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에 해당되는 글 173건

  1. 2014.07.30 미국의 영토 확장과 남북전쟁
  2. 2014.07.29 오스트레일리아의 공연
  3. 2014.07.29 미국의 역사, 미국의 탄생
  4. 2014.07.28 미국의 영토와 자연환경
  5. 2014.07.28 오스트레일리아의 종교적 성향
  6. 2014.07.08 천지대세를 알아야 산다
  7. 2014.07.06 호주 전통 종교의 숭배 대상 추룽가Tjurunga
  8. 2014.07.06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
  9. 2014.07.05 오스트레일리아 자본주의 발달과 국가를 향한 여정
  10. 2014.07.05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11. 2014.07.05 천연자원과 자연환경의 천국 오스트레일리아
  12. 2014.07.02 우크라이나 사태의 이면
  13. 2014.07.02 크림사태와 한반도 정세
  14. 2014.06.17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15. 2014.06.17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문화적 특징
  16. 2014.06.17 아프가니스탄의 인종, 언어와 종교
  17. 2014.06.14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18. 2014.06.14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의회
  19. 2014.06.14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및 행정
  20. 2014.06.13 아프가니스탄 - 미국 전쟁
  21. 2014.06.13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내전
  22. 2014.06.13 아프가니스탄 아프간-소련전쟁
  23. 2014.06.12 아프가니스탄의 공화국 수립과 공산독재정권의 등장
  24. 2014.06.11 아프가니스탄 근대통일국가 두라니
  25. 2014.06.11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26. 2014.06.10 아프가니스탄 자연환경
  27. 2014.05.29 북두칠성
  28. 2014.05.20 서신사명 상제님
  29. 2014.05.20 상제님의 위격
  30. 2014.05.19 구원의 섭리
세계정보2014. 7. 30. 14:10


미국의 영토 확장과 남북전쟁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미국은 점차적으로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1803년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루이지애나Louisiana주를 사들여 국토 규모를 2배로 확장한 것을 시발로, 병합·할양·구매 등을 통해 미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59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0 주가 성립되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미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American Civil War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쳐야만 했다.

 



흔히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노예 문제는 표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노예제로 대변되는 남과 북의 생활 방식, 특히 경제 구조의 근본적 차이에 있었다. 이미 17세기부터 미국의 남부는 전원적이며 농업 위주였고, 북부는 도시적이고 공업 위주의 경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하여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북부와 동부지방에서는 제조업과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이 둘이 그런 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 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입지는 자꾸만 좁아져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으로 몰려갔으며, 급기야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 기반을 붕괴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남부는 앉아서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연방의회는 이미 북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1860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남부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링컨Abraham Lincoln이 당선됨으로써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남부 7개주가 반발하며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를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북부에 맞섰다. 1861년 4월 남부의 섬터 요새Fort Sumter 공격으로 남북 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우수한 공업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북부가 우세를 보여 결국 1865년 4월 26일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은 종결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전쟁에도 승리했으나, 1865년 노예해방 반대론자 존 윌크스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29. 18:11

오스트레일리아의 공연

 





호주는 또한 풍부한 공연예술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국제적 면모를 갖춘 클래식 음악 연주 분야만 해도 6개의 전문 심포니 오케스트라, 2개의 극장용 오케스트라(오페라와 발레용), 2개의 전문 챔버 오케스트라, 수많은 챔버 뮤직 앙상블이 존재하며 이들 대부분은 국제 투어를 하고 있다. 시드니에 있는 오페라하우스The Sydney Opera House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이자 공연장으로 매년 약 300여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고, 멜버른에 있는 국립 발레 앙상블은 1961년 세워진 호주 발레단으로 매년 185명의 고전 무용수와 현대 무용수들이 호주 각지를 돌며 순회 연주를 하고 있다. 

 


스포츠는 호주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며, 야외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후의 영향을 받고 있다. 120개의 국립 스포츠 단체와 수천 개의 지역 및 주 체육 조직이 있는 호주에서는 약 650만 명의 국민들이 스포츠 단체에 등록되어 있고, 15세 이상의 호주인 가운데 23.5%가 규칙적으로 조직적인 체육 활동을 즐긴다. 호주인들은 한국에서는 생소한 스포츠인 럭비와 크리켓, 그리고 럭비와 축구의 중간 형태인 ‘호주축구(Australian rules football)’에 뜨거운 관심을 보인다. 호주는 1956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으며,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호주오픈테니스선수권대회는 매년 1월 멜버른에서 개최되는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중 하나로 호주에서 가장 외국인들이 많이 참관하는 스포츠 행사이기도 하다. 

 

현재 호주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이며 40% 이상이 한 가지 이상의 문화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어도 226개가 사용 중이며 영어 다음으로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광동어 그리고 아랍어가 많이 사용된다. 이처럼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은 음식에도 반영되어 호주에서 전세계 음식 대부분을 맛볼 수 있으며 예술적으로 융합된 퓨전 음식도 상당히 많다. 호주의 요리는 전통적으로 영국의 요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점차 비영국적인 주민이 이민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세계의 다양한 요리가 발달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 요리, 그리고 그리스, 이탈리아 등의 요리가 많이 퍼지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29. 18:09


미국의 역사

식민지 시대와 미국의 탄생





오늘날 미국의 역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 발견으로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유럽 지역에 소개된 이후, 16세기 유럽 각국은 남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게 되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Virginia주에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건설한 이후 1733년까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영토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캐나다, 5대호 및 미시시피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식민지들은 계속해서 이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고 경제도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남부에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이 세워지고 유럽, 카리브 해 제도, 아프리카 등과의 무역도 활발하였다. 남부 식민지에서 주로 재배한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은 유럽에서 수요가 많은 작물이었는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남부 농장들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를 구입하여 노동력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영국은 내전 및 명예혁명과 같은 국내의 혼란과 지리적 거리로 인하여 효과적 식민지 정책 집행에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지역의 식민지들은 영국 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았지만 18세기에 경제성장을 이루며 자치 확대의 욕구가 점차 커져갔는데 이를 억압하려는 영국 정부와의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식민지에 부과한 설탕조례Sugar Act(1764)와 인지조례Stamp Act(1765) 등 무리한 세금 정책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영국에서 수입되는 종이, 차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쉔드 법령Townshend Acts(1767)을 둘러싸고 영국과 식민지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5명의 보스턴 시민이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1770.3.5)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Lexington과 콘코드Concord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를 계기로 영국과 미 식민지 양자 간의 무력충돌로 발전하였으며, 1775년 5월에 소집된 식민지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버지니아Virginia주 출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전쟁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인들은 정식군대가 아닌 일종의 민병대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나, 과거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스파니아·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이 참전해 영국 진영에 서면서 영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결과로 드디어 1776 7 4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열린 3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 주의 대표들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기초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 공포하였는데 날이 후에 미국독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외국의 원조를 얻어 식민지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1783 9 3일에는 파리조약Treaties of Paris 체결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은 공식 종결이 되고 영국은 미국 13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미국은 강력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1787년 5월부터 9월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헌회의를 개최하였고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여 각주에 회부한 결과 13개의 주 중 9주가 비준을 완료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789년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1789년 4월 30일에는 독립 전쟁의 영웅인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듬해 수도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정해졌다가 1800년에는 워싱턴Washington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28. 23:16


