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6. 3. 26. 08:30




불가리아 정치





불가리아는 1947년 인민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공산정권이 붕괴된 이후인 1991년에는 자유 민주주의 신헌법을 제정했다. 현행 헌법에 의하면 불가리아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혼합형의 의회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 중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주요 권한으로는 총선실시권(대통령이 총선 이후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 대해 3차례의 조각을 의뢰했으나 모두 실패할 경우, 의회 해산 및 총선실시권 행사), 법률 거부 및 공포권(의회에서 통과되어온 법률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으나, 의회 재통과시에는 대통령이 이를 공포), 기타 군 통수권, 외교사절 임명접수권, 사면권 등이 있다. 현재 불가리아 대통령은 2012년에 취임한 로센 플레브넬리에프Rosen Plevneliev이다. 




행정부
총리는 정부의 수반으로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놓고 제1당, 제2당, 자신이 지명하는 정당에 대해 차례로 정부 구성 권한을 부여하는 바, 동 권한을 받은 정당은 총리와 내각 구성원(각료) 명단을 의회에 제출해 동의를 받아야 하며 의회 재적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면 내각이 성립된다. 내각(Council of Ministers)은 국가의 내정 및 외교 정책 이행을 총괄하고 공공질서와 국가안보를 보장하며 명령(Decree), 포고(Ordinance), 결의(Resolution) 등을 채택하고 시행한다. 민주화 이후 불가리아는 여러 차례의 총선을 통해 내각이 교체되어 왔는데, 최근 2014년 10월 치러진 총선 결과 유럽발전시민당(GERB)과 개혁블록(RB)의 연립정부 출범이 결정되어 11월에 보이코 보리소프Boyko Borisov(유럽발전시민당GERB)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지방행정
불가리아는 28개의 지역(region)으로 구분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가교 역할을 하는 각 지역별 지사(governor)는 내각에 의해 임명된다. 각 지역은 1개(소피아시) 또는 1개 이상의 자치 단체(municipality)로 구성되는데, 자치단체는 시장(mayor)과 지방의회(council)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시장과 지방의회 의원은 해당 지역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입법부
의회는 단원제로서 4년 임기의 의원 240명으로 구성된다. 선출 방식은 비례 대표제(209) 및 다수 대표제(31)가 혼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주요 정당들로는 유럽발전시민당(GERB), 사회당(BSP), 권리자유당(MRF), 불가리아부흥대안(ABV), 아타카Ataka당, 애국전선(PF), 검열없는 불가리아당, 개혁블록(RB), 푸른연대(The Blue Coalition), 사회정의당(OLJ)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독립적 국가 기관이며, 법관의 독립이 헌법에 근거하여 보장되고 사법부의 예산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사법제도는 3심제로 운영되고 일반적으로는 시·군법원(Regional Court), 지방법원(District Court), 항소법원(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단계를 밟는다. 행정사건의 경우에는 항소법원과 대법원 대신 최고행정법원(Supreme Administrative Court)이 그 역할을 하며, 군사 사건의 경우에는 군사법원(Military Court), 군사항소법원(Military 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절차가 적용된다. 이외에도 특정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최고사법위원회, 검찰(Prosecuting Authorities), 수사기관(Investigation Services)을 사법부 내에 설치해 운영한다. 대법원장, 최고행정법원장, 검찰총장은 7년 임기로 임명되고 중임이 불가하며, 법관에 대한 임명, 승진, 파면 등의 인사 조치는 최고사법위원회에서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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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6. 02:09




불가리아 공산화와 민주화의 정치 과정





영토상의 불만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섰던 불가리아는 결국 패전국이 되었고, 1919년 승전국과 맺은 뇌이Neuilly 조약으로 영토의 일부를 상실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30년대 이후 독일과의 밀접해진 경제관계 때문에 독일 편에 서게 되었다. 그 결과 1944년 9월 소련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소련군의 침공에 맞춰 불가리아의 좌익 진영인 ‘조국전선’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46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공산당은 조국전선의 모든 세력들을 축출하고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마침내 1946년 9월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소련헌법을 모방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농업과 산업이 국유화되고 불가리아는 이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소련의 가장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동구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소련 군대가 직접 주둔하지는 않았다.




공산당의 지배는 소련의 붕괴로 인해 종식되었는데, 1989년 11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있은 후 공산당은 일당독재를 포기하고 35년 동안 불가리아를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 공산당 서기장을 퇴진시키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민주화를 수용했고 당명도 사회당(BSP)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불가리아의 민주화 혁명은 루마니아의 유혈혁명과 구분지어 ‘푸른 혁명’이라고 불린다. 1990년 6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으며, 1990년 11월에는 국명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1990년 10월 민주세력동맹에 대한 지지율이 사회당의 지지율을 웃돌고 사회 정치적 불안이 가중됨에 따라 루카노프Lukanov 총리가 퇴진하였으며, 12월 포포프Popov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전후戰後 최초의 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1991년 7월에는 민주주의 신헌법을 채택하고 1991년 10월 신헌법에 의한 총선 및 지방 선거에서 민주세력동맹(UDP)이 승리하여 필리프 디미트로프Philip Dimitrov가 총리에, 공산주의 시절의 반체제 인사였던 젤류 젤레프Zelyu Zhelev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취임하는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다. 불가리아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서방진영으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1999년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신청을 하여 2007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당시 유럽연합은 경제의 민영화를 비롯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



불가리아 정부와 불가리아 국민들은 유럽연합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불가리아는 친서방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서방진영에 가담하였지만 불가리아는 아직도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천연가스를 러시아에 85%를 의존하고 핵발전소 연료의 경우 100% 의존하는 형편이다. 공산주의 몰락 후 불가리아의 경제는 레슬러 출신의 사업가들에 의해 대거 장악되었는데 이들은 폭력이나 부패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러시아는 이들 반불법적 기업가 집단과 밀접히 연계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논자들은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에 이러한 새로운 방식으로 불가리아에 영향력을 행사는 것을 일컬어 ‘러시아 신제국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많은 불가리아 인들은 불가리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경제가 급속히 좋아질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그 때문에 많은 불가리아 인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 현재 불가리아는 서유럽에 비해서는 경제수준이 아직은 크게 뒤떨어진다. 일인당 명목 GDP는 7,400 달러 정도로 유럽연합 평균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그래서 불가리아는 현재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서 최빈곤 국가라는 오명을 듣고 있다. 불가리아는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통화동맹에는 가입되지 않아 유로화를 쓰지는 않는다. 불가리아 화폐는 ‘레브’(복수는 레바)라고 한다. 현재 1유로에 1.95레바로 고정환율제를 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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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5. 09:30




불가리아의 독립과 발칸전쟁





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가리아 인들의 항거는 여러 차례 무장반란으로 터져 나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불가리아의 독립은 18세기 이후 같은 그리스 정교를 믿는 제정 러시아의 세력이 발칸 반도로 뻗쳐오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1768~1774년간의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토만 지배하에 있는 발칸 반도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얻어내었다. 이는 오토만 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권리였다. 1876년 4월에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있었는데 이 봉기는 잔학하게 진압되어 3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다시 투르크와 전쟁을 하여 산스테파노San Stefano 강화조약(1878)을 체결하였으며 그 결과 불가리아는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가 큰 나라로 독립하는 것을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같은 강대국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해에 열린 열강들의 베를린 회의에서 불가리아로부터 동루멜리아East Rumelia, 마케도니아Macedonia를 분리하여 별개의 나라로 만들었다. 동루멜리아는 불가리아의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몇 년 뒤에는 불가리아에 합쳐졌다.



모두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공국이었다. (이 시기부터 2차 대전 직후까지 불가리아는 줄곧 왕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물론 입헌군주제였다. 왕정 초기에 불가리아인들을 독일인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반투르크 봉기를 계기로 1908년 투르크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12년에는 그리스, 세르비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하였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이다. 발칸 동맹국의 승리로 발칸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사라졌다. 제2차 발칸전쟁(1913)은 영토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그리스와 세르비아 그리고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으나 이 전쟁에서는 져서 제1차 발칸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러시아와 사이가 크게 나빠진 불가리아는 적의 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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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5. 04:30



불가리아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불가리아는 1018년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Basilius 2세에 의해 정복되어 독립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불가리아는 공식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불가리아 속주(테메)가 되었는데 그 수도도 지금의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Skopje로 옮겨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지배는 불가리아 인들의 저항과 외침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1185년 아센Asen 형제가 일으킨 반란으로 제국의 지배는 종식되어 불가리아는 다시 부활하였다.




수도는 타르노보Tarnovo에 세워졌다. 이것이 제2 불가리아 제국이다. 아센 왕조가 지배하던 불가리아 제국은 발칸 반도의 태반을 지배한 강력한 국가였으나 봉건영주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위협이 재개되었다. 또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몽골족의 간섭도 빈번해지면서 일시적으로 몽골족이 지배한 적도 있었다.(1300년 차카의 지배)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에 진정한 위협이 된 것은 중앙아시아부터 소아시아를 차지하고 발칸으로 진출한 투르크Turk족이었다. 투르크인들의 발칸 침공은 134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1396년 최종적으로 불가리아를 멸망시켰다. 이후 불가리아는 ‘루멜리아 총독관구’로서 술탄이 파견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루멜리아Rumelia는 로마인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관구의 수도는 처음에는 오늘날의 터키 국경도시인 에르디네(고대의 아드리아노폴리스)에 두었으나 후일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sofia로 이전되었다.

