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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7. 29. 11:00






 

脣亡齒寒순망치한

 

 

 

  금주의 한자 ‘脣亡齒寒순망치한’에서

 

  ‘脣순’은 ‘입술’을 뜻하며, ‘입술과 이’를 ‘이 치齒’자를 써서 ‘脣齒순치’라고 한다. 후에 ‘입구口부’의 ‘순’자를 쓰기도 하나 양자는 형체만 다를 뿐 자음과 의미는 똑같은 이체자 관계이다.

 

  ‘亡망’은 ‘잃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잃는 것’을 ‘나라 국國’자를 써서 ‘亡國망국’이라 하고, ‘망해서 없어지는 것’을 ‘멸망할 멸滅’자를 써서 ‘滅亡멸망’이라 한다.

 

  ‘齒치’는 ‘이’를 뜻한다. 갑골문을 보면, 원래는 입속의 이를 본뜬 상형문자였는데, 전국시대에 소리를 나타내는 성부 ‘止지’자가 추가되어 형성문자로 변했다. 보통 ‘이’를 ‘齒牙치아’라고 표현하는데, 원래 ‘齒치’는 ‘앞니’를 가리키고, ‘牙아’는 ‘어금니’를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구별 없이 쓰게 되었다.

 

  ‘寒한’은 ‘차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시리다’로 번역한다. ‘추위와 더위’를 ‘더울 서暑’자를 써서 ‘寒暑한서’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순망치한’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뜻이다.

 

  이 성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5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는 공자가 노魯나라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를 기록하면서 선악善惡을 논하고 명분과 대의를 밝혀서 후세에 존왕尊王의 길을 가르친 책이다. 이 책은《시경》, 《서경》, 《주역》, 《예기》와 함께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춘추》를 해설한 책으로는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씨전》, 공양고公羊高의 《춘추공양전》, 곡량적穀梁赤의 《춘추곡량전》 등이 정평이 있는데, 이를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한다. 즉 《춘추좌씨전》은 좌구명이란 사람이 이 《춘추》를 해석한 책으로 인물묘사가 정확하여 사학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나 고문古文의 모범이 되는 책이다.

 


  순망치한에 얽힌 이야기는 기원전 658년경 춘추시대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다.

 

  흔히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두 시대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춘추시대는 주 왕조가 동쪽으로 천도한 동주시대 전기, 즉 기원전 770년부터 약 삼백년 동안인 기원전 476년까지를 말하고, 전국 시대는 춘추시대 후 기원전 476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약 250년간 지속된 시기를 말한다. ‘춘추春秋’라는 명칭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유래하였고, ‘전국戰國’이라는 명칭은 당시의 여러 나라 사료를 편집하여 완성한 《전국책》에서 유래하였다.

 

  이 시기동안 중국에서는 중원대륙의 패권을 잡기위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다.

 

춘추시대에는 무력으로 천하의 패권을 잡은 다섯 명의 패자가 있었는데 이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부른다. 춘추오패는 일반적으로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왕吳王 합려闔閭,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말한다, 이들은 제후이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무력으로 제패하여 천하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본 고사는 기원전 658년에서 기원전 655년 사이에, 중국 춘추시대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제나라 환공은 중원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고, 초나라 성왕(成王)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이때 진晉나라의 문공도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지형조건이 나빠 산과 강에 의해 길이 막혀 있었다. 진나라 남쪽 중조산中條山 아래는 우虞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고, 이 우나라 남쪽의 황하가에는 괵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니다. 진나라가 만약 우와 괵을 복속시킨 후에 그곳에 거점을 두고 중원에 진출하면 공격하기도 수월하고, 지키기도 쉬웠다. 그러나 우와 괵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지세가 워낙 험한데다 길이 좁고 강폭이 넓어서 쉽게 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진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진나라는 괵나라와 우나라를 함께 칠 목적으로 먼저 괵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진나라 군사가 괵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우나라를 거쳐야만 했는데, 만일 우나라가 출병을 해서 저지하거나 심지어 괵나라와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한다면 진나라의 목적은 달성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대신들과 상의한 진나라의 헌공獻公은 대부 순식荀息의 계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순식의 계책은 다음과 같았다.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 네 필과 세상에서 가장 값나가는 옥 한 쌍을 우나라에 선물로 보내서 진나라가 괵나라를 공격하는데 길을 빌려 줄 것을 요청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계책은 성공했다.

 

  기원전 658년, 우나라 왕은 이 두 가지 보물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진나라 사자의 부탁, 즉 진나라 군사가 괵나라를 칠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는 청을 냉큼 받아들였다. 우나라에도 현인이 있어 대부 궁지기宮之奇가 진나라의 흉계를 알아차리고 절대로 길을 빌려줘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국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3년이 지난 뒤 진나라가 다시 길을 빌리러 오자 궁지기는 또 왕에게 간언을 했다.

 

  “우와 괵은 모두 작은 나라이며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 입술과 이의 관계로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세상에 서로 의지해야지, 그렇지 않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의 처지도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식견이 좁은 우나라 왕은 간언을 듣지 않고 마침내 진나라 군사에게 길을 빌려주었고 그 결과 괵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괵나라를 병탄한 진나라는 군사를 돌려서 우나라에 머물다가 기회를 틈타 우나라를 습격하여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이것이 바로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킨다’는 ‘假道滅가도멸괵’의 고사이다. ‘빌릴 가假’, ‘길 도道’, ‘멸망할 멸滅’, ‘나라이름 괵’자를 쓴다. 또 순망치한에 얽힌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순망치한은 서로 의존하며, 이해가 상관됨을 비유하는데 쓰인다.

 

  비슷한 말로 ‘망(亡)’자 대신에 ‘다할 갈竭’자를 쓴 ‘脣竭齒寒순갈치한’을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 ‘竭갈’은 ‘亡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들 게揭’자를 써서 ‘脣揭齒寒순게치한’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입술을 들추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가 된다.

 

  우나라와 괵나라는 망한지 이미 2천6백여 년이 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망치한’의 역사적 교훈은 오늘날까지 줄곧 이어 내려오고 있다. 우나라가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괵 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했더라면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는 다시 쓰여 졌을 것이다.

 

  1956년에서 1957년 사이에 하남성 삼문협三門峽 상촌령上村嶺 일대에서 괵 나라의 묘지가 발견됐는데, 여기서 대규모의 문물이 출토되었다. 드러난 역사의 폐허는 다시금 우리에게 ‘순망치한’의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단어】

 

脣(순): 입술. /月(육달월)부, 총11획, chún/

 

亡(망): 잃다. /(돼지해머리)부, 총3획, wáng/

 

齒(치): 이. 치아. /齒(이치)부, 총15획, chǐ/

 

寒(한): 차다. 춥다. /(갓머리)부, 총12획, hán/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5년〉

 

虞師晉師滅夏陽, 非國而曰滅, 重夏陽也, 虞無師, 其曰師, 何也, 以其先晉, 不可以不言師也. 其先晉, 何也, 爲主乎滅夏陽也, 夏陽者, 虞之塞邑也, 滅夏陽而虞擧矣, 虞之爲主乎滅夏陽, 何也, 晉獻公欲伐, 荀息曰, 君何不以屈産之乘, 垂棘之璧, 而借道乎虞也. 公曰, 此晉國之寶也, 如受吾幣而不借吾道, 則如之何, 荀息曰, 此小國之所以事大國也. 彼不借吾道, 必不敢受吾幣, 如受吾幣而借吾道, 則是我取之中府, 而藏之外府, 取之中, 而置之外也, 公曰, 宮之奇存焉, 必不使受之也, 荀息曰, 宮之奇之爲人也, 達心而懦, 又少長於君, 達心則其言略, 懦則不能彊諫, 少長於君, 則君輕之, 且夫玩好在耳目之前, 而患在一國之後, 此中知以上, 乃能慮之, 臣料虞君, 中知以下也, 公遂借道而伐, 宮之奇諫曰, 晉國之使者, 其辭卑, 而幣重, 必不便於虞, 虞公弗聽, 遂受其幣而借之道, 宮之奇諫曰, 語曰, 脣亡則齒寒, 其斯之謂與. 其妻子以奔曹, 獻公亡, 五年而後擧虞, 荀息牽馬操璧而前曰, 璧則猶是也, 而馬齒加長矣.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8. 10:30






 

 

한자공부

守株待兎수주대토

 

 

 

우리 속담 중에 감이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감나무 밑에서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이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것을 꾸짖을 때 많이 쓰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감을 기다릴 때, 중국에서는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수주대토’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의 이야기, ‘금주의 한자’에서 만나보자.

 

금주의 한자 ‘守株待兎수주대토’에서,

 

‘守수’는 ‘지키다’는 뜻이다.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는 것’을 ‘옛 구舊’자를 써서 ‘수구守舊’라고 한다. 또 ‘돈 전錢’, ‘종 노奴’자와 결합된 ‘守錢奴수전노’는 ‘돈만을 지키는 종’이라는 뜻으로 ‘돈에 인색한 사람’을 욕하여 일컫는 말이다.

 

‘株주’는 ‘그루터기’ 즉 나무를 베어낸 뒤에 남은 밑동을 말한다. 본뜻과는 상관없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주식’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신문지상에서 ‘주식株式’이니 ‘주주株主’니 ‘주가株價’니 하는 말들을 만나볼 수 있다.

 

‘待대’는 ‘기다리다’는 뜻이다. ‘몹시 기다리다’는 뜻으로 ‘쓸 고苦’자를 써서 ‘고대苦待’라는 표현을 쓴다. ‘학수고대鶴首苦待’란 말도 있는데 ‘학의 목처럼 목을 길게 빼어 기다리다’는 뜻으로 ‘몹시 애타게 기다리다’는 말이다. ‘학 학鶴’자, ‘머리 수首’자를 쓴다.

 

‘兎토’는 ‘토끼’를 말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는데 ‘사냥에서 날쌘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소용없게 되어 삶아 먹힌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실컷 부리고 필요치 않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에 사용한다. ‘죽을 사死’, ‘개 구狗’, ‘삶을 팽烹’자를 쓴다.

 

이 성어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켜보며 토끼가 부딪치기를 기다린다는 뜻인데, 자신의 일방적인 경험을 고집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고도 요행히 성공할 수 있다고 망상하는 것을 비유한다.

 



이 고사는 《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편에 나온다.

 

《한비자》는 원래 이름이 《한자韓子》로서 총 5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법가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비의 저작이다.

 

한자韓子로 불리다가 나중에 한비자로 불리게 된 한비韓非(약 서기전280-서기전233)는 당시 한韓이라는 나라의 공자公子로서, 훗날 진시황秦始皇 영정(서기전259-서기전210)을 보좌한 재상 이사李斯(약 서기전284-서기전208)와 함께 순황荀況 즉 손자荀子(약 서기전313-서기전238)에게서 배웠다. 당시에 성행한 황로黃老와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좋아했던 그는 말더듬이라서 말을 잘 하지는 못했으나 글을 쓰는 데는 거침이 없었다고 하며, 문장도 대단히 웅변적이었다.

 

당시에 한나라는 국운이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왕에게 글을 올려 변법變法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초야草野로 물러나서 글을 지었는데, 과거의 득실得失 변화變化를 총결산해서 지은 〈고분孤憤〉, 〈오두五蠹〉, 〈세난說難〉 등의 글들이 《한비자》에 수록되었다.

 

한비의 글을 읽고 난 당시 진왕秦王 영정은 그를 크게 칭찬을 했지만 만나볼 수 없어 이를 한스럽게 생각했다. 급기야 그를 얻기 위해 영정은 군대를 동원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한나라 왕은 일이 다급해지자 할 수 없이 한비를 보내 진나라의 군대 동원을 철회하도록 부탁하게 되었다.

 

한비는 영정에게 글을 올려 먼저 조趙나라를 치고 한나라에 대한 공격은 늦추어달라고 했지만, 이사에게 해를 당해 감옥監獄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한비는 자신을 변론辯論하려고 했지만 성사成事되지 않고, 마침내 이사가 보낸 독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한비는 전기 법가의 학설을 종합하고 법法, 술術, 세勢를 하나로 합쳐 선진先秦시기 법가사상의 집대성자로 후대에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부연설명하면, 법이란 성문법成文法과 공포된 법령法令을 말하며 그 내용은 공功 있는 자에게 상賞을 주고 죄罪 지은 자에게 벌罰을 주는 것이고, 술은 관리의 임면任免, 평가評價, 상벌을 시행하는 군주의 통치수단을 말하며, 세는 권세權勢나 위세威勢로서 절대적 권위의 강제력 즉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군주통치권을 말한다.

 

이 ‘수주대토’의 고사는 한비가 고대의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의 정치를 무조건적으로 본받지 말고 당시의 상황을 연구 고찰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한 이야기이다.

 

송宋나라에 농사를 짓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토끼 한 마리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산토끼는 광분해서 이리저리 날뛰다가 결국에는 한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히고 말았다. 농부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산토끼는 이미 목이 부러져 죽어 버린 상태였다.

 

농부는 대단히 기뻐하며 죽은 토끼를 집으로 가져가서 아주 맛있게 요리를 해 먹었다.

 

이튿날부터 농부는 농기구를 내버려두고 더 이상 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곧장 어제의 그 장소로 갔는데요. 나무 그루터기 옆에 앉아서 또 다시 산토끼가 저 멀리서 달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다시 열흘 보름이 지나갔지만 다시 똑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농부는 더 이상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두 번째 산토끼를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밭에 있던 농작물은 이미 모두 못쓰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비웃었으며 모든 나쁜 소문이 그렇듯이 이 소문도 매우 빠르게 송나라 전역으로 퍼졌다.

 

사실 산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은 것은 매우 우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농부는 우연을 필연으로 간주하고는 농기구를 내팽겨 버리고 자기의 밭을 황무지로 내버려 두고 우연한 수확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정말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성어는 곧 낡은 관습만을 고집하고, 새로운 시대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참고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제자백가서에서 이 송나라 사람들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수주대토 말고도 우리에게 익숙한 ‘알묘조장揠苗助長’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송나라 사람이다. ‘뽑을 알揠’, ‘싹 묘苗’, ‘도울 조助’, ‘자랄 장長’자로 구성된 알묘조장은 ‘빨리 자랄 것을 기대하고 벼의 싹을 뽑아 올려 자라는 것을 도왔는데 결국 그 벼가 말라 죽었다’는 내용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上〉편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에 위치한 송나라는 당시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은殷나라 마지막 세 현인 중의 하나인 미자微子 자계子啓를 봉함으로써 비롯됐는데, 즉 송은 은나라를 계승하여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도 사실 송나라의 후예이다.

 

【단어】

 

守(수): 지키다. /(갓머리)부, 총6획, shǒu/

 

株(주): 그루터기. /木(나무목)부, 총10획, zhū/

 

待(대): 기다리다. /(두인변)부, 총9획, dài/

 

兎(토): 토끼. /(어진사람인발)부, 총7획, tu/

 

【출전】

 

宋人有耕田者, 田中有株, 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 不可復得, 而身爲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 治當世之民, 皆守株之類也.

 

-《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7. 23:10






 

 

 사자성어

傍若無人방약무인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겸손을 미덕으로 삼곤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거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자기자랑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면접에서는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PR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또 자식이나 아내자랑을 하는 사람은 가정적인 가장으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그래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적당한 선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금주의 한자는 겸손하지 못한 사람을 말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 ‘방약무인’이다.

 

금주의 한자 ‘傍若無人방약무인’에서

 

‘傍방’은 ‘곁’을 뜻한다. ‘도울 조助’자와 결합된 ‘傍助방조’는 ‘옆에서 도와주다’는 뜻이고, ‘볼 관觀’자와 결합된 ‘傍觀방관’은 ‘어떤 일에 관계하지 않고 옆에서 구경하다’는 뜻이다.

 

‘若약’은 ‘-과 같다’는 뜻이다. ‘위 상上’, ‘착할 선善’, ‘물 수水’자로 구성된 ‘上善若水상선약수’라는 말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에 나오는 말이다.

 

‘無무’는 ‘없다’는 뜻이다. ‘無依無托무의무탁’이란 말이 있는데, ‘의지할 의依’자, ‘맡길 탁托’자로 구성된 이 말은 ‘몸을 의지하고 맡길 데가 없다’는 뜻으로 ‘몹시 가난하고 외로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손수변’의 ‘托탁’자 대신에 ‘말씀언변言’의 ‘託탁’자를 쓰기도 하며, ‘依託의탁’, ‘無依託무의탁’이란 표현을 쓴다.

 

‘人인’은 ‘사람’을 뜻하는데, ‘화할 화和’자와 결합된 ‘人和인화’는 ‘여러 사람이 화합하다’는 뜻이고, ‘물결 파波’자와 결합된 ‘人波인파’는 ‘사람의 물결’이란 뜻으로 수많은 사람을 이른다.

 

‘방약무인’은 ‘곁에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행동한다’는 의미로, 주위의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마구 행동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사기史記》〈자객열전刺客列傳〉에 나온다. 자객刺客은 지금말로 하면 암살자 혹은 킬러를 말함이니, 자객결전은 ‘킬러들의 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사기》는 전한 무제武帝 유철劉徹(서기전156-서기전87)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司馬遷(서기전145년?-서기전90년)이 저술한 책으로서 중국 최초의 기전체통사紀傳體通史이다. 기전체란 《사기》처럼 본기와 열전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방식을 말하며, 통사는 한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단대사斷代史와 달리 전 시대에 걸쳐 역사적 줄거리를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책에는 황제黃帝부터 한 나라 무제까지 약 3천 년 간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체제는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本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대를 표기한 ‘표表’, 경제, 정치, 천문, 지리 등을 기록한 ‘서書’, 제후왕에 대해 기록한 ‘세가世家’, 여러 뛰어난 인물에 대한 전기인 ‘열전列傳’ 등 다섯 가지 체제로 구성돼 있으며 총 130편입니다. 이 책은 중국의 사학과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수많은 뛰어난 인물 전기는 중국 고대 전기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중국의 걸출한 사학가요, 문학가이며 사상가인 사마천은 자가 자장子長으로서 지금의 섬서성 한성韓城 남쪽에 위치했던 용문龍門 출신이다. 사마가 성이고, 이름이 천이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사관인 태사령太史令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많은 역사문헌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고대에 사관은 대체로 세습을 하였기 때문에 20여세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훗날 그는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 유철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고 말았다. 그러다 사형과 궁형宮刑의 선택에서 학자에게 치욕스런 궁형을 택하고 발분해서 12년의 노력 끝에 불후의 저작 《사기》를 완성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궁형은 고대 중국에서 행하던 다섯 가지 형벌 즉 오형五刑 중의 하나로서 죄인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다.

 

그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형가荊軻는 위衛 나라 사람이다. 그는 평상시에도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또한 그는 검술을 좋아하여 매일같이 하루 온종일 친구들과 함께 검술과 무기를 익히며 무예 연마를 했다. 매일 새벽 날이 밝아오면 그는 곧바로 일어나 검술을 연습했으며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야 비로소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는 검술뿐만 아니라 글 읽는 것도 매우 좋아하여 좋은 시와 문장을 많이 읽었다. 항상 게을리 하지 않고 배움을 좋아하여 전국시대에 유명한 협사俠士가 되었다.

 

형가는 연燕나라로 온 이후에 은거해서 개고기를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고점리高漸離와 의기투합하여 지기知己가 되었다. 지기란 자기를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를 말하는데, ‘知己之友지기지우’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매일 두 사람은 연 나라의 저자거리에서 술을 마셨으며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될 정도로 취한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고점리도 용맹한 무사였다. 그 뿐만 아니라 고점리는 ‘축筑’이라고 부르는 옛날 악기의 연주도 잘했다. 축은 쟁箏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13줄로 된 현악기인데, 다른 현악기와 달리 대나무자로 현을 쳐서 소리를 낸다. 1996년에 상영된 <진송秦頌>이라는 영화를 보면 갈우라는 홍콩의 유명한 배우가 고점리 역을 맡아 이 축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항상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시끌벅적한 저자거리로 가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느 날, 형가와 고점리 이 두 사람이 시끌벅적한 저자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량의 8,9할 정도 되는 술을 마셨을 때 취기가 오르자 그들은 함께 제일 번화한 저자거리 한복판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고점리는 축을 치며 형가는 악기 소리에 맞추어 목을 놓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점점 더 흥에 겨워졌으며, 이에 따라 노래 소리도 갈수록 더 커졌다. 이들의 고성방가高聲放歌 때문에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구경꾼들을 보고도 못 본체하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노래가 슬프고 비분강개한 대목에 이르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듯이 대성통곡을 하는데 마치 이 세상에 자기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훗날 형가는 연燕 나라의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진왕秦王 영정 즉 훗날의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러 목숨을 걸고 길을 떠났다. 배웅해 주는 사람들 가운데는 고점리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드디어 역수易水가에서 헤어져야 했다. 그때 고점리는 축을 치고, 형가는 거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디찬데 장사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눈을 부라리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았다고 한다. 결국 이 노래대로 형가는 일을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고점리도 뒷날 장님이 되어서까지 친구 형가의 원수를 갚으려고 진왕을 노리다가, 역시 실패하여 형가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방약무인한 행동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무례한 행동을 의미하나, 《사기》〈자객열전〉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 방약무인이라는 말로 표현했을 뿐 비난하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았다.

 

‘방약무인’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 말로는 ‘眼下無人안하무인’이 있다. ‘눈 안眼’자, ‘아래 하下’자를 쓰는 ‘안하무인’은 ‘눈 아래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 ‘輕擧妄動경거망동’이란 말도 있는데, ‘가벼울 경輕’자, ‘들 거擧’자, ‘망령될 망妄’자, ‘움직일 동動’자를 쓰는 ‘경거망동’은 ‘경솔하고 망령되게 행동하다’는 의미이다.

 

이 말들보다 좀 더 심한 표현으로 ‘傲慢無禮오만무례’와 ‘傲慢不遜오만불손’이 있다. ‘거만할 오傲’자, ‘게으를 만慢’자, ‘없을 무無’자, ‘예도 례禮’자를 쓰는 ‘오만무례’는 ‘태도나 행동이 거만하고 예의가 없다’는 의미이고, 또 ‘아니 불不’자와 ‘겸손할 손遜’자를 ‘오만불손’은 ‘태도나 행동이 거만하고 공손치 못하다’는 의미이다.

 

예의범절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 예의에 어긋나거나 예의가 없다, 무례하다는 말도 그 기준에 따라 정도가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아닐까?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닐진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미덕을, 각박해지는 요즈음 더욱 소중하게 새겨보게 된다.

 

【단어】

 

傍방: 곁. /人(사람인)부, 총12획, páng/

 

若약: 같다. /(초두머리)부, 총9획, ruò/

 

無무: 없다. /(연화발)부, 총12획, wú/

 

人인: 사람. /人(사람인)부, 총2획, rén/

 

【출전】

 

荊軻嘗游過楡次, 與蓋聶論劍, 蓋聶怒而目之. 荊軻出, 人或言復召荊卿. 蓋聶曰: “曩者吾與論劍有不稱者, 吾目之; 試往, 是宜去, 不敢留.” 使使往之主人, 荊卿則已駕而去楡次矣. 使者還報, 蓋聶曰: “固去也, 吾曩者目攝之!”

 

荊軻游於邯鄲, 魯句踐與荊軻博, 爭道, 魯句踐怒而叱之, 荊軻嘿而逃去, 遂不復會.

 

荊軻旣至燕, 愛燕之狗屠及善擊筑者高漸離. 荊軻嗜酒, 日與狗屠及高漸離飮於燕市, 酒酣以往, 高漸離擊筑, 荊軻和而歌於市中, 相樂也, 已而相泣, 旁若無人者. 荊軻雖游於酒人乎, 然其爲人沈深好書; 其所游諸侯, 盡與其賢豪長者相結. 其之燕, 燕之處士田光先生亦善待之, 知其非庸人也.

 

-《사기史記》〈자객열전刺客列傳〉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6. 06:30




 한자이야기

안제미擧案齊眉

 

 

 

 

 

금주의 한자 ‘擧案齊眉거안제미’에서,

 

‘擧거’는 ‘들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받쳐 들다’는 뜻을 갖는다. 우리가 자주 쓰는 ‘擧手敬禮거수경례’라는 말은 ‘오른손을 오른쪽 눈썹까지 올려서 하는 경례’를 이른다. ‘손 수手’, ‘공경할 경敬’, ‘예도 례禮’자를 쓴다.

 

‘案안’은 ‘밥상’ 혹은 ‘소반’이라고 해석하는데, 음식을 받쳐 들고 갈 때 쓰는 다리 짧은 나무 탁반을 말한다. 또 ‘책상’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지금과는 달리 좁고 긴 탁자를 지칭하며, ‘문서’나 ‘안건’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齊제’는 ‘가지런하다’, ‘같다’는 뜻이다. 동의어인 ‘가지런할 정整’자와 결합된 ‘整齊정제’는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다’는 뜻인데, 이 말은 ‘옷을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다’는 뜻으로도 써서 보통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다’라고 표현한다.

 

‘眉미’는 ‘눈썹’을 말한다. ‘두 눈썹 사이’를 ‘사이 간間’자를 써서 ‘眉間미간’이라 하는데, 여기에다 ‘두 량兩’자를 넣어 ‘兩眉間양미간’이라고도 한다.

 

이 ‘거안제미’는 ‘밥상을 눈썹 높이로 받쳐 올린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거나 또는 부부가 서로 간에 공경하고 사랑함을 형용한 말이다. 이를 줄여서 ‘齊眉제미’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동관한기東觀漢記》〈양홍전梁鴻傳〉과 《후한서後漢書》〈양홍전梁鴻傳〉에 나온다.

 

‘동관東觀’은 중국 후한 때 수도 낙양의 황궁에 있는 전각 이름인데, 황실의 도서가 보관돼 있었고 역사를 편찬하는 곳이었다.

 

《동관한기》는 초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서기전5-서기57)부터 제12대 영제靈帝 유굉劉宏(156-189)까지의 후한 왕조 역사를 《사기史記》의 경우처럼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 중국 최초의 관찬 사서인데,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황제의 사0관을 거쳐 완성되었다. 총 1백4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삼국시대와 양진 시대까지는 《한기》라고 불렸다가 남북조 때에 와서야 《동관한기》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 ‘세 가지 역사책’이라는 뜻의 ‘삼사三史’라고 하면 전한 사마천司馬遷(약 서기전145-약 서기전90)의 《사기》, 후한 반고班固(32-92)의 《한서漢書》 그리고 이 《동관한기》를 꼽았다. 그러다가 남조南朝 때 범엽范曄(398-445)의 《후한서後漢書》가 편찬되자 《동관한기》는 ‘삼사’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후한서》보다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록이 훨씬 자세하며, 《후한서》에 없는 내용도 기록돼 있어 후한 왕조를 연구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문헌이다.

 

그럼 양홍과 그의 아내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때는 후한 초, 부풍扶風 평릉현平陵縣(지금의 섬서성 함양咸陽)에 양홍梁鴻(자는 백란伯鸞)이라고 하는 가난한 서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부지런히 노력해서 당시의 최고학부인 태학太學에 당당히 들어갔다.

