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5. 7. 20. 00:30






Norway 교육과 언론

 




교육

노르웨이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10년을 의무교육으로 한다. 초등 과정은 6~13세, 1~7학년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등 과정은 13~16세, 고등 과정은 16~19세로 나뉘어져있다. 전체 학생 수는 약 90만 명에 이르고, 총 학교 수는 3,400여 개이다. 대학은 70여 개 정도이고, 학생 수는 23만 명 정도이다. 특징적인 것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정부지원으로 무상교육(외국인도 동일)이 실시된다는 점이다. 다만 대학 중에서 University는 모두 국가 보조금으로 운영되나 college 및 사립대학 등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영어는 기초 교육 과정에서 의무이고, 반수가 넘는 학생들이 불어와 독어를 추가로 선택하고 있다. 




 

언론

노르웨이는 언론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한다. 매체를 보면, 먼저 신문의 경우 전국적인 독자망을 갖고 있는 것은 3개(Verdens Gang, Aftenposten, Dagbladet)다. 그러나 전국에는 200개가 넘는 신문사들이 있다. 전체 신문 발행부수는 약 300만부이다. 방송으로는 국영 NRK(노르웨이 방송협회)를 비롯하여, 민방 TV 2, TV Norge, TV 3 등 다양한 채널이 있다. 노르웨이 최대 통신사는 1867년 설립된 NTB(Norsk Telegrambyraa)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19. 00:30

 

 

 

노르웨이 복지

 

 

 

 

노르웨이는 1997년 2월 ‘국가 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 제정을 계기로 노르웨이 사회복지제도의 근간인 국가보험제도(National Insurance Scheme)를 시행하고 있다. 국가보험제도는 국민연금(National Pension Insurance), 실업보험(Unemployment Insurance), 국민의료보험(National Health Insurance), 직업재해보험(Occupational Injuries Insurance), 출산·아동보험 등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 거주자는 외국정부 또는 국제기구에 고용되어 근무하는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국적에 관계없이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노르웨이는 이웃나라인 스웨덴 덴마크와 더불어 세계 최고수준의 복지국가이다. 이는 풍부한 자원 덕분에 복지 재정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 기반을 둔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는 세계 142개 나라를 대상으로 '2014 세계 번영 지수'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노르웨이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에 선정되었다고 하였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평균 수명은 물론 인간개발지수(HDI)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에서 남녀 평등 지수가 가장 높다. 최근 징병제를 여성에게도 확대하는 법안이 통과돼 2015년부터 시작될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는 1978년 양성평등법(Gender Equality Act)을 제정하여 교육 고용 등 사회 제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방지 및 제거하고자 한다. 양성평등법은 채용 승진 해고 시 성별에 따른 차별 및 임신을 이유로 한 해고를 금지하고 있다. 양성평등법 및 기업법은 550여개에 달하는 공기업 및 상장기업에게 이사진의 40% 이상을 여성에 할당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기타 결혼법, 상속법, 성명법姓名法, 시민권법 근로관계 법령 등에서 양성 지위 평등 여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들을 두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결혼 후에도 부부는 별성別姓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자녀의 성도 부모 일방의 것을 선택할 있다. 

 

그리하여 정치 분야의 경우 여성에 대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은 일찍이 20세기 초(1913년)에 주어 졌고, 정치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 신장으로 여성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다. 2008년 기준 여성의 공직 점유 비율을 보면, 중앙의회의 경우 총 169명 중 64명(38%), 중앙정부에는 약 40%에 이른다. 2013년 고용 인력 현황을 보면, 총인구 중 직장을 다니는 사람 수가 약 270만 명으로 약 절반이다. 총 노동 인구 중 여성이 약 47%를 차지한다. 여성은 전체 여성인구의 약 68%, 남성은 전체 남성인구의 74%가 고용되어있다. 직장을 다니는 여성 중 풀타임으로 일하는 여성은 약 6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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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8. 00:30




 

 

노르웨이 민족과 언어

 




 

노르웨이 주민은 금발과 파란 눈을 지니며 키가 큰 사람이 많다. 또한 장수長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균 수명은 남자는 73.6세이며, 여자는 80.3세이다. 그리고 랩Lapp족은 북부 노르웨이에만 살며 용모, 언어, 문화가 모두 이색적이다. 인구의 98%는 게르만계(북유럽인, 유럽중부인, 발트해 연안인) 노르웨이인이며 최대 소수민족은 약 0.6%를 차지하는 랩족이다. 노르웨이인을 구성하는 주체는 장신長身 장두長頭 금발 벽안碧眼 게르만계 북유럽인종이나, 최북부 지방의 핀마르크주에는 유사 이전부터 살아온 2만의 라프인 있다. 남서부에는 단두형短頭型 다갈색 모발과 눈을 가진 알프스계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핀마르크주에는 라프인과의 혼혈족인 단두에 얼굴이 넓은 주민들을 있다. 

 

노르웨이의 공식 언어는 노르웨이어이다. 노르웨이어는 북게르만어(또는 노르드어)에 속하며 덴마크어와 스웨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단일어가 아니다. 현재 노르웨이에는 2개의 공용어가 있다. 하나는 보크몰Bokmål(‘책 속의 언어’), 속칭 리크스몰로 부르는 언어인데 이는 과거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을 노르웨이어화한 덴마크어이다. 덴마크어 문어체를 노르웨이 동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언의 음운 조직으로 번안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니노르스크Nynorsk(‘신 노르웨이어’), 속칭 란스몰로 부르는 언어이다. 이는 19세기 중엽 민족주의에 자극되어 노르웨이어와 지방의 방언을 정리하여 만든 언어로 1885 의회의 승인으로 공용어가 되었다. 보크몰과 니노르스크는 공식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지만 보크몰은 오슬로를 중심으로 대도시 상류계층의 사람들의 일상어이다. 니노르스크는 전체 인구의 10~15%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서부 해안에서 사용되고 정부 문서, 문학 작품, 희곡, 방송, 교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약 2만여 명의 노르웨이인들은 사미Sámi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미어는 핀란드·우그리어족에 속한다. 북사미어의 경우 노르웨이 북부 지역에서는 노르웨이어와 동등한 자격의 공식 언어로 자리 잡았다. 모국어가 노르웨이어가 아닌 이주민들과 난민들의 숫자 때문에 현재 노르웨이 초등학교에서는 110가지의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영어는 노르웨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국제적 언어로 사용되며,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뒤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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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7. 00:30




노르웨이의 경제




2014년 기준 노르웨이의 국내총생산(GDP)은 5,116억 달러로 세계 26위 규모이다. 이는 1조 4,495억 달러로 세계 13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보다 적은 수치이다. 그러나 한 국가 국민들의 1인당 소득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지표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 per capita)을 보면 다르다. 노르웨이는 99,295 달러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이지만 우리나라는 28,739 달러로 29위이다. 우리나라보다 약 3.5배나 높다. 이는 에너지, 해운, 해양, 수산업 강국으로서의 노르웨이 위상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경제 안정화를 우선시하는 노르웨이의 경제정책은 높은 고용률, 지속가능한 개발정책, 공평한 수입의 분배 그리고 잘 구성된 복지시스템 구축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친환경과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전략적 바탕 위에 이루어지고 있다. OECD의 노르웨이 경제보고서(2012.2.15)에 따르면 노르웨이 경제는 석유관련 막대한 수익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 규모를 석유관련 수입으로 적립된 펀드(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 GPFG)의 일정 규모(4%) 이하로 유지하는 재정규칙을 대체로 잘 준수하는 가운데 건전한 거시정책을 수행함으로써 현재 유로위기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양호한 경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노르웨이 경제 발전의 기초는 제조업이 아닌 원유 개발(1969년 에코피스크Ekofisk 유전에서 처음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노르웨이 경제의 특성상 국민 경제는 석유산업 의존도가 매우 높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의 경우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반면, 서비스 부문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주요 부존자원은 원유, 천연가스, 철광석이며, 경제적 강점은 에너지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지만 약점은 국내시장이 협소하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산업을 종사자를 기준으로 보면 1차 산업이 약 2%, 2차 산업이 20%, 3차 산업이 78%를 차지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면 1차 산업이 약 1%, 2차 산업이 40%, 3차 산업이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전국토의 4%만이 경작 가능하여 농업생산이 미미하다. 

 

노르웨이의 2013년 무역 흑자는 323 billion NOK인데, 그 효자 수출품이 역시 석유와 가스이다. 노르웨이의 가장 큰 수출국은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 독일 순이고, 수입은 스웨덴, 독일, 중국, 영국 순이다. 노르웨이의 수출과 수입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스웨덴인데, 수입의 14% 수출의 9%를 차지한다. 노르웨이 수출의 약 80%, 수입의 60%는 EU(유럽연합) 국가와 이루어진다. 개발도상국에서 수입되는 것은 18%에 지나지 않으며, 주목할 만한 점은 최근 중국이 3위의 수입국일 정도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석유와 가스이고 그 뒤를 이어 어업과 수산물, 금속(특히 알루미늄)이다. 노르웨이 연어와 고등어는 우리나라로도 많이 수출되고 있다. 노르웨이가 수입하는 품목으로는 산업기계, 컴퓨터, 전기, 자동차 엔진 등이 많다. 

