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1. 29. 02:00






 

본질보 실존을 우선시한

철학자 사르트르

 

 






독일의 실존철학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까지 크게 유행하다가 1933년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9월에 프랑스 출신의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자 이때부터 실존철학은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럽게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실존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출범하게 된다. 그의 실존사상은 1943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책에서 사르트르는, 1940 나치의 침공으로 패망한 프랑스인들이 적의 침략 앞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기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 대해 불신과 울분과 회의에 젖게 됐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는 그들이 적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항쟁심抗爭心에 불타 융합된 저항의 힘을 보여 주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철학이 부정적 사고를 적극적인 행동의 가능성과 융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철학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극단적으로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러한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다소 난해한 면이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평생 동안 “계약결혼”을 시작하여 끝을 맺었고, 1945년에 그와 함께 『탕 모데른(Le Temps Modernes)』라는 월간지를 편집하였으며, 실존주의에 대한 주요 주제를 해설했던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의 소설 『초대받은 여자(L’nvitée)』를 통독하면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어떻게 출범하게 되는가에 대한 기본 토대를 잠깐 들여다보자. 그는 인간의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구분하고 있는데,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즉자卽自(en-soi)”라 하고,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대자對自(pour-soi)”라고 말한다.

 

‘즉자’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사르트르에게서 ‘즉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潛勢態(dynamis), 신의 합목적성과 같은 어떤 존재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체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창조되거나 다른 존재와 관계된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진리, 신적인 것, 최고의 초월자 같은 것도 아니다. 그는 이러한 ‘즉자’를 무의미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는데, 자신의 저서인 『구토(La Nausee)』에서 주인공을 통해 표현한 구토증으로 기술되고 있다.

 

‘대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의 특성을 지칭한다. 의식이란 항상 무엇에 대한 것으로 지향적 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원래 자기 자신을 벗어나 자기가 아닌 것을 향하기 때문에 탈자적인 초월적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못되고 언제나 즉자와의 관계에서 그의 존재성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의식의 성격을 사르트르는 ‘대자’라 했다.

 

앞서 밝혔듯이 의식은 의식 밖에 있는 ‘즉자존재’에 관계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가 만일 의식만을 떼어내서 생각해 본다면 의식은 자체로 ‘없는 것[無]’이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 ‘무無’는 중요한 의미를 점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작용은 자신이 간직한 ‘무’를 즉자 존재에 침투시켜 존재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의 무화작용(의식작용)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가 규정됨을 뜻한다. 이러한 의식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있다. 하나는 대상을 지각하는 의식과 다른 하나는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자신을 향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즉자’인 존재는 충실充實이지만, 분열된 의식은 존재의 충실을 결여하고 있다. 이는 ‘대자’인 의식이 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의 결여이고, 그러한 결여(공허)를 메꾸기 위해 욕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한 ‘즉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대자’로 있으면서 ‘즉자’로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즉자’로서의 충실성을 누리면서 의식적인 ‘대자’의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그러나 ‘즉자’이면서 ‘대자’인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즉자-대자(en-soi-pour-soi)”는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절대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즉자’라면 신은 존재의 충만성을 소유하게 되겠지만 의식이 없으므로 선善의 실행이나 어떤 합목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신이 ‘대자’라면 신은 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무’가 침투하여 결여를 메꾸고자 활동할 것이다. 이러한 신은 완전성과 합목적적인 인격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순된 측면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완전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트르는 창조주로서의 충만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실존사상을 전개한다.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이 설계한 세계도 없고, 신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여 인간에게 부여한 고정된 본질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L’homme n’est rien d’autre que ce qu il se fait).” 따라서 ‘대자’로서의 인간은 실존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초월해 가는 자각적 주체로서 언제나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밖으로 자기를 내던져 미래를 향해 현재를 뛰어넘는 기획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 미리 내던진 가능태를 향해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계획하여 자기를 실현해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입장을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표현을 쓴다. 인간의 의식은 ‘무’를 간직하고 있어서 빈 공허를 메꾸려는 욕구가 있고, 이러한 욕구는 곧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유다.

 

운명적으로 타고난 자유는 맹목적이거나 방종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오히려 행동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는 각자의 실존이 스스로가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의 존재 방식에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이러한 책임과 관련하여 실존자는 각자의 선택과 동시에 전 인류의 존재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선택은 선택되는 것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전제하고, 이러한 가치 평가는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는 언제나 인류 전체의 선택이라는 귀결이 된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