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4. 7. 8. 18:55


천지대세를 알아야 산다





천지대세 만유의 생명체라 하는 것은 대자연 섭리 속에서 왔다가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늙기 싫고 죽기 싫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섭리가 성숙됨에 따라서 만유의 생명체라 하는 것은 왔다 가는 것이고 그에 따라 역사도 조성되는 것이다. 

지구년이 초목농사를 짓는 것과 같이 우주년은 사람농사를 짓는다. 우주에서 사람농사를 짓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은 바로 여름과 가을이 바꿔지는 하추교역기이다. 지구년 초목농사를 지을 때에도 가을철에 열매를 맺어놓고 겨울에 폐장을 하지 않는가. 그걸 아까 내가 개구벽두에 묶어서 결론부터 얘기한다고 한 것이다.천지대세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고 열매를 여무는 법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한마디로 아주 다 하신 것이다.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고 열매를 여무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생사를 판단하는 법이다.” 알캥이를 여무느냐 아니면 빈 쭉정이, 그냥 허탕 치고 말아버리느냐, 이때는 바로 그걸 매듭짓는 때다. 


그래서 이 세상 천지대세를 아는 사람은 천지의 살 기운이 붙어 있다. 우리 상제님 말씀으로 “지천하지세자(知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생기(有天下之生氣)하고” 천지대세천하의 대세를 아는 자는 천하의 살 기운이 붙어 있고, “암천하지세자(暗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사기(有天下之死氣)라.” 천하의 대세가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만유생명은 이 대자연 섭리 속에서 살다 간다. 헌데 만유의 생명 중에 오직 사람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 정기를 다 타고나서 천지만큼 머리가 밝다. 만유생명의 상징적인 생물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알고서 살다가 죽게 되어져 있는 것이다. 천지대세 사람은 사람인지라 하늘땅이 둥글어가는 이치를 알게끔 되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천지의 질서가 바꿔지지 않는 때라 하더라도 우주질서, 이 세상이 둥글어가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 된다. 


더군다나 지금은 천지 질서가 바꿔지는 환절기다. 여름과 가을이 바꿔지는 천지 변혁기다. 천지대세 이번에는 사람이기 때문에도 알아야겠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도,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도 하늘땅이 둥글어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 증산도는 하늘땅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인류 역사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천지 이치가 어떻게 됐다 하는 것을,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전 인류에게 공포를 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7. 23:31


김연아와 그녀의 성공 노하우





아무것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 배경에서 나온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소녀가 전 세계 피겨계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만화에서나 볼 법한 판타스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자면 그녀의 피겨 인생은 위대한 설계자가 쓴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천하를 쥘 인물은 하늘이 낸다고 했던가. 

 


‘어째서 하늘은 이런 인물을 피겨 선진국인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불모지에 태어나게 하셨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재미있는 상이 보이지 않을까?

 

김연아가 피겨계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은 마치 도전道典 속에서 말하는 천하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출발하여 불굴의 개척 의지와 일심을 통해 마침내는 뜻을 이루리라는 희망의 표상이다. 그녀의 성공비결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해 있다. 

 

첫째,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기술을 향상시켰다. 세계를 상대로 한국선수가 1등이 될 수 없을 거라던 주변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석定石기술을 연마했다. 상제님께서

 

둘째, 기초를 중시하는 정도正道를 걸었다. 경쟁상대선수가 화려한 기술을 내세우며 세계에 이름을 떨칠 때에도 외양보다는 내실을 키우며 때를 기다렸다. 기초를 튼튼히 하며 모든 기술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에 주력했다. 외국 코치가 그녀를 보며 “보통 선수들이 기술이 조금 향상되었다 싶으면 기초는 무시하고 화려한 기술에 목매는 것과 달리, 김연아 선수는 항상 스텝, 스핀 등 기초를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그리고는 항상 잘못된 것이 없는지 묻곤 했죠. 저에게는 이것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트레이시 윌슨)”고 했을 정도다.

 

세째, 조화를 중시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피겨는 스포츠이면서 예술이다. 다른 선수들은 기술이 좋으면 점수 쌓는데 용이하기 때문에 예술적인 부분은 뒤로 미루기 일쑤다. 그저 음악은 배경이 되고 표현은 적당히 팔만 휘젓는 수준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김연아는 기술과 예술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였다. 피겨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그런 부분이 결국 그녀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만든 것이다.

 

네째, 성실함과 끈기이다. 김연아는 피겨를 시작한 7살 시절부터 성실함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조그만 꼬마가 중고등학교 언니 오빠들과 훈련을 끝끝내 같이 하며 결코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세계챔피언이 된 뒤에도 태릉훈련장에서 후배들보다도 더 늦게까지, 심지어는 훈련장의 불이 꺼질 때까지 열심히 훈련했다고 한다. 어떤 명사가 “어떤 분야이건 매일 2시간씩 10년을 꾸준히 연마하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다.”라고 했는데, 김연아는 매일 6~8시간씩 17년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연마를 해왔으니 세계 최고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 않을까. 

 

다섯째, 경쟁심과 열정이다. 김연아는 자신의 자서전인 『김연아의 7분드라마』에서 “물은 99도까지는 끓지 않는다고 한다. 100도가 되어야 끓기 시작한다. 그 1도를 극복해야만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늘 열심히 해도 마지막 1도의 한계를 버티지 못하면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그것은 물이 끓느냐 끓지 않느냐 하는 아주 큰 차이다. 열심히 노력해놓고 마지막 순간에 포기해 모든 것을 제로로 만들어 버리기는 싫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중요한 건, 마지막 1분 그 한계의 순간이 아닐까.”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한 경쟁심과 더불어 마지막 피치를 올리며 매듭을 짓는 열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김연아를 전설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7. 23:28


김연아, 퀸의 탄생과 성공스토리 - 

불모지에서 열린 기적의 열매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경기가 끝났을 때, 전세계 언론과 팬들은 들썩거렸다. 모두가 예상했던 결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김연아의 것이라 여겼던 금메달은 러시아 소녀가 차지했다. 진짜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만약 금메달을 뺏긴 주인공이 김연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이슈가 되었을까? 전 세계 피겨 전문가들이나 피겨팬들이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연아가 진정한 피겨퀸이라는 사실이 또 한번 증명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금메달을 빼앗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연아가 어떻게 세계인들이 동경하는 피겨퀸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피겨환경이 너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김연아는 올타임 레전드로서 피겨퀸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녀의 성공 역정이 일꾼의 신앙과 삶에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영웅은 이렇게 탄생했다. 중국 무협 영화나 소설이 즐겨 그리는 이야기 중 하나는 영웅 이야기이다. 중국 대륙이 커서 그런지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천하天下’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 천하를 쥐는 자는 하늘이 내려준다고 한다. 나라의 기운이 쇠퇴해 조정은 통제력을 잃고, 온갖 군웅들이 일어나 세력을 다투어 온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민중들이 고통을 받는 난세亂世에, 하늘이 점지한 영웅은 나타난다. 영웅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모든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천하를 평정하게 된다. 

 

이런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그와 같은 영웅 스토리를 지닌, 드라마틱한 감동과 삶의 교훈을 동시에 안겨주는 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바로 피겨스케이팅의 여왕 김연아 선수이다. 

 

피겨스케이팅 세계를 하나의 천하로 대입해 보면, 피겨스케이팅 세계에 나타난 김연아 선수의 등장과 그녀가 만들어 온 피겨의 역사가 이런 영웅 스토리와 너무도 흡사함을 알게 된다. 김연아의 이야기는 이 시대가 바라는 신영웅 스토리라 평가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강한 임팩트와 무게를 지니고 있다.

 

김연아의 등장

피겨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변방국이다. 중국에서는 첸 루라는 선수가 올림픽 동메달을 딴 전력이 있고, 일본에서도 이토 미도리, 아라카와 시즈카 선수 등이 아시아의 위상을 높여 주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남의 잔치를 구경만 하는 신세였다. 

 

게다가 일본에선 여자 선수는 뛰기 힘들다는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고 러시아의 베테랑 이리나 슬루츠카야Irina Slutskaya를 이기는 15세 선수의 등장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었다. 그 선수가 아사다 마오Asada Mao였다. 두 달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2006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올림픽이 열리는 이전 해 15년 7월생까지 가능) IOC(세계올림픽위원회)의 룰을 바꾸어야 한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총리까지 나서서 여론을 진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일본 여론을 들끓게 하는 천재소녀에게 세계의 이목이 맞추어졌다. 과연 세계피겨를 지배할 천재소녀의 등장인가? 

 

2006년 토리노올림픽의 금메달이 일본 선수에게 돌아가고 한달 후, 올림픽에 참가했다면 금메달이 확실시 된다던 아사다 마오 선수는 웬 무명의 한국 선수에게 져서 주니어 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놓치게 된다. 아니 놓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5점이 넘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무너졌다. 

 

그녀는 아사다 마오 선수와 동갑내기로 20일 먼저 태어난 한국의 김연아金姸兒 선수였다. 김연아가 누구인가? 그동안 한번도 올림픽 10위권 내에 이름도 올려보지 못한 피겨의 변방국 한국 출신이다. 그런 선수가 차세대 여왕이라고 칭송되는 아사다 마오 선수를 25점이나 차이를 내며 이기다니?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장기의 바탕이 된 중국 천하통일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초나라의 항우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낼 희대의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세력도 가장 컸다. 그러나 그런 항우는 시장바닥에서 술이나 얻어먹고 살던 백수건달 유방에게 패배하여 천하를 내어주었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기나긴 춘추전국시대의 막이 내리고 통일제국 한나라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 비교하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연아의 등장은 그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여왕 자리는 비어있다. 그 자리를 노리는 수많은 여왕 후보들이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렇다 할 승자가 없는 와중에 마치 천하를 제패할 듯한 인물이 일본에서 나왔는데, 그녀를 단숨에 제압해버린 이름 없는(피겨계에서 그렇다는 거다) 변방국 출신의 승자.

