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에 해당되는 글 116건

  1. 2017.09.24 카와카미 타카후미 선사 TED강의 명상을 하면 감성지능이 높아진다
  2. 2017.09.21 세계적인 성공학의 거장 나폴레온 힐 Napoleon Hill
  3. 2017.09.20 인류애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4. 2017.09.19 한국의 온돌문화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 대중화
  5. 2017.09.18 한민족 문화 온돌의 역사
  6. 2017.09.16 새책정보 호모데우스
  7. 2017.09.13 서양에서 인정받는 우리민족의 온돌문화
  8. 2017.09.12 우리민족 온돌의 효능
  9. 2017.09.11 한국이 발명한 인류 최고의 난방 한옥의 온돌문화
  10. 2017.09.04 찰스다윈의 진화론과 자연과학적인 유물론
  11. 2017.09.03 감각주의와 유물론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
  12. 2017.09.02 서양철학사에서의 칼 마르크스 등장
  13. 2017.09.01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14. 2017.08.31 절대관념론을 뒤집어 버린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
  15. 2017.08.30 미국의 정신을 세운 실용주의實用主義사상
  16. 2017.08.29 영국의 공리주의公理主義사상 서양사상가 벤담
  17. 2017.08.28 서양철학사의 현상주의 출현 프랑스의 실증주의
  18. 2017.08.27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프리드리히 니체
  19. 2017.08.26 서양철학사에서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의 태동 키에르케고르
  20. 2017.08.25 흑인 노예무역의 상흔을 간직한 고레Gorée 섬
  21. 2017.08.23 북한과 아프리카 세네갈의 관계
  22. 2017.08.21 서양철학사 헤겔 좌파의 유물론
  23. 2017.08.12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
  24. 2017.08.11 아마존닷컴의 CEO 제프 베조스 Jeffrey Preston Bezos
  25. 2017.08.07 활짝 열리는 인공지능 AI시대
  26. 2017.08.03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
  27. 2017.08.02 알아두면 든든한 고사성어 覆水難收복수난수
  28. 2017.08.01 재미있는 한자 三人成虎 삼인성호
  29. 2017.07.31 고사성어 塞翁之馬 새옹지마
  30. 2017.07.30 사자성어 朝三暮四 조삼모사
잡학2017. 9. 24. 00:30






 

 

 

카와카미 타카후미 선사 TED강의

명상을 하면 감성지능이 높아진다

 

 






마음챙김으로 현재에 머무르는 법

교토 슌코인椿光院 사원 주지스님인 카와카미 타카후미 선사는 선불교와 명상의 핵심을 마음챙김으로 보고, 미친 듯이 바쁜 우리의 삶의 속도를 늦추어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해준다.

 

*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면 감성지능(EQ)과 관련된 뇌의 영역의 활동과 질량이 증가한다.

*명상을 20분 동안 하면 6시간 정도 잠을 잔 것만큼 산소 소비량이 줄어든다. 즉, 수면보다 명상이 더 깊은 휴식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수 세기 동안 불교 전통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판단을 하지 않고 현재에 머무르도록 도와주는 연습이자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이 이곳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 또는 미래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갇혀 있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현재에 머문다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고통의 주요 공급원이 우리의 주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은 우리를 어떻게 깨어있게 하는가

마음챙김의 주된 훈련은 명상입니다. 명상은 여러분을 더 주의 깊게 만들고 판단하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불교 수행법은 최근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기업 및 경영 대학교에서 명상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구글, 링크드인, 포드 등 다양한 기업에서 명상을 기업 웰빙 프로그램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경과학을 통해  명상이 우리의 뇌 및 정서적 지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명상을 하면 감성지능이 높아진다.

감성지능(EQ)은 자기 인식, 자기 조절, 사회적 인식, 대인관계, 주의집중 및 세계관 등 6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면 이 감성지능과 관련된 뇌의 영역의 활동과 질량이 증가한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에서 입증되었습니다.

 

특히 자제력과 주의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방해받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휴식을 취할 때, 실제로 주의력과 자기 통제와 관련된 두뇌의 일부 영역의 활동이 증가합니다 . 그리고 실제로 뇌의 산소 소비가 느려집니다. 따라서 6시간을 자면 정말 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분 동안 명상을 하면 6시간 정도 잠을 잔 것만큼 산소 소비량이 줄어듭니다. 그것은 정말로 휴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상을 하면 뇌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서 세로토닌이 방출된다

 

또한 명상을 20분 이상 하면 뇌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합니다. 그리고 뇌의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뇌간을 자극하여 세로토닌이 방출되기 시작합니다. 세로토닌은 우리를 더 이완시키는 신경전달물질입니다.

 

*세로토닌 : 뇌의 시상하부 중추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 행복을 느끼는 데에 기여한다고 하여 "행복호르몬"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규칙적인 명상 훈련은 여러분을 더 편안하게 하고 주의력과 자기 통제력을 향상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순간을 충분히 주의 깊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순간에 달려있으며, 그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21. 01:00







세계적인 성공학의 거장

나폴레온 힐 Napoleon Hill




프로필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1883~1970)은 미국 버지니아 주의 와이즈 컨트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 새어머니로부터 “너는 틀림없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적인 말을 들으면서, 지역의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비와 생계를 위해 잡지사의 기자로 취직하여 마침내 당대 세계 최고의 부자인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를 만나게 된다.

앤드루 카네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건네준 507명의 명단을 1908년부터 1928년까지 20년에 걸쳐서 직접 인터뷰 및 조사를 한 끝에, 누구라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는 성공의 원리를 정리하였다. 이렇게 성공학 역사의 위대한 걸작인 『Law of Success』(1928)를 완성하였고, 이후 일반인들을 위해 다이제스트 판으로 정리한 『Think and Grow Rich』(1937) 등은 성공학의 명작으로 손꼽히며 지금까지 5천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출생 1883년 10월 26일, 미국
사망 1970년 11월 8일
직업 작가
경력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고문관
미국 윌슨 대통령 홍보담당 비서관

성공 명언


패배가 찾아왔을 때, 가장 논리적이고도 쉽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포기다. 그것이 바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취하는 조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남는 이유다.

성공과 실패는 모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두드러진 특색이 있다. 그들은 실패의 이유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실패에 대한 완벽한 변명거리를 저마다 만들고 있다.

역경의 순간에 여러분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7가지 기본적 두려움은 가난, 비난, 쇠약, 실연, 노쇠, 구속,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단지 심적 상태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행동을 취함으로써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큰 실패 후에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여러분 앞에 놓인 역경에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러한 역경은 여러분에게 관용, 동정, 자제심, 인내 그리고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는 다른 몇 가지의 덕목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자신이 서 있는 곳과 나아가는 방향에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인생을 조종하고 변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변화시켜라. 여러분만이 이런 일을 할 힘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실패할 때마다 동일한 크기의 혜택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어서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여러분도 성공의 빛을 쪼일 수 있다.

단문 명언


*성격의 씨앗을 뿌리면, 운명의 열매가 열린다.
*승리는 노력과 사랑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승리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1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다.
*우리가 어느 날 마주칠 재난은 오늘 우리가 소홀히 보낸 시간에 대한 보복이다.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
*비장의 무기가 아직 나의 손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설정한 것들이다.

생각을 디자인하라


만약 그대가 파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파멸하고 만다. 이기고자 할 때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승리는 그대에게 미소 짓지 않는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활한다면 그대는 실패한다. 성공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성공은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의 정신 상태에서 결정된다. 만약 그대가 낙오자가 될까 우려한다면 낙오자가 될 것이다. 당신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된다는 신념을 품어라. 기회가 언제나 힘이 강하고 재빠른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성공은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온다. -나폴레온 힐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20. 01:00






인류애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프로필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1875~1965)는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프랑스-독일 국경 지대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독일어로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에서 루터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이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899년 철학박사 학위, 그 이듬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5년 박애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선교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발표했고 1913년 의학박사가 되었다. 중앙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랑바레네Lambarene(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현재 가봉공화국)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우고 당시 비참한 상태에 있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평생 의료 봉사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랑바레네가 프랑스령이 되자 독일 국적 때문에 전쟁 포로로 잡히는 등 수모를 겪었으나 결국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고,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출생 1875년 1월 14일 알자스 카이저스베르크Kaisersberg에서 출생(독일령이었다가 1차 대전 후 다시 프랑스령)
사망 1965년 9월 4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사망 (향년 90세)
별칭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활동분야 의학, 종교, 예술
수상 괴테상(1928), 노벨평화상(1952), 적도성십자훈장(1960)

명언 모음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생생한 진리는 인간의 사색에 의해 산출된 것뿐이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지녔고 따라서 존중해야 할 의미를 지닌다.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베풀 수 있는지 터득한 사람뿐이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더 많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 사람이다.

*성공이 행복의 열쇠는 아니다. 행복이 성공의 열쇠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면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타인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것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밖이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올바른 것을 찾기 전에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라도, 설사 몇 번의 시도를 해야 할지라도 용기만은 잃지 말라. 실망을 맞아들일 준비는 하되, 원하는 것을 포기하진 말라.
*성실성이란 정신생활의 기본이다. 성실성이 튼튼히 자리하는 곳에 평온이 깃든다. 평온은 성실성의 깃발이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원을 모든 생명에게로 넓히기 전까지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

*독서는 단지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다.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당신은 당신의 동료를 위하여 잠시라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해도 당신은 남들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에게 돈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자존심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일화


슈바이처가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때 기자들이 슈바이처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왔다. 1등칸과 2등칸을 살펴보았지만 슈바이처는 없었다. 그러다가 3등칸에서 사람들을 진찰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발견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박사님! 왜 3등칸을 타고 가십니까?” 그러자 슈바이처가 대답했다.
“이 기차에는 4등칸이 없더군요.” 기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슈바이처가 다시 말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1등칸이나 2등칸에 있는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9. 02:30






 

 

 

한국의 온돌문화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 대중화

 

 






온돌이 가옥의 일반적인 구조가 된 것은 고려 시대이며, 전국으로 보급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라고 합니다. 온돌이라는 용어도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구들을 놓은 방 전체를 온돌방이라 불렀습니다.

 

온돌과 한옥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고온 다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이 있기 때문에 한옥韓屋은 난방을 위한 온돌(구들)과 더위를 피하기 위한 대청마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루는 남방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 남쪽 지방에서 발전해 북쪽으로 전파된 반면, 온돌은 추운 북쪽에서 발달해 차츰 남쪽으로 전해진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합쳐서 한옥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구조적 특징이며 자랑입니다.

 

전통 방식의 온돌에서 개량 온돌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추운 계절인 설 명절이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많이 지펴 따끈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오순도순 웃음꽃을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고향집이 이런 온돌 방식을 고수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온돌의 변형 방식으로 보일러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넣어서 방바닥을 데우는 한옥의 전통적인 난방 방법인 온돌이 ‘전통 온돌’이라면, 요즘 우리나라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온수 파이프에 의한 온돌을 ‘개량 온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아파트뿐 아니라 단독주택도 보일러를 설치하고 방바닥에 파이프나 호스를 매설하여 온수를 순환시키는 방식의 온돌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 역시 우리 전통의 온돌 난방 방식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개량 온돌’은 누가 개발한 것일까요?

 



개량 온돌 난방을 처음 적용한 미국의 건축가

현대 온돌의 역사를 논한다면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1916년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 설계를 맡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부호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1837~1928) 집에 머물렀습니다.

 

오쿠라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된 부산에 들어와 잡화점을 시작으로 금융(다이이치은행 조선 지점), 건설, 압록강 벌목으로 떼돈을 벌어 조선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긁어 갔던 인물입니다. 오쿠라는 1914년 총독부가 식민 통치의 치적을 홍보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궁궐 전각을 헐어 낼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구워삶아 세자의 동궁東宮으로 사용되던 자선당資善堂을 뜯어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다시 세웠습니다.

 

프랭크는 오쿠라가 자선당을 옮겨 놓은 ‘코리안 룸Korean Room’의 온돌을 운명처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온이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결코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봄이 온 듯했다. 우리는 곧 몸이 따뜻해지고 다시 즐거워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았다. 눈에 보이는 난방 시설도 없었고, 이것으로 난방이 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난방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Gravity Heat. 1943)

 

프랭크는 바닥을 데우는 난방 방식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 방식으로 보고 태양열보다 좋은 난방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큰 감동과 영감을 받은 프랭크는 미국에 돌아가 1930년대 후반부터 주택을 설계할 때 처음으로 온돌식 난방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온돌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랭크는 자신이 ‘중력 난방(Gravity Heat)’이라고 명명한 이 난방 기술을 자신이 설계한 약 30동棟의 단독 주택에 적용했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 유산 세 가지를 들라 하면 ‘한글’과 ‘금속활자’ 그리고 ‘온돌’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계속적으로 온돌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한옥이나 궁궐의 온돌을 살펴보면 놀라운 과학적 발명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과학적인 온돌 문화를 우리 조상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발명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 출발한 이 온돌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것도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몫입니다. 인류의 주거 문화 개선을 위해서도 온돌 문화를 알리고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8. 09:40





 

 

한민 문화

온돌의 역사

 

 

 

 

한국인이 온돌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였습니다. 온돌의 시기는 지금부터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흥륭와興隆窪문화는 BCE 6200년 ~ BCE 5200년 사이의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홍산紅山문화(요하문명)에 속하는 흥륭와문화는 동아시아 최초로 밭농사와 온돌 문화가 발생한 우리 문화의 기원지입니다. 이 흥륭와에 원시 온돌이 있었습니다.

