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7. 12. 10. 01:00




 

 

가포르의 초기역사

 

 




 

싱가포르에 관한 역사적 기술로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경 중국 문헌의 기록 ‘파라주婆(Pu Luo Chung)’이다. 이는 ‘반도 끝의 섬’이라는 뜻으로 말레이어의 플라우 우종Pulau Ujong(섬 끝의 땅)에서 음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3세기에 싱가포르 국명에 대한 기록이 중국 문헌에 나오는데, 수마르다 지역 스리위자야 왕국Srivijaya Kingdom의 트리부아나 왕이 표류하여 지금의 싱가포르에 상륙한 후 사자獅子Lion를 목격하고는 싱가푸라Singapura(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고 명명한 것이 싱가포르 국명의 유래이다. 싱가포르의 플러톤 로드에 위치한 관광 명소인 머라이언 공원에 가 보면 머리는 사자, 몸은 물고기 형상을 한 높이 8.6m의 ‘머라이언Merlion’ 동상이 입에서 분수처럼 물을 내뿜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 동상은 싱가포르의 국가적 상징물처럼 여겨지고 있다.

 

1365년에는 자바인의 문헌에 싱가포르를 테마섹Temasek(sea town, 항구도시)으로 기록한 것이 나타난다. 테마섹은 다양한 나라의 선박이 기항하면서 중요한 무역도시로 떠올랐으나 14세기경에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14세기 후반경에는 싱가푸라Singapura라는 표현이 통칭적으로 사용되었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레이반도 서쪽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 말라카Malacca를 점령하자 말레이 제독이 싱가푸라로 도망한 후 조호르 라마Johor Lama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싱가푸라에는 별도의 관헌을 유지했다. 그러다 1587년 포르투갈이 조호르 라마를 멸망시키고 이어 1613년 싱가푸라를 불태워 싱가포르에 관한 모든 자료와 기록이 소실되었다. 이후 싱가포르는 16세기 동안에는 포르투갈Portugal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네덜란드Netherlands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영국식민지 시대(1819~1941)

1818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총독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남서쪽에 있는 벵쿨루Bengkulu 주 부총독인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경에게 지금의 싱가포르 지역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가했다. 래플스 경은 1819년 조호르Johor 왕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싱가포르를 국제무역항으로 개발했으며, 이때부터 싱가포르는 크게 성장하였다.

 

1824년 조호르 국왕은 싱가포르를 영국 동인도회사에 영구 할양했고 1826년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서쪽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믈라카Malacca 및 말레이시아 서북부에 있는 항구도시 페낭Penang에 흡수되어 동인도회사 지배하의 해협식민지(The Straits Settlements)를 구성했다. 해협 식민지의 관할권은 1830년 인도의 뱅갈Bengal 총독에게 이전되었다가 1851년 인도 총독의 직속 관할이 되었으나, 이후 싱가포르가 지속 성장함에 따라 인도 총독의 행정력 부족 등으로 인해 1867년 싱가포르의 관할은 영국 식민지청으로 이관되어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Crown Colony)로 편입되었다.

 

1820년대 이후 싱가포르는 말라야 반도에서 생산되는 고무와 주석의 교역항으로서 발전하였고, 1842년 난징조약 체결로 인한 중국과의 통상 확대,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 등을 계기로 싱가포르는 국제무역항으로서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일본 점령 시대(1942~1945)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싱가포르는 ‘동방의 지브롤터Gibraltar’로 불리면서 동남아 주둔 영국군의 주요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나, 영국군이 싱가포르 전투(Battle of Sinagpore)에서 패배함에 따라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경험하였다.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은 1942년 중국 국민당을 지원하는 싱가포르의 중국계 주민들을 반反일본 성향으로 간주하고, 약 5만~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학살(숙칭肅淸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