 

중요 기업과 산업으로는 세계 최대 특수 선박 제조회사인 에이커 솔루션즈Aker Solutions, 세계 4대 선급협회 중 하나인 데트 노르스케 베리타스Det Norske Veritas, 선박용 통신 장비 기기업체인 네라NERA, 수중음향탐지장치인 소나Sonar를 제조하는 심라드SIMRAD, 잠수정 업체인 아르구스Argus, 마린 패션 업체인 헬리 한센Helly Hansen 등 해운과 북해 유전 관련 산업이 활발하다. 웹 브라우저 Opera를 만들고 있는 오페라 소프트웨어Opera Software도 노르웨이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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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6. 00:30




 

노르웨이 정치정세의 특징

 

 




노르웨이는 입헌군주국으로서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제도적 관행상 영국과 유사한 정치체제이다. 비례대표제도로 인해 군소정당이 난립하고는 있으나,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보수계)로 구분되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이 운영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2차 대전 후 국내정치의 주안점은 경제정책이었는 바,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 간에 사유재산권의 범위, 공업화 및 도시화에 따른 장단점이 주요 논쟁대상이 되었고, 특히 1960년대에는 북해에서 원유와 가스가 발견됨에 따라 개발을 둘러싼 국가의 역할문제가 큰 논란거리를 형성하였다. 세금, 사회보장문제, 북해유전문제 등 경제문제 이외에 교육문제, 노인복지, 의료개혁, 환경, 대NATO 정책, EU 가입문제 등이 오랜 정치 쟁점이라 할 수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대법원Høyesterett, 고등법원, 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17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고, 내각의 권고에 따라 국왕이 임명하며 종신제로 운영된다. 개별 사건 심의시, 법원은 5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며, 이들 5명중 1명이 위원장 역할을 수행한다. 

 

고등법원은 항소법원으로의 역할만 담당한다. 법률 적용 및 소송 절차, 판결 등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항소 가능하며, 통상적인 항소심의 경우, 3인의 법관과 4명의 법률비전문가(lay people)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하며, 징역 6년 이상의 중대한 범죄의 항소심의 경우, 3인의 법관과 10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한다. 

 

지방법원은 민사 및 형사사건의 제1심 법원이다. 통상적인 경우, 1인의 법관과 2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하며, 중대한 형사사건의 경우, 2인의 법관과 3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한다. 민사사건의 경우, 통상 1인의 법관이 심의하나, 일방 당사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3인의 법관으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할 수 있다. 또한 3인의 법관으로 법원이 구성되는 경우, 일방 당사자의 요청이 있으면 4인의 법률비전문가가 심의에 참여할 수 있다.

 

행정구역

노르웨이의 행정 구역은 필케Fylke(‘주’ ; County)를 가장 상위의 범주로 한다. 우리나라의 광역 자치 단체에 해당하는 필케는 19개이다. 주(오슬로는 전통적인 주로 간주하지 않음)는 국가와 지방자치제 사이의 행정적인 중간 단계를 제공하기 위해 1975년에 형성되었다. 각 주는 직접 선거에 의해 광역의회County Council를 구성한다. 필케는 기초 자치 단체인 코뮤네Kommune(‘군’ ; Municipality)로 세분화된다. 노르웨이에는 2012년 1월 기준, 429개의 지방자치체가 과세, 사회복지 정책 등에 있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가장 큰 지방자치체municipality는 수도 오슬로Oslo(647,676명)로, 유일하게 광역과 기초 자치 단체를 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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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5. 01:00





북유럽국가들 

입헌군주국 - 내각책임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이들의 공통점은 입헌군주국가라는 점이다. 모두 왕을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지구촌에는 지금도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군주제 국가가 적지 않지만, 노르웨이 국왕은 형식상 국가 원수이다. 노르웨이 국왕은 교회의 수장이며, 총리 및 각료 임명권, 법률거부권,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칙령은 국왕이 결제를 하고 총리가 부서한다. 정부에서 결정한 사항은 매주 금요일 국무회의에서 국왕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권한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국가 원수는 하랄드 5세King Harald Ⅴ 국왕으로 1991년에 즉위하였는데, 노르웨이 왕실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향유하고 있다.

 




행정부: 내각

형식적 행정권은 국왕에게 있지만, 현실 정치의 실질적인 행정권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 조직(내각)은 총리실을 비롯하여 총 18개 부, 18명의 장관(외교부의 경우 장관 2)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각은 최고 책임자인 총리와 각료로 구성되며, 총리는 의회의 동의하에 형식상 국왕이 임명한다. 2015 현재 노르웨이 내각 총리는 2013 총선을 통해 우파 연정으로 집권한 보수당의 에르나 솔베르그Erna Solberg이다. 

 

입법부: 단원제 의회

노르웨이의 의회는 스투르팅Storting(노르웨이어로는 스토르틴게트Stortinget)이라고 불리며, 노르웨이 최상위 정치 조직이다. 노르웨이 의회는 원래 양원제였다. 19개의 주(필케)를 단위로 하는 대선거구제에서 선출된 16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169명의 의원 가운데 4분의 1이 상원에 해당하는 러그팅Lagting을, 나머지 의원들이 하원에 해당하는 오델스팅Odelsting을 이루는 양원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2009년 10월부터 이것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지금은 임기 4년의 단원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의회는 19개 주에서 선출되는 총 169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처럼 1인 2표제(인물과 정당에 각 1표)를 시행하고 있으며, 선거구별로 크기 및 인구수에 따라 4~15명의 인원을 선출한다. 특이한 점은 보궐선거가 없다는 점이다. 궐석 시에는 해당 정당의 비례대표 리스트 순위에 따라 승계된다.

 

노르웨이에는 노동당Labour Party,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중앙당Centre Party,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ic Party, 자유당Liberal Party, 사회주의 좌파당Socialist Left Party, 진보당Progress Party 등 여러 정당이 있다. 2013년 9월 선거 결과 보수당과 진보당 기독민주당 자유당 등 보수야당 연합이 총 169석 중 과반 이상인 96석을 차지하고, 여당인 노동당을 비롯한 3개 진보정당 연합은 72석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철의 에르나'로 불리는 에르나 솔베르그 보수당 당수가 노르웨이 사상 두 번째 여성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고 있다. 특징적인 점은 당시 의원 중 여성 의원이 전체의 40.8%인 69명이 선출된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높은 여성 비율이다. 이런 면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각의 40%가 여성, 기업 임원의 40%가 여성인 나라, 유엔이 ‘성평등의 천국’이라 부르는 나라, 그것이 노르웨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14. 00:03




 

 

1905년, 독립 군주국이 되다

 

 

 

1814년 독립이 좌절된 이후, 노르웨이는 지속적으로 연합 내에서 평등권 획득을 주장했다. 1890년대에 노르웨이가 독자적인 영사권을 주장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01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영사제도에 관하여 협상을 하였으나 스웨덴 외무성의 감독을 받는 조건으로 영사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제안을 노르웨이측이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고, 1905년 6월에는 노르웨이 의회가 내각의 제안으로 독자적인 영사제도 수립을 결의하자 스웨덴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1905년 9월, 독자적인 영사제도를 둘러싼 양국간의 갈등은 양국이 각기 육군과 해군에 동원령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는데, 결국 양국 대표들이 회합을 가진 칼스타드Karlstad에서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완전한 독립과 연합의 분리를 승인하였다.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했으며, 노르웨이는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했다. 14세기 말부터 1814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1814년부터 1905년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노르웨이는 이로써 완전 독립을 하여 입헌군주국으로 오늘날의 왕가를 이루게 되었다. 

 



노르웨이 홀로서기, 그 이후

1905년 독립 군주국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노르웨이는 1914년까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 했고, 1913년에는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다.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즉각 중립을 선포했다. 노르웨이는 중립이 존중되어 1차 대전의 직접적 피해를 겪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후 노르웨이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1935년 새로운 경제정책을 도입하고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세금 징수를 늘리고 공공사업을 확대하는 시책을 펴나갔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복지국가 건설 과정은 일시 중단되었다. 1940년 4월 독일군은 덴마크를 점령하고 노르웨이의 일부지역을 점령했다. 자체 군사력이 약했던 노르웨이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자 전 국토를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은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노르웨이 상선단 대부분은 연합국의 관리하에 편입되었다. 독일 점령기간 중 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으며 35,000명의 노르웨이인들이 집단수용소나 감옥에 수용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노르웨이는 UN(국제연합)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하였고, 1949년에는 전통적인 중립정책에서 친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14. 00:03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연합역사

 

 

 




1397년에는 스칸디나비아 3국인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이 칼마르 연합Union of Kalmar을 맺었다. 그것은 덴마크 왕이 다른 두 나라 왕을 겸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 호콘 6세의 미망인이며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의 딸인 마가레테Margarethe 여왕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통치하고 있었는데, 스웨덴을 포함하는 스칸디나비아 3국간 연합을 형성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칼마르 연합이 가능했던 것은 스칸디나비아 3국 왕실 간 친인척 관계, 문화적·언어적 유사성, 그리고 독일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 여러 가지 요인에 기인하였다. 연합의 국왕은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의 원로원 합의를 통해 선출하였는데, 국왕은 에릭왕King Erik이었다. 

 

그런데 1448년, 노르웨이 지배권을 둘러싸고 덴마크와 스웨덴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패권 경쟁에서 덴마크가 우세를 보임으로써 노르웨이는 덴마크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1523년에는 연합의 왕이던 크리스티안 2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Gustav Vasa가 봉기, 크리스티안 2세를 스웨덴에서 축출하고 스웨덴 국왕이 되자 스칸디나비아 3국 연합은 해체되었다. 

