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약동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삶의 철학자로는 생의 약동을 주장한 프랑스 출신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1859~1941)과 우주적인 삶으로 파악한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1861~1949), 해석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독일 출신의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1833~1911), 서구의 몰락을 예견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1880~1936)를 대표적으로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사유는 현상적인 물질에 근거하는 유물론적인 사유나 기계론적이며 결정론적인 사유를 반대하는 삶의 철학이다. 그는 존재를 “삶의 약동(élan vital)”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실증주의나 현상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오직 텅 빈 공간과 물질적인 연장을 바탕으로 해서 드러나는 외부적인 것, 즉 사물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탐구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명과 내면에서 비롯되는 의식생활, 자유와 자발성 등이 본래의 빛을 찾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장되어 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철학의 의미에서 볼 때 공간은 한결같이 동질적이다. 동질적인 무한한 공간 안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존재는 정적이고, 비연속성이며, 전체적으로 도식적이 된다. 마치 원자들의 인과적 운동과 기계적인 필연성만이 되풀이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삶의 내적인 존재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즉 삶에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른 시간이 있고, 의식의 흐름은 절대로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에 내면적인 시간 또한 언제나 이질적으로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것들에게서의 시간은 자유를 내포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창의적인 발전이 있을 뿐이다.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베르그송은 ‘진정한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이고, 인간의 시간이란 지속(durée)’이라고 하여 삶의 철학을 전개한다.
‘지속’이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 또한 계속적인 흐름 속에 있고, 흐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란 이미 있는 것과 함께 규정되어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일회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살아 움직이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지속’이다.
우리의 이성은 도식적이며 언제나 개념화하여 고착화시킨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은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 속에 감정이 이입移入되어 유동적으로 지속한다. 이렇게 되면 현실적인 삶은 고착화된 보편적인 개념의 옷을 입지 않고 오직 유동적인 실재에 대한 직관(intuition)으로만 드러나게 마련이다. 직관이란 관조적인 입장에서 인식행위에만 주력하는 지적인 것이다. 이것이 체험體驗이고,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지속을 올바르게 파악하게 된다. 철학은 삶에 이러한 직관을 부여하기 때문에, 도식화된 표면을 꿰뚫고 나아가 내적이고 일회적인 삶의 지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보편적인 인과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일회성과 자유를 되찾으려한다. 왜냐하면 직관으로서의 의식은 곧 자유요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모든 존재는 의식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이성적인 것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삶과 체험, 충동, 지속, 자유, 창의적인 에너지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생성과 행위와 행동이고, 우리는 세계를 채우고 있는 물질과 삶의 모든 것 안에서 창조하는 힘들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삶의 약동(élan vital)”이라는 것이다. 삶의 약동이야말로 존재의 핵이요 삶의 정수精髓이다.
삶의 약동은 자유롭게 흘러간다. 삶의 약동은 기계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흘러가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은 비약飛躍이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낳는다. 따라서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곳에서는 삶이 만들어 내는 자유와 활동과 약동躍動(Elan)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곳에는 언제나 퇴락만이 있을 뿐이다. 미래의 보다 높은 발전을 위한 시작과 근원 또한 기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약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계 전체를 조망해 보자면, 삶은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파도처럼 생각되는 전진이다. 삶은 충동이요, 그 충동은 자유롭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삶의 의식이 인간에게서만 그 운동을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식물의 경우는 모호한 의식과 물질의 세계를 겸하고 있어서 경직성이 있고, 동물의 경우는 많은 움직임과 의식이 있으나 종種과 환경의 습성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식은 자유롭고 무한히 자발적이고, 인간의 입지를 드높이게 마련이다. 이러한 의식은 인간에게 무한한 지평이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베르그송은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의 진화론을 뒤집고 바로 #“창조적 진화”#의 문제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