 

양홍은 학업을 마친 후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은 그의 품격이 높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수도인 낙양에서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모두들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태학생 출신이라는 티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농사꾼과 마찬가지로 밭에 나가서 농사일을 했다.

 

이렇게 수년 동안 생활하자, 마을 가까이 사는 사람이든 멀리 사는 사람이든 모두 양홍이 학식이 있는 농사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양홍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같은 현縣에 맹孟 대인이라는 갑부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딸이 시집을 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맹 대인이 화를 내며 딸에게 물었다.

 

“네 나이 이미 서른 인데 아직도 여기도 시집 안 간다, 저기도 시집 안 간다고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쩔 셈이냐? 설마 평생 시집 안 가고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

 

딸이 대답했다.

 

“양홍 같은 사람이라야 시집 갈 거예요.”

 

맹 대인은 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사람을 보내 양홍에게 딸의 마음을 전달했다. 양홍은 맹 소저小姐가 자신에 맞는 배필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통해 구혼을 하였고 맹씨 집에서는 자연히 즉각 수락을 하였다.

 

얼마 후, 양홍은 맹 소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결혼 첫날부터 이레가 될 때까지 양홍은 신부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맹 소저는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어째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 당신은 품격이 고상하며 아내를 고르는 것도 퍽 신중하여 일찍이 여러 사람이 혼담을 꺼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비록 얼굴이 예쁜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혼담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당신과 의기투합하여 부부가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레가 되었는데도 당신은 저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저에게 틀림없이 어떤 잘못이 있을 터이니 당신에게 용서를 빕니다!”

 

양홍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어서 이윽고 아내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결혼하려고 생각했던 사람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검소한 아내요. 그래야 나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은거 생활을 할 수 있소.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것은 능라주단綾羅綢緞이요, 머리에 하고 있는 것은 금은보화金銀寶貨이니, 이게 어디 내가 바라던 바이겠소?”

 

맹 소저는 남편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 몸에 입고 있는 것은 혼례복입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뜻을 알았다면 진작부터 평범한 옷과 신발을 준비했을 텐데, 당신은 어째서 이 때문에 마음을 쓰고 계셨습니까?”

 

양 소저는 그때까지 초야를 치르지 않아 미처 혼례복을 갈아입지 못했던 것이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맹 소저는 내실로 들어가더니 머리장식을 빼버리고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채소바구니를 팔에 걸고 나왔다.

 

양홍은 이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서 말했다.

 

“이제야 진정한 양홍의 아내로서, 나를 받들어 줄 수 있소!”

 

말을 마치고 그는 아주 흔쾌히 아내에게 이름과 자를 지어주었는데, 이름은 ‘빛 광光’자를 써서 맹광이라 하고, 자는 덕요德曜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 부부는 패릉覇陵이라는 곳의 산속으로 이사를 했다. 부부는 농사와 길쌈으로 생활을 했고 시간을 내서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비파琵琶도 탔다. 시간이 오래 되지 않아서 그들은 패릉에서도 이름이 나게 되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양홍이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친구들에게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중에 황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그것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그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한동안 제齊와 노魯 지방에 가서 머물렀다가 맨 끝에는 오吳 지방에 가서 일부러 고백통皐伯通이라는 부자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의탁하여 방 한 칸을 빌려 머물렀다. 양홍은 매일 밖에 나가서 남의 집 쌀을 찧어주거나 밭갈이를 하였고, 맹광은 집에서 실을 뽑아서 베를 짰다.

 

매일같이 양홍이 집에 돌아올 때면 맹광은 밥과 반찬을 올려놓은 소반을 받쳐 들고 아주 공경스럽게 양홍의 면전으로 다가왔다. 남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맹광은 양홍을 쳐다보지 않았고 게다가 매번 소반을 눈썹 높이까지 받쳐 들고 건넸다. 양홍도 언제나 매우 예의 있게 두 손으로 소반을 받았다.

 

어느 날 고백통은 그들 부부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광경을 보고 양홍이 예사 농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곧 그의 일가를 자기 집으로 오게 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서 양홍이 마음 편하게 글을 읽고 글을 짓게 했다. 후에 자식들도 낳고 잘 살다가 양홍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때야 비로소 맹광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 맹광의 고사에서 ‘가시나무 비녀와 무명 치마’라는 뜻의 ‘형차포군荊釵布裙’이라는 말이 생겼다. ‘가시나무 형荊’, ‘비녀 차釵’, ‘베 포布’, ‘치마 군裙’의 ‘형차포군’은 부녀자의 소박한 옷차림을 말한다. 또 ‘아내 처妻’자를 쓰는 ‘형처荊妻’라는 말도 생겼는데, 이것은 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단어】

 

擧거: 들다. /手(손수)부, 총18획, jǔ/

 

案안: 밥상. 책상. /木(나무목)부, 총10획; àn/

 

齊제: 가지런하다. /齊(가지런할제)부, 총14획, qí/

 

眉미: 눈썹. /目(눈목)부, 총9획, méi/

 

【출전】

 

里孟氏女, 容貌醜而有節操, 多求之不肯. 父母問其所欲, 曰: “得賢婿如梁鴻者.” 鴻聞乃求之. 女椎髻, 著布衣, 操作具而前. 鴻大喜, 曰: “此梁鴻妻也, 能奉我矣.” 字之曰德耀, 名孟光. 將妻之霸陵山, 耕耘織作以供衣食, 彈琴誦詩以娛其志. 鴻將之會稽, 作詩曰: “維季春兮華阜, 麥含金兮方秀.” 適吳, 依大家皋伯通廡下賃舂. 每歸, 妻具食, 不敢于鴻前仰視, 案常齊眉. 伯通察而異之, 曰: “彼傭賃, 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 《동관한기東觀漢紀》〈양홍전梁鴻傳〉.

 

遂至吳, 依大家皐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 伯通察而異之, 曰: “彼傭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乃方舍之於家. 鴻潛閉著書十餘篇. 疾且困, 告主人曰: “昔延陵季子葬子於嬴博之閒, 不歸鄕里, 愼勿令我子持喪歸去.” 及卒, 伯通等爲求葬地於吳要離. 咸曰: “要離烈士, 而伯鸞淸高, 可令相近.” 葬畢, 妻子歸扶風. - 《후한서後漢書》〈양홍전梁鴻傳〉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5. 02:30




 

 

숙능생교 熟能生巧

 

 

 

분수에 맞지 않게 값비싼 명품을 고집하는 여자들을 일컬어 ‘된장녀’라고 비꼬아 얘기한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아름답고 고급스런 의상과 가방, 맛있는 먹거리를 탐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명품을 사는 것은 욕망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어느 정도 명품이나 좋은 것을 원하는 욕망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문제는 ‘명품’의 진정한 뜻도 모른 채 그저 브랜드에만 급급해 그것을 좇는 것이다. 명품이란 ‘장인정신의 산물’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까다로운 공정을 거치고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를 통해서 탄생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랜 시간을 거쳐야 뛰어난 기교를 발휘할 수 있다는 ‘숙능생교’를 통해 진정한 명품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지 알려드리고자 한다.

 

 


 

금주의 한자 ‘熟能生巧숙능생교’에서

 

‘熟숙’은 ‘숙련되다’는 뜻이다. 익숙하게 잘 하는 것을 ‘능숙能熟’이라 하고, 연습을 많이 해서 능숙하게 익히는 것을 ‘숙련熟練’이라 하며, 친하여 익숙한 것을 ‘친숙親熟’이라 한다.

 

‘能능’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능可能’은 ‘-할 수 있다’는 말이고 ‘능소능대能小能大’란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일에 두루 능한 것을 말한다.

 

‘生생’은 ‘생기다’, ‘나다’는 뜻이다. ‘생산生産’은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고, ‘출생出生’은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특히 귀인이 태어나는 것을 ‘탄생誕生이라 한다.

 

‘巧교’는 ‘기교’라는 뜻이다. 뛰어난 솜씨를 ‘기교技巧’라 하고, 솜씨나 꾀가 재치 있고 약삭빠른 것을 ‘교묘巧妙’라 하며, 여러모로 생각해낸 꾀를 ‘계교計巧’라 한다.

 

‘熟能生巧숙능생교’는 ‘숙련되면 기교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로, 오랜 기간의 수련을 거쳐야 뛰어난 기교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성어는 북송北宋 때의 문인 구양수가 쓴 〈매유옹賣油翁〉이라는 글에서 취한 것이다. ‘매유옹’은 ‘팔 매賣’, ‘기름 유油’, ‘늙은이 옹翁’으로서 ‘기름 파는 노인’이라는 뜻인데, 〈매유옹〉은 《귀전록歸田錄》에 들어 있으며, 《귀전록》은 구양수의 문집인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에 수록되어 있다.

 

구양수歐陽修(1007-1072)는 북송 때의 문인이요 역사가이다.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술에 취한 노인이라는 뜻의 ‘취옹醉翁’이며, 말년에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칭해졌다. 지금의 강서성에 속하는 길수吉水 영풍永 출신이다. 당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정사인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에 참여했고, 독자적으로 《신오대사新五代史》를 집필했다. 벼슬이 재상 다음가는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로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둘 다 정식국호는 ‘송’이다. 960년에 조광윤趙匡胤(927-976)이 세운 송나라는 경성이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인 변량汴梁이고, 1126년에 금나라에 의해 변량이 함락된 후 흠종欽宗 조환趙桓(1100-1156)의 동생 조구趙構(1107-1187)가 황제로 즉위하고 2년 후에 정한 경성은 지금의 항주杭州인 임안臨安이다. 변량이 상대적으로 북쪽이고, 임안이 남쪽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송을 구분해서 북송과 남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야기는 중국 북송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북송北宋 때 활을 아주 잘 쏘는 진요자陳堯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숙공康肅公이라고 불렸으며 당시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확실히 진요자 만큼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득의양양했으며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진요자가 집안 정원 안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쏘는 화살마다 거의 과녁에 명중해서 보는 사람들 모두가 환호하며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그 때 기름을 파는 한 노인네가 어깨에 멘 기름보따리를 땅에 내려놓고 매우 깔보는 듯한 눈초리로 진요자가 활 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의 활쏘기 실력에 대해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다가 가끔씩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곤 했다. 이윽고 노인이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거 뭐 특별할 것도 없구먼!”

 

진요자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해서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도 활을 쏠 줄 아시오? 내 화살 솜씨가 별거 아니란 거요?”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활쏘기는 훌륭하오. 허나 내가 활을 쏠 줄은 모르지만 이것은 결코 특별할 것이 없으며 단지 손에 익었을 뿐이지요.”

 

진요자는 더욱 성이 나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내 활쏘기 솜씨를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노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 노인에게 어떤 절정의 기량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대로 질문을 했더니, 다만 노인은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기름 따르는 기교를 가지고서, 나는 이 점을 알 수가 있소.”

 

노인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조롱박 하나를 꺼내서 땅에 세우고, 다시 동전 한 개를 꺼내 조롱박의 입구 위에 얹었다. 그런 후에 나무 국자로 기름통 속에서 기름을 퍼서 천천히 따랐다. 기름은 동전의 네모진 구멍 속으로 마치 한 줄기 직선처럼 곧장 조롱박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한 국자의 기름이 모두 다 들어갔지만 조롱박 입구의 동전에는 여전히 반 방울의 기름도 묻지 않았다. 이 때 노인은 고개를 들고 진요자에게 말했다.

 

“이것도 뭐 특별한 기량은 아니고 단지 숙련되어서 기교가 생긴 것일 뿐이외다.”

 

진요자는 노인의 기름 따르는 숙련된 솜씨를 보고서 마음속으로 많은 것들이 분명해져 웃으면서 노인을 집 정원 밖으로 내보내줬다.

 

 

 

이 고사는 어떤 일을 막론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반복해서 실천하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숙련된 기교를 익히고 요령을 터득할 수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한걸음 나아가, 기술이나 솜씨는 숙련되면 기교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 뽐낼 것은 없다는 점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구수한 된장찌개를 맛있게 해치운 기억,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밥과 함께 우리의 가슴에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사랑이 한 가득 채워졌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내에게서 받은 첫 번째 밥상.

 

밥은 뜸이 덜 들어서 돌을 씹는 것 같고, 콩나물국은 또 왜 이리 싱거운지....

 

아내 몰래 소금을 뿌리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결혼 후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밥상에 놓여 있는 먹음직스러운 잡채와 쇠고기로 맛을 낸 미역국으로 상다리가 휘청거린다.

 

그야말로 아내의 숙능생교는 그렇게 밥상위에서 만들어졌다.

 

 

 

【단어】

 

熟(숙): 익다. 익숙하다. 숙련되다. /(연화발)부, 총15획, shú/

 

能(능): 능하다. -할 수 있다. /月(육달월)부, 총10획, néng/

 

生(생): 나다. 생기다. /生(날생)부, 총5획, shēng/

 

巧(교): 기교. /工(장인공)부, 총5획, qiǎo/

 

 

 

【출전】

 

陳康肅公堯咨善射, 當世無雙, 公亦以此自矜. 嘗射於家圃, 有賣油翁釋擔而立, 睨之, 久而不去. 見其發矢十中八九, 但微頷之. 康肅問曰: “汝亦知射乎? 吾射不亦精乎?” 翁曰: “無他, 但手熟爾.” 康肅忿然曰: “爾安敢輕吾射!” 翁曰: “以我酌油知之.” 乃取一葫蘆置於地, 以錢覆其口, 徐以杓酌油瀝之, 自錢孔入, 而錢不濕. 因曰: “我亦無他, 惟手熟爾.” 康肅笑而遣之.

 

- 《귀전록歸田錄》 〈매유옹賣油翁〉.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4. 06:00






 

 

 한자공부

不恥下問 불치하문

 

 

 

 

 

어떤 직장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부하들이 상사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잘 모르겠는데, 좀 가르쳐주지.’가 1위였다고 한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질문하는 자세만 있으면 환영받을 수 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이제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는 시대는 지나갔나 보다.

 

오늘은 모르는 걸 모른다 하고, 아는 걸 안다고 하는 공자의 얘기를 할까 한다. 바로 ‘불치하문’이다.

 

 

 

‘不불’은 ‘아니다’는 뜻의 부정부사이다.

 

‘恥치’는 ‘부끄러워하다’는 뜻이고, 본문에서는 ‘부끄럽게 생각하다’로 해석한다. 흔히 ‘치욕恥辱스럽다’ 혹은 ‘수치羞恥스럽다’ 라고 할 때 사용한다.

 

‘下하’는 ‘아래’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아랫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학문이 부족한 사람을 말한다.

 

‘問문’은 ‘묻다’는 뜻으로 ‘의문疑問’, ‘질문質問’이나 ‘문답問答’이라는 표현에 쓰인다.

 

즉 ‘불치하문’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능력이나 학식이 자신만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 수 있으므로,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겸허한 자세로 배움을 좋아한다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이 말은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온다.

 

《논어》는 유가儒家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공자의 언행과 사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물론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나 혹은 제자의 제자 손에 의해 기록 정리된 것인데, 총 20편으로 구성돼 있으며 편의 제목은 해당 편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두 세 글자를 취해서 붙였다. 예를 들면 제1편 학이學而는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에서 따온 것이다. 해석하면,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 하겠다.

 

중국 춘추시대에 활동했던 공자孔子(서기전551-서기전479)는 위대한 사상가요 정치가이며 교육자로서 유가학파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서 노魯 나라 출신이다.

 

그는 당시에 무너진 정치질서를 회복하고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녔다. 이 말은 철환천하轍環天下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수레 철轍’자와 ‘돌 환環’자로 구성된 이 ‘철환’은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다‘라는 뜻이고 ’천하天下‘는 당시의 중국 전체를 말한다.

 

공자가 한 나라에 도착하면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이 급히 다른 나라로 떠났다고 해서 ‘공석불가난孔席不暇暖’이란 말도 생겼다. ‘겨를 가暇’자에 ‘따뜻할 난暖’자. 당唐 나라 때의 대문장가 한유韓愈가 〈쟁신론爭臣論〉이란 글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줄여서 ‘공석孔席’ 혹은 ‘겨를 가暇’자를 빼고 ‘공석불난孔席不暖’이라고도 쓴다.

 

훗날 공자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일러 성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자는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학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공자가 성인이라고 일컫는 노魯 나라 주공周公의 사당인 태묘太廟에 가서 제례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모르는 것을 질문했는데 거의 모든 일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등 뒤에서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누가 이 사람보고 예를 안다고 했어? 아무 것도 모르고 무엇이든지 물으려고 하려고만 하잖아!”

 

공자는 뒤에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묻는 것, 이것이 바로 예이다.”

 

그 시절 공어孔圉라고 하는 위衛 나라의 대부가 있었는데, 그는 겸허하게 학문을 좋아했으며 사람됨이 정직했다. 당시 사회 습관으로 최고 통치자 혹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에게 별도로 호칭을 달아줬는데 이것을 시호諡號라고 한다. 이 습관에 따라 공어가 죽은 뒤에 그에게 ‘문文’이라는 시호를 수여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공문자孔文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공子貢(서기전520-서기전456)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공자의 제자는 3천 명에 달했고 그 중에 주周 나라 때의 교육 과목인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고 한다. 육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는데 예는 예의,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몰기, 서는 글쓰기, 수는 산수를 가리킨다.

 

또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 10명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자공은 외교사령 즉 외교적인 언사에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졌다.

 

자공의 성은 단목端木이라는 복성複姓이고 이름은 사賜로서 춘추시대 위衛 나라 사람이다.『논어』에서 공자와 제자의 문답 중 그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영리하고 이해력이 뛰어나 공자로부터 ‘지난 것을 말해주면 올 것을 안다’, ‘그의 현명함이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상술에도 뛰어나 큰 부를 축적하였다고 전해진다.

 

자공은 공어에게 부족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스승 공자에게 가서 여쭈었다.

 

“스승님,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민첩한데다 배움을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그를 일러 ‘문’이라고 한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즉 공어가 총명하면서도 또 배우는데 부지런하며, 지위가 자신보다 낮거나 학문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으로써 그의 시호를 삼았다는 것이다. 시호를 정하는 법인 시법諡法에 의하면, ‘근학하문勤學下問’ 즉 부지런히 배우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문文’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공문자의 시호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 것이지만 사실 공자 자신의 학문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의미의 ‘(三人行삼인행에 必有我師焉필유아사언’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든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이다.

 

공자의 불치하문하는 태도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른바 ‘공자천주孔子穿珠’이다. ‘뚫을 천穿’자, ‘구슬 주珠’를 쓰는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하면 ‘공자가 구슬을 꿰다’인데, 공자가 시골 아낙에게 물어 구슬을 꿰었다는 뜻입니다. 고사는 이러하다. 공자가 구슬을 선물 받았는데, 그 구슬은 희한하게도 구멍이 아홉 번 굽어졌다. 공자가 이리저리 궁리해서 열심히 구슬에 실을 꿰어보았으나 너무 어려워서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어느 날 공자가 진陳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뽕을 따는 아낙네들을 만나자 그 구슬 생각이 났다. 이 아낙네들이 혹시 구슬에 실을 꿰는 방법을 알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공자가 질문을 하자, 한 아낙네가 대답했다.

 

“차근차근히 생각하고, 생각을 차근차근하게 하세요.”

 

공자가 아낙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는데, 발밑에 기어 다니는 개미들을 보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개미허리에 실을 묶고 구슬의 한 쪽 구멍으로 들어가게 하고, 반대쪽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는 것이었다. 그러자 개미는 꿀 냄새를 맡고 계속 구멍으로 들어가 이윽고 구슬의 다른 구멍으로 나왔다.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조정사원祖庭事苑》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는 학식이 없는 아녀자에게 거리낌 없이 모르는 것을 물어 알았던 것이다.

 

‘耕當問奴경당문노, 織當問婢직당문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밭갈이는 마땅히 사내종에게 묻고, 길쌈은 마땅히 계집종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학식이 아무리 뛰어나고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세상일을 다 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이 닥치면 학식 불문, 나이 불문, 지위 불문, 시간과 장소 불문하고 묻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또 다른 명언이 떠오릅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농경사회였다. 경험과 연공서열이 금과옥조처럼 귀히 여겨지던 시대에 굳이 ‘불치하문’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 듯 보인다. 오히려 이 사자성어는 지식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한다.

 

“어이, 김대리, 엑셀에서 데이터를 정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

 

“어멈아, 휴대폰 문자에 이모티콘은 어떻게 넣는 거지?”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더욱 부드럽게 하고, 고부간의 갈등을 더욱 완화시키는 비결, 바로 ‘불치하문’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단어】

 

不불: 아니다. 부정부사. /一(한일)부, 총4획, bù/

 

恥치: 부끄러워하다. /心(마음심)부, 총10획, chǐ/

 

下하: 아래. 아랫사람. /一(한일)부, 총3획, xià/

 

問문: 묻다. /口(입구)부, 총11획, wèn/

 

 

 

【출전】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3. 10:00




 

 

三顧草廬 삼고초려

 

 

 

 

 

최고 경영자를 뜻하는 CEO는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도 같다. 능력 있는 CEO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경쟁력이 요구되는데, 100대 기업 CEO들은 평균 새벽 5시 37분에 기상을 하며 근무시간의 40% 이상은 현장에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인재를 보는 눈과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야말로 CEO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 하겠다.

 

예전에 한 증권 회사 사장이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 멀리 해외로 ‘인재 찾아 삼만 리’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는데, 과거에도 흙속에서 진주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긴 마찬가진가 보다. 인재를 알아보고, 그 인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유비의 이야기, 함께 만나보자.

 

 


 

금주의 한자. ‘三顧草廬삼고초려’에서

 

‘三삼’은 아시다시피 숫자 3인데, 본문에서는 ‘세 번’이라는 뜻이다.

 

‘顧고’는 ‘돌아보다’는 뜻인데, 여기서 ‘방문하다’는 뜻이 나왔으며 본문에서도 이 뜻으로 사용되었다. ‘고객顧客’은 ‘찾아오는 손님’이란 말이다.

 

‘草초’는 ‘풀’이라는 말이다. ‘뿌리 근根’자, ‘나무 목木’자, ‘껍질 피皮’자로 이루어진 ‘草根木皮초근목피’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는 뜻으로 나쁜 음식이나 한약재를 말한다.

 

‘廬려’는 ‘오두막’을 말하니, ‘초려’는 바로 ‘초가집’이란 뜻으로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 된다.

 

그래서 ‘삼고초려’는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진심으로 예를 갖추어 남을 맞이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제갈량諸葛亮(181-234)의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며, 그 이야기는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약 1330-약 1400)이 지은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에 자세하다. 〈출사표〉는 위魏 나라를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직접 후주後主 유선劉禪(207-271)에게 올린 표문이다.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국충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천고의 명문인 이 〈출사표〉는 서진西晉 때의 사학가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제갈량전諸葛亮傳〉이나 《문선文選》 등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동한 즉 후한 말엽, 유비劉備(161-223)는 조조曹操(155-220)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형주荊州의 유표劉表(142-208)에게 몸을 의탁했다. 훗날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인재를 널리 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형주의 저명인사 사마휘司馬徽(?-208)를 찾아가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청했다. 사마휘는 이렇게 조언했다.

 

“이 지역에 복룡伏龍과 봉추鳳雛라는 사람이 있는데 둘 중에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소.”

 

유비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본 결과, 복룡이 바로 공명孔明이라는 자를 쓰는 제갈량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양양성襄陽城 서쪽 이십 리 떨어져 있는 융중隆中이란 곳에 은거해서, 초가집에 살며 직접 농사를 짓고 역사서에 정통해 있는 걸출한 인물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곧 자신의 결의형제인 관우關羽(?-219)와 장비張飛(?-221)를 데리고 융중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 날 공교롭게도 제갈량이 외출하고 집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며칠 후에 유비는 다시 관우, 장비와 함께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설을 무릅쓰고 제갈량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제갈량은 이번에도 친구와 함께 한가롭게 외출을 하였다. 유비는 할 수 없이 편지 한 통을 써서 남겨두었다. 내용은 자신이 제갈량에 대해 무한한 경의를 갖고 있으며, 아울러 제갈량에게 자신이 나라의 위험을 구하는데 도와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다시 얼마가 지난 후에 유비는 자신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특별히 사흘 동안 술과 고기를 삼가고 채식을 했으며 아울러 출발하기 전에 목욕을 하고 의복을 갈아입고 세 번째로 제갈량을 방문했다. 이 때 제갈량은 잠을 자고 있었다. 유비는 감히 그를 귀찮게 하지 않고 공경스럽게 섬돌 아래서 인내심을 갖고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제갈량은 유비의 성심성의에 감동을 해서 유비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 날 이후로 제갈량은 유비의 최고 모사謀士가 되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후 자신과 그의 사이를 물고기가 물을 만난 사이라고 말했는데, 이로부터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이 나왔다.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물고기는 물을 떠나 잠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친밀한 관계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훗날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동쪽에 위치한 손권孫權(182-252)의 오吳 나라와 연합해서 북쪽에 위치한 조조의 위나라를 공격하여 형주와 익주益州를 점거한 후 촉한蜀漢을 세워 오나라, 위나라와 함께 삼국정립의 국면을 형성했다.

 

 


 

이 성어는 달리 ‘草廬三顧초려삼고’, ‘三顧之禮삼고지례’라고도 하며, 줄여서 ‘三顧삼고’라고도 한다.

 

 

 

세속적인 가치나 일신의 안락함 보다는 장래성 있는 미래에 투자했던 공명의 이야기. 요즘으로 치면 대기업의 임원 자리를 마다하고 영세 벤처기업에 뛰어든 거라고도 볼 수 있다.

 

눈보라가 휘날릴 때 이십 리 길을 고생하며 스무 살이나 어린 공명을 찾아갔던 유비 또한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은 여러 번 공을 들여 ‘진심’을 보여야만 얻을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준 진정한 리더라 하겠다.

 

이 두 사람을 통해 리더는 인재를 필요로 하고 인재는 자신을 알아준 리더를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다한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단어】

 

三(삼): 3. /一(한일)부, 총3획, sān/

 

顧(고): 돌아보다. /頁(머리혈)부, 총21획, gù/

 

草(초): 풀. /(초두머리)부, 총10획, cǎo/

 

廬(려): 오두막집. /广(엄호밑)부, 총19획, lú/

 

 

 

【출전】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 『삼국지三國志』「제갈량전諸葛亮傳」(「출사표出師表」).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2. 08:00




 한자공부

漁父之利 어부지리

 

 

 

 

 

금주의 한자 ‘漁父之利어부지리’에서

 

‘漁어’는 ‘물고기를 잡다’는 뜻이다. ‘그물 망網’ 자와 결합된 ‘漁網어망’은 ‘고기잡이 그물’을 뜻한다. ‘豊漁풍어’와 ‘凶漁훙어’란 말이 있다. 年풍년, 凶年흉년과 같은 구조인데, ‘풍성할 풍 자와 결합된 ‘豊漁풍어’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다’는 뜻이고, ‘흉할 흉凶’ 자와 결합된 ‘凶漁흉어’는 ‘물고기가 아주 적게 잡히다’는 뜻이다.

