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에 해당되는 글 173건

  1. 2017.10.14 영국의 정치체재
  2. 2017.10.12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것
  3. 2017.10.11 프랑스 문화의 특성
  4. 2017.10.04 영국왕조 변천사 스튜어트, 하노버, 윈저 왕조의 계승
  5. 2017.10.03 영국의 플랜테저넷 왕조
  6. 2017.10.01 프랑스 카톡릭과 중국화교의 갈등
  7. 2017.09.29 프랑스혁명 종교개혁과 정교분리 과정
  8. 2017.09.28 프랑스문화의 정체성 카톨릭 문화
  9. 2017.09.27 영국의 노르만 왕조의 등장
  10. 2017.09.26 영국의 역사 시원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의유입
  11. 2017.09.25 영국과 유럽대륙과의 관계
  12. 2017.09.17 이슬람문화 라마단Ramadan
  13. 2017.09.15 영국에 연이은 IS테러
  14. 2017.09.14 지구촌 이상 기후로 몸살 지중해에선 폭염暴炎, 인도에서는 폭우暴雨 피해
  15. 2017.09.10 영국의 연합왕국의 형성과정
  16. 2017.09.09 영국명의 유래
  17. 2017.09.08 로마제국의 지배와 프랑크족의 등장
  18. 2017.09.07 프랑스의 별칭 엑사곤의 지정학적 위치
  19. 2017.09.06 골족에서 비롯된 프랑스 시원 역사
  20. 2017.08.24 대한민국과 아프리카 세네갈의 관계
  21. 2017.08.22 미국의 이슬람 테러전
  22. 2017.08.20 냉전체제와 미국의 번영
  23. 2017.08.19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24. 2017.08.18 아프리카 세네갈의 이슬람 문화
  25. 2017.08.17 아프리카 세네갈의 민족 및 언어
  26. 2017.08.16 아프리카 세네갈의 경제적 특성
  27. 2017.08.15 이스라엘의 건국
  28. 2017.08.14 이스라엘 시온주의Zionism 운동의 등장
  29. 2017.08.13 이스라엘의 시원민족과 국가형성
  30. 2017.08.10 아프리카 세네갈의 최근 정치상황
세계정보2017. 10. 14. 03:00






 

 

영국의 치체재

 




 

입헌군주국

영국은 현재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 원수 로 하는 군주국이며, 의회민주주의를 펼 치는 나라이다. 왕정과 의회정치가 절묘 하게 결합된 입헌군주국이다. 왕위 세습 을 원칙으로 하는 영국의 군주인 국왕은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215년 대헌장, 1628년의 권리청원, 1689 년의 권리장전으로 이어지는 왕권을 제한 하려던 역사 흔적은 왕권이 얼마나 강하 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부터 군주의 역할이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개혁되었다. 지금도 국왕은 국가를 상징 한다. 법적으로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 이고, 군의 최고 사령관이며, 국교인 성공 회의 수장이다. 그러나 왕은 군림하되 통 치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역할은 의례적일 뿐이다.


 


양원제하의 내각

나라의 실제 행정은 선거를 통해 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당이 집권당·하원 1당이 되고, 관례에 따라 국왕이 당수를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이루어진 . 영국 정부는 총리를 행정 수반으로 내각책임제이다.

영국 정부의 공식적 명칭은 ‘여왕 폐하 정 부’(Her Majesty’s Government)이다. 영국의 모든 공공기관은 여왕 정부를 위해 봉사한다. 그래서 경찰이나 소방서, 우체국은 물론 형무소 등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자나 문서를 보면 흔히 ‘HM’이라는 문 구를 볼 수 있다.


총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의무의 하나는 하 원 내 다수당의 지도자로서 하원에 정기 적으로 출석하여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것이다. 하원에서 여야가 코를 맞댈 정도 로 가까이하며 열띤 논쟁을 벌이는 모습 은 매우 인상적이다. 누가 금방 한 대 치기 라도 할 듯한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지만 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야당 자리와 여 당 자리는, 칼을 빼 들어도 상대방에 닿지 않을 거리를 두고 마주본다. 각 진영의 앞 에는 어떠한 싸움이 나도 서로 절대 넘지 말아야 할, 붉게 그어진 두 선이 암묵적으 로 폭력을 막는 듯하다.


초기에 영국 왕은 종교 지도자와 귀족으 로 구성된 협의회의 자문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것이 발전하여 이 협의회의 귀족들이 상원이 되고, 기사들은 하원이 되었다. 오늘날 영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 으로 이루어진 양원제이다.


상원은 귀족으로 구성된다. 상원에는 작위 가 후손에게 승계되는 귀족이 있는가 하 면, 총리가 제청하여 왕이 임명하되 후손 에게 승계되지 않는 귀족, 고등법원 판사 중 대법관으로 임명된 종신 귀족, 성직 귀 족 등 여러 귀족이 있다. 지난날 상원 의 원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의원직을 물려 받은 귀족들이었다. 그야말로 조상만 잘 두면 상원 의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상원 의원의 세 습제가 폐지되었고, 그리하여 세습 귀족 수가 크게 줄었다. 상원 의원의 수는 고정 되어있지 않는데, 2012년 12월 현재 총 759명이다.