 

일본은 여왕이 나올 만한 배경이 있었다. 수많은 국가적인 투자를 했고 역사와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다. 서구의 피겨는 서서히 저물어가는 형국이고 그 기세가 아시아, 특히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정작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김연아였다.

 

여왕 김연아

2006년 주니어 월드에서 우승한 김연아가 모든 걸 갖춘 토탈 패키지형 선수

로 등장했다는 것 또한 판타지와 같은 감흥을 안겨준다. 토탈 패키지total package가 무엇인가. 외모면 외모, 기술이면 기술, 예술이면 예술 모든 걸 갖추고 있는 선수가 토탈 패키지형 선수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대로 이런 선수가 있었던 것 같지만, 사실 어느 외국 코치의 말을 빌리자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가 김연아다.

 

기술은 세대를 거치면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카타리나 비트가 1980년대의 전설적인 선수라지만 지금 이 시대에 온다면 경쟁이 안 된다. 그러니 세대를 뛰어넘어 기술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절대적 비교는 가능하다. 카타리나 비트가 그 당시 다른 선수들보다 기술이 월등했는가? 아니었다. 기술로는 데비 토마스(미국)나 이토 미도리(일본)선수가 훨씬 우수했다. 예술성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피겨계의 여왕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연아 선수보다 그 유명한 아사다 마오 선수가 기술이 더 뛰어난게 아닌가? 남자만의 전유물이라는 트리플 악셀 점프를 뛰어댄다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 아사다 선수가 트리플 악셀을 내세우지만 정작 기술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 김연아 선수는 스케이팅의 기초부터 모든 점프가 일정한 표준 방식 그대로의 정석定石이다. 정석이라 하면 쉬운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게 정석이다. 정석으로 뛰려면 너무나 힘들게 훈련해야 하므로 대부분의 선수가 뛰기 쉬운 자신만의 방식으로 뛰는 요행을 부린다. 

 

김연아는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정석으로 배우고 훈련했다. 그래서 ‘점프의 교과서’라고 불리운다. 

 

바르기 때문에 아름답다. 점프가 높고 비거리(뛰어서 날아가는 거리)가 길다. 자세가 흔들리지 않고 깨끗한 에지(스케이트날)로 뛰고 착지한다. 정석으로 뛰는 선수가 김연아 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석으로 뛰는 선수 자체가 드문데 거기에 김연아는 그 모든 기술의 원형을 구현한다.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거다)

 

“기술이 완성되면 예술이 시작된다”고 한다. 완벽한 기술에 예술성 또한 그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티스트artist의 경지에 올랐다고 피겨의 전문가들이 극찬하고 있다. 딱 한 가지만 부언하자면, 서구의 피겨가 발레를 접목했다면 김연아는 여기에 더해 한국적인 선을 덧입혔다. 누구도 전엔 볼 수 없었던 선이다. 물 흐르듯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 척추부터 이어진 선이 손 끝으로, 또 머리와 시선이, 그와 더불어 다리와 발이 온 몸 전체의 한 선으로 이어져 음악을 표현한다. 어느 외국 해설자는 “그녀의 스케이트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무엇인가? 그건 전 세계가 꿈에서나 그릴 듯한 완벽한 피겨의 구현체가 눈앞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어느 해설자는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마치 꿈속에서나 보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피겨의 팬들은 그녀를 피겨 여왕을 넘어서 피겨의 여신이라고까지 칭송해 마지않는다. 혹은 피겨의 신이 직접 내려왔다고 한다. 어느 해설자는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어찌 여왕에 등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변방국 출신으로서 무수한 견제와 압박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그 눈물겨운 분투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구나 알고 있듯 그녀는 무수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며 여왕의 자리에 올랐고, 이번 마지막 소치올림픽에서는 판정과 관련된 세계적인 관심과 논란을 남긴 채 은메달로써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경기 후 김연아 선수가 남긴 말처럼 ‘올림픽 2연패’니 ‘금메달’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김연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와 상황 속에서 다른 선수가 금메달을 가져가더라도 이미 김연아는 선수로서의 능력과 정신적 측면에 있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업과 성숙한 품격을 갖추고 있고 만천하에 공인을 받은 진정한 챔피언이기 때문이다. 세계 여왕,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이라는 칭호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6. 17:57




호주 전통 종교의 숭배 대상 


추룽가Tjurunga







사람과 땅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호주 원주민 문화는 영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들은 땅을 자신들의 어머니라고 하며, 따라서 그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땅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보통 호주의 전통 종교에서 신화적 존재이자 그 숭배 대상을 추룽가Tjurunga 혹은 추링가Churinga라고 부른다. 대개 나무나 돌로 만들며, 그것을 그러한 존재의 상징 혹은 현시顯示로 삼는다. 아란다족의 용어인 추룽가는 특정 의식儀式, 돌과 나무로 만든 물건, 끈을 묶어 소리를 내는 판자, 땅에 그린 그림, 고분, 의식용 장대와 문장紋章, 머리의 쓰개, 신성한 노래 전통적으로 성화하거나 금기시하는 비밀스럽고 신성한 사물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납작한 타원형으로 다듬은 신성한 무늬를 새긴 돌이나 신화적인 의미를 가지는 복잡한 형태의 무늬를 새긴 나무판자를 말한다. 

 

대부분의 추룽가는 남자들의 비밀스럽고 신성한 의식에 사용되었다. 여자들의 의식에서도 작은 물건들이 사용되었으며, 더욱 작은 물건은 남자들의 사랑의 주술에 사용되었다. 모든 사람은 추룽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 입문식 때 청년은 자기가 사는 지방의 의식과 추룽가에게 소개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추룽가와 함께 지내는 법을 전수받는다. 죽을 때 추룽가는 시체와 함께 묻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이 추룽가를 다시 찾는다고 한다. 

 

추룽가는 본질적으로 그들과 연관된 지역의 전통적인 집단 구성원들의 불멸성을 나타낸다. 그들은 모두 생명의 연속성과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과 신화적인 시간, 사람과 위대한 존재들, 일상의 물질적인 면과 인간의 영적 유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의 상징이자 표현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6. 17:55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







한국과 호주의 교류는 1884년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양국의 관계는 호주가 1947년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6·25 참전함으로써 매우 긴밀해졌다


1961 양국의 수교 이래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범세계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정치, 외교 분야에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한 실질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양국은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양국의 번영에 직결되어 있다는 기본 인식 아래 역내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미국의 지역적 역할을 지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공히 통상국가이면서 상호 보완적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태지역의 중견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제반 문제에 공동보조를 취할 있는 유사성이 강하다

양국간의 상호 보완성과 유사성을 근간으로 양자관계 뿐만 아니라 지역 세계적 차원에서 안보·군축·경제·통상분야의 협력을 공고히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주는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와 남북 대화 촉진, 1953년의 휴전협정을 대신할 영구적 평화 협정 체결을 위한 강대국들의 움직임에 지지를 보내왔다. 



이를 위해 2000년 5월에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복원, KEDO(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에 2,190만 호주 달러를 지원했다. 또 기술 원조와 인도주의 차원에서 6,000만 호주 달러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2년 5월 호주 수도인 캔버라에 북한 대사관이 개설됐지만, 2008년 1월 재정난을 이유로 북한은 캔버라 주재 대사관을 폐쇄했다. 


그러다가 2012년 말 호주 외무부의 제안으로 대사관 재개설에 대한 협의가 진행이 되었으나, 북한이 3차 핵실험(2013.2.12)을 강행하자 이에 대한 제재의 일환으로 호주 정부는 북한 대사관 재개설 승인 입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한국과 호주 양국은 인적 교류 촉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교육·문화·관광·미디어 교류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현재 호주에는 15 이상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호주인 수가 증가하고 있다. 2012 기준으로 한국인 호주 방문자는 19 , 호주인 한국 방문자는 12 명에 달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5. 20:33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자본주의 발달과 국가를 향한 여정

 


 

1851년 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골드러시gold rush의 물결이 일어났다. 호주 멜버른 북쪽 빅토리아라는 곳에서 금이 발견되었는데, 이 금을 채광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골드러시로 인한 경제호황으로 중국, 유럽, 미국 등지로부터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850년의 호주 인구가 40만명이었으나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와 장사꾼도 모여들어 호주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인 영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건설붐과 교통 및 체신, 각종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는 한편 노동운동도 발달하였다. 