 

‘父부’는 ‘아비 부’ 자로서 ‘노인에 대한 존칭’이다. ‘아비 부父’ 자를 쓰는 ‘漁父어부’와 ‘지아비 부夫’ 자를 쓰는 ‘漁夫어부’는 같은 뜻인데, ‘아비 부’ 자를 쓰는 ‘漁父어부’는 ‘늙은 어부’라는 뜻이다.

 

‘之지’는 구조조사로서 ‘…의’라는 뜻이다.

 

‘利리’는 ‘이득’이라는 말이다. ‘해칠 해害’ 자, ‘얻을 득得’ 자, ‘잃을 실失’ 자로 구성된 ‘利害得失이해득실’은 이익과 손해, 얻음과 잃음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어부지리’는 글자그대로 ‘어부의 이득’이라는 뜻으로, 쌍방이 서로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第三者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利得을 챙긴다는 말이다. 이 말은 쌍방이 서로 대치하며 물러서지 않다가 결과적으로 둘 다 모두 피해를 입음을 비유할 때도 쓰인다.

 

이 고사는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2〉에 나오는데, ‘전국시대의 책략’이라는 뜻의 《전국책》은 중국 전국시대 각 나라들의 역사 정황을 기록한 중요한 국별체國 역사서로서 당시와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역사산문歷史散文의 걸작傑作이다. 이 책은 전국시대의 유세객遊說客들과 종횡가縱橫家의 정치주장과 책략策略, 전설傳說을 모은 것이다. 전국시대 초기부터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망시킬 때까지 약 2백40년 동안, 동주東周 및 진秦, 제齊, 초楚, 조趙, 위魏, 한韓, 연燕, 송宋, 위衛, 중산中山 각 나라의 일을 수록하였는데, 12책策, 3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4백97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전국책》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한 사람에 의해서 또 어떤 한 시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전국책》의 성립 시기는 전국시대 말엽이나 한대漢代 초기로 보며, 유명한 경학자經學者요, 목록학자目錄學者, 문학가인 유향劉向(서기전 77- 서기전 6)이 교정校訂하고 최후로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합종연횡合縱連衡이나 원교근공遠交近攻 등의 외교정책外交政策이 이야기로 실감實感나게 등장한다. 원래 ‘세로 종縱’ 자는 ‘좇을 종從’를 쓰기도 하며 남북을 가리키고, ‘가로 횡橫’ 자는 ‘저울대 형衡’ 자를 쓰기도 하며 동서를 뜻한다. 합종과 연횡은 서로 반대되는 외교정책이다. ‘합할 합合’ 자와 ‘세로 종縱’ 자로 구성된 ‘합종合縱’은 소진蘇秦이 여섯 나라 제후諸侯들에게 남북으로 연합해서 서쪽의 강대한 진秦 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외교정책이고, ‘잇닿을 련連’ 자와 ‘가로 횡橫’ 자로 구성된 ‘連橫연횡’은 진나라의 재상 장의張儀(?-서기전 310)가 제창한 외교정책으로서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합종 정책을 깨뜨릴 목적으로 여섯 나라의 각 제후들에게 이익으로 꾀어 진나라와 친선親善 관계를 맺도록 한 후에 다시 각개격파各個擊破를 하여 천하통일天下統一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소진과 장의는 모두 귀곡자鬼谷子라 불리는 왕후王詡(서기전 400-서기전 320)의 제자이다. ‘멀 원遠’ 자, ‘사귈 교交’ 자. ‘가까울 근近’ 자, ‘칠 공攻’ 자로 구성된 ‘원교근공’은 먼 나라와 친교親交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중국의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강대한 일곱 제후국, 즉 제齊 나라, 초楚 나라, 진秦 나라, 연燕 나라, 한韓 나라, 위魏 나라, 조趙 나라 등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서로 공벌攻伐을 하여 전쟁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칠웅’의 ‘수컷 웅雄’ 자는 ‘강국’을 뜻한다.

 

조 나라가 연 나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역사상 유명한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에게는 집안 아우인 소대蘇代라는 이름을 가진 유세객이 있었다. 참고로 소대의 아우는 소려蘇厲인데, 이렇게 소진, 소대, 소려 세 사람의 종횡가를 ‘삼소三蘇’라고 부른다. 삼소라는 명칭은 북송 때에도 있었는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대문장가 소순蘇洵(1009-1066), 소식蘇軾(1037-1101), 소철蘇轍(1039-1112)의 삼부자三父子도 삼소라고 부른다.

 

당시 연 나라 소왕昭王의 부탁을 받은 소대는 조 나라 혜문왕惠文王(서기전 약 308-서기전 266)을 알현하고 혜문왕에게 연 나라를 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소대는 혜문왕에게 다음과 같은 우언寓言 고사 하나를 이야기했다.

 

 

 

오늘 제가 역수易水(하북성 역현易縣에 있음)를 지나오는데, 말조개가 날이 맑게 개이자 양쪽의 딱딱한 조가비를 한껏 벌리고 강가의 모래톱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한 도요새가 이 말조개를 보더니 재빠르게 부리를 말조개의 조가비 속으로 뻗어서 살을 쪼았습니다. 말조개는 황급히 딱딱한 조가비를 닫아 도요새의 부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도요새는 조갯살을 먹지도 못하고 부리가 물려 있게 되자 말조개를 위협하며 말하였습니다.

 

“좋아, 네가 조가비를 벌리지 않는다면 기다리겠다. 오늘 비가 내리지 않고 내일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너를 말려 죽이겠다!”

 

말조개는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대꾸하였습니다.

 

“좋지, 네 부리는 이미 나에게 물려 있어. 오늘 뽑아내지 못하고 내일도 뽑아내지 못하면 너를 굶겨 죽일 거야!”

 

바로 이렇게 말조개와 도요새는 강가의 모래톱에서 서로 고집부리며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그들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육체적으로 힘이 빠졌습니다. 때마침 한 늙은 어부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들이 죽기 살기로 한데 얽혀서 누구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손쉽게 그들을 함께 잡았습니다.

 

 

 

소대는 이야기를 다 마친 후 혜문왕에게 말했다.

 

“만일 조 나라가 연 나라를 공격하면 연 나라는 온 국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라 쌍방이 반드시 장기간 서로 버티며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강대한 진秦 나라가 곧 어부처럼 앉아서 그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중하게 고려하셔서 다시 결정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소대의 말을 다 들은 후에 조 나라 혜문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옳은 말이오.”

 

혜문왕은 소대가 한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연 나라에 대한 공격 계획을 중단했다.

 

 

 

이 고사에서 어부지리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나왔는데, 다른 표현으로 ‘부父’ 자 대신에 ‘사람 인人’ 자를 쓴 ‘漁人之利어인지리’, ‘늙은이 옹翁’ 자를 쓴 ‘漁翁之利어옹지리’ 또는 조사 ‘지之’ 자 대신에 ‘얻을 득得’ 자를 써서 ‘漁人得利어인득리’, ‘漁翁得利어옹득리’라고 하며, 줄여서 ‘漁利어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또 이를 말조개와 도요새의 다툼이란 뜻으로 ‘말조개 방蚌’ 자와 ‘도요새 휼鷸’ 자, ‘다툴 쟁爭’ 자를 써서 ‘蚌鷸之爭방휼지쟁’ 또는 ‘서로 상相’ 자를 써서 ‘鷸蚌相爭휼방상쟁’이라고도 한다.

 

유사한 성어로, ‘개 견犬’ 자와 ‘토끼 토兎’ 자를 써서, 개와 토끼의 다툼이란 뜻의 ‘犬兎之爭견토지쟁’이란 말이 있는데 이 고사도 어부지리와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어】

 

漁(어): 고기 잡을 어. /(삼수변)부, 총14획, yú/

 

父(부): 아비. /父(아비부)부, 총4획, fǔ/

 

之(지): 구조조사. /丿(삐침)부, 총4획, zhī/

 

利(리): 이익. /(선칼도방)부, 총7획, lì/

 

 

 

【출전】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 過易水, 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合而拑其喙. 鷸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蚌.’ 蚌亦爲鷸曰: ‘今日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鷸.’ 兩者不肯相舍, 漁者得而幷禽之. 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 以弊大衆, 臣恐强秦之爲漁父也, 故願王之熟計之也.” 惠王曰: ‘善.’ 乃止.

 

-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2〉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1. 08:00



 

 

 자성어

一葉蔽目일엽폐목

 

 

 

 

 

금주의 한자 ‘漁父之利어부지리’에서

 

‘一일’은 숫자 1이다. ‘아침 조朝’ 자, ‘저녁 석夕’ 자와 결합된 ‘一朝一夕일조일석’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이란 뜻으로 매우 시간이 짧음을 형용하는 말이다.

 

‘葉엽’은 초목의 잎을 말한다. ‘글 서書’ 자와 결합된 ‘葉書엽서’는 원래 나뭇잎에 쓴 글로 편지를 말했지만 지금은 우편엽서를 가리킨다. ‘황금 금金’, ‘가지 지枝’, ‘구슬 옥玉’ 자와 결합된 ‘金枝玉葉금지옥엽’은 ‘황금 가지와 옥 잎’이란 뜻으로 왕의 가족이나 귀한 자손을 뜻한다.

 

‘蔽폐’는 ‘가리다’는 뜻이다. ‘숨길 은隱’ 자와 결합된 ‘隱蔽은폐’는 ‘덮어 감추다’ 혹은 ‘가리어 숨기다’는 뜻이고, ‘가릴 엄掩’자와 결합된 ‘掩蔽엄폐’는 ‘가리어 숨기다’는 뜻이다.

 

‘目목’은 ‘눈’이다. ‘예도 례禮’자와 결합된 ‘目禮목례’는 ‘눈으로 하는 인사’를 말하고, ‘아니 불不’, ‘참을 인忍’, ‘볼 견見’ 자와 결합된 ‘目不忍見목불인견’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일엽폐목’은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다’는 뜻으로, 눈앞의 작은 사물에 가려져 사물의 진실적 상황 및 주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데 쓰인다. 또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상황에 미혹돼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함을 비유하는데도 쓴다.

 

 


 

이 성어는 《할관자鶡冠子》〈천칙天則〉편에 나온다.

 

책명에서 ‘할’을 ‘갈’로 읽어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관자’로 부르기도 하나 《광운廣韻》 등의 운서韻書를 살펴본 결과, ‘할’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할관자》의 저자는 중국 전국시대 초楚 나라의 은사隱士 할관자로 전해진다. ‘할관鶡冠’은 할새의 깃털로 장식한 관冠을 말하며, 은자隱者의 관으로 일컬어진다. ‘새 조鳥’ 자를 써서 ‘할조관鶡鳥冠’ 혹은 ‘닭 계鷄’ 자를 써서 ‘할계관鶡鷄冠’이라고도 한다. 그는 깊은 산속에 살면서 할새의 깃털로 관冠을 만들어 쓰고 다녔기 때문에 존칭해서 할관자라고 불렸다. 그의 사상은 주로 도가 사상에 속한다.

 

재밌는 건, 할새라는 새는 꿩처럼 생겼는데 크기도 큰 편이며 색깔이 황흑색을 띠고 꼬리 깃털이 각이 져서 마치 관冠처럼 생겼다. 제 무리를 사랑하는 성질이 있지만 침입을 당하면 곧장 달려가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싸운다고 한다.

 

 

 

오늘 전하는 ‘일엽폐목’의 이야기는 중국 삼국시대 위魏 나라 학자 한단순邯鄲淳(약 132-221) 이 쓴 《소림笑林》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이 책은 중국 최초의 소화笑話 즉 우스운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으로, 중국 해학諧謔 소설의 시초로 평가된다. 원서는 이미 실전되었지만, 노신魯迅(1881-1936)이라는 유명한 문학가가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이라는 책에 비교적 완벽하게 집록해 놓았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옛날 중국 초楚 나라에 한 가난한 서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책 읽는 일만 좋아해서 세상일에는 어두운 책벌레였다.

 

어느 날 그가 전설적인 방술서인 《회남방淮南方》이란 책을 읽고 있다가, 갑자기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았다.

 

“만일 사마귀가 매미를 잡을 때 쓰는 은신용 나뭇잎을 얻으면 자신의 몸을 은폐할 수 있어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서생은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 나뭇잎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날부터 그는 온종일 숲속을 들락날락하면서 사마귀가 매미를 잡을 때 자기 몸을 가리는 나뭇잎을 찾았다. 마침내 얼마 후 사마귀가 나뭇잎 아래서 자기 몸을 감추고 있다가 매미를 잡는 것을 발견하고 그 나뭇잎을 땄다. 그런데 서생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서, 사방에 가득 널려있는 낙엽들과 한데 뒤섞여버렸다. 서생은 한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삼태기 하나를 가져와서 그곳에 있는 낙엽들을 모두 담아서 집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서생은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낙엽들 중에서 어떻게 몸을 감출 수 있는 나뭇잎을 골라낼 수 있을까?”

 

서생은 하나하나씩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거기 있는 나뭇잎을 하나 들어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볼 수 있소?”

 

아내가 대답했다.

 

“볼 수 있어요.”

 

그가 다른 나뭇잎을 들고서 다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보이오?”

 

아내가 인내심을 갖고 대답했다.

 

“보여요.”

 

이런 식으로 그가 나뭇잎을 하나씩 들고서 보이냐고 물을 때마다 아내는 놀랄 정도의 인내심을 나타내며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하고나자 나중에 너무 귀찮아진 아내는 그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보이지 않아요!”

 

서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는 곧바로 나뭇잎을 들고 거리로 가서,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가게 주인 앞에 서서 손을 뻗어 가게 안의 물건을 집어서 나갔다.

 

가게 주인은 너무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 그를 붙잡아 관아로 끌고 갔다. 관원은 뜻밖에 어떤 사람이 백주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데 남의 물건을 훔쳤다는 말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져 곧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서생으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관원은 한바탕 크게 웃으며 그를 처벌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성어는 ‘막을 장障’ 자를 써서 ‘일엽장목一葉障目’이라고도 한다. 또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면 태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一葉蔽目일엽폐목, 不見泰山불견태산’이라고도 한다.

 

《할관자》 〈천칙〉편에는 이 성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귀는 듣는 것을 주관하고, 눈은 보는 것을 주관한다.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면 태산이 보이지 않고, 콩 두 알이 귀를 막으면 우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단어】

 

一(일): 1. 하나. /一(한일)부, 총1획, yī/

 

葉(엽): 잎. /(초두머리)부, 총13획, yè́/

 

蔽(폐): 덮다. /(초두머리)부, 총16획, bì/

 

目(목): 눈. /目(눈목)부, 총5획, mù/

 

 

 

【출전】

 

夫耳之主聽, 目之主明, 一葉蔽目, 不見太山, 兩豆塞耳, 不聞雷霆.

 

-《할관자鶡冠子》〈천칙天則〉.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0. 02:30

 

 

 재미있는 한자

武陵桃源무릉도원

 

 

 

 

금주의 한자 武陵桃源무릉도원에서,

 

‘武무’는 ‘文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병기와 전쟁에 관한 일을 가리킨다. 이 글자를 보통 ‘호반 무’ 자로 훈을 하는데, ‘호반虎班’이란 무관의 반열을 말한다. ‘범 호虎’ 자는 ‘용맹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무인武人’을 가리킨다. 옛날에 임금이 조회朝會할 때 관원들은 문관과 무관이 각기 동서 두 열로 나뉘었는데 이것을 양반兩班이라고 부른다. 즉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인 양반이라는 말은 원래 이 문무관원을 가리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武器무기’, ‘武人무인’, ‘武士무사’, ‘武藝무예’란 말에 이 ‘호반 무武’ 자가 들어 있다.

 

‘陵릉’은 ‘높은 언덕’을 말한다. ‘陵谷之變능곡지변’이란 말이 있는데, ‘골짜기 곡谷’, 구조조사 ‘지之’, ‘변할 변變’ 자로 구성된 이 말은 ‘언덕과 골짜기의 변화’, 즉 높은 언덕이 깊은 골짜기로 바뀌고 깊은 골짜기가 높은 언덕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심하게 바뀌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桃도’는 ‘복숭아나무’를 말한다. ‘꽃 화花’ 자를 붙인 ‘桃花도화’는 ‘복숭아꽃’을 말한다. ‘하늘 천天’ 자를 쓰는 ‘天桃천도 복숭아’는 하늘나라에서 나는 복숭아를 말하고, ‘누를 황黃’ 자를 쓰는 ‘黃桃황도’는 속살이 노란 복숭아를, ‘흰 백白’ 자를 쓰는 ‘白桃백도’는 흰 복숭아를 말한다.

 

‘源원’은 ‘물의 근원’ 즉 물의 흐름이 처음 시작되는 곳을 말하는데, 원래는 ‘삼수변’이 없는 ‘原원’자를 쓰다가 물을 강조하기 위해 ‘삼수변’을 덧붙였다. ‘물 수水’ 자를 붙여 ‘水源수원’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경기도 수원시는 ‘삼수변’이 없는 ‘水原수원’을 쓴다.

 

그래서 ‘무릉도원’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 혹은 이상 속의 아름다운 곳을 비유할 때 쓰인다. ‘桃源境도원경’ 또는 ‘武陵源무릉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릉도원’은 ‘무릉의 도원’이라는 뜻인데, ‘무릉’은 지금의 호남성 상덕시常德市 부근에 있던 군郡 이름이며, ‘도원’은 ‘도화원桃花源’의 줄임말로서 도연명陶淵明의 명문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복숭아꽃 숲이 수원에서 끝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도화원은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곳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상향을 가리키기도 하며, 지금의 호남성 도원현 서남쪽의 도원산 아래에 도원 또는 도원동桃源洞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도연명이 기록한 도화원의 유적지라고 한다.

 

이 말은 또 ‘세상 밖의 도원’이라는 뜻으로 ‘世外桃源세외도원’이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중국 동진東晉 때의 대문학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에서 나왔다.

 

도연명(365-427)은 이름이 잠潛, 자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이며, 집 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호를 ‘다섯 오五’, ‘버들 류柳’ 자를 써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했다. 벼슬이 팽택령彭澤令에 이르렀을 때 봉급인 오두미五斗米 즉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히길 원치 않아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갔는데, 이 때 그의 심경을 읊은 글이 바로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농촌에 간 후 그는 직접 밭갈이를 하고, 시와 술을 즐겼다. 그의 시는 진솔하고 자연스러우며 대부분 산수와 전원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또 그가 지은 산문이나 사부詞賦 등도 질박하고 유창하다. 죽은 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으며, 후세 시인들의 창작에 매우 큰 영향을 줬던 인물이다.

 

도연명은 57세 때 〈도화원기〉라는 유명한 글을 한 편 썼는데, ‘기記’는 문체의 한 종류로서 사물을 서술한 문장을 이른다. 원래는 〈도화원시〉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에 있어 이 시의 서문에 해당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호남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겪은 기이한 일을 적고 있다.

 

 

 

태원太元(376-396) 연간에 있었던 일이

다.

 

어느 날 어부가 나룻배를 타고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갑자기 시내의 양쪽 푸르른 풀밭 옆에 다른 나무들은 일절 없고 복숭아나무들로만 꽉 찬 수백 보 넓이의 숲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향내 나는 꽃들은 곱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꽃들이 분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어부는, 계속 배를 저어 이 숲의 끝까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숭아꽃 숲은 물이 처음 흘러나오는 곳에서 끝났는데, 좀 더 들어가니 얼마 가지 않아 앞에 산이 나왔고 산허리에 작은 동굴 입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동굴 입구는 마치 빛이 있는 듯 보였는데, 어부는 호기심이 생겨나 배에서 내려 동굴로 올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부가 막 동굴 입구로 들어서니 안이 너무 어둡고 좁아서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였지만, 다시 수십 걸음을 걸었더니 길이 갑자기 확 넓어지면서 밝아졌다.

 

그곳은 땅이 평평하고 넓었으며, 한 줄 한 줄 집들이 매우 가지런히 배열돼 있고 비옥한 들판과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많은 뽕나무와 대나무가 있었다. 밭 사이의 길은 동서남북으로 나 있어 사통팔달하였고 닭울음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판에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경작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고 남자와 여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바깥사람들과 같았으며, 노인과 아이들은 매우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 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어부를 발견하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어부는 하나하나 상세하게 그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어부를 자기 집으로 가자고 청해서 술을 내오고 닭을 잡아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달려와서 바깥소식을 물었다. 아울러 자기네 조상이 진秦 나라 때의 전란을 피하기 위해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이 외부와 단절된 곳으로 왔으며 그 후로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아 마침내 바깥사람들과 왕래가 끊어졌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어부에게 지금이 어느 왕조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시기가 비교적 먼, 삼국시대 조조曹操(155-220)의 아들 조비曹丕(187-226)가 세운 위魏 나라와 사마염司馬炎(236-290)이 세운 진晉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시기가 가까운 유방劉邦(서기전 221-서기전 189)이 세운 한漢 나라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어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음을 말해줬더니 그들은 모두 매우 놀라며 탄식했다.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모두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며칠 후에 어부는 서운해 하면서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 마을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곳 상황을 외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소이다.”

 

어부는 그곳을 나와서 자신의 배를 찾아 타고서 왔던 길을 따라 돌아오며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무릉군의 집으로 돌아온 어부는 태수를 알현하여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알렸다. 어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태수가 즉시 사람을 보내 어부를 따라서 그곳을 찾아가게 했지만, 전에 해 놓은 표시를 찾다가 그만 방향을 잃어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남 남양군南陽郡에 사는 유자기劉子驥(이름은 인지驎之, 자는 자기子驥)라는 고상한 명사가 있었는데 이 일을 전해 듣고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찾아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실행을 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일도 있었다. 그 이후로 마침내 이 도화원을 찾는 길을 묻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데, 도연명은 여기서 인간이 갈 수 없는 이상향인 무릉도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Utopia)도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단어】

 

武무: 무인. /止(그칠지)부, 총8획, wǔ/

 

陵릉: 언덕. /(좌부변)부, 11획, líng/

 

桃도: 복숭아나무. /木(나무목)부, 총10획, táo/

 

源원: 근원. /(삼수변)부, 총13획, yuán/

 

 

 

【출전】

 

晉太元中, 武陵人, 捕魚爲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逢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美, 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林盡水源, 便得一山. 山有小口, 髣髴若有光, 便捨船, 從口入.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美池竹之屬, 阡陌交通, 雞犬相聞.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黃髮垂髫, 並怡然自樂.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雞作食.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訊. 自云, “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來此絶境, 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問今是何世, 乃不知有漢, 無論魏晉. 此人一一爲具言所聞, 皆歎惋.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後遂無問津者.

 

- 도연명陶淵明, 〈도화원기桃花源記〉.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9. 05:00




 

 

구밀복검

口蜜腹劍

 


 


금주의 한자 ‘口蜜腹劍구밀복검’에서

 

‘口구’는 ‘입’을 말한다. 우리말에서 ‘입에서 나는 나쁜 냄새’ 즉 ‘입구린내’는 ‘냄새 취臭’ 자와 결합된 ‘口臭구취’라고 표현하고, ‘말솜씨’는 ‘말 잘할 변辯’ 자와 결합된 ‘口辯구변’ 또는 ‘말씀 언言’ 자를 쓰는 ‘言辯언변’이라는 말을 쓴다.

 

‘蜜밀’은 ‘꿀’을 말한다. ‘벌 봉蜂’자와 결합된 ‘蜜蜂밀봉’은 ‘꿀벌’을 말하고, 글자의 순서가 바뀐 ‘蜂蜜봉밀’은 ‘벌꿀’을 말하는데, 이렇게 한문은 글자의 배열 순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 유의해야 하겠다.

 

‘腹복’은 ‘배’를 말한다. ‘抱腹絶倒포복절도’란 말이 있다. ‘안을 포抱’ 자를 쓰는 ‘포복’은 ‘배를 안다’는 뜻이고, ‘끊을 절絶’, ‘넘어질 도倒’의 ‘절도’는 ‘기절해서 넘어지다’는 뜻으로, 배를 끌어안고 넘어질 정도로 몹시 웃는 것을 말한다.

 

‘劍검’은 ‘칼’을 말한다. ‘칼’에는 ‘검’과 ‘도刀’가 있는데. ‘검’은 날이 양쪽에 있는 칼이고, ‘도’는 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이다. 그래서 ‘과일 깎는 칼’을 ‘果刀과도’라 하고 ‘과검’이라 하지 않으며, 부엌에서 쓰는 칼 즉 ‘식칼’을 ‘食刀식도’라 하고 ‘식검’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구밀복검’은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는 뜻으로, 입으로 꿀처럼 달콤하게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뱃속에는 남을 몰래 해치는 음모를 품고 있음을 비유해 하는 말이다.

 

 

 

이 성어는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펴낸 《자치통감資治通鑑》이란 책의 〈당기唐紀〉편 현종천보원년玄宗天寶元年 조에 실려 있다.

 

唐紀당기는 당 왕조의 기록이란 뜻이다.

 

玄宗현종(재위 712-756)은 당 나라의 황제로 이름은 이륭기李隆基(685-762)이다. 처음에는 유능한 재상을 임용하고 잘못된 정치를 고쳐서 역사상 유명한 ‘개원지치開元之治’ 즉 개원 연간의 치세治世를 이뤘으나 나중에는 이림보 같은 소인小人을 신임해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 즉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미인인 양귀비楊貴妃(719-756)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안록산安祿山(703-757)과 사사명史思明(703-761)이 일으킨 반란, 소위 안사安史의 난亂을 초래해서 당 왕조를 쇠퇴하게 만든다.

 

천보는 당 현종玄宗의 연호로서 742년에서 756년까지 15년간이다. 연호는 황제의 해를 기록하는 이름으로 한 나라 무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년은 ‘으뜸 원元’자를 써서 ‘원년元年’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천보 원년은 천보 1년으로 서기 742년을 말한다.

 

 

 

‘도울 자資’, ‘다스리 치治’, ‘통할 통通’, ‘거울 감鑑’ 자로 구성된 책명 ‘자치통감’이란 말은 당시 황제인 신종神宗 조욱趙頊(1048-1085)이 이 책을 가리켜 ‘지난 일을 거울삼고 있어서 치도治道 즉 정치 방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통감’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데, 사마광이 19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서 완성한 2백94권의 장편 역사 대작이다. 이 책은 각 왕조王朝의 ‘기전체紀傳體’ 단대사斷代史를 종합하고 편년체編年體 방식으로, 주周 나라 제32대 왕인 위열왕威烈王 희오姬午(?-서기전 402)이 진晉나라 3경卿(즉 한韓씨, 위魏씨, 조趙씨)을 제후諸侯로 인정한 기원전 403년부터 오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시영柴榮(921-959) 때인 959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1천3백62년간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연대와 역사적 사실을 결합해서 시대 순으로 서술한 이 책은 역사의 발전이 매우 명백하게 서술돼 있을 뿐 아니라 중대한 사건의 전후 인과因果 및 각 방면의 관련 사건에 대해서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후에 이 책이 너무 방대尨大하여 열람閱覽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종의 다이제스트라고 할 수 있는 북송 때 강지江贄의 『통감절요通鑑節要』와 남송 때 주희朱熹(1130-1200)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원추袁樞(1131-1205)의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이란 책들이 나와서 널리 읽혔다. 조선시대부터 『통감』이라고 하면 강지의 책 『통감절요』를 말하는데, 강지의 호가 소미少微이기 때문에 이를 『소미통감절요』라고도 부른다.