미국의 영토와 자연환경






미국은 우리나라와는 지리적으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먼 나라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미국만큼 우리와 가까운 나라도 없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한국의 맹방이며 또 우리나라 교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이며 한국 학생들이 가장 유학을 많이 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국이 세계를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데 반감을 가지며 또 미국이 미국인들의 가치와 이념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강요한다고 비난한다. 심지어 남북한 간의 긴장상태도 그 태반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본다. 아마 이런 비난들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좋던 싫던 미국은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미국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미국을 객관적으로 한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U.S.A.)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서, 영토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유럽과 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통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대서양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태평양 지역, 즉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동쪽에는 2,000미터 높이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고도 4,000m 이상의 험준하고 큰 봉우리들이 많은 로키 산맥Rocky Mountains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로키산맥에는 유명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다. 두 산맥 사이에 펼쳐진 대평원 지역에는 광대한 농경지가 존재하여 기계화 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영토가 크다보니 서부에는 사막Desert도 존재하는데,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도 네바다 주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기후 역시 다양하다. 중북부와 동부, 오대호 부근은 겨울에는 북극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대륙성 기후인데 비해 서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지중해 지역처럼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겨울에도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작물도 지중해지역처럼 오렌지와 포도를 많이 재배한다.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기후가 좋아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주는 플로리다Florida이다. 햇볕비치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별명이 ‘선샤인 스테이트sunshine state’이다. 플로리다 반도 남부에는 아열대기후가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열대식물들이 자라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지역은 온난한 기후로 인해 살기가 좋지만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해 있어 지진地震이 잦은 편이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의 많은 건물들을 파괴한 1906년의 지진(진도 7.8)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지진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자연재해로는 카리브 해 연안에서 발생, 멕시코 만으로 상륙하여 동부 연안을 휩쓰는 열대성 저기압 허리케인Hurricane과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빈발하는 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있다.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발생하여 집과 자동차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돌풍인데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강력한 뇌우를 동반하는 토네이도는 허리케인과는 달리 발생과 진행방향의 예측이 쉽지 않다. 최근 많은 피해를 남긴 허리케인으로는 2005년의 카트리나Katrina를 들 수 있는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남부의 뉴올리언스 시의 태반을 물에 잠기게 만들고 2,500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강은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이다. 그 이름 자체가 큰 강이라는 뜻이다. 오대호 근처의 미네소타 주에서 발원하여 미국의 중부 평원지대를 구불구불 만곡하여 멕시코 만으로 흘러가는데 길이가 3,700km에 달한다. 지나는 주들이 31개에 달하며 오하이오 강Ohio River, 미주리 강Missouri River, 아칸소 강Arkansas River, 테네시 강Tennessee River, 일리노이 강Illinois River 등 주 이름의 원천이 된 많은 지류를 갖고 있다. 미시시피 강은 철도시대 이전에는 증기선을 통한 중요한 내륙교통로였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의 무대가 바로 이 미시시피강이다. 미시시피 강에는 몇몇 지역에 얕은 여울이 있어 항해가 어렵지만 연방정부는 운하와 우회수로를 건설하여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대호의 하나인 미시간 호와 연결하는 운하(1848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도 건설하였다. 19세기 중엽 철도시대에는 미국에서 철도건설 붐이 불면서 많은 철도가 놓여 졌으나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광대한 자동차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28. 14:31



오스트레일리아의 종교적 성향







호주는 한마디로 국교가 없는 나라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이전에 토착민들의 애니미즘적 신앙은 천년간 지속되었다. 본토의 애버리진의 영성은 꿈꾸는 시간과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땅에 대한 귀속감을 매우 강조한다. 이런 내용의 설화는 애버리진의 법과 관습에 남아 있다. 


그들의 예술, 설화, 춤은 이러한 영성적인 전통을 묘사하고 있다. 호주와 뉴기니아 사이의 섬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우 영성과 관습들은 그들의 멜라네시아적 유래와 섬에 대한 귀속성을 말해준다. 1996년의 호주 센서스에 의하면, 전통적인 애버리진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은 7000명 이상이다. 영국의 함선이 호주에 도착한 1788년 이래, 기독교는 호주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공식 휴일이 되었고, 호주 도시들의 스카이라인은 교회의 첨탑이 장식하게 되었다. 교회는 교육, 건강, 복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있고, 가톨릭 교육 시스템은 가장 큰 비정규 교육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호주인의 종교적 성향을 살펴보면,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 중 67%를 차지하며 무종교가 26%, 기타(불교ㆍ이슬람교ㆍ힌두교ㆍ유대교 등)가 7% 정도인데, 무종교인의 수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비영리적인 한 독일 싱크 탱크인 베르텔스만Bertelsmann의 보고에 의하면, “호주는 서방 세계 가운데 종교심이 가장 박약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4인의 호주인 가운데 3인은 종교를 거의 믿지 않거나 종교가 삶에서 거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답한다.”고 한다. 


2009년 1718 명의 호주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 연구에 의하면 호주에서 매달 종교 봉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1993년 23%에서 2009년 16%로 감소했으며, 1993년 15~29세 응답자의 60%가 기독교인과 일치했으나 2009년에는 33%로 대폭 감소했다. 호주인이 급격하게 종교의 영향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8. 18:55


천지대세를 알아야 산다





천지대세 만유의 생명체라 하는 것은 대자연 섭리 속에서 왔다가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늙기 싫고 죽기 싫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섭리가 성숙됨에 따라서 만유의 생명체라 하는 것은 왔다 가는 것이고 그에 따라 역사도 조성되는 것이다. 

지구년이 초목농사를 짓는 것과 같이 우주년은 사람농사를 짓는다. 우주에서 사람농사를 짓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은 바로 여름과 가을이 바꿔지는 하추교역기이다. 지구년 초목농사를 지을 때에도 가을철에 열매를 맺어놓고 겨울에 폐장을 하지 않는가. 그걸 아까 내가 개구벽두에 묶어서 결론부터 얘기한다고 한 것이다.천지대세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고 열매를 여무는 법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한마디로 아주 다 하신 것이다. “가을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고 열매를 여무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생사를 판단하는 법이다.” 알캥이를 여무느냐 아니면 빈 쭉정이, 그냥 허탕 치고 말아버리느냐, 이때는 바로 그걸 매듭짓는 때다. 


그래서 이 세상 천지대세를 아는 사람은 천지의 살 기운이 붙어 있다. 우리 상제님 말씀으로 “지천하지세자(知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생기(有天下之生氣)하고” 천지대세천하의 대세를 아는 자는 천하의 살 기운이 붙어 있고, “암천하지세자(暗天下之勢者)는 유천하지사기(有天下之死氣)라.” 천하의 대세가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만유생명은 이 대자연 섭리 속에서 살다 간다. 헌데 만유의 생명 중에 오직 사람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 정기를 다 타고나서 천지만큼 머리가 밝다. 만유생명의 상징적인 생물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알고서 살다가 죽게 되어져 있는 것이다. 천지대세 사람은 사람인지라 하늘땅이 둥글어가는 이치를 알게끔 되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천지의 질서가 바꿔지지 않는 때라 하더라도 우주질서, 이 세상이 둥글어가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 된다. 


더군다나 지금은 천지 질서가 바꿔지는 환절기다. 여름과 가을이 바꿔지는 천지 변혁기다. 천지대세 이번에는 사람이기 때문에도 알아야겠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도,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도 하늘땅이 둥글어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 증산도는 하늘땅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인류 역사가 생긴 이후 처음으로 천지 이치가 어떻게 됐다 하는 것을,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전 인류에게 공포를 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6. 17:57




호주 전통 종교의 숭배 대상 


추룽가Tjurunga







사람과 땅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호주 원주민 문화는 영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들은 땅을 자신들의 어머니라고 하며, 따라서 그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땅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보통 호주의 전통 종교에서 신화적 존재이자 그 숭배 대상을 추룽가Tjurunga 혹은 추링가Churinga라고 부른다. 대개 나무나 돌로 만들며, 그것을 그러한 존재의 상징 혹은 현시顯示로 삼는다. 아란다족의 용어인 추룽가는 특정 의식儀式, 돌과 나무로 만든 물건, 끈을 묶어 소리를 내는 판자, 땅에 그린 그림, 고분, 의식용 장대와 문장紋章, 머리의 쓰개, 신성한 노래 전통적으로 성화하거나 금기시하는 비밀스럽고 신성한 사물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납작한 타원형으로 다듬은 신성한 무늬를 새긴 돌이나 신화적인 의미를 가지는 복잡한 형태의 무늬를 새긴 나무판자를 말한다. 

 

대부분의 추룽가는 남자들의 비밀스럽고 신성한 의식에 사용되었다. 여자들의 의식에서도 작은 물건들이 사용되었으며, 더욱 작은 물건은 남자들의 사랑의 주술에 사용되었다. 모든 사람은 추룽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 입문식 때 청년은 자기가 사는 지방의 의식과 추룽가에게 소개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추룽가와 함께 지내는 법을 전수받는다. 죽을 때 추룽가는 시체와 함께 묻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이 추룽가를 다시 찾는다고 한다. 

