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독립 군주국이 되다
1814년 독립이 좌절된 이후, 노르웨이는 지속적으로 연합 내에서 평등권 획득을 주장했다. 1890년대에 노르웨이가 독자적인 영사권을 주장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01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영사제도에 관하여 협상을 하였으나 스웨덴 외무성의 감독을 받는 조건으로 영사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제안을 노르웨이측이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고, 1905년 6월에는 노르웨이 의회가 내각의 제안으로 독자적인 영사제도 수립을 결의하자 스웨덴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1905년 9월, 독자적인 영사제도를 둘러싼 양국간의 갈등은 양국이 각기 육군과 해군에 동원령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는데, 결국 양국 대표들이 회합을 가진 칼스타드Karlstad에서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완전한 독립과 연합의 분리를 승인하였다.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했으며, 노르웨이는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했다. 14세기 말부터 1814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1814년부터 1905년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노르웨이는 이로써 완전 독립을 하여 입헌군주국으로 오늘날의 왕가를 이루게 되었다.
노르웨이 홀로서기, 그 이후
1905년 독립 군주국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노르웨이는 1914년까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 했고, 1913년에는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다.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즉각 중립을 선포했다. 노르웨이는 중립이 존중되어 1차 대전의 직접적 피해를 겪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후 노르웨이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1935년 새로운 경제정책을 도입하고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세금 징수를 늘리고 공공사업을 확대하는 시책을 펴나갔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복지국가 건설 과정은 일시 중단되었다. 1940년 4월 독일군은 덴마크를 점령하고 노르웨이의 일부지역을 점령했다. 자체 군사력이 약했던 노르웨이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자 전 국토를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은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노르웨이 상선단 대부분은 연합국의 관리하에 편입되었다. 독일 점령기간 중 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으며 35,000명의 노르웨이인들이 집단수용소나 감옥에 수용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노르웨이는 UN(국제연합)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하였고, 1949년에는 전통적인 중립정책에서 친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