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7. 9. 8. 01:30




 

로마제국의 지배와

프랑크족의 등장

 




 

갈리아는 기후도 온화하고 땅도 비옥한 편이어서 번영을 누렸다. 귀금속 장신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골족 장인들은 유리와 비누, 도자기 등을 만들었다. 골족은 평화스럽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골족 전사들은 적의 머리를 베어 허리춤에 달고 다니곤 하여 아주 용맹스런 사람들로 인식되어 여러 나라의 왕들이 이들을 용병으로 이용하였다. BCE 385년에는 알프스를 넘어온 골족 전사들이 로마 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갈리아는 수세에 서게 되었고 로마의 정복대상이 되었다.

 

프로방스를 속주로 지배하던 로마는 BCE 1세기 중엽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 정복전쟁을 ‘갈리아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그 전쟁을 지휘한 인물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갈리아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갈리아의 도시들을 기하학적인 설계에 따라 정연한 모습으로 건설하였다. 열주들이 늘어선 광장, 신전, 공회당, 대규모 극장, 원형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이 세워졌다. 토목에 능한 로마인들은 상수도도 설치하고 포석으로 포장된 견실한 도로를 건설하였다.

 



골족은 점차 로마의 지배에 동화되었다.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귀족들은 자제들을 학교에 보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만들었다. 그 결과 골족의 과거보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사상에 물든 골족 엘리트층이 형성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는 5세기에 끝이 났다. 게르만족의 일파로서 라인강을 건너온 프랑크 족이 갈리아를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다.

 

이들의 나라는 로마제국처럼 법체계를 갖춘 정연한 기구와는 거리가 멀어 왕이 아들들에게 왕국을 상속재산으로 분할해 주었다. 그래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결국 동서 프랑크 왕국(프랑키아)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이 프랑스가 되고 동프랑크 왕국이 독일 즉 신성로마제국이 되었다.

 

10세기 말에는 파리와 그 주변지역을 영지로 갖고 있던 카페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파리는 프랑스의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었다. 카페 왕가의 왕들은 지방의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수도 파리에 행정기구와 사람 그리고 돈이 몰리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 그 과정은 가속되어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다. 그 결과는 오늘날의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인구의 5분의 1, GDP의 4분의 1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프랑스의 철도노선과 고속도로 노선도 파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방사형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프랑스의 중앙집권적 경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