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1. 7. 03:00




 

 

선조말

천주교유입에 대한 우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민중들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금수와 같은 삶으로 전락하게 된 조선사회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학의 유입이 그것이다. 천주학은 조선왕조의 윤리의식을 근본부터 어지럽히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천주학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이다. 당시 천주학은 서학의 가톨릭을 지칭하는데, 천주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천주학은 로마 가톨릭의 예수교 선교자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1552-16010)가 중국에 들어와 서교西敎를 포교하게 되었고, 포교의 일환으로 리치가 중국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를 펴낸 데서 연유한다. 조선 선조 말년(1608년)부터 『천주실의』를 비롯한 많은 서양 책들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오면서 천주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천주학이 퍼지기 시작하자 1783(정조 7년)에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사신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게 됐으며,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천주교회로 찾아가 교리를 익히고(1784년), 그 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됐다.

 


천주교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실제적으로 중국에서 선교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천주 개념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후 재주 있는 많은 젊은이들은 천주교를 믿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조선왕조를 지태해온 유교의 사회질서 체제를 위협하고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1860년(경신)에 글을 지을 당시에 수운은 서학을 표방하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이 무력으로 동양을 침범하고 강제로 국권을 침탈하는 것을 보고 천주학에 대한 위력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주교가 세상을 구할 올바른 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깨닫게 된다. “지난 경신년에 이르러 전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천주의 뜻으로 부귀는 바라지 않고 온 세상을 처서 빼앗아 (서학을 믿는) 교당을 세워 서도를 행한다고 하더라. 나는 또한 ‘그럴 수 있을까 어찌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글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천주학에 대한 수운의 두려움은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운은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칭하고, 학을 천주라 칭하며, 교를 성교라 하니, 이는 천시를 알고 천명을 수용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를 하나하나 열거해 보아도(그들이 펼치는 서학의 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알 수 없는 까닭에(그들이 이렇듯 강성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나 역시 두려워하여 늦게 태어난 것이 한스러울 즈음에”라고 그는 말한다.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는 천주학의 도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으나 천주학 또한 서양인들이 천시에 따라 천명을 받아 나온 것이므로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그가 “서양 사람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 그 조화를 부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언급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