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퀸의 탄생과 성공스토리 -
불모지에서 열린 기적의 열매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경기가 끝났을 때, 전세계 언론과 팬들은 들썩거렸다. 모두가 예상했던 결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김연아의 것이라 여겼던 금메달은
러시아 소녀가 차지했다. 진짜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만약 금메달을 뺏긴 주인공이 김연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이슈가 되었을까? 전 세계 피겨
전문가들이나 피겨팬들이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연아가 진정한 피겨퀸이라는 사실이 또 한번 증명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금메달을 빼앗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연아가 어떻게 세계인들이 동경하는 피겨퀸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피겨환경이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김연아는 올타임 레전드로서 피겨퀸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녀의 성공 역정이 일꾼의 신앙과 삶에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영웅은 이렇게 탄생했다. 중국 무협
영화나 소설이 즐겨 그리는 이야기 중 하나는 영웅 이야기이다. 중국 대륙이 커서 그런지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천하天下’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 천하를 쥐는 자는 하늘이 내려준다고 한다. 나라의 기운이 쇠퇴해 조정은 통제력을 잃고, 온갖 군웅들이 일어나 세력을
다투어 온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민중들이 고통을 받는 난세亂世에, 하늘이 점지한 영웅은 나타난다. 영웅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모든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천하를 평정하게 된다.
이런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와 같은 영웅 스토리를 지닌, 드라마틱한 감동과 삶의 교훈을 동시에 안겨주는 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바로 피겨스케이팅의 여왕
김연아 선수이다.
피겨스케이팅
세계를 하나의 천하로 대입해 보면, 피겨스케이팅 세계에 나타난 김연아 선수의 등장과 그녀가 만들어 온 피겨의 역사가 이런 영웅 스토리와 너무도
흡사함을 알게 된다. 김연아의 이야기는 이 시대가 바라는 신新영웅 스토리라 평가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강한 임팩트와 무게를 지니고 있다.
김연아의 등장
피겨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변방국이다. 중국에서는 첸 루라는 선수가 올림픽 동메달을 딴 전력이 있고, 일본에서도 이토 미도리, 아라카와 시즈카 선수 등이
아시아의 위상을 높여 주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남의 잔치를 구경만 하는 신세였다.
게다가 일본에선 여자 선수는 뛰기
힘들다는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고 러시아의 베테랑 이리나 슬루츠카야Irina Slutskaya를 이기는 15세 선수의 등장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다. 그 선수가 아사다 마오Asada Mao였다. 두 달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2006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올림픽이 열리는
이전 해 15년 7월생까지 가능) IOC(세계올림픽위원회)의 룰을 바꾸어야 한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총리까지 나서서 여론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일본 여론을 들끓게 하는 천재소녀에게 세계의 이목이 맞추어졌다. 과연 세계피겨를 지배할 천재소녀의 등장인가?
2006년 토리노올림픽의 금메달이
일본 선수에게 돌아가고 한달 후, 올림픽에 참가했다면 금메달이 확실시 된다던 아사다 마오 선수는 웬 무명의 한국 선수에게 져서 주니어
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놓치게 된다. 아니 놓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5점이 넘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무너졌다.
그녀는 아사다 마오 선수와 동갑내기로 20일 먼저 태어난 한국의 김연아金姸兒 선수였다. 김연아가 누구인가? 그동안 단 한번도 올림픽 10위권 내에 이름도 올려보지 못한 피겨의 변방국 한국 출신이다. 그런 선수가 차세대 여왕이라고 칭송되는 아사다 마오 선수를 25점이나 차이를 내며 이기다니?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장기의 바탕이
된 중국 천하통일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초나라의 항우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낼 희대의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세력도 가장 컸다. 그러나 그런
항우는 시장바닥에서 술이나 얻어먹고 살던 백수건달 유방에게 패배하여 천하를 내어주었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기나긴 춘추전국시대의 막이
내리고 통일제국 한나라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 비교하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연아의 등장은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여왕 자리는 비어있다. 그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여왕 후보들이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렇다 할 승자가 없는 와중에 마치 천하를 제패할 듯한 인물이 일본에서 나왔는데, 그녀를 단숨에 제압해버린
이름 없는(피겨계에서 그렇다는 거다) 변방국 출신의 승자.
