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1. 30. 01:00




 

본질을 알기위해서는

현상을 정확 파악해야 한다는 철학자 후설

 








철학자로서 후설의 고민은 우리가 의식 밖의 대상을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가 제창한 철학적 사유의 중심은 무엇이 참된 지식의 근거를 제공하는가 하는 인식認識에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사실과 사실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후설은 인식에 있어서 먼저 경험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임을 받아들인다. 이는 영국의 경험주의 입장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 의해 경험되는 사물에 집중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본질개념(Wesensbegriff)”에 대한 인식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서의 본질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서 추구했던 그런 불변하는 실재, 즉 현상의 배후에 근원으로 실재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띤 객관적인 의미 요소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 요소는 바로 현상의 사태(Sache)와 짝이 되는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으로 드러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만일 의식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태는 없을 것이고, 현상 또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에 주어져 있는 사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명하면 되는 방법론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상학의 목표는 사태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할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이다. 이것을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식의 대상은 우리의 의식과 독립하여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식에 없는 대상은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사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천인 의식의 내부로 돌아가야 한다.

 

의식 내부로 돌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인식론에 있어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주관으로 전환하는 선험적 태도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선험적’이란 인식을 형성하는 궁극의 원천, 즉 주관으로 되물어 가려는 동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이라 부른다. 방법을 통해 우리는 의식 내부로 돌아가 사태 자체, 사물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환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상적 환원(eidetishe Reduktion)”과 “선험적 환원(transzendental Reduktion)”이 그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사물을 인식비판적으로 검토함이 없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인데, 세 가지 태도로 구분된다. 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그것이다. 자연적 태도는 대상을 자명한 존재로 확신하여 지각하지만, 지각의 주체인 인격을 아주 도외시하는 태도이고, 인격주의적 태도는 지각주체인 인격을 중심으로 사물을 지각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확신하는 태도이고, 자연과학적 태도는 모든 대상을 일정한 방법이나 기구를 매개로 하여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성질이나 구조를 설명하는 태도이다. 이들 세 가지 태도는 경험적인 대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확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 인식에 중요한 것은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은 자연적 태도의 일반 정립을 비판하고, 모든 인식의 형성과 인식하는 자기 자신과 인식 생활에 관한 자기 반성의 최종 근거를 반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후설은 철학을 엄밀한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태도를 비판하고 선험적 태도로 돌아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판단중지(Epoche)이다. 여기에서 판단중지는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자(피론Pyrrhon, 기원전 360~270년 경)가 말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론의 회의론은 모든 사물에 대해 단지 속견俗見만을 가질 뿐 진리 인식이란 불가하기 때문에 단정적인 판단을 중지하고 진리 탐구를 체념함으로써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설이 제안한 판단중지는 객관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낯선 사람이 지나간다,’ ‘호랑이가 개에게 접근하고 있다’, ‘개가 배가 몹시 고프다’, ‘누군가 개를 괴롭히고 있다’는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의식 내부로 들어가 그 본질을 직시해 보라는 뜻이다.

 

후설의 판단중지는 앞서 말한 “형상적 태도(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취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배제하고 괄호 침(주체와 대상의 ‘한데 묶기’)을 의미한다. 판단을 중지해야 일종의 사유 실험을 통한 자유로운 변경이 가능하며,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 같은 성질을 가진 요소들을 분류하여 이것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도록 정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현상학적 잔여(Residium)”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판단중지를 통해 얻어 낸 불변하는 본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형상적 환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판단중지, 자유로운 변경, 기술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이기 때문에 본질적 환원이라 불린다.

 

“형상적 환원”을 통해 얻어낸 본질을 다시 의식내재로 환원하는 절차가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이란 무엇인가? “형상적 환원”은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 현실성을 넘어서 초월적인 것이 되기 쉽다. 여기에서 후설은 초월적 존재를 순수의식으로 내재화하는 절차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선험적 환원”이라 하는데, 이는 ‘현상학적 잔여’들을 순수의식으로 직관하여 사상 자체, 즉 순수의식의 보편적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고 현상에 대한 참된 본질 인식이 산출된 것은 아니다. 순수의식은 각 개인의 주관적인 것이므로, 그 체험 내용의 객관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설은 이런 문제점을 ‘상호주관성’과 ‘생활세계의 이론’으로 보완하고 있다. ‘상호주관성’이란 사회공동체적 의식을 말한다. 즉 우리의 인식 주체는 순수한 개인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호주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인정된다면, 이는 진리임이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공동체적 사회인식에 의해 결정됨을 말한다.

 

후설은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호주관성’을 내세웠고, 그 기반이 되는 것을 ‘생활세계Lebenswelt’에서 찾고 있다. 생활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우리의 판단의 근원적 토대는 개별적 대상이고, 개별적 대상이란 언제나 어떤 전체 속에 있는 개체인데, 개별적인 대상을 파악할 때는 그 대상이 이미 생활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한 생활세계는 무질서하거나 막연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활세계는 지평구조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개체는 생활세계 속에서 부각되어 개인에게 촉발되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은 이렇게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활세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활세계 속의 동형으로서 파악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식의 명증적 토대를 찾고자 하는 현상학자는 모든 개별적 경험의 보편적 기반으로서 우리 눈앞에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로 귀환하여야 한다. 본질에 대한 진리 인식은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