 

1854년 9월에 일어난 ‘유레카 혁명’ 사태는 호주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발전을 촉진한 광부들의 소요 사건이었다. 일명 ‘유레카 방책 봉기’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건은 호주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무장 폭동으로 기록된 사건으로서, 금광 지역에 몰려든 채굴업자와 광부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폭력적 징세절차 등 가혹한 압제 때문에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1854년 12월 영국군과 지방 경찰력에 의해 의해 유혈진압이 되었으나, 식민지 전역에 미칠 파장과 봉기의 확산으로 인한 금광의 상실을 우려한 영국의 유화책으로 인해 자치와 민주적 개혁 등 요구 사항들이 대부분 수용되는 진전을 이루었다. 경제적 불만에 대한 광부들의 희생이 호주의 기반을 닦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자유롭게 호주로 들어왔고 고유한 국가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23년 뉴사우스웨일즈가 제한된 입법권을 취득한 이래 식민지 각 지역은 서서히 자치체제를 확립하였다. 1855년과 1859년 사이에 영국은 호주 내 각 식민지의 헌법 및 자치정부를 승인함으로써 개별적인 식민지들은 책임있는 정부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대영제국으로부터 한층 더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은 우선 외교정책과 국방, 무역을 관장했고, 식민지에서는 개별국가들의 결합을 위한 기획이 시작되었다. 1887년 골드러쉬에 의한 노동력 수요 충족을 위해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 유입됨으로써 임금 경쟁이 초래되었으며, 이때부터 백인 노동자들은 유색 인종에 대한 배척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백호주의白濠主義(White Australia Policy, 백인 우선주의 백인 사회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정책) 기원이다. 결국 1888년에 중국인 이민의 제한이, 1896년에는 모든 유색인종의 배척이 결정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5. 20:28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유럽인의 이주 이전

호주에는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이동해 온 것으로 추측되는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s이 5~6만년 전부터 살기 시작했다. 약 6,000년 전 뉴기니아에 이르는 육로가 범람하기까지 뉴기니아와 북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는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약 4,200년 전에는 인디아 본토인들의 이주와 이로 인한 애버리진들과의 혼혈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갑자기 식물 가공과 석기 제조가 행해졌고, 오스트레일리아 들개Dingo가 등장한다. 약 1,000년 전에는 토레스해협의 여러 섬들에 멜라네시아의 항해자들이 이주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과 북오스트레일리아인들 사이에 교류가 일어났다. 중국과 인도의 상인 및 인도네시아의 어부들은 아마도 수세기간 호주 해안을 상륙하거나 지나쳤을 것이다. 이들의 문화적 영향은 애버리진의 암각화나 나무껍질 그림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유럽인들에 의한 발견

호주 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유럽의 식자들은 ‘호주 대륙’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이론에 의하면 북극의 육지 무게에 해당하는 만큼의 육지가 남반구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00년대 이전에는 호주 원주민과 인도네시아, 토레스해협 원주민들이 무역활동을 벌였으며, 16세기에는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특히 네덜란드의 항해가들이 호주의 해안에 도달하거나 육지에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06년에는 스페인인 토레스Luis Vaez de Torres가 토레스해협을 항해하였고, 같은 해에 네덜란드인인 윌리엄 얀츠W. Jansz가 케이프 요크Cape York 반도를 발견했다. 1616년에는 덕 하톡D. Hartog이 호주 서부 해안에서 섬을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덕 하톡이라 불렀다. 1619년에는 프리드릭 핫맨F. de Haoutman이 연구차 이 해안을 따라가다가 그의 이름을 딴 핫맨 아브롤오스를 발견했다. 하톡과 마찬가지로 후일 1696년 플라밍W. de Vlaminh도 호주 대륙의 최서단을 발견했다. 

 


네덜란드의 항해가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발견을 결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서부지역은 메마르고 생산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탐험해볼 흥미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1642년에야 비로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지역에서 지리학적 관계를 탐험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인 타스만Abel Tasman은 동쪽을 향해 나아갔는데, 온전한 호주 대륙은 아니지만 타스마니엔 섬을 발견했다. 1688년에는 항해가 댐피어William Dampier가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호주 북부 해안 피쵸리 강가에 있는 킹 사운드 근처에 다다랐고, 1699년에는 호주 최서단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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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5. 20:26



천연자원과 자연환경의 천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선진국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이다. 또한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5위이며, 군비 지출은 세계 13위이다. 인력개발 지수가 세계 2위이고,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 자유와 정치적 권리 등과 같은 국가 성취도가 상위권에 속한다. 호주라고도 불리는 이 나라는 G20에 속하는 유엔 회원국, 영연방국, OECD,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기구, 태평양 도서국 포럼의 회원국이다. 최근에는 한국 정부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믿음직한 우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백인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지 불과 200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다방면의 급성장을 이룩한 이 나라의 면모에 대해서 알아보자.

 

 


오스트레일리아
자연환경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라는 나라 이름은 ‘Terra Australis Incognita’(남쪽의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약 774만 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세계 6위의 대국이다. 이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 그리고 태즈메이니아Tasmania 섬을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호주濠洲’로도 불리는 이 대륙은 남북 3,700, 동서 4,000, 해안길이 36,000 달하는데, 서부·중부·동부로 나뉜다. 남쪽에는 남극대륙, 북쪽에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파푸아뉴기니, 북동쪽에는 솔로몬제도와 바누아투, 뉴칼레도니아, 남동쪽에는 뉴질랜드가 위치한다. 서부의 서호주평원은 호주 면적의 60% 차지한다. 이곳에 대규모 모래사막인 그레이트 빅토리아Great Victoria 사막, 그레이트 샌디Great Sandy 사막이 있다. 중앙에는 맥도넬MacDonnell 산맥이 있고, 태반이 평원으로서 기후는 건조하다. 동부 고지는 습곡산맥이 형성한 완만한 지형인데, 고지도 300~1,000m정도에 불과하다. 고지는 준평원이지만 동쪽 가장자리는 하천이 깊은 계곡을 이룬다. 

 


동남부에 치우친 오스트레일리아 알프스Australian Alps 산맥은 주봉 코지어스코 산이 해발 2,234m로서 이 대륙에서 눈이 내리는 유일한 지역으로 수자원 개발이 이루어진다. 중앙 저지는 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지역으로 에어 호수 주위에는 해수면 아래의 저지도 있다. 그리고 이 대륙에서 가장 큰 머리, 달링 강Darling River이 흐른다. 중앙저지의 중앙부는 달링강을 비롯해 대부분의 하천이 간헐천이다. 따라서 지하 깊숙이 삼투된 물을 찬정이라는 굴착 우물로 만들어 끌어올려 사용한다. 대체로 중서부는 사막이기 때문에 건조하다. 남회귀선이 국토의 중앙을 지나므로 국토의 40%가 열대권에 속하여 덥다. 동북연안은 무역풍이 불어 열대우림기후다. 동남부는 온대 해양성기후이므로 쾌적하다. 남부와 서남부지역은 겨울비가 내리는 지중해성기후다. 북부지방은 사바나기후이며, 내륙으로 감에 따라 스텝기후를 보여준다. 유카라와 아카시아가 대표적인 수종이며, 캥거루와 코알라, 오리너구리, 가시두더지, 원벳, 듀공, 포섬 등의 특이한 동물들이 서식한다. 선사시대부터 격리되어 있어서 동물계는 세계의 다른 동물과 다른 계통으로 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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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2. 22:26



우크라이나 사태의 이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사태는 그 부분만 국한해 볼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전반적인 정국을 함께 살펴봐야 하는 복합적인 문제다. 우크라이나는 많은 유럽의 국가들처럼 현재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와중에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권력 부패상이 드러나면서 우크라이나 정국은 반정부 시위와 이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정권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당면한 디폴트(default, 국가 대외채무불이행)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대외적인 경제지원이 필요했는데, 서방측인 EU와 나토에 가입하느냐 아니면 러시아와 손을 잡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야누코비치는 미온적인 지원을 약속한 서방측보다도 현실적인 지원을 약속한 친 러시아 정책으로 선회를 했다. 


하지만 1932년 당시 소련의 스탈린이 집단농장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식량을 징발하는 인위적인 기근 정책을 실시해서 최소 8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을 굶어 죽게 만든 수탈과 원한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데다가 대통령이 민족적 감정이 개입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자 국민들이 극렬하게 저항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영토인 크림반도는 본래 러시아 영토였으나 1920년대 소련이 사회주의 연방에 우크라이나를 강제 편입시키면서 그 불만을 달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넘겨준 지역이다. 이처럼 언어와 인종이 다르고 2/3가 러시아계 주민인 크림반도 지역을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자치공화국 형태로 묶어두면서 관리를 해 왔는데, 친러시아 입장에 선 대통령이 축출되는 정국의 혼란 속에 최근 크림지역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선택하면서 분리 독립의 흐름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우크라이나 동부 주 곳의 친러 분리주의 세력도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현재 동부 도네츠크, 루간스크, 하리코프 각각 독립 공화국을 선포한 상태이고,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강력 대응을 천명하면서 도네츠크 주에서 친러시위대와 교전을 벌이는 사태가 확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크림사태의 파장

이번 크림사태는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적지 않다. 1991년 알마아타 선언Alma Ata Declaration을 통해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The Budapest Memorandum를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핵무기를 제거하는 대신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의 보안과 안보를 약속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1997년 크림반도 항구에 러시아의 흑해함대Black Sea Fleet의 주둔을 허가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는 특히 대규모 러시아군의 병력이동은 우크라이나의 허가 아래 가능하도록 되어있고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병력 규모를 늘릴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크림반도 합병 과정에서 보았듯이 러시아는 협정에 구애받지 않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결과적으로 약속을 믿고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현실에 있어서는 위축된 입장에서 힘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비핵화’를 화두로 삼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목격한 북한이 핵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원하고 있지만 강대국의 이권과 힘의 논리가 어떤 결과를 낳느냐를 보여준 이번 사태를 통해 비핵화는 더욱 어려운 난제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는 것이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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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2. 22:24



크림사태와 한반도 정세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지난 2014년 3월 3일 러시아가 인접국 우크라이나의 크림(크리미아)반도 전역을 장악한 뒤 주민투표 등의 절차를 거쳐 3월 21일에 러시아-크림공화국 합병을 확정짓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2013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정권에 반발하는 시민 저항이 일어나 친러시아 세력과 친서방 세력 간에 정치 투쟁이 벌어진 혼란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 사태로 인해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대통령 야누코비치가 국민에 의해 축출되어 러시아로 도피하는 국면을 맞았고, 내전의 위기까지 거론되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흑해를 향해 돌출한 ‘크림반도’ 내부에서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해 독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러시아가 즉각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크림반도에 군대를 투입해 장악하고 일사천리로 합병을 확정해버린 것이다.