 

 

 

이야기는 당 나라 천보 5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림보李林甫(683-753)는 중국 당 나라 현종 이륭기 때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中書令’이었는데, 이는 재상宰相의 직위였다. 이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 글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러나 인품을 논한다면 철저하게 악질惡質이었다. 그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여 재능이 자기보다 앞서거나 명성이 자기보다 높은 모든 사람들을 해쳤다. 권세와 지위가 자기와 대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척하고 공격했다. 그는 당시 황제인 현종 이륭기에게 온통 아첨阿諂을 통해 신임을 얻는 재주를 가지기도 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륭기에게 다가갔으며 아울러 이 수법으로 현종이 총애하고 신임하는 비빈妃嬪들과 심복心腹 태감太監 즉 내시內侍들의 비위를 맞춰 그들의 환심과 지지를 얻었으며 이로써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이림보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 겉으로는 더할 수 없이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이며 온통 감동적인 선의의 말들을 했지만, 실제로 그의 성격은 매우 음험하고 교활하여 언제나 은밀히 남을 해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보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성실하고 간절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동료 대신 이적지李適之(694-747)에게 말했다.

 

“화산華山에 엄청난 양의 황금黃金이 매장埋藏되어 있는데 만일 개발해서 채굴採掘해낼 수 있다면 나라의 재정財政을 대대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오. 안타깝게도 황상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시다오.”

 

이적지는 이것이 정말인 줄 알고 황급히 달려가 현종 이륭기를 알현謁見해서 한시라도 빨리 화산의 금광을 채굴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륭기는 이적지의 말을 듣자마자 매우 기뻐하며 즉시 이림보를 찾아서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런데 이림보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일은 제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화산은 제왕의 풍수風水가 집중돼 있는 곳인데 어떻게 함부로 채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황상皇上께 채굴하라고 아뢰었다면 아마도 좋은 뜻을 품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제가 여러 차례 이 일을 황상께 아뢸 생각을 하였으나 단지 일을 열 수 없었을 뿐이옵니다.”

 

현종 이륭기는 이림보의 말에 감동을 받고 그가 진정으로 임금에게 충성忠誠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신하로 생각했으며, 반대로 이적지에 대해서는 크게 불만을 갖고 점차 그를 멀리하게 됐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이림보는 이 특수한 ‘재능’으로 줄곧 19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후에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펴낼 때 이림보를 평가하여 그가 입에는 꿀을 달고 있지만 뱃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실제에 아주 부합한 말이다.

 

 

 

이 성어는 원래 좀 더 구체적으로 ‘있을 유有’ 자를 넣어서 ‘口有蜜腹有劍구유밀복유검’이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우리 속담의 ‘웃음 속에 칼이 있다’와 같은 의미인데, 이 속담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여럿 있습니다. ‘웃을 소笑’, ‘가운데 중中’, ‘있을 유有’, ‘칼 검劍’ 자로 구성된 ‘笑中有劍소중유검’, ‘검’ 자 대신에 ‘칼 도刀’ 자를 쓰는 ‘笑中有刀소중유도’, ‘笑中刀소중도’가 있고, ‘속 리裏’, ‘감출 장藏’ 자를 쓰는 ‘笑裏藏刀소리장도’도 많이 쓰인다.

 

또 ‘범 호虎’ 자를 쓰는 ‘笑面虎소면호’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호랑이의 성격이 흉악하고 사나워서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생겨났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흉악한 사람을 비유하는데 쓰인다.

 

 

 

【단어】

 

口구: 입. 口(입구)부, 총3획, kǒu

 

蜜밀: 꿀. 虫(벌레충)부, 총14획, mì

 

腹복: 배. 月(육달월)부, 총13획, fù

 

劍검: 칼. (선칼도방)부, 총15획, jiàn

 

 

 

【출전】

 

李林甫爲相, 凡才望功業出己右及上所厚、勢位將逼己者, 必百計去之; 尤忌文學之士, 或陽與之善, 啖以甘言而陰陷之. 世謂李林甫“口有蜜, 腹有劍.”……

 

李適之性疏率, 李林甫嘗謂適之曰: “華山有金, 採之可以富國, 主上未之知也.” 他日, 適之因奏事言之. 上以問林甫, 對曰: “臣久知之, 但華山陛下本命, 王氣所在, 鑿之非宜, 故不敢言.” 上以林甫爲愛己, 薄適之慮事不熟, 謂曰: “自今奏事, 宜先與林甫議之, 無得輕脫.” 適之由是束手矣. 適之旣失恩, 韋堅失權, 益相親密, 林甫愈惡之.

 

-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 현종천보원년玄宗天寶元年 조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8. 10:00




 

 

사자성어

千慮一得천려일득

 

 

 

금주의 한자 ‘천려일득千慮一得’에서,

 

‘千천’은 숫자 1000이나 여기서는 매우 많음을 뜻한다. ‘千載一遇천재일우’란 말이 있는데, ‘천 년에 한 번 만나다’는 뜻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형용하는 말이다. 여기서 ‘실을 재載’ 자는 ‘해 년年’, ‘해 세歲’ 자와 같은 뜻이고, ‘한 일一’ 자는 ‘한 번’, ‘遇우’는 ‘만나다’는 뜻이다.

 

‘慮려’는 ‘생각하다’는 뜻이다. ‘헤아릴 고考’ 자와 결합된 ‘考慮고려’는 ‘깊이 생각하여 헤아리다’는 뜻이고, ‘깊을 심深’, ‘꾀 모謀’, ‘멀 원遠’ 자로 구성된 ‘深謀遠慮심모원려’는 ‘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을 말한다.

 

‘一일’은 숫자 1로서 ‘한 번’을 말한다. ‘얼굴 면面’, ‘같을 여如’, ‘옛 구舊’ 자로 구성된 ‘一面如舊일면여구’는 ‘한 번 만났으나 오랜 벗처럼 친밀해지다’는 뜻인데, 여기서 ‘얼굴 면’ 자는 ‘만나다’는 뜻이며 이 글자 대신에 ‘볼 견見’ 자를 써서 ‘一見如舊일견여구’라고도 한다.

 

‘得득’은 본래 ‘얻다’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타당하다’, ‘정확하다’는 뜻이며 ‘타당한 것’이란 명사로 사용되었다.

 

즉 ‘천려일득’은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타당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서,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면 그 과정에서 언제나 한 가지 정도는 타당한 것이 나올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견에 대해 겸손함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이 말은 《안자춘추晏子春秋》〈잡하雜下〉편에 나온다. 《안자춘추》는 《안자》라고도 하는데, 주周 나라 때 안영晏嬰(서기전 585-서기전 500)의 저작이라고 돼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뒤인 전국시대戰國時代(서기전 475-서기전 221) 말기의 작품이다. 이 책에는 안영의 언행言行이 기술돼 있는데, 여러 고서古書 속에 흩어져 있는 관련 기록과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고 내용은 주로 군주君主에게 간언諫言하는 것과 군주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서기전 770-서기전 476)의 이야기이다.

 

안영은 제齊 나라의 정치가이다. 안영은 제나라의 대부였던 아버지 안약晏弱(서기전 635-서기전 556)이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벼슬을 승계하여 제나라의 경卿이 되어 영공靈公 강환姜環(재위 서기전581-서기전 554), 장공莊公 강광姜光(재위 서기전 553-서기전 548), 경공景公 강저구姜杵臼(재위 서기전 547-서기전 490) 등 3대에 걸쳐 상국相國을 역임했다. 상국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즉 임금 한 사람의 바로 아래면서 만백성의 위에 있는 자리로, 지금으로 말한다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높은 직위이다. 안영은 사람됨이 정직正直했고 벼슬을 하면서는 매우 청렴淸廉했으며 아주 검소儉素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를 매우 존경했다. 특히 공자孔子는 그의 품행과 절조가 고상하기 때문에 그를 형으로 모시려고도 했다.

 

어느 날 안영이 막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경공이 보낸 사람이 그를 만나러 왔다. 안영은 상대방이 임금이 보낸 사람이라 특별 대접을 하느라고 즉석에서 그에게 자기의 밥과 반찬을 반반씩 나눠 주면서 함께 점심밥을 먹었다. 물론 그는 이 식사로 배가 부를 수 없었다.

 

경공은 이 일을 알고 난후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국의 집안이 이렇게까지 가난할 줄은 짐이 이제껏 알지 못했노라. 이것은 짐의 잘못이다!”

 

말을 마치고 경공은 사람을 시켜 안영에게 천금千金을 보내면서 안영이 손님을 접대하는데 쓰도록 했다. 그러나 뜻밖에 안영은 받기를 원치 않고 가져온 사람 즉 사자使者에게 도로 돌려보냈다. 경공이 사람을 시켜 다시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 경공이 사람을 시켜 세 번째로 보내왔을 때 안영이 사자에게 말했다.

 

“전하殿下께 잘 아뢰어 주시오. 나는 결코 빈곤하지 않소이다. 전하께서 나에게 내린 봉록俸祿만으로도 내가 우리 집안사람들을 먹이고 손님들을 접대하는데 충분할 뿐 아니라 곤궁困窮한 백성을 돕는데도 쓸 수 있소. 그러니 나는 전하께서 별도로 내리시는 하사금下賜金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소!”

 

사자도 매우 난감難堪해서 안영에게 사정했다.

 

“상국, 저는 전하의 명을 받들고 이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상국께서 이번에도 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절더러 어떻게 돌아가서 전하께 아뢰란 말씀입니까?”

 

안영은 생각을 좀 해 보더니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당신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서 직접 전하께 사양한다는 말씀을 드리겠소.”

 

궁궐로 간 안영은 경공을 알현謁見하고 자신에게 베풀어준 후한 사랑에 감사드리고 아울러 신하의 한 사람으로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으면 됐지, 과다한 재물을 가질 수는 없으니 전하께서 자신에게 특별히 내리는 상을 받도록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뜻을 아뢰었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는 안영을 더욱 존중했고 그래도 그에게 천금을 하사하려 했다. 경공은 하나의 예를 들었다.

 

“옛날 우리 제 나라의 현명한 재상인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을 위해서, 그 분을 당시 각 제후국 최초로 맹주로 만들어 대공을 세웠소. 환공은 보답하기 하기 위해서 그에게 수많은 봉토封土를 상으로 하사하셨는데 관중은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받았소. 그런데 상국은 어째서 사양한다 말이오?”

 

안영이 대답하였다.

 

“저는 이러한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인도 천 번을 생각하면 언제나 한 번의 실수는 있기 마련이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을 생각하면 언제나 한 번의 타당함은 있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관중은 이 일을 생각하는데 실수를 한 듯하고, 저는 비록 어리석지만 이 일은 정확하게 처리한 듯합니다.”

 

경공은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서 마침내 상을 거두었다.

 

 

 

이 성어는 원래 이러한 말에서 나왔다.

 

“聖人千慮성인천려면, 必有一失필유일실하고 愚人千慮우인천려면, 必有一得필유일득이라.” 즉 성인이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타당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千慮一失천려일실’이란 말도 나왔는데, 이 말은 ‘성인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실수가 있다’는 뜻으로서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수많은 생각을 하다보면 언제나 실수할 때가 있음을 의미한다.

 

【단어】

 

千천: 1000. 천. 十(열십)부, 총3획, qiān

 

慮려: 생각하다. 心(마음심)부, 총15획, lǜ

 

一일: 1. 한번. 一(한일)부, 총1획, yī

 

得득: 얻다. 타당하다. (두인변)부, 총11획, dé

 

 

 

【출전】

 

晏子方食, 景公使使者至. 分食食之, 使者不飽, 晏子亦不飽. 使者反, 言之公.

 

公曰: “嘻! 晏子之家, 若是其貧也. 寡人不知, 是寡人之過也.” 使吏致千金與市租, 請以奉賓客. 晏子辭, 三致之, 終再拜而辭曰: “嬰之家不貧. 以君之賜, 澤覆三族, 延及交遊, 以振百姓, 君之賜也厚矣! 嬰之家不貧也. 嬰聞之, 夫厚取之君, 而施之民, 是臣代君君民也, 忠臣不爲也. 厚取之君, 而不施于民, 是爲筐篋之藏也, 仁人不爲也. 進取于君, 退得罪于士, 身死而財遷于, 是爲宰藏也, 智者不爲也. 夫十總之布, 一豆之食, 足于中免矣.”

 

景公謂晏子曰: “昔吾先君桓公, 以書社五百封管仲, 不辭而受, 子辭之何也?”

 

晏子曰: “嬰聞之, 聖人千慮, 必有一失; 愚人千慮, 必有一得. 意者管仲之失, 而嬰之得者耶? 故再拜而不敢受命.”

 

- 《안자춘추晏子春秋》〈잡하雜下〉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7. 13:30

 

 

 

소백산의 추억

 




 

대학교를 다닐때 일이었습니다. 

동아리 하계 M.T 답사차 선발대로 소백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백산으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버스에서, 커브를 돌때마다 이리저리 몸이 쏠리고 심지어 날라다니는 것에 당황하면서도 그 상황이 웃겨서 우리는 탄성을 지르고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버스 안을 둘러보니 자리에 앉으신 어르신들은 '무슨 일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평온하게 앉아있었습니다. 무안함에 서로의 얼굴만 보며 키득거리다가 드디어 소백산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저에게 소백산은 놀라움으로 다가 왔습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과 우뚝우뚝 선 바위들. 하늘을 가릴 듯 울창한 수풀.

밤이 되자 산 기슭에는 어둠이 가득 메워졌고, 머리 위로는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인공적인 불빛이라고는 없는 산에서는 코 앞으로 내민 주먹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짙었습니다. 그 침묵사이로 들려오는 물 소리는 너무나 신비로웠습니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흘러서 어른이 되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탁 트인 무량수전의 뜨락에 서서 마치 바다처럼 너른 소백산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름다운 능선들 어느 곳이 바로 대학생때 가보았던 소백산의 그 자락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또한, 안동의 하회마을과 병산의 서원과 임청각의 우물이 그 소백산 줄기가 굽이쳐 멈춘 곳에 자리잡은 우리네 오랜 삶의 터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산. 그리고 사람.

 

내내 같은 굴곡의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는 높은 산마루로 떨어진 빗방울이 계곡을 타고 흐르며 개울이 되고, 다시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듯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을 쉼없이 도는 수레바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모든 강이 흘러 멈추는 바다는 생명의 고향이자 동경으로 불리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은 저 대자연속에서 왔다가, 다시 대자연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신 태상종도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6. 08:38




 

 

왜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질까요?

 

 

 






"와.. 바다다!"

 

"너 왜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지는지 알아?"

 

"글쎄..? 갑자기 그 노래 생각나는데?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가면.. 이 노래도 있지;;"

 

"후훗 그러고보니 그 노래들도 웬지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치? 왜 마음이 편안해지냐면..."

 

"와.. 유성이다."

 

"대자연앞에 서면, 난 그저 작은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다는걸 인정하게되면서 겸손해지기 때문이야.."

 

"응...?"

 

"가끔 힘들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잖아. 어머니. 고향에 계신 어머니말야. 그럴때 어머니 곁에서 그냥 얼굴만 바라봐도 상처 받았던 마음이 치유되고 편해져서 그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이유 같은거야"

 

"음.. 왜 그런걸까?"

 

"글쎄... 엄마는 내가 똥싸고 코 흘리던 철부지 애기때부터 내 못난거, 바보같은 거 다 본,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잖아. 그래서 엄마 앞에서는 편하고 겸손해지는거 아닐까?"

 

"응 맞어 칠순이 넘은 노인도 어머니 앞에서는 아기가 되잖아. 갑자기 엄마 보고 싶다...."

 

'우리에게 신神은 그런 존재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5. 05:00






 

 아프리카 아이들의 실험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 연구하던 중이었습니다. 하루는 부족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게임을 제안했습니다.

 

나무 옆에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지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주겠노라 한 것이지요. 


 


인류학자의 말이 통역되어 전달되자마자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채로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 입안 가득 과일을 베어 물고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인류학자가 아이들에게 "누구든 일등으로 간 사람에게 과일을 몽땅 주려고 했는데 왜 손 잡고 함께 달렸지?"고 물어보자 아이들의 입에선 "UBUNTU"라는 단어가 합창하듯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 있나요?”

 

- UBUNTU는 아프리카 코사(Xhosa)어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4. 02:30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일 중에 하나가 '스마트폰을 통해서 뉴스를 읽는 것'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육하원칙에 의해 쓰여진 비슷한 문체의 기사들.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지 오래인데, 문제는 머리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간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송지나 작가가 썼던 고 김종학PD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다녀왔습니다'로 시작되는 그녀의 추모 글.

 

왠지 마음을 적시는 글에 정신을 뺏겨서 그녀의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바드 대학의 한 교수는 '말이 많은 부모'와 그렇지않은 부모를 비교해서 그들 자녀의 뇌속에 생기는 시냅스의 차이점을 연구해놓았습니다.

 

결론은 대화가 많은 부모의 자녀에게서 훨씬 더 많은 시냅스들이 정리되어 있고 연결되어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수십년동안 자녀는 부모와 함께 살아갑니다.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듣는 '말'을 통해서 자녀들은 어휘력과 사고력을 배우게 됩니다.

 

'비 온다. 빨래 걷어라' 하는 어머니의 말보다, '해가 짱짱한데 비가 오네, 여우가 시집 가는가보다'하는 말에 아이들의 사고력과 어휘력이 훨씬 더 발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3. 08:22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라! TED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이름은 류지현입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만 현재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면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냉장고를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습관 때문에 사라지고 있는 음식저장에 관한 전통 구전지식을 향한 제 열정을 여러분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라(save food from the fridge)'를 소개하려고합니다.

 

프로젝트 이름이 왜 “save food from the fridge”일까요? 첫째로 '음식을 낭비되는 것에서 구하자'는 의미입니다.

 

유럽을 보자면 구매한 식재료의 30%가 그냥 버려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냉장고 사용을 들 수 있는데요. 냉장고에 사온 식재료를 다 집어넣고는 뭐가 있는지 잊어버리고는 하죠.

 

두 번째 의미는 '음식이 맛과 영향을 잃지 않도록 구하자'라는 것입니다. 냉장고에 보관하는 많은 채소와 과일들은 실제로 냉장고 안의 차가운 온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이런 지식들을 잘 모르죠.

 

냉장고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알고 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식재료를 관찰하고 그들의 특성을 이해하며 자신들만의 지식과 방식을 개발할 수 있었죠. 저는 사람들과 그들이 먹는 음식 간의 관계를 다시 가깝게 되돌려놓고 싶습니다.

 

그동안 할아버지 할머니들 혹은 농부들을 대상으로 조사해왔는데요. 그중에서 몇몇 지식들은 우리의 부엌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물건으로 디자인 했습니다.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할 수 있는 물건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을 지식전달에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몇몇 예를 보여드릴께요. 감자와 사과를 함께 보관하면 사과에서 나오는 가스덕에 감자를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감자는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서랍 안쪽에 넣고요. 사과는 그 위쪽으로 나 있는 구멍에 넣습니다. 이 구멍을 통해 사과의 가스가 감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죠.

 

이 방식으로 감자를 더 오래 보관하면서도 예쁜 사과의 모습을 감당할 수도 있는 것이죠.

 


두 번째로 뿌리 채소를 보관할 때 보통 뉘여서 보관하는데요. 실제 뿌리채소들이 누워 있으면 다시 서려고 에너지 에너지를 더 쓴다고 합니다. 항상 살아왔던 자세이기 때문이죠.

 

모래를 이용하면 뿌리채소를 세워 보관할 수 있습니다. 모래는 과거 농부들이 작물을 보관하는 데 이용하던 중요한 재료였습니다.

 

모래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는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채소들이 서로 부딛쳐 상처를 내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가지, 호박, 오이 등은 보통 채소라고 생각하지만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입니다. 즉 일반적인 과일들이 가지고 있는 '냉장고에 있으면 안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박은 영상 7도 이하에서는 냉방병에 걸립니다.

 

냉장고 안이 보통 영상 0~4도 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런 채소들을 냉장고에 보관하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맛도, 영양도 잃게 됩니다.

 

우리가 겨울에 하루종일 밖에 서 있으면 감기에 걸리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어요.

 

채소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달걀의 경우 슈퍼마켓에서 기껏 냉장고 밖에 있는 것을 사와서는 집에 오면 냉장고 안에 넣습니다.

 

하지만 달걀 표면에는 수백만개의 작은 구멍이 있기 때문에 냉장고 냄새를 다 흡수합니다. 달걀을 냉장고에 넣는 건 그리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거죠.

 

냉장고 밖에 보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채소나 과일과는 다르게 달걀은 겉에서만 봐서는 상했는지 알 수가 없죠.

 

보시는대로 물그릇을 이용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달걀을 물에 넣어봤을 때 가라앉으면 신선한 것입니다. 뜨면 상한 것이고요.

 

디자인 오브젝트를 만드는 것 외에도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방문하셔서 다른 사람들이 공유한 지식들도 확인하시고 알고 계신 지식도 공유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2. 02:00




[TED] 의식, 최후의 개척지 

강연을 시작하며: 나는 왜 요기가 되었나




 


 

고맙습니다. 메리가 제 이름을 부를 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도 그보다 더 잘 발음할 수 없었을 겁니다. (웃음)

 

약 25년 전, 저는 의과대학 졸업학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꽤 오랫동안 제 직업 선택에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친절한 작은 할머니의 피를 뽑으러 갔는데 정맥 대신에 동맥을 건드렸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방에 피가 뿜어 나올 때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맞아. 넌 확실히 직업을 잘못 찾았어.” (웃음) 따라서 관계된 모든 것들의 이익을 위해, 저는 학교를 중퇴하고 대신 요기가 되었습니다. (웃음) (박수)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여러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요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개념, 즉 내면의 우주, 내면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와 외부의 우주, 우리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우주를 지구의 크기라고 하면 우리 지구는 핀 머리 크기의 약 10억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런 핀의 10억분의 1 크기란 말이죠.

 

 

저는 지금 핀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제 소품이에요. (웃음) 자, 보시죠. 같은 핀입니다. 실제로는 같은 핀입니다. 이런 핀들 중 하나의 10억분의 1크기인 거죠 우주가 지구 크기라면.

 

 

그런데 핀 머리의 십억 분의 일 크기는 모래 입자의 약 백만 분의 1 정도 또는 원자의 평균 크기 정도입니다. 둘 중 선택하세요.

 

 

어쨌든, 아이디어는 그것이 우주의 크기에 비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작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크기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되나요? 저는 이것이 우주의 크기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복잡한 우주는 어떤 의도도 없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전화기와 노트북 컴퓨터가 설계 또는 제작한 사람 없이 갑자기 생겼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물학자 루퍼트 쉘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적을 공짜로 주면 우리가 그 나머지를 설명해 주겠다.’라는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웃음) “그 하나의 기적이란 무로부터 한 순간에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수천 년 동안 요가 과학이 말해온 결론,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어 갈 우주에 대한 설명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과 의도는 우리가 보통 마음과 감각으로 느끼는 물질적 실재보다 더 깊은 실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실재는 의식(consciousness)입니다.  모든 사람과 만물에 내재된 보편적인 행복한 인식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여러분 마음의 본질이듯이, 우주 의식은 전체 우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만물 안에 존재하며 만물은 그 안에 존재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은 의식의 일부이며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우주를 물질주의적으로 보는 세계관 vs.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세계관

 


그러나, 그 이유를 지금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현대 세계관에서는 더 고차원적인 의식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현대과학은 현실을 매우 기계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물질, 공간이 모두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요? 

 

만약 모든 면에서 의식이 지금 우리 현실의 구성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고차원적 현실이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매우 심각한 단점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아주 실질적인 이점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주를 임의적이고, 기계적이며, 감각이 없다고 보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소외되고, 외롭고, 두려워하고, 우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문제들 속에서 그것을 너무 자주 봅니다. 물질주의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낙관론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행복한 의식을 가진 우주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세상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랑받고, 희망적이고, 행복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스승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께서는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고 무력하지 않다. 별을 인도하는 힘이 당신을 인도한다.”

 


그래서 저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세계관보다는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서 성취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세계관을 인정하려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다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관의 이점은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들 중 어느 것 보다도 유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의 본질은 의식이라는 전제는 우주의 본질이 물질이라는 전제와 마찬가지로 유효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는 감지되고 다른 하나는 감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과학적 측정을 통해 물질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의식은 내면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우리 자신 안에서 찾아야 만합니다.

 


나살 우템이라고 불리는 수피 신비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며칠 동안 터키에 있는 그의 고향에 실제로 머물렀죠. 그의 기괴하고 유머러스한 가르침의 방식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그가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내 집 열쇠를 찾고 있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어디에서 그것을 잃어버렸나요?”그녀가 물었습니다. “집안 어딘가에서요.” 행인은 당연히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왜 밖에서 찾고 있나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집안이 어둡기 때문이에요.” (웃음)

 

 

 

우리는 올바른 것을 올바른 장소에서 찾아야합니다. 비록 거기서 그것을 찾기가 어렵더라도 말이죠. 겉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속은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식은 내면에 있으므로 내면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머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게 함정입니다.

 

 

의식은 우리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구를 생각해보십시오. 방의 전구는 주위에 빛을 비출 수 있지만 그것을 빛나게 하는 힘, 전기에는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의식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고의 정상적인 기능과 말을, 심지어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핵심은 생각은커녕 말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데카르트의 이 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요가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멈추었을 때 나는 진실로 존재한다.” (웃음)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거나 과학적으로 무언가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는 생각으로 파헤쳐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과학으로는 결코 인간이란 무엇인지의 핵심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고차원적 실재로 규정한 과학자들

 

 

 

지금쯤이면, 여러분은 제 말씀이 조금 실체가 없고 뉴에이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웃음)

 

 

그래서 의식을 더 고차원적 실재일 것이라고 인정한 과학자들에 대한 간단한 예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합니다.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끝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웃음)

 

 

 

양자이론의 아버지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의식이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물질을 의식의 파생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가정한다.” 이것은 양자론의 선구자가 한 말입니다.

 

 

 

얼마 후,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James Jean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식의 흐름은 비물질적 실재로 향하고 있다. 우주는 위대한 기계보다는 위대한 생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설득력을 드리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웃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감정은 신비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모든 과학의 근원이다. 