5년 임기의 하원은 2010년에 소선거구제 직접선거로 선출된 650명의 의원들로 구 성되었다. 이들의 지역구를 보면 잉글랜드 533석, 웨일즈 40석, 스코틀랜드 59석, 그리고 북아일랜드가 18석이다. 사실상의 가장 강력한 권한은 이 하원에 있다. 하원 을 중심으로 상원이 인준하는 형식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2. 01:30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것

 

 





프랑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

 

첫째는 프랑스인들이 매일 먹는 빵인 바게트이다. 바게트는 막 대기 모양의 빵이다. 바게트는 밀가루와 물, 소금, 효모 외에는 따로 들어가는 것이 없는 지극히 단순한 빵이다. 화덕에서 구 워내는 이 빵은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식당에서 고기요리를 먹을 때에도 바게트를 잘라서 곁들여 먹고 샌드위 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먹는 네모난 식빵을 갖고 만드 는 것이 아니라 바게트 속에 치즈나 햄, 토마토 등을 넣어서 만 든다. 바게트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딱딱해져 먹기가 힘들 다. 갖 구운 바게트를 구입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은 아침부터 바 게트를 사러 동네 빵집에 들른 다. 식사에서 바게트가 중요한 음식이므로 동네 빵집은 프랑 스인들의 생활에서는 필수적인 존재이다.

 


둘째는 포도주다. 포도주를 즐 겨 마시는 것은 지중해 지역의 공통된 것인데 로마제국 시대 에 포도 재배와 포도주가 널리 퍼졌다. 포도주는 일조량이 적 은 북부 프랑스를 제외하면 프 랑스 도처에서 재배된다. 프랑 스 포도주는 두 종류로 나뉜 다. 서남부산 보르도 포도주는 떫은맛이 강한 짙은 색깔이고 프랑스 동부와 론강 유역에서 나는 부르고뉴 포도주는 떫은맛이 덜하고 색깔과 맛이 가볍 다. 식사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오랜 전통이며 미사의식에 서도 포도주는 필수품이다. 포도주를 증류하면 증류주인 코냑 이 된다. 코냑은 알콜 도수가 보통 40도 이상 되기 때문에 아 주 조금씩 마신다. 혀에 코냑을 살짝 올려 향을 음미하며 목으 로 넘기는데 우리나라 소주처럼 들이키다가는 정신이상자 취 급을 받기 십상이다. 포도주 외에도 지방마다 특산주가 더러 있는데 유명한 것이 프랑스 서북부의 노르망디 지방의 사과주 다. 사과주를 ‘시드르’라고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의 사이다도 여기서 온 말일 것이다. 알콜 도수가 약한 술이지만 이 시드르 를 증류하면 알콜 도수가 매우 높은 ‘칼바도스’가 된다(칼바도스는 노르망디 지방의 한 도의 이름이다).

 

셋째 프랑스 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으로는 치즈(불어로는 ‘프로마주’라 고 한다)가 있는데 지방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구린 냄새가 지독 한 치즈도 있고 겉에 파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어 있는 치즈도 있다. 치즈는 요리에 넣기도 하지만 정찬에서는 주된 요리 후 에 여러 종류의 치즈를 생으로 먹는다. 치즈는 포도주의 안주 로도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보르도 포도주에는 노르 망디산 카망베르 치즈가 제격이다.

 

넷째 프랑스인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페 문화이 다. 프랑스인들은 시간이 나면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신 문이나 책을 읽거나 담소를 하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한다. 날씨가 좋으면 바깥 테이블은 만석이 된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보내기를 좋아하는 데서도 나타나지만 프랑스인 들은 중소도시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파리에서 사는 것도 일자리 때문이지 대도시인 파리가 좋아서가 아니라고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1. 22:03






 

 

프랑스 문화의 특성

 

 

 

프랑스는 원주민인 켈트계 갈리아인, 로마인,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은 물론이고 이후 이탈리아인 등 수많은 민족들이 뒤 섞여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민족간의 갈등이 거 의 없고 사고방식 또한 다양한 가장 안정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켈트족(Celtes)으로부터 개인주의를, 로마인 으로부터 법과 질서를 사랑하는 마음을, 게르만족으로부터 건 축제조 재능을, 노르망족으로부터 진취적 기질을 이어받았다 고 말한다. 또한 풍부하고 다양한 국토와 천혜의 기후 아래 조 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갖게 된 점도 민족성 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인은 이러한 민족적 특성을 바탕으로 지성과 사고를 중 시하고 명석한 논리와 표현을 좋아하며,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정신을 선호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 만 이런 성향이 지나쳐서 정작 행동으로 옮길 때는 사고의 과 정에 집착하여 눈앞의 사실을 분석하는 측면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가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오히려 ‘원형原型(prototype)의 나라’이고 ‘양산量産의 나라가 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국가를 권력을 두뇌로 하는 유기체로서 이해하 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창조력을 소생시켜 헤쳐 나가야 할 ‘우리 프랑스’라는 관념을 강하게 갖 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인은 쇼비니즘(chauvinism, 배타적 애국심)이 있다거나 이상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추상적 관념이 법률주의로 정착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프랑스인은 현실적이고 검소하며, 인생을 즐기고 자녀교 육이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벼룩시장이 활성화되어 있 고, ‘전통’과 ‘낡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또한 타인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고 유럽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해 있으며, 예술적인 감각과 활동이 탁월하고 음식문화는 영국 다음으로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족에 대 한 의무가 약화되고 이혼율이 높은 편이며, 노령화 현상과 높 은 실업률, 공해, 주택부족, 사회계층 간의 신분 차로 인한 문 제가 증가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4. 01:00