 


오 스만 투르크Osman Turk는 불가리아를 여러 개

의 군(빌라예트vilayet)로 나누어 태수(산자크베이sanjakbey)를 보내 다스렸다. 그리고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크기에 따라 ‘티마르Timar’ 혹은 ‘지야메트Zeamet’라고 불린 봉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봉토는 봉토보유자가 죽은 후에는 그 점유권이 술탄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투 르크의 지배는 근 500년간 계속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무슬림보다는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져야 하였다. 문화적 엘리트인 기독교 성직자들은 투르크의 지배를 피해 대거 인근의 슬라브 국가로 망명하였다. 투르크 당국은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을 비잔틴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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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6. 3. 24. 15:30





불가리아의 슬라브화와 기독교화





불가리아에는 슬라브Slav족의 수가 꾸준히 늘어갔다. 슬라브족이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이다. 슬라브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언어도 슬라브어가 주된 언어가 되었다. 지배층인 불가르 귀족들(볼리야르Bolyar)은 전통적인 천신(텐기르) 신앙을 하였지만 슬라브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소수 지배층인 불가르족의 통치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수용이 불가피하였다. 861년 보리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불리한 전세를 벗어나기 위해 비잔틴 황제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는 몇 년 뒤 자신의 가족들 및 일부 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카엘 3세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양에서는 기독교권 내부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틴 정교회 간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보리스Boris 1세는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적 지위를 얻어내었다. 기독교의 도입으로 불가리아 칸의 권력은 일층 강화되었다. 예전에는 칸은 불가리아 부족 연합의 우두머리 성격을 띠었으나 이제는 신의 지상 대리자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을 하나의 불가리아 인민으로 통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927년 불가리아 정교회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는데 이는 세르비아 정교회 독립보다 300년 앞선 것이며 러시아 정교회보다는 600년 앞선 것이다. 그리하여 불가리아 총주교좌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 이은 여섯 번째 총주교좌가 되었다. 




보리스 칸은 정치적인 동기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종교를 통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애를 썼다. 당시 비잔틴 제국에서 파견한 그리스 성직자들이 불가리아의 성직자 양성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보리스 칸은 모라비아 왕국으로부터 추방된 키릴Cyrill과 메토디우스Methodios의 제자들을 적극 환영하고 그들에게 불가리아 성직자들의 교육을 맡겼다.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는 그리스 출신으로서 슬라브 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에 몸을 바쳤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사후에 그 제자들은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모라비아로부터 추방되었던 것이다.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불가리아의 수도인 플리슈카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오리드에 각각 학교를 세워 성직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칸의 명에 따라 그리스어가 아닌 슬라브어로 교육을 하였다. 또 불가리아의 공식문자도 그리스어가 아닌 키릴문자Cyrillic alphabet를 채택하였다. 키릴문자는 855년 키릴이 슬라브어로 된 기도문을 적고 바이블을 번역하기 위해 만든 글라골릭 문자를 개량하여 만든 문자로 피레슬라브 학교에서 창안된 것이다. 프레슬라브 학교는 예전에 플리슈카에 있던 학교로 보리스 1세가 귀족의 반란 때문에 수도를 플리슈카에서 프레슬라브로 옮기면서 따라 이전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몽골에서 사용하는 키릴문자는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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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4. 08:00





북방 유목민에 의해 세워진 나라 불가리아





고대 불가리아 지역에는 약 2만년 전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트라키아Thracia인(불가리아인의 조상)이 최초로 거주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CE 480년경에는 트라키아인에 의해 도시국가가 건설되었고, BCE 46년 로마제국이 트라키아인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대다수 트라키아인들이 모에지아 및 트라키아 지역에서 이탈해 분산되었다. 로마제국의 몰락 후에는 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으로 발칸지역이 황폐화되었다. 


‘불가리아’라는 나라를 세운 주체는 불가르Bulghar족이다. 불가르족에 대한 언급은 480년 비잔틴의 제노 황제가 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동원하였다는 비잔틴 사서의 기록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 불가르족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었던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유목민이라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기원은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신용하 교수 같은 경우 불가르족이 부여夫餘족이었다는 주장도 내어놓고 있다. 4세기 후반 부여족의 일파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프카즈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불가르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체로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사료상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단지 부여가 ‘부르’라고도 불렸다는 등 몇 가지 명칭이 유사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좌우간 7세기 이전에는 카프카즈 북부로부터 흑해 북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과 약탈, 비잔틴 제국의 용병 등으로 활동하며 살았던 불가르족은 7세기에 들어와 동유럽 역사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불가르족의 한 우두머리인 쿠브라트Kubrat라는 인물이 불가리아라는 이름의 나라를 635년경에 세웠던 것이다. 비잔틴 역사가들의 기록에는 쿠브라트가 세운 나라를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라고 부르고 있다. 그 영토가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흑해 북안의 땅에 세워진 나라였다. 대불가리아가 세워질 당시 이 일대는 무주공산이 아니라 또 다른 아시아 유목민인 아바르Avar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바르인들은 그 이전의 훈Hun족처럼 6세기 중반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으로 들어와 흑해 북안에서부터 헝가리 평원 일대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는데 바로 이 아바르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불가르인들이 세운 나라가 대불가리아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비잔틴의 한 연대기 기록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에 발견된 『불가리아 칸 명부』라는 문서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아틸라Attila 왕의 후손이다. 옛 슬라브어로 기록되어 있는 이 문서에서는 쿠브라트 가문이 아틸라로부터 전해져 왔으며 2대가 아틸라의 막내 아들인 이르니크이고 4대가 바로 쿠브라트라고 한다.

아틸라가 453년 돌연사 한 후 그 지배하에 있던 게르만 족속들이 대거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거대한 훈 제국이 무너졌는데 아틸라 왕의 세 아들들에 대한 기록이 라틴 사서들과 비잔틴 사서들에 남아 있다. 그 기록들에 의하면 이르니크(혹은 에르나크)는 형들과는 달리 비잔틴 제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세력 보존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다뉴브 강 하구 도브루자 지역에 정착하여 조용히 세력을 확대해갔는데 그 후손이 쿠브라트였던 것이다. 7세기 말에 씌어진 이집트 콥트파 주교 요한의 기록에는 쿠브라트는 어릴 때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그곳 황궁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쿠브라트는 비잔틴 사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훈족의 양대 부족인 우티구르 훈족과 쿠트리구르 훈족을 통일하여 그를 기반으로 대불가리아를 세웠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브라트의 사후인 670년경 하자르Khazar인들의 공격으로 대불가리아는 멸망하였다. 그 아들들은 불가르족을 이끌고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장남은 볼가 강과 카마 강 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라는 나라를 세웠다. 쿠브라트의 3남 아스파루크Asparukh는 다뉴브 델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앞에서 말한 그의 선조 이르니크가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이 불가르족 집단이 다뉴브 강을 넘어 도브루자 지방으로 진출하자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 4세는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패한 콘스탄틴 4세 황제는 681년 아스파루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도브루자 지방의 점령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다뉴브 강과 발칸 산맥 사이에 위치한 모에시아 주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불가르족의 나라가 세워졌다. 이것이 ‘다뉴브 불가리아’ 혹은 ‘불가리아 제1 제국’이다. 발칸 반도의 이 불가르족 국가는 9세기 말에 마자르Magyar족에 의해 세워진 헝가리Hungary와 더불어 대표적인 북방 유목민 국가였다. 불가리아는 정확히 말해서 유목민 출신의 군사엘리트인 불가르족과 일반 백성을 이룬 슬라브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러나 그 지배층이 훈족의 후예인 기마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성격 역시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 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의 왕은 아시아 유목민들의 왕 호칭인 ‘한汗(칸Khan)’으로 불렸다.

9세기 초에는 영토가 서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드디어 유럽의 최강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크룸Krum(그리스 사서에서는 ‘크루모스’라고 한다) 칸은 아바르인들, 비잔틴 제국과 싸워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그리하여 당시 불가리아 제국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의 영토를 포괄하여 남쪽으로는 비잔틴 제국, 서로는 프랑크 제국과 어깨를 겨루는 큰 세력이 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6. 3. 24. 07:30




불가리아 영토와 자연환경




불가리아Bulgaria는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서 남쪽으로는 그리스, 터키, 동쪽으로는 흑해, 북쪽에는 루마니아, 서쪽에는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와 접한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넓은 11만㎢ 정도이나 인구는 우리보다 훨씬 적다. 2014년 통계로 692만 명 정도로 남한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는 소련의 위성국가의 하나로서 우리에게는 머나 먼 나라였다. 1989년 소련이 무너지고 난 후 이 나라는 급속히 서방 진영에 가까워졌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전의 종주국 러시아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 




직사각형 모양의 불가리아는 두 개의 큰 평원과 두 개의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루마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다뉴브 강을 따라 다뉴브 평원이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그 평원 남쪽으로 동서로 뻗어 있는 것이 발칸 산맥이다. 발칸 산맥은 세르비아와의 국경 지역부터 동쪽 흑해 연안까지 560㎞ 가량 길게 뻗어 있는데 발칸 반도라는 지명도 이 산맥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발칸 산맥은 고대에는 ‘하에무스 산’이라고 불렸다. 이는 이곳에 오랫동안 살던 트라키아 인들의 이름인데 불가리아 사람들은 이 산맥을 ‘스타라 플라니나’라고 부른다. ‘오래된 산’이라는 뜻이다. 발칸 산맥 남쪽에 동쪽으로 세모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평야가 트라키아 평원이다. 그리스 역사서에도 많이 등장하는 트라키아 지방이 바로 이 평원을 말한다. 또 하나의 산맥인 로도페 산맥은 그리스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길이가 240㎞이다. 로도페 산맥 서쪽 끝에는 또 릴라 산지가 높이 솟아 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높은 무살라 산(2925m)이 있다. 이 산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불가리아의 유명한 릴라 수도원 역시 릴라 산맥 깊은 골짜기에 있다. 


불가리아 땅은 상당한 높이의 산맥들이 가로지르기때문에 산지의 비율도 높다. 고도 600m 이상의 산지가 국토의 30%를 점하며 여기에 높이 200~600m의 구릉지대를 합치면 그 비율은 70%나 된다. 수도 소피아 역시 큰 산에 인접해 있다. 비토샤 산이라는 이름의 높은 산이 소피아를 감싸고 있는데 그 높이가 2,300m에 달하는 덩치가 큰 산이다. 그러나 높은 산에 인접한 소피아에서부터 트라키아 평원이 시작된다. 이 트라키아 평원은 동쪽으로 뻗어 터키 이스탄불까지 이어진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소피아(당시 이름은 세르디카였다)에서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군사도로가 놓여 있었다. 유럽 대륙에 큰 제국을 세웠던 훈족이 몇 차례에 걸쳐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였을 때 이용하였던 도로가 이 군사도로였다. 


