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에서의
칼 마르크스 등장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의 유서 깊은 로마가톨릭 도시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교 랍비의 후예였고, 개신교로 개종한 변호사였다. 아버지는 마르크스가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한 나머지 그를 본Bonn 대학의 법학과로 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법학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결국 그는 진로를 바꾸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베를린 훔볼트Humboldt 대학교로 전학하여 역사와 철학의 배움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에는 헤겔의 기본 사상의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해석하여 인간성의 해방을 주도하려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청년헤겔학파가 그것이다. 베를린에 온 마르크스는 이 학파에 속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에 물들면서 헤겔 좌파의 길로 발을 옮기게 된다. 1841년 마르크스는 예나대학교(Universität Jena)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란 제목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3년에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서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생존에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뜬구름 잡는 관념론을 비판하게 된다.
독일에서 급진적인 좌파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론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는 비밀 결사 단체인 “정의의 동맹(Bund der Gerechten)”에 가입한다. 1844년 말경에 파리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만나 함께 노동운동의 세계관을 완성하게 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급진적인 인물로 찍혀 추방될 위기에 처하게 됐고, 결국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영국으로 건너간 마르크스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청년헤겔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본주의 자체에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잉태되어 있다고 보고, 이로부터 역사유물론에 대한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1846년에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하게 됐는데, 여기에서 유물론의 기본적인 원칙을 정해 놓은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확립한다. “소외론疎外論(Entfremdung)” 또한 이 시기에 작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