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종교개혁과 정교분리 과정
가톨릭을 국교로 강제하였던 프랑스에도
‘종교개혁’(Reformation)시대에는 가톨릭을 거부하고 루터와 칼뱅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단들이 생겨났다. 소위
‘위그노’들이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자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웠다. 16세기 후반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사이의 내전이 근 40년간 계속되었다.
위그노 세력의 영수 앙리 드 부르봉이 가톨릭 세력과 타협을 벌여 앙리 4세로서 프랑스 왕좌를 차지하였다. 타협의 결과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나(낭트 칙령)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자유는 계속 위협을 받았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국이 하나의 신앙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위그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였다. 당시 많은 위그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 신교도 국가로 이주하였는데 그 수가 3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프랑스 국내의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신민으로서 공식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고 국가로부터 갖가지 협박과 탄압에 시달렸다. 이들의 종교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가 인정된 것은 프랑스혁명으로 인해서였다. 프랑스혁명은 종교와 신분상의 차별을 일소하고 시민들의 법적 평등을 확립하였다. 혁명지도자들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였는데 이 선언은 현재 프랑스헌법의 전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만방의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해 혁명세력 내에서도 온 건파와 과격파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과격파들은 왕 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며 부르봉 왕가를 지지 하는 가톨릭 교회를 적대시하였다. 심지어는 기독교의 신 대 신 인간 이성을 신성시하는 종교도 급조되었다. 가톨릭 교회 는 그 토지와 건물 등 막대한 재산을 국가 재정문제 해결을 꾀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에 빼앗겼다. 혁명이 종식된 후에도 교회는 그 재산을 되찾지 못했다. 많은 부동산이 이미 일반인 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혁명기에 가톨릭 교회는 반혁명 진영을 지원하는 바람에 그 위신이 크게 추락하였다. 혁명 이전부터 계몽사상이 확산되 면서 사회상층부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이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혁명으로 인해 교회의 신망은 큰 상 처를 입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정략상 교황청과 화해하였지 만 가톨릭은 예전과 같은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성직자 들은 국가가 지불하는 봉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국가에 충성 을 맹세하였기 때문에 국가 공무원처럼 되었다.
국교가 아니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의 이러한 지위 는 19세기 내내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공화파들은 국가와 교 회간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였다. 종교가 개인양심의 문제가 된 만큼 국가를 종교와 무관한 제도로 만들자는 것이 공화파 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1905년 국가가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4대 공인종교(가톨릭교, 칼뱅교, 루터교, 유대교)에 대한 일체의 자금지원 을 못하게 하는 정교분리법이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로써 정 교분리의 오랜 과정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