 



노르웨이·덴마크 연합(1523-1814) 

칼마르 동맹이 130여 년간 지속되다가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함으로써 와해는 되었으나, 덴마크 왕에 의한 노르웨이의 지배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덴마크 지배하의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한 투쟁은 모두 실패하였다. 16세기 초 오슬로의 아케르스후스Akershus성에서 덴마크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알브손Alvsson의 독립운동은 덴마크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극작가 입센Ipsen은 ‘At Akershus’라는 시에서 알브손Alvsson의 죽음을 ‘노르웨이의 심장을 강타’한 사건으로 묘사했다. 덴마크의 지배는 노르웨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전에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던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도화가 이루어졌고,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노르웨이 지배층의 대다수가 덴마크 귀족들로 구성됨에 따라 덴마크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노르웨이는 이전까지 주로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1700년대부터 상업이 발달하면서 노르웨이 경제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스웨덴 연합(1814-1905) 

노르웨이의 운명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또 바뀐다. 나폴레옹 전쟁시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함께 나폴레옹 진영에 소속되어 스웨덴과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패하면서 스웨덴과 영국은 덴마크 국왕 프리드리히 6세에게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이양하도록 압박했고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하며 킬Kiel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1700년대 말경부터 싹트기 시작한 노르웨이 국민의 독립 의식은 덴마크의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치달았고 킬 강화조약에서 노르웨이를 양도한 덴마크 왕의 권위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르웨이 정부는 에이츠볼Eidsvold에서 국가회의를 소집하고, 1814년 5월 17일에 독자적인 헌법과 왕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스웨덴의 칼 14세는 노르웨이를 전격 침공하였고, 노르웨이는 결국 스웨덴과의 연합 수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1905년까지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스웨덴과의 연합 동안 1814년 5월에 채택된 헌법을 간직하도록 허용되었고, 헌법상으로는 독립 국가였다. 스웨덴과의 연합 기간은 노르웨이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다당제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경제적으로는 산업사회로의 진전 및 상업선단의 급성장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1825년 미국으로의 첫 이민이 이루어진 후, 1910년까지 약 40만명의 노르웨이인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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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3. 07:23




노르게 왕국의 시작, 9세기 하랄드 1세

 



노르웨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말기인 BCE 90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노르웨이인의 조상은 바이킹Viking계 민족인 노르드인Norsemen이다. 노르웨이Norway라는 국명도 고대 노르드어로 ‘북쪽의 길(Norðvegr)’을 의미한다. 그들은 8세기 말까지 남부에서 여러 개의 작은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 국가는 일단의 무사들을 이끄는 족장이 지배했다. 이러한 분열된 공동체가 하나로 통일된 것은 9세기 후반이다. 885년경 하랄드 1Harald Fair Hair 처음으로 노르웨이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하였다. 노르게Norge 왕국, 노르웨이Norway 왕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통일국가의 완성은 이루지 못한 끊임없는 내란과 덴마크의 침략 등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고, 노르드인들은 강력한 해양 전사인 바이킹으로서 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9세기부터 노르드인은 해외로 진출하였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반세기에 걸친 노르드인의 지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바이킹의 해외 활동은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0세기 이후 노르웨이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지속되었으나, ‘해상의 왕’으로 유명했던 올라프 1세Olav Ⅰ Tryggvesson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기독교 전파에 노력하였다. 노르웨이의 재통일과 기독교로의 개종은 올라프 하랄드손Olav Haraldsson(재위 1016~1028년)을 기점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빠져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많은 노르웨이인들을 개종시켰다. 역사에서는 서기 1000년을 노르웨이에 기독교가 전래된 기점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로의 개종과정에서 올라프 하랄드손은 많은 적을 만들게 되고 1028년 덴마크의 카누테 왕King Canute과 결탁한 노르웨이 귀족들에 의해 축출되었다가 1030년 왕권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스베레 왕가 시대(1184-1319)

1130년부터 50년간 왕권을 둘러싼 귀족들 간의 내란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1184년 스베레 시구르드손Sverre Sigurdsson이 강력한 통일 국가를 완성하였다. 1184부터 1319년까지는 스베레 왕가 시대인데, 이 때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등으로 노르웨이의 영토를 확장하고 왕위를 장자가 상속하게 하는 등 국력이 신장되고 제도가 크게 정비되었다. 1217년 호콘 4세Håkon Håkonsson den Gamle 즉위하여 내란을 점차 평정하고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1217~1263년에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배하여 노르웨이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권 대립 항쟁이 그치지 않아 왕권이 쇠퇴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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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2. 01:19






노르웨이 영토와 자연환경




노르웨이는 공식 명칭이 노르웨이 왕국(The Kingdom of Norway)으로,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서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국토는 북위 57도에서 72도에 걸쳐 남북으로 약 1,750 길게 늘어지고 동경 4도에서 32도에 걸쳐 동서로 좁은 형태의 모습이다. 면적은 39, 한반도의 1.7, 대한민국의 4배이다.

 

노르웨이 땅은 250만 년 전부터 여러 번 빙하로 뒤덮였고, 지금도 약 1,700여 개의 빙하가 있다. 국토의 72%는 빙하의 침식을 받은 평탄한 꼭대기를 지닌 산지이다. 특징적인 것은 서쪽에 섬이 많다는 것인데,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2,000여 개의 섬을 포함하여, 노르웨이에는 섬이 약 15만 개나 있다. 그러다보니 해안선이 매우 길며, 거대한 피오르드fjord(협만峽灣: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 지형이 발달하였다. 

 



인접국을 보면 동부로는 나라의 대부분이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부 지역은 남으로는 핀란드, 동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부의 스카게라크 해협 건너편에는 덴마크가 있다. 또 남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해, 북해가 위치해 있다. 

 

노르웨이의 산계山系는 영국 제도를 형성하는 칼레도니아Caledonia계의 연장으로, 최고봉인 갈트회피겐(2,470m)이 남쪽에 있다. 글로마Glåma (599km) 가장 주요한 강이며 뫼사 호가 가장 호수(368)이다. 노르웨이는 알래스카와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기후가 따뜻하다. 그것은 멕시코 만류 덕분이다. 만류가 협만의 동결을 막아준다. 우리나라와 같이 4계절이 나타나지만 겨울이 가장 길고 여름은 짧지만 덥다. 7 평균 기온은 남쪽의 17로부터 북쪽의 10까지 변화한다. 또한 1 평균 기온은 남동 해안의 영하 2로부터 내륙 골짜기의 영하 10까지 기온차가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동쪽의 750㎜ 이하로부터 서쪽의 약 2,052㎜까지 큰 차이가 있다. 빈번한 돌풍이 발생하며 날씨 변화가 심하다. 북부 노르웨이는 백야白夜의 지방이다. 5월 중순부터 7월말까지 한여름에는 시계가 한밤중인 0시를 가리켜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계속된다. 반대로 11월말부터 1월말까지는 해가 지평선 위로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 중 서너 시간만 해를 볼 수 있는 긴 밤이 지속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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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1. 13:26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Norway

 

노르웨이는 세계지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이곳은 바이킹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고, 얼마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눈부신 설경과 스키의 나라, 자연이 준 마법 백야白夜와 피오르드fjord를 관광산업으로 하는 나라 등 노르웨이를 묘사하는 수사는 많다. 국기에 나타나 있는 자유·평등·박애 이념을 바탕으로 바이킹의 후손답게 해운, 해양, 수산업의 강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노르웨이를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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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8. 4. 23:25




미합중국의 정치 체제의 특성






미합중국은 ‘연방공화국’이라는 국가체제를 토대로 하여, ‘대통령중심제’의 정치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다. 즉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연방공화국 체제라 할 수 있는데, 미국 정부는 연방주의Federalism, 권력분립Seperation of Powers,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라는 헌법의 주요 원칙에 입각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의 권한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에 나누어지고, 다시 각자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기관 사이에 나누어진다. 이유는 정부의 권한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건국 당시에 만든 헌법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계속해서 수정조항들이 추가되었는데 권리장전의 10개 조항을 제외한 17개의 조항(수정헌법 11조~27조)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노예제 금지(제13조 1865년), 대통령 3선 금지(제22조 1951년) 등이다. 현행 미국의 연방헌법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규정하여 두고 그 이외의 사항은 모두 주정부의 권한으로 해 두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연방정부가 주정부를 규제할 수 있는 사항은 연방헌법이 연방의회에 권한을 부여한 사항에 한정된다. 다만 연방법과 주법이 상충할 경우에는 연방법이 우선한다.

 



헌법상 미국의 국가원수이자 연방정부의 수장인 대통령The President은 직접 선거가 아니라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을 통한 간접선거로 선출이 된다. 특이한 것은 주에서 한 표라도 더 많이 얻는 후보가 주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간다는 승자독식 제도winner takes all이다. 그래서 실제 득표수와 확보한 선거인수가 어긋나 더 높은 표를 얻었지만 선거인단수에서는 지는 경우도 간혹 일어난다. 최근의 경우로는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엘 고어 후보가 국민들의 표는 더 많이 받았으나 선거인단 수의 차이로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게 패배한 바 있다. 선거인단의 수는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수를 합치고 여기에 미국 연방정부가 소재한 컬럼비아 특별구에 배당된 몇 명을 합한것으로 현재는 538명이다.