 

 

무한의 우주 안에서 드러나는 최고 이성의 힘을 지닌 존재에 대한 깊은 감정적 확신이 내가 신에 대하여 지닌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더 높은 의식을 실제로 경험 한 현대 과학자의 예를 들어주고 싶습니다.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 박사는 많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뇌가 의식을 창출한다고 믿어온 신경과학자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매우 드문 뇌 감염에 걸려서 일주일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시 그는 임상적으로 뇌사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조되고 깨우친 의식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7일간의 혼수상태 동안 나는 완전히 의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평화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놀라운 세계를 여행했다. 나는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엄청난 경험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박사는 이제 뇌 과학계가 “유치원에서 졸업”하고 뇌가 현실을 창출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명상: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체험을 통해 고차원적 의식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과 저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개인적으로 의식을 확인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명상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상은 의식이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경험에 의해 구체화되는 직관적인 과학입니다. 명상을 통해, 지금 이 방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나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실재하는 고차원적 의식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저는 방 전체가 인식과 행복으로 진동하는 의식의 장으로 가득 차있다고 느꼈던 특별히 빛나는 명상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하고 실감났습니다. 당시 그것은 마치 칼로 자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당시에는 너무나 현실과 같아서 저는 아직도 그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상을 통해 우리를 궁극적으로 의식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그런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금 명상을 통해 더 높은 의식을 경험해보면 어떨까요? 함께 해 볼까요?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늘 여러분이 명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동안 여러분이 눈을 감아 주시길 권합니다.

 

 

숨 쉬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세요. 물론 긴 하루였을 테지만요.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중심을 느껴보십시오. (음악 재생 시작)

 

 

이제 여러분이 완전히 평화롭게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가득한 평화와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주위에 가득한 무한한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그 무한한 행복에 합류하는 것을 느껴 보세요. 여러분의 인식 감각이 여러분을 둘러싼 무한한 인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의식이 주변의 무한한 의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과 하나 되는 느낌. 여러분이 그것과 하나라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이 무한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몇 초간 계속하십시오.

 

 

 

좀 더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셨나요? 그런가요? 아닌가요? (청중: 네.)

 

 

어쨌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이 전체 우주의 의식과 하나라는 가능성에 대해 지금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의식이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을요. 또한 그것은 진짜이며, 정말로 노력한다면 느낄 수 있다는 것을요.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뿐만 아니라 여러분 존재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현실이 더 보편적인 현실임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서 더 큰 의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감, 존재감을 더 확장할수록 우리는 모든 존재에 더 큰 연결감을 느낍니다.

 

 

더 행복해지고, 덜 두려워하고 덜 외롭습니다. 만물이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가 만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내면을 향한 탐구는 모든 사람들, 동물, 식물 ... 모두의 포용을 용이하게 합니다. 행성, 다른 행성의 사람, 동물 및 식물도요. 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주 전체입니다.

 

 

 

저는 의사소통 및 운송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이 더 좁아지는 것처럼 명상 기술의 발전으로 우주도 더 좁아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은 개인의 존재감각, 즉 그의 가슴이 원하는 바에 머문다.”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1. 18:02




 

 

서양철학사상

인식론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一切(일체)가 惟三神所造(유삼신소조)오

(만유의 일체가 오직 삼신이 지은 바다)

 

心氣身(심기신)이 必修相信(필수상신)이나 未必永劫相守(미필영겁상수)하며

(마음과 기운과 몸은 반드시 서로 의지해 있으나 영원토록 서로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靈智意三識(영지의삼식)이 卽爲靈覺生三魂(즉위영각생삼혼)이나 亦因其素以能衍(역인기소이능연)하며

(영식 지식 의식의 세 가지 앎[삼식]은 영혼 각혼 생혼의 세 가지 혼을 생성하지만, 이 또한 삼식三識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 뻗어 나간다)

 

形年魂(형년혼)이 嘗與境(상여경)으로 有所感息觸者(유소감식촉자)오

(육신과 목숨과 혼이 주위 환경과 접하는 경계에 따라 이른 바 느낌과 호흡과 촉감이 있게 되는 것이고)

 

而眞妄相引(이진망상인)하야 三途乃歧(삼도내기)하니라.

(성명정性命精의 삼진과 심기신心氣身의 삼망三妄이 서로 이끌어 감식촉感息觸의 삼도三途로 갈라진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1) 어떤 앎들이 있을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모두가 끝없이 닥쳐오는 문제에 직면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들은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해 각기 어떻게 대처하여 생존해 가는 것일까? 여타의 생명체와 인간의 대처 방법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여타의 생명체는 문제에 대해 본능에 의존하여 대처하지만, 인간만은 본능과 더불어 궁리와 생각에 의존하여 문제에 대응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의 궁리와 생각, 이것에 관련하여 과학의 천재요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팡세Pensees』에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도 가장 가냘픈 한줄기 갈대와 같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했다.

 

급변하는 생존환경에 직면하여 인간은 궁리와 생각을 통해 삶의 보존과 질적인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도모해 왔다. 궁리와 생각을 통해 얻어낸 것은 다름 아닌 앎이라고 하는 것, 즉 지식이다. 그래서 앎(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삶의 본질적인 방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릇되게 하거나 미궁으로 빠져들게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E 384~322)가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욕망한다”고 말했던 것을 되짚어 보면, 인간은 모르는 것을 열광적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진실을 파악하고 그릇된 앎을 바로잡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 노력하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많이 알아라, 그러면 선善해진다”는 말은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BCE 470~399)의 말이다.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해 보면 사람이 무지無知하면 할수록 악惡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속담에는 “알면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삶의 여정을 돌이켜 보면, 교묘하게 도둑질하는 것도 알아야 할 수 있고, 개과천선改過遷善도 알아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만인에 베푸는 선행도 알아야 행할 수 있고, 근사하게 사는 것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도대체 이러저러한 앎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앎이 나오는 통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안다’란 말을 아주 다양한 방식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을 갖고 있고, 앎은 곧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지식을 망라하여 그것이 생겨난 통로를 세별해 보면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된다. 소위 외부와의 직접적인 감각[오관五官: 눈, 귀, 코, 혀, 피부]을 통하여 생겨난 지식, 감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서 얻어 내는 지식, 감각과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제3의 지식, 즉 대상들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의 지식이 그것이다.

 

첫 번째는 소위 감각을 통한 경험적 지식을 꼽을 수 있다. “손을 불에 가까이 대면 뜨겁다는 것을 안다”, “똘똘이는 자신의 키가 180cm임을 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을 안다”, “대전에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사과는 빨갛다는 것을 안다” 등과 같이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 그것이다. 나아가 “나는 지금 배가 몹시 아프다는 것을 안다” 등과 같은 심정적인 사건에 대한 지식, “불이 나면 연기가 남을 안다”와 같이 원인과 결과에 대한 탐구로 얻어낸 과학적 지식, 지나간 역사적인 사실이나 사건 사고와 같은 앎도 기원을 추적해 가면 감각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험 관찰을 통해 획득한 것이거나 역사적인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알았던 지식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소위 이성을 통한 직관이나 추론적 지식이다. 경험적으로 획득된 지식이 아닐지라도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과 소나무는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까투리는 암꿩임을 안다” 등과 같은 지식은 이성의 사유를 통한 직관이나 추론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적 지식, 논리학적 지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근원이 있음을 안다”와 같은 형이상학적 지식, “나는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안다” 등과 같은 가치론적 지식 또한 자유나 선악이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성적 지식에 넣을 수 있다.

 

세 번째는 감각을 통한 경험적 지식도 아니고 추론을 통한 이성적 지식도 아닌 깨달음을 통한 영적 지식이다. 경험적 지식은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고, 이성적 지식은 감각적인 경험이 아닌 정신적인 사유를 통해 추론해서 나온 것이지만, 깨달음을 통한 영적 지식은 양자를 넘어선 신적神的인 세계에 대한 앎이다. 영적 지식은 감성의 눈으로 봐서 아는 것도 아니고, 이성의 눈으로 봐서 아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깨달음을 통한 앎은 제3의 영적靈的인 눈으로 봐야 한다. “의식의 스펙트럼”을 말하면서 종교적인 의미를 풍부하게 역설한 켄 윌버Ken Wilber(1949~ )는 관조觀照의 눈을 제시한다. 관조의 눈을 통해 얻어낸 영적 지식은 현묘玄妙한 신의 존재, 불가에서 말하는 중도실상中道實相, 유가에서 말하는 시중지도時中之道, 도가에서 말하는 시공時空이 멈춰버린 무無에 대한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재存在와 인식認識은 불가분의 관계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되든지 이성적 직관을 통해서 알게 되든지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되든지 간에, 앎에는 앎의 대상 이 일단 주어져야 하고, 이들에 대한 앎은 확실성의 정도가 매겨질 수 있다. 대상에 따라 확실하지 않은 지식에서부터 가장 확실한 지식에 이르기까지 등급이 있음을 최초로 역설한 철학자가 있는데, 바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학적으로 체계화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BCE 427~347)이다. ‘실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가 된다’는 이념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플라톤은 대상에 대한 확실성의 정도에 따라 앎을 분류한다. 여기로부터 그는 존재란 곧 인식일 수 있음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대상에 대한 앎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앎을 갖게 되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대상에 대한 탐구는 소위 존재론적 탐구의 영역에 속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앎을 얻게 되는가의 문제는 인식론적 탐구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존재론存在論(ontology)과 인식론認識論(epistemology)은 불가분의 관계가 될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가 참되지 못하면 앎도 불확실하게 되고, 참되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곧 참된 인식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앎의 대상을 구분해 보면 크게 세 측면, 즉 없는데도 있다고 믿고 있는 것(허구), 생성변화하면서 항시 유동하는 것(감각의 대상들), 항상 그대로 존속하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에 대응해서 앎의 획득과정은 신체적인 감각을 통해 감성으로 아는 것, 감각과 사유의 합작으로 아는 것, 지성의 논리적인 추론이나 직관을 통해 아는 것, 관조를 통한 영적인 깨달음으로 아는 것으로 구분하여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인식이 대응해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는 플라톤은 우선 참된 진리인식과 그렇지 않은 앎(지식)을 구분한다. 유동적이며 확실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앎과 고정적이며 영원한 존재에 대한 앎이 그것이다. 그는 전자의 경우를 억견臆見(doxa)이라 했고, 후자의 경우를 인식認識(episteme)이라 했다. 억견은 앎의 대상이 없거나 유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진리가 아닌 것이고, 인식은 앎의 대상이 고정적인 존재로 확실하고 영원한 진리라는 얘기다.

 

억견은 감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실하지 않은 앎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망상妄想(eikasia)이고, 다른 하나는 의견意見(pistis)이다. 망상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환영과 같은 대상에 대한 앎이고, 의견은 항상 유동 변화하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사물에 대한 앎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주관적인 상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망상이다. 캄캄한 산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멀리에 빤짝거리는 불빛을 보고 도깨비불로 알고 있거나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것을 보고 폐렴에 걸린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망상에 속하는 앎이다. 감각으로 경험하는 대상들에 대한 앎은 의견이다. 이는 물이 담긴 유리컵 속에 꽂혀 있는 젓가락을 보고 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든가, 여름에 은행나무 잎이 파랬다가 가을이 되어 노랗게 물들어 변화했는데, 은행나무 잎이 파랗다고 알고 있는 경우들이 의견이다. 감각을 통한 앎은 대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모두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인식은 순수 이성적인 사유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확실한 앎을 뜻하는데, 감각이 아니라 이성적인 논증이나 직관, 혹은 영적인 깨달음과 같은 앎이 여기에 속한다.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앎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증명하여 얻어내는 논증論證(dianoia)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 즉 순수 이성의 관조적 직관直觀(noesis)이다. 논증이란 감각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지만 순수 사유를 통해 추론하여 아는 지식이다. ‘같음’은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거나,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든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임을 아는 경우, 사물의 실체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定義 등도 모두 이에 속하는 지식이다. 관조적 직관은 순수 이성을 통해 항존하는 근원의 존재에 대한 신적인 깨달음, 즉 형이상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데아Idea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플라톤은 이 두 종류의 앎만이 진정한 진리인식이라 했다.

 

플라톤이 제시한 진리인식은, 엄격한 의미에서 말해볼 때,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앎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올바른 인식은 논증적인 것과 이데아에 대한 앎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감각을 넘어서 있는 수학적인 대상이나 사물로부터 추상화된 보편 개념, 혹은 근원의 존재에 대한 것만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앎 또한 확실하고 불변하는 인식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평소에 ‘안다’는 말을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하면서 앎이 모두가 인식이 되는 것처럼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학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식은 아주 느슨한 의미의 앎, 혹은 넓은 의미의 지식을 통칭하는 것 같다. 만일 지식이 곧 인식이라는 생각을 근저에 깔고서 어떤 대상이나 사태들에 대하여 우리가 안다고 말한다면, ‘안다’고 할 때 그 앎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지, 얼마나 알 수 있는지, 나아가 엄격한 의미의 인식으로 진리眞理의 반열에 들어올 수 있는 앎인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무엇에 대해 ‘안다’고 할 때 그 주장이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면, 그 앎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진리인식으로 통용돼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분야에서 탐구된 앎들이 어떻게 진리인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러 학문에서 ‘인식한다’고 하는 다양한 진술들을 검토하고, 각각의 주장에 대하여 무엇을 타당한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살피며, 어떤 의미에서 진리인식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진정으로 진리인식인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앎의 의미, 앎의 근거, 앎의 기준 등을 따져 묻는 것은 철학의 한 분야, 즉 인식론(epistemology)에서 탐구된다고 할 수 있다.

 

2) 진리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감각적 사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은 바로 앎이다. 앎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첫 번째의 관문은 이른바 감각기관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생겨난 앎은 바로 감각感覺(sense)이기 때문이다. 만일 감각기관이 마비되기라도 한다면 감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인 앎은 전혀 없을 것이다. 시각장애나 청각장애가 그러한 예들이다. 만일 태어날 때부터 감각기관 전체가 마비된다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감각을 통한 어떠한 앎도 형성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게 된다.

 

일차적인 앎을 제공하는 감각은 크게 두 가지 경로로부터 나오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외적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 감각’이다. 외적인 감각이란 오관(五官, 즉 눈, 귀, 코, 혀, 피부)을 일컫는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유발한다. 눈으로는 시야에 전개되는 것을 보며, 귀로는 모든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으며, 혀로는 사물의 맛을 보고, 피부의 접촉으로는 부드럽고 단단한 것을 감지한다. 반면에 내적 감각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따라 느끼고, 바라며, 의도하는 것들을 총칭한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어떤 때는 귀찮고 슬프며 우울함 등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은 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감각은 곧 앎이 되는데, 이러한 앎을 우리는 인식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감각은 우리가 인식을 얻는 데에 기초적인 조건으로서의 수단은 될지언정 확실한 앎을 제공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것’을 감각했을 경우 이는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단순히 어떤 감각적 영상 내지는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빨간색’, ‘둥근 모양’, ‘먹음직스러움’ 등은 단순히 감각에 의한 영상 내지 표상이며, 이것만으로는 인식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다양한 감각적 영상 내지 표상들을 정리하고 조직하여 어떤 판단이나 명제로서의 “지각知覺(perception)”에 이르러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곧 지식이요, 그것은 판단이나 명제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이것은 사과이다”와 같은 명제가 그것이다.

 


감각지각은 진리인식인가?

그러면 감각으로 지각된 개별적인 판단이나 명제는 모두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또한 앎(지식)은 될지언정 모두 인식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앎이 진리인식의 규준을 통과하려면 ‘보편성普遍性’과 ‘항구성恒久性’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을 검토해 보자.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대화편 『테아이테투스Theaetetus』, 151e~152b에서 진리론을 검토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BCE 485?~410)의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소개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 무엇이든 내가 아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나타내 보인 그대로이며, 네가 아는 것은 그것이 너에게 나타내 보인 그대로이다. … 너와 나는 인간이다. … 그러므로 어떤 것을 인식하는 자는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며, 지각은 인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인용문이 말해주듯이 프로타고라스는 각자 개별적인 감각지각이 곧 인식이요 진리임을 천명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감각지각이 정말 진리인식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정적인 비판을 가한다 : 만일 ‘인식’과 ‘지각’이 동일한 것이라면, 어떤 자의 꿈속에서 가지는 지각이나 정신 이상자가 가지는 지각이나 혹은 무지한 자가 가지는 지각이나 모두 인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상식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심지어 개별적인 감각지각에 나타난 것이 모두 인식이라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주장에 근거해 볼 때, 어떤 자는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것이 ‘사과’라고 할 것이고 어떤 자는 ‘토마토’라고 판단하여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것은 ‘사과’이면서 동시에 ‘토마토’라는 귀결이다. 이런 주장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감각지각은 객관적으로 ‘보편성’과 ‘항구성’을 확보할 수 없다. 결국 감각지각이 진리인식이라는 주장은 부당하다. 왜 그런 것일까? 만일 참된 지식 즉 인식이 성립하려면 두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불변적이고 항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대상을 탐구하는 주체 또한 불변적인 확고한 인식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세계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이다. 또한 개별적으로 감각지각을 하는 주체는 그 능력에 있어서 천차만별이고, 주관적인 감정 상태가 일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개별적인 감각지각에만 의존한다면 결국 참된 진리인식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개별적인 감각지각은 회의론에 봉착한다는 견해

심지어 인식이 개별적인 감각지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란 없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인식이 개별적인 감각지각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결국 회의론(scepticism)에 빠지게 된다는 입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극단적으로 설파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인 고르기아스Gorgias(BCE 485~385)이다. 그의 극단적인 회의주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참된 실재란 없다.”(감각적인 대상들은 항상 유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인식은 고정적이고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주관이 다른 각자는 주관대로 받아들이므로 보편적인 인식일 수 없다)

 

이와 같은 개별적인 감각에 직접 주어지는 지각만이 진리인식일 수 있다는 주장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진리에 대한 회의론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심지어 진리인식이 전적으로 감각적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판단, 즉 “지구는 몇 백억 년 전에 생겨났다”고 하는 과학적 지식이나 “전지전능한 절대자는 우주세계를 권능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종교적인 명제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어떻게 인가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도 발생한다. 일련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인식인가에 대한 방법적 통찰을 개괄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식의 필연적 진리와 우연적 진리

먼저 학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진리의 의미와 기준을 검토해 보자. 직접적인 감각지각으로 아는 것이든 감각을 넘어서 있는 것들을 이성적 직관으로 아는 것이든, 이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가질 때에만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일련의 이런 내용들에 대한 진리성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인식론에서 다뤄져야 할 중요한 과제라 본다. 즉 참된 앎의 의미, 근거, 기준 등을 따져 묻는 것이 인식론의 분야가 되기 때문이다.

 

인식에 대한 문제는 최소한 언표 형식의 판단 내지 명제 차원에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인식이 성립하는 형식적 장소는 판단이나 명제에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과”, “사람”, “귀신” 등은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만으로는 허위인지 아닌지, 진리에 대한 인식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사과는 빨갛다.”, “그는 거짓말쟁이다.”처럼, 주어에 대한 서술 형식을 갖춘, 판단 내지 명제의 형식으로 주어져야만 주장이 성립되고, 주장에 대한 진리인식의 문제를 따져볼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럼 어떤 판단(명제)이 진리인식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먼저 대표 격으로 전통적으로 논의된 주장, 즉 항상 참일 수 있다고 하는 “필연적 진리”와 개연적으로 참일 수 있다고 하는 “우연적 진리”에 대하여 검토해 보자.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대부분은 감각지각에 의존해서 유용하게 살아간다. 즉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앎이나, 이런 앎으로부터 이루어진 지식을 가지고 현실적인 삶을 편리하게 영위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이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네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 “대전에는 지금 비가 몹시 내리고 있다”, “네가 찾고 있는 여자는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부여는 백제의 옛 수도이다” 등은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 얻어낸 앎에 속한다. 반면에 감각지각으로부터 얻어낼 수 없는 앎도 우리는 진리로 받아들여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에 둘을 더하면 셋이 된다”,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 “99에다 75를 더하면 174가 된다”, “총각은 장가를 가지 않은 건장한 청년이다”,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욕망한다” 등이 그것이다.

 

진리의 측면에서 볼 때, 감각지각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앎과 이성의 추론을 통해 얻어내는 앎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와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이들 두 진술들 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 : 우연적 진리, 경험적 또는 후천적 지식, 종합적 명제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 : 필연적 진리, 논리적 또는 선천적 지식, 분석적 명제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라는 진술은 감각으로 관찰 가능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관찰될 수 있고, 조건만 맞으면 똘똘이가 과연 언제 어디에서 청바지를 입고 있는지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명제이다. 이 진술은 똘똘이가 항상 청바지를 입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혹은 똘똘이의 기분이나 어떤 상황에 따라 청바지를 입거나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제약을 받는 ‘우연적인 진리’라 한다.

 

반면에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진술은 사정이 다르다. 이 진술은 관찰 가능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실들에 의존함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항상 참인 그런 명제이다. 즉 정사면체는 현실적인 사물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과는 관계없이 항상 또는 ‘필연적’으로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진술은 ‘필연적인 진리’라 한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후천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적절한 검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명제이다. 즉 이러한 진술은 과연 똘똘이가 언제 어디에서 청바지를 입고 있는지가 경험적으로 관찰되고 검증되어야만 그 진리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명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명제는 진술을 구성하는 낱말들이나 그 의미만을 검토하는 것만으로 그 진리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후천적으로’ 확보되는 인식이다.

 

반면에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와 같은 진술은, 정사면체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4개의 모서리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진리성을 결정하기 위해서 경험적으로 관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진술에 대하여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이 진술에 사용된 낱말의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와 같은 진술의 진리성은 ‘선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인식된다고 말한다.

 

만일 똘똘이가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진술이 참임을 입증하기 위해 보증자로서의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똘똘이가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든지 혹은 주장에 대하여 부인하는 자를 직접 데리고 가서 관찰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진리임을 확인하면 된다. 이러한 진술을 ‘종합명제’라 한다. 그러나 ‘정사면체’에 관한 진술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단지 ‘정사면체’라는 말이 정의되는 방식이 그러하다고 지적할 뿐이거나 아니면 ‘정사면체’의 낱말을 이해시키면 된다. 이는 마치 ‘삼각형’이 왜 세 개의 선분으로 이뤄져 있느냐를 입증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진술은 ‘분석명제’라 한다.

 

‘종합명제’인지 ‘분석명제’인지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방식은 각각의 진술을 부정했을 경우 자기모순에 빠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별하면 된다. 종합적 명제의 경우, 만일 어떤 자가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를 잘못 판단하여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지 않다”라고 부정해도 이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석명제의 경우,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명제를 부정하면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지 않다”고 진술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모순을 범하게 된다. 자기모순에 빠졌음을 모른다면 이는 ‘정사면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결과이든지 아니면 주장하는 자가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면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결과일 것이다.

 

분석적 명제를 부정할 경우에 자기모순에 빠지는 까닭은 주어 속에 주장된 것이 술어 속에서 부인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합적 명제의 경우 이를 부정해도 아무런 모순이 생기지 않는 까닭은 주어와 술어의 뜻이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합적 명제의 경우 똘똘이가 청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청바지를 입고 있지 않다고 하면 이를 검증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모순을 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석명제의 경우 정사면체에서 네 개의 모서리를 부인하게 되면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짐은 틀림없다.

 

 

이 밖에도 아직까지는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그래서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종합 명제들도 있다. “은하계 어딘가에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있다” 등과 같은 진술은 아직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기술의 발전도 안 되어 있고, 또한 이 진술의 진위眞僞를 결정하는 데에 필요한 감각지각을 현재로서는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진술들은 본성상 종합적이고 후천적인 명제로 여길 수 있겠는데, 아직은 참과 거짓을 가릴 능력이나 방안이 없어서 못할지라도 원리적으로는 검증될 수 있는 종합명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종합명제도 분석명제도 아닌 진술들도 있다.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진술은 내 입장에서는 분석명제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종합명제일 수 있다. 게다가 “내 눈에 심한 통증이 있다”와 같은 심리적인 사건을 기술한 명제도 있다. 그리고 종합명제에도 분석명제에도 속하지 않지만 명백히 참과 거짓이 가려질 필요가 있는 진술들, 즉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도덕적인 올바른 규칙이 있다”라든가 또는 “마음의 과정은 뇌의 과정과 동일하다”와 같은 철학적 진술들도 있다. 더욱 어려운 작업은 “명제의 자격을 갖춘 모든 진술이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다”는 판단들이다. 이러한 진술들은 종합명제에도 분석명제에도 명확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 진위를 가리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진리인식의 두 기준, 대응설對應說과 정합설整合說

탐구의 과정에서 얻어낸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에 관한 인식은 진리일까 아닐까? 즉 무엇이 진리이고 아니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전에 ‘진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입은 삐뚤어져 있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진리다. 즉 진리는 존재에 대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식과 그 대상이 일치해야 진리가 됨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면 지성 안에 앎으로 있는 인식을 말해야 하고, 인식은 곧 대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로부터 대상 = 인식 = 진술(말) = 진리가 됨을 알 수 있다.

 

대응설과 정합설

대상과 인식이 일치하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면, 대상과 인식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전적인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를 뜻하는 ‘대응설對應說(correspondence theory)’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판단과 판단간의 일치를 뜻하는 ‘정합설整合說(coherence theory)’의 입장이다.

 

대응설적 입장의 진리관은 두 측면으로 나누어 말해 볼 수 있다. ‘감각적 모사설’과 ‘이성적 모사설’이 그것이다. 감각적 모사설에 따르면, 감각적 경험을 통한 인식, 즉 종합판단이 실제적인 대상과 일치하면 진리라는 것이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고 했을 때, 감각적으로 똘똘이가 실제로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 진리가 된다는 것이 그 예이다. 경험주의 인식론은 이러한 감각적 모사설의 진리관을 견지한다. 감각적 모사설의 진리를 주장한 철학자는 대표적으로 영국의 경험론자, 로크J. Locke(1632~1704)를 꼽을 수 있다.

 

 

경험주의 인식론에 기반을 두고서 나오는 학문, 소위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심리학이나 사회과학 등의 진리관은 감각적 모사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분야는 개별적인 사례들의 실험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검증하여 판단의 진리성을 확보하고, 이로부터 귀납적 추리 방식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성을 형성하여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까마귀는 검다.”, “저 까마귀도 검다.” 등 수차례의 경험적 관찰을 통해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판단하고, 결국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보편적인 판단을 추론해 낸다.

 

이성적 모사설에 따르면, 이성적 사유의 직관을 통한 인식, 즉 분석적 판단은 자명하기 때문에 명증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라고 한다.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진 다각형이다.”는 판단이 그 예이다. 수학이나 기하학적 진리는 근본적으로 분석적 판단에 속하는 것들이다. 감각이 아닌 이성을 통한 합리주의 인식론은 이러한 이성적 모사설의 진리관을 견지한다.

