰德耀, 名孟光. 將妻之霸陵山, 耕耘織作以供衣食, 彈琴誦詩以娛其志. 鴻將之會稽, 作詩曰: “維季春兮華阜, 麥含金兮方秀.” 適吳, 依大家皋伯通廡下賃舂. 每歸, 妻具食, 不敢于鴻前仰視, 案常齊眉. 伯通察而異之, 曰: “彼傭賃, 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 《동관한기東觀漢紀》〈양홍전梁鴻傳〉.

 

遂至吳, 依大家皐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 伯通察而異之, 曰: “彼傭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乃方舍之於家. 鴻潛閉著書十餘篇. 疾且困, 告主人曰: “昔延陵季子葬子於嬴博之閒, 不歸鄕里, 愼勿令我子持喪歸去.” 及卒, 伯通等爲求葬地於吳要離. 咸曰: “要離烈士, 而伯鸞淸高, 可令相近.” 葬畢, 妻子歸扶風. - 《후한서後漢書》〈양홍전梁鴻傳〉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