 

현행 미국 행정부 내각Cabinet은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과 바이든Joseph Biden 부통령, 그리고 국무부를 비롯해 연방정부 집행기능의 주축을 이루는 15개의 중앙행정부처로 구성된다. 중앙 행정부처 각 부의 최고 책임자는 장관Secretary이며 연방 내각의 구성원이 되고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진다.

 

또한 중앙정보국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이나 연방준비은행제도Federal Reserve System 등 대통령을 위해 일을 하는 독립 행정기관들이 있는데, 이는 업무가 특수하여 행정 각 부에 소속되기가 어려우며 그 업무가 초당적 입장에서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설치된 기관들이다. 4년 임기의 대통령은 헌법상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가지며 주요 권한으로는 공직임명권, 의회소집권, 의회법률안거부권, 조약체결권, 사면권 등이 있다.

 

연방의 구성원인 각 주State의 정부 수장은 주지사Governor라고 하며, 주정부는 외교권과 교전권 등을 제외하고는 주권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권력의 거의 전부를 보유하고 있다. 즉, 주정부에는 주 자체의 의회, 법원, 행정부가 있어 각주에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각 주가 담당하는 사항에 관하여는 각 주 스스로가 정한 방식에 따라 규제방식도 달라지게 되므로, 각 주에 따라 동일한 사항에 대한 규율방식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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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8. 2. 18:38



미국 데탕트에서 대 테러전까지






제37대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이전 정권과 달리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였으며 1970년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를 명시하고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국제외교관계에서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6년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에 제3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터Jimmy Carter는 경제문제와 자원보존을 정부개입주의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대외정책에서는 인권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79년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건 발생시 구출작전의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보수주의 성향이 강화된 미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을 안고 1981년 취임한 제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줄임으로써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공산주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군비를 확충했다. 레이건 노선을 승계한 제41대 대통령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국가 재정적자 증가 및 경제상황 악화가 지속되는 상황 하에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촉발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상승하게 되었다.

 

1992년 지속적인 경제침체 해결에 대한 기대로 정부개입과 복지국가노선을 추구하는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이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클린턴은 소수인권과 근로자 권익을 강화하고 의료보험혜택을 확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경제 호황에 힘입어 2차 대전 이후 민주당 출신 최초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적 규모의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2001년에는 항공기를 이용해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Pentagon)를 공격한 ‘9.11테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제43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행정부는 대테러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2002.12)하고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2003.5)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고, 대테러전 차원에서 대량파괴무기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확산 저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하였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2008년 실시된 제44대 대통령 선거에서 ‘희망hope과 변화change’를 주창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했고 적극적, 전향적 대외 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12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는 2014년 4월 25일, 재선 후 처음으로 방한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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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8. 1. 16:13




냉전체제와 아메리카의 번영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유럽권을 장악한 소련의 위협을 크게 인식하고 전후에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제33대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해 소련에 대한 포위정책을 수립, 1947년 3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는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제의하는 마샬계획Marshall Plan을 수립하고, 1949년에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서방 12개국을 규합해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크게 인식해 격렬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국가보안법인 매캐런법McCarran Act이 제정되었고,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일련의 반공산주의 선풍이 미국을 휩쓸기도 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기본으로 복지국가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고, 한편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을 중심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본격화되는 등 민권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뿌리 깊은 인종차별 관습의 철폐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 되었다. 진보적 성향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하고 빈곤을 없애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하였으며, 1962년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단행해 소련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 쿠바 미사일 사건을 계기로 1963년 핵전쟁 방지를 위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TST(일명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어 미·소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36 존슨Lyndon Baines Johnson 행정부 시절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 움직임이 강화되어 반체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층과 흑인 소수자 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과격한 흑인민권 운동과 급진적인 학생운동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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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8. 1. 16:12



USA의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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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31. 17:10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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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31. 17:09

호주의 사회적 특징






호주를 처음 개척한 건 영국인들이지만, 오늘날의 호주는 미국이나 캐나다보다도 이민자 비율이 높을 정도로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사는 다문화 국가이다. 백인과 비백인을 포함해서 이민 1,2세대가 무려 절반을 차지하는 나라가 호주다. 본래 호주 대륙의 원주민은 아직도 수렵시대의 생활을 영위하고 그 인구도 크게 감소하였으므로, 오늘날 호주 사회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럽계 백인의 천하라 해도 좋을 정도다. 호주는 식민지 개척 이래 지속적으로 이민에 의한 인구 증가를 꾀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원개발과 경제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이민 수용 정책을 편 결과 주로 이탈리아, 그리스, 네덜란드계의 이민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1850년대의 골드러시 때 중국인 광부들과의 사이에 일어난 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겨난 백호주의白濠主義(White Australia Policy) 정책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으나, 1973  정책이 공식 폐지되었고 1975년엔 인종차별금지법Racial Discrimination Act 제정되었다지금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히려 국민들 대다수가 다문화 정책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며 여러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호주에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다. 고령자, 장애인, 실업자, 병약자, 무주택자에 대한 지원이 눈길을 끈다. 또 오전과 오후에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으며, 크리켓, 론 볼링, 럭비 등의 스포츠가 활발하다. 골프나 경마, 수상스포츠, 캠핑을 즐기고 일요일 오후에는 ‘아르보’(오후라는 뜻)라는 정원 맥주 파티에서 서로 어울린다. 또 예고 없이 친구나 친척집을 방문하여 잡담하는 관습이 있고, 호주식 바비큐를 즐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동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일년에 4~5주의 휴가와 연중 다수의 공휴일이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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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4. 7. 30. 22:41

세월호 침몰

김창규 / 천안구성도장

안타까운 침몰의 현장

2014년 4월 16일, 큰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옆으로 기울어 침몰되고 있었다. 총탑승자 470여 명으로 대부분이 안산 단원고 학생들(320여 명)이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주위에는 구명보트가 보이고 여객선 위로는 헬리콥터가 승객들을 하나 둘 구조하고 있었다. 큰 배라서 금방 침몰되지도 않을 것이고 구조가 진행되고 있으니까 ‘모두 구명되겠구나’하는 기대감을 갖기도 했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 전원 구조’라는 뉴스의 자막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 바쁘게 오보를 정정하는 속보들이 연이어 방송화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무려 3백명이 넘는 사람을 실은 채 여객선은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세월호’라는 배 이름처럼 너무도 무상하게 어린 생명들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는 비탄의 광경을 모두가 목도해야만 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바라본 두가지의 문

월호 침몰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인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후진국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인재人災로 지적되는 참사다. 연일 계속된 뉴스특보에 진도와 안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전원이 구조 될 수도 있었는데 수백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침몰!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첫째, 불의한 사람과 불의한 세상이 참화를 불렀다
여객선의 수장이 대리선장이고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계약직이라고 하더라도, 정의로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1912년 4월 14일 늦은 밤, 어린이와 여성들을 먼저 구출할 것을 승무원들에게 명령한 후 선교에서 조타키를 붙잡고 배와 함께 침몰한 타이타닉 호의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의 의연한 모습을 세월호의 선장과 1등항해사에게서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스미스 선장은 자신의 목숨을 헌신하고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 세월호 승객 중에는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인간 본연의 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명조끼를 왜 안 입고 있느냐는 학생의 물음에“ 승무원은 마지막이야”라고 말하는 아르바이트 여대생, 다섯 살 여동생에게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죽은 여섯 살배기 오빠,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숨진 고등학생, 첫 제자들을 살려내고 자신은 죽은 새내기 여교사, 이들이 오히려 선장보다 더 선장같은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제 천하창생이 진멸(盡滅)의 경계에 박도하였는데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이(利)끗에만 몰두하니 어찌 애석치 아니하리오.(도전 2:45:2)


상제님의 이 말씀처럼 안전보다는 돈욕심이 앞서 사람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불의한 세상이 또한 문제다.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경영진과 오너의 물욕은 도가 지나쳤다는 것이 중론이다. 승객들의 안전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노후 선박을 들여와 증설을 했고, 배의 복원력에 문제가 있었는데도 개선하지 않고 지나쳤다. 그날 세월호는 자동차 180대와 화물 1,157톤 등 총 3,608톤을 실어서 허용된 화물적재량 1,070톤의 3배를 넘었다. 과적 단속을 속이기 위해서 평형수를 4분의 1만 채우고 그것도 화물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고 하니, 돈욕심에 아직 세상에 꽃도 피우지 못한 어린 학생들을 태우고 죽음의 항해를 한 것이다. 감독기관은 해운사와 돈으로 얽혀 불법행위를 눈감아 주었다.