 

추룽가는 본질적으로 그들과 연관된 지역의 전통적인 집단 구성원들의 불멸성을 나타낸다. 그들은 모두 생명의 연속성과 영혼의 불멸을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과 신화적인 시간, 사람과 위대한 존재들, 일상의 물질적인 면과 인간의 영적 유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의 상징이자 표현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7. 6. 17:55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







한국과 호주의 교류는 1884년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양국의 관계는 호주가 1947년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6·25 참전함으로써 매우 긴밀해졌다


1961 양국의 수교 이래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범세계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정치, 외교 분야에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한 실질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양국은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양국의 번영에 직결되어 있다는 기본 인식 아래 역내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미국의 지역적 역할을 지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공히 통상국가이면서 상호 보완적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태지역의 중견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제반 문제에 공동보조를 취할 있는 유사성이 강하다

양국간의 상호 보완성과 유사성을 근간으로 양자관계 뿐만 아니라 지역 세계적 차원에서 안보·군축·경제·통상분야의 협력을 공고히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호주는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와 남북 대화 촉진, 1953년의 휴전협정을 대신할 영구적 평화 협정 체결을 위한 강대국들의 움직임에 지지를 보내왔다. 



이를 위해 2000년 5월에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복원, KEDO(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에 2,190만 호주 달러를 지원했다. 또 기술 원조와 인도주의 차원에서 6,000만 호주 달러를 제공하기도 했다. 2002년 5월 호주 수도인 캔버라에 북한 대사관이 개설됐지만, 2008년 1월 재정난을 이유로 북한은 캔버라 주재 대사관을 폐쇄했다. 


그러다가 2012년 말 호주 외무부의 제안으로 대사관 재개설에 대한 협의가 진행이 되었으나, 북한이 3차 핵실험(2013.2.12)을 강행하자 이에 대한 제재의 일환으로 호주 정부는 북한 대사관 재개설 승인 입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한국과 호주 양국은 인적 교류 촉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교육·문화·관광·미디어 교류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현재 호주에는 15 이상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호주인 수가 증가하고 있다. 2012 기준으로 한국인 호주 방문자는 19 , 호주인 한국 방문자는 12 명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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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5. 20:33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자본주의 발달과 국가를 향한 여정

 


 

1851년 호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골드러시gold rush의 물결이 일어났다. 호주 멜버른 북쪽 빅토리아라는 곳에서 금이 발견되었는데, 이 금을 채광하려는 사람들이 대거 이곳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골드러시로 인한 경제호황으로 중국, 유럽, 미국 등지로부터 이민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1850년의 호주 인구가 40만명이었으나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와 장사꾼도 모여들어 호주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인 영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건설붐과 교통 및 체신, 각종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는 한편 노동운동도 발달하였다. 



 

1854년 9월에 일어난 ‘유레카 혁명’ 사태는 호주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노동운동의 발전을 촉진한 광부들의 소요 사건이었다. 일명 ‘유레카 방책 봉기’라고도 불리우는 이 사건은 호주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무장 폭동으로 기록된 사건으로서, 금광 지역에 몰려든 채굴업자와 광부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폭력적 징세절차 등 가혹한 압제 때문에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1854년 12월 영국군과 지방 경찰력에 의해 의해 유혈진압이 되었으나, 식민지 전역에 미칠 파장과 봉기의 확산으로 인한 금광의 상실을 우려한 영국의 유화책으로 인해 자치와 민주적 개혁 등 요구 사항들이 대부분 수용되는 진전을 이루었다. 경제적 불만에 대한 광부들의 희생이 호주의 기반을 닦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자유롭게 호주로 들어왔고 고유한 국가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23년 뉴사우스웨일즈가 제한된 입법권을 취득한 이래 식민지 각 지역은 서서히 자치체제를 확립하였다. 1855년과 1859년 사이에 영국은 호주 내 각 식민지의 헌법 및 자치정부를 승인함으로써 개별적인 식민지들은 책임있는 정부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대영제국으로부터 한층 더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은 우선 외교정책과 국방, 무역을 관장했고, 식민지에서는 개별국가들의 결합을 위한 기획이 시작되었다. 1887년 골드러쉬에 의한 노동력 수요 충족을 위해 저임금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 유입됨으로써 임금 경쟁이 초래되었으며, 이때부터 백인 노동자들은 유색 인종에 대한 배척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백호주의白濠主義(White Australia Policy, 백인 우선주의 백인 사회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정책) 기원이다. 결국 1888년에 중국인 이민의 제한이, 1896년에는 모든 유색인종의 배척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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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5. 20:28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유럽인의 이주 이전

호주에는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이동해 온 것으로 추측되는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s이 5~6만년 전부터 살기 시작했다. 약 6,000년 전 뉴기니아에 이르는 육로가 범람하기까지 뉴기니아와 북오스트레일리아 사이에는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약 4,200년 전에는 인디아 본토인들의 이주와 이로 인한 애버리진들과의 혼혈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갑자기 식물 가공과 석기 제조가 행해졌고, 오스트레일리아 들개Dingo가 등장한다. 약 1,000년 전에는 토레스해협의 여러 섬들에 멜라네시아의 항해자들이 이주했으며, 이로 인해 그들과 북오스트레일리아인들 사이에 교류가 일어났다. 중국과 인도의 상인 및 인도네시아의 어부들은 아마도 수세기간 호주 해안을 상륙하거나 지나쳤을 것이다. 이들의 문화적 영향은 애버리진의 암각화나 나무껍질 그림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유럽인들에 의한 발견

호주 대륙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유럽의 식자들은 ‘호주 대륙’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이론에 의하면 북극의 육지 무게에 해당하는 만큼의 육지가 남반구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00년대 이전에는 호주 원주민과 인도네시아, 토레스해협 원주민들이 무역활동을 벌였으며, 16세기에는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특히 네덜란드의 항해가들이 호주의 해안에 도달하거나 육지에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06년에는 스페인인 토레스Luis Vaez de Torres가 토레스해협을 항해하였고, 같은 해에 네덜란드인인 윌리엄 얀츠W. Jansz가 케이프 요크Cape York 반도를 발견했다. 1616년에는 덕 하톡D. Hartog이 호주 서부 해안에서 섬을 발견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덕 하톡이라 불렀다. 1619년에는 프리드릭 핫맨F. de Haoutman이 연구차 이 해안을 따라가다가 그의 이름을 딴 핫맨 아브롤오스를 발견했다. 하톡과 마찬가지로 후일 1696년 플라밍W. de Vlaminh도 호주 대륙의 최서단을 발견했다. 

 


네덜란드의 항해가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발견을 결정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서부지역은 메마르고 생산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탐험해볼 흥미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1642년에야 비로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지역에서 지리학적 관계를 탐험하기로 결정했다. 네덜란드인 타스만Abel Tasman은 동쪽을 향해 나아갔는데, 온전한 호주 대륙은 아니지만 타스마니엔 섬을 발견했다. 1688년에는 항해가 댐피어William Dampier가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호주 북부 해안 피쵸리 강가에 있는 킹 사운드 근처에 다다랐고, 1699년에는 호주 최서단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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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5. 20:26



천연자원과 자연환경의 천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선진국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이다. 또한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5위이며, 군비 지출은 세계 13위이다. 인력개발 지수가 세계 2위이고, 삶의 질, 건강, 교육, 경제적 자유, 시민 자유와 정치적 권리 등과 같은 국가 성취도가 상위권에 속한다. 호주라고도 불리는 이 나라는 G20에 속하는 유엔 회원국, 영연방국, OECD,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기구, 태평양 도서국 포럼의 회원국이다. 최근에는 한국 정부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믿음직한 우방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백인이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지 불과 200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 다방면의 급성장을 이룩한 이 나라의 면모에 대해서 알아보자.