 

 

영국왕조 변천사

스튜어트, 하노버, 윈저 왕조의 계승

 

 




자녀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를 사촌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에게 넘겼다. 제임스 6세는 처음으로 두 나라 를 통일하고 스코틀랜드계인 스튜어트 왕조 (1603~1649)를 연 제임스 1세가 되었다. 뒤이어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의 회와 왕 간의 내전 결과, 영국의회는 왕을 처형하여 왕가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 포하였다. 1660년 왕정복고 시기까지 공화 정을 이끈 것은 크롬웰이었다.

 

스튜어트 왕조의 부활(1660~1714) 시기 마지막 왕인 앤은 1707년 스코틀랜드, 웨일즈 의 회를 병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을 만 들었다. 앤은 후계자가 없이 죽었다. 앤의 유지를 받든 슈루즈버리 공작은 하노버 선 제후의 부인이자 제임스 1세의 손녀인 소 피아와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프로테스탄 트 자녀들이 왕위를 잇도록 하는 법을 선 포했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왕위는 독일 하노버 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조지 1세로부터 시작되는 하노버 왕조 (1714~1901)는 정치적으로 의회 민주주의 정 치를 처음으로 실현하였고, 식민지도 많이 개척하여 영국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던 때(1837~1901)에 영 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영국은 아편전쟁(1839~1842)으로 중국의 쇄국을 깼고, 1857년 인도의 세포 이 반란을 진압하여 인도를 직할지로 만들 었으며, 1856년부터 7년 전쟁을 통해 캐나 다를 점령하는 등 식민지 제국을 이룩하였 다.

 

한마디로 영국은 세계의 많은 나라를 정복한 제국이었고, 산업혁명을 통해 가장 잘 사는 국가였으며, 무역을 통해 엄청난 자본을 축적한 나라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왕이다.

 

1901년 하노버 왕가의 여왕 빅토리아가 세 상을 떠나자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 황혼 기인 59세에 에드워드 7세로 왕위에 올랐 다. 빅토리아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즉위 후 빅토리아의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의 성性 인 작센-코부르크-고타가 왕조명이 되었다.

 

이어 에드워드 7세의 차남인 조지 5세에게 왕권이 넘어갔는데, 그는 독일계 작위 칭호 를 버리고, 1917년에 왕궁 소재지의 이름 을 따라 왕조명을 윈저로 바꾸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함 으로써 영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 의 영국은 윈저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엘리 자베스 2세가 1952년부터, 우리의 전통으 로 말하면, 사람이 환갑을 맞은 긴 세월을 통치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3. 22:01




 

 

 

영국의

플랜테저넷 왕조

 






플랜테저넷 왕조의 에드워드 3세는 유럽 대륙을 지배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당 시 프랑스 왕실의 적통이 끊긴 것을 빌미 로 삼고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인 점을 내 세우며, 외척 혈통인 자신이 프랑스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잉글랜드가 브리튼 섬에 갇혀 있다가 대륙으로 날개를 활짝 펴려는 시도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을 벌였다. 당시 쓰러져가는 프랑스를 구한 것이 누구나 잘 아는 잔다르크였다.

 

리처드 2세를 끝으로 플랜테저넷 왕조가 끝났다. 플랜테저넷 가家의 분가로 플랜테 저넷 왕조 에드워드 3세의 손자 헨리 4세 가 랭카스터 왕조(1399~1471)를 개창했다. 헨 리 6세 때 요크 공 에드워드는 타우턴 전 투에서 승리하고, 자신을 에드워드 4세라 칭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요크 왕조(1471~1485) 의 첫 주인이 된 것이다.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3세가 조 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랭카스터 가계의 왕위 계승권자이며 프랑스에 망명 해 살고 있던 헨리 튜더가 가만히 있지 않 았다. 1485년 보스워스 평야에서 양군 사 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것은 붉은 장미 를 상징으로 하는 랭카스터 가문과 흰 장 미를 상징으로 하는 요크 가문이 사생결 단을 내리는 전투였다. 흔히 장미전쟁(1455- 1485)이라고 하는 전쟁을 두 가문은 30년 간 계속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헨리 튜더 가 리처드 3세를 죽임으로써 전쟁이 끝났 다. 헨리가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함으 로써 요크 왕조가 막을 내리고 튜더 왕조 (1485~1603)의 문이 열렸다.