둘째, 재난에 대한 위기관리능력이 부재했다
현 정부가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이름을 바꿔 달면서까지 국민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한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를 못했다. 중앙재해안전대책본부가 있고 재난에 대응하는 매뉴얼은 있었지만 실제상황에서는 전혀 작동되지 않았다. 컨트롤타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지휘체계가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우왕좌왕했다. 초기대응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해경은 승객을 버리고 달아나는 승무원과 스스로 탈출을 하는 승객들만 구조하다가 배안에 갇힌 300여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다 놓치고 말았다. 대형 재난사고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다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다. 검찰에서‘ 해경이 현장에 도착 즉시 선내에 진입했다면 전원 구조가 가능했을 것이다’라고 한것도 구조 주체가 현장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구조에 가장 중요한 핵심 시간대인 골든타임golden time을 놓쳐 적극적인 구조를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대재난의 극복을 준비해야 할 때

세월호 침몰 사건이 수습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추돌사고가 일어났고, 또다시 그 원인을 둘러싸고 여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렇게 무거운 현실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재난은 언제고 우리 주변에서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고 소중한 삶과 생명을 지키고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대비가 필요함을 깊이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이 조선의 땅에서 시천주侍天主 시대를 선언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대신사大神師는“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표현을 통해 앞으로 지구촌에 대재난이 올 것임을 밝혔다. 또 1975년 일본 불교계의 기다노 대승정은 앞으로 세계지도가 완전히 달라지며, 그 때 일본은 20여만 명이 살아남고 한국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425만 명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외에도 많은 예언가와 선지자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과학적인 자료들을 보면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큰 재난이 다가옴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국지적인 재난이 아니라 전세계적이며 총체적인, 상상을 할 수 없는 대재난이 온다고 한다. 이제는 천지에서 오는 대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세월호 사태를 겪으면서‘ 국가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뼈저린 각성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의 힘을 국가 차원에서 하나로 뭉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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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30. 14:11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화







초기에 호주 대륙의 문화는 식민세력에 의해서 각인되었지만, 고유한 국가적 동질성이 생겨나면서 호주의 국가 문화도 생겨났다. 오늘날 호주의 문화는 다양한 집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원주민인 애버리진의 토착 문화와 혼합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즉, 현대 호주 문화의 정체성은 원주민 애버리진의 유산, 활기찬 문화의 융합, 혁신적인 사고와 활발한 예술 현장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모방예술의 가장 오랜 형태는 기원전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애버리진의 석굴묘다. 자연 안료로 나무껍질에 그린 그림에서 아크릴로 화포 위에 그리는 그림으로 바뀌면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고, 1960년대 이래 애버리진 예술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호주에 거주하는 최초 유럽인들의 회화는 동물이나 애버리진을 모티브로 삼고 있으나 톤과 색조에 있어서 유럽의 회화를 범례로 하고 있다. 멜버른에 있는 하이델베르크학파에 의한 프랑스 인상주의에 동화됨으로써 19세기 후반 경에 호주 예술은 처음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오늘날 호주 예술가들은 점차 아시아 나라들의 예술 형태에 영향을 받고 있다. 


 

자립적인 호주 문학의 발전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헨리 로슨이나 페터슨 같은 초기 작가들의 시는 ‘부시 발라드(bush ballad)’라 불리면서 호주 숲 속 농촌지역의 다채롭고 모험적인 생활을 다루었으며, 그 이후에도 초점은 호주 대륙과 그 주민들에 맞추어졌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많은 호주 작가들은 농촌 생활과 아울러 도시 생활에 관해서도 작품을 썼는데, 소설가 패트릭 화이트Patrick Victor Martindale White(1912~1990)는 ‘폭풍의 눈 The Eye of the Storm’이라는 소설로 1973년에 호주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세기 호주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칭송을 받고 있다. 

 

호주는 영화 산업을 선도하고 발전시킨 역사를 갖고 있다. 1896년 호주 시드니에서 최초의 영화관이 문을 열었으며, 1906년 호주의 구세군이 상영한 ‘십자가의 병사들’은 세계에서 최초의 진정한 영화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호주의 영화 산업은 20세기 초에 붐을 이루었다가 1930년대 말 이후 미국과 영국의 영화에 밀려 사실상 소멸했으나, 1969년에 호주 정부가 영화 산업의 촉진 정책을 강화하면서 부활했다. 이후 호주적인 테마를 취한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975년 피터 와이어 작 ‘성 발렌틴제의 소풍’이다. 1998년 시드니에는 대형 영화촬영장인 폭스 스튜디오Fox Studios가 문을 열었으며, 이후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의 제작사가 호주로 옮겨졌다. 오늘날 호주는 1년에 20편 이상의 장편영화를 제작하며 갈수록 많은 작품을 해외에 배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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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30. 14:10


미국의 영토 확장과 남북전쟁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미국은 점차적으로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1803년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루이지애나Louisiana주를 사들여 국토 규모를 2배로 확장한 것을 시발로, 병합·할양·구매 등을 통해 미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59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0 주가 성립되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미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American Civil War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쳐야만 했다.

 



흔히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노예 문제는 표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노예제로 대변되는 남과 북의 생활 방식, 특히 경제 구조의 근본적 차이에 있었다. 이미 17세기부터 미국의 남부는 전원적이며 농업 위주였고, 북부는 도시적이고 공업 위주의 경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하여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북부와 동부지방에서는 제조업과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이 둘이 그런 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 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입지는 자꾸만 좁아져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으로 몰려갔으며, 급기야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 기반을 붕괴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남부는 앉아서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연방의회는 이미 북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1860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남부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링컨Abraham Lincoln이 당선됨으로써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남부 7개주가 반발하며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를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북부에 맞섰다. 1861년 4월 남부의 섬터 요새Fort Sumter 공격으로 남북 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우수한 공업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북부가 우세를 보여 결국 1865년 4월 26일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은 종결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전쟁에도 승리했으나, 1865년 노예해방 반대론자 존 윌크스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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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29. 18:11

오스트레일리아의 공연

 





호주는 또한 풍부한 공연예술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국제적 면모를 갖춘 클래식 음악 연주 분야만 해도 6개의 전문 심포니 오케스트라, 2개의 극장용 오케스트라(오페라와 발레용), 2개의 전문 챔버 오케스트라, 수많은 챔버 뮤직 앙상블이 존재하며 이들 대부분은 국제 투어를 하고 있다. 시드니에 있는 오페라하우스The Sydney Opera House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이자 공연장으로 매년 약 300여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고, 멜버른에 있는 국립 발레 앙상블은 1961년 세워진 호주 발레단으로 매년 185명의 고전 무용수와 현대 무용수들이 호주 각지를 돌며 순회 연주를 하고 있다. 

 


스포츠는 호주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며, 야외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다. 120개의 국립 스포츠 단체와 수천 개의 지역 및 주 체육 조직이 있는 호주에서는 약 650만 명의 국민들이 스포츠 단체에 등록되어 있고, 15세 이상의 호주인 가운데 23.5%가 규칙적으로 조직적인 체육 활동을 즐긴다. 호주인들은 한국에서는 생소한 스포츠인 럭비와 크리켓, 그리고 럭비와 축구의 중간 형태인 ‘호주축구(Australian rules football)’에 뜨거운 관심을 보인다. 호주는 1956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으며,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호주오픈테니스선수권대회는 매년 1월 멜버른에서 개최되는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중 하나로 호주에서 가장 외국인들이 많이 참관하는 스포츠 행사이기도 하다. 

 

현재 호주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이며 40% 이상이 한 가지 이상의 문화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어도 226개가 사용 중이며 영어 다음으로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광동어 그리고 아랍어가 많이 사용된다. 이처럼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은 음식에도 반영되어 호주에서 전세계 음식 대부분을 맛볼 수 있으며 예술적으로 융합된 퓨전 음식도 상당히 많다. 호주의 요리는 전통적으로 영국의 요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점차 비영국적인 주민이 이민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다양한 요리가 발달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 요리, 그리고 그리스, 이탈리아 등의 요리가 많이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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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29. 18:09


미국의 역사

식민지 시대와 미국의 탄생





오늘날 미국의 역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 발견으로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유럽 지역에 소개된 이후, 16세기 유럽 각국은 남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게 되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Virginia주에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건설한 이후 1733년까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영토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캐나다, 5대호 및 미시시피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식민지들은 계속해서 이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고 경제도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남부에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이 세워지고 유럽, 카리브 해 제도, 아프리카 등과의 무역도 활발하였다. 남부 식민지에서 주로 재배한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은 유럽에서 수요가 많은 작물이었는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남부 농장들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를 구입하여 노동력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영국은 내전 및 명예혁명과 같은 국내의 혼란과 지리적 거리로 인하여 효과적 식민지 정책 집행에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지역의 식민지들은 영국 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았지만 18세기에 경제성장을 이루며 자치 확대의 욕구가 점차 커져갔는데 이를 억압하려는 영국 정부와의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식민지에 부과한 설탕조례Sugar Act(1764)와 인지조례Stamp Act(1765) 등 무리한 세금 정책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영국에서 수입되는 종이, 차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쉔드 법령Townshend Acts(1767)을 둘러싸고 영국과 식민지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5명의 보스턴 시민이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1770.3.5)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Lexington과 콘코드Concord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를 계기로 영국과 미 식민지 양자 간의 무력충돌로 발전하였으며, 1775년 5월에 소집된 식민지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버지니아Virginia주 출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전쟁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인들은 정식군대가 아닌 일종의 민병대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나, 과거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스파니아·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이 참전해 영국 진영에 서면서 영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결과로 드디어 1776 7 4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열린 3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 주의 대표들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기초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 공포하였는데 날이 후에 미국독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외국의 원조를 얻어 식민지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1783 9 3일에는 파리조약Treaties of Paris 체결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은 공식 종결이 되고 영국은 미국 13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미국은 강력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1787년 5월부터 9월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헌회의를 개최하였고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여 각주에 회부한 결과 13개의 주 중 9주가 비준을 완료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789년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1789년 4월 30일에는 독립 전쟁의 영웅인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듬해 수도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정해졌다가 1800년에는 워싱턴Washington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28. 23:16