 



고조선 온돌

북한에서는 영변군 세죽리, 시중군 로남리, 요령성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 등에서 고조선 시기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같은 온돌 유적은 중국 동북부의 무순시에서도 발견됐습니다. 온돌이 발견되는 지역은 중북 북부이거나 만주 지역인데 이들 지역은 홍산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뻗어 나간 흉노족도 온돌을 놓고 살았습니다. 실제 흉노족이 살던 시베리아의 현지 민속박물관을 보면 온돌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옥저의 온돌

북한 자강도 증강군 토성리 유적에서 고구려 초기의 4개의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4세기경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 온돌이 등장하고 안악 고분 3호와 약수리 무덤 벽화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고 또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는 ‘그 풍속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인들이 오래전부터 온돌 시설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옥저에도 온돌이 발달했습니다. 기원전 4~3세기 북옥저인들의 주거 유적에서 원시 형태의 온돌을 비롯,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쪽구들이 확인되었습니다. 북옥저인들이 발명한 쪽구들은 고구려 외곽을 거쳐 중심부로 유입됐으며 대진국(발해)의 지배층도 애용했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6. 01:30






호모데우스




신이 된 인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피엔스 신드롬’을 일으킨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신작이다. ‘호모데우스’는 7만 년의 역사를 거쳐 마침내 지구를 정복한 인류가 이제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이야기한다. 사이엔스 종이 협력이라는 도구로 집단을 만들고, 허구를 믿는 능력으로 사회를 이룬 과정처럼, 과학의 발달로 인본주의의 의미가 퇴색해 더 이상 신의 가치나 인간 중심 이데올로기의 의미가 사라질 미래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호모데우스Homo Deus’의 ‘호모Homo’는 ‘사람 속屬을 뜻하는 학명’이며, ‘데우스Deus’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god’이라는 뜻이다. 즉,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난 시기 인류를 괴롭히던 ‘기아, 역병, 전쟁’을 보기 좋게 진압하고, 이제껏 신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불멸, 행복, 신성’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 물결은 거세서 개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것인지, 어디까지 타협하고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지’를 논의해야 할 갈림길에 섰다.

1부에서는 인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존재의 특수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와 그 외 동물들의 관계를 살핀다. 2부에서는 인류가 지난 천 년 동안 이룩한 기이한 세계와 우리를 오늘날의 교차로로 데려온 길을 돌아본다. 3부에서는 21세기 초 우리가 처한 환경과 가능한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3. 02:00




 

 

 

서양에서 인정받는

우리민족의 온돌문화

 

 




대체로 서양식 난방은 히터의 난방 열기가 위로 그냥 날아가면서 실내는 여전히 춥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온돌을 제대로 경험해 본 외국인들은 방의 밑에서부터 골고루 열이 위로 올라와서 몸을 덥혀 주는 온돌을 그리워합니다.

 

서양인들이 온돌을 경험한 기록이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1690년에 발간한 『북과 동 타르타리아지』에서 네델란드의 위트센은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문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라고 온돌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미국의 과학자 퍼시벌 로웰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5)에는 “온돌은 겨울철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일종의 화로 역할을 한다. 방 밖엔 난로용 구멍이 있는데 이것을 ‘아궁이’라 부른다. 불을 때면 더운 연기가 벌집처럼 돼 있는 미로를 따라 방바닥에 넓게 퍼진다. 아이디어가 뛰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록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과학기술연구소(CNRS)는 에너지 절약의 일환으로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온돌을 사용할 경우 입식 생활에 사용되는 강제 환기식 난방 방법보다 약 20% 이상의 에너지가 절약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자기들 중심으로 이미 바닥 난방 설비의 독자적인 ISO(국제표준화기구) 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지금 한창 연구하는 바닥 난방의 근원이 우리의 온돌임을 정확히 알리고 더 늦기 전에 온돌의 현대화와 산업화를 서둘러야 할 때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2. 01:00




 

리민족

온돌의 효능

 

 

서양에서 발달한 라디에이터radiator(방열기)를 이용한 공기 난방법은 더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대류 현상 때문에 바닥을 따뜻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온돌은 바닥을 먼저 데웁니다. 그러므로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따뜻하게(두한족열頭寒足熱) 하여 인체 면역력을 높여 줍니다.

 



두한족열이라는 말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말로 달리 쓸 수 있습니다. 수승화강이란 차가운 기운을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내려가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한의학의 원리이자 수행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동양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의 도道적 온돌 문화이지만, 서양은 침대식 화승수강火昇水降 주거 문화입니다.

 

구들은 불을 지피지 않을 때도 방바닥에 축적된 열이 방 안을 데우는 방식(고체축열식)이어서 에너지 효율적입니다. 또한 실내 온도를 공기 난방에 비해 낮게 유지해도 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구들의 재료는 열손실 계수가 낮아 대부분의 가정에서 쓰고 있는 온수 파이프 난방 시스템보다도 훨씬 적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게다가 물리·화학적으로 안전한 자연 광물질 재질은 거의 영구적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1. 17:35






 

 

한국이 발명한 인류 최고의 난방

한옥의 온돌문화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 방식이다. 이것은 태양열을 이용한 복사 난방보다도 훌륭하다. 발을 따스하게 해 주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난방이다

-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

 

온돌은 한국 고유의 독특한 난방 방식이고 온돌 문화는 우리 겨레가 가진 삶의 예지와 숨결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보물이자 훌륭한 자산입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시골 마을을 회상해 보면 솥을 걸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불로 방은 뜨끈뜨끈했고 그 안에서의 잠은 정말 편안했던 꿀잠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전통 온돌방에 불을 피워 놓고 등을 지지러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아궁이 불이 굴뚝을 통해서 연기로 나오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정말 아름답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풍광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어렸을 적에는 그냥 그게 좋은 줄만 알았지 그걸 ‘온돌’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방바닥에서 잠을 자나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은 케이팝K-Pop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주몽’ 열풍이 불었을 때 외국인 팬들의 온라인 토론장에서는 우리들의 난방 방식에 대해서 토론이 붙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침대에서 자고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데 한국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을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본 겁니다. 온돌은 주택의 실내 온도를 섭씨 1316도로 유지할 있을 정도로 뛰어난 난방 장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돌방에 신체를 최대한 접촉하기 위해서 신발을 벗는 좌식 생활을 주로 했습니다. 그런 거주 문화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쳤던 겁니다.

 

이는 또한 중국인과 일본인에게도 다르게 비춰졌을 겁니다. 일본의 이로리(いろり) 등은 직접 열을 이용하는 방식인 비해 온돌은 구들장과 고래(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길)를 데워 발생하는 간접 복사열을 난방에 사용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온돌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 동북부와 몽골 일부 지역에서도 온돌과 비슷한 원리로 난방을 했지만 잠자는 부분에만 구들을 설치한 중국 동북부의 ‘쪽구들’ 방식과 게르 바닥에 구들을 놓은 몽골 방식은 방바닥 전체를 데우는 ‘통구들’인 우리 온돌과는 분명 다릅니다.

 


온돌의 난방 방식과 구조

그럼 본격적으로 온돌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돌은 그야말로 ‘따뜻한 돌’입니다. 구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구들은 ‘구운 돌’의 약자입니다. 요즘에는 추울 때 핫팩hot pack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에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논두렁 밑에서 돌을 구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곤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달궈진 돌은 난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마도 거주하는 공간의 아래쪽을 달궈야겠다는 생각도 이런 돌을 달구는 것과 같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온돌 시스템은 아궁이, 방고래, 개자리, 구들, 굴뚝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옥의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기가 아궁이 아궁이 후렁이 부넘기 구들개자리 방고래 고래개자리를 거쳐 굴뚝으로 빠져나갑니다.

 

고래

온돌의 핵심은 ‘고래’에 있습니다. 고래는 방구들을 구성하는 돌 사이의 빈 공간으로 뜨거운 연기가 지나가는 길입니다. 구들은 이 고래 위에 놓이게 됩니다. 방바닥을 데우는 것은 구들을 어떻게 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궁이 쪽이 깊고, 굴뚝 쪽이 얕아 옆에서 보면 꼭 고래등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불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운 공기가 고래 속을 빙빙 돌아 구들장을 달구는 구조입니다.

 

아랫목은 뜨거운 연기가 지나는 고래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윗목에 비해 따뜻합니다. 또한 아랫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습니다 그리고 열의 전달이 미약한 윗목은 좀 더 빨리 달구기 위해서 얇은 돌을 놓습니다.

 

부넹기(부넘기)

불과 뜨거운 연기는 아궁이에서 ‘부넹기(부넘기)’라는 구멍을 통해 고래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부넹기는 ‘불이 넘어가는 고개’, ‘불을 넘기는 고개’란 뜻으로 ‘불목’이라고도 불리는데, 방고래가 시작되는 어귀에 조금 높게 쌓아 불길이 아궁이로부터 골고루 방고래로 넘어가게 만든 작은 언덕입니다. 구멍이 작아 열기가 바깥으로 새지 않고 고래로 잘 빨려 들어가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구들 개자리, 고래 개자리

고래를 통과한 열기는 ‘구들 개자리’로 이동합니다. 구들 개자리는 부넘기 너머에 파놓은 골로서 이곳에서 고래로 열기가 균등하게 전해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이 고래 전체로 골고루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래 개자리’는 굴뚝과 구들 사이에 있는 벽 바로 안쪽에 깊게 파인 고랑입니다. 개자리는 그 중에서 굴뚝에 이르기 직전에 깊이 판 통로를 말하는데 이것은 열과 연기가 좀 더 오래 머물도록 하며, 재티 등을 걸러 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구들과 고래가 제대로 놓아져야만 따뜻한 온돌방이 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열이 이동하는 방향과 가열된 열기의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굴뚝을 고안하는 등 과학적인 방식으로 한옥을 지켜 왔습니다. 구들을 놓을 때 아궁이, 고래 구멍 및 굴뚝의 배치는 지역의 바람 방향, 기후 조건에 따라 절묘하게 맞출 수 있는 과학적 슬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못 맞추면 굴뚝으로 빠져나가야 할 열과 연기가 거꾸로 아궁이로 되돌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4. 06:00




찰스다윈의 진화론과 

자연과학적인 유물론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고, 이로 인해 19세기에 이르러 유물론적인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1854년에 괴팅겐에서 열린 자연과학자회의는 19세기 유물론의 시대정신을 확증하는 계기가 됐다. 결국 유럽인들의 사고는 감각적인 데이터(datum)라고 하는 부분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치의 증대와 인간성의 내적인 빈곤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에 입각해서 사고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고, 유물론이 탄생하게 되는 간접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헤겔 좌파의 유물론은 이러한 사회적 풍조의 영향으로부터 출범하게 된 것이다.

 

유물론적인 사고를 대변하는 자연과학적 저서로는 1845년에 나온 카알 포크트Karl Vogt의 『생리학적인 편지들(Physiologische Briefe)』, 1852년에 출간된 야콥 몰레쇼트Jakob Moleschott의 『생명의 순환(Kreislauf des Lebens)』, 1855년에 나온 루우트비히 뷔히너Ludwig Büchner 『힘과 물질(Kraft und Stoff)』, 1855년에 나온 하인리히 쏠베Heinlich Czolbe의 『감각론 신설(Neue Darstellung des Sensualismus)』 등이 유명하다.

