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현대역사의 시작
리콴유총리
리콴유 시대(1965~1990)
독립 국가로 재출범하면서 리콴유李光耀 자치정부 총리는 다시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26년간 재임을 했다. 리콴유는 확고한 신념과 냉철한 현실 감각, 그리고 유연한 정치 감각을 갖춘 지도자로서 싱가포르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해 나가는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아시아는 물론 세계 수준의 금융과 물류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고, 싱가포르가 세계 최고의 깨끗한 정부로 발돋움하는 데에도 절대적 역할을 한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1965년 9월 21일에 국제연합UN(United Nations)에 가입했고 같은 해 10월 15일에는 영국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 가입했다. 곧이어 12월 22일에는 헌법을 개정해 국명을 싱가포르공화국(The Republic of Singapore)으로 바꾸고 국가 원수를 대통령으로 개정하여 유소프 빈 이샥Yusof bin Ishak 초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67년 8월 13일 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을 결성했으며 1968년 4월 13일 총선거를 실시해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이 58석 전 의석을 차지했다. 1970년 11월 23일 유소프 빈 이샥 대통령이 사망하고 1971년 1월 2일 벤저민 시어스Benjamin Henry Sheares 제2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71년 10월 31일 영국 극동사령부가 폐쇄됨에 따라 1972년 9월 2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인민행동당이 65석 전全 의석을 차지했다. 이후 1976년과 1980년 총선에서도 인민행동당이 전 의석을 차지함으로서 패권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화하였으며, 1981년 안손Anson 선거구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노동자당WP(Workers’s Party) 사무총장인 조슈아 벤저민 제야레트남Joshua Benjamin Jeyaretnam이 당선됨으로서 최초로 야당의원이 원내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1년 5월 12일 벤저민 시어스 대통령이 사망하고 10월 24일 챙가라 비틸 드반 나이르C. V. Devan Nair 제3대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나 1985년 3월 29일 알코올 중독으로 사임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9월 2일 위킴위Wee Kim Wee(黄金辉, 黃金輝) 제4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86년 국내 문제에 간섭하는 외국 언론의 싱가포르 내 배포 부수를 제한하기 위한 ‘언론출판법(Newspaper and Printing Press Act)’ 개정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같은 해 10월, 법무전문직법(Legal Profession Act)을 개정하여 자격정지 전력이 있는 자의 변호사협회 간부직 취임을 제한함으로써 변호사협회 회장인 프란시스 소우Francis Seow(萧添寿)가 자동 해임되었으며, 11월 10일 제야레트남 의원이 노동자당 회계 허위 신고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7년 5월 21일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가톨릭 활동가, 전문 직업 종사자 등 16명을 공산주의 활동 혐의로 구금했고, 6월에 20명을 추가 구금하였다가 12월까지 순차로 주동자 빈센트 챙Vincent Cheng(鄭海泉)을 제외한 21명을 석방했다. 1988년 5월 7일 싱가포르 정부는 주駐싱가포르 미국 대사관 핸드릭슨E. M. Hendrickson 1등 서기관을 국내 정치에 간섭한다는 이유로 추방했고, 전날인 5월 6일에는 프랜시스 소우 전前 변호사협회 회장을 핸드릭슨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구금했다. 이어 5월 18일 연대 출마 방식의 집단 선거구 제도에 관한 헌법 및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9월 3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81석 중 인민행동당이 80석을 차지하고 치암시통Chiam See Tong(詹时中) 싱가포르민주당SDP(Singapore Democratic Party) 사무총장이 재선에 성공했다.
고촉통 시대(1991~2004)
1990년 11월 28일 리콴유 총리가 사임하고 고촉통Goh Chok Tong(吳作棟) 부총리가 총리에 취임했다. 1991년 1월 3일 헌법을 개정하여 6년 임기의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하고 같은 해 8월 31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81석 중 인민행동당이 77석, 싱가포르민주당 3석, 노동당이 1석을 차지했다. 9월 7일에는 고촉통 총리 내각이 출범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선임장관(Senior Minister)에, 리콴유 전 총리의 장남인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은 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93년 8월 28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옹텡청Ong Teng Cheong(王鼎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9월 1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7년 1월 2일 총선거를 실시해 총 83석 중 인민행동당이 81석, 노동자당이 1석, 싱가포르인민당SPP(Singapore People’s Party)이 1석을 차지했다. 1999년 8월 2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셀라판 라마 나단Sellapan Rama Nathan이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9월 1일에 취임했다. 2001년 11월 3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총 84석 중 인민행동당 82석, 노동자당 1석, 싱가포르인민당이 1석을 차지했다. 무선거구 의원은 국민단결당NSP(National Solidarity Party)이 1석이고 지명 국회의원은 9석이었다. 2002년 3월 25일 제 10대 국회가 개원하였고 국회의장으로 압둘라 타르무지Abdullah Tarmugi를 선출했다.
2003년 5월 6일 싱가포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에 서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4일 말레이시아와 페드라 브랑카Pedra Branca 섬 영유권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공동 회부했다.
리셴룽 시대(2004 ~ 현재)
2004년 8월 12일에는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이 총리에 취임했다. 리콴유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에, 고촉통 전 총리는 선임장관에 임명되었다. 2005년 8월 1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 나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2007년 8월 2일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의장국을 수임했고 2009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의장국을 수임해 그해 11월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2011년 5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승리하여(총 87석 중 인민행동당 81석, 노동자당 6석) 5월 20일 리센룽 내각이 출범하였고, 리콴유 고문장관과 고촉통 선임장관은 내각에서 공식 퇴진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토니 탄Tony Tan Keng Yam(陳慶炎)이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9월 1일 취임하였다. 이후 2012년과 2013년 실시된 2차례의 보궐선거에서 여당인 인민행동당이 노동자당 후보에게 패배하였고, 2012년 11월 버스노동자 파업, 2013년 2월 정부의 인구정책에 대한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하였다. 가장 최근인 2015년 9월 싱가포르 총선에서는 리센룽 총리의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이 70%에 육박하는 69.9%의 지지율로(2011년 총선보다 10% 포인트 가량 지지율 상승) 89개 의석 중 83개 의석을 차지하며 승리함으로써 앞으로 5년 동안 더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선거는 싱가포르 총선 사상 처음으로 야권이 모든 선거구에 입후보하면서 여야간 사상 최대의 접전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야권의 선두두자였던 노동자당WP의 득표율은 지난 선거보다 6.8% 하락한 39.8%를 기록해 6개 의석을 얻는 데 그친 반면, 여당은 독립 이래 역대 최저를 기록했던 2011년 때의 득표율(60.1%)을 10% 가까이 회복(69.9%)시키면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