미국의 영토와 자연환경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지리적으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먼 나라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미국만큼 우리와 가까운 나라도 없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한국의 맹방이며 또 우리나라 교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이며 한국 학생들이 가장 유학을 많이 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국이 세계를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데 반감을 가지며 또 미국이 미국인들의 가치와 이념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강요한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남북한 간의 긴장상태도 그 태반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본다. 아마 이런 비난들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좋던 싫던 미국은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미국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미국을 객관적으로 한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U.S.A.)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서, 영토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유럽과 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통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대서양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태평양 지역, 즉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동쪽에는 2,000미터 높이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고도 4,000m 이상의 험준하고 큰 봉우리들이 많은 로키 산맥Rocky Mountains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로키산맥에는 유명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다. 두 산맥 사이에 펼쳐진 대평원 지역에는 광대한 농경지가 존재하여 기계화 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영토가 크다보니 서부에는 사막Desert도 존재하는데,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도 네바다 주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기후 역시 다양하다. 중북부와 동부, 오대호 부근은 겨울에는 북극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대륙성 기후인데 비해 서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지중해 지역처럼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겨울에도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작물도 지중해지역처럼 오렌지와 포도를 많이 재배한다.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기후가 좋아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주는 플로리다Florida이다. 햇볕비치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별명이 ‘선샤인 스테이트sunshine state’이다. 플로리다 반도 남부에는 아열대기후가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열대식물들이 자라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지역은 온난한 기후로 인해 살기가 좋지만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해 있어 지진地震이 잦은 편이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의 많은 건물들을 파괴한 1906년의 지진(진도 7.8)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지진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자연재해로는 카리브 해 연안에서 발생, 멕시코 만으로 상륙하여 동부 연안을 휩쓰는 열대성 저기압 허리케인Hurricane과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빈발하는 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있다.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발생하여 집과 자동차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돌풍인데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강력한 뇌우를 동반하는 토네이도는 허리케인과는 달리 발생과 진행방향의 예측이 쉽지 않다. 최근 많은 피해를 남긴 허리케인으로는 2005년의 카트리나Katrina를 들 수 있는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남부의 뉴올리언스 시의 태반을 물에 잠기게 만들고 2,500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강은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이다. 그 이름 자체가 큰 강이라는 뜻이다. 오대호 근처의 미네소타 주에서 발원하여 미국의 중부 평원지대를 구불구불 만곡하여 멕시코 만으로 흘러가는데 길이가 3,700km에 달한다. 지나는 주들이 31개에 달하며 오하이오 강Ohio River, 미주리 강Missouri River, 아칸소 강Arkansas River, 테네시 강Tennessee River, 일리노이 강Illinois River 등 주 이름의 원천이 된 많은 지류를 갖고 있다. 미시시피 강은 철도시대 이전에는 증기선을 통한 중요한 내륙교통로였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의 무대가 바로 이 미시시피강이다. 미시시피 강에는 몇몇 지역에 얕은 여울이 있어 항해가 어렵지만 연방정부는 운하와 우회수로를 건설하여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대호의 하나인 미시간 호와 연결하는 운하(1848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도 건설하였다. 19세기 중엽 철도시대에는 미국에서 철도건설 붐이 불면서 많은 철도가 놓여 졌으나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광대한 자동차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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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28. 14:31



오스트레일리아의 종교적 성향







호주는 한마디로 국교가 없는 나라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이전에 토착민들의 애니미즘적 신앙은 천년간 지속되었다. 본토의 애버리진의 영성은 꿈꾸는 시간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땅에 대한 귀속감을 매우 강조한다. 이런 내용의 설화는 애버리진의 법과 관습에 남아 있다. 


그들의 예술, 설화, 춤은 이러한 영성적인 전통을 묘사하고 있다. 호주와 뉴기니아 사이의 섬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우 영성과 관습들은 그들의 멜라네시아적 유래와 섬에 대한 귀속성을 말해준다. 1996년의 호주 센서스에 의하면, 전통적인 애버리진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은 7000명 이상이다. 영국의 함선이 호주에 도착한 1788년 이래, 기독교는 호주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공식 휴일이 되었고, 호주 도시들의 스카이라인은 교회의 첨탑이 장식하게 되었다. 교회는 교육, 건강, 복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있고, 가톨릭 교육 시스템은 가장 큰 비정규 교육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호주인의 종교적 성향을 살펴보면,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 중 67%를 차지하며 무종교가 26%, 기타(불교ㆍ이슬람교ㆍ힌두교ㆍ유대교 등)가 7% 정도인데, 무종교인의 수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비영리적인 한 독일 싱크 탱크인 베르텔스만Bertelsmann의 보고에 의하면, “호주는 서방 세계 가운데 종교심이 가장 박약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4인의 호주인 가운데 3인은 종교를 거의 믿지 않거나 종교가 삶에서 거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답한다.”고 한다. 


2009년 1718 명의 호주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 연구에 의하면 호주에서 매달 종교 봉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1993년 23%에서 2009년 16%로 감소했으며, 1993년 15~29세 응답자의 60%가 기독교인과 일치했으나 2009년에는 33%로 대폭 감소했다. 호주인이 급격하게 종교의 영향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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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4. 7. 27. 22:43




모든 소원을 이루는 증산도






모든 종교가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바랬냐면 우리의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랬어요. 세상을 불교에서는 극락이라고 이야기했고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다, 낙원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것이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땅 덩어리에 열린다고 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려운 말일 수 있지만 용화낙원이라고 했고 기독교에서는 지상천국이라고 했어요. 천국이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 열린다는 거예요. 이게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인데 증산도 또한 이런 종교를 포함하고 있으면서 크다고 했죠? 증산도 또한 이 세 가지를 이루는 곳이에요. 


증산도 이해법칙 '우주 일년'

증산도도 3가지 공통된 핵심 메시지가 있는데 증산도를 이해하려면 원과 세모를 알아 야해요. 동그라미는 모든 종교가 말하고 있는 것을 풀 수 있는 암호 해독할 수 있는 동그라미인데 이것을 이름 하여 우주의 일년이라고 해요. 우리는 10살 11살 될 때까지 모두 매년 봄여름을 겪었어요. 1년 4계절이라는 것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것 이 지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도 지구별을 담고 있는 우주에도 똑같이 있다는 것이 증산도가 처음으로 밝힌 사실이에요. 증산도가 우주의 열매라고 했는데 왜 열매를 이야기할 수 있냐면 우주의 가장 기본이 되는 암호,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그것을 피자를 자르듯이 네 조각으로 자르면 우주에도 봄, 우주에도 여름, 우주에도 가을, 우주에도 겨울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의 시대는 우주의 여름철 말기'

현재의 우주는 우주의 1년 사계절 중에서 어느 계절을 살고 있을까요? 한번 맞춰보세요. 그것은 지금부터 이유를 설명해줄게요. 우리가 봄철에 새싹 돋죠? 여름철에는 어때요? 나무가 무성히 자라서 꽃도 피고 그러잖아요. 가을에는 뭐한다고 했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 다 떨어뜨리고서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어요. 지금 우리의 우주는 이런 새싹 문명일까? 무성한 나무일까? 열매를 맺는 걸까? 아님 다 떨어뜨리고 쉬는 걸까? 지금 우리 문명은 여름철에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고 나무를 가득 덮고 있는 거처럼 여름철에 속해있어요. 여름철은 어때요? 더워요. 덥다는 것을 더운 것의 원인은 불이 많이 있는 거거든요? 불은 한자로 火라고 써요. 


여름철은 한 글자에서 다 설명이 되요. 근데 지금 지구가 굉장히 뜨거운 거 알죠?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요. 어려운 말로 지구 온난화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전쟁이라는 것도 전부 불장난이에요. 불로서 세상이 망하고 흥하고 하는 거. 그 다음에 어린이들도 느끼겠지만 이런 말 흔히 하나요? 아. 열 받아. 스트레스. 열 받는다.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보다 열 받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은 알죠? 옛날에 착하게 문명은 미개했어도 그 사람들 마음은 더 차분했다고 생각이 드는데 지금 이렇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도 똑같이 열 받았기 때문에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픈 겁니다. 


지금 우리가 여름철 말기에 와 있기 때문에 종교도 서로 한 뿌리에서 나와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커 나가는 거거든요.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 살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서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이 세 가지 종교의 결론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에 여름철 말기에 전부다 적용이 되요. 이 세 가지 전부는 우주의 봄철이 아니라 여름철 말기에 살고 있는 우리세대.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가리키는 거예요.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5. 19:54


『천부경』을 내려 주신 상제님






『천부경』은 일만년 전, 인류사의 황금시절인 환국의 환인 천제에게 내려 주신 삼신 상제님의 천강서天降書이다. 상제님은 누구신가? 『도전』 총론장에 해당되는 상제님 강세편, 1편 1장에 상제님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다. 


* 이 삼신과 하나 되어 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서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 (道典 1:1:4~5) 

여기 보면 기성종교의 하나님[신]에 대한 생각이나 기도와 수행을 통해 체험한 모든 영적인 깨달음과 가르침으로는 쉽게 이해 안 되는 구절이 있다. 바로 ‘주재자主宰者’라는 말씀이다. 