불가리아는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발칸 산맥은 대륙의 기단들이 넘어오는 데 방벽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북쪽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이 크고 남쪽은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은 영하로 살짝 내려가는 정도이며 여름 7,8월의 평균기온은 20도를 살짝 넘어선다. 연평균 강우량은 630㎜로 우리의 절반 정도이다. 장마나 태풍처럼 많은 비를 내리는 기상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강우량의 분포 역시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겨울은 월평균 40~55㎜, 여름은 30~45㎜ 로서 지중해의 영향으로 여름보다 겨울이 조금 많지만 대체로 연중 골고루 비가 내리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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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6. 3. 23. 16:30


우주에서 우주를 보다 허블 망원경



우주로의 여행을 떠난 망원경, 허블 망원경

허블망원경은 무게 12.2t, 주 거울 지름 2.4m, 경통 길이 약 13m의 반사망원경이다. 1990년 4월 24일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실려 발사되었고, 지구상공 610km 궤도에 진입하여 우주관측활동을 시작하였다. 지구에 설치된 고성능 망원경들과 비교해 해상도는 10∼30배, 감도는 50∼100배로, 지구상에 설치된 망원경보다 50배 이상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빅뱅(Big Bang:대폭발) 후 빛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우주공간이 투명해진 대략 5억 년이 지난 시점부터 우주의 중심에서 초속 18만 6000마일의 속도로 이제 막 지구에 도착하기 시작한 빛까지 포착할 수 있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허블망원경은 지금까지 150만 장이 넘는 사진들을 지구로 보내왔다. 그 중에는 우주를 보는 인류의 시각을 획기적으로 바꾼 유명한 사진이 적지 않다. 허블 망원경이 보낸 사진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을 통째로 뒤흔들기도 하고, 추측에 불과했던 가설들을 사실로 입증해 주기도 했다. 허블 망원경이 생기기 전에는 우주의 나이가 100억 년인지 200억 년인지 밝힐 수 없었지만, 지금은 우주의 나이뿐 아니라 우주의 시작과 끝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허블 망원경은 24시간 쉬지 않고 관측 자료를 지구로 전송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논문이 매주 8편씩 발표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허블 망원경은 우주에서 시시각각 천문학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허블망원경이 밝힌 우주의 모습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대부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암흑 에너지나 블랙홀 같은 암흑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허블 망원경이 포착한 증거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우주를 보는 법을 알아볼 수 있다. 허블 망원경이 보낸 생생하고 경이로운 우주의 사진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빅뱅 이론, 블랙홀, 별과 행성의 차이 등 천문학에서 기본이 되는 개념들을 쉽게 머릿속에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첨단기술로 재탄생한 창조의 기둥
일반인에게 가장 유명한 허블망원경 사진은 1995년 4월 1일 촬영한 독수리 성운, 이른바 ‘창조의 기둥’이다. 여름철 남쪽 하늘에 보이는 뱀자리의 꼬리 부분에 있는 독수리 성운은 지구에서 약 6500광년(1광년=약 9조 4607억㎞) 거리에 있다. 이 성운은 고밀도의 수소와 먼지로 채워져 있으며 이 가스와 먼지가 중력에 의해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뭉쳐져 별을 탄생시킨다. 사진에서도 세 기둥 위쪽에서 새로 탄생한 별들이 쏟아내는 강렬한 빛을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사진에 별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창조의 기둥(Pillars of Creati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장 큰 왼쪽 기둥의 길이는 4광년이나 된다.


2. 일반상대성 이론을 입증한 중력렌즈
올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 6일자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입증하는 한 장의 천체사진을 실었다. 바로 지난해 11월 허블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레프스달(Refsdal)’ 초신성 사진이다. 사진에서 가운데 확대된 부분에 있는 네 개의 별은 실제로는 하나의 별이다. 레프스달 초신성은 지구에서 93억광년 거리에 있다. 이 초신성과 지구 사이에는 엄청난 중력을 가진 거대 은하들이 모여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시간과 공간을 휘게 하여 시공간을 지나는 빛도 휘게 한다. 은하들이 거대한 중력을 내면서 렌즈처럼 빛을 휘게 하는 이 현상을 ‘중력렌즈(gravitational lens)’라고 한다. 

초신성과 은하, 지구가 일직선으로 있으면 초신성 빛이 강력한 중력을 가진 은하를 지나면서 은하 바깥쪽으로 균일하게 휘어져 마치 둥근 고리처럼 빛이 난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이 중력렌즈 효과를 예측해, 이를 ‘아인슈타인 고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초신성과 렌즈 역할을 하는 은하, 그리고 지구가 일직선에 있지 않으면 초신성 빛은 둥근 고리 모양이 아니라 네 갈래로 갈라져 허블 망원경에는 각기 다른 4개의 별 모양으로 관측된다. 4개의 별이 십자가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이 역시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따서 ‘아인슈타인 십자가’라고 부른다.


3. 우주의 새벽을 촬영하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우주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주의 새벽'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 놀라운 이미지는 미 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이 중력 렌즈를 사용해 잡아낸 초창기 원시은하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원시 은하는 빅뱅 이후 6억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태어난 것으로, 허블 망원경이 이제껏 잡아낸 어떤 은하보다도 먼 거리에 있는 은하들이다. 우주에서는 시간이 곧 공간이므로 이 은하들의 나이는 130억년이 넘는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이 작은 은하들이 지금의 우주를 만든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스위스 로잔 공과대학의 하킴 아텍 교수가 이끄는 국제적인 연구진은 빅뱅 이후 6억년에서 9억년 사이의 공간에서 이와 같은 작은 은하들을 250개 이상 발견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은하들 중 가장 오랜 은하들이다. 이들 은하에서 출발한 빛은 적어도 120억년 이상의 시간을 날아서 망원경에 포착된 셈인데, 이는 곧 천문학자들이 120억년 이전의 과거에 존재했던 아기 우주의 모습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허블 망원경이 잡은 심우주深宇宙(deep space)의 은하들 중에서 이보다 더 오랜 은하들은 없습니다.”라고 프랑스 리옹 천문대의 요한 리차드가 밝혔다. 이들 은하에서 온 빛을 모아 분석해본 결과, 연구진은 이 원시 은하의 빛이 초창기 우주의 역사에서 미스터리에 싸인 기간, 곧 재이온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초기 원시우주에서 탄생한 최초의 별(항성)과 은하가 우주 공간에 강력한 자외선을 방출하면서 우주 온도가 높아지면, 우주는 다시 이온화의 과정을 겪게 되는데, 이를 ‘재이온화’라고 부른다. 재이온화가 진행되면 수소의 양성자에서 분리된 전자로 인해 우주는 다시 빛이 직진할 수 없는 불투명한 상태가 된다. 


이번 연구에서 관측된 원시은하의 자외선을 조사하면 이 은하들이 진화의 과정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연구진은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이들 원시은하들이 초창기 우주를 투명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재이온화 시기는 빅뱅 이후 7억년 시점에서 끝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발견의 뒤에는 연구진이 활용한 중력 렌즈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허블 심우주 관측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연구진은 심우주에 있는 3개의 은하단을 중력 렌즈로 활용했다. 연구진은 이 중력 렌즈를 이용해 해상도 높은 원시은하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제1세대 은하를 관측, 연구하려면 이 중력 렌즈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심우주의 은하단은 강력한 천연 망원경이다. 이들의 도움이 없으면 초창기 우주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고 스위스 로잔 공과대학의 얀-폴 크나이브 박사가 밝혔다.

허블 망원경의 뒤를 잇다. 차세대 우주 망원경

지구 바깥의 우주는 우리에게 여전히 밝혀진 것보다 질문이 더 많은 미지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계속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설명을 찾게 될 것이다.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이 그랬듯, 세계를 관찰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연습을 한다면 말이다. 허블 망원경은 궤도에 오른 뒤 25년간 천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오는 2017년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허블 망원경의 뒤를 이어 허블 망원경보다 성능이 뛰어난 차세대 우주망원경이 준비 중에 있다. 

달 너머의 궤도에 올려 보낼 차세대 우주망원경은 허블 우주망원경보다 10배나 크면서도 무게는 적게 나가는 반사경이 달리게 된다. 이 반사경은 마치 꽃잎처럼 발사 시에는 접혀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활짝 펴지게 된다.

이 망원경은 자외선에서 근적외선에 달하는 파장의 허블우주망원경과는 달리 근적외선에서 중간 적외선을 목표로 관측한다고 한다. 적외선용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좀 떨어져도 크게 지장이 없으므로 자주 수리하지 않아도 되어 경비를 줄일 수 있다. 또한 망원경에 대형 빛 가리개를 달아 태양이나 지구로부터 나오는 적외선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허블 우주망원경은 구경(口徑)이 2.4m인 데 비해 차세대 우주망원경은 구경이 8m나 되어 허블 우주망원경보다 1000배나 강력하므로, 행성의 형성 또는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획기적인 단서가 될 만한 발견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차세대 우주망원경이 본격적으로 우주개발에 이용되는 것은 2010년경으로, 이후부터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크게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연구 중인 차세대 우주망원경의 종류에는 NASA Goddard, Ball Aerospace, Lockheed-Martin, TRW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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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6. 3. 23. 04:12


[재난시대 생존법] 심폐소생술(CPR)




심폐소생술(Cardio Pulmonary Resuscitation)은 심장마비가 발생했을 때 인공적으로 혈액을 순환시켜 호흡을 돕는 응급치료법이다. 심장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산소를 공급하여 뇌손상을 지연시키고 심장을 정상상태로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심정지 직후 심폐소생술을 받지 못한다면 비록 생존하더라도 대부분 심한 뇌손상으로 고통 받게 된다. 국내 급성심정지 환자는 매년 4%씩 증가하여 2014년에는 3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한해 교통사고 사망자의 5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질환은 급성심근경색이다. 심장근육으로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관상동맥)이 완전히 막혀 혈액 공급이 되지 않는 급성심근경색은 증상이 있다면 즉시 119에 구조를 요청해야 한다.




