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4. 7. 5. 20:33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자본주의 발달과 국가를 향한 여정

 


 

1851년 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골드러시gold rush의 물결이 일어났다. 호주 멜버른 북쪽 빅토리아라는 곳에서 금이 발견되었는데, 이 금을 채광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골드러시로 인한 경제호황으로 중국, 유럽, 미국 등지로부터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850년의 호주 인구가 40만명이었으나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와 장사꾼도 모여들어 호주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인 영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건설붐과 교통 및 체신, 각종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는 한편 노동운동도 발달하였다. 



 

1854년 9월에 일어난 ‘유레카 혁명’ 사태는 호주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발전을 촉진한 광부들의 소요 사건이었다. 일명 ‘유레카 방책 봉기’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건은 호주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무장 폭동으로 기록된 사건으로서, 금광 지역에 몰려든 채굴업자와 광부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폭력적 징세절차 등 가혹한 압제 때문에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1854년 12월 영국군과 지방 경찰력에 의해 의해 유혈진압이 되었으나, 식민지 전역에 미칠 파장과 봉기의 확산으로 인한 금광의 상실을 우려한 영국의 유화책으로 인해 자치와 민주적 개혁 등 요구 사항들이 대부분 수용되는 진전을 이루었다. 경제적 불만에 대한 광부들의 희생이 호주의 기반을 닦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자유롭게 호주로 들어왔고 고유한 국가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23년 뉴사우스웨일즈가 제한된 입법권을 취득한 이래 식민지 각 지역은 서서히 자치체제를 확립하였다. 1855년과 1859년 사이에 영국은 호주 내 각 식민지의 헌법 및 자치정부를 승인함으로써 개별적인 식민지들은 책임있는 정부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대영제국으로부터 한층 더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은 우선 외교정책과 국방, 무역을 관장했고, 식민지에서는 개별국가들의 결합을 위한 기획이 시작되었다. 1887년 골드러쉬에 의한 노동력 수요 충족을 위해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 유입됨으로써 임금 경쟁이 초래되었으며, 이때부터 백인 노동자들은 유색 인종에 대한 배척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백호주의白濠主義(White Australia Policy, 백인 우선주의 백인 사회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정책) 기원이다. 결국 1888년에 중국인 이민의 제한이, 1896년에는 모든 유색인종의 배척이 결정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