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1. 22. 01:00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

 




 

 

“중은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상잡相雜하야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하야 타생장소병몰墮生長消病歿의 고苦하고 철哲은 지감止感하며 조식調息하며 금촉禁觸하야 일의화행一意化行하고 개망즉진改妄卽眞하야 발대신기發大神機하나니 성통공완性通功完이 시是니라.” -『桓檀古記』 「蘇塗經典本訓」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1960년대 초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 기간 중에 그는 교토에 있는 일본의 국보 제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친견하고서 “이것은 지상의 모든 시간적인 것, 속박을 넘어 달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영원한 평화와 이상을 실로 아낌없이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야스퍼스는 그 불상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까? 그것은 불상이 바로 인간 실존(Existenz)의 최고 경지를 조금의 미혹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해 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3년에 독일의 나치Nazi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독일에는 야스퍼스를 중심으로 하는 실존철학이 풍미를 이룬 바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이 인기가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현존재(Dasein)의 인간이 참다운 자아로 돌아가 일체一切의 존재 양식을 초월超越하여“포괄자(Das Umgreifende)”에 다다름으로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초월성이란 말은 비대상적非對象的으로 완전히 은폐되어 있어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실존자의 경지에 다다른 경우에만 상징적인 시사示唆를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괄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포괄자는 존재의 모든 대상을 안에 포괄하는 무한한 지평地坪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사유를 통해 그런 무한한 지평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언제나 새삼스럽게 우리를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포괄자의 의미란 얘기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절대적 존재인 포괄자는 결국 매듭지어질 수 없는 무애无涯의 상태로 세계에 노정露呈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영구히 완결된 전체로서의 그런 존재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현존재現存在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존재가 궁극의 절대적인 포괄자에 의해 감싸인 상태에서 그 참뜻이 밝혀질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초월성이다. 결국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에서 포괄자는 실존적인 인간이 그 경계에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현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실존자가 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실존을 삶과 정신에 합쳐진 작용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포괄자의 모든 방식 안에서 현존재는 양극성을 갖고 있는데, 이성이 없는 실존(vernunftlose Existenz)과 실존이 없는 이성(existenzlose Vernunft)이 그것이다. 만일 이성이 없는 실존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감정과 느낌, 본능과 충동에 충실하게 되지만 맹목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실존이 없는 이성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지성적인 보편자, 도식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을지언정 인격을 잃고 역사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공허하고 자의적이 될 수 있다.

 

이성과 실존은 분리될 수가 없다. 이성이 무너지면 실존이 상실되고, 실존이 없으면 이성이 무너진다. 이성은 기존의 것을 고집하여 관철하기 위해 실존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되고, 실존은 스스로를 투명성으로 이끌기 위해 이성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실존은 이성에 의해 밝혀지고, 이성은 실존에 의해 내용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실존이란 한편으로 체험된 것, 삶으로부터 결단으로 받아들여진 것, 자유와 역사적인 일회성 속에서 개인적으로 얻어낸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적인 것, 정신적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 학문적인 의식으로 높여진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실존조명(Existenzerhellung)”의 길로 나아가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는 실존이란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존인식’이라 하지 않고 ‘실존조명’이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실존을 조명한다는 뜻은 “실존이 자기 자신이 된다(sich selbst werden)”,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sich selbst bewußt werden)”는 뜻이다. 결국 실존이란 삶과 정신이 합쳐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밝혀감으로써 참된 자기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완결된 체계 내에서 활용되는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오직 실존철학에 고유한 범주를 통해서 실존이 “조명”될 수 있을 뿐이다. 야스퍼스에게서 실존범주란 바로 ‘자유(Freiheit)’, ‘상호관계(Kommunikation)’, ‘역사성(Geschichtlichkeit)’으로 집약된다.

 

실존은 고정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되어가는 가능적 존재이다. 이는 실존적인 인간이 자기 상실과 자기 보존을 겪으면서 끊임없는 선택의 도정道程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결단을 재촉받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실존은 자유로운 선택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원천으로부터의 자기창조自己創造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자유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또한 실존적인 인간은 어떤 독단적인 진리나 개념, 체계 등을 고집하지 않고 타인에게 항상 마음을 열어 두어 배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실존이 타자他者의 자아와 진솔한 유대 관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상호관계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리고 실존은 언제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즉 역사성을 안고 있는 특수자로서의 자기존재를 의미한다. 역사성 안에 있다는 뜻은 단순히 시간성으로서의 역사성(필연적 계열을 의미함)만이 아니라 실존적 현존재가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의미한다. 역사성으로서의 실존적인 인간은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의 순간에 대한 충실充實에, 즉 영원한 현재로 초월에 직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성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럼 이와 같은 실존은 어떻게 자각되고 실현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에 의하면 그것은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 에 대한 자각에서 출범한다. ‘한계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재인 인간은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시대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변경할 수도 회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다. 다름 아닌 죽음, 고뇌, 싸움, 죄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다. 이것을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 부른다.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有限性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유한적임을 깨달은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동시에 포괄자가 주재하는 현실에 눈을 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식을 변혁시켜 본래의 자기 존재에로 회생回生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상황’은 인간의 실존을 각성하게 하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할 때 모든 것은 초월자를 지시하는 암호暗號로 나타난다. 암호란 실존이 청취할 수 있는 초월자의 언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종류는 무수하게 많다. 모든 현존재, 자연과 역사, 세계와 인간의 통일, 인간의 자유 등은 모두 초월자의 암호일 수 있다.

 

초월자를 지시하는 이런 암호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기술될 수도 없고, 논증될 수도 없고, 오직 실존의 참된 좌절에서 체험되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암호 해독은 어디까지나 실존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체험하는 실존에 따라 다양하면서도 독특하게 내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실존은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을 통해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초월자의 절대적인 현실을 확인하게 되고, 본래적인 자기 존재로 회생回生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