 

 


오스트레일리아
자연환경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라는 나라 이름은 ‘Terra Australis Incognita’(남쪽의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은 약 774만 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세계 6위의 대국이다. 이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본토, 그리고 태즈메이니아Tasmania 섬을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호주濠洲’로도 불리는 이 대륙은 남북 3,700, 동서 4,000, 해안길이 36,000 달하는데, 서부·중부·동부로 나뉜다. 남쪽에는 남극대륙, 북쪽에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파푸아뉴기니, 북동쪽에는 솔로몬제도와 바누아투, 뉴칼레도니아, 남동쪽에는 뉴질랜드가 위치한다. 서부의 서호주평원은 호주 면적의 60% 차지한다. 이곳에 대규모 모래사막인 그레이트 빅토리아Great Victoria 사막, 그레이트 샌디Great Sandy 사막이 있다. 중앙에는 맥도넬MacDonnell 산맥이 있고, 태반이 평원으로서 기후는 건조하다. 동부 고지는 습곡산맥이 형성한 완만한 지형인데, 고지도 300~1,000m정도에 불과하다. 고지는 준평원이지만 동쪽 가장자리는 하천이 깊은 계곡을 이룬다. 

 


동남부에 치우친 오스트레일리아 알프스Australian Alps 산맥은 주봉 코지어스코 산이 해발 2,234m로서 이 대륙에서 눈이 내리는 유일한 지역으로 수자원 개발이 이루어진다. 중앙 저지는 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지역으로 에어 호수 주위에는 해수면 아래의 저지도 있다. 그리고 이 대륙에서 가장 큰 머리, 달링 강Darling River이 흐른다. 중앙저지의 중앙부는 달링강을 비롯해 대부분의 하천이 간헐천이다. 따라서 지하 깊숙이 삼투된 물을 찬정이라는 굴착 우물로 만들어 끌어올려 사용한다. 대체로 중서부는 사막이기 때문에 건조하다. 남회귀선이 국토의 중앙을 지나므로 국토의 40%가 열대권에 속하여 덥다. 동북연안은 무역풍이 불어 열대우림기후다. 동남부는 온대 해양성기후이므로 쾌적하다. 남부와 서남부지역은 겨울비가 내리는 지중해성기후다. 북부지방은 사바나기후이며, 내륙으로 감에 따라 스텝기후를 보여준다. 유카라와 아카시아가 대표적인 수종이며, 캥거루와 코알라, 오리너구리, 가시두더지, 원벳, 듀공, 포섬 등의 특이한 동물들이 서식한다. 선사시대부터 격리되어 있어서 동물계는 세계의 다른 동물과 다른 계통으로 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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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2. 22:26



우크라이나 사태의 이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사태는 그 부분만 국한해 볼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전반적인 정국을 함께 살펴봐야 하는 복합적인 문제다. 우크라이나는 많은 유럽의 국가들처럼 현재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와중에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권력 부패상이 드러나면서 우크라이나 정국은 반정부 시위와 이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정권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당면한 디폴트(default, 국가 대외채무불이행)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대외적인 경제지원이 필요했는데, 서방측인 EU와 나토에 가입하느냐 아니면 러시아와 손을 잡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야누코비치는 미온적인 지원을 약속한 서방측보다도 현실적인 지원을 약속한 친 러시아 정책으로 선회를 했다. 


하지만 1932년 당시 소련의 스탈린이 집단농장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식량을 징발하는 인위적인 기근 정책을 실시해서 최소 8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을 굶어 죽게 만든 수탈과 원한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데다가 대통령이 민족적 감정이 개입된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자 국민들이 극렬하게 저항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영토인 크림반도는 본래 러시아 영토였으나 1920년대 소련이 사회주의 연방에 우크라이나를 강제 편입시키면서 그 불만을 달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넘겨준 지역이다. 이처럼 언어와 인종이 다르고 2/3가 러시아계 주민인 크림반도 지역을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자치공화국 형태로 묶어두면서 관리를 해 왔는데, 친러시아 입장에 선 대통령이 축출되는 정국의 혼란 속에 최근 크림지역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선택하면서 분리 독립의 흐름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우크라이나 동부 주 곳의 친러 분리주의 세력도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현재 동부 도네츠크, 루간스크, 하리코프 각각 독립 공화국을 선포한 상태이고,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강력 대응을 천명하면서 도네츠크 주에서 친러시위대와 교전을 벌이는 사태가 확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크림사태의 파장

이번 크림사태는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적지 않다. 1991년 알마아타 선언Alma Ata Declaration을 통해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The Budapest Memorandum를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핵무기를 제거하는 대신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의 보안과 안보를 약속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1997년 크림반도 항구에 러시아의 흑해함대Black Sea Fleet의 주둔을 허가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는 특히 대규모 러시아군의 병력이동은 우크라이나의 허가 아래 가능하도록 되어있고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병력 규모를 늘릴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크림반도 합병 과정에서 보았듯이 러시아는 협정에 구애받지 않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결과적으로 약속을 믿고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가 현실에 있어서는 위축된 입장에서 힘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비핵화’를 화두로 삼고 있는 한반도 정세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목격한 북한이 핵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원하고 있지만 강대국의 이권과 힘의 논리가 어떤 결과를 낳느냐를 보여준 이번 사태를 통해 비핵화는 더욱 어려운 난제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는 것이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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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2. 22:24



크림사태와 한반도 정세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지난 2014년 3월 3일 러시아가 인접국 우크라이나의 크림(크리미아)반도 전역을 장악한 뒤 주민투표 등의 절차를 거쳐 3월 21일에 러시아-크림공화국 합병을 확정짓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2013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정권에 반발하는 시민 저항이 일어나 친러시아 세력과 친서방 세력 간에 정치 투쟁이 벌어진 혼란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 사태로 인해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대통령 야누코비치가 국민에 의해 축출되어 러시아로 도피하는 국면을 맞았고, 내전의 위기까지 거론되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우크라이나 남쪽으로 흑해를 향해 돌출한 ‘크림반도’ 내부에서 우크라이나로부터 분리해 독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러시아가 즉각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크림반도에 군대를 투입해 장악하고 일사천리로 합병을 확정해버린 것이다.

 

크림반도 합병의 전략적 이유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진입해 합병을 강행한 표면적인 명분은 크림반도 내의 다수를 차지하는 친러시아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면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합병을 강행한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크림반도가 러시아 흑해함대 주둔지로서 세바스트로폴이라는 부동항不凍港이 있어서 전략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주변의 국가들을 친서방국으로 포섭해 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크림지역이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유럽에 수출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많은 지하자원을 보유한 지역이라는 점도 이곳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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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7. 01:29



한국과 아프가니스탄의 관계






아프가니스탄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1973년 12월에 한국과 아프간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5년 한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1978년 9월 아프간에 좌경 성향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 정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공관을 폐쇄했다. 그러다가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과도정부가 수립되면서 2002년 1월에 양국의 외교관계가 재개되었고 그 해 9월에는 주아프간 한국대사관이 재개설되었으며, 동년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아프간이 참가하기도 했다. 2004년 1월에는 주한 아프가니스탄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아프간에 체류중인 교민은 2013년 현재 86명이며,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인 아프간 방문자는 379명, 아프간인 한국 방문자는 1,008명을 기록하고 있다. 양국간 교역은 1.4억 달러(2012년 기준, 수입은 없고 수출만 1.4억 달러)이며, 대아프간 투자도 2012년까지 58만 달러 정도에 그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등으로 많은 상처를 입은 탓에 국가적인 재건 지원 사업이 필요한 나라이다. 한국은 2002년 2월 아프간에 최초로 공병지원(다산 부대)과 의무지원(동의 부대)의 병력을 파견하였다가 파병기한이 연장되지 않아 2007년 12월 철수하였다. 2007년은 아프간에 선교활동을 간 한국 교회 선교자들의 피랍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2008년 6월에는 카불 북방 60km 지역에 소재한 바그람Bagram 기지에서 재건사업(병원 운영)을 개시하였으며, 2010년 7월에는 오쉬노Ashena(현지어로 ‘동료’, ‘친구’의 의미를 지녔다고 하여 붙인 애칭) 부대가 재파병되어 파르완Parwan주에서 독자적인 PRT 활동을 시작하였다. ‘PRT’란 외교관, 군인, 재건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아프가니스탄에 국제안보지원군(ISAF) 소속으로 활동 중인 각국의 지역재건팀(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2011년 1월에 독자 PRT기지인 차리카르Charikar 기지에 입주하였으며, 2012년 2월에는 차리카르 기지 주요 재건시설을 개소하였다. 이어 2012년 12월에 차리카르 기지를 아프간 정부로 이양하였지만, 바그람 기지 재건사업은 지속하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과 북한은 1973년 12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아프간의 공산 정권이 붕괴된 후 1993년부터는 사실상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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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7. 01:27



아프가니스탄의 사회 문화적 특징







전통적인 아프간 사회는 험악한 산악과 사막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종족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며, 집단주의보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아프간의 개인주의는 단순히 개인중심주의가 아니라 가족과 부족을 강조하는 특성을 띠고 있다. 

