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2. 18. 01:00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의 실존론적 분석

 






‘존재론적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서에서 ‘존재’의 참뜻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를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존재자를 찾아낸다. 그런 존재자를 그는 “현존재(Dasein)”라 불렀다. 현존재란 ‘거기(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인간을 뜻한다.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물론 책상, 집, 고양이, 나무 등과 같은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존재자들 중에서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명확하게 대답하기란 어렵지만 어렴풋이나마 조금 알고 있기에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은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현존재’라 하지 않고 ‘도구적 존재’라 불렀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어떤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이거나 논리적이고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그런 보편적인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개별인간을 지칭한다. 개별적인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와는 달리 자신의 존재를 언제나 문제 삼고 그것에 관심을 쏟는다. 이런 현존재를 하이데거는 실존(Existenz)이라 부른다.

 

존재론의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 즉 인간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제시한 ‘존재범주(Category)’에서가 아니라 “실존범주(Existenzialien)”에서 다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현존재의 존재이해 방식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는 존재이해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분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밝히는 실존분석만이 존재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존재론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고 본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첫째, 실존론적 분석에서 볼 때,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Being-in-the-world)이다. 이는 인간이 세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이 세계에는 다양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인간은 이것들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에 관심을 갖고, 이것들을 유용한 도구(Zeug)로 간주하여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또한 인간은 사물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공동세계존재(Mitweltsein)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사물에 대한 배려(Besorge)이건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Fürsorge)이건 결국 “관심(Sorge)”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관심”을 세계 내에 있어서의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라고 규정한다.

 

둘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실존자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적인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세상 사람”(das Man)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는, 어느 누구도 아닌,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표적으로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고 그저 풍문이나 잡담에 귀를 기울이며, 유행이나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인을 가리킨다. 이런 일상적인 세상 사람으로서의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가 가리워져 있는 존재방식으로 퇴락(頹落)한 사람이다. 퇴락한 사람은 비본래적인 자기로부터 본래적인 자기로의 실존을 회복하여야 하는데, 실존을 회복하거나 비본래적인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Angst)이다.

 

셋째, 불안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恐怖)와 다르다. 공포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만 불안은 아무런 대상이 없다. 그럼에도 불안이 생기는 까닭은 현존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 즉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외부로부터 현존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현존재에게 붙어 있다. 인간의 생존은 죽음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부서짐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불안은 인간에게 숙명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세상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락, 스포츠 등의 즐거움에 탐닉하기 마련이다. 즉 죽음에 대한 불안이 현존재로 하여금 비본래적인 일상의 존재로 타락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깊이 통찰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결국 죽는다”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피를 통하여 세상 사람은 불안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라도 초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넷째, 인생의 시작과 종말은 무(無)에 놓여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Nichts)’에서 수동적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이다.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는 완전히 ‘무’이다. 무위에 떠 있는 유한한 존재는 죽음에의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능동적으로 미래를 향해 자신을 설계하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기투”(Entwurf)라 한다. 던져져 있음이 필연적이라면 기투는 미래를 향하여 기획하고 계획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무’에서 그냥 던져진 채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얘기다. 미래를 기획하는 인간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소위 “양심”(Gewissen)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하다. 양심이란 세상 사람의 일상성 속에 잊혀져 있던 본래의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는 부르짖음이다.

 

다섯째, 현존재는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거나 죽음의 불안을 도피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앞질러 죽음을 결의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죽음의 가능성을 앞당기는 것은 인간의 존재를 그 전체성에서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양심의 결단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깨우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이 죽음에의 선구(先驅)와 일상적인 자기의 비본래적인 모습을 버리고 자신의 본래성을 되찾으려는 결단성을 합친 것이 “선구적 결단”(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이다. 이러한 태도는 현존재의 근거가 ‘무’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와 같이 현존재의 실존은 유한성의 자각을 토대로 하여 죽음에의 선구를 결의함으로써 본래적인 자기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