 

당시의 자연과학적 저술은 고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볼 수 있는 유물론적 사고가 기본 바탕에 깔려 있다. 세계는 생성의 과정에 있으며, 물질과 운동의 힘만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제시된 아낙사고라스의 “정신(Nous)”,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나 이를 본떠서 세계를 창조한 “데미오우르고스Demiourgos 신神”,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의 운동인으로 제시한 “부동의 원동자”, 그리스와 로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모든 신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학문을 탐구하는 인간의 의식이나 영혼은 물질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뇌腦의 작용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정신에서 나오는 사상과 물질적인 뇌의 관계를 육체에서 흐르는 땀[汗], 간에 붙어 있는 쓸개, 콩팥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오줌에 비유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유하는 정신은 신체적인 감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뇌 활동의 부수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학의 진보는 유물론적 사고를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1858년에 차알스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은 『자연도태에 바탕을 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을 간행하여 모든 종은 하나의 유일한 원세포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진화론을 도입했다. 1871년에 그는 『인간의 기원과 종에 관한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을 출판하여 인간도 진화해 왔음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9세기 말의 시대정신은 유물론적인 “일원론(Monismus)”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즉 1906년에 발족된 “일원론자협회(Monistbud)”는 ‘많음이 근원의 하나(das Eine)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부르짖었다. 근원의 ‘하나’를 에른스트 핵켈Ernst Haeckel(1834~1919)은 “실체(Substanz)”라고 했고,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wald(1853~1932)는 “에네르기(Energie)”라 했다. 특히 핵켈은 원자가 기계론적으로 진화하여 오늘날의 인간에 이르렀다고 함으로써 다윈보다 더 급진적인 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는 1868년에 펴낸 『자연적인 창조의 역사(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에서 생명의 변종은 저절로 생긴다는 , 원생동물이 계속적으로 분화함으로써 고등생물이 생겨났다는 것,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은 유인원類人猿이라는 것 등을 주장했다.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범신론汎神論(Pantheismus)으로 흐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즉 전통적으로 분리되어 각자 유지되어 왔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즉 초월적인 신과 현실세계라는 이원성은 하나로 융합되어 기계론적 일원론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일원론은 오직 하나의 실체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일원론에서는 물체와 정신, 신과 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만이 실재할 뿐이라는 얘기다. 그 하나는 바로 신이요 곧 세계이다. 그런데 만일 초월적인 신과 자연세계가 분리된다면, 인격적 유신론이 설 자리가 있겠지만, 일원론의 입장에서는 무신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근대에 발생한 범신론의 부활은 이런 입장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3. 03:30



 

감각주의와 유물론의

철학자 이에르바흐

 

 

 

19세기 중반은 헤겔 좌파의 유물론이 출범하는 시기였다. 헤겔 좌파의 사상적인 혁명은 슈트라우스D.F Strauß가 1835년에 『예수의 생애(Leben Jesu)』를 출판하면서 비롯된다. 책에서 그는 초자연적인 , 영혼이나 초월적인 등이 모두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들과 그 변화의 법칙들만이 남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해서 신의 계시가 해석되고 인간이 종교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자연종교가 말해 주듯이, 19세기에는 유물론이 득세하게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일등공신은 바로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1804~1872)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포이에르바흐의 사고는 어떠했을까? 그는 1839년에 “절대자”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을 담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헤겔철학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당시 헤겔의 철학은 독일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중심이념은 절대정신이었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과정이란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국가란 절대정신의 대변이자 실현도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즉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이 현실적인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규정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극적으로 반기를 든 철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헤겔을 극단적인 관념론자라고 비판한 포이에르바흐이다. 그는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란 자신의 철학적 사고 안에서 말라 죽어 버린 채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빈껍데기의 신학적 성령聖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절대관념론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향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흐는 모든 존재란 원초적으로 개념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알려지는 물질이고, 물질적인 토대에서 철학적 사유가 비롯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신체를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의 권리를 부활시키게 될 수밖에 없었고, 로마시대에 스토아학파 창궐 이후 오랫동안 경멸을 당해 왔던 유물론을 철학적 사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정신(영혼)과 물질(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포이에르바흐는 ‘신체가 영혼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헤겔의 근본철학에 대립한다. 헤겔의 관념론에서 보면, 현실적인 인간의 모든 것은 영혼과 정신으로부터 나온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육체적인 것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헤겔은 인간의 정신적인 사고가 인간 삶의 전반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란 그저 먹는 바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핵심내용은, 정신이 육체를 의식적으로 규정하지만, 정신 자체가 이미 육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정신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포이에르바흐는 또한 헤겔의 관념론을 “위장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절대이념의 외적 전개[외화外化]로 인해 현실적인 존재가 형성된다고 하는 헤겔의 주장이란 단지 절대자인 ‘신에 의해 자연적인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 하는 전통적인 신학적 학설을 합리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토대로 해서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이 말한 “무한자(das Unendliche)” 또한 현실적으로 유한한 것, 감각적인 것, 정해진 것이 추상화되고 신비화되어서 그리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헤겔의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조차 포이에르바흐에 의해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실재하는 현실적인 것이란 신도 아니고, 추상적인 존재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며, 오직 감각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흐는 감각주의와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을 버리고, 무신론(Atheism)을 바탕으로 인간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그는 최고의 존재를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요, 인간에게는 곧 “인간이 신이다(homo homini deus)”라는 얘기다. 만일 신이 인간의 주主라면 인간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고 신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러한 주장은 포이에르바흐가 인간의 존재를 신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기초 또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흐의 감각주의와 유물론은 19세기의 새로운 질서가 개벽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칼 마르크스Karl Heinlich Marx(1818~1883)는 유물론을 전개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의 정치와 문명사가 결정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2. 03:30




 

서양철학사에서의

칼 마르크스 등장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의 유서 깊은 로마가톨릭 도시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교 랍비의 후예였고, 개신교로 개종한 변호사였다. 아버지는 마르크스가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한 나머지 그를 본Bonn 대학의 법학과로 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법학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결국 그는 진로를 바꾸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베를린 훔볼트Humboldt 대학교로 전학하여 역사와 철학의 배움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에는 헤겔의 기본 사상의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해석하여 인간성의 해방을 주도하려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청년헤겔학파가 그것이다. 베를린에 온 마르크스는 이 학파에 속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에 물들면서 헤겔 좌파의 길로 발을 옮기게 된다. 1841년 마르크스는 예나대학교(Universität Jena)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란 제목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3년에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서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생존에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뜬구름 잡는 관념론을 비판하게 된다.

 




독일에서 급진적인 좌파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론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는 비밀 결사 단체인 “정의의 동맹(Bund der Gerechten)”에 가입한다. 1844년 말경에 파리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만나 함께 노동운동의 세계관을 완성하게 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급진적인 인물로 찍혀 추방될 위기에 처하게 됐고, 결국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영국으로 건너간 마르크스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청년헤겔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본주의 자체에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잉태되어 있다고 보고, 이로부터 역사유물론에 대한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1846년에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하게 됐는데, 여기에서 유물론의 기본적인 원칙을 정해 놓은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확립한다. “소외론疎外論(Entfremdung)” 또한 이 시기에 작성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 08:00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과 “역사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으로 구분된다. 변증법이란 우리가 자연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와 그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자연현상에 대한 파악과 해석을 유물론적으로 이론화한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변증법적인 주된 명제들이 사회적인 생활 현상이나 사회적인 역사에 확대된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핵심과제는 “역사적인 유물론”에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란 곧 왕이나 국가의 정복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 조건으로 만들어진다. 역사를 이루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은 사회의 생산양식(사회의 경제)에서 찾아져야 한다. 사회의 생산양식은 도구, 인간, 생산경험을 일컫는 “생산력(Produktivkräfte)”과 인간이 안에 모여서 생산하는 집단인 “생산관계(Productionsverhältness)”로 분석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유물론이란 단순히 비인간화된 물질이 아니라 물질적인 생산관계 안에 있는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서 역사과정이 전개되는데, 이는 원시공동체 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이상적 공산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진행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인간의 전체적인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곧 물질적인 경제에 관계하는 인간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유물론은 바로 인간의 감각 안에서 물질과 인간이 서로 적응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언제나 실천적인 면이 요청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산업사회에서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적인 경제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단순한 존재론적인 유물론이 아님을 뜻한다. 여기에서 그는 경제적 관계에서 인간의 경험과 정신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게 되는데, 그의 역사적 유물론의 새로운 특징은 바로 계급투쟁론階級鬪爭論(Klassenkampf)으로 집약된다.

 




계급투쟁론이란 무슨 의미인가? 계급투쟁론의 기초는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Mehrwert)에 있다. 잉여가치란 상품생산에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이윤을 말한다. 노동의 생산품에 대한 효용가치가 크면 클수록 잉여가치는 많아진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에게 최소의 임금만 지불한다.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손에 들어간다. 즉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윤을 착취하게 마련이고,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점점 더 큰 부富를 축적해 나간다. 자본가는 이윤착취로 인한 부의 축적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Bourgeoisie) 유산계급이 되고, 이윤을 빼앗긴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계급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은 서로 대립해 있으면서 결국 모두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疏外(Selbstentfremdung)”에 직면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상품세계에서의 소외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소외를 문제 삼았다. 여기에서 ‘자기소외’란 인간다운 삶이 노동 이외의 장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소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사적소유私的所有와 사적노동을 버리고 사회적 소유와 공동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꿈꿔 온 진정한 인간의 삶이다. 그러한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마르크스는 대립도 없고 계급도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경제 개혁론자이다. 세계사의 과정에 있어서 관념의 영원한 생성, 대립의 지양止揚, 새로운 것에로의 전진을 내세운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물질에 바탕을 둔 자본의 사회질서(These),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질서(Antithese), 계급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Synthese)로의 전진이라는 실천적인 역사유물론을 내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31. 06:00




 

 

절대관념론을 뒤집어 버린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은 헤겔에서 출발했지만 헤겔의 절대관념론과는 정반대인 유물론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그는 헤겔의 이념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대신에 물질적인 현실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바꾸려면 정신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헤겔이라면, 물질의 경제적인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이념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을 규정한다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조건과 변화가 바로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물질적인 존재와 그 현실이야말로 진정으로 참된 존재가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관습, 윤리, 법, 종교나 문화 등의 이념적인 것은 물질에 따라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유물론적 사고”의 핵심이 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유물론(Materialism)”은 어떤 의미일까? 유물론은 현실적인 모든 것이란 관념이나 의식이 아니라 오직 물질적인 것임을 전제한다. 물질은 가장 근원적인 존재요, 감각, 표상, 의식 등은 물질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思考라는 것은 뇌腦라는 물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연, 실재, 물질의 세계가 1차적인 것이고, 의식과 사고는 제2차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과 그 존재가 일차적인 근원이며, 정신적인 삶과 사고는 거기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의식과 사유와 이데올로기(관념)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인간의 실천적인 활동은 바로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의 발전을 요구하는 데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헤겔의 유신론을 무신론으로 전환한 것이 포이에르바흐였다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실천적인 유물론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즉 헤겔이 체계화한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를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시킨 것이 포이에르바흐의 공헌이었다면, 마르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감각적인 활동이란 실천적이며, 곧 공동적인 활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그는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개혁을 자신의 과제로 삼은 것이다.

 

실천적인 유물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인간이 감각으로 보는 것, 정신으로 생각하는 것, 몸으로 행위 하는 것 등은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을 규정하는 조건들이다. 이것들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생성의 기초는 생산관계의 총체인데, 이는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Überbau) 가진 사회의 현실적인 바탕이 된다. 정신적인 상부구조에 따라 역사, 철학, 종교, 예술, 정치 등은 그의 부수 현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30. 05:30



 

미국의 정신을 세운

실용주의實用主義사상

 

 

실용주의 또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진리관을 거부하고 현상으로 드러난 경험적인 세계에만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실용주의 진리관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유용성이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행동과 실천을 중요시함을 뜻한다. 그래서 실용주의는 ‘삶의 행동이 인식을 결정짓는 것이지 인식이 삶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바탕에 깔고서 삶의 유용성을 추구하는 철학으로 나아간다.

 

실용주의적 사고를 처음으로 창시한 자는 차알스 퍼어스Charles Peirce(1839~1914)이고, 이를 발전시킨 자는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라 볼 수 있다. 나아가 실용주의를 계승하여 새로운 철학, 일명 도구주의(Instrumentalism)로 전개해 나간 자는 존 듀이John Dewey(1859~1952)이다.

 

퍼어스는 사물을 지각하는 관념을 명료화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실천(pragma)”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로부터 실용주의란 말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 속에 개념으로만 있는 관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관념이 실천으로 규정되어 현실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행동으로 실현된 관념만이 의미가 분명해지고 알려질 수 있다. 이는 관념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천의 차이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이다.

 

퍼어스의 실용주의적 특성은 1877년에 발표한 “신념의 고정화(The Fixation of Brief)”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의심에서 시작하여 탐구의 과정을 거쳐 신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의심은 모르는 것, 생소한 것을 알기 위해서 탐구로 이끌기 때문이다. 탐구의 결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구란 의심에서 시작하여 신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사고과정이며, 그 목적은 신념의 확립에 있는 것이다. 퍼어스에 의하면, 신념의 확립에 기여하는 중요한 방법은 과학적 방법이다. 이와 같이 그는 ‘관념을 명료하게 하고 신념을 고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실용주의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제임스는 퍼어스가 말한 관념이나 신념이 인간의 경험에서 어떤 몫을 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사고한 철학자다. 제임스는 미국 특유의 또 다른 실용주의적 사고를 내놓게 되는데, 실용주의를 어떤 연구 성과가 아니라 연구방법론으로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학설이나 관념이 참된 것이냐 아니냐는 그것이 가져오는 실제적인 효과에 의해서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학설이나 관념은 사람에게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야말로 실제적인 결과로서의 사실로 판명되는 것이다.