국내 심정지발생 현황과 소생율
심폐소생술의 시간대별 소생율에 따르면 구조대 도착 전 최초 발견자의 신속한 조치가 매우 중요하다. 심폐소생술은 1분 이내에 하면 97%가 소생하지만, 4분이 경과하면 급격한 뇌손상을 일으킨다. 10분을 넘으면 생존이 어려워진다. 실제 국내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은 5% 수준이다. 이것은 10%인 미국과 8~10%인 대만, 일본에 비해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뇌생존이다. 살아서 응급실을 나가는 비율은 비슷한데, 일본은 살아서 퇴원하는 사람 중에 75%가 뇌가 회복돼서 나가지만 우리는 45%에 그치고 있다. 전과 같은 일상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더 많다는 뜻이다. 이는 일상에서 심정지 환자를 목격했을 때 심폐소생술 실시 여부와 함께, 심정지 후 얼마나 빨리 응급조치를 했느냐에 달려 있다. 최초 목격자가 1분이라도 빨리 심폐소생술을 하면 죽을 사람이 살고, 살아서 눈만 깜빡일 사람이 말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목격자 심폐소생술 시행방법
만약 당신이 심폐소생술을 알고 있고 타인에게 시술하는 상황이라면 “지금부터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외치고 시술하는 것이 좋다. 환자가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았거나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 암묵적으로 이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 법적인 문제를 대비하기 위한 조치이다. 심정지 환자가 소생하기 위해서는 즉시, 그리고 쉼 없이 시술이 이어져야 한다. 그만큼 목격자의 첫 대응이 중요하다.

자동제세동기自動除細動器(AED) 사용방법
자동제세동기(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는 급성심정지 환자에게 전기충격을 가해 심장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기기로 ‘자동심장충격기’라고도 한다. 급성심정지 발생시 4분 이내에 심폐소생술과 AED로 신속한 응급처치를 하면 환자의 생존율을 80%까지 높일 수 있다. 공공장소에 비치되어 있는 AED위치를 평소에 확인해두자. 위급 시 심폐소생술과 함께 얼마나 빨리 전기 충격을 가했는지가 생존 확률을 높이는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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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6. 3. 22. 22:00




공연·행사 시의 안전사고


유명 연예인 팬 사인회, 인기품목 전시, 기념품 배부 등 이벤트성 공연·행사에는 안전을 등한시하기 쉽다. 그러나 인파가 모이는 곳은 사고 위험을 동반한다. 비교적 조용히 이뤄지는 행사일지라도 관중이 집중되어 동선 확보가 어렵거나 심야 시간대에는 관람객 스스로가 주의할 필요가 있다.



환풍구
2014년 판교밸리 야외에서 걸그룹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 일부가 환풍구 위에 올라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하중을 견디지 못한 철골 받침이 20m 아래로 무너져 내려 16명이 사망한 것이다. 환풍구는 도심 곳곳에 널려 있지만 안전 기준이 없는 경우가 많고 지자체마다 기준도 제각각이라 특히 주의해야 한다. 철골이라도 한계이상의 하중이 걸리면 끊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평소 이동할 때도 환풍구 위는 피하는 것이 안전하다.

압사사고
압사는 한 번 발생하면 연쇄적으로 넘어져 서로 깔리면서 피해가 커지는 게 특징이다. 국내에서는 1960년 서울역 계단에서 귀성객이 집단으로 넘어져 31명이 압사한 사고가 가장 크다. 2005년 상주 콘서트에서 입장객 11명이 압사한 사례도 있다. 최근 해외에서는 2010년 캄보디아 물축제에서 347명,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하즈 압사사고로 최소 2,121명이 압사하였다. 하즈 기간에 벌어지는 압사사고는 끊이지 않는데 1990년에 1,426명 2006년에는 346명이 숨지기도 했다. 따라서 공연과 행사에 참가할 때는 줄을 서서 입·퇴장을 해야 하고, 비지정 좌석제와 선착순 입장이라면 상황에 따라 행사장을 벗어나는 것도 방법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2. 20:30



캠핑사고 안전요령




최근 캠핑을 즐기는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 농협경제연구소 추산 결과 우리나라 캠핑 인구는 480만 명에 달하고 국민 3명 중 1명은 가족과 함께 캠핑을 가 본 적이 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국립재난연구원이 2013년 전국 캠핑장 430곳을 표본 추출해 안전점검을 벌인 결과, A등급은 4%인 17곳에 불과했고 79%인 340곳이 최하위 안전등급인 E등급을 받았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 캠핑장은 1,945곳 가운데 미등록 캠핑장이 무려 88%인 1,713곳을 차지하여 안전관리가 시급한 실정이다. 실제 캠핑 안전사고는 2010년 282건에서 2012년 4,350건으로 급격히 증가했고 캠핑시장도 매년 커지고 있다.




캠핑 안전수칙
텐트는 어디에 쳐야 할까?
•텐트는 평평한 대지에 물을 구하기 쉽고 암벽과 언덕이 없는 곳에 세운다. 
•계곡 근처는 우천 시 물이 범람할 수 있어 위험하다.
•철탑이나 큰 나무 아래, 전깃줄, 철계단, 쇠줄 근처도 낙뢰 위험이 있다.

가스폭발 사고에 주의하자.
2015년 상반기에만 부탄 캔 폭발사고가 13건 발생해 2명이 숨지고 19명이 부상당했다. 사고 원인은 과대불판 사용, 보관 부주의, 장착불량, 산소결핍 등 모두 부주의에서 비롯되고 있다.
•삼발이 크기에 맞는 조리 기구를 사용한다.
•텐트 내부 등 밀폐된 공간에서는 가스용품 사용을 금지한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침낭, 두꺼운 점퍼, 이불 등을 이용해 체온을 유지한다.
•가스 주변에 가연성 물질을 두지 않는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2개 이상 연결하지 않는다.(부탄 캔 폭발위험)
•알루미늄 호일 사용하지 않기(열을 반사시켜 부탄 캔의 온도를 높인다.)
•다 사용한 부탄 캔은 구멍을 뚫어 분리수거 한다.
•캠핑용 가스용기의 자율안전인증 마크를 확인하고 재충전을 하지 않는다.
•화로 불씨에 주의하고 랜턴도 휘발유나 가스보단 건전지 제품을 이용한다.
•캠핑장 내 소화기 위치를 확인하고 휴대용 소화기를 준비한다.
캠핑 중 집중호우를 만나면?
•릴선이나 케이블 등 감전 우려가 있는 전자제품들의 전원을 차단한다.
•호우특보 발령 시 스마트폰, 라디오 등으로 기상상황을 계속 주시한다.
•등산 중일 때는 서둘러 하산하거나 높은 지대로 피신하되, 물살이 거센 계곡은 절대 건너지 않는다.
•야영 중에 물이 밀려들 때는 물건에 미련을 두지 말고 신속히 대피한다.
•집중호우 시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는 건너지 않는다.
•휴대용 랜턴, 라디오, 밧줄(로프), 구급약품 등을 준비해둔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2. 09:30



물놀이 사고 인전요령


계곡이나 강에서 물놀이를 할 때 수영미숙, 체력저하, 위험구역 출입 등으로 해마다 안전사고가 발생한다(2014년 24명 사망). 익수溺水 사고의 절반이 여름에 집중되며 어린이와 청소년, 남학생, 수영 숙련자의 사망 비율이 높다. 특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섣불리 물에 들어갔다가 구조에 실패하고 더 큰 익사사고를 부르는 경우가 많아 주의를 요한다.

위급상황 행동요령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는?
•큰 소리로 외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119에 신고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려 무작정 물속에 뛰어들지 말고 도구를 던져 붙잡게 유도한다.(튜브, 막대기, 밧줄, 스티로폼, 생수통 등)
※(주의) 물에 빠진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움켜쥐고 물 위로 올라오려 하므로, 무작정 뛰어들면 둘 다 위험해진다.
•물이 깊지 않고 사람이 많다면 서로 손목을 붙잡고 인간 사슬을 만들어 익수자를 구한다.



최후의 수단으로 물에 뛰어들어 구조해야 할 때는?
•도구가 없거나 익수자가 지친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다.
•상의와 신발을 벗고 물에 뜨는 물건을 들고 들어간다.
•익수자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고 구명튜브를 먼저 붙잡게 한다.
•익수자가 본능적으로 구조자를 움켜쥐고 달라붙을 때는?
⇒ 일단 같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익수자를 떼어낼 수 있다.
•익수자가 의식을 잃었다면?
⇒ 익수자가 엎드렸다면 얼굴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몸을 뒤집고, 목이 꺾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천천히 육상으로 옮긴다.
•119구조대원이 오는 동안 지시에 따라 응급처치를 한다. 환자가 호흡이 없으면 인공호흡을, 맥박이 없으면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 인공호흡에 자신이 없거나 할 줄 모른다면 가슴압박이라도 한다. 가슴압박만으로도 충분히 뇌에 산소공급이 이뤄진다.

내가 물에 빠졌다면?
•몸에 힘을 빼고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물결에 몸을 맡기고 몸이 저절로 뜰 때까지 기다린다.
•몸이 뜨면 전신의 힘을 빼고 누운 자세를 취한다.
•코와 입을 물 위로 내밀어 호흡을 시도한다.
•육지 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한쪽 손을 크게 흔들어 구조를 요청한다.

물속에서 갑자기 쥐(근육경련)가 났다면?
•당황하여 무리하게 힘을 주지 말고 해당 부위를 부드럽게 마사지한다.
•몸에 힘을 빼면 물 위로 떠오를 수 있고 손과 상체만으로도 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부위별로 다음과 같은 응급조치를 취하며 천천히 물 밖으로 나온다.
- 종아리 뒤(무릎을 펴고 엄지발가락을 발등 쪽으로 당기기), 허벅지 뒤(무릎 펴기), 허벅지 앞(무릎 구부리기)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1. 07:00

낙뢰(lightning)사고  안전요령


흔히 벼락이라고 부르는 낙뢰는 대기의 상, 하층 온도차가 크고 불안정할 때 생긴다. 낙뢰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낙뢰의 평균 전압은 약 10억 볼트, 온도는 태양표면의 4배에 해당하는 2~3만 도의 열을 낸다. 사람이 낙뢰를 직접 맞으면 외상이 심하지 않더라도 몸 안으로 흐른 전류가 내부 장기에 화상을 입힐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특히 전류가 심장을 관통하여 흐르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120만 건에 달하는 낙뢰가 발생하고 평균 10여 명 이상이 사고를 당한다. 2005년 장성군의 한 돼지사육장에서는 낙뢰로 인해 돼지 346마리가 새까맣게 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위급상황 행동요령
야외에 있다면?
•몸을 웅크리고 자세를 낮춘다.
•건물 안, 자동차 안, 움푹 파인 곳, 동굴로 대피한다.
•우산, 낚싯대, 골프채 등 금속성 물체를 몸에서 멀리 떼어 놓는다.
•산의 정상, 돌출된 지형, 산등성이에 있다면 재빨리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
•대피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가급적 5~10미터 이상 떨어진다.

