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1. 17. 01:00





 

삶의 근원을 우주적으로 파악한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

 

 

 



“하나는 시작이나 무에서 비롯된 하나요(一始無始一), 하나가 삼극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析三極無盡本) … 하나가 오묘하게 뻗어 나가 우주만유가 오고 가고(一 萬來), 작용이 부동의 근본으로 변화하나니라(用變不動本). 근본은 밝고 밝은 태양에 바탕을 둔 마음이니(本心本太陽昻明), 사람이 천지 가운데 태일이 된 하나(人中天地一)이니라. 하나는 끝이로되 무에서 마무리 된 하나이다(一終無終一)”

-「天符經」

 

블롱델은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지속’과 ‘창조적 진화’에 반대하고, 삶의 근원을 밝히는 쪽으로 사유하기에 이른다. 그의 삶의 철학은 우선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러한 ‘행위’는 급진적인 삶의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행위’는 맹목적인 것도 아니고, 순수한 의지도 아니고, 이성에 대해 항거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정신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블롱델에 의하면 인식은 행위의 한 부분이요, 사고의 진보는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에서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이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문제는 그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사고의 정체가 무엇인가이다. 사고는 근원의 존재도 아니다. 사고는 단순히 힘이며 정신적인 삶의 동력 안에서 무엇을 밀어내고 끌어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블롱델은 사고의 근원이 바로 정신적인 삶의 전체요 모든 부분들에 앞서서 ‘밀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삶의 철학은 사고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사고의 근원이 되는 ‘밀고 나아간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행위’ 속에 나타나는 그런躍動 밀고 나아감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도했던 의미와 유사할 것이다. 즉 플라톤의 철학에서 ‘모든 것이 이데아를 닮으려고 노력한다’고 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질료가 형상을 실현하기 위해 형상을 그리워한다.’고 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최고의 진리요 모든 형상들 중의 형상인으로 신神에게로 나아가려는 본성적인 욕구’라고 했을 때, 그런 의미의 밀고 나아감이라고 보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밀고 나감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그것은 근원이요 완성이라는 “하나”를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세계는 하나다. 하나의 통일된 틀은 우주세계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 놓고 있다. 이 틀은 결국 우주세계를 이루는 여러 형상들의 형상[神]에 뿌리내리고 있는 질서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주세계는 고정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되어 감에 따라 완성의 진리는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완성에 대한 동경이고, 완성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神)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주체는 우주적인 존재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가고, 생명으로부터 밀고 나가 정신으로, 정신으로부터 신(神)으로 밀고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즉 정신은 자기 밑에 있는 불분명하고 혼란된 여러 단계를 벗어나 광명의 빛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행위의 철학적 과제는 정신과 가치 질서의 원천을 자연 안에서 밝히는 것이고, 타당한 질서라 불리는 행위와 사고의 관계, 즉 행위에는 사고가, 사고에는 행위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