 

크림반도 합병의 전략적 이유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진입해 합병을 강행한 표면적인 명분은 크림반도 내의 다수를 차지하는 친러시아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면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합병을 강행한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크림반도가 러시아 흑해함대 주둔지로서 세바스트로폴이라는 부동항不凍港이 있어서 전략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주변의 국가들을 친서방국으로 포섭해 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크림지역이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유럽에 수출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많은 지하자원을 보유한 지역이라는 점도 이곳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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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4. 7. 2. 22:19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 사람을 죽이는 말

 

막말의 악영향


막말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상상 이상이다. 두통, 어지럼증, 불면증, 근육통, 우울증 등 가벼운 증상은 기본이다. 심할 경우 고혈압, 당뇨병, 불임 등 만성질환을 일으킨다. 나쁜 말은 인체의 호르몬에도 영향을 끼친다. 폭언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코르티솔cortisol’1)이라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킨다. 이는 급성 스트레스에 반응해 분비되는 물질로, 스트레스에 대항하는 신체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준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받거나, 만성스트레스가 되면 코르티솔의 혈중농도가 높아지고 그 결과 식욕이 증가하게 되어, 지방의 축적을 가져온다. 또한 혈압이 올라 고혈압의 위험이 증가하며, 근조직의 손상도 야기될 수 있다. 불안과 초조 상태가 이어질 수 있고 체중의 증가와 함께 만성피로, 만성두통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코르티솔은 면역체계를 담당하는 백혈구의 일종인 임파구의 수를 감소시켜 인체의 면역기능을 떨어뜨린다. 폭언으로 인한 불면증, 우울증 등도 코르티솔이 필요 이상으로 분비돼 생기는 대표적인 증상이다.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등을 지병持病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막말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막말에 노출되면 코르티솔이 분비돼 혈당과 혈압 수치가 급격히 오르는 등 격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뇌중풍과 심근경색 등이 한꺼번에 올 수 있다. 말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1) 코르티솔은 콩팥의 부신 피질에서 분비된다. 외부의 스트레스와 같은 자극에 맞서 몸이 최대의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분비되어 혈압과 포도당 수치를 높이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분노의 침전물 실험 미국의 워싱턴대학의 심리학자 엘마 게이츠는 사람들이 말할 때 나오는 미세한 침의 파편을 모아 그 침전물을 분석했다. 그랬더니 평상시엔 무색이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땐 분홍색, 화를 내거나 욕할 땐 짙은 갈색으로 나타났다. 더 놀라운 건 갈색 침전물을 실험용 흰쥐에게 투여했더니 금방 죽었다. 말 그대로 독설인 셈. 이에 게이츠 교수는 이 갈색 침전물에 ‘분노의 침전물’이란 이름을 붙였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 고사성어故事成語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아이에게 상처되는 말


성인들에 비해 감정이 예민한 아이들은 나쁜 말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유년기에 가정에서 언어폭력을 경험하면 우울증과 지능지수 감소, 정신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하버대 의대 마틴 타이커 교수팀은 어린 시절 또래들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한 18~25세의 성인 63명을 관찰한 연구 결과를 2010년 미국 정신건강 의학지에 발표했다. 


현재의 불안함, 우울증, 적대감, 정신분열, 약물 남용 등의 증상이 과거 언어폭력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어 들여다봤다. 성폭력을 당한 아동들에게서 얻어지는 결과와 유사한 이미지가 보였다. 


이들의 뇌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들보(뇌량)와 감정,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가 위축되어 있었다. 이 경우 언어능력이나 사회성에 문제가 생기고 우울증을 앓을 확률이 높아진다. 언어학자들은 보통 생후 18개월을 전후해 부모의 언어습관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고도흥 한림대 언어청각학부 교수는 “생후 18개월은 ‘언어가 폭발하는 시기’로 본격적인 언어 인지능력을 갖게 된다”면서 “영유아기에 듣는 부모의 공격적인 언어는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지만 정작 말을 한 부모는 이를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 22:15

살아있는 계란이 죽은 바위를 뛰어넘은 영화

‘변호인’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

영화 <변호인>을 소개할 때 따라붙는 말입니다.

전직 대통령을 모델로 했다, 특정한 정치집단에 우호적이다, 특정한 사건을 왜곡되게 다루었다 등등 이 영화와 관련된 수많은 의견들을 잠시 내려놓고, 영화 자체로만 바라보려 합니다. 천만 관객을 훌쩍 넘은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사람 냄새’가 나고, ‘재미’와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민주화의 투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학생들과 소위 깨어있는 시민들 사이로 민주화의 열기가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을 무렵, 정부에서는 그런 사회 분위기를 잡기 위해 군인들을 동원해 압력을 가하던 시기였습니다. 1980년대 초 부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된 속물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은 처음부터 인권변호사로 나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처절했습니다. 공사판에서 일을 하며 아내가 아이를 출산했는데도 병원비 낼 돈이 없었고, 밀린 밥값도 못내 국밥집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도망갔을 정도였습니다. 어렵게 변호사가 되었지만 고졸 출신에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어서 자신을 알리고자 야간업소 웨이터들처럼 명함 전단지를 돌리며 광고하러 다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라고 송우석은 등기 전문 변호사부터 세법 전문 변호사까지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오직 세상의 성공과 돈을 벌기 위해 눈이 멀어 있던 송우석. “데모로 세상이 바뀔 것 같아? 내가 아는 세상은 그렇게 말랑말랑한 곳이 아냐.”라며 바닥 인생에서 변호사로 자수성가하기까지 자신이 부딪혔던 경험에만 비추어 세상을 바라보는 편견을 가진 송우석이었습니다. 

 

국밥집 아들의 억울한 사연

세법 변호사로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고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을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리며 전국구 변호사로 명성을 날릴 즈음, 돈 없던 시절 이용하던 국밥집 아들 진우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송우석은 국밥집 아주머니 순애와 함께 행방을 수소문하다 구치소에 감금당해 온갖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진우의 믿지 못할 모습에 충격을 받게 되고, 이때부터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생의 180도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진우의 일로 세상일에 눈을 뜨게 된 송우석은 이런 일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 아이들은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을 굳힌 송우석은 비상식적인 세상에 분노하며 자신만의 시각에 갇혀있던 생각에서 벗어나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게 됩니다.

 

제가 할께요, 변호인


군사정권의 유지를 위해 선량한 시민을 공산주의자로 내몰아 온갖 고문을 자행하는 등 옳지 않은 일이 벌어지지만 사람들은 귀를 닫고 입을 막으며 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언론에 떠들어대는 것을 믿으며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 할 뿐이었습니다. 송우석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변호를 하겠다고 선뜻 나서게 됩니다. 잘못된 국가의 권력 앞에 복종하지 않고 “무죄면 무죄판결 받아 내야죠, 그게 내 일입니다.”라며 발 벗고 나섭니다. 

 

과연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나도 저 상황이라면 할 수 있을까? 

 

그런 송변호사에게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아들이 잘 지내는지, 몇 학년 몇 반인지... 아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듯한 전화를 아내가 받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내는 그 일 그만하면 안 되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송변호사는 변하지 않습니다. 가족들마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굴하지 않는 송우석의 모습을 통해 용기와 집념, 끈기와 배짱을 느낄 수 있었고 돈이나 성공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신념과 정의임을, 그리고 올바른 일은 반드시 해야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정의로운 자는 외롭지 않다

송우석은 진정한 애국은 국민을 위한 행동이라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외칩니다. “국가는 곧 국민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진정한 애국은 정치권력의 틈바구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해 그들의 편에서 대변해 주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강자와 약자의 계층이 나뉘어져 있고, 부조리한 문제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면, 대다수는 권력의 손길 앞에서 방관자의 입장이거나 무관심에 그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럴 때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는 공분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습니다. 

 

이후 송우석의 삶은 국민을 위해 싸우고 법을 지키며 바른 일에 앞장서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됩니다. 마지막 재판 장면은 데모를 선동한 죄로 법정에 선 송우석을 대변하기 위해 부산 지역 149명의 변호사 중 99명이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해 지지를 표명하는 광경으로 그려지면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으려 부단히 전진하는 모습으로 막을 내립니다. 

 

“바위는 강하지만 죽은 것이고 계란은 약하지만 산 것입니다.

계란은 살아서 바위를 뛰어넘습니다.” 

<변호인>은 수많은 장애물이 가로막더라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단단해 보이는 죽은 바위도 언젠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돈과 성공의 이끗만 보고 현실에 안주해 자신과 타협하지 말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올바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세속적인 한 인간이 역사적인 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은 가을 개벽기에 살고있는 오늘의 인류에게 사뭇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 21:50

노화는 왜 일어나는가?




사람은 왜 늙는 것일까?

