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에서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의 태동
키에르케고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시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국가라는 대립적인 것을 조화하여 시민사회의 안정성을 추구한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19세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와해되었다. 심지어 헤겔철학의 절대이념에 반기를 든 쇠렌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1813~1855)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복轉覆을 꾀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적 사고를 무너뜨렸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zsche(1844~1900)는 신에 기원하는 도덕적 가치를 뒤집음으로써 신[主]과 인간[客]에 대한 주객을 전도顚倒시켰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主體의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인간의 실존實存을 드러냈고, “신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라 하여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태동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변증법적 신학”과 카알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의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반면에 니체는 초인超人의 철학을 내놓음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드러냈고, “신은 죽었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실존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했다. 1841년에는 베를린에서 셸링Schelling의 강의를 들었고, 그 후에 문필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의 논쟁에 휘말려 들었고, 교회와의 타협을 보지 못하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그는 고독한 삶을 보내다가 얼마 살지 못하고 42세가 되던 1855년에 젊은 나이로 코펜하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진리는 전통적인 학문에서 밝혀져 전수되어 온 것도 아니요, 영원한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짜여진 교리를 깨닫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 앞에 당당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객관적으로 규정된 진리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완전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완전한 인간적인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실존實存”의 가장 깊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은 동양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진리는 바로 신적인 것 안으로 성장해 들어가 실존자實存者가 되는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실존”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오직 일회적인 존재인 각자는 내면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야 실존자가 될 수 있다. 보다 깊은 내면에 이른 자신의 존재는, 빛이 모여들고 내어 주는 광원光源과 같으며, 신이 받아들이고 내어 주는 중심체와도 같은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모여들고 거기로부터 퍼져 나가는 독자적인 자기활동의 주체적인 개별자는 바로, 어느 누구도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신 앞에 선 “단독자(Das Einzelne)”이다. 단독자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실존자가 되는 셈이다.
실존을 말하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이데아에다 생명을 가진 개별자를 맞세웠듯이, 헤겔의 사고로부터 추상된 보편자에다 개별적인 의미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맞세운다. 개별자는 절대로 보편자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개별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깊숙한 내면內面에 이름으로써 언제나 자립적으로 실존하며, 고유하게 활동하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한 개별자는 완결되지 않은 채 언제나 고유하게 행동하는 존재이다. 고유하게 행동하는 개별자는 항상 “비약飛躍(Sprung)”을 감행敢行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삶의 과정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감으로써 전진前進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진에는 하나하나의 결단決斷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에는 ‘가능성’이 언제나 현존해 있다. 거기에는 ‘이리할까 저리할까’하는 선택의 망설임이 있고, 절망과 한계에 부딪힌 좌절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결단에는 항상 불안不安이 따라다니고, 신앙信仰이 떠오른다. 불안은 결과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앞질러 가 있고, 앞질러 가 있는 불안의 바탕에는 자유自由가 버티고 있다. 자유는 의지의 선택으로 무한한 것이며, 무無에서 생겨난다. 여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이 없이는 비약을 감행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에 대한 기분, 감행, 불안, 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유 등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범주들이다.
하나하나의 상태에서 순간순간 확고한 결단을 주도하는 것은 내면의 주체이고, 주체적 결단은 곧 비약을 감행함으로써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에 이르는 길은 세 방식이 있다. 첫째는 이미 있었던 것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명상하는 “감성적인 길”이다. 둘째는 결단을 내리는 행위와 자유로운 선택, 즉 개별자의 독자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윤리적인 길”이다. 여기에는 이미 자신이 혼자(單獨)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마주치게 된다. 불안은 완전히 혼자인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홀로 감당해야 하므로 결단이 요구된다. 세 번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맡겨짐으로써 궁극적인 내면에 이른 “종교적인 길”이다.
종교적인 신앙은 현존재(Dasein)와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神]에 매달려 그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설(Paradox)은 여기에서 나온다. 역설적이면 역설적일수록 신앙은 그만큼 더 커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무조건 순종順從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역설은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때에 인간은 절망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럴 때 신앙을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최고의 확증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실존자는 결국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세계에서 풀려나 하나님에게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진정한 실존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