실내에 있다면?
ㆍ전기제품, 유선전화, 전기계량기의 전원을 차단한다.
ㆍ전화선이나 안테나선에서 1m 이상 떨어진다.
ㆍ외출을 자제하고 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 낙뢰의 표적이 되는 장소
: ① 골프장, 운동장 등 평평한 곳 ② 나무 바로 아래 ③ 젖은 땅과 물가(호수, 웅덩이, 강, 수영장, 바닷가 등) ④ 지붕과 옥상, 철제 구조물 근처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1. 06:30


산악사고  안전요령





산악사고는 교통, 화재, 추락, 물놀이(익사) 사고와 함께 인적재난의 주요원인이다. 최근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사고 건수도 늘고 있다. 산에 올랐다가 119구조대에 구조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한 해 만 명에 이르는 가운데, 산악사고의 절반 가까이는 실족하여 추락한 경우이다. 10미터가 넘는 곳에서 떨어지면 절반 이상은 사망이나 중상에 이르게 된다. 등산사고는 지형과 기상조건, 입산자의 인적요인이 맞물려 발생한다. 산행 중 음주나 지나친 자신감으로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행위이다. 등산 중 산악안내표지판 번호를 수시로 파악해 두는 습관을 가지면 사고 시 구조요청에 큰 도움이 된다. 겨울철 산행은 추위로 인해 휴대전화 배터리가 훨씬 빨리 방전되므로 여분의 배터리는 꼭 챙기도록 하자.



위급상황 행동요령
산중에서 길을 잃었다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 자신이 아는 곳까지 간 후 119에 구조요청을 한다.
•근처의 산악안내표지판을 찾아 위치 식별번호를 확인한다. 식별번호를 메모해두면 만약의 사태에서 도움이 된다.
•불필요하게 체력을 소진시키지 말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길을 찾거나 구조를 요청 시 2인 1조로 움직여 1명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1명은 구조를 요청한다.
•여분의 겉옷을 입고 장갑을 껴 체온을 유지한다.
•해가 지거나 안개 등으로 시야가 안 보일 때는 무리하게 하산하지 말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야영 준비를 한다.
•날이 밝으면 나침반이나 지형을 이용해 하산한다.
•계곡(물)을 따라 내려오면 산 아래로 내려올 수 있다.
산에서 나침반 없이 방향을 찾으려면?
•손목시계에서 작은 바늘(시침)이 태양을 향하게 하면 시침과 숫자 12의 중간 방향이 남쪽이다.
•비석이나 정상석의 글자가 적혀 있는 면이 남쪽이다.
•오래된 나무의 이끼가 낀 방향이 북쪽, 나무가 휜 방향이 동쪽, 나이테 간격이 넓은 쪽이 남쪽, 촘촘한 쪽이 북쪽이다.
•북극성(작은곰자리의 밝게 빛나는 마지막 별)은 진북(항상 북쪽)에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0. 03:59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안전요령





거의 날마다 접하는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무빙워크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안전하게 이동하고 있을까?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에 따르면 전국 엘리베이터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2014년 기준 50만 대를 넘어섰다. 사고로 인해 갇혔다 구출되는 건수가 한 해 평균 7,000여 건, 119 구조대의 출동건수도 연 1만 건을 넘어섰다. 승강기 안전사고로 인한 사망자도 연간 10명에 달할 정도로 빈번한 안전사고라 할 수 있다. 

승강기 사고사례
2014년 방영된 SBS 예능 프로그램 ‘심장이 뛴다’에서는 20명의 승객이 승강기에 갇혔다 구조되는 모습이 그려졌다. 결혼식장 하객들이 정원을 초과하여 탑승한 것이 사고원인이었다. 당시 탑승객들의 모든 휴대전화는 물론 비상벨도 먹통이었다. 승객들의 체온으로 내부 온도가 높아지고 불안감이 증폭되던 순간, 한 시민이 승강기 문을 열고 휴대전화 신호를 확보하여 신고에 성공했다. 승강기 문을 여는 행동은 매우 위험하지만 해당 엘리베이터가 마지막 층인 지하 5층에 멈췄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사고는 정원 초과의 위험성은 물론 비상벨 점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위급상황 행동요령
엘리베이터
•급정지나 정전이 발생하면 인터폰으로 연락하고 119에 신고한다.
•탑승 중 비정상적인 진동이나 굉음이 들리면 인터폰으로 연락한다.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췄다가 갑자기 아래로 움직일 경우, 몸을 바닥과 벽 쪽에 붙여 자세를 낮춰 부상을 방지한다.
•내부는 밀폐되지 않아 질식 위험이 없으니 사고 시 당황하지 않는다.
•사고로 로프가 끊어져도 2미터 이상은 움직이지 않아 곧바로 추락하지는 않는다. 무리한 탈출보다는 침착하게 구조를 기다린다.



에스컬레이터
•큰 소리로 외쳐 사고를 알리고 부상자가 있으면 119로 신고한다.
•갑자기 멈추거나 역주행하는 등의 오작동 사고를 목격하면 출구와 입구 아래에 위치한 비상정지버튼을 누른다.
ㆍ탑승 도중 오작동 사고가 발생하면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지버튼을 눌러달라고 외친다.
ㆍ핸드레일을 잘 붙잡아 중심을 잃고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0. 03:49


2차 대전이후 가장 큰 공격 받은 파리

테러로 129명 사망





작년 11월 13일 밤(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연쇄 테러가 일어났다. 테러범들은 모두 7명으로, 3개 팀으로 나뉘어 파리 시내 6곳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저질렀다. 7명 중 2명은 중동 난민으로 위장하여 그리스에서 난민 신청을 한 뒤 EU에 들어온 것으로 나타났다. 또 1명은 알제리계 프랑스 국적인이란 사실도 밝혀졌다. 이번 연쇄 테러로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15개국 출신의 129명이다. 부상자 약 100명도 매우 위독한 상황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발생한 최악의 유혈 사태이다. 테러범 7명은 모두 사망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몸에 자살 폭탄을 두르고 있었다. 7명 중 6명은 자폭 사망했고 1명은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그 중 한 명은 오후 9시 20분 경 파리 북부의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에 들어가려다 폭탄 조끼가 발각되자, 폭탄을 터뜨렸다. 당시 경기장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가대표 친선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하여 8만 명의 관중이 들어차 있었다. 만약 테러범이 경기장에 진입했다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더 발생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1500명의 관객이 미국 록밴드 ‘이글스 오브 데스메탈’ 공연을 즐기던 바타클링 극장도 한순간 지옥으로 변했다. 9시 40분 경 극장에 난입한 테러범들은 종교와 국적을 묻고는 즉결 심판하듯 총을 쏘았다. 테러범은 “이게 다 올랑드가 세계 곳곳의 무슬림들에게 피해를 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3시간 뒤 경찰 진입 시까지 이곳 극장에서 89명이 숨졌다. 


이번 테러를 프랑스 정부는 국내외 세력이 정교하게 설계한 ‘합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프랑스 내부의 도움을 받은 IS 세력이 준비, 조직하고 계획한 공격이라는 것이다. IS는 “이번 공격은 폭풍의 시작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공개했다. 지난 7월 공개한 동영상에서는 “파리 거리가 시체로 뒤덮이게 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테러를 13일의 금요일에 저지른 것은 공포의 극대화 전략으로 해석됐다. 13일의 금요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날로 서양에서 불운不運을 상징한다. 프랑스가 테러의 표적이 된 것은 서방 국가 중 미국과 함께 IS 공습에 가장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지난해 이라크 내 IS 공습, 올해 시리아 내 IS 공습에 가장 먼저 참전했다. 현재 프랑스에는 전체 인구 중 8%가 무슬림으로 유럽 국가 중 무슬림 비중이 가장 높다. 프랑스 내 무슬림들은 실업 등으로 사회 하층인 경우가 많아 IS 같은 해외 테러단체의 유혹에 쉽게 빠지기도 한다.


파리테러 주범들


이번 테러로 유럽은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번 테러를 계기로 유럽 통합을 상징하는 솅겐조약(EU 회원국 간 자유로운 국경 출입을 보장하자는 약속)은 효력이 일시 중단된 상태다.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있는 프랑스가 국경 봉쇄 조치를 내렸고, 이웃 나라들도 강도 높은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용을 기반으로 한 유럽의 난민 정책도 벼랑 끝에 서게 됐다. 파리 테러를 계기로 무장 세력 IS가 난민 행렬에 섞여 있을 가능성 때문에 포용적 난민 정책은 코너에 몰렸다. 국제 사회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 11월 15일 터키에서 개막한 G20 정상회의에서 IS의 테러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제2의 파리 테러’ 예방도 비상이다. IS 지지자들은 트위터에 “다음은 로마, 런던, 워싱턴”이라는 글을 퍼뜨리고 있어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향후 미국은 IS 격퇴를 위해 중동에 지상군을 파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IS를 격퇴를 위해 나라간 공조가 더 깊어지면서 지구촌이 IS테러와 세계대전에 나서는 상황으로 갈 수 있다. ◎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6. 3. 20. 03:44



미국 IT매체가 뽑은 올해의 혁신기술들






최근 미국 IT 전문 매체 테크인사이더Tech Insider는 ‘지난 1년간 개발된 흥미로운 혁신 기술’에서 40가지의 기술들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을 비롯하여 앞으로 산업 지형을 바꿀 수 있는 혁신기술들도 많이 있다. 그 중 주요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이미지 번역 앱 구글은 해외에서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 간판 때문에 당황하는 여행자를 위해 올해 ‘이미지 번역’ 앱을 내놨다. 예컨대 러시아어 표지판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영어로 번역된다. 스마트폰 화면에 비치는 글자를 원하는 언어로 번역해 주는 게 장점이다. 온라인 접속을 하지 않고도 번역이 된다. 한국어·영어·중국어·아랍어 등 27개 언어로 번역해 준다.