 

이성적 모사설의 진리를 주장한 철학자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말한 플라톤Platon(BCE 427~347)과 이성적 사유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근대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데카르트R. Descartes(1596~1650)가 대표적이다. 플라톤은 감각적 현상의 배후에 본질적인 이데아가 실재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순수이성의 예지적인 직관(noein)에 의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수학과 기하학적 명제들이 경험으로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하고, 이들에 대한 진리인식이란 오직 순수 이성의 직관에 의해 그 자체로 선명한 명증적 진리라고 했다.

 

그럼 정합설적 입장의 진리관은 무엇인가? 정합설은 진리의 근거를 사물과 지성간의 일치에서 찾지 말고 자명한 상위의 관념이나 판단을 전제하고, 이것과 새로운 판단이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자명한 판단이 주어지고, 새로운 판단이 이것과 맞아 떨어지면, 즉 아무런 모순 없이 일치관계에 있으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때 일치관계의 여부는 모순 여부를 판가름하는 ‘모순율’과 그에 기초한 연역의 규칙이다.

 

 

만일 누군가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죽지 않는다.”고 말했을 경우, 이 주장이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당장 판가름하는 작업은 대응설의 입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바마 대통령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진술은 이치를 따져 보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장 드러난다. 연역규칙에 근거한 정합설이 그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죽는다, 오바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바마는 반드시 죽는다.”의 연역추리에서 보듯이, “오바마 대통령은 죽지 않는다.”는 판단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에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 거짓임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연역추리의 규칙에 따르면, A와 B가 동일하고, B와 C가 동일하다면, A와 C는 동일하다. 삼단추리의 연역규칙은 이성의 선천적 규칙으로 보편적이다. 연역에 의한 정합 여부는 감각적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논리적인 이성의 사유로써 판정한다. 이와 같이 정합설적 진리관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이성이 보장하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의 확고한 근거와 기준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대응설과 정합설의 진리관 비판

분석적 판단을 선호하는 진영과 종합적 판단을 선호하는 두 진영은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체계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럼에도 대응설적 진리관과 정합설적 진리관은 나름대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진리관은 각기 어떤 문제가 숨어있던 것일까?

 

<대응설의 비판적 검토> :

첫째, 지성의 관념과 사물의 일치를 진리로 간주하는 대응설적 진리관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한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 입장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각자의 나름대로 판단한 것이 진리라고 할 수 있어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는 것이 진리라는 주장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책상 위에 실제로 빨간 사과가 있을 때, 빨강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이나 색약이 있는 사람은 “이것은 빨간 사과이다.”는 판단을 알지 못할 수 있거니와, 주변의 빛의 밝기에 따라 사과의 색깔이 달라져서 일정한 빨간색의 사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특정의 판단이 사물과 일치하는지의 여부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판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둘째, 대응설적 진리관은 사물과 판단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관념과 판단의 일치가 될 수 있고 결국 영국의 경험론자 버클리G. Berkeley(1685~1753)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흘러갈 여지가 있다. 요컨대 “이것은 빨간 사과이다.”라고 할 경우, ‘이것’은 책상 위에 실제로 있는 빨간 사과를 가리키는 것이고, “빨간 사과이다.”는 판단은 이미 알고 있는 사과에 대한 관념이다. 대응설은 관념 밖에 있는 사물의 ‘이것’과 관념으로 알고 있는 빨간 사과가 일치하므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지성 안에 있는 관념을 말하는가 아니면 지성 밖의 책상 위에 실제로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가이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사물과 관념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대응설은 곧 관념과 관념의 일치를 말하는 꼴이 된다.

 

셋째, 이성의 예지적 직관으로만 파악된다고 말한 플라톤의 이데아는 지성 밖에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아에 대한 인식은 진리인지 허위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게 된다. 이성으로 파악한 이데아들은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대응설은 확실한 진리관이 될 수 없다.

 

넷째, 인과적 지식이나 심리적인 지식은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대응점을 찾을 길이 없다. 요컨대 “주먹으로 뺨을 때리면 고통스럽다.”는 판단이나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는 판단에서 주먹으로 때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불이 났는데도 연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또한 하루에도 수천 가지의 새로운 생명체가 창조되고 소멸하는 자연계에서 미래적인 사건에 대한 판단은 확인할 수 없게 된다. “현생 인류는 장차 소멸하고 새로운 종의 인간이 등장할 것이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다섯째, 감각적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대응설적 진리관은 현실 체계의 관찰 가능한 것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연적’이고 개연적인 진리를 내세울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이유는 현실 세계의 관찰 가능한 것들이란 잠시의 정지도 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이들을 근거로 진술이 확정되면 어떤 때는 참이었다가 다른 순간에는 거짓이 될 수 있어서 보편적인 진술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식이 감각적 관찰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자들은, 비록 감각 지각에 근거한 판단이 틀리고 종종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감각적 경험의 세계이고 지식 또한 이곳을 떠난 것은 공허한 것이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가지고 이를 살아가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합설의 비판적 검토> :

앞서 논리학의 정언적 삼단론의 추리에서 보듯이, 정합설은 판단과 판단의 일치 여부, 즉 상위 판단인 대전제를 깔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판단이 논리적으로 추론되어 나오는 것을 진리로 판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상위 판단인 대전제에 있다. 대전제의 진리성을 판정받으려면 더 포괄적인 상위 판단이 요구되고, 결국은 최초의 상위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상위 판단의 진리성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판단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과 정합되기 때문에 진리성이 확보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판단은 “모든 동물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과 부합하기 때문에 진리이다. “모든 동물은 죽는다.”는 판단은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에 부합된다. 그런데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진술은 최종적인 상위 판단이다. 이 판단의 진리성은 확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상위 판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상위 판단의 진리성은 확보될 수 없다. 그렇다면 최고의 판단인 대전제로부터 연역하여 가장 하위에 있는 판단의 진리성은 논리적으로 확보되지만, 최고의 판단인 대전제의 진리성은 확실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추론되는 모든 하위 판단의 진리성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맹점 때문에 정합설의 진리관 역시 비판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합설과 대응설의 보완적 검토 :

먼저 정합설은 무엇의 도움으로 진리관이 확보될 수 있는가에 대해 검토해 보자.

 

정합설의 진리관은 상위 판단과 새로운 판단간의 일치관계가 연역추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고 필연적인 진리를 확보해 준다. 그러나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이 되고 있는 경험의 과학적 사실에 대한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상위 판단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적 내용의 진리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경험에 의한 객관적 사실에 도움을 받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바로 대응설의 하나인 감각적 모사설의 진리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일 “이 까마귀는 검다.”의 상위 판단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것인데, 상위 판단의 진리성은 “이 까마귀”도 검고, “저 까마귀”도 검으며, 과거의 “그 까마귀”도 검었다는 사례들을 검증함으로써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합설적 진리관의 보편성과 경험적인 대응설의 기준, 즉 감각적 경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사실적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함축한다.

 

상위 판단인 공리와 정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수학이나 기하학과 같은 순수 이론적인 체계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두 점을 잇는 직선은 두 점 간의 최단거리이다.”와 같은 정합적 진리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대응설적 진리관의 하나인 이성적 모사설이 뒷받침해 줄 수 있다. 적어도 정상적인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성의 직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수학의 이론적인 공리나 정리는 이성적 직관에 의해 자체로 명증적 진리와 더불어 이로부터 논리적 연역에 의해 그 진리성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응설에서 감각적 모사설의 맹점은 무엇의 도움으로 진리관이 확보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자. 감각적 경험으로 얻어낸 개별적인 판단으로는 과학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개별적인 지식이 학문의 일반적인 지식이 되려면 그것이 뜻하는 모든 대상이 감각적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여기로부터 창안해 낸 것이 소위 귀납추리(induction)이다.

 

귀납歸納이란 구체적인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경험될 때, 이 사례들을 바탕으로 같은 조건이 주어지면 앞으로도 그런 사례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일반화하는 방법이다. 이는 감각적 지각의 사례들을 토대로 하여 경험적 지식을 획득하고, 그 지식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부의 사례로부터 보편적 법칙성을 부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논리적 비약을 동반한다. 이것을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이라 한다.

 

그렇다면 귀납적 비약은 정당한 것인가? 만일 귀납적 비약이 치명적인 약점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그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개별적인 판단에서 보편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 귀납법은 그 기반부터 무너질 것이고, 개별적인 감각적 경험 지식으로부터 일반화하는 작업은 애초부터 타당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귀납적 비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자연의 한결같음(the uniformity of nature)’이라는 원리가 제시된다. 이 원리에 관련해서 밀J. S. Mill(1806~1873)은 우주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 일정한 조건 하에 일어난 개별적인 사례가 현재나 미래에도 같은 조건이 주어지면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연의 진행 과정은 한결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한결같음’은 실험적 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획득한 인식이 보편적인 진리명제(귀납추리)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학문의 진보 :

합리주의 인식론은 진리의 근거가 순전히 합리적인 이성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경험주의 인식론은 개별적인 감각적 지각에 근거한다고 설파한다.

 

‘필연적으로’ 참인 진술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식’일 수 있음을 고집하는 합리주의자들은, 항상 참일 수 있는 명제들만이 진리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진리관이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명제들보다 항상 우위에 있음을 단호하게 제시한다. 왜냐하면 필연적인 진술들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항상 참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세계의 지각을 참고할 필요가 없고, 조금이라도 의심될 수도 없는 그래서 결코 틀린 것으로 증명될 수 없는, 그런 확실한 인식만이 진리라는 명칭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합리주의 입장에서 인식론을 전개하는 자들은 확실성의 진리 인식이란 말을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사용하기를 거부한다. 그 근거로 감각의 대상들이란 변화하는 것들이어서 진리의 항존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느 순간에는 삼각형의 물체였던 것이 다른 순간에는 변화되어 사각형의 물체로 바뀐다면, 이에 대한 진술은 “이 물체는 삼각형이면서 사각형이다”라는 상반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경험주의자들에게도 사정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것이 확실한 인식이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분석명제와 같은, 현실적으로 검증될 수도 발견될 수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인식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또한 그들은 합리주의 인식이 필연적인 진리임을 인정하나 그들의 진술이 단순히 낱말을 정의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지만, 인류가 알아야할 지식의 증가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필연적인 인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수학이나 논리학의 영역인데, 이는 곧 여러 공리와 정리들로부터 출발해서 논리적인 추론과 관계들을 여러 방식으로 풀어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 + 3 = 5”의 경우처럼, 이 진술은 정의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참이 될 뿐이다. 그래서 오류를 범하지 않고 확실성을 얻어낼 수 있는 영역은 오직 수학과 논리학에 국한될 뿐이고, 과학적 지식의 증가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학문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개별적인 감각적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이성적 사유의 비판을 통해 누구에게나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양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특히 학문의 체계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 인식론은 대응설이 말하는 감각적 경험만으로도, 정합설에 기초하는 이성적 사유만으로도가 아닌 감성과 이성, 감각과 이성적 직관의 협력으로 축적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온전한 학문적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합리주의 방식과 경험주의 방식 중에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방식을 종합해야 한다. 귀납적 방식을 통하여 얻어낸 일반적인 진술은 학문적 체계의 보편성을 확립하는 연역적 방식을 통하여 학문적 진리체계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사에서 볼 때, 새로운 경험적 자료들을 진리인식의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귀납, 사실들이 모순 없이 체계를 성립시키는 연역의 정합적 체계화, 이 양자의 융합은 새로운 진리인식의 학문적 체계화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진리의 개방성을 통해 우리는 학문의 발전과 진보의 행보를 거듭해 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30. 17:07

 

서양철학사상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인식론 순서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2.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3. 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은 자연법사상을 비롯하여 자연의 합리적인 질서를 찾아 나섰고, 그러면서 그리스 사상을 받아들이고 보존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자 로마 제국은 정복민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되자, 결국 로마인의 삶은 개인의 영적구원靈的救援에 대한 관심으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새롭게 일어난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침투해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됐고, 중세 교황敎皇의 신권정치神權政治가 시작되었다. 중세 초기 교부철학은 그리스-로마 문화를 수용하여 그리스도 교리를 공고화하기에 이르렀지만, 중세 말기에 접어들면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절정을 이룬 스콜라철학은 사물을 파악하는 데에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진리를 체계화하는 신학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즉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던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는 확고했던 중세의 신 중심체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유럽 문명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일명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고 일컬어지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그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화, 예술, 건축 등의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재인식과 수용이 유럽을 주름잡게 됐다. 이로써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한 그리스도교의 사고와 정치적인 체계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일어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결정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유럽은 르네상스로 인해 중세시대의 막을 내리게 됐고,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본성상 알기를 욕망”하는 인간 이성의 자유로운 탐구활동은 여러 분야에서 그 진가를 보이게 된다. 즉 자연과학, 수학, 생물학, 화학, 천문학, 예술 및 건축 등 여타의 학문이 우후죽순처럼 부흥하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성적 사고에 절대적인 신뢰를 둔 그리스 합리주의 사상이 다시 부활한 셈이다. 철학의 사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합리주의 철학으로 근대의 문을 최초로 열어젖힌 철학자는 바로 프랑스 출신 데카르트Renē Descartes(1596~1650)이다. 그의 사상을 계승 극복하여 동일 철학을 전개한 인물로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1632~1677)와 형이상학적 단자론을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쯔Leibniz(1646~1716)가 있다.

 

 


1) 합리주의 선구자 데카르트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프랑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1596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출생한 지 14달이 채 되기도 전에 폐병으로 세상을 떴다. 갓난아기인 그도 병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마음씨 좋은 간호사의 극진한 돌봄으로 생명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몸이 무척이나 허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일찍 눈을 뜰 수 없었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즐겨했으며, 형제들과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한 채 혼자 조용한 곳에서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다.

 

1606년에 그는 지방에 있는 꼴레즈(Collège la Flèche) 입학하여 8 동안 중세식 인본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게 되었는데, 5년간은 라틴어, 수사학, 고전작가 수업을, 3년간은 변증론을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 철학 수업을 받았다. 학교생활에서 그는 부지런했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했으며,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파리로 가서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과학, 법률학, 스콜라철학을 배우고 1616년에 졸업한다. 졸업하자 그는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로 들어가 30년 전쟁(가톨릭교회 국가와 개신교 국가 간에 벌어진 최초의 국제 전쟁)에 출정했다. 전쟁 때에도 틈만 있으면 그는 병영의 침대에 누워 조용한 사색에 잠겼는데, 천장에 붙어 있는 지도에서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 애쓰다가 처음으로 수학에서 사용되는 ‘좌표’라는 개념을 발견하기도 했다. 제대 후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1620년).

 

1627년에 그는 다시 종군한 후, 사색의 지유를 찾아 1628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있던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약 20년간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정신지도의 법칙”을 집필하여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1637년부터 그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를 사색하면서 프랑스어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을 출판했고, 1641년에 라틴어로 『성찰(Meditationes)』을, 1644년에는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판했다. 그리고 1649년에 보헤미아 왕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을 모아 그의 마지막 저술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을 출간했다. 같은 해에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Drottning Kristina(1626~1689)는 데카르트를 스톡홀름에 있는 황궁으로 초청하여 철학을 강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여왕은 일주일에 세 번 새벽 5시에 강의하도록 데카르트에게 명했기 때문에, 그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스웨덴의 찬 공기를 쏘이면서 여왕의 서재로 찾아가 철학을 강의했다. 그 때문에 늦잠을 즐기지 못한 그는 감기에 걸렸고, 1650년 2월 폐렴의 악화로 세상을 등진다.

 

데카르트가 아침 늦도록 침대에 누워서 끊임없는 사색을 통해 이루어낸 가장 뛰어난 업적은 무엇일까? 그는 철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에서 탁월함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의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순수 이성적 사유를 근간으로 해서 근대철학의 새로운 틀을 확립한 비조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철학이란 바로 전통적인 존재론과 대비되는 인식론 분야이다. 그의 인식론은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우세했던 것과는 달리 유럽 대륙에서 우세한 합리주의적 방식이라 불린다. 극단적인 경험주의는 모든 앎이 외적인 감각과 내적인 감각을 통해 얻어낸 관념이라 보기 때문에, 지식이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관점이다. 반면에 합리주의는, 수학과 기하학에서 자명한 원리가 보여주듯이, 인식론 상의 근본원리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원칙들로부터 나머지 모든 지식들을 연역적으로 추론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쯔의 철학에 계승되고 있다. 철학사에서 이들을 묶어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자라 부른다.

 

수학의 분야에서 데카르트의 빛나는 업적은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것이고, 수학적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x{displaystyle x}’를 사용하였고, 좌표계(직교 좌표계)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숫자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수학을 ‘불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기하학을 ‘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보았으나, 해석기하학을 창시함으로써 이 둘 간의 장벽이 간단하게 해결됐다. 또한 그가 창안한 직교좌표계는 이전까지 독립적으로 다루어졌던 대수론과 기하학을 융합하여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했고, 뉴턴 역학을 비롯한 근대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물리학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현대물리학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연장(extension)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감각적 특성들을 하나하나 지우게 되면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색, 무취, 무미의 어떤 것이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그가 말하는 기하학적 공간은 물질적인 원소로 ‘꽉 차 있는 공간(plenum)’이다. 그에 의하면 실제적인 사물의 크고 작은 운동변화란 기하학적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원소들이 충돌하고 이동하고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특히 자연계가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그의 기계론적 운동관은 중세의 신 중심적 자연관을 밀어내는 데에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생물학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한데 있다. 그는 다양한 동물의 머리를 해부해 봄으로써 해부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이 위치하는 곳을 찾아 연구를 계속했다. 또한 그는 가설적 방법을 통해 육체 전체를 일종의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로 간주하고, 우리가 의지에 따라 자동적으로 걷는 현상과 눈의 깜빡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을 기계적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설명방식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근대 생리학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2) 근대 합리주의 전통은 어떻게 출범하게 될까?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인 권위를 둔 데카르트는 청년기부터 끊임없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겠노라고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학문이란 다름이 아닌 새로운 철학을 일컫는다. 그것은 인식론(epistemology)으로 수학과 기하학적 방법을 모범으로 하는 단순하면서도 엄밀한 철학을 의미한다. 데카르트가 이러한 사고를 하게 된 까닭을 우리는 어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진리 탐구에 관한 한 오늘의 진리가 내일에는 거짓이 되고, 이렇게 말했다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그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신뢰할 수 없는 거짓을 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참인 확실한 앎”의 탐구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앎이야말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참된 진리에 대한 인식을 제공함에 틀림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확실성의 인식만이 진리의 반열에 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진리인식을 ‘형상形相(eidos)’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데, 형상이야말로 참된 인식을 제공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형상은 지속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어야 하고, 영원히 불변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식은 가장 확실하고 참된 진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대상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불변적인 형상을 찾아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들은 항상 가고 오는 것이어서 그 형상들이 수시로 변형이 되므로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형상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에 주어지는 경험 세계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저렇게 말할 수도 있어서 확실한 진리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상대주의 지식론을 전개한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는 명구에서 명백히 제시한 바 있다. 즉 개별적인 감각에 주어지는 경험 세계란 항시 유동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얻어내는 인식은 때로는 참이지만 때로는 거짓으로 판명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을 쉽게 기만하게 된다. 또한 개별적인 감각 세계는 엄밀하게 말해서 감각하는 주체가 각자의 주관적인 구미에 맞는 앎을 갖게 되므로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고정적인 형상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디에서 찾으면 될까 하고 고민한 끝에 언어로 표현되는 보편적인 개념槪念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이 인간’, ‘저 인간’, ‘그 인간’과 같은 경험적인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쓰이는 보편 개념인 ‘인간’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플라톤에 의하면 보편 개념인 ‘인간’은 현실적인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 즉 이데아에 대한 개념이다.

 

이데아에 대한 탐구 작업은 보편적인 개념에 대한 명확한 경계를 확정하는 정의(definition)이다. 정의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요컨대 누군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인간’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 자체’는 이데아에 실재하고, 인간에 대한 보편적 형상은 ‘이성적 동물’(이성적은 종차, 동물은 최근 유개념)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는 경험적인 감각 대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따지고 분석하여 공통적인 본성을 찾아낸 후, 이성의 직관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이러한 인식 과정을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상기想起(anamnesis)라 했다.

 


플라톤이 제안한 형이상적 탐구는 최고의 보편 개념으로부터 최하위 개념에 이르기까지 종차를 가지고 쪼개내어(diairesis) 정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방식은 수학이나 기하학학적 탐구 방식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수학이나 기하학에서는 “선제”(hypotheseis)로서 자명한 원리에 대한 ‘공리(axiom)’를 설정하고, 이를 가지고 ‘정리(definition)’를 내세운다. 공리 및 정리와 같은 근본 원리가 설정이 되면, 이로부터 수학이나 기하학의 복잡한 지식들을 연역 추리해 낼 수 있게 된다.

 

수학이나 기하학에서 근본 원리가 되는 ‘공리’와 ‘정리’들에 대한 인식은 물론 감각적인 세계에서 찾아낼 수 없는 “선천적”(apriori)인 것들이다. 반면에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얻어낸 인식은 “후천적”(posteriori)인 것들이라고 한다. 선천적인 인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순수 이성을 통해 자명한 것으로 직접(직관적으로) 얻어낸 지식이다. 그 예들로 “전체는 그 어느 부분보다 더 크다”고 하는 기하학적 원리라든가, “A는 A이면서 동시에 B일 수 없다”(즉 이 자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개일 수 없다)는 논리적인 원리와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논증적”(demonstrative)인 지식인데, 이는 오직 논리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서 결정지을 수 있는 지식, 즉 유클리드Euclid(BCE 330~275) 기하학의 정리와 같은 지식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선천적인 지식들로서 가장 확실하고 필연적인 진리들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형상에 대한 “상기설”(anamnesis)을 인식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탐구 방식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으로 전수되어 부활한다. 플라톤이 제시한 탐구 방식을 이어받아 그 단초를 마련한 합리주의가 수학을 여타의 학문의 범형範型으로 삼으려 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수학과 기하학적 탐구 방법론을 신봉하는 합리주의가 내세우는 선천적인 진리관은 그 정당성이 확립될 필요가 있다. 이에 데카르트는 자명한 진리를 인식해 낼 방법론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서 있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전통을 계승한 근대의 합리론자 데카르트는 수학이나 기하학을 모범으로 하여 엄밀하면서도 아주 단순하게 철학을 하기 시작한다. 수학이이나 기하학적 탐구방식으로 철학을 한다면, 이는 매우 단순하고 쉬운 논리의 꼬리를 더듬어 착실하게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쉬운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쉬운 철학은 전적으로 선명하고 분명한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명한 원리가 되는 선천적 진리를 탐구해 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탐구된 것을 가장 확실하고 필연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지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먼저 이렇게 새롭게 학문하는 방법으로 누구나 탐구에 착수하기 전에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한다. 그 규칙은 명증성의 규칙, 분석의 규칙, 종합의 규칙, 매거의 규칙으로 4가지인데, 이를 데카르트는 자신의 주요 저서 『방법 서설』에서 설정하고 있다.

 

내가 분명한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경우라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속단과 편견을 피하고, 그리고 조금의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명”(clara)하고 “분명”(distincta)하게 나의 정신에 나타나는 것 이외는 결코 나의 판단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 명증성의 규칙

 

내가 검토하려고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필요한 만큼의 많은 부분들로 분할하여 검토할 - 분석의 규칙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단계를 밟아 복잡한 것을 인식하도록 것이며, 자연적으로 나의 사고를 질서 있게 인도해 - 종합의 규칙

 

분석하고 종합하는 과정에서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는가를 충분하게 재검토하여 완벽하게 열거할 - 매거枚擧의 규칙

 

확실한 진리인식을 위해 이상의 규칙들을 정신이 잘 준수하면서 차근차근 진행해 간다면, 그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자명한 진리의 인식을 얻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3)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기억의 창고에 쌓아 두고 이를 활용하면서 생을 이어 가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태아 시절의 태교로부터 시작하여, 유아원과 유치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대학의 전문적인 교육과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교육을 통해 너무도 많은 지식을 짊어진 채 지식의 인도 하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렇게 많은 지식들 중에 어느 것이 거짓일까? 그리고 진정한 진리인식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탐구의 규칙들을 설정한 까닭은 많은 지식들 중에서 진정한 진리 인식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진리 인식을 가려내기 위해 그는 우선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을 진리 인식을 위한 ‘방법적 회의’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과연 이것들이 과연 참된 진리 인식인지 아니면 그릇된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 중 하나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오직 추호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장 확실하고 자명한 명증적인 인식이 있다면 이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이고, 가장 명확한 진리를 바탕으로 여타의 모든 진리를 연역 추리하겠다는 심산이 깔려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의 주요 저서 『성찰』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 왔던 지식들을 우선적으로 철저한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데카르트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지식들이란 셀 수 없이 많아서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함은 평생을 해도 끝이 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들을 쉽고 간단하게 검토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것은 수십 층으로 지어진 고층빌딩을 단숨에 허무는 방식과 같다. 그는 그 방법을, 고층빌딩이 전적으로 기초에 의존하여 존립하기 때문에, 기초가 무너지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이다. 진리 인식을 위한 방법적 회의는 바로, 많은 지식들이 결정적으로 의존해 있는 기초적인 지식을 확실하게 검토하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단번에 검토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 확실한 진리라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많은 지식 또한 진리이고, 진리가 아니라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수많은 지식 또한 진리가 아니다. 이 방법적 회의를 위해 데카르트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에 의존하는 것들을 각기 정리해 본 결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즉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감각을 통해 들어온 지식, 감각적 지식으로부터 일반화된 지식, 그리고 누구나 진리로 믿고 있는 보편적 지식이 그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만 의심하여 철저하게 검토해 보면 되는 것이다.

 

첫째, 감각적인 지식에 대한 회의 :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하는 대부분의 지식은 시각이나 청각, 촉각 등 오감五感 내지는 내부 감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얻은 것들이거나, 혹은 감각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여러 방식으로 결합하여 나온 것들이다. 이런 지식을 우리는 진리라고 믿고 있고, 또한 이를 편리한 방식으로 일상에서 유익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감각을 통해 형성된 지식에 대하여 조금만 반성해 본다면, 감각적 지식은 대체로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 즉 감각 지각의 기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서 나온 지식은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런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예로 평상시에는 달콤하던 꿀맛도 감기에 걸렸을 적에는 미감을 잃게 되어 쓰게 감각되기도 하며, 물속에 비스듬하게 꽂혀 있는 곧은 막대기는 굴절 현상 때문에 항상 휘게 보임을 안다. 또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그대로 정확하게 감각되지 않고 달리 보인다. 더욱이 세밀한 관찰을 통하여 우리가 사물들을 아무리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지각뿐만 아니라 이들의 복합들로 이뤄진 지식들은 모두 확실하지 않다.