 

예전에는 노화의 원인을 신경내분비, 스트레스, 면역, 유전자 프로그램, 체세포돌연변이, 유전자변형, 노폐물축적, DNA의 장애 등에서 찾았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효소의 존재가 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노화는 인체가 보유하고 있는 잠재효소의 절대량이 감소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인체 내 효소의 과다소모가 원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노화는 피할 수가 없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노화의 빠른 진행을 막을 수 있다. 노화를 예방하기 위해서 천연호르몬이나 SOD식품, 비타민, 미네랄, 파이토케미컬 등을 섭취해도 좋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은 효소기능성 식품과 생식이다. 효소가 노화예방에 가장 좋은 이유 중의 하나가 매우 강력한 항산화물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젊어서부터 효소 복용을 생활화한다면 누구나 노화를 지연시키면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참고자료: 『현대인은 효소를 밥처럼 먹어야 한다』

 

효소의 분류


효소는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약 3.000여 종류가 있으나, 영양학적 관점에서 보면 크게 소화, 대사, 식품효소(먹거리)로 분류할 수 있다. 

 

1) 소화효소(Digestive Enzyme) :

우리 몸에서 직접 만드는 효소(단백질)로서 섭취한 음식물을 소장에서 흡수할 수 있도록 분자 레벨의 크기까지 잘게 분해한다.

 

2) 대사효소(Metabolic Enzyme) :

소화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신체기능을 지배하는 효소이다. 대사효소는 호흡을 하거나 손발을 움직이거나 생각하거나 노폐물을 체외로 배출하고 호르몬 밸런스 조절, 병에 걸렸을 때 병원균과 맞서 싸우는 역할도 대사효소가 한다. 

따라서 효소가 부족한 사람은 병에 걸리기 쉽고 병에 걸려도 치유되기 어려운 몸이라 말할 수 있다. 난치병이라고 불리는 병중에는 효소결핍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3) 식품효소(Food Enzyme) :

효소가 풍부한 음식은 신선한 야채, 과일, 날 생선, 생고기이다. 그리고 된장, 고추장, 청국장, 김치 등 발효식품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발효식품은 자연의 미생물에 의해 발효과정을 거쳐 분자구조가 잘게 쪼개져 인체의 영양 흡수력이 극대화된 식품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노화 예방 8원칙

1) 생채소와 과일 등 매일 효소가 풍부한 음식물을 섭취할 것

2) 노화를 유발하는 가열식, 가공식품, 흰설탕(과자류에 함유된 것도 포함), 산화한 기름, 트랜스지방, 육류, 계란 등의 과식을 피할 것

3) 잠자는 동안에는 효소의 활동을 멈춰 소모를 줄일 수 있으므로 충분한 수면을 취할 것

4) 수면 전 3시간 동안에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말고 꼭 먹어야 한다면 소화가 잘 되는 바나나 등을 소량 섭취할 것

5) 효소기능성 식품을 매 식사 때와 취침 전에 섭취할 것

6) 매일 충분히 걷는 등 적당한 운동으로 땀을 흘릴 것

7) 하루 두세 번 양질의 배설을 할 것

8) 스트레스를 쌓아두지 않을 것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 21:48


생명의 촉매, 기적의 효소



“현대인은 효소를 밥처럼 먹어야 한다”


현대인에게 효소 왜 중요한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섭취하는 음식물의 약 90% 이상은 화식(火食-열에 의해서 조리된 음식물)이다. 화식에는 효소가 모두 파괴돼 존재하지 않으며 비타민의 대부분과 미네랄 또한 상당부분 훼손되어 있다. 효소* 50도에서 파괴되기 시작하고 70도가 되면 거의 모두 파괴된다. 그래서 불에 조리한 음식에는 효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부득이 불에 조리한 음식물을 분해하고 소화시키려면 우리 인체 내에 저장되어 있는 효소를 꺼내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인체 내에 저장되어 있는 효소는 음식물의 분해와 소화를 돕는 일 외에도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새로 만드는 신진대사와 면역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 항상 일정량이 유지돼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신진대사와 면역기능 강화의 목적으로 사용해야 할 효소는 크게 부족하게 되고, 결국 신진대사와 면역기능은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물에서 발생하지 않는 퇴행성질병이나 만성병, 생활습관병이 인간에게만 발생하는 이유이다. 즉 효소가 파괴된 화식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대인의 식생활은 화식을 떠나 생각할 수가 없으며 그렇게 화식을 계속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만성적인 효소결핍증이 초래된다. 이와 같은 효소의 부족으로 인해 우리 몸은 섭취한 음식물이 충분히 분해, 소화되지 않고 대장大腸 등의 소화기관 내에 잔류물 덩어리로 남은 부패하고 독소를 뿜어내게 된다. 그리고 독소는 대장의 벽을 뚫고 혈관으로 들어가 혈관을 타고 전신을 순환하며 인체 여러 부위에 통증을 유발시킨다. 또한 혈액 자체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혈관을 좁아지게 만들어 결국 혈액순환의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현대인의 대부분의 질병이 효소부족으로 기인한 것이다. 

 

 

효소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3대 영양소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이다. 여기에 비타민, 미네랄을 더해 5대 영양소라 하고 식이섬유소와 물을 더해서 7대 영양소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가장 중요한 영양소가 하나 빠져 있다. 바로 효소이다. 영어로 효소는 엔자임(Enzyme)이다. 비타민과 미네랄은 영어로 코엔자임(Coenzyme)이라고 한다. 코엔자임은 엔자임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서 코엔자임(보효소-補酵素)이다. 그런데 주역인 효소를 빼고 7 영양소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있다. 

 

효소는 우리 몸의 에너지의 원료인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을 에너지와 세포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일꾼이다. 그리고 효소를 도와서 함께 일을 하는 일꾼이 보효소인 비타민이고 미네랄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양의 탄수화물과 지방, 그리고 단백질을 섭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효소에 의해 분자 크기로 분해되어 인체에 흡수되지 않으면 인체는 그것을 에너지로, 또 세포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하지 못한다. 즉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은 충분한 양의 효소, 미네랄, 비타민과 함께 섭취해야만 분해, 흡수되어 에너지원으로, 또 인체 세포의 원료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효소의 작용

소화 흡수작용 침 속의 프티알린이란 효소는 전분을 맥아당으로 분해한다. 펩틴이란 효소는 위에서 단백질을 분해한다. 소장의 트립신, 리파아제 등의 효소는 지방과 남은 단백질을 분해하여 흡수되기 쉬운 상태로 소화시킨다. 

 

분해 배출 작용 핏속의 콜레스테롤, 피하지방, 혈관의 노폐물, 그리고 장의 숙변을 분해해서 배출한다. 

 

항염 항균작용 효소는 세포를 활성화해 염증을 치료해준다. 백혈구의 식균작용을 도와 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킨다. 

 

해독 살균작용 효소는 간 기능을 강화시켜 독물을 빨리 배출하고 화농균에 대해 항생물질 이상의 강력한 살균작용을 한다. 

 

혈액 정화작용 산성 혈액 속에 많은 콜레스테롤을 조절하여 건강한 약알칼리성 혈액으로 개선해 피의 흐름을 돕는다. 

 

세포 부활작용 세포의 대사기능을 활성화해 늙은 세포와 새로운 세포를 빨리 교체시킨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 21:43

태극기, 민족의 상징




태극기는 우리 국민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해왔습니다. 격동의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에는 태극기가 있었습니다. 기미년 3 1,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토해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조선의 백성들은 깊이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들었습니다. 8.15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우리들의 손에 손에는 태극기가 있었습니다. 6.25동란 공산군의 손아귀에서 수도 서울을 탈환했을 때도 연도에서 국군을 환영해준 역시 태극기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2 6월의 월드컵, 우리는 ‘대~한민국’ 구호와 함께 장엄한 태극기의 물결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청소년들이 나라의 상징, 태극기를 제대로 못 그린다고 합니다. 태극기에 담긴 의미와 철학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우리 대통령이 잘못 그려진 태극기를 들고 응원하는 일도 있었습니다(2008년 8월 10일 언론 보도). 혹시 여러분들도 태극기에 대해 ‘태극은 음양이요, 가장자리 네 곳에 있는 것은 건곤감리이다’ 정도로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태극기의 태극太極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건곤감리乾坤坎離를 포함한 팔괘八卦를 처음 그으신 분은 누구일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 국민들은 학교에서 태극기에 대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 배달국 5대 환웅의 막내 아들인 태호 복희씨께서 삼신상제님께 하도河圖를 받아내려 인류 문명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복희씨는 하도의 이치를 바탕으로 하여 팔괘를 그려 우주의 변화 원리를 처음으로 밝혀주었습니다. 팔괘는 천지가 둥글어가는 법칙을 밝힌 태고시절의 상징언어요 부호언어입니다. 팔괘에서 64괘가 나왔습니다. 64괘 중에서 바탕이 되는 것이 건곤감리의 4괘입니다. 태극기에 있는 건곤감리 4괘는 복희팔괘의 배치와 똑같습니다. 역철학의 효시인 복희팔괘를 나라의 상징 국기에 담았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배달국의 정통 후예이자 동방 문화의 주인공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건곤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고 감리는 건곤의 대행자로 달과 태양을 상징합니다. 동방의 백성들에게 건곤감리와 천지일월은 관념속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곧 천지는 우주를 주재하시는 삼신상제님의 분신이었고 일월은 상제님의 아들인 천자天子(天帝之子)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천지일월 우주를 나라의 상징, 국기에 담았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천지의 자식인 천손天孫 민족이요, 인류 역사의 천자국임을 표방하였습니다. 