일본은 여왕이 나올 만한 배경이
있었다. 수많은 국가적인 투자를 했고 역사와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다. 서구의 피겨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형국이고 그 기세가 아시아, 특히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정작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김연아였다.
여왕 김연아
2006년 주니어 월드에서 우승한
김연아가 모든 걸 갖춘 토탈 패키지형 선수
로 등장했다는 것 또한 판타지와 같은 감흥을 안겨준다. 토탈 패키지total package가
무엇인가. 외모면 외모, 기술이면 기술, 예술이면 예술 모든 걸 갖추고 있는 선수가 토탈 패키지형 선수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대로 이런 선수가
있었던 것 같지만, 사실 어느 외국 코치의 말을 빌리자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가 김연아다.
기술은 세대를 거치면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카타리나 비트가 1980년대의 전설적인 선수라지만 지금 이 시대에 온다면 경쟁이 안 된다. 그러니 세대를 뛰어넘어 기술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절대적 비교는 가능하다. 카타리나 비트가 그 당시 다른 선수들보다 기술이 월등했는가? 아니었다. 기술로는 데비
토마스(미국)나 이토 미도리(일본)선수가 훨씬 우수했다. 예술성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피겨계의 여왕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연아 선수보다 그 유명한 아사다 마오 선수가 기술이 더 뛰어난게 아닌가? 남자만의 전유물이라는 트리플 악셀 점프를 뛰어댄다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 아사다 선수가 트리플 악셀을 내세우지만 정작 기술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 김연아 선수는 스케이팅의 기초부터 모든 점프가 일정한 표준
방식 그대로의 정석定石이다. 정석이라 하면 쉬운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게 정석이다. 정석으로 뛰려면
너무나 힘들게 훈련해야 하므로 대부분의 선수가 뛰기 쉬운 자신만의 방식으로 뛰는 요행을 부린다.
김연아는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정석으로 배우고 훈련했다. 그래서 ‘점프의 교과서’라고 불리운다.
바르기 때문에 아름답다. 점프가 높고
비거리(뛰어서 날아가는 거리)가 길다. 자세가 흔들리지 않고 깨끗한 에지(스케이트날)로 뛰고 착지한다. 정석으로 뛰는 선수가 김연아 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석으로 뛰는 선수 자체가 드문데 거기에 김연아는 그 모든 기술의 원형을 구현한다.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거다)
“기술이 완성되면 예술이 시작된다”고
한다. 완벽한 기술에 예술성 또한 그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티스트artist의 경지에 올랐다고 피겨의 전문가들이 극찬하고 있다.
딱 한 가지만 부언하자면, 서구의 피겨가 발레를 접목했다면 김연아는 여기에 더해 한국적인 선을 덧입혔다. 누구도 전엔 볼 수 없었던 선이다.
물 흐르듯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 척추부터 이어진 선이 손 끝으로, 또 머리와 시선이, 그와 더불어 다리와 발이 온 몸 전체의 한 선으로
이어져 음악을 표현한다. 어느 외국 해설자는 “그녀의 스케이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무엇인가? 그건
전 세계가 꿈에서나 그릴 듯한 완벽한 피겨의 구현체가 눈앞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어느 해설자는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마치 꿈속에서나 보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피겨의 팬들은 그녀를 피겨 여왕을 넘어서 피겨의 여신이라고까지 칭송해 마지않는다. 혹은 피겨의 신이 직접 내려왔다고
한다. 어느 해설자는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어찌 여왕에
등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변방국 출신으로서 무수한 견제와 압박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그 눈물겨운 분투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알고 있듯 그녀는 무수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며 여왕의 자리에 올랐고, 이번 마지막 소치올림픽에서는 판정과 관련된 세계적인
관심과 논란을 남긴 채 은메달로써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경기 후 김연아 선수가 남긴 말처럼 ‘올림픽 2연패’니 ‘금메달’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김연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와 상황 속에서 다른 선수가 금메달을
가져가더라도 이미 김연아는 선수로서의 능력과 정신적 측면에 있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업과 성숙한 품격을 갖추고 있고 만천하에 공인을 받은
진정한 챔피언이기 때문이다. 세계 여왕,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이라는 칭호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