 

튜더 왕조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영국의 기 틀은 헨리7세-헨리8세-에드워드6세-메 리1세-엘리자베스1세로 이어지는 이 튜더 왕가에 의해 잡혔다.

그 중 헨리 7세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를 만들었고, 헨리 8세는 절대군주제 의 확립 및 종교개 혁을 통해 성공회 를 국교로 만들었 다. 대륙의 거대한 문화적 끈인 교황 과 결별하여 성공 회를 만들어 스스 로 영국 국교의 수 장이 된 것이다.

 

뒤를 이어 에드워 드 6세와 큰 딸 메리 1세를 거치며 잉글랜 드는 다시 장미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하면서 그런 기우는 사라졌다. 그녀는 풀리지 않 을 것 같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 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강국이었던 스페 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는 등 대영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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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톡릭과

중국화교 갈등

 






 

1500년간 기독교 국가였던 프랑스에는 마을마다 교회요 동네 마다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당이 많다. 교회는 오랫동안 프랑스인들의 생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문화적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나면 교회에 출생신고를 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결혼식도 교회에서 올리고 죽으면 사망신고도 교회에 하였다. 이는 교회가 동네마다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 지만 지금은 이러한 호적기록은 모두 국가의 몫이 되었다.


프랑스의 무수한 교회당은 프랑스 문화유산 가운데서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의 주교좌 성당을 불어로는 ‘카테 드랄’이라고 하는데 주교가 앉는 의자를 의미하는 그리스 말 ‘카테드라’에서 온 말이다. 프랑스에는 이러한 대성당 외에도 수도원들이 곳곳에 있다. 원래 수도원은 인생을 오로지 신에게 바치고 평생을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집을 의 미한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찰과 같은 것이 수도원인데 프랑스 의 수도원들도 다양한 집단에 속해 있다. 수도원 건물들도 오 래된 것이 많지만 수도원들은 학문의 전수와 서적의 필사와 보 관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옛날에는 많은 학자와 교사들이 이들 가운데서 배출되었다.

 


회교의 신장에 따른 종교갈등

현재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예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우선 미사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는데 특히 젊 은이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사제가 되려는 성 직자 지망생들이 줄어 가톨릭 교회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반 대로 전통적으로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워온 회교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이 늘어 남에 따라 프랑스 종교지형에서 차지하는 회교의 비중은 날로 커지고 있다.


회교도들의 경우 기독교도들에 비해 세속화의 세 례를 훨씬 적게 받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그 힘이 갈수록 강해진다는 느낌을 준다. 기독교를 프랑스의 주요한 정 체성의 요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간혹 회교 사원(모스크) 건립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원주민들과 회교 이민자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최근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라는 극우정당의 지지율이 점 점 높아가는데 이것도 이러한 종교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여겨 진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29. 01:30






 

 

프랑스혁

종교개혁과 정교분리 과정

 






 

가톨릭을 국교로 강제하였던 프랑스에도 ‘종교개혁’(Reformation)시대에는 가톨릭을 거부하고 루터와 칼뱅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단들이 생겨났다. 소위 ‘위그노’들이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자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웠다. 16세기 후반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사이의 내전이 근 40년간 계속되었다.


위그노 세력의 영수 앙리 드 부르봉이 가톨릭 세력과 타협을 벌여 앙리 4세로서 프랑스 왕좌를 차지하였다. 타협의 결과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나(낭트 칙령)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자유는 계속 위협을 받았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국이 하나의 신앙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위그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였다. 당시 많은 위그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 신교도 국가로 이주하였는데 그 수가 3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프랑스 국내의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신민으로서 공식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고 국가로부터 갖가지 협박과 탄압에 시달렸다. 이들의 종교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가 인정된 것은 프랑스혁명으로 인해서였다. 프랑스혁명은 종교와 신분상의 차별을 일소하고 시민들의 법적 평등을 확립하였다. 혁명지도자들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였는데 이 선언은 현재 프랑스헌법의 전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만방의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해 혁명세력 내에서도 온 건파와 과격파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과격파들은 왕 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며 부르봉 왕가를 지지 하는 가톨릭 교회를 적대시하였다. 심지어는 기독교의 신 대 신 인간 이성을 신성시하는 종교도 급조되었다. 가톨릭 교회 는 그 토지와 건물 등 막대한 재산을 국가 재정문제 해결을 꾀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에 빼앗겼다. 혁명이 종식된 후에도 교회는 그 재산을 되찾지 못했다. 많은 부동산이 이미 일반인 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혁명기에 가톨릭 교회는 반혁명 진영을 지원하는 바람에 그 위신이 크게 추락하였다. 혁명 이전부터 계몽사상이 확산되 면서 사회상층부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이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혁명으로 인해 교회의 신망은 큰 상 처를 입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정략상 교황청과 화해하였지 만 가톨릭은 예전과 같은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성직자 들은 국가가 지불하는 봉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국가에 충성 을 맹세하였기 때문에 국가 공무원처럼 되었다.