 

제임스는 경험으로 검증 가능하면 그 관념은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검증이란 진리화의 과정이며, 진리는 관념이 경험에 의해 사실과 일치되는 것을 뜻한다. 진리는 항상 결과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관념은 언제나 경험에 의해 부단히 검증되어 새롭게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관념은 개인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 구체적인 활동에 가치가 되는 것, 행위로 옮겼을 때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관념은 개인에게 유용할 때 참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거짓이라는 얘기다. 만일 실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관념이라면, 이는 무의미한 것이거나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듀이의 경험주의 철학은 전통적인 감각경험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확대된다. 경험은 감각적인 활동을 포함하여 생리적, 인류학적, 문화적 활동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경험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뜻에 가깝다. 경험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질서 있는 맥락을 가지고 연속되면서 성장한다. 경험이란 즉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이면서 지속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듀이가 말하는 경험은 상호작용의 원리요 지속성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유기체로 살아간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고, 환경을 개척해서 바꾸기도 한다. 이 경우에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 혹은 도구가 되는 것은 개념, 지식, 사고, 논리, 학문이다. 듀이에 의하면 지성의 인식작용은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 형태이며, 관념이나 개념은 이러한 적응작용을 돕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생명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개념이나 관념이라면, 이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검증되고 끊임없이 수정돼야 마땅하다.

 

듀이는 환경에 적응하는 도구로서의 관념이나 개념이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리로 인식되고 있는 개념이나 관념은 인간이 환경에의 적응과정에서 능동적인 지성이 만들어 낸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환경에 접하여 적응하기 위해 개조된 실험적 행위의 성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나 관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로서 개조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개념, 관념, 사상 등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듀이가 말하는 탐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관념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검증을 통해 진리화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9. 02:30

 





국의

리주의公理主義사상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인 흄D. Hume 이후 경험론은 새롭게 변질되어서 그 명맥이 유지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적 현상주의이다. 공리주의적 현상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J.S. Mill(1806~1873)의 사상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밀은 철학에서 추구하는 객관적인 본질이나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존재란 없고, 또한 지성의 선천적인 내용이나 개념도 없으며, 오직 순간적으로 지각되는 것만이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전적으로 경험론의 입장을 깔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에서 다루는 것이란 경험적인 자료들뿐이고, 이로부터 귀납적인 법칙을 얻어내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귀납추리가 보편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밀은 그 보완책으로 “자연의 과정이란 한결같다”(자연의 제1성질)는 전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이로부터 경험적 명제로부터 귀납추리의 학문적 타당성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것이다.

 

경험적 진리를 토대로 해서 전개되는 영국의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가’의 물음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겠다. 대표적인 인물은 벤담Bentham, J.(1748~1832)과 밀을 꼽을 수 있다. 벤담이나 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행복한 삶에 대한 문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행복幸福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선善(good)한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선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삶이야말로 즐거움[快樂]이 함께 따라다니고, 곧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는 선한 삶을 살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것이지, 즐겁게 살기 때문에 선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됨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벤담이나 밀은 행복한 삶이란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苦痛이나 악惡을 피하고 즐거움[快樂]을 추구함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쾌락이 유일한 선이고, 고통이 유일한 악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쾌락만이 유일하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이 선이요 곧 행복이라는 등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쾌락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따라야 할 윤리적인 삶의 목적은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이것이 곧 공리公利의 준칙準則이다. 그래야만 인간 모두가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흄이 마련한 행복주의幸福主義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행복주의는 벤담과 밀의 윤리학적 토대에 그대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행복론을 말하지만, 벤담과 밀의 행복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담은 모든 쾌락이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쾌락의 양量만이 다를 뿐이지, 질적으로 고급의 쾌락이나 저급의 쾌락이란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벤담은 행복의 척도를 쾌락의 양으로 계산해 낸다. 쾌락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반복성, 순수성, 빈도성이 그것이다. 쾌락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더 좋은 것이요 더 옳은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쾌락의 양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람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까? 요컨대 나라를 폭력으로 통치하는 독재자가 가난에 찌들어 굶주린 삶을 살고 있었던 국민에게 먹을 것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여러 면에서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를 요구했다고 해 보자. 독재자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풍부하게 공급해 주자 많은 사람들은 많은 양의 쾌락을 누려 모두 행복해 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달라고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먹는 것만으로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독재자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밀은 벤담이 제시하는, 감각적으로 충당되는 양적 쾌락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충당되는 질적인 쾌락을 내세우게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훨씬 더 많은 쾌락을 향유할 수 있고, 따라서 그만큼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진리에 대한 갈급증에 시달려 온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충당되는 쾌락보다 정신적인 쾌락이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주고 더 많은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밀은 감성적인 만족을 통해서 계산되는 벤담의 양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통해서 느끼는 질적인 쾌락이 더 강도가 있고, 쾌락의 영원한 지속성과 순수성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8. 01:00






 

서양철학사의

현상주의現象主義(Phänomenalismus) 출현

프랑스의 실증주의實證主義

 

 




19세기의 철학은 한마디로 “현상주의現象主義”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상주의란 사물의 배후를 드러내는 본질적 탐구도 아니고 근원의 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도 아닌, 말 그대로 현실적으로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진정한 실재라고 여기는 입장이다.

 

사상적인 틀에서 보자면, 존재란 현상現象일 뿐이라는 19세기 현상주의는 프랑스에 일어난 실증주의(Positivism)와 독일에서 일어난 유물론(Materialism)이고,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포함하며, 그리고 미국에서 붐이 일어난 실용주의(Pragmatism)와 변질된 귀납적 형이상학이 현상주의에 속한다.

 

오늘날에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까지도 실증주의 사상이 파고들어 널리 유포되어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역사관 또한 실증주의에 물들어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어떻게 태동해서 오늘날 인류의 정신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일까?

 

실증주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오구스트 꽁트August Comte(1798~1857)이다. 그는 인류의 정신사를 검토하여 세 시기로 나누는데, 1단계는 신화적인 시기, 2단계는 형이상학적인 시기, 3단계는 실증주의 시기가 그것이다. 마지막 실증주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과학적 탐구의 중요성을 간파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1단계의 시기 :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원시적인 상태에서 맨 먼저 신화적인 혹은 신학적인 단계에 접어든다. 이는 자연의 모든 현상이 보다 높은 인격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시기이다. 먼저 인격적인 힘이 특별한 사물 안에 살아있다고 믿는 페티시즘(Fetischismus), 다음은 그 힘을 가진 인격적인 신이 여러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던 다신교(Polytheismus), 마지막으로 전능한 유일신이 온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는 유일신교(Monotheismus)가 여기에 속하는 시기로 나타난다.

 

2단계의 시기 : 다음은 인간이 비판적 탐구능력이 발현되면서부터 시작한 형이상학적 시기이다. 대표적으로 아테네 시대의 철학적 탐구 시대가 그것이다. 철학은 신화적인 시대에서 탈피하여 창조변화의 힘을 추상적인 개념, 즉 사물의 본질, 형상, 영혼 등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꽁트의 눈에 여전히 허구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3단계의 시기 : 마지막 단계는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즉 현실적인 경험적 대상으로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인간이 진리 탐구로 간주하게 되는 시기이다. 실증적인 것들만이 실재이고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학문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두 가지 업무에 주력하게 되는데, 첫째는 현상들로부터 언제나 반복적이고 동일한 것을 밝혀내어 개념을 창출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상들이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일어나게 되는 법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하여 20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신실증주의新實證主義가 등장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7. 05:30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는 누구인가? 그는 1844년 프러시아Prussia의 뤼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슈울포르타를 졸업한 후 라이프찌히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때에 그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고, 22살쯤부터 바그너R. Wagner와 친하게 지냈으며, 24세에 바아젤Basel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가 되었다. 1870~1871년에는 지원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위생병으로 몇 달을 지냈는데, 이 때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호되게 앓게 되자 휴가를 얻어 제대했다. 그는 휴양하러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1889년에 진행성마비증에 걸려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극진히 간호했지만 그는 결국 1900년 8월에 별세하게 됐다.

 

니체의 초기 사상은 새로운 교양(Bildungsideal)을 형성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의 이상은 아름답고 영웅적인 인간상에 있었고, 그 원형을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즉 헤라클레이토스, 테오그니스, 아이스킬로스 등의 비극적인 시대성에서 찾았다. 특히 그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의 예술과 비극을 새로이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비극은 두 요소, 즉 현실적인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요인과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찢어 버리는 표상을 상징하는 “아폴론Apollon”적인 요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삶에 푹 빠져 있었고, 진정한 삶의 가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았다.

 

그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내놓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세계를 제시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란 새로운 가치 창조를 암시하는 신호탄이다. 이는 1883년 이후에 나온 『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초인(Übermensch)”을 등장시켜 극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자이고, 초인은 가치들을 창조하는 자이고, 디오니소스는 가치들을 상징하는 자이다. 이 가치에 대립하는 것은 모두 십자가에 매달린 죽은 자로 상징된다.

 




니체의 고민은 진정한 철학자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 인간이 나아갈 길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세계를 열어주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외치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괴하는 망치를 든 철학자로 변신한다. 그는 기존의 모든 도덕적 규범들을 파괴하고, 인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가치 창조로 나아가는 삶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이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그가 부수고자 하는 확립된 기존의 도덕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은 이러저러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도덕적 규범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적 규범이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풍부한 가치를 마비시켜 왔다고 보았다. 또한 니체는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발명하여 삶의 본능, 삶의 기쁨과 풍부함을 억압하였고, 천국이라는 저세상[피안彼岸]을 발명해내어 이 세상[차안此岸]의 가치를 말살하였으며, 구원받는 영혼을 발명해 내어 신체적인 모든 것을 비방하였고, 죄와 양심을 발명해 내어 삶의 창조의지를 빼앗아 버렸다고 말한다.

 

삶은 일회적이요 살과 피로 형성된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기존의 도덕은 새로운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은 허구요, 참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는 도덕현상이란 없다고 한다. 즉 열등한 사람들이 삶과 삶의 현상을 잘못 해석한 것이 도덕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적나라한 생존 자체요, 순수한 자연적인 모든 생성이다. 또한 사랑, 동정, 겸손, 자신을 낮춤, 희생정신을 강요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노예의 도덕이요, 삶에 적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삶에 대한 저주’라고까지 말한다.

 

기존의 도덕적 규범이나 이념이 모두 부서졌으니, 이제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은 죽었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이다. 사실 이 초인 안에 니체의 의욕 전체가 응집해 있다. 초인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유일한 것이며, 인간도 아니고 괴로워하는 자도 아니고, 가장 착한 자도 아니다. 초인은 이상理想으로서 나타나는 일체의 피안의 세계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대지大地를 위하여, 생生 자체를 위하여 스스로를 바치면서 이에 기꺼이 순응하는 자이다.

 

니체는 그리스도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는다. 초인은 세계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영원히 새로 솟아오르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인식과 창조의 가치 확립을 가져오지만 스스로 파탄에 직면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초인은 모든 가치란 삶을 위해서이고, 진정한 삶이란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초인은 자신이 이 세계의 한 부분인 동시에 “힘에의 의지”를 뜻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초인은 생生 자체의 가장 요원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모순을 견디어 낼 줄도 알고 있었다.

 

끝으로 초인은 “영겁회기永劫回歸(die ewige Wiederkunft)”의 사상도 체득할 수 있는 인간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輪迴를 거듭한다.”(『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 제3부). 다시 말해서 세계란 일정한 크기를 지닌 힘의 덩어리며, 여기에는 무수하게 많은 존재자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무한히 지속하는가? 아니다. 무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뿐이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무한한 시간 계열에서 수없이 생겨나고 없어진다. 만물은 반복적으로 영원히 회귀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이라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6. 08:00






서양철학사에서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의 태동

키에르케고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시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국가라는 대립적인 것을 조화하여 시민사회의 안정성을 추구한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19세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와해되었다. 심지어 헤겔철학의 절대이념에 반기를 든 쇠렌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1813~1855)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복轉覆을 꾀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적 사고를 무너뜨렸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zsche(1844~1900)는 신에 기원하는 도덕적 가치를 뒤집음으로써 신[主]과 인간[客]에 대한 주객을 전도顚倒시켰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主體의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인간의 실존實存을 드러냈고, “신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라 하여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태동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변증법적 신학”과 카알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의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반면에 니체는 초인超人의 철학을 내놓음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드러냈고, “신은 죽었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실존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했다. 1841년에는 베를린에서 셸링Schelling의 강의를 들었고, 그 후에 문필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의 논쟁에 휘말려 들었고, 교회와의 타협을 보지 못하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그는 고독한 삶을 보내다가 얼마 살지 못하고 42세가 되던 1855년에 젊은 나이로 코펜하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진리는 전통적인 학문에서 밝혀져 전수되어 온 것도 아니요, 영원한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짜여진 교리를 깨닫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 앞에 당당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객관적으로 규정된 진리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완전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완전한 인간적인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실존實存”의 가장 깊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은 동양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진리는 바로 신적인 것 안으로 성장해 들어가 실존자實存者가 되는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실존”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오직 일회적인 존재인 각자는 내면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야 실존자가 될 수 있다. 보다 깊은 내면에 이른 자신의 존재는, 빛이 모여들고 내어 주는 광원光源과 같으며, 신이 받아들이고 내어 주는 중심체와도 같은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모여들고 거기로부터 퍼져 나가는 독자적인 자기활동의 주체적인 개별자는 바로, 어느 누구도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신 앞에 선 “단독자(Das Einzelne)”이다. 단독자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실존자가 되는 셈이다.