 

한반도 주변 4대강국의 국기들도 나름대로 그 의미가 깊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깊이와 철학에서 전혀 태극기와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한눈에 봐도 그들의 국기는 태양과 별 등으로 그 의미가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자인의 관점에서도 우리의 태극기처럼 균형미를 갖춘 국기를 찾기가 힘듭니다.

 


태극기는 우주를 품고 있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상징입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산에서 나무하는 초동樵童들 정도면 ‘복희씨가 처음으로 팔괘를 그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태극기의 원제작자인 복희씨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에서는 ‘천하 제일묘’라는 커다란 사당을 지어놓고 복희씨를 인문시조人文始祖로 높이 받들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려 혼빠진 민족으로 전락한 우리의 현 주소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역사광복, 이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한민족 제 1의 민족과제입니다. 이와 함께 미래의 주역인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태극기의 유래와 그 철학에 대해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 역시 우리의 시급한 교육과제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6. 17. 01:29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아프가니스탄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1973년 12월에 한국과 아프간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5년 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1978년 9월 아프간에 좌경 성향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정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공관을 폐쇄했다. 그러다가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과도정부가 수립되면서 2002년 1월에 양국의 외교관계가 재개되었고 그 해 9월에는 주아프간 한국대사관이 재개설되었으며, 동년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아프간이 참가하기도 했다. 2004년 1월에는 주한 아프가니스탄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아프간에 체류중인 교민은 2013년 현재 86명이며,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인 아프간 방문자는 379명, 아프간인 한국 방문자는 1,008명을 기록하고 있다. 양국간 교역은 1.4억 달러(2012년 기준, 수입은 없고 수출만 1.4억 달러)이며, 대아프간 투자도 2012년까지 58만 달러 정도에 그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등으로 많은 상처를 입은 탓에 국가적인 재건 지원 사업이 필요한 나라이다. 한국은 2002년 2월 아프간에 최초로 공병지원(다산 부대)과 의무지원(동의 부대)의 병력을 파견하였다가 파병기한이 연장되지 않아 2007년 12월 철수하였다. 2007년은 아프간에 선교활동을 간 한국 교회 선교자들의 피랍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2008년 6월에는 카불 북방 60km 지역에 소재한 바그람Bagram 기지에서 재건사업(병원 운영)을 개시하였으며, 2010년 7월에는 오쉬노Ashena(현지어로 ‘동료’, ‘친구’의 의미를 지녔다고 하여 붙인 애칭) 부대가 재파병되어 파르완Parwan주에서 독자적인 PRT 활동을 시작하였다. ‘PRT’란 외교관, 군인, 재건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아프가니스탄에 국제안보지원군(ISAF) 소속으로 활동 중인 각국의 지역재건팀(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2011년 1월에 독자 PRT기지인 차리카르Charikar 기지에 입주하였으며, 2012년 2월에는 차리카르 기지 주요 재건시설을 개소하였다. 이어 2012년 12월에 차리카르 기지를 아프간 정부로 이양하였지만, 바그람 기지 재건사업은 지속하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과 북한은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아프간의 공산 정권이 붕괴된 후 1993년부터는 사실상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6. 17. 01:27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문화적 특징







전통적인 아프간 사회는 험악한 산악과 사막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종족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며,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아프간의 개인주의는 단순히 개인중심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강조하는 특성을 띠고 있다. 

 

특히 파슈툰족은 아프간의 지배적인 종족이다. 이들 종족은 약 200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해 왔다. 파슈툰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적으로 용기, 활력, 호전성을 강조해 왔다. 자신들의 문화적 유사성 및 동질성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투쟁도 불사한다. 

 

파슈툰족은 강력한 부계사회와 대가족제를 유지하고 있다. 부족의 혈통을 종교나 사상적 요소보다 중시한다. 따라서 종족수호를 위한 충성심, 협동심, 희생과 봉사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파슈툰족 사회에서 개인은 파슈툰왈라Pashtunwali라고 불리는 기사도 규범(일종의 불문법)을 엄격히 추종한다. 이 불문법의 주요 골자는 바달Badal(복수), 멜마스티아Melmastia(환대), 나나와티Nanawati(보호)이다. 이중에서 특히 바달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되어 있다. 직계가족의 복수는 그 마을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파슈툰족 사회의 유일한 통치기구는 지르가Jirga(부족장회의)이다. 지르가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오면서 관습적으로 제도화되었다. 전쟁이나 평화와 같은 중요한 문제는 모두 이 지르가에서 논의되어 결정된다.

 

파슈툰족의 오래된 집권은 다른 종족과의 대립을 유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비파슈툰족은 하자리족ㆍ우주베크족ㆍ타지크족 등이다.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이 대립은 아프가니스탄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8세기 중엽 아흐마드 샤가 파슈툰족 중심의 아프간 왕조를 건설하였을 때 비파슈툰족은 자신들의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슈툰족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비파슈툰족은 ‘파슈툰’의 동의어인 아프간이라는 단어가 국가적 시민권으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이와 같은 종족적 소외감은 아프간 단일국가 건설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과의 갈등은 근친결혼과 사회경제적 이동이 강하게 나타나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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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7. 01:25



아프가니스탄의 인종, 언어와 종교








아프가니스탄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툰Pashtun족이다. 타지크족ㆍ우즈베크인ㆍ하자라인이 다음을 차지한다. 파슈툰족은 주로 남부와 동부 지역에 살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한다. 타지크족들은 대부분 농민과 장인匠人들이며 주로 헤라트 북동부와 서부 주변지역에 산다. 우즈베크인들은 주로 농민으로 힌두쿠시 산맥 북쪽 지역에 살며, 하자라인들은 중부 산악지대에 살면서 유목을 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토(파슈투)어와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다리어로서 2가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다리어를 쓰며 약 1/3(주로 타지크족ㆍ하자라인ㆍ샤하르아이마크인ㆍ키질바시인)은 파슈토어를 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ㆍ투르크멘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3/4가량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약 1/4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이다.

 

인구는 전쟁과 난민들의 대대적인 탈출로 1980~1985년에 연간 약 2%씩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인구성장률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평균수준으로 다시 돌아왔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지만 인구의 45%가 15세 이하의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의 4/5 이상이 시골에 살며 1/5 정도는 유목생활을 한다. 가장 큰 도시는 카불Kabul이며 다른 주요도시로는 칸다하르ㆍ헤라트ㆍ마자르에샤리프ㆍ잘랄라바드ㆍ콘두즈 등이 있다. 도시의 거주지 대부분은 카불에서 남서쪽으로 칸다하르, 북서쪽으로 헤라트, 북동쪽으로 마자르에샤리프를 거쳐 다시 남쪽 카불로 돌아올 수 있도록 건설된 주요 순환도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다. 농촌 인구는 주로 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평균수명은 약 46세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결핵과 세균성ㆍ아메바성 이질의 발생률이 높으며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성인의 문자해독률은 약 25%에 지나지 않는다. 1979년 정부에서 7~15세의 어린이를 위한 무료 의무 교육제도를 처음 실시했으나 초등학교 취학연령 어린이들 가운데 실제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1/3에 불과하다. 거듭된 전쟁으로 고등교육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매체는 철저히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선전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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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4. 12:42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191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프간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전근대적인 종교 관습, 공업기반의 결여 등으로 경제 전체가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전형적인 농업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79년 소련 침공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도입되었다. 이후 계속된 내전으로 피폐한 경제기반조차 파괴되었고 경제활동에 필요한 인력 및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아프간 경제는 지속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다. 


2001년 말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아프간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국제사회의 원조 및 지원에 힘입어 2007년까지 연평균 11.9%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의 밑바탕에는 농업분야를 중심으로 건설, 무역, 최근에는 무선통신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GNP의 2/3는 농업이, 나머지는 광업·제조업·공공사업 부문과 교역이 차지하며, 주요 교역국으로는 파키스탄, 인도, 미국, 타직 등을 있다. 또한 아프간은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국이다.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의 생산 조건이 아프간의 건조한 기후와 맞아 떨어지고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적발이 힘들며 전쟁으로 인한 치안 부재 상태로 인해 아프간은 완벽한 아편생산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탈레반이 아편 생산을 금지하였지만, 미국과의 전쟁 이후 오히려 탈레반이 자금 확보를 위해 아편 생산을 독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IMF 관련 국제기구인 UN마약범죄사무국(UNODC) 등은 아편산업 규모가 아프간 전체 GDP 규모의 40% 달하고 있으며, 지하경제 규모가 전체 경제규모의 80~90%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편산업 지하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아프간 정부는 경제 재건을 위해 필요한 세금 수입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8 아프간 정부는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전략 정책 수립을 위해 IMF 공동으로 아프간 개발 종합전략(Afghanistan National Development Strategy)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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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4. 12:38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및 행정

 

 

정부와 의회 및 법원







아프간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이다.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는 2004년 10월 55.4%의 지지율을 얻어 임기 5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9년 8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치안 부재와 낮은 투표율, 각종 선거 부정들로 얼룩진 가운데 다시 당선되어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행정부의 내각은 대통령과 함께 국민 직선으로 선출되는 2명의 부통령과 대통령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임명하는 25명의 각료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 의회 결정비준권, 장관ㆍ판사ㆍ장교 임명동의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가지며, 내각은 대내외 정책을 집행하고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한다. 