국교가 아니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의 이러한 지위 는 19세기 내내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공화파들은 국가와 교 회간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였다. 종교가 개인양심의 문제가 된 만큼 국가를 종교와 무관한 제도로 만들자는 것이 공화파 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1905년 국가가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4대 공인종교(가톨릭교, 칼뱅교, 루터교, 유대교)에 대한 일체의 자금지원 을 못하게 하는 정교분리법이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로써 정 교분리의 오랜 과정이 완성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28. 22:58





프랑스문화의 정체성

카톨릭 문화

 






프랑스의 지배적인 종교인 구교(로마 가톨릭 교회)의 힘은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 중세와 근대초 가톨릭 교회의 지배력은 그야말로 막강하였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생활도 지배하였다. 기독교는 1세기부터 프랑스 땅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갈리아가 프랑크족에 의해 정복되었던 5세기경에는 갈리아 주민들은 거의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다.


클로비스를 비롯하여 프랑크족의 왕들은 골족 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왕들이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지켜주고 성직자들과 교회에 면세 혜택을 주는 등 친교회 정책을 취한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 교황도 프랑스 왕권을 신성한 것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후대에 프랑스 왕들은 ‘기독교 왕’이라는 교회에서 부여한 칭호를 자랑스레 사용하였다. 프랑스 왕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들의 도전을 앞장서 진압하였다. 중세기 프랑스 남부에는 알비(Albi) 파를 비롯한 다양한 이단들이 등장하였는데 국가가 무자비하게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가 계속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14세기 초에는 성직자에 대한 과세문제를 놓고 프랑스 왕과 교황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주교 임명권을 놓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루이 14세 시대에 주교임명권은 왕에게로 넘어갔는데 그래서 프랑스 교회에 대한 지배권도 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왕이 갖게 되었다. 향후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는 거리가 있는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경향을 ‘갈리카니즘’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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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27. 01:00




영국

 노르만 왕조의 등장

 





8세기 말부터 외부로부터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북게르만족의 일파로 서 바이킹인 데인족Danes의 습격이 잦았다.

비록 알프레드 대왕 때 앵글로색슨족이 이들과 맞서 하나로 뭉치기도 하였으나, 데 인족의 침입이 계속되더니 1016년에 덴마 크 왕의 아들인 크누트 왕이 잉글랜드 왕 위에 올랐다. 덴마크 바이킹계 크누트 왕 과 두 명의 왕이 더 통치한 뒤에는 노르망 디에 망명 중이던 브리튼계의 참회왕 에드 워드가 잉글랜드 왕권을 복원함으로써 바 이킹 시대는 끝났다.


23년간 통치하던 에드워드가 1066년에 죽 자 귀족들은 에드워드의 처남인 해롤드를 후계자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에 에드워드 의 사촌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노르만 족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그리 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영국 해롤드 왕을 물리치고 1066년에 영국의 새로운 왕 윌리 엄 1세로 등극하였다. 영국 역사에 프랑스 계 노르만 왕조(1066~1154)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로써 영국 귀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노르만 왕조는 영국 영토를 완전하게 지배 하는 사실상 최초의 왕조였다. 윌리엄은 브 리튼을 정복하고 대륙의 봉건제도를 잉글 랜드에 도입하였다. 이로써 브리튼 섬은 비 로소 유럽의 일부가 되었다. 노르만 왕조가 열림으로써 프랑스에서 많은 노르만인들과 다른 부족들이 영국에 건너와 정착하였는 데, 그로 인해 기존의 영국 문화가 크게 바 뀌었다. 이를테면 지배계급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면서, 이 말이 앵글로색슨족의 말과 섞여 오늘날 영어의 바탕이 되었다.


노르만 왕조는 직계 왕위를 그리 오래 유 지하지 못했다. 3대 스티븐에서 끊어졌다. 노르만 왕조 헨리 1세의 외손으로 프랑스 인 아버지를 둔 헨리 2세가 스티븐을 이어 왕위에 오름으로써 성이 바뀐 것이다. 이 로써 플랜테저넷 왕조(1154~1399)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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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26. 00:30






영국의 역사

시원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의유입

 

 



 

 

유럽의 정복국가인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에 브리튼 섬에는 기원전 수백년 전에 원 주민을 정복하고 유럽에서 이주해 온 켈트 Celts족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켈트족 중 게일족과 브리튼족이 영국 땅에 정착하였 으며, 브리튼족은 영국의 이름인 ‘브리튼 Britain’의 어원이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55 년부터 브리튼을 침입하고 약 100년 뒤 잉 글랜드 땅을 정복한 로마제국은 이들 켈트 족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약 400년간 스 코틀랜드 북부를 제외한 브리튼 전 지역을 지배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브리튼 땅을 ‘브리타니아’라고 하였으며, 당시 로마 군대 는 템즈 강 주변을 기지로 쓰며 항구 이름 을 ‘론디니움Londinium’이라 하였는데, 이곳 이 뒷날 영국의 수도 런던이 되었다.




