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통일제국을 건설한 최초의 세계인
칭기즈칸의 성장과정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 -몽골비사
수많은 별을 가진 하늘도 돌고 있었다. 모든 나라는 우리를 배반하였다. 편안히 침대위로 들어가 자지도 못하고 서로 노략질했다. 푸른 풀로 덮인 대지도 구르고 있었다. 온 나라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편안히 이불 속에 들어가 눕지도 못하고 서로 공격했다. - 몽골비사
단기 197년 서력기원 BCE 2137년, 갑신 단군조선 4세 오사구 단군 재위 원년에 아우皇弟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는데, 혹자는 지금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
칭기즈칸Chingiz Khan(成吉思汗, 1162~1227)
1162년 - 오논 강 유역 숲에서 탄생, 보르치긴족으로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1171년 9세 - 아버지 예수게이 사망, 두 엄마와 7형제가 떠돌이 신세가 됨
1178년 16세 - 부르테와 결혼
1189년 27세 - 씨족, 부족 회의인 쿠릴타이를 소집해 칸의 칭호를 얻음
1196년 34세 -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둠
1204년 42세 - 몽골 고원 통일
1207년 45세 - 서하(탕구트) 복속시킴
1219년 57세 - 호라즘 원정
1223년 61세 -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 건설
12세기 초 몽골 고원은 언제나 흉흉한 긴장의 바람 속에 놓여 있었다. 땅에서 생산된 것으로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것을 뺏어야 했고, 뺏기 위해 죽여야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해서만 겨우 살아가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기 위한 싸움은 한층 더 치열해져 갔다. 당시 몽골 고원 절반은 광활한 대초원 지대였지만, 나머지는 원시림과 호수, 그리고 반半 사막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유목 부족들 간에 거주 지역에 따라 사육하는 가축의 종류와 생활양식에 차이가 있었다.
몽골족은 칭기즈칸의 증조부인 카불칸 때 몽골 울루스ulus라는 정치적 독립체를 결성하여 인근 타타르와 금나라 변방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결국 몽골족은 금나라와 타타르족의 집중 견제로 2대 칸인 암바가이(보르치긴 씨족이 아닌 타이치우드 씨족 전사)가 사로잡혀 당나귀 형틀에 못 박혀 죽는 사건이 있었다. 뒤를 이은 키야트 씨족 출신 괴력의 용사 코톨라는 13번에 걸쳐 타타르족과 싸웠지만 패배하고 몽골 울루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때 몽골고원에 개입한 중원의 금金나라 세종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잔인한 대북방 정책을 감행한다. 몽골 남자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는 금나라의 감정減丁 정책은 몽골족들에게 골수에 박힌 원한을 심어 주었다. 이는 금나라 여진족이 자신들의 확고한 세력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3년마다 어김없이 벌인 유목민 학살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냉혹한 부족 궤멸 위기의 와중에 몽골족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자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강철은 시련 속에서 단단해진다
1203년 테무친(鐵木眞)이라는 키는 작고 눈은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몸에서는 말과 낙타의 노린내가 배어 있는 중년의 사나이가 몽골 동부지역에서 최강 케레이트 부족을 꺾고 패자가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테무친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테무친은 몽골부 보르치긴 씨족의 수장인 예수게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테무친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직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쥔 채였는데, 주먹 안에는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그것도 새끼 양의 복사뼈만 한 핏덩이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용기, 전투, 그리고 승리의 표시로 해석되었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족 족장인, 테무친(바다나 호수처럼 ‘넓게 퍼진 상태’를 뜻하는 중세 몽골어)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인간 테무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타고난 두뇌는 그저 평균치 정도였고, 어린 시절 개를 무서워하기도 하는 소심한 겁쟁이였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지 못했고,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평생을 생활했으면서도 외국어는 구사하지 못했고, 최고 수준의 학자에게 집중 과외를 받았지만 문맹이었다. 그의 가족은 문맹에서 벗어났는데도 말이다. 무쇠처럼 단단한 성품의 남자도 아니었다. 자주 울었고, 특히 여자들의 호통에 정신을 번쩍 차리기도 하고 판단력도 뛰어나지 못했다. 때로는 의심하고 화내기도 하였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주변 타타르족과 대립한 용사였다. 예수게이는 테무친이 9살 무렵(혹은 13세라고도 한다) 혼인을 위해 옹기라트족인 보수쿠르의 데이 세첸을 방문하고 그의 딸 보르테와 혼인을 약속하고 돌아오는 도중 숙적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당했다.
부친의 죽음은 테무친에게 닥친 역경의 시발점이었다. 초원에서 정치적 권력이란 어떤 확립된 제도에서 발생하기보다는 개별적 지도자들의 인물 됨됨이에서 나온다. 즉 강한 자 아래에 모이게 되어 있는 구조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들은 분열하였다. 친족들은 테무친의 가족들을 버리면서 재산인 가축들도 모두 빼앗아 갔다. 이는 다가올 겨울에 굶어죽으라는 것이었다. 오논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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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초원에서도 북쪽 끝에 위치한 곳이다. 추위는 더 혹독하고 먹거리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 가족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테무친 일가는 강철 같은 여인 후엘룬
(★)
을 중심으로, 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유목민의 일상 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했고 풀뿌리와 생선, 들쥐 등으로 연명하였다.
테무친은 연이어 지옥 같은 포로 생활에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가 하면 화살에 목이 꿰어 죽기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는 몇 번의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절대적인 위기에 몰렸을 때는 불과 19명의 동지만 살아남았고 그들은 초원 끝 흙탕물로 갈증을 풀며 테무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부족은 이미 와해되었기에 테무친은 부족을 따지지 않고 조금씩 세력을 모으며 성장해야 했다. 그러면서 혈연과 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능력과 인망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인재를 평가하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이런 경험들은 테무친에게 씨족 중심 사회가 아닌 동료들의 충성심과 우정을 더 믿게 만들었다.
극렬한 고난을 겪고 나면 그 고난이 트라우마로 남아 나쁘게 작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난이 더 큰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테무친은 후자의 전형이었다. 그는 믿을 사람과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친구들과의 우정에 주목했고, 진정 의지해야 할 가치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한 우정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믿음은 혈연이나 지연, 종교 같은 선천적이거나 이념적인 진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마련이다. 건강한 개방성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부족의 분열과 배신 사건으로 테무친은 조직 내부에서 불화와 불만이 있는 자, 이탈자를 탐지해 내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역경은 테무친에게 배신하는 자와 의리를 지키는 자가 있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많이 얻어야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래서였는지 테무친은 이후 한 번도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 더불어 실제 조직 경영에 있어 칭기즈칸이 등용한 전투 지휘관의 조건은 용맹함, 두뇌, 인내심과 현장판단력 등의 능력 위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