 

특히 파슈툰족은 아프간의 지배적인 종족이다. 이들 종족은 약 200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해 왔다. 파슈툰의 문화적 특성은 전통적으로 용기, 활력, 호전성을 강조해 왔다. 자신들의 문화적 유사성 및 동질성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투쟁도 불사한다. 

 

파슈툰족은 강력한 부계사회와 대가족제를 유지하고 있다. 부족의 혈통을 종교나 사상적 요소보다 중시한다. 따라서 종족수호를 위한 충성심, 협동심, 희생과 봉사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파슈툰족 사회에서 개인은 파슈툰왈라Pashtunwali라고 불리는 기사도 규범(일종의 불문법)을 엄격히 추종한다. 이 불문법의 주요 골자는 바달Badal(복수), 멜마스티아Melmastia(환대), 나나와티Nanawati(보호)이다. 이중에서 특히 바달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되어 있다. 직계가족의 복수는 그 마을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의 문제로 확대된다. 

 

파슈툰족 사회의 유일한 통치기구는 지르가Jirga(부족장회의)이다. 지르가는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오면서 관습적으로 제도화되었다. 전쟁이나 평화와 같은 중요한 문제는 모두 이 지르가에서 논의되어 결정된다.

 

파슈툰족의 오래된 집권은 다른 종족과의 대립을 유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비파슈툰족은 하자리족ㆍ우주베크족ㆍ타지크족 등이다.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이 대립은 아프가니스탄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8세기 중엽 아흐마드 샤가 파슈툰족 중심의 아프간 왕조를 건설하였을 때 비파슈툰족은 자신들의 권리가 박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파슈툰족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비파슈툰족은 ‘파슈툰’의 동의어인 아프간이라는 단어가 국가적 시민권으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이와 같은 종족적 소외감은 아프간 단일국가 건설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파슈툰족과 비파슈툰족과의 갈등은 근친결혼과 사회경제적 이동이 강하게 나타나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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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7. 01:25



아프가니스탄의 인종, 언어와 종교








아프가니스탄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파슈툰Pashtun족이다. 타지크족ㆍ우즈베크인ㆍ하자라인이 다음을 차지한다. 파슈툰족은 주로 남부와 동부 지역에 살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착생활을 한다. 타지크족들은 대부분 농민과 장인匠人들이며 주로 헤라트 북동부와 서부 주변지역에 산다. 우즈베크인들은 주로 농민으로 힌두쿠시 산맥 북쪽 지역에 살며, 하자라인들은 중부 산악지대에 살면서 유목을 하고 있다. 

 



공용어는 파슈토(파슈투)어와 페르시아어의 일종인 다리어로서 2가지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국민 가운데 약 절반이 다리어를 쓰며 약 1/3(주로 타지크족ㆍ하자라인ㆍ샤하르아이마크인ㆍ키질바시인)은 파슈토어를 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에서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ㆍ투르크멘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3/4가량이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약 1/4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이다.

 

인구는 전쟁과 난민들의 대대적인 탈출로 1980~1985년에 연간 약 2%씩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인구성장률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평균수준으로 다시 돌아왔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지만 인구의 45%가 15세 이하의 연령층에 집중되어 있다. 

 

인구의 4/5 이상이 시골에 살며 1/5 정도는 유목생활을 한다. 가장 큰 도시는 카불Kabul이며 다른 주요도시로는 칸다하르ㆍ헤라트ㆍ마자르에샤리프ㆍ잘랄라바드ㆍ콘두즈 등이 있다. 도시의 거주지 대부분은 카불에서 남서쪽으로 칸다하르, 북서쪽으로 헤라트, 북동쪽으로 마자르에샤리프를 거쳐 다시 남쪽 카불로 돌아올 수 있도록 건설된 주요 순환도로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다. 농촌 인구는 주로 강변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평균수명은 약 46세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결핵과 세균성ㆍ아메바성 이질의 발생률이 높으며 의료시설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성인의 문자해독률은 약 25%에 지나지 않는다. 1979년 정부에서 7~15세의 어린이를 위한 무료 의무 교육제도를 처음 실시했으나 초등학교 취학연령 어린이들 가운데 실제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1/3에 불과하다. 거듭된 전쟁으로 고등교육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매체는 철저히 정부의 통제를 받으면서 선전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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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4. 12:42

아프가니스탄의 경제




191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아프간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전근대적인 종교 관습, 공업기반의 결여 등으로 경제 전체가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전형적인 농업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79년 소련 침공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도입되었다. 이후 계속된 내전으로 피폐한 경제기반조차 파괴되었고 경제활동에 필요한 인력 및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면서 아프간 경제는 지속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다. 


2001년 말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아프간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국제사회의 원조 및 지원에 힘입어 2007년까지 연평균 11.9%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의 밑바탕에는 농업분야를 중심으로 건설, 무역, 최근에는 무선통신 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GNP의 2/3는 농업이, 나머지는 광업·제조업·공공사업 부문과 교역이 차지하며, 주요 교역국으로는 파키스탄, 인도, 미국, 타직 등을 있다. 또한 아프간은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국이다.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의 생산 조건이 아프간의 건조한 기후와 맞아 떨어지고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라서 적발이 힘들며 전쟁으로 인한 치안 부재 상태로 인해 아프간은 완벽한 아편생산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탈레반이 아편 생산을 금지하였지만, 미국과의 전쟁 이후 오히려 탈레반이 자금 확보를 위해 아편 생산을 독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IMF 관련 국제기구인 UN마약범죄사무국(UNODC) 등은 아편산업 규모가 아프간 전체 GDP 규모의 40% 달하고 있으며, 지하경제 규모가 전체 경제규모의 80~90%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아편산업 지하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아프간 정부는 경제 재건을 위해 필요한 세금 수입을 확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8 아프간 정부는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전략 정책 수립을 위해 IMF 공동으로 아프간 개발 종합전략(Afghanistan National Development Strategy)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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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4. 12:38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및 행정

 

 

정부와 의회 및 법원







아프간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의 수반이다.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는 2004년 10월 55.4%의 지지율을 얻어 임기 5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9년 8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치안 부재와 낮은 투표율, 각종 선거 부정들로 얼룩진 가운데 다시 당선되어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행정부의 내각은 대통령과 함께 국민 직선으로 선출되는 2명의 부통령과 대통령이 국회의 승인을 얻어 임명하는 25명의 각료로 구성된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 의회 결정비준권, 장관ㆍ판사ㆍ장교 임명동의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가지며, 내각은 대내외 정책을 집행하고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한다. 