그런데 5세기 들어 브리튼 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로마제국이 위협받자 로마 황제 호노리우 스는, 로마 본토를 지키기 위해 “브리튼 의 제국민들이여! 로마를 위해 자신의 지 역을 스스로 방어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로마군을 철수시켰다. 로마인이 떠 난 뒤 브리튼 섬에는 독일, 덴마크, 네덜란 드에서 이전부터 침입하던 게르만 계열의 주트족, 앵글족, 그리고 색슨족이 들어와 지배한 것이다.


이들은 브리튼 땅을 차지하며 7세기 초까지 각각 켄트 왕국, 에식스 서식스 웨식스 왕 국, 이스트 앵글리아, 머시아Mercia, 노섬브리 아Northumbria 왕국 등 7개 소규모 왕국을 세 웠다. 잉글랜드라는 말은 이들 중 세력이 강하였던 ‘앵글족의 나라’라는 의미에서 시 작되었다. 브리튼 섬이 앵글로색슨족의 땅 이 된 것이다.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이들 앵글로색슨족이 지금 영국의 뿌리이다.


이들 여러 왕국이 패권 싸움을 한 결과, 8 세기에 이르러 머시아, 노섬브리아, 웨식스 세 왕국만 남게 되었고, 829년에는 이것도 웨식스 왕 에그버트Egbert에 의해 하나로 병 합되었다. 에그버트는 잉글랜드 통일의 바 탕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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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25. 22:24






영국과

럽대륙과의 관계






주변 국가를 보면 영국은 영국해협을 사 이에 두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마 주한다. 대륙과 가장 짧은 거리는 약 34 ㎞에 지나지 않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약 50㎞의 채널 터널Channel Tunnel; Le tunnel sous la Manche(영국과 프랑스간의 도버 해협을 연결하는 해저 터널) 로 이어져 기차로 통행할 수 있다. 유로스 타를 이용하면 런던에서 파리까지는 두 시 간 조금 더 걸린다. 다른 나라를 보면 덴 마크나 노르웨이와는 북해를 사이에 두고 있고, 본토를 중심으로 반대쪽으로는 아 일랜드 해를 두고 섬나라 아일랜드 공화 국과 접하고 있다.

 




변덕스러운 기후 환경

영국은 서울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그래 서 서울보다 더 추울 것 같지만, 더 온화 하다. 멕시코 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체적으로 온난한 기후를 나타낸다. 연간 강수량은 많지 않으며 1년 내내 날씨가 흐 리고 지나가는 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연중 비오는 날이 반 이상인데, 비가 많이 오는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부슬부슬 온 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우산을 준비하 지 않기도 한다. 그 정도면 그냥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습한 날씨가 특징이지 만, 날씨가 맑다가 갑자기 비가 오거나 추 워지기도 하는 등 영국 날씨는 급변한다. 아이슬란드 저기압의 영향 때문인데 아주 변덕스럽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파카를 입 는 사람도 입고 겨울에 반팔 티셔츠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누가 힐끔거 리며 보지도 않는다. 어떤 때는 거리 사람 들의 옷차림에서 하루에 네 계절의 옷을 동 시에 볼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는 가을~겨울에 비가 많이 오고, 런던은 겨울 에 안개가 많이 끼는 특성을 보인다.

영국에서는 기온이 영하10° 밑으로 내려가 거나 32°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혹시라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씨라도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공원이나 집 정원 또는 옥상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웃 통을 벗어던진 남자들, 비키니를 입은 여 자들이 남의 시선 마다하지 않고 이런 저 런 자세로 햇살을 즐기는 모습이 우리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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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17. 01:30






이슬람문화

라마단Ramadan

 

 

아랍어語로 ‘더운 달’을 뜻한다. 이슬람교도는 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5번의 기도를 드린다. 여행자·병자·임신부 등은 면제되지만 대신 이후에 별도로 수일간 금식해야 한다. 이슬람 신자에게 부여된 5가지 의무 가운데 하나이며, ‘라마단’이라는 용어 자체가 금식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 물, 성관계도 금지된다.

 




라마단은 1년이 354일인 이슬람력의 9번째 달 첫날에 시작된다. 따라서 라마단의 기간은 해마다 열흘씩 빨라진다. 라마단은 약 1,400년 전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코란의 계시를 받은 것을 기려 헤지라Hegira 2년(623년)부터 9번째 달의 시작을 알리는 초승달이 나타난 다음 날부터 금식을 시작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라마단이 동시에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각국의 종교위원회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새로운 달을 알리는 초승달이 목격되는 시점을 기해 라마단의 시작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라마단 기간에는 관공서와 기업들이 출근 시간을 늦추고 퇴근 시간을 앞당기는 방식으로 근무시간을 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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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15. 02:30






 

영국에 연이은

IS테러

 

 

 

지난 3월 22일(이하 현지 시각) 영국 런던London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발생했다. 이날 오후 은색 옷을 입은 괴한 1명이 국회의사당을 지키던 경찰관 1명을 칼로 찔렀다. 범인은 국회의원들이 있는 의회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른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의사당 바로 옆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또 다른 괴한이 모는 재규어 승용차가 시민과 관광객들을 덮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총격 사건 발생 당시 국회의사당에는 하원 의원들이 있었고, 총 소리가 나자 긴급하게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가 발생한 곳은 관광 명소인 데다 주변에 레스토랑과 바 등이 몰려 있어 평소에도 관광객과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범인은 영국 남부 켄트에서 태어난 50대의 칼리드 마수드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슬람국가(IS)의 온라인 선전 매체 ‘아마크Amaq’는 마수드가 “IS의 전사”라며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자처했다.