베티젤 해조류를 이용해 만든 ‘베티젤’이라는 연고는 12초 만에 피를 멈추게 한다. 바르면 금세 지혈되는 베티젤을 발명한 사람은 뉴욕대를 졸업한 조 랜돌리나(22)다. 베티젤은 해조류를 잘게 쪼개 젤에 녹인 것으로 상처 위에 바르면 빠른 속도로 혈소판이 쌓여 피가 멎는다.



홍수 방지 콘크리트 1분 내로 3300~4000L의 물을 흡수하는 홍수 방지 콘크리트 ‘톱 믹스’는 영국·프랑스의 합작 시멘트 기업 ‘라파즈 타르맥’에서 발명했다. 주차장·도로·골프장 등에 사용되는 톱 믹스는 빗물이 튀어 넘치는 것을 막아주는 스마트 건축자재다.

1만원 PC 9달러 짜리 초소형 컴퓨터도 올해의 기술로 선정됐다. 미국 스타트업 기업 넥스트 싱(Next Thing)에서 제작한 컴퓨터 칩은 9달러, 칩과 배터리는 19달러(약 22,000원)에 판매된다. 칩 크기는 가로 5.8㎝, 세로 3.8㎝로 매우 작지만 모니터와 키보드만 연결하면 PC처럼 쓸 수 있다.

색맹을 위한 안경 올해 8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스타트업 ‘엔크로마’에선 색맹도 색깔을 볼 수 있게 하는 안경을 내놨다. 이 색맹 교정 안경의 가격은 329~699달러(약 38만~80만원)이며 현재는 콘택트렌즈형으로도 개발 중이다. 빛의 파장을 조절하는 이 안경을 끼면 색깔 구별이 한결 쉬워진다.



3D 프린팅으로 만든 의약품 미국에서 3D 프린터로 만든 의약품이 지난 8월 세계 최초로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FDA에 따르면 미 제약업체 ‘아프레시아’에서 만든 ‘스프리탐’은 뇌전증(간질)으로 인한 마비현상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테크 인사이더는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하면 의약품 제조 단가가 낮아질 수 있다”고 전했다. 

3D 프린팅 코뿔소 뿔 바이오 신생기업 ‘펨비언트’는 올 1월 코뿔소 뿔의 성분인 케라틴과 단백질 등을 3D프린터에 넣어 출력하여 실제 뿔과 동일한 인조 코뿔소 뿔을 만들었다. 뿔을 만들기 시작한 건 코뿔소 멸종을 막기 위해서다. 3D 프린터로 만든 코뿔소 뿔은 강장제·해독제 등의 민간 의약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 제작자는 “인조 코뿔소 뿔은 암시장 거래 가격의 8분의 1에 불과하지만 성분은 동일하다”며 신기술 덕에 코뿔소 밀렵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모기 퇴치기술 영국 생명공학 회사인 ‘옥시텍’은 불임 백신을 넣은 유전자 조작(GMO) 수컷 모기를 개발했다. 몸속에 ‘자멸 유전자’를 지닌 GMO 모기와 야생 암컷 모기 사이에서 태어난 모기 유충은 성충이 되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모기의 개체 감소에 도움이 된다. 올봄부터 브라질 상파울루주의 피라시카바에서 변형 모기를 풀어놓는 작업을 시작했다. 옥시텍은 이를 통해 파나마·브라질 등에서 모기 개체를 90% 이상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변기 물을 식수로 바꾸는 기술 지난 1월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가 물 한 잔을 들이키는 사진이 언론에 공개됐다. 마시기 몇 분 전만 해도 이 물은 사람의 배설물이 들어간 ‘똥오줌 물’이었다. 그러나 올해 개발된 신기술 덕에 폐수는 깨끗한 식수로 변했다. 이것은 빌앤드멀린다게이츠 재단에서 자금을 대는 ‘옴니 프로세서’가 구현했다. 전 세계 20억 명이 청결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해 고통 받는 상황에서 나온 기술이다. 배설물을 고온으로 가열해 수증기만 걸러낸 뒤 이를 냉각시켜 물을 얻는다. 정수는 기본이고 걸러진 배설물로 전기도 생산한다. 물과 전기가 부족한 개발도상국에 특히 필요한 기술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5. 8. 3. 00:30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





명언 모음


사과는 빠르게, 키스는 천천히 사랑은 진실하게, 웃음은 조절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너를 웃게 만든 것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말 것

불가능한 것은 없어. Impossible이라는 단어가 I'm possible(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여성의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는 게 아니다.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녀의 영혼이 반영된 내면의 모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나를 웃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해. 나는 정말로 웃는 것을 가장 좋아하니까. 웃음은 수많은 질병을 치료해주잖아. 웃음은 아마도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걸 거야. 

난 나 자신을 절대 우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건 내 마음속엔 없어. 나는 단지 내 일을 할 뿐이야.

난 내일이 또 다른 날일 것을 믿고 기적을 믿어. 

인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최고의 것은 ‘서로’이다. 

자녀들에게 남긴 명언


아래 구절은 그녀가 죽기 1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들에게 들려주었다는 시詩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활동했으며 말년에는 대장암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사회봉사를 실천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아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자신이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내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5. 8. 2. 00:30


명언 Story


내가 야구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 ​하겠다는 뜻만 있으면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룰 수 있다는 것. 

​스스로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을 뛰어넘고, 다음에는 더 큰 목표를 세우고 ​다시 한계를 만나고, 그것을 뛰어넘으면서 큰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승부는 눈물겨운 것이다. 나 하나에 우리 가정은 울고 웃는다. 나 하나의 움직임에 가족이 웃고 운다. 내가 던지는 공 하나에 내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다는 절박함이 있다면 쉽게 던질 수 있겠는가. 고통을 이겨내야 행복해 질 수 있다.

보통 선수는 안 된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더 나은 선수는 안 되는 게 있으면 그걸 고치겠다는 열정을 갖고 있다. 고치겠다고 마음먹으면 달라질 수 있다.

기회는 언젠가 분명히 온다. 내 것을 확실히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처음 가졌던 목표를 마무리 지어 놓지 않으면 기회가 왔을 때 허둥댈 수밖에 없다. 연습량이 많다고 만족하지 말라. 양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서 내 것을 찾고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는 한번 하고 나면 버릇이 된다. 할 수 있을지 걱정하지 말고 된다고 마음먹고 부딪혀라.

프로는 백조다. 백조가 물에 떠 있는 모습은 우아하지만 보이지 않는 발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경기장에서는 멋지고 우아한 플레이를 선보여야 하지만 그를 위해서 훈련장에서는 피를 토할 만큼 치열하게 운동해야 한다. 

편심 - 어느 스님은 하루에 옷을 열여섯 번이나 갈아입는다고 한다. 새로운 일을 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이다. 물론 까다롭거나 깔끔함 혹은 화려함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한다는 자세였던 것이다. 

진실이란 것은 언젠가 꽃이 피어난다. 거짓말은 단거리이지만 진실은 마라톤 경주다. 

오늘 컨디션이 50% 정도이면 50% 쉬는 것이 아니라 50%밖에 안 되니까 100%를 만들기 위해 50% 더 노력하자. 이것이 성공하는 비결이다.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발전할 수 없다. 시행착오를 겪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떨어지면 언제든 올라가면 된다. 떨어졌다고 좌절하거나 잘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갖지 말고 왜 떨어졌는지부터 생각하라. 불가능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안되면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왜’부터 다시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다. 

거북이처럼 살고 싶다. 한발 한발 우직하게 내딛으면서, 때로 깊이 막히면 토끼는 뛰어가겠지만, 거북이는 가만히 서서 고민하고 때를 기다려 자기 갈 곳을 찾아간다. 고민하면서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운다. 그 속에서 살길을 찾는다.” 



리더란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누구나 장점이 있다. 리더는 장점을 발견할 눈을 가져야 하고, 그걸 살릴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리더는 선수의 경험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선수가 가지고 있는 경험을 믿어주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한다.

리더는 할아버지가 되는 순간 끝이다.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면 끝이다. 한번 일으켜주면 다음에 넘어졌을 때도 일으켜주길 기대한다.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 

리더는 모든 일을 최악의 상황을 설정해 놓고 가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 몰렸을 때 얼마나 할 수 있느냐가 인간의 능력이다. 그래서 선수들을 극한으로 내몰았고 거기서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마지막 당부


여러분은 지금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땀을 믿으세요. 성공은 곧 노력입니다. 설령 노력했는데도 성공이 좌절됐다고 무릎 꿇지 마세요. 또 도전하세요. 그래도 안 되면 또 도전하세요. 저는 67살이 되도록 그걸 믿으며 살았고, 65살에 성공을 했어요, 좌절하려거든 절 보세요, 절…. 여러분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8. 1. 22:56



러시아 전승戰勝 70주년 기념행사






5월 9일 오전 10시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2,000만 명의 영혼을 달래는 종소리가 울렸다. 러시아의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the Great Patriotic War) 전승戰勝 70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조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 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대大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날 ‘승리의 깃발’로 불리는 옛 소련기를 앞세운 차량을 선두로 군인들이 줄을 맞춰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가로질러 행진했다. 이날 군사 퍼레이드에는 전투기와 장갑차 수백 대와 군인 만 6천여 명이 동원되어 러시아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러시아 우방국 10개 나라의 군인들이 동참했으며, T-14 전차와 신형 대륙 간 탄도미사일 등 그동안 개발한 신무기들도 공개되었다. 이번 행사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을 이유로 서방 국가 정상들은 대부분 참석하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박근혜 대통령도 불참하는 등 러시아가 초청장을 보낸 68개국 정상 가운데 27개국 지도자만 자리를 함께했다. 이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앞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데에 이어 행사장에서도 나란히 앉아 긴밀한 협력 관계를 과시해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이 5월 9일이다. 반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은 5월 8일이다. 처음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프랑스 랭스 연합군사령부에서 “5월 8일 오후 11시부터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역할은 소련군이 했고, 나치의 심장부는 베를린이기 때문에 항복 문서는 베를린에 있는 소련군사령부에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를 받아들여 8일 오후 10시 43분 베를린 근교 소련군사령부에서 빌헬름 카이텔 독일군 총사령관이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군 총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다시 서명했다. 이 시간이 모스크바 시간으로 9일 0시 43분이었다. 