 

입법부의 의회 형태는 양원제로, 원로회의로 불리는 상원Meshrano Jirga은 102명의 의원(임기 4년의 34석은 주선거에서, 임기 3년의 34석은 지방선거에서 선출되며 임기 5년의 나머지 34석은 대통령이 지명)으로 구성된다. 하원Wolesi Jirga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249석이 구성되고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3분의 2 이상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법안을 제출ㆍ수정ㆍ폐지할 수 있다. 양원의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 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정한다. 족장회의에서 유래된 로야지르가Loya Jirga는 독립, 국민 주권, 영토 통합, 헌법 개정, 대통령 탄핵 등을 의결하며 국회의원, 주 및 지방 정부장으로 구성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사법부는 한때 과도정권하에서 근본주의자 종교인들이 장악을 한 결과 케이블 텔레비전 금지령이나 여성 권리의 제약 등에 대해 판결하거나 헌법상의 권한을 무시하고 법원에 맡겨지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서 판결을 내리기도 하는 등의 파행을 겪었다. 하지만 현행 법원은 과거에 비해 더욱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전 법원보다는 기술 관료들이 더욱 주도권을 잡고 있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행정구역


아프가니스탄의 지방 행정구역은 34개 주Province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주는 영내에 주도를 두고 있다. 각 주는 10여개의 군District으로 나뉘며, 전국적으로 364개의 군이 존재하는데, 각 군은 보통 한 도시나 여러 마을로 되어 있다. 각 주에는 주의회Provincial Council가 구성되며, 아프간 전체 주의원 수는 420명이다. 주지사는 내무부에서 임명하고, 군수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아프가니스탄 중앙 정부의 대표자이며, 모든 행정 및 공무를 담당한다. 주의 경찰국장도 내무부에서 임명하는데, 주지자와 협력하여 주내 모든 도시나 군의 법 집행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수도 카불Kabul은 예외적으로 시장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임명하며, 카불 주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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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4. 12:31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및 행정

 

 

 

정국 개황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체제는 이슬람공화국이고,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이며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은 2014년 5월 22일 임기가 종료되는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는 여러 정치적 세력간의 다툼과 정변 및 권력 이동의 불안정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1919년 독립 이후 아프간은 왕정(1919), 공화정(1973), 공산 통치(1978), 소련의 침공(1979), 원리주의 신정(1996), 미국의 침공(2001) 등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의 정치 형태를 겪었다. 


무자헤딘이 나지불라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1992년 이전까지 아프간은 PDPA(인민민주당)가 주요 도시들을 지배했고, 농촌지역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중앙정부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아래서만 협력하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되자 옛 게릴라 반군, 종교지도자, 지식인 등으로 이루어진 폭넓은 이슬람교 단체 연합이 의장을 포함해 51명으로 구성된 통치회의를 카불에 결성하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뒤 미국이 탈레반 정권을 축출하고 나서 카르자이 과도정부가 구성된 후, 2003년 로야지르가Loya Jirga(아프간 종족 대표자 회의)에서 비준되고 2004년 1월에 채택된 신헌법에 의해 아프간은 3부(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로 이루어진 현재의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신헌법의 주요 내용은 이슬람 외 여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대통령 중심제 및 양원제 채택, 여성의 정치·사회 진출을 허용하는 등이었다. 

 

그러나 2014년 올해 차기 대통령 선거 등 주요 정치일정들에 당면해 있는 아프간의 정국은 선거준비 미비와 치안 불안 등의 요인들 때문에 예정대로 정치일정들이 치러질 지에 대해 일부에서 우려를 제기하고 있을 정도로 미래가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다. 



또한 아프간은 2009년 11월 국제 투명성 기구의 연간 부패 지수에서 세 계단이 떨어져서 소말리아 다음으로 부패가 심한 세계 2위의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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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3. 14:44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아프간-미국 전쟁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방부 건물이 비행기 테러(9.11테러)를 당했다. 그런데 이 테러의 주모자로 알려진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가 이끄는 국제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Al-Qaeda가 아프간의 탈레반들과 연합했으며 그들이 아프간에서 은신하며 신변을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미국은 이들의 신변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2001년 10월 7일, 아프가니스탄과 미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아프간 반군인 북부동맹도 공격을 강화하여 2001년 11월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이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2001년 11월 26일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4개 정파(로마그룹, 페샤와르그룹, 북부동맹, 키프로스그룹)가 참여해 파슈툰족 출신인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2005년 9월 개최된 아프간 총선 이후 2005년 12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개원되고 의회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미국에 패한 탈레반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카르자이 정권에 끈질기게 항거하고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현재 3 3000 규모의 미군을 아프간에 주둔시키고 있는데, 과거 소련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나토NATO 진영은 아프간 반군과의 오랜 소모전으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고 있는 상황이므로 2014년부터 치안권을 아프간 정부에 넘겨주고 서서히 철수할 전망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국제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시아파 교도들과 이란에 있는 180만 명의 난민을 이유로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일정 부분 관여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란 견제세력을 지원했다. 파키스탄에는 150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있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파슈툰족의 영원한 고향이므로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밖의 나라들은 아프가니스탄 군벌 세력이 양성하는 테러리스트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상당량 생산·거래되는 마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관련된 러시아ㆍ유럽연합(EU) 초강대국들이 미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한층 복잡한 상태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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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3. 14:41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탈레반-북부동맹 내전

하지만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장악한 무자헤딘은 강고한 통일체 조직이 아니라 여러 무장군벌과 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이를 극복하고 단일 조직체로 통합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 결국 무자헤딘 세력들간에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충돌하면서 아프간은 다시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Mullah Mohammed Omar가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파키스탄 서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공부하던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10월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서 탈레반Taliban이라는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랍바니 대통령과 다른 무자헤딘 세력들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을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원리주의Islamic fundamentalism를 표방했다. 탈레반의 무장투쟁은 정권과 군벌의 학정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에 따라 탈레반은 무장투쟁 2년 만인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랍바니 대통령을 축출해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극단적인 원리주의 독재 정치를 시작하여 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의무화하는가 하면 음주, 담배흡연, 면도, 영화를 금지하고 연날리기나 부즈카시같은 아프간의 전통놀이도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금지했으며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을 가했다. 또한 문화재 파괴에 민간인 학살, 법 위반자에 대한 손목절단과 잔인한 총살형 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포로 몰아갔다.

 

이에 탈레반 정권 성립 후 부르하누딘 랍바니 등 몇몇 무자헤딘 세력들이 북부 산악지역으로 달아나 결성한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이 탈레반 정권에 맞서 내전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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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3. 14:38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아프간-소련 전쟁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인접국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자국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결국 소련은 1979년 12월 27일 기존 정권 수호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 대통령을 사살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이 개시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에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해 체코 영사로 밀려난 바브라크 카르말Babrak Karmal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친소련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군 및 친소 카르말 정부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과 게릴라전 형태의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때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들은 소련군의 반군 진압작전을 피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도피했다.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소련은 막대한 전비를 쓰고 병력도 쏟아부었지만 전세를 회복하지 못하자 1985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군 병력 철수를 시작해 이듬해인 1989년 완료함으로써 아프간-소련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나지불라-무자헤딘 내전

그러나 카르말에 이어 집권한 친소 정권인 모하마드 나지불라Mohammad Najibullah 정권이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반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주요 도시들을 계속 지배하려 하자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 사이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주둔 소련군이 두고 간 무기들과 소련의 추가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우세했지만 무자헤딘이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강력한 게릴라전으로 저항하면서 나지불라 정부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무자헤딘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정부군의 공군기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에 대한 약탈과 강간, 방화 등이 자행되면서 나지불라 정부는 국민들의 민심마저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정부군은 패퇴를 반복했고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장병들이 늘어났으며,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지원이 끊기는 등 악재가 계속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무자헤딘은 점차 세력을 넓혀 카불을 제외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했고, 마침내 1992년 4월 25일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인 수도 카불의 점령에 성공하면서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고 14년(1978~1992)간 계속된 장기간의 내전은 무자헤딘측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200만 명이 사망했고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국토는 폐허가 되는 참화를 겪었다. 종전 후 이슬람 집권평의회 의장 모자데디는 5월 내각을 발족시키고, 6월 랍바니Burhanuddin Rabbani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12월 랍바니는 임기 2년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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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2. 11:58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공화국 수립과 공산독재정권의 등장