 


지난 달 5월 22일에는 맨체스터Manchester의 한 공연장에서 폭탄이 터져 22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다쳤다. 이번에도 IS는 자신들이 테러 배후임을 주장했다. 범인은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리비아계 대학생 살람 아베디(22)로 밝혀졌다.

 

이어 6월 3일 오후 10시쯤에는 영국 런던 도심에 있는 런던 브리지와 인근 상가들이 소재해 있는 번화가에서 테러범 3명이 차량과 흉기를 이용한 테러를 자행했다. 범인들은 승용차를 몰고 사람들이 밀집된 인도로 돌진했다. 차에 받힌 사람들이 하늘로 튀어 올라 주변 일대는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범인들은 차가 돌진할 수 없게 되자 흉기를 들고 인근의 버러 마켓Borough Market으로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공격했다. 범인들은 “이것은 알라를 위한 일”이라 외쳤다고 한다. 이번 공격으로 시민과 관광객 7명이 숨지고 48명이 부상을 당했다. 런던경찰청은 5일 범인 2명의 신원을 공개했다. 그중 한 명은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시민권자였다. IS는 선전 매체를 통해 “IS에서 파견한 보안부대가 어제 런던에서 공격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테리사 메이Theresa May 총리는 4일 오전 비상대책회의를 마친 뒤 이슬람 극단주의를 잇따른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지금까지보다 훨씬 엄격

하게 이슬람 극단주의를 색출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말해 찬반 양론을 일으켰다. 테러 행위를 예방하고 처벌했던 종전의 대對테러 정책에서 벗어나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사상 자체를 억제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의 연이은 테러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IS가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라마단Ramaān 시작되던 시점인 지난 5월 26일 IS가 잡지나 유튜브 등을 통해 “IS의 땅에 올 수 없는 유럽의 이슬람교도 형제들이여, 본토에서 그들의 집이나 시장, 도로나 광장을 공격하라.”고 주문했다고 보도했다. 자생적인 ‘외로운 늑대’형 테러를 부추긴 것이다. 이슬람 금식禁食 성월聖月인 라마단 기간에 테러가 잇따르면서 ‘피의 라마단’이 재현되는 양상이다. 라마단이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IS가 2014년 이라크 북부 모스크에서 왕국 수립을 천명한 뒤 라마단을 테러와 양민 학살에 악용하면서부터다. 미국 워싱턴에 기반을 둔 중동미디어리서치기구(Middle East Media Research Institute, MEMRI)에 따르면 지난해 라마단 기간은 9·11 테러 이후 세계적으로 테러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한다. 요르단, 미국, 프랑스, 레바논, 터키, 방글라데시 세계 각지에서 테러가 발생했고 420명이 숨지고 730여 명이 다쳤다. 올해 라마단은 지난 5월 27일 시작됐으며 6월 25일 끝났다. 올해 라마단 무렵 발생한 테러 사망자만 180명에 육박한다. 거룩해야 할 종교 성일이 피로 얼룩져 버렸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14. 01:30




지구촌 이상 기후로 몸살

지중해에선 폭염暴炎,

인도에서는 폭우暴雨 피해

 






지구촌이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다. 터키와 그리스 등 지중해 지역에서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됐고, 몬순기에 접어든 인도에선 평년보다 훨씬 많은 양의 비가 내려 침수 피해가 속출했다.

 

7월 2일(현지 시간) 터키 남부 안탈리아Antalya에선 수은주가 섭씨 45.4도까지 올랐다. 이스탄불Istanbul은 사상 최고 기온인 39.2도를 기록했다. 이즈미르 지방에선 고온에 산불까지 발생해 500여 헥타르의 숲이 불에 탔다. 기상학자들은 북아프리카의 더운 공기가 북상하여 유럽 지역에 이상 고온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스에서도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됐다. 수도 아테네Athens를 포함해 대부분 지역에서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졌으며 오존 수치 또한 매우 높았다. 불가리아도 44도의 기록적인 폭염으로 수도 소피아Sofia에서만 5명이 숨졌다.