많은 이들이 2차대전을 미국과 독일이 싸운 전쟁으로 알지만 이는 냉전과 할리우드 영화가 만든 오해다. 미·영 연합군의 유럽 전선 전사자는 40만 명 정도였고 러시아군 전사자는 800만 명 이상이었다. 독일은 러시아 전선에 전력의 80~90%를 투입했고, 300여만 명이 전사했다. 미·영과 싸움에서 나온 피해의 4배가 넘는다. 소련군은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바다 건너서 구경하는 사이 동유럽 전선에서 고군분투했다. 러시아인들은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굶어 죽어가면서도 지켜낸 레닌그라드 봉쇄전,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린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쿠르스크 격전 등이 2차 대전의 승기를 잡는 분수령이었다고 믿는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미영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56만 명과 싸웠을 뿐이지만,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홀로 450만 명의 독일군과 싸웠다. 전쟁 막바지 베를린 점령 작전에서만 소련군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소련 인구가 1억 6,000만 명이었는데 2,700만~2,800만 명이 전쟁 중 사망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전승기념일인 5월 9일이 공식적인 2차 세계대전 승전일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 제패를 꿈꾸던 최강 나치 독일군을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단결해 물리치고 세계도 구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러시아는 아무리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매년 승전 기념일 행사만큼은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 국제 역학관계상 주목할 장면은 중국 인민해방군 의장대 112명의 참석이다. 러시아 승전 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에 중국이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미국과 일본의 관계 강화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의 협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두 나라의 관계가 더 긴밀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 북한을 위에 두고 주변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로서는 썩 밝지 않은 그림이다. 상제님의 상씨름 천지대세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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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5. 7. 31. 22:22



 

분노 조절장애 증상에 대처하는 방법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손이나 목소리가 떨리기도 한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 온몸이 긴장한다. 영화 속 괴물 캐릭터인 헐크로 변할 때 몸이 커지고 옷이 찢어지듯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폭발하기 전에 신호를 보낸다. 이런 상태가 되면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36계 줄행랑 

먼저 해야 할 것은 피하는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기 전에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대화 중이거나 말다툼 중이었다면 일단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다. 그럴 수 없다면 행동을 중단하거나 화제를 돌리거나 잠시 뒤돌아서는 것도 방법이다.

 

3분의 법칙

일단 상황을 피했다면 시간을 둔다. 짧게는 30초면 충분하다. 길어도 분노가 지속하는 시간은 3분을 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10~100까지 세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의외로 시간에는 분노를 줄이는 힘이 있다.

 


분노한 이후 예측하기

아무리 생각해도 화를 낼만한 상황인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도 격한 감정은 어느 정도 누그러지지만 앙금은 남을 수 있다.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과연 겉으로 표출하는 것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순간의 후련함 대신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건강하게 화내기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고 능사는 아니다. 억누르기만 하면 오히려 화병이 된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망쳐버렸다’는 식의 말로 시작하면 분노했던 상황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또 의문형 문장보다는 평서문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의 질문은 상대방을 쏘아붙이거나 다그치는 말이기 쉽다. 질문의 의도를 살리되 ‘나는 ~였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을 말하는 것으로 순화한다.

 

‘Must’를 버려라

‘~해야 한다’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표현부터 버려야 한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런 단어는 무의식 중에 부정적인 사고를 높이고 신경을 과민하게 한다. 당위적 사고방식은 자신을 자책하게 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줄인다. 반대로 이런 사고를 덜어낼수록 마음의 유연성을 높여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자극의 폭을 넓힌다. 광분하는 일이 그만큼 줄어든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9. 00:30



 

노르웨이의 의회 옴부즈맨ombudsman 제도




노르웨이 의회는 총선이 치러진 다음해 1월 1일부터 4년 임기로 의회옴부즈맨Parliamentary Ombudsman을 임명해 운영하고 있다. 옴부즈맨은 변호사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의원일 필요는 없다. 옴부즈맨 제도는 1809년 스웨덴 정부에서 행정부의 독주를 막고자 고안한 것으로, ‘행정감찰관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정부(국가, 주, 시정부)의 부당한 행위로 고통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을 취지로 한다. 옴부즈맨은 정부와 개인 사이에서 독립적이고 공정한 중재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옴부즈맨의 판정은 명령이 아닌 권고이다. 





옴부즈맨은 제출된 불만사항을 검토하고 성명을 발표하는데, 만약 정부의 행위가 위법이거나 명백히 부당하다고 옴부즈맨이 판정할 경우 해당 관청이나 관료는 해당 건을 재고하고 일반적으로 옴부즈맨의 권고를 따르게 된다. 1962년 옴부즈맨법은 옴부즈맨이 의회에 매년 보고서를 제출토록 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옴부즈맨은 의회의 감시 기능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이외에도 군인 또는 공익근무요원을 위한 옴부즈맨 제도도 운영 중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8. 00:30

 

 

한국과 노르웨이의 관계

 

 

 

노르웨이는 NATO 회원국으로 친서방노선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1959년 3월 2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우리나라는 1972년 12월 노르웨이에 상주공관을 설치하였고, 노르웨이는 1980년에 주한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노르웨이는 6.25전쟁 발발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외과 병원단을 파견한 바 있으며, 그후 메디컬 센터Medical Center 운영 지원 등을 통하여 양국관계는 계속 발전되어 왔다. 메디컬 센터는 국립의료원의 전신으로,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과 유엔한국재건단(UNKRA) 및 우리 정부가 공동으로 1958년에 설립했고 1968년 우리 정부가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노르웨이는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1973년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남북한 수교 후 대남북한 형평관계 유지를 표방하고 있어 친서방이라고는 하나 실리가 없는 한 우리나라에 편중된 관계유지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의 경제관계가 증진됨으로써 한-노르웨이 관계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 최근 2006년 한국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회원국: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간에 체결된 한-EFTA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한-노르웨이 양국간 교역량이 4배, 투자 규모가 15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상호보완적인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어 향후 경제 통상 협력의 잠재력이 매우 큰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2009년 한-노르웨이 수교 50주년을 계기로 향후 50년간의 새로운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위해 지속 협력키로 하고, 특히 녹색성장이라는 양국의 미래 공동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녹색미래를 위한 파트너쉽’을 구축 모색해 나가기로 하였다.

 




한국과 노르웨이 간의 무역 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해운과 해양이다. 1979년 이후 노르웨이인 소유의 선박 중 280척이 한국에서 제작되었으며, 노르웨이 도로에서는 지금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를 많이 볼 수 있다. 2014년 한국 기준 교역 현황을 보면, 수출은 선박, 해양구조물, 승용차, 타이어 분야에서 16.69억 달러를 기록했고, 수입은 선박용 부품, 펌프, 배전 및 제어기, 자동제어기 부품을 중심으로 28.41억 달러였다. 2013년 신고 기준 투자 현황을 보면 대노르웨이 투자는 54건 18.56억 달러, 대한국 투자는 138건 4.74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노르웨이는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에 참가하였고, 한국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때 노르웨이에 선수단을 파견한 바 있다. 

 

2014년 현재 노르웨이에 체류 중인 한국 교민은 692명이다. 그 중 시민권자 및 영주권자가 440명이고, KOTRA를 비롯하여 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현대미포조선 STX조선 등에서 진출한 일반 체류자가 252명이다. 노르웨이의 한인 교민단체로는 1972년 결성된 주노르웨이 한인회(Korean Resident's Association)가 있고, 입양인 단체로는 한국인 입양인 협회(Forum for Korean Adoptees, Norway)가 있다. 한국전 이후 1954년경부터 시작된 노르웨이의 한인 입양인은 현재 약 6,800~6,9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NATO 회원국으로 친서방 노선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동서긴장완화 및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1973년 6월 22일 북한과 상호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1973년 8월 노르웨이에 상주 공관을 개설하였으며, 노르웨이도 북경주재 대사로 하여금 겸임토록 하였다. 노르웨이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실질협력관계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 북한과의 관계는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 1976년 북한 공관원의 마약 및 술, 담배 밀수사건, 1983년 KAL기 폭파 사건 및 미얀마사건, 김일성 우상화 체제, 북한의 허구적인 선전 책동 등으로 인하여 노르웨이는 북한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대사는 1991년 3월 경제사정으로 오슬로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고, 스웨덴에서 겸임하기로 하였다고 노르웨이에 통보한 후 4월 30일 북한대사관을 완전 철수하였다. 북한의 폐쇄성과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경제적 파탄 및 권력 세습 등으로 북한에 대한 노르웨이의 인식은 매우 나쁘나, 일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노르웨이인들은 북한을 옹호하고자 하는 태도를 아직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노르웨이는 북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개발원조를 하지 않고 있으나, 인도적 차원에서는 매년 대북지원을 해오고 있다. 2008년 현재 주스웨덴 북한대사가 노르웨이 대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주한 노르웨이대사가 북한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북한간의 교역은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7. 07:41




노르웨이의 국기






노르웨이는 덴마크와의 동맹 기간인 1380~1814년 사이에 사회·문화적으로 덴마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 형태인 붉은색 바탕에 그려진 하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 안에 파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그려져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그것은 덴마크의 국기인 ‘단네브로Dannebrog’를 바탕으로 청색 십자가를 첨가한 형태이다. 청·백·적색은 1814년에 제정된 ‘에이츠볼(Eidsvold) 헌법’에서 강조한 기본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를 각각 상징한다.

 


그러나 이 국기는 스웨덴의 지배 하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사용될 수 없었다. 1905년 독립을 하면서 비로소 노르웨이는 이 국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노르웨이 국기 하나에는 7나라의 국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세계에는 비슷한 국가가 많은데,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노르웨이 국기 1장이면’이라는 제목으로 노르웨이 국기 사진이 한 장 게재되었다. 