 

실존을 말하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이데아에다 생명을 가진 개별자를 맞세웠듯이, 헤겔의 사고로부터 추상된 보편자에다 개별적인 의미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맞세운다. 개별자는 절대로 보편자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개별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깊숙한 내면內面에 이름으로써 언제나 자립적으로 실존하며, 고유하게 활동하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한 개별자는 완결되지 않은 채 언제나 고유하게 행동하는 존재이다. 고유하게 행동하는 개별자는 항상 “비약飛躍(Sprung)”을 감행敢行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삶의 과정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감으로써 전진前進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진에는 하나하나의 결단決斷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에는 ‘가능성’이 언제나 현존해 있다. 거기에는 ‘이리할까 저리할까’하는 선택의 망설임이 있고, 절망과 한계에 부딪힌 좌절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결단에는 항상 불안不安이 따라다니고, 신앙信仰이 떠오른다. 불안은 결과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앞질러 가 있고, 앞질러 가 있는 불안의 바탕에는 자유自由가 버티고 있다. 자유는 의지의 선택으로 무한한 것이며, 무無에서 생겨난다. 여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이 없이는 비약을 감행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에 대한 기분, 감행, 불안, 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유 등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범주들이다.

 

하나하나의 상태에서 순간순간 확고한 결단을 주도하는 것은 내면의 주체이고, 주체적 결단은 곧 비약을 감행함으로써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에 이르는 길은 세 방식이 있다. 첫째는 이미 있었던 것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명상하는 “감성적인 길”이다. 둘째는 결단을 내리는 행위와 자유로운 선택, 즉 개별자의 독자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윤리적인 길”이다. 여기에는 이미 자신이 혼자(單獨)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마주치게 된다. 불안은 완전히 혼자인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홀로 감당해야 하므로 결단이 요구된다. 세 번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맡겨짐으로써 궁극적인 내면에 이른 “종교적인 길”이다.

 

종교적인 신앙은 현존재(Dasein)와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神]에 매달려 그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설(Paradox)은 여기에서 나온다. 역설적이면 역설적일수록 신앙은 그만큼 더 커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무조건 순종順從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역설은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때에 인간은 절망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럴 때 신앙을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최고의 확증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실존자는 결국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세계에서 풀려나 하나님에게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진정한 실존자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5. 21:08




 

 

흑인 노예무역의 상흔을 간직한

고레Gorée

 

 


 

세네갈은 일 년 내내 관광이 끊이지 않는 나라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항공교통이 편리한 지역으로 서아프리카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하고 남쪽의 카자망스 평원은 원시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의 끝자락이 이어졌는데, 파리에서 출발하는 유명한 자동차레이스 파리-다카르 랠리의 종점이기도 한 나라다. 기후와 거리가 유럽과 비교적 가까우며 역사적 관계도 깊다.


세네갈은 2007년~2008년 시즌에 유럽 등지로부터 약 8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였고 2015년에는 방문 관광객이 총 3백만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네갈에는 대서양 해변을 따라 외국인을 위한 관광 리조트들이 개발되어 있다. 유럽에서 겨울철인 12월~2월 기간에는 따뜻한 기후를 즐기고 싶은 유럽인의 방문이 많다. 이 기간에는 월동을 위해 세네갈에 도래하는 철새도 볼 수 있다. 또한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국립공원을 선정하고 문화보호 정책과 관광개발 정책 등을 추진함으로써 관광지로서 가치를 높이고 있다. 세네갈의 관광산업은 재외국민 송금, 어업과 함께 세네갈의 주요 외화 획득원이며, 각종 레저단지는 면세 혜택을 받고 있다. 세네갈의 주요 관광지로는 고레 섬(노예 수출 기지), 쥬지 국립공원(철새 도래지), 생루이(구 프랑스 식민지 수도), 살리(휴양지) 등을 꼽을 수 있다.

 



고레 섬은 다카르 동쪽의 3㎞ 앞 바다에 길이 900m, 폭 300m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이전에는 노예무역의 중계지였다. 지금은 인구 10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는 평화로운 곳으로 아스팔트 길도, 자동차도 없다. 단철로 만든 발코니가 있는 식민지풍 집들, 구 공회당, 멋진 해변, 또 섬과 다카르의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바위투성이 고원으로 지금은 마리화나 중독자들이 차지한 르 카스텔 등이 있다. 섬 북쪽의 역사박물관은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멋진 그림과 여러 전시물들이 현재에 이르는 세네갈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비참한 노예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고레 섬 방문에서 빠질 수 없는 일정은 메종 데 에스끌라브(노예의 집)에 가는 것이다. 노예들이 생활하고 있었던 집으로 노예 무역의 상흔을 간직한 이곳은 1786년 세워졌으며 1990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새롭게 꾸며졌다. 노예의 집과 이에 얽힌 이야기는 그 야만적인 상행위에 세네갈이 연루되었던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기려 그 이름을 붙인 생루이. 한때 세네갈의 수도였던 생루이에는 도시의 중심이기도 한 세네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을 끼고 우측 본토인 소르지구, 좌측에 랑고 드 바르발리라고 하는 모래톱에 위치한 응다르 투트 등이 있다. 또한 이 도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리가 이 세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쥬지 조류공원이 이곳에 있는데 이곳은 수만 마리의 철새들의 휴식처이다. 또한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묵던 호텔도 있다.

 

“살람 말리쿰” 세네갈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인사말이다. ‘안녕하세요.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답례의 말은 “말리쿰 살람”이다. 일찍이 식민지 역사와 내전의 아픔을 겪은 아프리카 서쪽 끝나라 세네갈에도 따뜻한 안정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3. 01:00




 

 

한과

아프리카 세네갈의 관계

 

 

 

 

 

세네갈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비동맹 중립 외교노선을 견지, 원칙적으로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표방하고 있으나, 한국과의 경제 협력을 보다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 북한은 1972년 9월 세네갈과 수교하고, 같은 해 11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1974년 셍고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세네갈은 한때 친북한 경향을 띠기도 했다.


하지만 친서방 실리 외교를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8년 2월 북한은 경제 사정으로 인해 주세네갈 상주 대사관을 폐쇄하였다가 2013년 7월에 상주공관을 재개설하였다. 상주 대사관 폐쇄 기간 동안에는 주기니 대사관에서 관련 업무를 겸임하였다. 세네갈은 주일본 대사가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북한의 만수대 해외사업부가 2011년 LSS 국제공항에서 다카르 시내로 진입하는 언덕에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탑’을 건설하여, 세네갈의 상징물로 자리 잡고 있다. 2015년 5월 현재 북한은 건축기술협력 대표부 및 만수대 해외사업부 세네갈 지사를 설치, 기술자 및 100명 가량의 노동자를 세네갈에 파견하고 있으며, 이들은 다카르 시내 및 인근에서 각종 건물 신축 사업에 투입되고 있다. 북한과 세네갈 간에는 경제기술 협력 협정(1974), 무역 협정(1974), 혼성위 창설 협정(1986), 정보교류 협력 협정(1994) 등이 체결되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1. 02:00

 


서양철학사

헤겔 좌파의 유물론

 

 

이성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전개된 인식론은 대륙의 합리론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진리인식이 감각적 경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경험론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진영에서 주장된 내용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선험적 관념론에서 꽃을 피운다.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에서 태동하여 헤겔의 절대관념론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룬다.

 



헤겔 이후 19세기 중반은 자연과학의 진보에 따른 기술혁명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시대의 사조 또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풍조로 바뀌어 갔고, 지성사에서는 관념론이 밀려나고 유물론(Materialism)이 철학의 권좌를 차지하여 득세하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귀한 정신의 관념이 아니라 신체적인 생명을 보존하는 물질이었고, 물질적 가치의 창조와 변형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산업과 경제가 중심이 됐던 것이다.

 

유물론의 득세는 시대와 역사를 바꿔 놓았다. 국가체제는 강대국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바뀌었고, 물질문명에 따른 국부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결국 헤겔의 관념적 정신사精神史는 유물론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어 버리고, 이로부터 또 다른 새롭고 다양한 사상이 출범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조를 거론해 보면, 헤겔 좌파의 유물론, 인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실존철학의 태동, 진리의 기준이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는 실증, 공리, 실용성을 내세우는 현상주의, 감각적 경험에 바탕을 둔 귀납적 형이상학을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12. 01:00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盛和夫

 

 


프로필

이나모리 가즈오(いなもり かずお, Inamori Kazuo) 일본의 기업인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 쇼이치로와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기업가’로 꼽힌다. 교세라, 다이니덴덴(현 KDDI)의 창업주이며, 일본 대표 항공사인 일본항공JAL의 회장을 역임했다. 가고시마 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쇼후 공업에 입사한 후, 1959년 교세라를 설립했다. 10년 뒤에 주식 상장을 했으며, 파인 세라믹 기술로 성장했다. 1984년 다이니덴덴을 설립했다. 같은 해 재단법인 이나모리 재단을 설립했으며, 교토 상을 제정했다. 2010년 일본항공이 파산하자 단 세 명의 측근만 데리고 투입되어 13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2012년 3월에는 역대 최고액을 경신했다. 2013년 3월에 일본항공의 회장에서 물러나 교세라에 복귀했다. 주요 저서로는 『아메바 경영』, 『카르마 경영』, 『소호카의 꿈』, 『성공을 향한 정열』, 『이나모리 가즈오의 철학』 등이 있다.

 

출생 1932년 1월 21일(만 85세), 일본

소속사 교세라

학력 가고시마 대학교

경력 1997 교세라 명예회장

1984 다이니덴덴 설립

1984 이나모리 재단 설립

1959 교토세라믹 설립

(1982년 교세라로 변경)

 


명언 모음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다. 성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끈끈함과 인내심이다. 실패하는 사람은 벽에 부딪혔을 때 형편 좋은 핑계를 찾아서 노력하는 것을 그만둬 버린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관리하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당신의 운명을 정해 버린다.

 

신이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일에 전념하라.

 

마음의 등불이나 나침반이 되는 것은 바로 강렬한 의지이다.

 

사람은 영감을 밖에서 추구한다. 하지만 나는 안에서 추구한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가능성을 맘껏 추구하고 개량을 더해 가면 상상도 안됐던 큰 혁신을 도모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천직이라는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어진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일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생을 보다 잘 살고자 한다면 평소보다 더 잘 살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낙관적으로 구상하고 비관적으로 계획하며 낙관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사물을 성취시키고 바람을 현실로 바꿔 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못하는 것이고, 장래의 자신이라면 가능하다고 미래진행형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짧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자신의 마음과 맞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인생이란 자기 자신이 각본을 쓰고 주역을 맡은 드라마다. 어떠한 드라마를 그릴지는 본인이 하기 나름이며, 마음이나 사고방식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한 깨끗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신념, 소원은 꼭 성취된다. 반대로 사리사욕을 바탕으로 한 ‘흐려진 원망’은 한 번은 실현되더라도 일시적인 효력으로 끝나고 만다.

 

리더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겸손한 리더만이 협조성 있는 집단을 구축해 그 집단을 조화롭고 영속적인 성공으로 유도할 수 있다. .

 

1,155일간의 투쟁 명언들

(일본항공JAL의 회생 과정 1,155일 동안의 명언)

 

*나는 매일 ‘나의 동기는 선한가? 사심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집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지금의 세 배로 일해야 합니다. 임원은 열 배로 일하고, 저는 그 이상으로 일하겠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 욕심부리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 남에게 친절히 대해라.” 어릴 적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배운,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규칙들, 그런 것을 규범 삼아 경영을 하면 됩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한 번이라도 품게 되면 정말로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11. 00:30






아마존닷컴의 CEO

제프 베조스

 

 

프로필

제프리 프레스턴 베조스Jeffrey Preston Bezos는 미국의 기업가이자 투자자이며, 아마존닷컴을 설립한 CEO(Chief executive officer, 최고경영자)이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에 아마존닷컴을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인터넷 상거래를 통해 책을 판매하였지만, 이후에 넓고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에 아마존닷컴을 설립하였다. 199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2000년 블루 오리진Blue Origin이라는 민간 로켓 회사를 설립하고 우주여행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3년에는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해 전 세계 언론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출생 1964년 1월 12일(만 53세), 미국

소속 아마존

학력 프린스턴 대학교

수상 1999 타임지 올해의 인물

경력 現 아마존 CEO

1994 아마존 설립, 회장

1994 디이쇼DE Shaw(데이비드 E 쇼 컴패니) 수석 부사장

1990 뱅커스트러스트 부사장

 


통찰력 넘치는 명언

만족 회사는 화려하게 보이는 데 연연해서는 안 된다. 빛나는 것은 지속되지 않는다.