 

입법부의 의회 형태는 양원제로, 원로회의로 불리는 상원Meshrano Jirga은 102명의 의원(임기 4년의 34석은 주선거에서, 임기 3년의 34석은 지방선거에서 선출되며 임기 5년의 나머지 34석은 대통령이 지명)으로 구성된다. 하원Wolesi Jirga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249석이 구성되고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3분의 2 이상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법안을 제출ㆍ수정ㆍ폐지할 수 있다. 양원의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 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정한다. 족장회의에서 유래된 로야지르가Loya Jirga는 독립, 국민 주권, 영토 통합, 헌법 개정, 대통령 탄핵 등을 의결하며 국회의원, 주 및 지방 정부장으로 구성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사법부는 한때 과도정권하에서 근본주의자 종교인들이 장악을 한 결과 케이블 텔레비전 금지령이나 여성 권리의 제약 등에 대해 판결하거나 헌법상의 권한을 무시하고 법원에 맡겨지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기도 하는 등의 파행을 겪었다. 하지만 현행 법원은 과거에 비해 더욱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전 법원보다는 기술 관료들이 더욱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행정구역


아프가니스탄의 지방 행정구역은 34개 주Province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주는 영내에 주도를 두고 있다. 각 주는 10여개의 군District으로 나뉘며, 전국적으로 364개의 군이 존재하는데, 각 군은 보통 한 도시나 여러 마을로 되어 있다. 각 주에는 주의회Provincial Council가 구성되며, 아프간 전체 주의원 수는 420명이다. 주지사는 내무부에서 임명하고, 군수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아프가니스탄 중앙 정부의 대표자이며, 모든 행정 및 공무를 담당한다. 주의 경찰국장도 내무부에서 임명하는데, 주지자와 협력하여 주내 모든 도시나 군의 법 집행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수도 카불Kabul은 예외적으로 시장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임명하며, 카불 주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6. 14. 12:31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및 행정

 

 

 

정국 개황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체제는 이슬람공화국이고,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이며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은 2014년 5월 22일 임기가 종료되는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는 여러 정치적 세력간의 다툼과 정변 및 권력 이동의 불안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1919년 독립 이후 아프간은 왕정(1919), 공화정(1973), 공산 통치(1978), 소련의 침공(1979), 원리주의 신정(1996), 미국의 침공(2001) 등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의 정치 형태를 겪었다. 


무자헤딘이 나지불라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1992년 이전까지 아프간은 PDPA(인민민주당)가 주요 도시들을 지배했고, 농촌지역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정부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아래서만 협력하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자 옛 게릴라 반군, 종교지도자, 지식인 등으로 이루어진 폭넓은 이슬람교 단체 연합이 의장을 포함해 51명으로 구성된 통치회의를 카불에 결성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뒤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나서 카르자이 과도정부가 구성된 후, 2003년 로야지르가Loya Jirga(아프간 종족 대표자 회의)에서 비준되고 2004년 1월에 채택된 신헌법에 의해 아프간은 3부(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로 이루어진 현재의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신헌법의 주요 내용은 이슬람 외 여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대통령 중심제 및 양원제 채택, 여성의 정치·사회 진출을 허용하는 등이었다. 

 

그러나 2014년 올해 차기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정치일정들에 당면해 있는 아프간의 정국은 선거준비 미비와 치안 불안 등의 요인들 때문에 예정대로 정치일정들이 치러질 지에 대해 일부에서 우려를 제기하고 있을 정도로 미래가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다. 



또한 아프간은 2009년 11월 국제 투명성 기구의 연간 부패 지수에서 세 계단이 떨어져서 소말리아 다음으로 부패가 심한 세계 2위의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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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3. 14:44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아프간-미국 전쟁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9.11테러)를 당했다. 그런데 이 테러의 주모자로 알려진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가 이끄는 국제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Al-Qaeda가 아프간의 탈레반들과 연합했으며 그들이 아프간에서 은신하며 신변을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미국은 이들의 신변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과 미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아프간 반군인 북부동맹도 공격을 강화하여 2001년 11월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이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2001년 11월 26일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정파(로마그룹, 페샤와르그룹, 북부동맹, 키프로스그룹)가 참여해 파슈툰족 출신인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2005년 9월 개최된 아프간 총선 이후 2005년 12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개원되고 의회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미국에 패한 탈레반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카르자이 정권에 끈질기게 항거하고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현재 3 3000 규모의 미군을 아프간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과거 소련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나토NATO 진영은 아프간 반군과의 오랜 소모전으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고 있는 상황이므로 2014년부터 치안권을 아프간 정부에 넘겨주고 서서히 철수할 전망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국제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교도들과 이란에 있는 180만 명의 난민을 이유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일정 부분 관여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란 견제세력을 지원했다. 파키스탄에는 15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파슈툰족의 영원한 고향이므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밖의 나라들은 아프가니스탄 군벌 세력이 양성하는 테러리스트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당량 생산·거래되는 마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관련된 러시아ㆍ유럽연합(EU) 초강대국들이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한층 복잡한 상태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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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3. 14:41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탈레반-북부동맹 내전

하지만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장악한 무자헤딘은 강고한 통일체 조직이 아니라 여러 무장군벌과 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이를 극복하고 단일 조직체로 통합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무자헤딘 세력들간에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충돌하면서 아프간은 다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Mullah Mohammed Omar가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10월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서 탈레반Taliban이라는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랍바니 대통령과 다른 무자헤딘 세력들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원리주의Islamic fundamentalism를 표방했다. 탈레반의 무장투쟁은 정권과 군벌의 학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따라 탈레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랍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극단적인 원리주의 독재 정치를 시작하여 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하는가 하면 음주, 담배흡연, 면도, 영화를 금지하고 연날리기나 부즈카시같은 아프간의 전통놀이도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금지했으며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을 가했다. 또한 문화재 파괴에 민간인 학살, 법 위반자에 대한 손목절단과 잔인한 총살형 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포로 몰아갔다.

 

이에 탈레반 정권 성립 후 부르하누딘 랍바니 등 몇몇 무자헤딘 세력들이 북부 산악지역으로 달아나 결성한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이 탈레반 정권에 맞서 내전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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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3. 14:38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아프간-소련 전쟁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인접국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자국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결국 소련은 1979년 12월 27일 기존 정권 수호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 대통령을 사살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이 개시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에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해 체코 영사로 밀려난 바브라크 카르말Babrak Karmal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친소련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군 및 친소 카르말 정부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과 게릴라전 형태의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때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은 소련군의 반군 진압작전을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피했다.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소련은 막대한 전비를 쓰고 병력도 쏟아부었지만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자 1985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군 병력 철수를 시작해 이듬해인 1989년 완료함으로써 아프간-소련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나지불라-무자헤딘 내전

그러나 카르말에 이어 집권한 친소 정권인 모하마드 나지불라Mohammad Najibullah 정권이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반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주요 도시들을 계속 지배하려 하자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주둔 소련군이 두고 간 무기들과 소련의 추가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우세했지만 무자헤딘이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강력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면서 나지불라 정부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무자헤딘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정부군의 공군기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에 대한 약탈과 강간, 방화 등이 자행되면서 나지불라 정부는 국민들의 민심마저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정부군은 패퇴를 반복했고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장병들이 늘어났으며,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지원이 끊기는 등 악재가 계속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무자헤딘은 점차 세력을 넓혀 카불을 제외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고, 마침내 1992년 4월 25일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인 수도 카불의 점령에 성공하면서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고 14년(1978~1992)간 계속된 장기간의 내전은 무자헤딘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는 참화를 겪었다. 종전 후 이슬람 집권평의회 의장 모자데디는 5월 내각을 발족시키고, 6월 랍바니Burhanuddin Rabbani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12월 랍바니는 임기 2년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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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2. 11:58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공화국 수립과 공산독재정권의 등장

1919년 8월 독립하며 군주제를 유지하게 된 아프간의 집권자는 아마눌라Amanullah왕이었다. 그는 1880~1901년간 재위했던 라만Rahman왕의 셋째아들이다. 아마눌라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종교 및 부족세력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1929년에 즉위한 나디르 칸Nadir Khan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열었으나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Mohammad Zahir Shah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자히르는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며 신중하고 온건한 정부를 운영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도 했으나 1973년 7월 국왕이 외유를 하던 도중에 좌익 파르캄(‘깃발’이라는 뜻)당이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모하마드 다우드 칸Mohammad Daoud Khan 전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다우드 칸은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총리가 되었고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 사회를 바꾸려고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외교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다우드 대통령은 친소련 정책을 펼치면서도 자국 내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을 탄압했고 나아가 이슬람주의자들까지 탄압하는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내의 불만을 키웠고 결국 1978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PDPA)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 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민주당 1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쿠데타로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운 인민민주당은 급진적인 공산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러한 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종교를 부정하면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소위 ‘무자헤딘(مجاهدين; mujaheddin)’이라 불리우는 이슬람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해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헤딘간의 충돌로 인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집권한 인민민주당 내부에서도 여러 파벌들의 분열상이 나타났고 1979년에는 당내 권력 투쟁에서 타라키가 실각되고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이 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내정간섭을 거부했고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 세력, 당내 정파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분열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공산 정권을 붕괴 위기로 몰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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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1. 20:49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최초의 근대 통일국가 두라니 



1747년 이란장교 출신인 두라니Ahmad Shar Durrani는 칸다하르에 자치정부를 수립, ‘두라니Durrani 제국’을 건설하였다. 자신의 부족인 파슈툰족 사도자이 부족을 중심으로 통치했던 두라니는 동으로 인도 무굴제국을 격퇴하고 서로는 페르시아로부터 헤라를 탈환하는 등 아프간 영토를 공고화하고 가장 광대한 회교제국을 형성하였으므로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1772년 두라니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티무르 샤Timur Shah가 즉위하고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Kabul로 옮겼다. 혈족에 바탕을 둔 티무르의 통치는 비 파슈툰족 및 같은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으로부터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1818년 사도자이족 왕조가 멸망한 후에는 왕권쟁탈을 위한 내전이 아프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26년 두라니 부족 출신의 도스트Dost가 집권하였다. 도스트는 아들을 동부지역으로 파견하여 시크Sikh군을 격퇴한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스트는 시크족의 위협에 대한 방어를 위해 당시 인도에 주둔 중이던 아우크랜드Auckland 영국총리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는 영국이 아프간 분쟁에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아프간 내전의 원인은 이데올로기적, 제도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의무와 충성심에 바탕을 둔 개별적인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 이는 아프간 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3차 아프간전쟁과 독립 군주국 시대

19세기 이후 아프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대로서 두 제국에 의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즉 제국주의적 경쟁과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남쪽 부동항을 찾으려는 남하 정책의 거점이면서 자국의 영향권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내륙국들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방지하려고 했다. 반면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까지 진출할 것이라고 판단, 이를 막기 위해서 인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아프가니스탄을 세 차례나 침공해 자국의 세력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것이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아프간-영국간의 전쟁(아프간 전쟁)이다. 