 

둘째로 일반화된 감각적 지식에 대한 회의 :

우리가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이 손’ ‘이 머리’ 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일반화된 지식, 즉 ‘이 손’이 아닌 ‘손’ ‘이 머리’가 아닌 ‘머리’ 등의 일반적인 지식은 어떠한가? 어떤 화가가 “사튀로스Satyros”(반은 인간의 머리이고 반은 양으로 이루어진 숲의 신)를 그릴 때, 우선 그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일반적인 ‘머리’와 ‘입’이 어떻게 생겼고, 개별적인 양들을 감각함으로써 양의 일반적인 ‘발’ ‘꼬리’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그가 이런 것들을 모른다면 그는 신화에 나오는 가상적인 사튀로스를 그려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감각하는 부분들을 가지고 상상을 통해 쪼개고 결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개별적인 감각 물들의 결합으로부터 이뤄진 상상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상상하여 그려낼 수 있는 ‘외눈박이 귀신’, ‘도깨비’, ‘인어 공주’, ‘스핑크스’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유형의 것들이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확실한 진리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이는 얼마나 허황된 것이겠는가?

 

셋째로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회의 :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은 어떤가? 보편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물체의 연장, 형태, 수, 공간, 시간 등을 말하거나, “1 + 2 = 3”과 같은 수학적인 지식, 또는 누구나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자기 자신의 실재”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확실한 진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세상 어딘가에 전능하고 사악한 그런 악령惡靈이 있고, 그가 사람들의 정신을 꿈의 환상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치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홰나무 밑에서 잠들어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자신은 나비가 되어 우주를 훨훨 날아다녔는데, 꿈을 깬 후 내가 지금의 나인지 꿈속의 나비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꿈속에서 사는 환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도 원래 꿈의 환상인데 사악한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한다던가, ‘1 + 2’는 원래 ‘3’이 아니고 ‘5’ 인데 사악한 악령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1 + 2’를 계산할 때 항상 ‘3’ 이라고 믿도록 배후에서 정신을 조작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근거에서 본다면 우리가 실제로 누구나 다 인정하는, 그래서 확실한 진리라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조차도 의심할 수 없는 명증적인 진리로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진리 탐구에 대한 방법적 회의는 극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명증적인 진리 인식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진술은 과연 없는 것인가? 다행히도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 위에서 바로 언급한 사악한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그가 나를 항상 속이기 때문에 내가 기만을 당하고 있고, 항상 그릇된 것에로 이끌리고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나를 속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존재조차도 꿈의 환상으로 속이고 있다 할지라도, 그 속임이 참인 것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속임을 당하는 나의 존재가 참인 것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나의 생각이 전부 속임을 당하기 때문에 그릇된 것일지라도 속임을 당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한, 나는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확고하게 주장한다. 이 진술만은 필연적인 진리 인식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최초로 진리 인식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내가 사유하는 한에서 존재한다는 진술은 자명한 명증적 진리이고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 진리가 되는 셈이다. 즉 사악한 악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정신을 조작하여 속일지라도 속임을 당하는 사유 주체만큼은 진정으로 실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 실체”이다.

 

4) 사유실체를 보증하는 무한실체로서의 신神

 

夫三神一體之道(부삼신일체지도)는 在大圓一之義(재대원일지의)하니,

造化之神(조화지신)은 降爲我性(강위아성)하고

敎化之神(교화지신)은 降爲我命(강위아명)하고

治化之神(치화지신)은 降爲我精(강위아정)하나니,

故(고)로 惟人(유인)이

爲最貴最尊於萬物者也(위최귀최존어만물자야)라.

 

(무릇 삼신일체의 도는 ‘무한히 크고 원융무애하며 하나 되는 정신’에 있으니, 조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성품이 되고, 교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목숨이 되며, 치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정기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된다.)

 

夫性者(부성자)는 神之根也(신지근야)라.

神本於性(신본어성)이나 而性未是神也(이성미시신야)오

氣之炯炯不昧者(기지형형불매자)가 乃眞性也(내진성야)라.

 

(무릇 성이란 신의 뿌리다. 신은 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성이 곧 신인 것은 아니다. 기가 환히 빛나 어둡지 않은 것이 곧 참된 성이다.)

 

是以(시이)로 神不離氣(신불리기)하고 氣不離神(기불리신)하나니

吾身之神(오신지신)이 與氣(여기)로 合而後(합이후)에

吾身之性與命(오신지성여명)을 可見矣(가견의)오.

 

(그러므로 신은 기를 떠날 수 없고, 기 또한 신을 떠날 수 없으니, 내 몸 속의 신이 기와 결합한 후에야 내 몸 속의 본래 성품과 나의 목숨을 볼 수 있게 된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 서檀君世紀 序」) -

 

나의 주체가 사유하는 한에서 꿈의 환상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실체 관념은 확실한 진리 인식이다. 이제 사유 실체인 자신이 사유하여 획득하는 다른 관념이 참된 인식인가 아니면 거짓된 것인가를 검토해 가면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어떤 사악한 악령이 있어서 나를 속여 나의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이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나의 사유가 모두 꿈의 환상이라면, 사유를 통해 더 이상의 탐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그러한 사악한 악령 따위란 없다는 것, 설혹 있다 하더라도 나의 사유에 대한 영향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 탐구를 수행할 때 사유를 기만하는 어떤 연원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존재가 사유를 통해 인식을 획득하는 우리의 능력에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영향력을 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사유를 통해 우리가 수행하는 탐구가 진리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사악한 악령의 영향력을 차단시키고, 사악한 악령에 의해 우리가 기만을 절대로 당하지 않도록 하는, 어떤 전능全能하고 전지全知하며 전선全善한 존재가 있음을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증명하는 것이다.

 

탐구하는 나의 올바른 사유가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임을 입증해 주는 절대적으로 선善한 존재(신)에 대한 증명은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사실을 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처럼 오직 순수한 이성만을 사용하여 명증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증명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6단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진행해 간다. :

 

(1)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관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하다. 이들 관념을 분류하여 묶어 보면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감각적 경험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와 형성된 “외래 관념”, 내 자신이 이런 관념들을 근거로 해서 마음대로 상상하여 만든 “인위적 관념”, 그리고 외부의 감각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었던 “본유 관념本有 觀念”(innata idea)이 그것이다.

 

“외래 관념”은 우리가 통상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부터 형성된 경험적인 관념들의 총체를 지칭한다. “인위적 관념”은 감각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조작한 관념들이다. 인어(머리와 팔다리는 사람이고 몸과 다리는 물고기로 이루어진 형상)나 스핑크스(머리는 사람, 팔은 날개, 몸과 다리는 동물로 이루어진 형상)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본유 관념”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 논리학의 ‘동일률’이나 “전체는 항상 그 부분보다 크다”는 기하학적 관념, 또는 ‘크다’, ‘같다’와 같은 비교 관념들이다.

 

세 종류의 관념들 중 본유 관념에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이 있다. 데카르트는 분명히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에서 ‘완전한 인격자’는 전적으로 선한 존재로서의 신을 말한다. 이제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을 논증의 대상으로 삼아보자.

 

(2) 결과로서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없는 것, 즉 무無에서 나올 수 없다. 또한 결과로서 갖고 있는 모든 관념에는 어떤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결과로서 확실히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도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은 결과보다도 더 크고,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원리이다. 이 원리로서의 원인을 데카르트는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명증적인 관념이라 부른다.

 

(3) 그런데 결과로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일까? 이 원인은 부모로부터 나온 것일까? 아니면 자연 또는 유한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그러나 모두 아니다.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오직 ‘완전한 존재’, 즉 절대적인 신神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과로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질적인 의미에서 적어도 결과와 같은 것이어야 하거나 결과보다 더 커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래서 결과가 그 원인보다 크다면, 우리가 어떻게 결과로서의 그런 관념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분명하고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이며, (2)의 단계에서 언급한 원리와 같이 선명하고 분명하며 자명한 원리이다.

 

(4)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으로서의 ‘완전한 존재’는 어떠한 한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추리는 (3)의 단계에서 주장된 자명한 원리에 의해 가능하다. 만일 ‘완전한 인격자’라는 관념이 완전한 인격자 자신 이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이는 (3)의 단계에서 설명된 “원인이 더 크다”는 원리에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성이라는 관념의 원인은 그 관념 자체와 마찬가지로 완전해야 하며, 완전하게 실재해야 한다. 이러한 존재는 우리의 정신을 넘어서 실재하는 자이고, 또한 우리의 정신에 그런 완전성의 관념을 넣어 줄(산출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격자’는 관념에서뿐만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한다.

 

(5)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는 사유실체를 있게 하는 유일한 가능적 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생명의 힘은 바로 창조의 힘과 맞먹는 것이고, 다른 유한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증명해 보였듯이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물론 나는 감각적인 것들을 수용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사유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의 정신은, ‘완전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물질들과는 달리 어떤 유한성을 지닌 자에 의해 창조됐을 리가 없다. 즉 ‘완전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나의 정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지하고 전능한 능력을 가졌으며 또한 완전한 정신을 가진 자(신神)가 실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자는 완전한 존재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모는 나의 신체가 생겨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원인을 제공했을런지는 모르지만, 나의 지속적인 생명력으로서의 나의 정신을 있게 한 원인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 속에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완전한 존재에 의해서만 존립 가능한 것이다.

 

(6) 완전한 존재가 나를 창조할 적에 여러 가지 능력들을 함께 주었는데, 이들 중 하나는 내가 감각적 지각을 믿게 하는 강한 경향성이다. 완전한 인격자는 전지하고 전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항상 기만을 당함으로써 빚어지는 신뢰할 수 없는 그런 능력을 부여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또한 나를 항상 기만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려는 사악한 악령이 있다 해도 전적으로 선한 완전한 인격자는 내가 악령의 속임수에 끌려가도록 창조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로 내가 만일 실수를 범한다면, 나의 잘못이지 결코 ‘완전한 인격자’ 즉 절대적인 신의 잘못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인격자가 부여한 순수한 이성을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결코 실수를 범할 리 없을 것이며,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인식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5) 연역 추리의 빛과 그림자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주의적 방식의 진리 탐구는, 인식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상식이나 감각적 경험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수학이나 기하학의 진리 탐구와 같은 방식으로 연역적 추리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정신(사유) 실체를 찾아냈다. 사유 실체는 의심할 여지가 추호도 없는 명증적인 것이었다. 이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진리들을 연쇄적으로 연역하여 증명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첫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증적인 사유 실체를 기반으로 하여 참이라고 여겨지는 다른 것, 즉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런 관념의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이 타당성을 갖는 근거는 바로 모든 결과란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로부터 각 단계의 논의는 사슬의 고리와 같이 타당한 추리의 규칙에 의거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이끌어 낸 의심할 수 없는 명증적 진리는 보다 진전된 어떤 명제를 끌어내기 위한 논리적인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추리가 만일 규칙을 전혀 어기지 않고 타당하게 진전되고, 추리의 진행 과정에 거짓된 진술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확실성의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진리 탐구에 관한 한 확실성의 인식을 위해서는 감각적 관찰로부터 들어오는 경험적인 지각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관점이 그렇듯이 합리주의적 인식론은 명확한 증명을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불확실한 것들을 마땅히 배제하고 있고, 경험적인 지각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라 볼 수 있다.

 

셋째, 다른 합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설을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의 학통을 이어받은 근대 합리주의의 인식 방법에 의거해 보면,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이라든가 ‘자아 실체’ 관념, 수학과 기하학적 진리에 대한 관념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 창조주에 의해 사람의 정신 속에 ‘선천적’으로 이미 심어진 상태이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관련된 개념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들인데, 이러한 관념들은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유 관념들은 어떻게 하면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이러한 관념들은 원래부터 정신 속에 갖고 태어난 것들이기 때문에, 흩어짐이 없는 일심의 경계(사유 실체 자체)에서 정신 안에 있는 관념들을 온전히 “상기想起(anamnesis)”하기만 하면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주의 진리 인식에 문제가 전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사유 실체가 명증적인 ‘제1원리’로 확립되고, 이로부터 ‘생각하는 자아’가 이성의 규칙을 잘 순수順守하여 사유의 연역적 추리의 사슬을 밟아 탐구해 나아가면 필연적인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사악한 악령이 속일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유를 통한 연역이 사악한 정신에 의해 기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전지하고 전능한 선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논증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증에 결정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

 

첫째, 데카르트의 논의가 순환론循環論에 빠졌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 있다. 순환 논법이란 A임을 증명하기 위해 B를 가지고 논의하고, B를 증명하기 위해 A를 가지고 논의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성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다’와 같이 말하는 것을 순환 논법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순환 논증 과정은 이렇다 : 그는 ‘사유하는 자아 실체’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필연적이고 명증적인 진리라고 확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명증적 진리임을 보증하기 위해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는 사유하는 자아 실체의 정신에 선험적으로 있는 본유 관념, 즉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이 명증적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는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전에 ‘완전한 인격자’가 ‘생각하는 자아의 추리’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주장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그는 증명하려는 진술을 확실성 인식의 기초로 사용했기 때문에, “순환 논법”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둘째,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연역 추리의 과정에서 그는 관념의 “원인이 최소한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원인’이 어떤 근거에서 ‘결과’보다 커야만 하는지, 또한 이 원리가 어떤 근거에서 확실한 원리일 수 있는지가 불명확하다. 원인이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것 또한 사악한 정신의 조작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고, 나아가 이 원리를 사용하여 증명하는 여타의 진술들이 진리임을 어떻게 보증받을 수 있을지 또한 상당히 의심스럽게 된다. 따라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사용된 원리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밝힌 후에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 원리의 진술이 선명하고 분명한 논증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를 통하여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가 증명되는 각 단계의 인과적 역할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셋째, 정신의 외부로부터 들어온 감각적인 관념들과 정신의 내부에서 생겨난 인위적인 관념들 외에 정신 안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이 있다는 전제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들 본유 관념은 ‘자아’라는 실체 관념이나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 ‘크다와 작다’와 같은 비교 관념, ‘인과 법칙因果法則’이나 ‘추론 법칙’ 등인데, 이런 본유 관념설이 전적으로 타당하다면, 한 살 박이 어린 애도 이런 본유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 한 살 박이 어린 애는 말도 못하는데, 우리는 어린애가 본유 관념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설사 어린애가 이해하고 있으니까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데카르트는 어린애가 본유 관념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는 주장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지적인 성숙이 있을 때까지 아마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유 관념이 이런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더욱 더 불투명해진다. 왜냐하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유 관념이 평생 동안 현실적으로 알지 못하고 마냥 ‘잠재적’으로만 가지는 것만으로 생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본유 관념이 정신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는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을 것이다.

 

6)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의 선구자

데카르트의 기본 사상은 실체實體(substantia)의 철학이다. 그가 말하는 실체는 존재성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며,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완전한 신神만이 독립적으로 자존하며, 자기원인自己原因(causa sui)으로서의 실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유한한 존재, 즉 정신(사유)과 사물(연장)도 실체라고 주장한다. 정신과 사물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고, 비록 신에 의존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실체는 무한 실체(substantia infinita)로서의 신과 유한 실체(substantia finita)로서의 정신 실체와 사물 실체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철학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이원론二元論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즉 자연”이라는 사상과 라이프니쯔의 “단자 형이상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 실체란 무엇인가? 정신은 유한한 존재로서 사유하는 실체를 말한다. 정신의 본성은 완전히 비물질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다. 정신 실체의 본성은 사유이고, 그 속성(attributum)은 의식 작용(cogitans)이다. 만일 정신의 본성인 사유가 전혀 없다면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정신에서 의식 작용이 일어날 때, 감정, 욕구, 의지 등이 쏟아져 나온다. 즉 “나는 생각한다(cogito)”와 함께 주어지는 사유 작용은 결국 사유된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의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정신 실체의 부차적인 성질들, 즉 사유의 양태(modus)가 되는 셈이다.

 

사물 실체란 무엇인가? 사물도 유한한 존재로서 연장되어 있는 실체이다. 사물의 본성은 완전히 물질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사물 실체의 본질은 연장(extensa, 퍼져 있음)이고, 그 속성은 크기, 모양, 넓이이다. 만일 사물의 본성인 연장이 없다면, 사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연장 실체는 사유 실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신이 사유 활동으로 드러나듯이, 사물은 연장으로 드러난다. 사물은 항상 모양에 의해 한계가 지어지고 장소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사물들 간에 서로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채워진 공간(plenum)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본질적인 속성으로 길이, 넓이, 부피라는 성질을 필연적으로 가진다. 그리고 사물의 위치, 상태, 운동 등은 사물 실체의 양태들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들과 양태들을 통하여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물체의 운동은 데카르트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유 실체와 사물 실체가 완전히 다르듯이, 영혼과 물체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명의 원리인 영혼은 데카르트의 사유에서 볼 때 물체의 운동 원리가 될 수 없게 된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물체의 운동이 기계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치게 되는데, 기계적인 운동은 마치 누군가가 벽시계에 태엽을 감아 놓으면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면 우주 자연의 물질적인 세계가 기계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운동의 최초 원인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무한 실체로서의 신神을 말한다. 태초에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 우주 자연의 물질 세계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도록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가 내놓은 자동적인 기계론은 고대 원자론자들이 제시한 원자들의 필연적인 운동 방식과 다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텅 빈(vacum) 공간이란 없고, 오직 물질로 채워진 공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채워진 공간에서 물체들은 서로 접촉해서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이것들의 운동은 서로의 위치 이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로 채워진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가 헤엄쳐서 이동하는 방식과 같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 자연에는 텅 빈 공간이 없이 물질적인 것과 에테르(aether)로 꽉 차 있다. 여기에서 물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위치 이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수학적인 점과 그 경계선이 옮겨갈 뿐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운동은 사물의 활동이 아니라, 오직 수학적인 함수가 우주 전체에 그려져 있고, 언제나 위치 이동에 의한 새로운 함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계선으로서의 좌표계의 이동이 바로 운동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운동은 기하학적인 기계론이지 원자론자들이 주장하는 질량質量의 기계론이 아니다. 기하학적인 기계론에서 운동은 공간을 점유한 물체의 좌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짐으로써 자동적으로 서로서로의 영향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물들과 식물들 모두의 운동은 좌표 상에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들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정신과 사물이라는 완전히 다른 성질들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에서 발생한다. 특히 인간의 경우에서 비물질적인 정신(心)과 물질적인 신체(身)는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신체에 강한 자극을 주면 정신에서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정신이 목적하는 의지가 있게 되면 의지에 따라 신체가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다른 ‘마음과 신체’ 간의 상호 관계 작용의 문제를 데카르트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정신과 신체가 상호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연결하는 관계의 끈이 필수적이다. 관계의 끈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인 특성을 가져야 한다. 해부학에 능통했던 데카르트는 이것이 인간 두뇌頭腦 안에 있는데, “송과선(anarium)”이라고 불렀다.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송과선을 통해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전달될 수 있고, 정신의 의지에 따라 신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신경계神經系로 전달되어 송과선을 통해 정신이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한 “심신 상호작용설”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정신 실체와 사물 실체, 즉 영혼과 신체라는 이원론二元論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인간의 경우에서 영혼과 신체라는 대립된 두 실체 때문에, 합리적인 체계를 구축하려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후대에 스피노자Spinoza가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사유와 연장이 진정한 의미에서 실체가 아니라 무한 실체인 신의 본질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신과 신체가 조화 통일된 동일철학同一哲學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심신이원론으로 말미암아 유물론과 기계론이 짝이 되어 사물 실체만을 인정하거나, 관념론과 심리주의가 짝이 되어 정신 실체만을 인정하는 철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20. 02:30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찌민胡志明


 

 


프로필

호찌민(Ho Chi Minh, 胡志明)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阮生恭)이다. 1890년 프랑스 치하의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사회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1941년부터 30여 년간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부터 1969년까지 북베트남 대통령을 지냈다. 열강들의 손에 의해 갈라진 조국 베트남의 통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하였으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69년 사망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로 꼽힌다.

 

출생 1890년 5월 19일

사망 1969년 9월 3일

국적 베트남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베트남 게친 주州

 


대표명언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식민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혁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강물은 둘로 나눌 수 없다. (베트남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

 

어려운 것이란 없다. 산을 파고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

사회를 개조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개조해야 한다. 자신의 속마음을 엄숙하게 검열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 우선 자신을 갈고닦아야 그 다음에 조직 내부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

 

사랑은 보물과 같다. 조국을 사랑한다거나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이는 각자가 소유한 귀중한 보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보물들을 꼭꼭 숨기기를 좋아한다. 집 안에 금고를 두고 지하 비밀창고를 만들고 이를 숨기려고만 한다. 이를 끄집어내어 자랑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You will kill 10 of our men, and we will kill one of yours,

and in the end it will be you who tires of it.”

(우리가 당신네 한 사람을 죽이는 동안 당신들은 열 사람을 죽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땅에서 먼저 없어지는 것은 당신들이 될 거요.)

-1946년 9월, 프랑스 장 생트니 소령을 만난 호치민

 

호찌민의 유언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19. 10:38




 


아시아 최대갑부 리자청李嘉誠

 


 

프로필

리자청(리카싱 Li Ka Shing, 李嘉誠)은 중국 광둥 성에서 태어난 기업인으로, 중국 최대의 기업, 청쿵그룹[長江實業(集團)有限公司, Cheung Kong (Holdings) Limited]의 창시자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며, 중국인 중 세계 최대의 부자 중 한 사람이다.

 


2011년 《포브스Forbes》 선정 세계의 억만장자 11위, 2007년 《포춘Fortune》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 12위 등에 선정되었다. 현재 허치슨왐포아, 창장개발, 에어캐나다, 홍콩전력, 홍콩텔레콤, 허스키오일, 파나마운하·부산항·광양항의 컨테이너 터미널 총 460여 개에 달하는 기업에 관계하고 있다.

 

출생 1928년 7월 29일, 중국

소속 청쿵그룹(회장)

경력 청쿵그룹 회장

1981 중국 산터우대학교 설립

1980 리카싱 재단 설립

1945 청쿵 플라스틱 공장 설립

 



명언 모음

운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일이 천시, 지리, 인화에 부합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경솔하게 일을 하다가 실패한 후, 운명을 탓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품덕과 재능을 알고 합리적으로 등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각각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곳이 있다. 능력을 살펴보고 사람을 쓴다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인생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생활의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성공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나는 인생의 힘든 시기에 제일 많이 단련을 받았다. 특별히 판촉사원으로 근무할 때, 적지 않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경험과 교훈은 지금 10억, 20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초인이라 부르지만, 사실 나는 타고난 경영자가 아니다. 많은 좌절과 역경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경영의 비결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재는 아무리 취하여도 다함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그들도 당신에게 좋게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모두 다 당신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는 한 발짝 더 앞서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는 올림픽 경기에서 1, 2, 3등이 결정 나는 것이 한 발짝의 차이인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조심스럽고 면밀하게 연구해야 한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용기를 가지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

 

사업의 성공은 절대적인 공식은 없다. 그러나 일련의 원칙을 따른다면 성공 가능성을 상당히 높일 수 있다.

 

옛 친구든 새 친구든 친구를 사귈 때는 성실을 의지하고 호언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했다면 행하여야 하고, 공포탄을 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총명하고 재빠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를 믿고 따르며 나와 왕래하기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100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는 200에 버금가는 힘으로 공격했고 아무렇게나 도박을 하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인류에 공헌한 사람들을 나는 존경하며, 그들에 관한 책 읽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의료, 정치, 교육, 사회복지 등 분야를 막론하고 전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보면 탄복해 마지않는다.

 

더 많이 양보할수록 더 많이 돌아온다.

 

나만 돈을 벌고 상대방은 빈손인 사업이란 절대 불가능하다.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한 푼이라도 더 차치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에게 이익이 없다면 내게 돌아올 이익도 없다. 다른 사람이 먼저 이익을 얻도록 양보해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나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촌철활인

도덕경에는 ‘얻고자 한다면 먼저 내놓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먼저 다른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야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 리차청 회장은 아들에게 “다른 사람과 동업할 때 상대가 이익의 7할이나 8할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 주어라. 우리는 2~3할만 가져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14. 17:33






대화 중 여러분의 뇌의 모습입니다

by Uri Hasson

 

 

 


by Uri Hasson 우리 하슨 신경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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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천지의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니, 그 도는 천지의 업을 이루는 것으로 원융무애하고, 그 해야 할 일은 서로 협력하여 온 세계가 하나 되게 함이니라.' 「염표문」 中

 

연결된 우리 모두의 합이 우리의 부분의 합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소통을 통해 하나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소통은 어떤 매커니즘을 가지고 진행되는 걸까요?

 

호기심 많은 과학자인 우리 하슨(Uri Hasson)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섯 명의 두뇌를 스캔해봤습니다.

 

청중들은 재미있는 대목에서 매우 유사한 모양의 변화 패턴을 보이는데요, 이것을 ‘신경동조현상’ 이라고 합니다. 

 

또한 청자들의 뇌 패턴은 말하는 화자의 뇌 패턴과도 동일했습니다.

 

하슨은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이 될 때 뇌 사이의 유사한 정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아주 소중한 영감을 하나를 얻게 되는데요,

 

'소통을 위해서는 공통된 기반, 이해, 공동의 신념체계를 구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소통이 공통점에 기반한다는 얘깁니다. 반대로 공통점을 잃으면 소통은실패하고 말겠죠. 그래서 하슨은  '그러니까 소통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자꾸 연결하세요. 자꾸 아이디어를 퍼뜨리세요!'  라고 강조합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13. 17:23







강연을 시작하며: 나는 왜 요기가 되었나

Gunamuktananda




 

고맙습니다. 메리가 제 이름을 부를 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도 그보다 더 잘 발음할 수 없었을 겁니다. (웃음)

 

약 25년 전, 저는 의과대학 졸업학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꽤 오랫동안 제 직업 선택에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친절한 작은 할머니의 피를 뽑으러 갔는데 정맥 대신에 동맥을 건드렸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방에 피가 뿜어 나올 때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맞아. 넌 확실히 직업을 잘못 찾았어.” (웃음) 따라서 관계된 모든 것들의 이익을 위해, 저는 학교를 중퇴하고 대신 요기가 되었습니다. (웃음) (박수)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여러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요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개념, 즉 내면의 우주, 내면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와 외부의 우주, 우리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우주를 지구의 크기라고 하면 우리 지구는 핀 머리 크기의 약 10억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런 핀의 10억분의 1 크기란 말이죠.

 

저는 지금 핀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제 소품이에요. (웃음) 자, 보시죠. 같은 핀입니다. 실제로는 같은 핀입니다. 이런 핀들 중 하나의 10억분의 1크기인 거죠 우주가 지구 크기라면.

 

그런데 핀 머리의 십억 분의 일 크기는 모래 입자의 약 백만 분의 1 정도 또는 원자의 평균 크기 정도입니다. 둘 중 선택하세요.

