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7. 8. 14. 18:52

 

 

 

이스라엘 시온주의Zionism 운동의 등장

 




로마의 탄압 속에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고향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 벌어졌을 때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수는 수만 명에 불과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종교 때문에 현지인들에 잘 동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게토ghetto(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 강제 격리를 위해 만든 거주 지역)에 모여살고 직업선택에 제한을 받는 등 천민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살던 곳의 주민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것은 프랑스혁명기부터였다. 프랑스는 혁명의 주된 이념인 자유와 평등에 입각하여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것이 유대인 해방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서유럽에서는 점차 철폐된 반면 동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더 나아가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논의와 운동이 19세기말 시작되었다. 이러한 운동을‘시온주의Zionism’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에서 온 말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60-1904)에 의해 명확한 강령과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896년 『유대 국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세계 시오니스트 총회가 스위스 바벨에서 개최되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영국 정부가 추천하는 아프리카의 우간다, 시나이 반도에 있는 엘 아리쉬 등이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오로지 팔레스타인만이 유대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그리고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 실용주의적 입장이 우세해져 일단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정착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 초에 들어 유럽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주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것은 러시아 유대인들이었는데 당시 러시아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유독 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이 등장할 무렵 팔레스타 인에는 유대인들이 3만 5,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물결이 있었는데 도합 45만명 정도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고 추정된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