1919년 8월 독립하며 군주제를 유지하게 된 아프간의 집권자는 아마눌라Amanullah왕이었다. 그는 1880~1901년간 재위했던 라만Rahman왕의 셋째아들이다. 아마눌라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종교 및 부족세력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1929년에 즉위한 나디르 칸Nadir Khan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열었으나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Mohammad Zahir Shah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자히르는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며 신중하고 온건한 정부를 운영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도 했으나 1973년 7월 국왕이 외유를 하던 도중에 좌익 파르캄(‘깃발’이라는 뜻)당이 지원한 군사혁명이 성공하면서 모하마드 다우드 칸Mohammad Daoud Khan 전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다우드 칸은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총리가 되었고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 사회를 바꾸려고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외교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다우드 대통령은 친소련 정책을 펼치면서도 자국 내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을 탄압했고 나아가 이슬람주의자들까지 탄압하는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내의 불만을 키웠고 결국 1978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PDPA)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 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민주당 1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쿠데타로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운 인민민주당은 급진적인 공산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러한 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종교를 부정하면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소위 ‘무자헤딘(مجاهدين; mujaheddin)’이라 불리우는 이슬람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해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헤딘간의 충돌로 인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집권한 인민민주당 내부에서도 여러 파벌들의 분열상이 나타났고 1979년에는 당내 권력 투쟁에서 타라키가 실각되고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이 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내정간섭을 거부했고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 세력, 당내 정파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분열과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으며 공산 정권을 붕괴 위기로 몰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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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6. 11. 20:49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최초의 근대 통일국가 두라니 



1747년 이란장교 출신인 두라니Ahmad Shar Durrani는 칸다하르에 자치정부를 수립, ‘두라니Durrani 제국’을 건설하였다. 자신의 부족인 파슈툰족 사도자이 부족을 중심으로 통치했던 두라니는 동으로 인도 무굴제국을 격퇴하고 서로는 페르시아로부터 헤라를 탈환하는 등 아프간 영토를 공고화하고 가장 광대한 회교제국을 형성하였으므로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1772년 두라니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티무르 샤Timur Shah가 즉위하고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Kabul로 옮겼다. 혈족에 바탕을 둔 티무르의 통치는 비 파슈툰족 및 같은 파슈툰족의 길자이 부족으로부터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1818년 사도자이족 왕조가 멸망한 후에는 왕권쟁탈을 위한 내전이 아프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26년 두라니 부족 출신의 도스트Dost가 집권하였다. 도스트는 아들을 동부지역으로 파견하여 시크Sikh군을 격퇴한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스트는 시크족의 위협에 대한 방어를 위해 당시 인도에 주둔 중이던 아우크랜드Auckland 영국총리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는 영국이 아프간 분쟁에 개입하게 된 계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아프간 내전의 원인은 이데올로기적, 제도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의무와 충성심에 바탕을 둔 개별적인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 이는 아프간 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3차 아프간전쟁과 독립 군주국 시대

19세기 이후 아프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대로서 두 제국에 의한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즉 제국주의적 경쟁과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남쪽 부동항을 찾으려는 남하 정책의 거점이면서 자국의 영향권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앙아시아 내륙국들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방지하려고 했다. 반면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자국의 식민지인 인도까지 진출할 것이라고 판단, 이를 막기 위해서 인도로 넘어오는 길목인 아프가니스탄을 세 차례나 침공해 자국의 세력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것이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아프간-영국간의 전쟁(아프간 전쟁)이다. 

 



영국은 도스트Dost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Shir Ali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
1842)ㆍ제2(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 아브도르 라흐만Abdor Rahman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 하비브알라Habib Allah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제정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한 결과 제3차 아프간전쟁이 벌어졌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였으므로 영국은 더 이상 전쟁의 여력이 없었던 탓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그 해 8월 아프간과 영국간에 라왈핀디Rawalpindi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어 아프간은 독립 군주국 체제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6. 11. 13:15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고대 이민족 지배 시대

아프간의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규정되어진 측면이 크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 또는 동·서양의 주요 육상 연결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여행자, 유목민, 상인, 군인들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전략적인 지점에 위치한 아프간 지역은 그만큼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지금의 명칭으로 처음 이슬람 자료에 나타난 것은 982년이다. 하지만 그 이전 고대 역사부터 살펴보면 아프간 지역은 페르시아(고대 이란)와 인도 지역의 경계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인도와 그리스, 페르시아계 국가들에 의해 번갈아가며 지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BCE(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인도, 아프가니스탄까지 확대하였다. 이후 BCE 4세기에는 페르시아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대왕Alexandros the Great에게 아프가니스탄이 정복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아프간 일부 지역은 시리아에 거점을 둔 셀레우코스Seleukos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인도 북부에 근거를 둔 마우리아Maurya 제국에 넘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박트리아(지금의 ‘발흐’ 지방) 총독통치령에서는 박트리아Bactria 왕국이 생겨나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선보였다. BCE 2세기에는 인도 쿠샨Kushan 왕조의 카니슈카 왕(78~144경)에게 정복되었다. 이어 에프탈Ephtalite 왕조와 페르시아 사산Sasan 왕조를 거치면서 힌두교의 영향권에 들어섰으며, 870년경 사파르Saffarid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교가 뿌리내렸다. 1219년에는 칭기즈 칸의 몽골Mongol 제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몽골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독립된 제후국들로 분리되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인도 무굴Mughul 제국과 페르시아 사파비Safavid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6. 10. 12:47

전쟁과 상흔의 역사를 지닌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이다. 고대에는 ‘실크로드Silk Road(비단길)’의 중심지였지만 중앙아시아와 이란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1919년 독립 이후에도 여러 분쟁 요인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전 상태로 빠져드는 바람에 세계적인 극빈국이며 위험 요소가 많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는 다민족ㆍ다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고 과거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정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노종상 /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아프가니스탄 자연환경과 역사

아프가니스탄 자연환경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있는 내륙국이다. 동쪽으로는 파키스탄과 중국(일부), 서쪽으로는 이란, 북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투르크메니스탄 등 6개국과 각각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이 메마르고 기름지지 못한 산악지대 또는 사막지대이다. 북부와 남서부 평원지역 일부는 비교적 좋은 조건을 갖춘 농업지대. 전국토의 1/8가량을 차지하는 농경지(약 12.13%) 가운데 1/3에 관개시설이 되어 있으며 이 관개지역에서 전국 작물의 80% 이상이 생산된다. 

 

아프가니스탄은 3개의 지역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 주요 농업지역인 북부 평원지대, 리게스탄 사막을 비롯해 주로 사막과 반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서부 고원지대,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힌두쿠시 산맥을 포함해 히말라야 산맥의 연장지대인 중부 산악지대 등이 그것이다. 

 

북쪽의 여러 공화국들과 국경을 이루는 지역에는 아무다리야 강(고대에는 옥수스 강)이 흐르고 있다. 남서부 고원지대에는 길이 1,150km의 헬만드 강이 여러 차례의 관개공사를 거쳐 이 지역의 필요한 농업용수 대부분을 공급한다. 

 

아프간은 대륙성 기후로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다. 해발 1,770m의 고지에 위치한 수고 카불의 여름 최고기온은 35~40, 겨울 최저기온은 -5~0이지만 지방 산악지대의 겨울 최저는 -35, 사막지대의 여름 최고는 55 이른다. 중부 산악지대는 북극기후로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는 기후이다. 나머지 지역 역시 겨울에는 대부분 춥지만, 여름에는 더운 반건조 스텝 지대이거나 사막지대이다. 

 

강우량은 극히 적어 연평균 101~406㎜ 수준이다. 좀 구체적으로 남서부 사막지대의 75㎜ 미만에서부터 힌두쿠시 산맥의 1,270㎜ 이상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아프간에는 막대한 양의 고급 철광석을 비롯해 중요한 여러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채광과 수송상의 문제 때문에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북부 평원지역에 매장된 천연가스만이 유일하게 개발되어 상당량 생산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5. 29. 23:40



북두칠성




큰곰자리의 꼬리에 해당하는 α(두베)에서 η(알카이드)까지의 일곱 영어권에서는 국자(Big Dipper), 쟁기(Plough), 찰스의 마차(Charles' Wain)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일곱 개의 별이 국자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두斗자를 써서 북두칠성이라고 한다모두 2등내외의 밝은 별이고 길이가 20° 이르므로쉽게 식별할 있어 예로부터 항해가의 길잡이로서 친근한 별이다β(메라크)로부터 α로 직선을 그으면 별의 각거리의 다섯 배쯤 되는 곳에 북극성이 있어서 별을 지극성指極星이라고 한다북두칠성은 3월경에는 정오에 남중하고, 5,6월경에는 오후 8시쯤에 남중한다ζ(미자르) 맨눈으로 있는 쌍성으로 알려져 있으며,ε(알리오트) 변광성이다한국과 중국에서는 국자의 머리부터 차례로 천추天樞·천선天璇·천기天璣·천권天權·옥형玉衡·개양開陽·요광搖光으로 불렀으며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여겼다.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데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은 도교의 전래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그러나 최근에 고고학적인 유물의 발굴에 의해서 자생적인 칠성신앙에 대한 학계의 해석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조정에서 태일太一(우주의 본체 또는 만물의 근원) 제사지낼 칠성신에게 제사지냈고무속에서도 칠성신을 모신 것을 있다 칠성신이 어떠한 기능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일초太一醮(太一에 지내는 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점에서 기우의 대상신이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있다.