 

어쨌든, 아이디어는 그것이 우주의 크기에 비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작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크기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되나요? 저는 이것이 우주의 크기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복잡한 우주는 어떤 의도도 없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전화기와 노트북 컴퓨터가 설계 또는 제작한 사람 없이 갑자기 생겼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물학자 루퍼트 쉘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적을 공짜로 주면 우리가 그 나머지를 설명해 주겠다.’라는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웃음) “그 하나의 기적이란 무로부터 한 순간에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수천 년 동안 요가 과학이 말해온 결론,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어 갈 우주에 대한 설명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과 의도는 우리가 보통 마음과 감각으로 느끼는 물질적 실재보다 더 깊은 실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실재는 의식(consciousness)입니다.  모든 사람과 만물에 내재된 보편적인 행복한 인식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여러분 마음의 본질이듯이, 우주 의식은 전체 우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만물 안에 존재하며 만물은 그 안에 존재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은 의식의 일부이며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우주를 물질주의적으로 보는 세계관 vs.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세계관

 

그러나, 그 이유를 지금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현대 세계관에서는 더 고차원적인 의식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현대과학은 현실을 매우 기계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물질, 공간이 모두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요? 

만약 모든 면에서 의식이 지금 우리 현실의 구성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고차원적 현실이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매우 심각한 단점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아주 실질적인 이점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주를 임의적이고, 기계적이며, 감각이 없다고 보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소외되고, 외롭고, 두려워하고, 우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문제들 속에서 그것을 너무 자주 봅니다. 물질주의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낙관론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행복한 의식을 가진 우주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세상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랑받고, 희망적이고, 행복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스승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께서는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고 무력하지 않다. 별을 인도하는 힘이 당신을 인도한다.”

 

그래서 저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세계관보다는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서 성취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세계관을 인정하려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다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관의 이점은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들 중 어느 것 보다도 유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의 본질은 의식이라는 전제는 우주의 본질이 물질이라는 전제와 마찬가지로 유효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는 감지되고 다른 하나는 감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과학적 측정을 통해 물질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의식은 내면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우리 자신 안에서 찾아야 만합니다.

 

나살 우템이라고 불리는 수피 신비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며칠 동안 터키에 있는 그의 고향에 실제로 머물렀죠. 그의 기괴하고 유머러스한 가르침의 방식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그가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내 집 열쇠를 찾고 있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어디에서 그것을 잃어버렸나요?”그녀가 물었습니다. “집안 어딘가에서요.” 행인은 당연히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왜 밖에서 찾고 있나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집안이 어둡기 때문이에요.” (웃음)

 

우리는 올바른 것을 올바른 장소에서 찾아야합니다. 비록 거기서 그것을 찾기가 어렵더라도 말이죠. 겉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속은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식은 내면에 있으므로 내면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머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게 함정입니다.

 

의식은 우리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구를 생각해보십시오. 방의 전구는 주위에 빛을 비출 수 있지만 그것을 빛나게 하는 힘, 전기에는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의식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고의 정상적인 기능과 말을, 심지어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핵심은 생각은커녕 말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데카르트의 이 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요가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멈추었을 때 나는 진실로 존재한다.” (웃음)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거나 과학적으로 무언가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는 생각으로 파헤쳐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과학으로는 결코 인간이란 무엇인지의 핵심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고차원적 실재로 규정한 과학자들

 

지금쯤이면, 여러분은 제 말씀이 조금 실체가 없고 뉴에이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웃음)

 

그래서 의식을 더 고차원적 실재일 것이라고 인정한 과학자들에 대한 간단한 예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합니다.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끝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웃음)

 

양자이론의 아버지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의식이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물질을 의식의 파생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가정한다.” 이것은 양자론의 선구자가 한 말입니다.

 

얼마 후,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James Jean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식의 흐름은 비물질적 실재로 향하고 있다. 우주는 위대한 기계보다는 위대한 생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설득력을 드리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웃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감정은 신비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모든 과학의 근원이다. 

 

무한의 우주 안에서 드러나는 최고 이성의 힘을 지닌 존재에 대한 깊은 감정적 확신이 내가 신에 대하여 지닌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더 높은 의식을 실제로 경험 한 현대 과학자의 예를 들어주고 싶습니다.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 박사는 많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뇌가 의식을 창출한다고 믿어온 신경과학자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매우 드문 뇌 감염에 걸려서 일주일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시 그는 임상적으로 뇌사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조되고 깨우친 의식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7일간의 혼수상태 동안 나는 완전히 의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평화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놀라운 세계를 여행했다. 나는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엄청난 경험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박사는 이제 뇌 과학계가 “유치원에서 졸업”하고 뇌가 현실을 창출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명상: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체험을 통해 고차원적 의식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과 저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개인적으로 의식을 확인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명상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상은 의식이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경험에 의해 구체화되는 직관적인 과학입니다. 명상을 통해, 지금 이 방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나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실재하는 고차원적 의식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저는 방 전체가 인식과 행복으로 진동하는 의식의 장으로 가득 차있다고 느꼈던 특별히 빛나는 명상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하고 실감났습니다. 당시 그것은 마치 칼로 자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당시에는 너무나 현실과 같아서 저는 아직도 그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상을 통해 우리를 궁극적으로 의식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그런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금 명상을 통해 더 높은 의식을 경험해보면 어떨까요? 함께 해 볼까요?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늘 여러분이 명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동안 여러분이 눈을 감아 주시길 권합니다.

 

숨 쉬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세요. 물론 긴 하루였을 테지만요.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중심을 느껴보십시오. (음악 재생 시작)

 

이제 여러분이 완전히 평화롭게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가득한 평화와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주위에 가득한 무한한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그 무한한 행복에 합류하는 것을 느껴 보세요. 여러분의 인식 감각이 여러분을 둘러싼 무한한 인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의식이 주변의 무한한 의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과 하나 되는 느낌. 여러분이 그것과 하나라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이 무한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몇 초간 계속하십시오.

 

좀 더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셨나요? 그런가요? 아닌가요? (청중: 네.)

 

어쨌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이 전체 우주의 의식과 하나라는 가능성에 대해 지금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의식이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을요. 또한 그것은 진짜이며, 정말로 노력한다면 느낄 수 있다는 것을요.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뿐만 아니라 여러분 존재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현실이 더 보편적인 현실임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서 더 큰 의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감, 존재감을 더 확장할수록 우리는 모든 존재에 더 큰 연결감을 느낍니다.

 

더 행복해지고, 덜 두려워하고 덜 외롭습니다. 만물이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가 만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내면을 향한 탐구는 모든 사람들, 동물, 식물 ... 모두의 포용을 용이하게 합니다. 행성, 다른 행성의 사람, 동물 및 식물도요. 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주 전체입니다.

 

저는 의사소통 및 운송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이 더 좁아지는 것처럼 명상 기술의 발전으로 우주도 더 좁아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은 개인의 존재감각, 즉 그의 가슴이 원하는 바에 머문다.”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

 

고맙습니다. (박수 갈채)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8. 19. 07:43




Is this real? 가상현실이 다가온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Virtual Reality




영화 아이언맨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네오Neo, 너무나 현실 같은 꿈을 꾸어본 적이 있나?
만약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럴 경우 꿈 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어떻게 구분하겠나?" 



1999 년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영화 매트릭스(Matrix)의 명대사다. 인공지능 AI가 만든 가상현실 프로그램인 매트릭스, 인간들은 매트릭스의 프로그램에 따라 평생 1999년의 가상현실을 살아간다. 영화에선 가상현실 속에서 진정한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이 많지 않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공간인 꿈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곳이 현실의 세계인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그 세계에서 보거나 듣기도 하고 물건을 만지기도 하며 걸어 다니거나 공중을 날아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은 너무도 생생하다.




1989년 ‘가상현실’이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재론 래니어 (Jaron Lanier, 1960~ )


최 근 영화나 꿈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바로 가상현실(VR)을 통해서다. 가상현실이란 꿈과 같은 가상의 세계를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실제와 유사하지만 실제가 아닌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상황 또는 그 기술 자체를 의미한다. 결국 꿈과 가상현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실제 세계가 아닌 가상 세계가 마치 현실 상황인 것처럼 혼동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가상현실은 우리가 기존의 TV, 컴퓨터 모니터 등을 통해 봤던 2차원의 평면화면이 아닌 3차원의 입체적 경험을 제공한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곳마다 장면이 달라져서 마치 실제 그곳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상현실기기를 가지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하와이의 해변을 거닐고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에 가 있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크리스 밀크 TED강연


가상현실 기업인 벌스Vres의 설집자인 크리스 밀크Chirs Milk는 VR이 ‘궁극의 감정이입 도구(Ultimate Empathy Machine)’라고 표현한다.






가상현실영화 <시드라 위의 구름>



이 가상현실 영화는 시리아 난민캠프의 12살 소녀이야기를 촬영한 것이다. 소녀와 가족은 시리아를 도망쳐 나와 사막을 통과해 요르단으로 갔고 1년 반 동안 캠프에 살고 있다. 밀크는 TED강연에서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 러분이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을 때 여러분은 모든 방향, 360도 방향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겁니다. 그 소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방에 앉아 있는 경험은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고, 창문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거기에 앉아 있는 경험입니다. 아래를 보면 그녀가 앉아 있는 땅에 여러분이 같이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여러분은 그녀의 인간성을 더 깊게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녀에게 더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그는 VR이 ‘궁극의 감정이입 도구(Ultimate Empathy Machine)’라고 표현하면서 더 많은 사용자들이 더욱 깊은 공감의 세계로 빠져들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2월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 2016 참가자들이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가 바로 옆을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가상현실 체험에 빠져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막한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 2016에서 ‘기어VR’을 시연한 모습 (삼성 뉴스룸 플리커 채널)


기어VR체험 (오큘러스vr홈페이지)


지난 2월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MWC LG전자 부스를 찾은 관람객들이 ‘LG 360 VR’을 통해 가상현실 화면을 보고 있다. (LG전자 플리커 채널)


가상현실 체험장면







현 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상현실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 등장하게 된 시기는 1989년에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었다. 인공 현실(Artificial Reality)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용어는 이미 1970년대 중반에 Videoplace개념을 창안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크루거(Myron Krueger)에 의해 탄생되었으며, 그 후에 미국 VPL Research 사의 사장이었던 재론 레니어(Jaron Lanier)에 의해 1989년에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용어로 다시 표현되었다.




가상현실 기기의 원리 (조선일보, 삼성전자 제공)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9. 07:30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





프로필
생몰 : 1922년 5월 8일(대구)~2009년 2월 16일(향년 86세) 
직업 : 성직자 
학력 : 뮌스터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수상 : 2002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대십자훈장(칠레공화국) 
2001 대십자공로훈장(독일연방공화국) 
2000 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0 제13회 심산상 
1970 국민훈장 무궁화장 

경력 : 2003.1 생명21운동 홍보대사 
2001.5 사이언스 북 스타트운동 상임대표 
1997.11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1981.5~1987.11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1975 이탈리아 산 펠리체 명의 추기경 
1970.10~1975.2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1969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
1968 대주교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 
1964 주간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 

김수환金壽煥(1922년 7월 2일~2009년 2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성직자이자 사회운동가이다.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아호는 옹기이며 기독교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천주교에 귀의하여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 사제의 가장 높은 영예인 로마교구의 ‘산 펠리체 다 칸탈리체 첸토첼레 성당’ 명예주임사제직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명동성당에 자리잡은 서울대교구의 교구장(대주교)을 역임하는 등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수십 년간 군부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사회지도층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인권의 수호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신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인생 덕목


1. 말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옵니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 번 생각하고 말하세요. 
2. 책
수입의 1%는 책을 사는 데 투자하세요. 옷은 해어지면 입을 수 없게 되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발휘합니다. 
3. 노점상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마세요.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4. 웃음
웃는 연습을 생활화하세요.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자 치료약이며, 노인을 젊어지게 하고 젊은이를 동자로 만듭니다.
5. TV는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함께하지 마세요.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되어 바보가 됩니다.
6. 화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봅니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언제나 외롭고 쓸쓸해요. 
7. 기도 
기도는 녹슨 쇳덩이를 녹이고 천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 줄기 빛이에요.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합니다. 기도는 자성을 찾게 하고 만생을 요익하게 하는 묘약이에요. 
8. 이웃
이웃과는 절대로 등지지 마세요.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춰주는 큰 거울입니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봐야 합니다. 
9. 사랑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어요.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를 낮춤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어요.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진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는 것과 복 지은 것뿐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당신이 태어났을 땐 당신만이 울었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엔 
당신 혼자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경찰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리고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며 
신부님들을 쓰러뜨리고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 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6.10항쟁’때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인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찾아온 공안관계자에게 날린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9. 02:30



빈민과 병자와 고아들의 수호자

마더 테레사 수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1910년 8월 26일~1997년 9월 5일) 수녀는 가톨릭 수녀로 1928년 수녀회에 들어가 평생을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1948년 사랑의 선교수녀회Missionaries of Charity를 창설하여 전 세계적으로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사후 2003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시복되어 성자聖者 바로 아래 단계인 복자福者로 서품됨으로써 ‘콜카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 

프로필
출생 : 1910년 8월 26일, 오스만투르크 제국
사망 : 1997년 9월 5일
직업 : 수녀
학력 :1995 워싱턴 입양센터 테레사의 집 설립 
1950 사랑의 선교수녀회 설립 
1928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 
수상 :1979 노벨 평화상 
1975 제1회 알버트 슈바이처상 
1973 템플턴상 
1971 요한 23세 평화상 
1962 막사이사이상 
1962 파드마 슈리상 



마더 테레사 수녀의 어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신의 존엄성이 존중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뵙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돌봐드린다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입니까. (1974년 인터뷰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 이상 돌려줍니다. 그들은 강한 사람이며 음식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저주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1977년 인터뷰)

*며칠 전 제가 천국의 문 앞에서 서 있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성 베드로께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는 빈민굴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96년 연설)

*저는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일일묵상집 ‘사랑은 철따라’에서)

*하느님은 보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복종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고 선교회는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1989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원장 사임의사를 밝히며)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사랑의 등불 마더 테레사’에서)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들까지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더 테레사 말씀집’에서) 

그래도 사랑하라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도 만들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라.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4. 15:30





불가리아의 슬라브화와 기독교화





불가리아에는 슬라브Slav족의 수가 꾸준히 늘어갔다. 슬라브족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슬라브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언어도 슬라브어가 주된 언어가 되었다. 지배층인 불가르 귀족들(볼리야르Bolyar)은 전통적인 천신(텐기르) 신앙을 하였지만 슬라브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소수 지배층인 불가르족의 통치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수용이 불가피하였다. 861년 보리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불리한 전세를 벗어나기 위해 비잔틴 황제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는 몇 년 뒤 자신의 가족들 및 일부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양에서는 기독교권 내부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틴 정교회 간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보리스Boris 1세는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적 지위를 얻어내었다. 기독교의 도입으로 불가리아 칸의 권력은 일층 강화되었다. 예전에는 칸은 불가리아 부족 연합의 우두머리 성격을 띠었으나 이제는 신의 지상 대리자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을 하나의 불가리아 인민으로 통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927년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는데 이는 세르비아 정교회 독립보다 300년 앞선 것이며 러시아 정교회보다는 600년 앞선 것이다. 그리하여 불가리아 총주교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 이은 여섯 번째 총주교좌가 되었다. 




보리스 칸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종교를 통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한 그리스 성직자들이 불가리아의 성직자 양성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보리스 칸은 모라비아 왕국으로부터 추방된 키릴Cyrill과 메토디우스Methodios의 제자들을 적극 환영하고 그들에게 불가리아 성직자들의 교육을 맡겼다.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는 그리스 출신으로서 슬라브 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에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사후에 그 제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모라비아로부터 추방되었던 것이다.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슈카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오리드에 각각 학교를 세워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칸의 명에 따라 그리스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교육을 하였다. 또 불가리아의 공식문자도 그리스어가 아닌 키릴문자Cyrillic alphabet를 채택하였다. 키릴문자는 855년 키릴이 슬라브어로 된 기도문을 적고 바이블을 번역하기 위해 만든 글라골릭 문자를 개량하여 만든 문자로 피레슬라브 학교에서 창안된 것이다. 프레슬라브 학교는 예전에 플리슈카에 있던 학교로 보리스 1세가 귀족의 반란 때문에 수도를 플리슈카에서 프레슬라브로 옮기면서 따라 이전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몽골에서 사용하는 키릴문자는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3. 16:30


우주에서 우주를 보다 허블 망원경



우주로의 여행을 떠난 망원경, 허블 망원경

허블망원경은 무게 12.2t, 주 거울 지름 2.4m, 경통 길이 약 13m의 반사망원경이다. 1990년 4월 24일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실려 발사되었고, 지구상공 610km 궤도에 진입하여 우주관측활동을 시작하였다. 지구에 설치된 고성능 망원경들과 비교해 해상도는 10∼30배, 감도는 50∼100배로, 지구상에 설치된 망원경보다 50배 이상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빅뱅(Big Bang:대폭발) 후 빛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우주공간이 투명해진 대략 5억 년이 지난 시점부터 우주의 중심에서 초속 18만 6000마일의 속도로 이제 막 지구에 도착하기 시작한 빛까지 포착할 수 있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허블망원경은 지금까지 150만 장이 넘는 사진들을 지구로 보내왔다. 그 중에는 우주를 보는 인류의 시각을 획기적으로 바꾼 유명한 사진이 적지 않다. 허블 망원경이 보낸 사진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을 통째로 뒤흔들기도 하고, 추측에 불과했던 가설들을 사실로 입증해 주기도 했다. 허블 망원경이 생기기 전에는 우주의 나이가 100억 년인지 200억 년인지 밝힐 수 없었지만, 지금은 우주의 나이뿐 아니라 우주의 시작과 끝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허블 망원경은 24시간 쉬지 않고 관측 자료를 지구로 전송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논문이 매주 8편씩 발표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허블 망원경은 우주에서 시시각각 천문학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허블망원경이 밝힌 우주의 모습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암흑 에너지나 블랙홀 같은 암흑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허블 망원경이 포착한 증거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우주를 보는 법을 알아볼 수 있다. 허블 망원경이 보낸 생생하고 경이로운 우주의 사진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빅뱅 이론, 블랙홀, 별과 행성의 차이 등 천문학에서 기본이 되는 개념들을 쉽게 머릿속에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첨단기술로 재탄생한 창조의 기둥
일반인에게 가장 유명한 허블망원경 사진은 1995년 4월 1일 촬영한 독수리 성운, 이른바 ‘창조의 기둥’이다. 여름철 남쪽 하늘에 보이는 뱀자리의 꼬리 부분에 있는 독수리 성운은 지구에서 약 6500광년(1광년=약 9조 4607억㎞) 거리에 있다. 이 성운은 고밀도의 수소와 먼지로 채워져 있으며 이 가스와 먼지가 중력에 의해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뭉쳐져 별을 탄생시킨다. 사진에서도 세 기둥 위쪽에서 새로 탄생한 별들이 쏟아내는 강렬한 빛을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사진에 별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의 기둥(Pillars of Crea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장 큰 왼쪽 기둥의 길이는 4광년이나 된다.


2. 일반상대성 이론을 입증한 중력렌즈
올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 6일자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입증하는 한 장의 천체사진을 실었다. 바로 지난해 11월 허블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레프스달(Refsdal)’ 초신성 사진이다. 사진에서 가운데 확대된 부분에 있는 네 개의 별은 실제로는 하나의 별이다. 레프스달 초신성은 지구에서 93억광년 거리에 있다. 이 초신성과 지구 사이에는 엄청난 중력을 가진 거대 은하들이 모여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시간과 공간을 휘게 하여 시공간을 지나는 빛도 휘게 한다. 은하들이 거대한 중력을 내면서 렌즈처럼 빛을 휘게 하는 이 현상을 ‘중력렌즈(gravitational lens)’라고 한다. 

초신성과 은하, 지구가 일직선으로 있으면 초신성 빛이 강력한 중력을 가진 은하를 지나면서 은하 바깥쪽으로 균일하게 휘어져 마치 둥근 고리처럼 빛이 난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이 중력렌즈 효과를 예측해, 이를 ‘아인슈타인 고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초신성과 렌즈 역할을 하는 은하, 그리고 지구가 일직선에 있지 않으면 초신성 빛은 둥근 고리 모양이 아니라 네 갈래로 갈라져 허블 망원경에는 각기 다른 4개의 별 모양으로 관측된다. 4개의 별이 십자가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이 역시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따서 ‘아인슈타인 십자가’라고 부른다.


3. 우주의 새벽을 촬영하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우주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주의 새벽'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 놀라운 이미지는 미 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이 중력 렌즈를 사용해 잡아낸 초창기 원시은하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원시 은하는 빅뱅 이후 6억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태어난 것으로, 허블 망원경이 이제껏 잡아낸 어떤 은하보다도 먼 거리에 있는 은하들이다. 우주에서는 시간이 곧 공간이므로 이 은하들의 나이는 130억년이 넘는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이 작은 은하들이 지금의 우주를 만든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스위스 로잔 공과대학의 하킴 아텍 교수가 이끄는 국제적인 연구진은 빅뱅 이후 6억년에서 9억년 사이의 공간에서 이와 같은 작은 은하들을 250개 이상 발견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은하들 중 가장 오랜 은하들이다. 이들 은하에서 출발한 빛은 적어도 120억년 이상의 시간을 날아서 망원경에 포착된 셈인데, 이는 곧 천문학자들이 120억년 이전의 과거에 존재했던 아기 우주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허블 망원경이 잡은 심우주深宇宙(deep space)의 은하들 중에서 이보다 더 오랜 은하들은 없습니다.”라고 프랑스 리옹 천문대의 요한 리차드가 밝혔다. 이들 은하에서 온 빛을 모아 분석해본 결과, 연구진은 이 원시 은하의 빛이 초창기 우주의 역사에서 미스터리에 싸인 기간, 곧 재이온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기 원시우주에서 탄생한 최초의 별(항성)과 은하가 우주 공간에 강력한 자외선을 방출하면서 우주 온도가 높아지면, 우주는 다시 이온화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를 ‘재이온화’라고 부른다. 재이온화가 진행되면 수소의 양성자에서 분리된 전자로 인해 우주는 다시 빛이 직진할 수 없는 불투명한 상태가 된다. 


이번 연구에서 관측된 원시은하의 자외선을 조사하면 이 은하들이 진화의 과정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연구진은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이들 원시은하들이 초창기 우주를 투명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재이온화 시기는 빅뱅 이후 7억년 시점에서 끝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발견의 뒤에는 연구진이 활용한 중력 렌즈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허블 심우주 관측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연구진은 심우주에 있는 3개의 은하단을 중력 렌즈로 활용했다. 연구진은 이 중력 렌즈를 이용해 해상도 높은 원시은하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제1세대 은하를 관측, 연구하려면 이 중력 렌즈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심우주의 은하단은 강력한 천연 망원경이다. 이들의 도움이 없으면 초창기 우주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스위스 로잔 공과대학의 얀-폴 크나이브 박사가 밝혔다.

허블 망원경의 뒤를 잇다. 차세대 우주 망원경

지구 바깥의 우주는 우리에게 여전히 밝혀진 것보다 질문이 더 많은 미지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계속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설명을 찾게 될 것이다.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이 그랬듯, 세계를 관찰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연습을 한다면 말이다. 허블 망원경은 궤도에 오른 뒤 25년간 천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오는 2017년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허블 망원경의 뒤를 이어 허블 망원경보다 성능이 뛰어난 차세대 우주망원경이 준비 중에 있다. 

달 너머의 궤도에 올려 보낼 차세대 우주망원경은 허블 우주망원경보다 10배나 크면서도 무게는 적게 나가는 반사경이 달리게 된다. 이 반사경은 마치 꽃잎처럼 발사 시에는 접혀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활짝 펴지게 된다.

이 망원경은 자외선에서 근적외선에 달하는 파장의 허블우주망원경과는 달리 근적외선에서 중간 적외선을 목표로 관측한다고 한다. 적외선용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좀 떨어져도 크게 지장이 없으므로 자주 수리하지 않아도 되어 경비를 줄일 수 있다. 또한 망원경에 대형 빛 가리개를 달아 태양이나 지구로부터 나오는 적외선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허블 우주망원경은 구경(口徑)이 2.4m인 데 비해 차세대 우주망원경은 구경이 8m나 되어 허블 우주망원경보다 1000배나 강력하므로, 행성의 형성 또는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획기적인 단서가 될 만한 발견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차세대 우주망원경이 본격적으로 우주개발에 이용되는 것은 2010년경으로, 이후부터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크게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연구 중인 차세대 우주망원경의 종류에는 NASA Goddard, Ball Aerospace, Lockheed-Martin, TRW 등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3. 04:12


[재난시대 생존법] 심폐소생술(CPR)




심폐소생술(Cardio Pulmonary Resuscitation)은 심장마비가 발생했을 때 인공적으로 혈액을 순환시켜 호흡을 돕는 응급치료법이다. 심장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산소를 공급하여 뇌손상을 지연시키고 심장을 정상상태로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심정지 직후 심폐소생술을 받지 못한다면 비록 생존하더라도 대부분 심한 뇌손상으로 고통 받게 된다. 국내 급성심정지 환자는 매년 4%씩 증가하여 2014년에는 3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한해 교통사고 사망자의 5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질환은 급성심근경색이다. 심장근육으로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관상동맥)이 완전히 막혀 혈액 공급이 되지 않는 급성심근경색은 증상이 있다면 즉시 119에 구조를 요청해야 한다.




국내 심정지발생 현황과 소생율
심폐소생술의 시간대별 소생율에 따르면 구조대 도착 전 최초 발견자의 신속한 조치가 매우 중요하다. 심폐소생술은 1분 이내에 하면 97%가 소생하지만, 4분이 경과하면 급격한 뇌손상을 일으킨다. 10분을 넘으면 생존이 어려워진다. 실제 국내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은 5% 수준이다. 이것은 10%인 미국과 8~10%인 대만, 일본에 비해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뇌생존이다. 살아서 응급실을 나가는 비율은 비슷한데, 일본은 살아서 퇴원하는 사람 중에 75%가 뇌가 회복돼서 나가지만 우리는 45%에 그치고 있다. 전과 같은 일상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더 많다는 뜻이다. 이는 일상에서 심정지 환자를 목격했을 때 심폐소생술 실시 여부와 함께, 심정지 후 얼마나 빨리 응급조치를 했느냐에 달려 있다. 최초 목격자가 1분이라도 빨리 심폐소생술을 하면 죽을 사람이 살고, 살아서 눈만 깜빡일 사람이 말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목격자 심폐소생술 시행방법
만약 당신이 심폐소생술을 알고 있고 타인에게 시술하는 상황이라면 “지금부터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시술하는 것이 좋다. 환자가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았거나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 법적인 문제를 대비하기 위한 조치이다. 심정지 환자가 소생하기 위해서는 즉시, 그리고 쉼 없이 시술이 이어져야 한다. 그만큼 목격자의 첫 대응이 중요하다.

자동제세동기自動除細動器(AED) 사용방법
자동제세동기(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는 급성심정지 환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해 심장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기기로 ‘자동심장충격기’라고도 한다. 급성심정지 발생시 4분 이내에 심폐소생술과 AED로 신속한 응급처치를 하면 환자의 생존율을 80%까지 높일 수 있다. 공공장소에 비치되어 있는 AED위치를 평소에 확인해두자. 위급 시 심폐소생술과 함께 얼마나 빨리 전기 충격을 가했는지가 생존 확률을 높이는 관건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