 



영국은 도스트Dost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Shir Ali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
1842)ㆍ제2(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 아브도르 라흐만Abdor Rahman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 하비브알라Habib Allah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제정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한 결과 제3차 아프간전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였으므로 영국은 더 이상 전쟁의 여력이 없었던 탓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그 해 8월 아프간과 영국간에 라왈핀디Rawalpindi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어 아프간은 독립 군주국 체제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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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1. 13:15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고대 이민족 지배 시대

아프간의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규정되어진 측면이 크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 또는 동·서양의 주요 육상 연결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여행자, 유목민, 상인, 군인들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전략적인 지점에 위치한 아프간 지역은 그만큼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의 명칭으로 처음 이슬람 자료에 나타난 것은 982년이다. 하지만 그 이전 고대 역사부터 살펴보면 아프간 지역은 페르시아(고대 이란)와 인도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인도와 그리스, 페르시아계 국가들에 의해 번갈아가며 지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BCE(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인도, 아프가니스탄까지 확대하였다. 이후 BCE 4세기에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대왕Alexandros the Great에게 아프가니스탄이 정복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아프간 일부 지역은 시리아에 거점을 둔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도 북부에 근거를 둔 마우리아Maurya 제국에 넘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지금의 ‘발흐’ 지방) 총독통치령에서는 박트리아Bactria 왕국이 생겨나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선보였다. BCE 2세기에는 인도 쿠샨Kushan 왕조의 카니슈카 왕(78~144경)에게 정복되었다. 이어 에프탈Ephtalite 왕조와 페르시아 사산Sasan 왕조를 거치면서 힌두교의 영향권에 들어섰으며, 870년경 사파르Saffarid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교가 뿌리내렸다. 1219년에는 칭기즈 칸의 몽골Mongol 제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몽골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독립된 제후국들로 분리되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인도 무굴Mughul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비Safavid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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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0. 12:47

전쟁과 상흔의 역사를 지닌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이다. 고대에는 ‘실크로드Silk Road(비단길)’의 중심지였지만 중앙아시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1919년 독립 이후에도 여러 분쟁 요인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전 상태로 빠져드는 바람에 세계적인 극빈국이며 위험 요소가 많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는 다민족ㆍ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고 과거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정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노종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아프가니스탄 자연환경과 역사

아프가니스탄 자연환경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있는 내륙국이다. 동쪽으로는 파키스탄과 중국(일부),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 등 6개국과 각각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이 메마르고 기름지지 못한 산악지대 또는 사막지대이다. 북부와 남서부 평원지역 일부는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춘 농업지대. 전국토의 1/8가량을 차지하는 농경지(약 12.13%) 가운데 1/3에 관개시설이 되어 있으며 이 관개지역에서 전국 작물의 80% 이상이 생산된다. 

 

아프가니스탄은 3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주요 농업지역인 북부 평원지대, 리게스탄 사막을 비롯해 주로 사막과 반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서부 고원지대,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힌두쿠시 산맥을 포함해 히말라야 산맥의 연장지대인 중부 산악지대 등이 그것이다. 

 

북쪽의 여러 공화국들과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는 아무다리야 강(고대에는 옥수스 강)이 흐르고 있다. 남서부 고원지대에는 길이 1,150km의 헬만드 강이 여러 차례의 관개공사를 거쳐 이 지역의 필요한 농업용수 대부분을 공급한다. 

 

아프간은 대륙성 기후로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다. 해발 1,770m의 고지에 위치한 수고 카불의 여름 최고기온은 35~40, 겨울 최저기온은 -5~0이지만 지방 산악지대의 겨울 최저는 -35, 사막지대의 여름 최고는 55 이른다. 중부 산악지대는 북극기후로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는 기후이다. 나머지 지역 역시 겨울에는 대부분 춥지만, 여름에는 더운 반건조 스텝 지대이거나 사막지대이다. 

 

강우량은 극히 적어 연평균 101~406㎜ 수준이다. 좀 구체적으로 남서부 사막지대의 75㎜ 미만에서부터 힌두쿠시 산맥의 1,270㎜ 이상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아프간에는 막대한 양의 고급 철광석을 비롯해 중요한 여러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채광과 수송상의 문제 때문에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북부 평원지역에 매장된 천연가스만이 유일하게 개발되어 상당량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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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4. 6. 7. 00:27


저승 명부의 세계

 

명부는 좁은 의미로서 죽어서 심판을 받는 곳, 다시 말하면 염라대왕이 있는 곳이다. 넓은 의미로는 죽은 뒤에 가는 다른 세상을 말한다. 다른 말로 저승이라고도 하며 명계冥界, 황천黃泉, 구천九泉, 유명幽冥, 음부陰府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한다.

 

명부시왕과 관련해서는 불교의 명부신앙을 참고할 수 있다. 불교의 명부신앙은 고대 슈메르, 메소포타미아 및 고대 아리아인들의 명부신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명부신앙은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을 거쳐 온 것이다. 불교의 명부에는 지하세계의 구주救主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함께 심판관인 시왕들이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 받은 보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대승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님으로 신앙된다. 그는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은 이미 입멸하고 미래불인 미륵불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천상·인간·아수라·아귀·축생·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에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모신 전각을 지장전·명부전 혹은 시왕전이라 한다.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죽은 조상을 극락왕생하도록 천도遷度하는 공력을 가진 보살이다. ‘이 세상 사람들 사람이라도 성불하지 않은 이가 있다면 또한 부처가 되지 않으리라’ 하는 서원을 세워 석가 입멸 ‘미륵불’이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중생들이 고통에서 헤어나도록 제도하고 있는 보살이다. 따라서 '부처' 불리지 아니하고 '보살' 존숭한다. 사찰에는 이러한 지장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명부전이 대개 대웅전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어 지장전, 시왕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5. 31. 23:43



명부시왕과 야마

 

명부시왕은 본래 불교의 경전에는 없다. 도교의 신앙 가운데, 이 '시왕'들이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판결하는 10위位의 임금으로 되어 있다. 그것을 불교가 포용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불교에서 '시왕'이라 하면 욕계 6천의 임금들과 색계 4선천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나, 보통은 도교에서 일컫는 '10위'의 신을 지칭한다.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도 사후死後 암흑세계를 지배하는 왕으로서 이른바 시왕十王 가운데의 하나이다. 본래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 행동을 심판하고 다스린다는 염라국의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염라대왕도 불교 교의敎義와는 관계없는 존재이다.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신화의 야마에 다다른다.

 

야마는 인도신화에서 인간 제1호, 따라서 죽음도 제1호로 기록된 자이다. 인간 세상에서 처음으로 죽은 뒤 야마는 사람의 자취가 전혀 닿지 않은 길을 거슬러 천계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 후로 이 천국에 줄지어 죽은 자가 도착했으며 급기야 천국은 만원이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천국에 온 자 중에는 천국과 어울리지 않는 악인도 있었다. 그래서 야마는 그들을 가려내 지옥으로 추방했다. 따라서 야마 자신은 천국의 지배자인 동시에 지옥의 지배자이기도 했고, 재판관이기도 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염라대왕에게 심판 받는 곳이 바로 명부冥府가 된다. 명부의 총 책임자는 염라대왕이다.

 

 

명부시왕 용례

 

『삼국유사』권 제5, 13장, 감통 7 ‘선율환생’ 편에는 “나도 또한 남염주의 신라 사람이었는데 우리 부모가 금강사의 논 1묘를 몰래 뺏은 일로 죄를 얻어 명부에 잡혀 와서 오랫동안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我亦南閻州新羅人 坐父母陰取金剛寺水田一畝 被冥府追檢 久受重苦.)”라는 기록이 있다.

 

『당태종전唐太宗傳』 『이계룡전李季龍傳』 등 고전소설에도 명부의 명관冥官의 위계를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우주의 주재신으로 옥황상제, 그 아래 명부를 관할하는 명부시왕冥府十王이 있고 그 대표격이 염왕閻王이다. 염왕 아래 생사부生死簿를 주관하는 판관判官이 있다. 그 밑에 염왕의 명을 받아 사자를 압송해 나르는 차사差使, 사자使者가 있다.

 

그리고 명부의 구조는 큰 성곽으로 그려지고, 그 안에 죄인 심판하는 염왕의 궁전, 선인善人들이 행락行樂하는 극락, 선계仙界가 있고 그 이웃에 악인惡人들이 형벌 받는 지옥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