 

하늘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북극성은 천제天帝로북두칠성은 천제를 대변하는 별로 고대인들의 관념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들은 북두칠성이 순차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지상의 계절이 바뀌면서 만물이 태동생장성숙수장收藏 등의 변화를 반복한다고 믿었다그런가하면 북두칠성은 비를 내리는 신으로또는 인간의 수명과 출산을 관장하는 신으로 신앙되기도 했으며재물과 재능을 관장하는 신으로도 믿어져 풍농을 빌거나 입신출세할 있기를 비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5. 20. 22:02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후 인류를 위해 하신 일을 정의할 수 있는가?



-인존하느님이신 증산상제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를 위해 ‘서신사명西神司命’이라는 강세 목적을 집행하셨습니다. 서쪽 방향을 의미하는 ‘서西’에는 결실·통일을 뜻하는 ‘가을’의 의미도 있으므로, 서신西神은 곧 가을의 신, 가을에 오시는 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서신사명’은 가을우주를 여는 하느님의 결실 추수사명을 말합니다.

가을철에 농부가 결실할 열매를 가려내서 직접 추수를 하듯이,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극적인 대개벽의 시간대에는 우주의 주재자께서 직접 오셔서 우주의 결실인 인간 열매의 씨종자를 가려내어 추수하는 일을 맡아 행하시게 됩니다. 우주 가을철의 인존시대에는 사람이 천지대세를 바로잡게 되므로, 상제님께서 이 지상에 강세하여 인류구원의 서신사명을 맡아 집행하신 것입니다.

●상제님의 서신사명 [도전] 4:21:2(서신이 명을 맡아), 4:152:2(서신사명), 5:291:12(병겁과 서신사명)
●우주사의 인존시대 선언 [도전] 2:22:1~2(이제는 인존시대)


상제님의 서신사명과 천지공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상제님께서 1901년부터 9년간 집행하신 ‘천지공사天地公事’는 교화를 외친 선천 성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우주주재자의 인류구원 법방으로, 대개벽기를 맞아 인간을 널리 건져 구원하려는 상제님의 강세 목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역사 전개의 시간표, 이정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인류구원이라는 서신사명의 실현을 구체화하는 인간 역사 질서의 기틀이 곧 천지공사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오직 상제님께서 처음으로 짓는 일입니다.

●상제님의 천지공사 [도전] 5:1, 5:435(천지공사의 대의)
●천지공사의 도수를 정하심 [도전] 3:227:7(오직 내가 처음 짓는 일이니라)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존귀한 사명도 알고 있는가?

-상제님께서는 우리 인류를 위해 서신사명의 집행이라는 더할 나위없이 존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무한한 진리와 생명의 은혜에 대해 보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상제님의 서신사명에 보응하는 인간의 존귀한 사명은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천지 도수, 즉 천하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참 진리를 만나 천지의 일을 하는 일꾼으로 당당히 참여하는 것만이 진정한 구원을 받아 사는 길이고, 인생을 보람있고 의미있게 하는 일이며, 상제님의 큰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상제님의 진리를 통해서 삶의 목적과 해야 할 일을 올바로 찾는 것이 인생을 성공시키는 비결인 것입니다.

●인간의 천하사 참여 사명 [도전] 2:23(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도전] 2:119:3(어렵게 받아 난 몸으로)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5. 20. 22:00


상제님의 위격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삼신상제 [도전] 1:1:4
●우주의 주재(통치)자 [도전] 1:1:5
●삼계대권의 주재자 [도전] 2:16:2
●옥황상제 [도전] 2:16:3
●중통인의 도통주체 [도전] 2:22:4
●공자,석가,예수를 보내신 분 [도전] 2:40:6
●천지의 원주인 [도전] 5:18:5
●미륵부처님 [도전] 6:7:2
●천지공사의 도수 주체(나는예언자가 아니로다)[도전] 3:227:7

▶[핵심술어] 중통인의 [도전] 2:22:3 측주
▶[핵심술어] 도수 [도전] 2:74:2 측주
▶[핵심술어] 삼계대권 [도전] 2:11:4측주


역사속에서 찾을 수 있는 상제문화는?

-상제문화의 전통은 신교의 종주국인 우리 나라의 천제天祭문화 의식과 문헌 등에서 살펴볼 수 있고, 중국의 유적과 문헌에도 상제문화의 흔적이 있습니다.

[#●신교의 종주국 조선 
[도전] 1:1:6, 1편 후주(원전 111쪽)
■우리나라의 상제문화
①강화도 마리산(마니산)‘ 참성단’(사적 제46호)에서의 천제 봉행 / ②고구려, 백제, 신라 국왕들의 천제 기록(삼국사기) / ③‘원구단’천제 기록(고종 황제) / ④‘대한제국 애국가’ 원본 초기 가사에서의 상제 언급 / ⑤‘심청전’에 나오는 상제님의 심청이 구원 어명 / ⑥ 최제우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의 상제님 언급 등
■중국의 상제문화
①천단(천자가 상제께 제사) / ②영화 <마지막 황제>의 즉위시 천제 장면(昊天上帝之位) / ③하늘에는 샹띠(上帝) 땅에는 황띠(皇帝) / ④제출호진帝出乎震「( 주역」 설괘전 중 문왕팔괘 설명 부분)#}

상제님의 지상 강세는 어떻게 성사되었는가?

-상제님의 강세 예언: 각 종교와 성자, 예언가들이 말한 하느님 강세 메시지의 핵심을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교의 미륵불 강세 [도전] 1:2
●기독교의 아버지 하나님 강세 [도전] 1:3
●최수운의 상제님 강세 선포 [도전] 1:8
●김일부의 상제님 강세 예고 [도전] 1:9
●남사고의 예언(격암유록) [이것이 개벽이다(上)] 개정신판 83쪽
●노스 트라다무스의 예언 [이것이 개벽이다(上)] 개정신판 58쪽


-상제님 강세의 이유(배경): 상제님의 강세는 신도와 이법, 지리 및 인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요인들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중요한 핵심을 찾아 정리해 보세요.

●신도적 차원의 탄원 [도전] 2:30(이마두 대성사의 집단적인 신명계 탄원)
●지리적 강세의 이치 [도전] 1:5(주역 간艮방의 이치), 1:10(진인도통연계의 지맥 원리) / 지구의 혈穴 한반도의 지리(태상종도사님)
●인간계와의 인연 [도전] 1:7(진표율사의 구도), 2:36(조선의 신명 대접 전통 보답)
●한민족 존망 위기 구제 [도전] 1:1:7~8(한민족 역사왜곡 바로잡고 인간과 신명 구원)
●개벽 추살에서 인류 구원(우주이법적 강세 이유) [도전] 2:17(하추개벽기 상극의 화액을 다스려 인간을 구원)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5. 19. 20:31


가을개벽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섭리는 무엇인가?




-상제님께서는 우주의 열매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의 몸으로 탄강하셔서 인간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처방을 내리심으로써, 장차 다가올 대개벽을 극복하고 인간완성의 최종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구원의 틀을 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인존 상제님의 강세와 인간 구원 사명의 섭리를 ‘서신사명’이라 하고, 그 구원 사명의 집행 틀을 인간 역사로 구체화한 것이 ‘천지공사’입니다.


● 인존상제님의 서신사명
[도전] 4:21:2(서신이 명을 맡아), 4:152:2(서신사명), 5:291:12(병겁과 서신사명), 4:155:1~2(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
● 개벽기 인간 씨종자 구원
[도전] 8:21:2(씨종자라도 있어야)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