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운의 시대
조선말의 내우외환內憂外患
수운은 유명한 유학자의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鋈은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단봇짐으로 떠들어온 과부를 만나 수운을 낳았던 것이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과 기백이 비상했던 것은 물론이고, 비범한 안광을 가진 남다른 용모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자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부의 사랑과 귀염을 받으면서 유년시절부터 선비로 자랐고 상당한 학식도 쌓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통정할 수 없는 번민과 고독한 심정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유소시절인 7세 때쯤에 생모를 여읜 후, 16세 때에 부친인 근암공도 별세하여 3년 상을 마치자 18세에 집을 나가 호협들과 교류하면서 활도 쏘고, 술도 마시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21세(1844년)부터 31세(1854년)까지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을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게 된다.
수운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세태를 직접 목도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가 전국을 주유周遊했다는 사실은 천주의 가르침에 대한 화답和答을 노래한 시詩, 즉 「화결시和訣詩」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다 돌아보니 물이면 물, 산이면 산 모두를 다 알겠더라”. 그리고 그가 세태를 목도하게 됐다는 사실은 「권학가」의 “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을 「도원기서」에서는 ‘주유팔로周遊八路’라는 말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세태를 둘러보면서 민중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무엇을 깨닫게 되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많은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했던 질서 체제의 붕괴와 열강 제국주의 침탈에 의한 국권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이었을 것이다. 우선 이러한 문제를 수운이 얼마나 심각하게 통감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수운의 정신을 에워싸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수운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수운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내적으로는 말 그대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유교적 이념이 무너져 인심과 풍속이 없어진 사회였다. 「권학가」에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있지마는 인심풍속人心風俗 괴이怪異하다. 세상世上구경 못한인생人生 출생이후 첨이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강요와 유교적 사회질서로 유지해왔던 윤리적인 가치체제의 기강이 무너져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평생平生에 하는근심 효박淆薄한 이세상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과 부불부父不父 자부자子不子를 주소간晝宵間 탄식歎息하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누구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을 따르지도 않고 돌보지 않으며 각기 제 맘대로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로부터 조선사회는 지배계급의 탐학과 부패로 물들어 있었고, 그로 인해 어느 성현 군자가 나와도 구제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몽중노소문답가」의 “매관매작賣官賣爵 세도자勢道者”, “전곡錢穀쌓인 부첨지富僉知”, “유리걸식流離乞食 패가자敗家者” 등이나 “아서라 이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不足施요 공맹지덕孔孟之德이라도 부족언不足言이라”는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궁핍과 핍박을 받아 왔으며, 유리걸식이 일상이었고, 일반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운이 살았던 조선사회의 민초들은 그야말로 금수禽獸 같은 삶 자체였다.
조선 왕조는 대외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당시 지구촌의 세태는 서양의 몇몇 열강 제국주의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상황이었다. 서양 제국주의는 18세기경에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갖추면서 탄생한다. 몇몇 국가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정교한 기계를 발명하고, 신무기로 무장한 채 중상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특히 서양의 제국주의는 동양을 넘보기 시작하면서 극동에까지 들어와 무력으로 국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840-1842년에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은 그 시발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중국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7년에 광저우를 점령하여 텐진조약을 강요했고, 1860년에 청조가 조약의 비준을 반대하자 북경을 점령하기도 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그러하자 이어 조선왕조의 상황도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832년에는 영국 상선이 서해안에 들어와 통상조약을 체결을 요구하였고, 1845년에는 영국 군함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하였으며, 1850-53년에는 미국과 러시아 배들이 조선 연안에 출몰하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왕조를 위협하는 서양 제국주의는 수운에게 국권이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겨주게 됐다. 이에 대한 수운의 생각은 “괴이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세간에 흉흉하게 떠도는데, 서양 사람들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져서 그 조화의 힘을 부리는 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고, 또 무기로써 공격하여 싸움을 하면 그 앞에 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니, (이와 같이 강성한 서양의 힘에) 중국이 망해버리면 어찌 우리나라도 따라 화를 당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수운은 조선의 정세가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국권이 풍전등하에 몰릴 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