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2. 20. 01:30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에 응답하는 철학자

 






철학이 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논리학에서처럼 정확성이나 사리(事理)에 일치하는 것만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학문만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돌이켜 사유하는 “추념”(Andenken)이란 뜻에서 존재의 가르침과 그의 부름에 충실하려는 사유(Denken)를 철학이라고 말한다.

 

존재의 가르침이나 부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가르침이나 부름을 받는 탈존자는 사유를 전제한다. 탈존자의 사유란 무엇이고, 무엇이 사유하도록 하는 것일까? 사유는 “이성”(Vernunft)이 한다. ‘이성’은 “귀담아듣는다"(Vernehmen)라는 뜻에서 나왔다. 무엇을 귀담아듣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眞理)에 대한 것이다. 진리는 바로 스스로를 은폐하면서도 동시에 살짝 드러내 보이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유는 ‘존재에 대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역으로 본다면 존재가 그 진리를 이성으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한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이라는 두 방식으로 구분하여 의미를 해석해볼 수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사유가 존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에로 귀속될 수밖에 없는 사유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유가 존재에 귀속되어 있으면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존재가 걸어오는 말에 대한 사유다. 가르침과 부름은 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이나 교제의 수단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의 집이다. 존재의 집은 탈존자가 몸담고 있는 집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말을 하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탈존자의 사유란 오직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에 응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경모하는 사유이다. 만일 사유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존재의 말이 일상적인 언어적 표현으로 형용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시(詩)의 세계로 접근해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독일의 시인 휄더린Friedrich Hoelderin(1770~1843)의 시어(詩語)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다양한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위대한 시인들 중에서도 휄더린을 동양의 도연명陶淵明(365~427)만큼이나 최고로 위대한 시성(詩聖)으로 여겼고, 휄더린이 존재자체가 걸어오는 말을 가장 순수하게 시어로 표현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