 

혁신 다른 통제 요소와 마찬가지로 절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혁신을 채찍질한다. 비좁은 박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빠져나가는 특별한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

 

발전 경쟁자만 바라본다면, 경쟁자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객에 집중하면 보다 선구자가 될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 발명을 하다 보면, 늘 예기치 않은 행운이 따르기 마련이다.

 

동기 나는 선구자가 더 좋은 제품을 만든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더 많이 고민한다. 선구자에게는 어떤 일이 단순한 사업이 아니다. 돈이 돼야 하고, 말이 돼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선구자는 자신을 설레게 만드는, 가치 넘치는 일을 한다.

 

전략 아마존은 18년 동안 3가지 생각으로 성공을 이룩했다. 고객을 우선 생각하라, 개발하라, 그리고 인내하며 기다려라.

 

성장 모든 사업은 계속해서 젊어져야 한다. 고객이 당신과 함께 늙어 간다면 당신은 지루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방향 선회 당신이 고집스럽지 않다면 실험을 너무 빨리 포기할 것이다. 당신이 유연하지 않다면 벽에 머리를 박기만 할 뿐, 문제를 풀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마케팅 과거에는 멋진 서비스를 만드는 데 30%, 이를 알리는 데 70% 시간을 썼다. 새 시대에는 반대다.

 

가격 세상에는 두 종류의 회사가 있다. 고객에게서 돈을 더 받기 위해서 일하는 회사와 덜 받기 위해서 일하는 회사. 아마존은 후자다.

 

기타 명언 모음

*아마존이 혁신하는 방법은 소비자 중심으로 생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게 아마존이 혁신하는 방법의 기준이다.

 

*보통 회사들은 매일 어떻게 경쟁 회사보다 앞지를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우리 회사는 어떻게 소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혁신을 만드는가를 고민한다.

 

*부재가 혁신을 부른다. 무엇인가(인력, 시간, 자금 등이) 부재한 어려운 상황은 결국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하는 실험 횟수를 2배로 늘리면 창의력이 2배가 된다.

 

*창조란 오랫동안 오해를 받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진심으로 믿는 일을 해도 도와주려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비판을 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의 비판이 맞는다면 그들의 말을 수용해야 되고, 반대로 그들이 맞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오랜 시간 동안 오해를 받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게 창조의 핵심이다.

 

*다른 회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시장 조사를 해야 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저거 베껴야 되겠다” 하지 말고, “저거 괜찮은데? 저거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무엇을 만들어 볼까?”라고 생각해서 당신만의 유일한 색깔을 만들어라.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7. 01:00




 

 

 

활짝 열리는 AI시대

10억 대의 카메라로 인공지능 도시 구축,

뇌 속의 AI가 기억 복원해 내

 

 

 

지난 5월 9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州 새너제이San Jose에서 열린 ‘GTC(GPU Technology Conference) 2017’에서는 ‘인공지능(AI) 도시’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과 플랫폼들이 소개됐다. GTC는 그래픽칩(GPU) 제조 기업 엔비디아NVIDIA가 매년 AI·자율주행차 등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에서 활약하는 개발자와 전문가들을 초청하는 연례행사다. 엔비디아가 GTC 2017에서 선보인 ‘메트로폴리스 플랫폼Metropolis Platform’은 ‘인공지능 도시’의 구축을 돕는다. 이 플랫폼은 도로 위 카메라들이 인식한 행인·자동차·반려동물 등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학습한다. 도로 위의 수상한 물체나 차량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감지하여 그간 감지한 적 없는 얼굴이나 흉기 등 수상한 물체를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실시간으로 경찰에 통보할 수 있다. 2020년에는 전 세계 대중교통·도로 등 공공장소에 약 10억 대의 카메라가 설치될 것으로 예상한다. 카메라 10억 대는 1초에 약 300억 장, 1시간에 약 100조兆 장의 이미지를 찍는다. ‘메트로폴리스 플랫폼’은 이처럼 방대한 고화질의 이미지와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학습하고 분석한다. 이렇게 ‘딥 러닝deep learning’이 가능한 카메라들은 행인·강아지·자동차 등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이제 실종된 어린이나 반려동물을 찾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행인의 얼굴을 인식해 신원까지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카메라가 차주에게 주차할 구역을 제안해 주어 주차장에서 헤맬 필요도 없다. 슈퍼마켓에서는 손님들의 구매 패턴을 분석하고 재고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24시간 무인 마트도 쉽게 운영할 수 있다.

 


인간이 컴퓨터의 일부가 되고 컴퓨터도 인간의 일부가 된다. 이제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들이 현실이 된다. 뇌와 컴퓨터가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구상을 엘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모터스 최고경영자(CEO)가 현실로 구현하겠다고 나섰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머스크가 ‘뉴럴링크Neuralink’라는 회사를 설립했다고 3월 27일 보도했다. 전기 차 양산에 이어 민간 우주여행, 화성 식민지 개척을 시도하는 머스크가 이번엔 ‘뇌와 컴퓨터가 결합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뉴럴링크는 ‘전자그물망(neural lace)’이란 기술에 주목한다. 이것은 액체 상태의 전자그물망을 뇌에 주입하면 특정 뇌 부위에서 액체가 최대 30배 크기의 그물처럼 펼쳐지는 기술이다. 이 그물망은 뇌세포들 사이에 자리 잡아 전기 신호·자극을 감지할 수 있다. 뇌에 일종의 인공지능(AI) 컴퓨터를 심겠다는 발상의 시작인 셈이다. 머스크는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면 인간은 AI가 시키는 대로 하는 ‘애완 고양이(house cat)’가 될 것”이라며 “전자그물망을 두뇌에 삽입해야 인간이 AI에 지배당하지 않고 공생한다.”고 말했다.

 

뉴럴링크의 우선 목표는 뇌질환 문제 해결이다. 간질·우울증 등 만성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뇌 삽입 물질이 뉴럴링크 최초의 제품이 될 것으로 외신은 전망한다. 나아가 뉴럴링크는 공각기동대처럼 컴퓨터와 뇌를 연결해 인간이 원하는 정보를 뇌에 입력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 기술이 성공하게 되면 반대로 인간의 기억을 PC의 서버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확인할 수 있다. 인지력·사고력 등 뇌의 특정 기능을 향상시키는 ‘뇌 미용 성형 수술’도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뇌 과학 연구가 효과적으로 결합한다면 의외로 빠른 시간 안에 신세계가 열릴 수 있다. 앞으로 뇌에 칩만 심으면 안 배운 외국어도 할 수 있고,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처럼 뇌에 매뉴얼 프로그램을 접속하면 헬기를 처음 타는 사람이 헬기 조종법을 익히는 세상이 펼쳐질 수도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3. 08:30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예수 공자 석가와 함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聖人중의 한사람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네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예수가 약간 늦긴 했지만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고, 모두 남자이며, 돈벌이에는 별로 소질이나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결정적인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그들 모두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천이지 결코 이론이 아니었다. 예수가 주장한 사랑과 용서, 석가의 자비, 공자의 인仁 등은 모두 인간이 행해야 할 실천적 개념들이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일생동안 찾아 헤맨 것도 행위의 절대적 기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러한 윤리적 문제를 행동을 통해 직접 스스로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이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목숨을 건 실천이야말로 그들의 이름이 빛나게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나 과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면 소위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정치제도란 있을 수 없으며, 과학에 있어 절대적 진리란 없기 때문이다.

 

기원전 339년, 71세에 독약을 마시고 평소에 주장하던 ‘영혼의 나라’로 돌아간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튀어나온 눈과 작은 키, 그리고 들창코에 대머리를 연상하게 되지만 그러한 외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악녀로 유명한 아내를 사랑한 애처가 였으며, 2박3일을 한자리에서 사색을 할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겨울에도 맨발에 얇은 외투를 걸쳤을 뿐이며, 말술에도 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사형장에서 독배를 마실 때 그의 아내가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다는데 이는 그의 탁월한 건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만큼 그의 아내 이름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처로 기록된 크산티페와 한평생(소크라테스가 50세에 결혼하였으니 사실은 20년)을 살았다는 것은 그의 인내심이 신적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친구들이 그에게 ‘자네같이 똑똑한 친구가 왜 크산티페 같은 악처와 사는가’ 라고 물었을 때, “크산티페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여자와도 결혼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서 그의 유머감각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담장 밑에서 동네청년과 철학적 담론을 즐기고 있을 때 크산티페는 담장 너머로 구정물을 끼얹었다고 한다.

 

4대 성인 중 나머지는 다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예외다. 그는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여전히 위대한 철학자로, 사상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세 사람에 비해서 소크라테스의 레테르는 조금 딸린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예수를 기록한 『성경』은 세계 최대 베스트셀러이며, 불교의 경전이나 유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며 우리 문화의 한 틀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 그는 철학자라는 돈 안되는 직업을 가진(실제 직업은 좋게 말해서 조각가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석공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평민이었다. 아테네에서 열리는 모든 술자리에 기어코 참석하였으며, 매춘부와 잠자리도 거절하지 않았다. 시장이나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는 언제나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그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너 자신을 알라” 라는 한마디를 통해서이다. 그래도 이 말 한마디 때문에 4대성인으로서 소크라테스는 겨우 체면을 살리게 되었다. 사실 할아버지의 유언은 몰라도 이 말은 누구나 알며, 영어시간만 되면 눈이 감기는 시절에도 “Know yourself"는 유창하게 발음하였다. 또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이 말을 인용하기까지 하였다. 필자도 어릴 때 종종 인용하였는데 그 때는 “니 꼬라지를 알라”는 말로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역시 성인의 말은 세월이 가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말의 의미는 소크라테스가 전하려고 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원래 뜻을 모르고 단지 그 문장의 의미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보통 소크라테스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처음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당시 델포이 아폴론신전 현관기둥에 씌어져 있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의 정치인이나 문학가, 법률가 등 지식인들을 향해 “너 자신을 알라”라고 겁 없이 외쳐대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행동은 무모한 짓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곧 그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국가에서 인정한 신을 섬기지 않았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재판 결과 독미나리즙 한 사발을 받게 되었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기에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게 되었는가?

 

 


 

당시 그리스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을 소피스트(sophist)라고 부른다. 물론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 중의 한사람일 것이다. 실재로 그는 소피스트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소피스트들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사상을 가진 자였고 그래서 소피스트가 아닌 철학자로 분류되었다. 그가 소피스트들과 구별되는 것은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주장하지 않고 절대적인 진리를 찾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델피Delphi 신탁의 예언을 들었다. 카이레폰이 델피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가 있는가’ 라고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진리탐험은 여기서 시작된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신이 가장 현명한 자라는 신탁의 대답은 그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본 검객 미야모토무사시(宮本武將)가 자신보다 고수를 찾아 일본열도를 헤맨 것처럼, 자신보다 더 현명한 자를 찾기 위해 아테네의 일류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이 자신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면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대답이 오류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당시 지식인들에게 던진 질문은 “용기勇氣란 무엇인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윤리적 개념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되었기 때문에 ‘경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문 : 경건이란 무엇인가?

 

    답 : 잘못한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다.

 

    문 :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경건한 행동들 중 한 두 가지를 말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경건한 행동들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경건성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답 : 신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경건한 행동이다.

 

    문 : 신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한 신에게 기쁜 것이 다른 신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답 :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며, 모든 신이 싫어하는 것이 불경이다.

 

    문 : 신들은 어떠한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그 행동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신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행동은 경건한가?

 

    답 : 경건은 신들에게 바쳐야할 정성과 관계가 있다.

 

    문 : 어떠한 종류의 정성이 신에게 바쳐져야 하는가?

 

    답 : 소크라테스 난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이쯤 되면 바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방식을 변증술, 대화법, 산파술 등으로 부른다. 질문에 대답을 하였으나 소크라테스는 그 대답이 정답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다시 대답을 하도록 계속 유도한다. 상대방은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하였지만 사실은 그의 대답은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듣고자 한 것은 용기나 경건, 선 등의 윤리적 개념이 적용되는 갖가지 구체적 행동의 사례가 아니라 그 개념 본래의 의미였다. 경건한 행위가 아니라 ‘경건 그 자체’, 즉 모든 경건한 행위를 경건한 행위라고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경건성’(이를 우리는 경건의 ‘정의定義’라고 부른다), 즉 영원불변하는 경건의 이데아에 대해서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 당시 지식인들과의 문답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현명한 자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그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소크라테스 자신도 진리를 알고 있지는 못했다. 단지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자였다. 왜냐하면 진리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역설이 드러난다. 즉 자신은 자신이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면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으므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무지(無知)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진리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 때(無知의 知), 그는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무지의 자각은 단순히 인식의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에서 더욱 중요하다.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무지로 인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신발 만드는 법을 알 때 그는 좋은 신발을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용기가 무엇인지 알 때 그는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善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는 곧 악덕惡德이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은 바로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 즉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개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가 바로 진리였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앎으로써 그에 따른 실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 철학이 갖는 위대성이다. 보통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한마디로 주지주의(主知主義),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소피스트의 변명을 들어보자. 당시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은 소피스트들로서는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란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의 대표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인간이 바로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즉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진리의 기준이 서로 달랐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자신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무식한 인간으로 낮추어 보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여름에도 내가 춥다면 추운 것인데 그걸 거짓이라고 몰아세우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를 그냥 두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멜레토스Meletos에 의해 고발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니 그는 자유인이 되어 영혼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에게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으니까.