본래 주재자에서 주主는 주장할 주 자거든. 주인이다. ‘주관한다, 주장을 한다’는 뜻이다. 한 가정, 사회, 한 나라에 주인, 주관자가 있다. 유럽 공동체에도 머리가 있잖은가. 마찬가지로 우주 사회에도 그 주인이 계신다. 주재, 주인 주 자, 재상 재, 다스릴 재, 주관할 재 자. 엄밀하게 말하면 하늘과 땅과 인간 생명 속에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불변의 이법이 있다. 그 대자연 변화의 이법, 한 글자로 이理가 우주의 주재 자리이다. 그리고 그 변화 이치를 다스리는 분, 그분을 주재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주의 주재자란 하늘과 땅과 인간, 그리고 역사의 결정체인 신명계 신들을 다스리시는 우주의 통치자다. 

이것을 머릿속에 입력해 두고, 이제 『천부경』에서 밝혀 주는 동서고금의 원형 문화, 인류 창세 역사 시원 문화 속으로 들어서야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5. 07:18


증산상제님의 강세를 예고한 공자 석가 예수







신앙이라 하는 것은 진리대로 신앙해야 한다. 불교를 신앙하려면 석가모니 부처 진리대로 신앙해야 될 게고, 예수를 신앙하려 할 것 같으면 예수가 부르짖은 대로 해야 될 게고, 유교를 신앙하려면 공자의 윤리를 바탕으로 해야만 될 게다. 

 

우리는 증산도 신도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제님 진리를 바탕으로 해서 신앙을 해야 한다. 상제님의 진리 그 테 밖에 벗어날 것 같으면 그건 절대로 신도가 아니다.

 




헌데 기존 문화권의 각색 종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석가모니도 때가 아니기 때문에, 3천년 후에 미륵부처가 알캥이 진리를 들고 나오니까, 자기 아들에게 미륵부처님을 좇으라고 했다.

 

또 예수도 “아버지 하나님이 오신다.”고 했다. 유교와 도교에서는 옥황상제를 찾았다. 그게 다 내내 천지에서 사람농사 지은 것을 추수하러 옥황상제님, 우리 증산 상제님께서 오실 것을 얘기한 것이다. 선천 성자들이 하나같이, 다 똑같이 상제님이 오실 것을 얘기했다.

 

여기 제주도는 육지하고는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제주도 사람들도 들어서 잘 알 게다. 상제님께서 제주도에 오셔서 여기 바닷물도 빼셨다. 이건 제주도 신도들이 더 잘 알 게다. 

 

상제님은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바람도 불리고 비도 오게 하고, 축천축지(縮天縮地)하고, 하늘도 쭈그리고 땅도 쭈그리고, 바닷물도 빼시고, 용궁의 물속에도 들어가셨다. 그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게 믿어지면 제주도 사람들한테 물어 봐라. 

 

우리가 지금 신앙하는 증산 상제님이 바로 참하나님이다. 상제님은 천지를 마음대로 하셨다. 그걸 삼계대권(三界大權)이라고 한다. 천계天界지계地界인계人界, 세상일을 상제님의 대이상향에서 마음대로, 뜻대로 행하셨다. 

 

이 세상은 상제님 세상

그런 절대자, 우리 증산 상제님께서 천지공사에서 틀을 짜 놓으신 그대로 세상만사가 둥글어간다. 그 천지공사 내용 이념은 우리 신도들이 교육도 많이 받고, 『도전(道典)』을 통해서 양으로 음으로 테니까 시간 관계로 자세한 얘기는 약하고 만다. 그렇게 천지공사에서 틀을 놓으신 그대로, 시간표 이정표를 놓으신 그대로 세상사가 전개된다. 세계, 각색 민족이 살기 위해 서로 공존공영하는 속에서, 모든 가지가 우리 참하나님, 상제님께서 틀을 놓으신 시간표 이정표 그대로만 둥글어간다. 머리털만큼도 달리 되는 없잖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 상제님의 세상이다. 그걸 세상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하늘도 상제님의 하늘이요, 땅도 상제님의 땅이요, 이 지구상에서 사는 전 인류가 다 상제님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천지질서가 바뀌는 때, 천지에서 개벽을 하는 때다. 해서 상제님께서 “참된 사람은 진리를 만나서 기수영창 할 것이요, 거짓된 자는 빈 꺼풀이 돼서 길이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4. 14:06


지금은 전 인류의 생사를 가늠하는 개벽

 



 

각색 성씨가 이렇게 분포돼서 여기도 지금 여러 성씨가 뭉치지 않았는가. 여기 앉았는 사람들도 다 각기 5천년, 6천년 전 조상 할아버지가 있다. 그 조상 할아버지가 없으면 내가 없다. 5천년, 6천년 전 조상 할아버지가 그 다음 대를 전하고, 또 그 다음 대를 전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걸 유전인자라고 그러잖는가. 그 유() 자가 귀할 ()에다가 책받침() 자인데, 그게 끼칠 () 자다. 알아듣기 쉽게 물려줄 (), 물려받을 () 자다.

 

그렇게 여러 천년을 물려주고 물려받았다. 내 몸뚱이는 우리 아버지한테 물려받고,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 물려받고,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또 아버지는 내게 물려줬다. 우리는 조상의 그 유전인자, 정자를 물려받았다. 안() 가의 유전인자를 받으면 성을 안가라고 한다. () 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았으면 그건 박가다. 그건 누가 죽인다 해도 박가다 

 

누가 “너 박가라고 안 하면 내가 죽이들 않는다. 박가가 아니라고 해라.”라고 해도, “나는 박가 아버지로부터 났으니 죽어도 박가가 될 수밖에 없다. 죽어도 난 박가밖에 안 될 게다.”라고 한다. 그게 참말이다. 누구도 자기 유전인자, 5천년, 6천년 전 핏줄, 그건 절대로 못 바꾸는 것이다. 저 미물곤충, 초목도 무엇도 다 그렇다. 


 

내가 요새 이런 얘기도 한다. 콩알캥이가 그 껍데기를 새까맣게 입은 것은 검정 밤콩이라 하고, 붉은 옷을 입은 것은 대추밤콩이라고 한다. 그 구별을 콩 까풀로 한다. 검정 밤콩은 만년을 가도 검정 밤콩이다. “너,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내가 죽여버린다.” 해도 도저히 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도 유전인자를 바꿀 수는 없다. 그걸 바꾸면 씨가 딴 씨가 돼 버린다. 그렇게 다 각자의 5천년, 6천년 전 조상이 계계승승 내려와서 이번 가을철에 각색 혈통이 매듭을 짓는다. 

 

봄에 씨를 뿌려서 여름 내 길러서 가을철에 결실을 한다. 똑같이 봄부터 출발을 해서 컸는데 결실을 못 하는 것도 있다. 빈 쭉정이도 있고, 30% 여무는 놈도 있고, 50% 여무는 놈도 있고, 70% 여무는 놈도 있고, 80% 85% 각양각색으로 알캥이가 여문다. 이번에는 사람도 그것하고 똑같다. 

 

어째서 그런가. 5천년, 6천년 내려오면서, 각기 조상들의 행동이 다를 것 아닌가. 사람 속이고, 도둑질하고, 누구 음해하고, 뭐 별별 건이 다 있다. 

 

우리 클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하나만 예를 들어 줄 테니 들어 보아라. 그 당시 과부(寡婦) 서리라고 하는 있었다. 과부 서리는 어떤 것이냐. 그때는 어수룩한 세상이 돼서 가마 같은 것도 없었다. 내가 지금 여든네 살이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사람 아닌가. 내가 살에 철을 알았다 하더라도 75 얘기를 하는 것이다. 

 

과부 서리를 어떻게 하느냐? 과부도 많았지만 마누라 없는 남자도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 세상에도 그렇게 많았다. 그 때에는 이렇게 새끼로 엮은, 벼 담을 때 쓰는 섬이라고 하는 게 있었다. 그 섬하고 자루를 가지고서 서너 명이 과부 서리를 하러 간다. 껌껌한 밤에 문 열고 들어가서 자루로 과부를 뒤집어 씌워서 자루에 담아가지고 섬에다 둘둘 말아 떠메고 온다. 그러니 그 과부가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가. 동서남북 사방 아무것도 모른다. 과부 하나를 지게에다 지고, 아니면 등에다 메고 온다. 

 

그렇게 몇 십리를 와서는 방에다 풀러놓고서 가서 밥을 지으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장가도 들고 그랬다. 그렇게 살다가 정자하고 난자하고 만나지면 새끼도 낳을 것 아닌가.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참 윤리적으로, 사회 도덕상으로, 여러 가지 측면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얼마고 있었다. 

 

남 죽이는 데도 그냥 죽이는 게 아니다. 음해해서 죽이고 별별 건이 다 있었다. 헌데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서 신명이 되면, 그 신명들은 절대로 잘못한 것을 용서를 안 한다. 그래 도덕률을 바탕으로 해서, 신명들이 좋은 일 못된 짓 한 것을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질서정연하게 다 정리를 한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적덕가(積德家) 자손이 들어왔다 나가려 같으면 ‘너는 여기를 떠나면 죽느니라. 하고 뒤통수를 쳐서 집어넣고, 적악가(積惡家) 자손이 들어오면 ‘너는 여기 있을 데니라. 하고 앞이마를 쳐서 내쫓는다.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가 열매를 맺는 곳이다. 천지에서 사람농사를 지어서 사람 알캥이를 추리는 곳이다. 또 지금이 그런 시기다. 