 

아래 그림은 노르웨이 국기인데, 검은색 네모로 다른 나라 국기를 표시해놓았다. 노르웨이 국기에는 ‘인도네시아’, ‘폴란드’, ‘핀란드’, ‘프랑스’, ‘네덜란드’, ‘태국’의 국기가 숨겨져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6. 00:30

 

 

극동에도 뻗친 프랑스 침략사

 

 

 

19세기 프랑스는 극동에도 세력을 뻗쳐 영국과 함께 중국에 대해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에 대해서는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응징을 명목으로 강화도를 일시 점령하였다(1866년의 병인양요). 그러나 조선이 미국과 영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886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당시 조불조약에서는 천주교의 선교가 조선에서 허용된다고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정부가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실질적인 포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위에서 보듯이 제2제정기(1852~1871)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해외영토와 세력을 세계 도처에서 확대하려는 제국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가 가장 야심차게 추진한 대외정책의 하나가 멕시코의 보수파들과 손을 잡고 멕시코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친프랑스적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주의적 모험은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군사적 패배로 끝났다. 그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 제국을 부활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국한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5. 14:36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프랑스 식민지배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대였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욕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알제리 태수와 프랑스 영사의 외교적 마찰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알제리를 점령하였다(1830). 당시 알제리는 오토만 투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제 300여년간의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대신하여 프랑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점령에 이어 프랑스인들을 위시한 유럽 이민자들이 알제리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토지를 많이 차지함에 따라 많은 알제리 원주민들이 고향에서 떠나야 하였다. 회교도 알제리인들은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에 비해 법적인 차별을 받았다. 알제리인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가 알제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알제리전쟁은 프랑스 내부에도 큰 갈등을 불러일으켜 알제리 독립 허용을 반대하는 프랑스 장군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프랑스 정부(제4공화국)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의 투쟁과 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여 1962년에 독립을 허용하였다.

 


19세기에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도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말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였으나 차츰 영토획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월남에서 영토와 큰 영항력을 획득한 프랑스는 월남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불전쟁(1884~1885)이 그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월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었다.

 

인도차이나인들의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투쟁은 영불전쟁 직후부터 있었으나 2차대전 이전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인도차이나는 2차대전시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프랑스의 수중에서 잠시 벗어났으나 일본이 패전한 후 프랑스가 다시 인도차이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호치민의 베트민 세력과 힘든 싸움을 벌이다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 군대가 참패함으로써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는 끝이 났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4. 00:30

 

 

 

프랑스 정치체제




프랑스는 임기 7년으로 연임이 허용되는 대통령 중심제이며 의회는 지역구에서 인구비례로 선출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하원(Assemblee Nationale)과 간접선거로 뽑힌 상원(Senat)으로 구성된다. 상원보다는 하원이 더 큰 권한을 갖는다. 상원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은 지방의회 의원과 시의원, 시장 등으로 구성된다. 지방자치는 최상위 단위인 26개의 지방(region) 의회를 통해 이뤄진다. 지방의회는 주민의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물론이다. 한 지방에 몇 개씩 있는 도(데파르트망departement)는 대통령이 임명한 지사가 관장하는 행정단위로 중앙권력을 대변한다. 모두 101개나 되는 도청은 내무부에 소속되어 있다. 프랑스의 가장 기초 행정단위는 ‘코뮌’(commune)이다. 코뮌의 수는 36,000개가 넘는다. 재미난 것은 인구 2백만이 넘는 파리도 시골마을처럼 하나의 코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코뮌의 수장인 ‘메르’(maire)는 큰 코뮌의 경우는 시장이라 번역해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코뮌의 경우는 촌장 정도이다.

 



제국주의 식민정책으로 확보된 해외영토

프랑스는 해외 영토도 많이 갖고 있다. 태평양 지역의 뉴칼레도니아, 남미의 가이아나와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 인도양의 레위니용 등이 그러한 해외영토이다. 모두 근대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확보한 해외식민지 가운데 독립하지 않고 남아 있는 땅들이다. 프랑스 인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도 일찌감치 발을 들여놓아 17세기초 현재 캐나다에 위치한 퀘벡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곳을 기지로 삼아 프랑스인들은 오대호를 거쳐 미시시피강 유역으로 탐사를 하였다. 17세기말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인들은 미시시피 연안의 광대한 지역을 프랑스 영토로 만들고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아나’라고 지었다. 그리고 교역거점과 요새가 세워지고 뒤이어 정착식민지가 세워졌는데 이 지역의 중심지 뉴올리언스가 건설된 것은 1718년이었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유럽 내의 영토확장을 놓고 싸웠을 뿐아니라 해외무역과 식민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프랑스의 주적은 영국이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두 나라는 유럽의 정치적 주도권을 넘어서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7년전쟁(1756~1763)이라고 역사에서 알려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퀘벡 식민지를 영국에 넘겨줘야 했다. 루이지아나 식민지는 나폴레옹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생국가인 미국에 팔아넘겨 북미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는 모두 사라졌다. 퀘벡의 경우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 주민들은 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프랑스계 사람들이다. 프랑스에 대해 문화적 애착이 강하고 일부는 캐나다로부터의 독립을 원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3. 00:30




프랑스혁명에서 태동한 현대사

 

 



현재 프랑스 국가의 정식명칭은 ‘프랑스 공화국’이다. 프랑스는 프랑스혁명기인 1792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였지만 혁명이 끝나면서 왕정이 다시 복위하였다. 19세기에는 공화국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는 공화파와 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줄곧 계속되었다. 1848 혁명으로 2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공화국도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제정으로 바뀌었다(1852). 나폴레옹 3세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다시 수립되었다. 이것이 3공화국으로 이후 왕당파들의 도전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공화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공화국은 드골 때의 헌법개정으로 5공화국으로 불린다.



현재 프랑스 공화국은 프랑스혁명기에 등장한 삼색기를 국기로 삼고 있으며 국가國歌로는 프랑스혁명기 때 군가로 사용되었던‘라 마르세이예즈’를 사용한다. 라 마르세이예즈의 가사는 군가에서 나온 것이라서 내용이 좀 살벌하다. “폭군을 향하여 피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대오를 짜자. 진격하자. 진격하자. 저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땅을 적시도록...” 그래서 일부 프랑스인들은 국가의 개정을 주장한다.


국기와 국가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늘날의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에서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현대사를 1789년의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잡고 교과서도 그렇게 되어 있다. 프랑스 역사교육과정은 중학교에서는 고대사부터 시작해서 중세사와 근대사를 배우고 고등학교에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 현대사를 배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등학생들은 매우 상세한 내용의 현대사를 배우게 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2. 00:30

 




 

노르웨이 문화 예술


 

 


노르웨이 문화예술
계의 대표적 인물로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미술),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음악), 그리고 헨리크 입센Henrik Ibsen(문학) 3인을 꼽고 있다. 오랜 식민역사로 인해 전통문화의 취약성을 안고 있는 점 때문에 노르웨이는 현대 문화예술 진흥에 역점을 두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는 문화예술진흥부문에 GDP의 3%를 지원하고 있고 베르겐 국제 페스티벌, 노르웨이 국제영화제 등 국제행사 외에도 지역별로 각종 행사를 펼치고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국제펜클럽 노르웨이 지부, 노르웨이 작가연맹 등을 중심으로 시, 소설, 희곡작품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음악 부문은 국립 오슬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비롯 크리스챤산드, 베르겐, 트론하임 등지에 시립 심포니오케스트라를 두고 정기 및 부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갖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솔베이지 송”의 작곡가 에드워드 그리그의 생전의 예술활동을 기리는 그리그 기념 사업회는 매년 베르겐에서 ‘그리그 추모음악제’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한편 노르웨이 서중부에 위치한 Molde시에서 매년 여름 세계 유명 재즈 음악인을 초대하여 대규모 재즈음악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12월에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주관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위한 축하 음악회를 열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 국민화가로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는 에드워드 뭉크의 이름을 본따서 만든 오슬로 소재 뭉크박물관에서는 그의 생전에 작품들을 장르별로 연중 전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소수의 민간화랑과 국립박물관 등지에서 국내외 현대 작가의 작품 전시회를 자주 갖고 있어, 1~2년 전에 전시 계약을 해야 할 정도이다. 


 

영화 부문은 노르웨이 국제영화제, 노르웨이 단편영화제 및 Film from the South등 주요 영화제를 개최하고 세계작품 초청 시사회를 갖고 있다. 정부의 영화산업 진흥을 위한 투자에 비해 외국 작품의 범람과 당지의 높은 인건비로 인한 대외 경쟁력이 약해 노르웨이 작품 활동은 미미한 편이다. 한편, 노르웨이 정부는 현재 소수민족인 사미Sami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영화 제작도 지원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1. 22:00




 

 

노르웨이 종교

 

 

 




노르웨이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헌법상 루터 복음교를 국교로 한다. 2013년 현재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82% 정도인데, 그중 국교인 루터교 인구가 76.1%를 차지한다. 그 다음이 로마가톨릭으로 2.4%이다. 기독교는 10세기경 주로 해외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왕족들에 의하여 전래 포교되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늦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가운데 하나다. 1539년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를 루터교로 개종시켰다.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늦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나라에 속한다. 노르웨이에서는 루터교 의식에 따라 교회에서 왕의 즉위식부터 세례, 결혼, 장례 등이 다 행해진다. 부활절, 성령강림주일, 성탄절처럼 기독교 교회력에 나오는 절기들은 공휴일로 인정된다. 

 

노르웨이 국교회는 노르웨이 국왕이 교회장이며 의회(Storting)가 최고 집행부이다. 왕실은 의무적으로 복음 루터교를 실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왕이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정부 통제를 책임지고 있다. 문화교회부는 행정적인 책임을 지며, 의회는 교회 관련 법안과 예산안을 채택하는 일을 담당한다. 모든 주교와 주임 사제들은 정부가 임명한다.

 




개신교 국가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슬람, 불교, 로마 가톨릭 등의 종교가 다 보장된다. 최근 수십 년 간 노르웨이에 많은 기타 종교단체들이 생겨났다. 1964년 헌법 제2조가 개헌되어 노르웨이 내에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었고, 1969년에는 종교 및 생활신조 단체들에 대한 국가 보조금 지급 계획이 도입되었다. 

 

2013년 말 노르웨이 국교 신도는 총인구의 약 75%를 차지하는 384만 명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국교 루터복음교가 아닌 다른 종교 생활을 한다. 2014년의 경우 그 숫자가 587,000여 명에 이른다. 국교 이외 종교의 인구 지형을 보면, 루터복음교가 아닌 여타 기독교도가 57.4%를 차지하여 가장 많다. 비기독교 중 가장 많은 종교 인구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교로 22.5%를 차지한다. 이어 불교가 2.9%, 힌두교가 1.3%, 시크교가 0.6%를 차지하였다. 그 외에 바하이교, 유대교도 800~1,100여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