 

플라톤이 스승의 재판을 지켜보고 쓴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마지막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변론을 끝맺는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중에 어느 편이 더욱 좋은 일을 만날는지, 그건 신밖엔 아무도 모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 07:30






 

 

알아두면 든든한 고사성어

覆水難收복수난수

 

 


 

 

오늘의 한자 ‘覆水難收(복수난수)’에서, ‘覆(복)’은 ‘엎어지다’, ‘뒤집히다’는 뜻이다. ‘넘어질 전(顚)’자와 결합된 ‘顚覆(전복)’은 ‘뒤집혀서 엎어지다’는 뜻이고, ‘뒤칠 번(飜)’자와 결합된 ‘飜覆(번복)’은 ‘이리저리 뒤쳐서 고치다’, ‘뒤집다’는 뜻이다.

 

 

 

‘水(수)’는 ‘물’을 말한다. ‘水滴石穿(수적석천)’이란 말이 있는데, ‘물방울 떨어질 적(滴)’자, ‘돌 석(石)’자, ‘뚫을 천(穿)’자로 구성된 이 말은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지면 돌이 뚫린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꾸준하게 오랫동안 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비유하는데 쓴다.

 

 

 

‘難(난)’은 ‘어렵다’는 뜻이다. ‘관문 관(關)’자와 결합된 ‘難關(난관)’은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을 말하며 ‘어려운 고비’를 비유하여 쓰인다. ‘풀 해(解)’자와 결합된 ‘難解(난해)’는 ‘풀기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收(수)’는 ‘거두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담다’로 번역한다. ‘가을 추(秋)’자와 결합된 ‘秋收(추수)’는 ‘가을에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뜻하여 ‘가을걷이’를 말하고, ‘돈’을 의미하는 ‘쇠 금(金)’자와 결합된 ‘收金(수금)’은 ‘받을 돈을 거두어들이다’는 뜻이다.

 

 

 

그래서 ‘복수난수’는 ‘엎질러진 물은 되 담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 성어는 『습유기(拾遺記)』란 책에 나온다.

 

『습유기』는 중국의 전설을 모은 지괴서이며, 작자는 동진(東晋) 때의 왕가(王嘉)이다. 이 책은 신선(神仙)과 방술(方術)을 선전하는 내용을 10권으로 엮은 책이며, 『왕자년습유기(王子年拾遺記)』라고도 한다.

 

왕가(王嘉)는 자가 자년(子年)으로 동진과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 350-394) 때에 활동하였으며 농서(隴西) 안양(安陽; 지금의 감숙성 위원) 사람이다.

 

 

 

강태공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낚시꾼을 떠올릴 것이다. 이야기의 소재는 바로 그 강태공이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을 훌쩍 넘긴 주(周) 나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 나라를 세운 사람이 무왕(武王) 희발(姬發)이라고 하나 실제로 주 나라의 건립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무왕의 아버지 문왕(文王) 희창(姬昌)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연의』에서, 삼국시대의 위(魏)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무제(武帝) 조조(曹操; 155-220)와 문제(文帝) 조비(曹丕; 187-226)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공식적으로 위 나라를 세운 사람은 아들 조비이지만 실제로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은 아버지인 위왕 조조였던 것이다.

 

참고로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국지』는 실제로 『삼국지연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삼국지(三國志)』는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정통 역사서 즉 정사(正史)이고, 『삼국지연의』가 바로 명대 초기의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에서 삼대(三代)라고 하면 상고시대의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를 가리킨다. 상나라는 후에 도읍이 은허(殷墟)로 옮겨지면서 은(殷)나라로 불리게 된다. 그 상나라 말기에 지혜가 풍부하고 계략이 많은 한 인물이 있었다. 이 사람의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이며, 자는 자아(子牙)라고 한다. 주 민족의 지도자 희창에게 중용되기 위하여 그는 항상 위수(渭水)가에서 미끼 없는 곧은 낚시를 강물에 드리우고 남보란 듯이 낚시를 하였다. 성이 희(姬)요, 이름이 창(昌)인 희창은 당시 서방 제후의 패자란 의미로 서백(西伯)으로 불렸다.

 

강태공이 만날 온종일 낚시만을 하러 가기 때문에 집안의 생계는 늘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마(馬)씨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너무 싫었고 미래도 불확실하자 강태공과 함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하였다. 강태공은 아내에게 떠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만류하면서 지금은 가난하게 살지만 때가 되면 부귀해질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마씨는 그가 빈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여기고 아무 말도 믿지 않았다. 강태공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그녀가 떠나가도록 했다.

 

훗날 강태공은 마침내 서백의 신임과 중용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을 잠깐 이야기하자.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겠다. 하루는 서백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점을 쳤다. 점괘는 이러하였다.

 

“얻는 것은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고, 범도 아니고, 곰도 아니다. 얻는 것은 바로 패왕(覇王)을 이루게 해 줄 보필자이다.”

 

서백이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의 남쪽에서 강태공을 만났다. 강태공과 얘기를 나누어 본 서백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 태공께서 ‘성인이 주(周)에 가면 주가 흥성하리라’라고 하셨는데, 선생이 바로 그 분이시군요! 우리 아버지 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리신지 오래되셨습니다.”

 

그리고는 수레를 함께 타고 돌아와 강태공을 스승으로 삼았다.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에서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후에 그는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즉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에 제후로 봉해져 그곳의 시조가 되었다.

 

마씨는 그가 부귀를 누리고 또한 지위가 높아진 것을 보고 당초에 그를 떠난 것을 후회하였다. 이윽고 마씨는 강태공을 찾아와 옛날처럼 부부로 살자고 간청했다.

 

강태공은 이미 마씨의 사람됨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부부의 연을 잇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물 한 병을 땅에 쏟으면서 마씨에게 주워 담아보라고 하였다.

 

마씨는 재빨리 엎드려서 물을 주워 담았으나 약간의 진흙물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태공이 냉랭하게 마씨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미 나를 떠났기 때문에 다시는 함께 합칠 수가 없소. 이는 땅에 떨어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소.”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고금을 통해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한나라 무제(武帝: 기원전141-기원전87) 때 승상을 지낸 주매신(朱買臣)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도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강태공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하면, 그는 동해 사람이다. 동해는 당시 동이족이 살던 곳이다. 순 임금과 우 임금 시절에 그의 조상이 공을 세워 여(呂)라는 곳에 봉해져 여상(呂尙)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70세까지 평범하게 살다가 70세부터 80세까지 10년 동안 서백을 기다리기 위하여 위수가에서 낚시를 드리웠다고 한다.

 

그래서 강태공과 관련해서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는 말도 있다. ‘궁할 궁(窮)’자를 쓰는 궁팔십은 강태공이 서백을 만나기 이전 80년 동안의 궁핍한 생활을 이름이요, ‘달할 달(達)’자를 쓰는 달팔십은 강태공이 왕조 개창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80년 동안 풍족한 삶을 산 것을 말한다.

 

 

 

우리 속담의 ‘쏘아 놓은 화살이요 엎지른 물이다’ 혹은 ‘깨진 거울은 다시 비춰지지 않는다’를 떠오르게 하는 이 성어는 한 번 저지른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음을 말해 준다. 일반적으로 한 번 헤어진 부부나 친구는 다시 결합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성어로는 ‘어려운 난(難)’자 대신 ‘아닐 불(不)’자를 쓰는 ‘복수불수(覆水不收)’가 있고, ‘돌아올 반(返)’자, ‘동이 분(盆)’자를 써서 ‘엎질러진 물은 물동이에 되 담을 수 없다’는 뜻을 가진 ‘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 ‘잔 배(杯)’자를 써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覆杯之水(복배지수)’ 등이 있다.

 

 

 

또한 유사한 성어로는 ‘이미 쏜 화살’이라는 ‘이발지시(已發之矢)’, ‘시루가 이미 깨졌다’는 뜻의 ‘甑已破矣(증이파의)’, ‘한번 떨어진 꽃은 나뭇가지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낙화불반지(落花不返枝)’ 또는 ‘낙화난상지(落花難上枝)’, ‘깨어진 거울은 다시 비추지 못한다’는 ‘파경부조(破鏡不照)’, ‘깨진 거울 조각을 들고 하는 탄식’이라는 뜻의 ‘파경지탄(破鏡之歎)’ 등이 있다.

 

 

 

【단어】

 

覆(복): 엎어지다. /(덮을아)부, 총18획, fù/

 

水(수): 물. /水(물수)부, 총4획, shuǐ/

 

難(난): 어렵다. /隹(새추)부, 총19획, nán/

 

收(수): 거두다. /(등글월문)부, 총6획, shōu/

 

 

 

【출전】

 

동진(東晋) 때 왕가(王嘉)의 『습유기(拾遺記)』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1. 02:00






 

 재미있는 한자

三人成虎 삼인성호

 

 

 

 

 

오늘의 한자 ‘三人成虎삼인성호’에서 ‘三삼’은 숫자 ‘3’을 뜻한다. ‘세 가지 효도’라는 뜻의 ‘三孝삼효’라는 말이 있다. 제일 큰 효는 부모가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하는 것이고(尊親존친), 그 다음은 부모의 명성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弗辱불욕), 맨 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다(能養능양).

 

 

 

‘人非木石인비목석’이라는 말이 있다. ‘人인’은 ‘사람’을 말한다. ‘아닐 비非’, ‘나무 목木’, ‘돌 석石’자로 이루어진 ‘人非木石’은 ‘사람은 목석이 아니다’는 뜻이다. 사람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成성’은 ‘이루다’는 뜻이다. ‘모양 형形’자와 결합된 ‘形成형성’은 ‘어떤 모양을 이루다’는 뜻이고, ‘합할 합合’자와 결합된 ‘合成합성’은 ‘둘 이상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다’는 뜻이다.

 

 

 

‘虎호’는 ‘범’, ‘호랑이’를 말한다. ‘가죽 피皮’자와 결합된 ‘虎皮호피’는 ‘호랑이의 털가죽’을 말하고, ‘용 룡龍’자와 결합된 ‘龍虎용호’는 ‘용과 범’이라는 뜻으로 ‘실력이 비슷한 두 영웅’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삼인성호’는 ‘세 사람이 호랑이를 이루어낸다’는 뜻이다. 헛소문이나 와전된 말이 여러 차례 중복해서 나타나면 듣는 사람이 진짜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음을 비유해서 쓴다.

 

 


 

이 말은 『전국책戰國策』「위책魏策」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책』은 중국 전국시대의 작품으로 원저자는 알 수 없으며 서한西漢 때 유향劉向(서기전77-서기전6)이 편찬하였다. 주로 중국 전국시대에 활약한 책사策士와 모사謀士들의 문장을 모아 놓았다. 서주西周동주東周진秦제齊초楚조趙위魏한韓연燕송宋위衛중산中山 등의 12책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나라 원왕元王(?-서기전469)에서부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서기전259-서기전210)까지 2백40여 년간 살았던 여러 인사들의 주장이 실려 있다.

 

‘삼인성호’라는 고사의 내용은 이러하다.

 

 

 

중국 전국시대에 위魏나라 혜왕惠王(서기전400-서기전319) 때의 일이다. 위나라의 태자가 인질이 되어 조趙 나라의 도성인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위나라 혜왕은 중신 방총龐葱을 파견하여 태자를 모시고 가도록 결정하였다.

 

방총은 역사상 유명한 손빈孫臏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서기전400-서기전320)에게서 병법을 배운 방연龐涓(?-서기전341)의 조카이다.

 

방총은 줄곧 혜왕의 신임을 얻어왔으나 조 나라로 떠난 뒤 누가 등 뒤에서 자신에 대한 나쁜 말을 하여 혜왕이 자신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길을 떠날 때 일부러 궁궐로 가서 혜왕에게 물었다.

 

“대왕, 만일 어떤 사람이 대왕께 아뢰기를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한다면 대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혜왕이 즉시 대답하였다.

 

“나는 물론 믿지 않소.”

 

방총이 이어서 물었다.

 

“만약 두 번째 사람이 대왕께 아뢰기를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한다면 대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혜왕이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반신반의할 것 같소.”

 

방총이 다그치듯 이어서 물었다.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대왕께 아뢰기를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한다면 대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혜왕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였다.

 

“그땐 믿을 것이오.”

 

방총이 이 상황을 분석하여 말하였다.

 

“길거리에 호랑이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그곳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면 호랑이가 있는 것이 됩니다(夫市之無虎明矣, 然而三人言而成虎.) 이제 저는 태자를 모시고 한단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우리 도성인 대량大梁과의 거리는 궁궐에서 저자거리와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멉니다. 게다가 등 뒤에서 제가 옳지 않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세 사람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금후에 이러한 말들을 잘 살펴서 가볍게 믿지 마시옵소서.”