 


이번은 천지에서 생사를 가름하는 때다. 사실 죽을 사람, 살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건만 그냥 내던져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알고서 찾아오지는 않는다. 

 

천지의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 결실을 함과 동시에 역사 문화도 열매기를 맺는다. 인류 문화라는 것이 하늘 이치보다도 더 중하고 땅 이치보다도 더 중하다. 이번에는 인류 문화가 아주 극치로 발전을 해서 천리와 지리도 정복할 수 있는 그런 대문명이 열린다.

 

정성이 지극하면 척신도 물리친다

헌데 사람이 정성이 지극할 것 같으면, 우리 신도들의 정성이 지극하면 척신도 물리칠 수 있다. 그저 알아듣기 쉽게 어떤 사람이 천냥 어치 척이 있다면, 천냥 어치, 만냥 어치 정성을 가지고 천냥 어치 되는 척을 물리쳐 줄 수 있다. 여기 있는 우리 신도들이 “내가 저 사람을 꼭 살려야 되겠다.”고 할 것 같으면 여간해서 척이 덤비지 못한다. 

 

나는 이런 것을 봤다. 하나 예를 들어서 꼭 죽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천지의 큰 기운을 가진 사람이 그 사람을 반드시 살려야겠다고 착수를 하면, 저승사자가 그 사람을 절대로 못 더불고 간다. 사자가 감히 덤빌 수가 있는가. 그 정력가 때문에 사자도 포기하고 못 더불고 간다. 내가 그런 정도만 얘기하고 만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상제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정성이 지극할 같으면 천지에서도 어쩔 수가 없다. “봐 주는 수밖에 없다, 한두 번은.” 

 

그러니까 우리 신도들의 성불성(誠不誠), 정성스럽고 정성스럽지 못함에 따라서, 아무리 조상의 업적을 바탕으로 생사판단이 된다 하더라도 척을 감해서 좋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4. 7. 23. 22:43


천지 농사의 알캥이, 사람




봄이라 하는 것은 천리지상(天理至上) 시대, 천존(天尊) 시대다. 여름이라 하는 것은 지존(地尊) 시대다. 가을은 인존(人尊) 시대다. 그게 무슨 말인가. 봄에는 그저 태양 볕만 받는 데면 그 온화한 기운을 받아서 새싹이 돋아난다. 그래서 천존, 천리지상 시대다. 헌데 여름철에는 땅이 토옥(土沃)하면, 비옥(肥沃)하면 잘 큰다. 토옥이라고 하면 흙 토(土) 자, 걸 옥(沃) 자고, 비옥이라면 살찔 비(肥) 자, 걸 옥(沃) 자다.


 

여름철에는 다 똑같이 찌고 더웁지 않은가. 그 때에는 땅이 걸어야 잘된다. 하늘의 혜택은 어느 곳이든 다 똑같으니까 잘되고 못되는 것은 땅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름은 지리지상(地理至上) 시대다. 또 그 때에는 사람도 지정학상으로 좋은 땅을 만나서 양택(陽宅)도, 음택(陰宅)도 지리를 잘 응용할 것 같으면, 천지에서 함축된 기운을 받아서 잘될 수가 있다. 그 이치는 한두 시간에 다 얘기되는 것이 아니다. 천리도 알기가 어려운데 지리는 더 어렵다. 난지자(難知者) 지리(地理)라. 알기 어려운 것이 지리다. 그러니 우선 큰 틀만 알아두면 된다. 그 알캥이는 말 몇 마디, 한 시간 두 시간 가지고 알아지는 게 아니니 다음으로 미뤄두고 만다.

그러면 가을은 어떻게 해서 인존(人尊) 세상이냐? 천지에서는 무엇을 위해서, 봄에 물건을 내서 여름철에 기르느냐? 알캥이를 위해서, 결실을 하기 위해서다. 성숙돼서 익은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는, 아주 단내가 나는 알캥이를 위해서 봄여름은 있는 것이다. 봄에 물건을 내서 여름철에 기르는 것은 그 진액을 전부 뽑아 모아가지고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그래서 봄여름이 있는 것이다. 가을에 열매 하나를 맺지 못하면 봄여름이라 하는 것은 있어야 한 푼어치도 필요치 않은 과정이다. 봄여름은 반드시 가을의 알캥이, 결실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다.

그 알캥이를 매듭짓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천지의 큰 틀로 볼 때 천지의 목적이 무엇이냐? 사람농사를 지어서 가을철에 사람 씨종자를 추리는 것이다. 천지에서 사람농사를 지은 알캥이가 바로 사람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4. 7. 22. 20:34


 




 

"인간 농사를 짓는 대우주"

증산도 우주일년 사계절

 

 


 


 

 

대우주 근본법칙 '생장염장' 섭리

증산상제님께서는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사의四義를 쓰느니라” (증산도 도전 2:20) 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이 다스리시는 대우주와 자연 만물이 생성변화하는 순환의 근본법칙은 생장염장生長斂藏입니다. 은 낳고 장은 기르고 염은 거두고 통일하며 장 휴식을 하며 저장을 한다는 뜻입니다. 

 



 

'생장염장' 이치로 돌아가는 지구일년 사계절

이 '생장염장'의 이치로 지구 1년 4계절이 둥글어 갑니다. 봄이 되면 차갑게 굳은 땅을 뚫고 여린 새순이 돋아나는데, 이것이 생의 과정입니다. 무성한 녹음이 숲을 가득히 메우는 여름이 장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무한정 자라지 않습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면 성장을 멈추고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염입니다. 이때 잎사귀들은모두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오면 초목은 생명의 물기[水氣]를 뿌리로 되돌려 겨울을 나게 되는데 이것이 장의단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대우주에도 '생장염장'의 이치에 따라 인간 생명과 인류문명을 내고 기르는 시간의 큰 주기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1년 입니다.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지구 1년은 초목농사짓는 주기이고 우주 1년은 인간농사 짓는 주기”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증산도가 전하는 우주의 '생장염장우주일년 사계절

하늘땅이인간과 만물을 낳는 때가 생의 단계로 우주의 봄철입니다. 초목이 봄에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듯, 우주의봄철에 지구에는 인간과 여러 가지 동식물들이 출현합니다. 우주의 여름철에 인류는 수많은 종족으로 분화되면서 인구가 계속 증가합니다. 장의단계로서 각 지역마다 다양한 종교, 사상, 예술 등이 생겨납니다.

 

그러다 우주의 가을이오면 인간과 문명이 결실을 맺는 수렴의 단계를 맞이합니다. 봄여름 동안 인간과 만유 생명을 길러 온 하늘땅이인간생명을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때는 문명이 완전히 성숙하여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가을철 통일 문명, 조화선경으로 극적 대전환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장의 시간, 우주의 겨울에는 만물 생명이 다음 우주 1년을 준비하기 위해 휴식을 취합니다. 이때는 지구상에 일체의 생명이 존재하지않게 되는데 과학에선 이 시기를 빙하기라고 부릅니다.



  

우주와 인생의 모든 해답을 주는 증산도 우주일년진리

이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법에 따라 우주는 인간을 내고 기르고 성숙시키는 것을반복하며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이것이 증산도가 전하는 우주일년 사계절의 대자연섭리입니다.

 

따라서 이 우주 1년의순환 법칙 속에 그동안 궁금해 했던 지구촌의 모든 변화와 문명의 탄생과 발전, 인간 삶의 목적, 깨달음에 대한 해답이 증산도 우주일년 진리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증산도 밝히는 우주의 신비수 '129,600'

지구는 하루에 360도 자전을 하면서 1년 360일(원운동의 기본주기는 360) 동안 태양을 안고 한 바퀴 돕니다. 그래서

지구 1년의 주기는129,600도(360도x360일)를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우주도지구의 자전과 공전처럼 360년을 한 주기로 하여 더 큰 원을 그리며 360회 순환, 반복을 합니다. 그래서 우주 1년은129,600년(360년x360회)을 주기로 돌아갑니다.

 

이 129,600수는천지의 열매인 인간 몸의 생명활동에서도 나타납니다. <동의보감> 등의 의서에는, ‘사람이 하루 동안 생명활동을 하는호흡수와 맥박수를 재어 보면 성인의 하루평균 생명주기가 129,600번으로 천지의 주기와 같다.’고 나와 있습니다.

 

  

증산도가 밝히는 우주일년 주기 129,600

이렇듯129,600수는 우주 1년, 지구 1년이나 인체의 생명주기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생명 변화의 공통된 1주기입니다. 우주의 일년은 크게 선천인 '우주의 봄여름'과 후천인 '우주의 가을겨울'로 나뉩니다. 

 

선천은 양의 시대로 분열·생장을 하는 시간대이고 후천은 음의 시대로 수렴·통일을 하는 시간대입니다. 선천은 지축의 경사로 인해 인간을 낳아 키우는 어머니 지구의 몸이 양의 방향으로 23.5 지축이 기울어서 상극의 질서를 이루게 되고, 후천은 기울어졌던 지축이 똑바로 서면서 모든 질서가 조화를 이루고 정음정양이 되어 상생의질서로 돌아갑니다.  

 

이 우주 1년의 구체적인 틀을 인류 최초로 밝혀 주신 분은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이십니다. 태상종도사님께서는우주 1년의 운행 원리를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 표 한 장으로 그려 정리해 주셨습니다.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이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정리해 주신 '우주 1년 도표'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