 

혜왕이 마지못해서 말하였다.

 

“공의 뜻을 잘 알겠소. 공은 염려 말고 태자를 모시고 갔다 오시오.”

 

방총이 조 나라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과연 혜왕에게 그에 관한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 혜왕은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그에 관한 험담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혜왕은 마침내 그들의 말을 믿게 되었다.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같은 사실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이해능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남의 말을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총명한 사람이 된다. ‘총명聰明’은 ‘귀 밝을 총聰’자에, ‘눈 밝을 명明’자이다. 귀가 밝아야 시비를 정확히 분별할 수 있고, 눈이 밝아야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 고사에서 보듯이, 세 사람이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진짜라고 믿게 할 수 있다. 헛소문이나 와전된 말이 여러 차례 중복해서 나타나면 듣는 사람이 진짜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게 된다는 말이다.

 

이 성어는 ‘저자거리’를 의미하는 ‘市시’자를 써서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라고도 한다.

 

 

 

【단어】

 

三삼: 셋. /一(한일)부, 총3획, sān/

 

人인: 사람. /人(사람인)부, 총2획, rén/

 

成성: 이루다. /戈(창과)부, 총7획, chéng/

 

虎호: 범. 호랑이. /(범호밑)부, 총8획, hū/

 

 

 

【출전】

 

『전국책戰國策』「위책魏策」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31. 13:00





 

고사성어

塞翁之馬새옹지마

 

 

 

 

 

  오늘의 한자 ‘塞翁之馬새옹지마’에서, ‘塞새’는 변방, 변경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의 북쪽 변경을 말한다. 특히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塞北새북’이라고 한다. 이 글자가 ‘막다’는 의미로 쓰이면 ‘색’으로 읽는다. 예를 들면 동의어 ‘窒질’과 결합된 ‘窒塞질색’은 ‘몹시 싫어해서 기가 막히다’는 뜻이다.

 

 

 

  ‘翁옹’은 ‘노인’이라는 말로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도 성 뒤에 붙여 ‘김옹’이니, ‘최옹’이니 하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 ‘새옹’은 ‘변방에 사는 노인’이라는 의미가 된다.

 

‘지之’는 한정어와 중심어 사이에 쓰는 구조조사이다. 본문에서는 한정어 ‘새옹’과 중심어 ‘마’ 사이에서 ‘-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馬’는 ‘말’이다. 우리말의 ‘말을 타다’는 의미로 ‘乘馬승마’와 ‘騎馬기마’란 한자어가 있다. ‘乘승’은 ‘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말에 오르다’는 뜻이고, ‘騎기’는 ‘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새옹지마’는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새옹지마’는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고사는 《회남자淮南子》〈인간훈人間訓〉편에 나온다.

 

  《회남자》는 중국 전한前漢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서기전179-서기전122)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책이다. 회남왕이란 중국 고대의 왕작王爵 봉호封號 명칭이다. 역대로 이 봉호를 받은 사람은 20여 명이라고 한다. 유안은 우리가 잘 아는 고조 유방劉邦(서기전256-서기전195)의 손자이다. 유안이 소비蘇飛, 이상李尙, 좌오左吳, 전유田由, 뇌피雷被, 모피毛被, 오피伍被, 진창晉昌 등 이른바 ‘팔공八公’ 등과 함께 편찬한 이 책은 도가 사상을 위주로 해서 유가법가음양가 등의 학설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그래서 잡가雜家로 본다.

 

 

 

  자 그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

 

 

 

  옛날 중국의 서북쪽 변방 요새 부근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기르는 말이 갑자기 변방 밖으로 달아나서 찾을 길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아들은 큰 낙심을 하였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일을 알고 난 후, 모두 와서 그를 위로하며 그렇게 병이 날 정도로 너무 지나치게 상심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말 주인의 아버지는 오히려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말 한 필을 잃어버린 것이 좋은 일이 될지 어찌 알겠소?”

 

  사람들은 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묻기가 곤란하여 할 수 없이 돌아갔다.

 

  수개월이 지난 후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달아났던 말이 홀연히 돌아왔던 것이다. 게다가 키가 크고 몸집이 큰 준마를 한 필 데리고 왔다. 인근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축하를 하였으며 아울러 노인이 이전에 한 말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의 축하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냉랭하게 말했다.

 

  “달아난 말이 돌아왔고 또 준마 한 필을 데리고 왔지만 이것이 좋지 않은 일이 될지 어찌 알겠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의혹이 생기며 답답하였다.

 

  ‘이 노인은 너무 괴상하다. 분명히 좋은 일인데 어째서 또 좋지 않은 일을 생각하는 것일까?’

 

  노인의 말은 또 한 번 적중했다. 노인의 아들은 그 준마를 매우 좋아해서 항상 타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 말을 타고 방심하다가 떨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불행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또다시 모두 위문을 하러 왔다. 사람들이 예상 외로 노인은 또다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였다.

 

  “다리뼈가 부러진 것이 좋은 일이 될지 어찌 알겠소?”

 

  과연 일 년 후에 변방 바깥에 사는 흉노가 군대를 이끌고 침입을 하였다. 노인의 집 인근에 사는 젊은이들은 모두 국가의 부름에 응해 군대에 가서 전쟁을 하였다. 그 결과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전사하는 바람에 여느 집안의 노인들은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되었으며, 어떤 노인들은 이 때문에 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았으며 따라서 노인과 함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새옹지마’는 세상만사는 변화가 많아 어느 것이 화禍가 되고, 어느 것이 복福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인생人生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시적인 손실을 입더라도 이로 인해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또 세상일이란 변화가 많아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할 수 있음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즉 ‘잃다’는 의미의 ‘실失’자를 써서 ‘새옹실마塞翁失馬’라고 한다. 이 말은 ‘변방의 노인이 말을 잃다’라는 뜻이다.

 

또 이 말은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고도 쓰며, 새옹득실塞翁得失·새옹화복塞翁禍福 또는 단순히 새옹마塞翁馬라고도 한다.

 

 

 

  【단어】

 

  塞새: 변방. /土(흙토)부, 총13획, sàì/

 

  翁옹: 늙은이. /羽(깃우)부, 총10획, wēng/

 

  之지: 조사. /丿(삐침)부, 총4획, zhī/

 

  馬마: 말. /馬(말마)부, 총10획, mǎ/

 

 

 

 【출전원문】『회남자淮南子』「인간훈人間訓」

 

 夫禍福之轉而相生, 其變難見也.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能爲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髀.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30. 09:30






 사자성어

朝三暮四 조삼모사

 

 

 

 

 

   금주의 한자 ‘朝三暮四조삼모사’에서,

 

   ‘朝조’는 ‘아침’이라는 말이다. ‘저녁 석夕’자와 결합된 ‘朝夕조석’은 ‘아침과 저녁’이란 뜻이고, ‘책 펴낼 간刊’자와 결합된 ‘朝刊조간’은 ‘아침에 발행하는 신문’을 말하고, 저녁 신문은 ‘夕刊석간’이라고 한다.

 

   ‘三삼’은 숫자 ‘3’을 말한다. ‘잊을 망忘’자를 쓰는 ‘三忘삼망’이란 말이 있는데, 장수가 출정해서 전투에 임할 때 잊어야 할 세 가지 일을 말한다. 즉 출정의 명령을 받은 날엔 집을 잊고(忘家), 전투가 벌어질 때는 부모를 잊고(忘親), 북소리가 급박할 때는 자기 몸을 잊어야 한다(忘身)는 것이다.

 

‘暮모’는 ‘저녁’을 뜻한다. ‘朝令暮改조령모개’라는 자주 쓰인다. ‘명령 령令’자, ‘고칠 개改’자로 구성된 이 말은 ‘아침에 명령을 내렸다가 저녁에 다시 고친다’는 뜻으로 법령을 자주 고쳐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움을 이른다.

 

   ‘四사’는 숫자 ‘4’를 말한다. ‘근심 환患’자를 쓰는 ‘四患사환’이란 말이 있는데, 정치를 하는데 네 가지의 폐단이란 뜻이다. 즉 ‘거짓’을 뜻하는 ‘僞위’, ‘사사로움’을 뜻하는 ‘私사’, ‘방종’을 뜻하는 ‘放방’, ‘사치’를 뜻하는 ‘奢사’를 일컫는다.

 

 


 

   조삼모사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의미이다. 원래는 수단을 사용해서 남을 잘 우롱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나중에는 수법을 바꾸어서 남을 속이거나 혹은 생각이 정해지지 않고 반복무상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이 말은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하거나 남을 농락하여 자기의 사기나 협잡술 속에 빠뜨리는 행위를 이르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 말은 《열자列子》〈황제黃帝〉편에 나온다. 여기서 잠깐 《열자》라는 책이 어떤 책인가 알아보자.

 

   초기 황로도가老道家의 경전에 속하는 이 《열자》라는 책은 열어구列御寇 즉 열자가 썼다고 전해지는데, 사실은 중국 전국시대 초기에 열자와 그의 제자 및 후학이 지은 것이다. 이 책은 사상적으로 도가와 매우 가까우며, 후에 도교에서 경전으로 받들었다. 전한 초기에 매우 성행하였으나 한 무제 유철이 백가를 물리친 후에 민간에서만 관심을 받다가, 서진 시기에 다시 중시되었으며 당송唐宋 시기에 이르러서는 정점에 도달했다. 당 고종高宗 이치李治는 건봉乾封 2년인 667년에 노자老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로 존봉하였으며 현종玄宗 이륭기李隆基는 개원開元 25년인 737년에 현학박사玄博士를 설치하고, 《노자老子》, 《열자列子》, 《장자莊子》, 《문자文子》를 필독서로 지정하였는데, 당시에 이를 ‘사현四玄’이라고 불렀다. 또 천보天寶 4년인 745년에는 열어구冲虛眞人으로 추봉하였고, 《열자》를 《충허진경冲虛眞》으로 격상시켰다. 송대에 와서, 진종眞宗 조항趙恒은 ‘충허’ 뒤에 다시 ‘지덕至德’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여 《충허지덕진경冲虛至德眞》이라고 불렀다. 휘종徽宗 조길趙佶은 정화政和 6년인 1116년에 《황제내경黃帝內經》, 《도덕경道德經》(즉 《노자》), 《열자》, 《장자莊子》에 대해 박사를 설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렇게 중시된 《열자》는 쉽고 우아한 산문으로 쓰여졌으며. 우언寓言을 통해서 사람에게 지혜를 열어주고, 많은 예지叡智와 철리哲理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조삼모사의 이야기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서 도가의 대표 인물인 장주莊周(서기전369-서기전286)의 저작인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도 나온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송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에는 원숭이 떼를 기르는 노인이 한 명 있었는데, 사람들은 원숭이 ‘저狙’자를 붙여서 그를 ‘저공狙公’이라고 불렀다. 저공은 가정 형편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원숭이를 매우 좋아해서 차라리 자신이 먹는 것을 줄이고 쓰는 것을 절약하며 돈을 벌어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사 줄지언정 이제까지 한 번도 원숭이들의 배를 굶게 한 적이 없었다.

 

   저공과 원숭이들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냈으며 서로 간에 사이가 매우 좋았다. 원숭이들이 무엇을 생각하면 저공은 원숭이를 보는 순간 곧바로 그들의 생각을 알았으며, 저공이 무엇을 말하면 원숭이들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저공은 원숭이들의 먹이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원숭이들의 먹성이 대단해서 한도 끝도 없이 먹어대니 마침내 저공은 먹이를 공급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원숭이들의 먹이를 줄이려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원숭이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하나의 꾀를 생각해냈다.

 

   얼마 후 저공이 원숭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다.

 

   “앞으로 너희들에게 도토리를 줄 때,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면 되겠니?”

 

원숭이들은 이 말을 듣고 도토리를 적게 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날뛰면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저공이 말투를 바꾸어서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아침에는 네 개를 주고 저녁에는 세 개를 주겠다. 이렇게 하면 충분하지?”

 

이 말을 들은 원숭이들은 모두 도토리를 많이 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땅에서 펄쩍 뒤며 기뻐했다.

 

 

 

 

 

【단어】

 

朝조: 아침. /月(달월)부, 총12획, cháo/

 

三삼: 3. 셋. /一(한일)부, 총3획, sān/

 

暮모: 저물다. /日(날일)부, 총15획, mù/

 

四사: 4. 넷. /(큰입구몸)부, 총5획, sì/

 

 

 

【출전】

 

《열자列子》〈황제黃帝〉

 

宋有狙公者, 愛狙, 養之成, 能解狙之意; 狙亦得公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匱焉, 將限其食. 恐衆狙之不馴於己也, 先誑之曰: “與若茅, 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茅, 朝四而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物之以能鄙相籠, 皆猶此也. 聖人以智籠愚, 亦猶狙公之以智籠衆狙也. 名實不虧, 使其喜怒哉.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 何謂‘朝三’? 狙公賦茅,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