 


중동도 폭염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랍에미리트UAE 기상센터에 따르면 지난 6월 15일 아부다비Abu Dhabi 부근 리와 사막 마디나트 자예다트 지역의 낮 최고 기온은 50.8도를 기록했다. 6월 16일 낮과 17일에는 리와 사막 메자이라 지역의 기온이 각각 51.5도, 50.5도까지 치솟았다. 이란 아흐바즈Ahvaz, 쿠제스탄Khuzestan 등 이란 남부 지역의 낮 최고 기온도 50도 안팎까지 오르면서 이 지역 한 대학 기숙사에서는 학생들이 에어컨 설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영국과 미국이 열대지방인 태국보다 수은주가 더 높이 올라가는 등 곳곳에서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이 깨지고 있다. 미국의 남서부 지역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네바다 주에는 기상청에서 ‘매우 위험한 수준의 폭염’이 몰려오고 있다는 경고를 내렸다. 지난 6월 18일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Sacramento의 평균 기온은 섭씨 41.1도로, 75년 만에 최고 기록이던 섭씨 40.5도를 경신했다. 애리조나 주는 최근 1990년에 기록했던 역대 최고 6월 기온 섭씨 ‘50도’에 근접한 49도를 기록했다. 애리조나 지역 주민들은 SNS에 ‘녹아버린 플라스틱 벽’, ‘더위에 쓰러진 우편함’, ‘자동차에서의 빵 굽기’ 등의 사진을 올리며 더위를 하소연하고 있다.

 

연교차가 크지 않은 영국도 유례없는 이상 고온 현상으로 열대기후 지역인 태국보다도 높은 평균 기온을 보이고 있다. 여름에 선선하고 겨울에 따뜻한 영국의 7월 평균 기온은 섭씨 16.4도, 런던은 17.6도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지난 6월 18일 런던의 최고 기온은 섭씨 31.9도를 기록하며 평년보다 10도 가량 상승했다. 특히 남부 지역의 현재 기온은 인도 방갈로Bangalore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물론 지중해성 기후인 그리스보다도 훨씬 높다. 이런 고온 현상은 유례없는 일로, 남부 및 남동부 지역의 기온은 평년보다 섭씨 10도가량 높은 편이다.

 


반면 몬순기에 접어든 인도에선 폭우가 계속되고 있다. 비는 6월부터 계속됐으며, 강우량은 기록적인 수준이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191.9㎜가 내렸는데 지난 2007년 150.9㎜의 강우량을 기록한 이후 10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또 평년 강우량 대비 289%에 달한다. 수도 뉴델리New Delhi뿐만 아니라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북서부 라자스탄 주 등에서도 강우량이 평년 수준을 웃돌아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한편 세계기상기구WMO(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는 올해도 지난해에 이어 예외적으로 더운 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국NOAA(US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과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European Centre for Medium-Range Weather Forecasts)의 분석을 인용하여 지난 5월 한 달 동안 육지와 바다 표면에서 관측된 기온은 지난해에 이어 관측 사상 두 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이는 아직 엘리뇨El Niño 영향을 받지 않은 결과라고 하므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열기는 강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때 이른 불볕더위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미국 마노아 하와이대 연구팀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100년쯤에는 세계 전체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매년 살인적인 폭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10. 02:00




 

 

영국의

연합왕국의 형성과정

 

 

영국을 이루는 이들 네 나라를 홈 네이션 Home Nation이라고 하는데, 웨일즈는 1282년 에 에드워드 1세가 정복한 뒤 반포한 러들 랜 법Statute of Rhuddlan에 의해 잉글랜드 왕 국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재위 군주의 왕세자에게 웨일즈 공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지금의 웨일즈 공은 엘 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 로, 1969년에 봉해졌다.

 

웨일즈가 잉글랜드에 공식적으로 합병된 것은 16세기이다. 헨리 8세가 1536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한 의회로 통합하였 다. 그동안 웨일즈에는 자치권이 거의 없 었으나, 1999년에 웨일즈 국회가 공식적 으로 다시 개원되었다.

 



스코틀랜드는 1603년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 스 6세가 잉글랜드 및 웨일즈 왕국의 통합 왕 제임스 1세로 등극하기 전까지 자국의 왕 정과 국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1707년 에 잉글랜드와 연합하였다.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 여왕은 스튜어트 왕조라는 한 줄기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따로 통치되던 것을 연합법을 통해 서로의 자치권 을 보장하며 통합한 것이다. 이로써 그레이 트 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지금까지 영국의 홈 네이션으로 남아 있다.

 

1801년 연합법으로 아일랜드 왕 국이 잉 글랜드 왕국에 편입되어 그레이트 브리튼 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2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남부의 아 일랜드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였 고 북아일랜드는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그 대로 남았다. 북아일랜드는 이후 독립의 과정을 거치다 지금은 독자적인 의회를 가 지면서 영국의 홈 네이션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국의 국호는 지금의 그 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바뀌었다. 영국의 현재 국기인 유니온 기The Union Flag, Union Jack 또한 이를 반영하였는데, 먼 저 잉글랜드 기와 스코틀랜드 기가 통합되더 니, 이것이 다시 아일랜드 기와 합쳐졌다. 국 기에도 세 국가가 연합한 흔적이 선명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9. 23:50




 

영국명의 유래

 





유럽 대륙 서북쪽에 있는 섬나라 영국. 영 국의 진짜 이름은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 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줄여서 Great Britain 혹 은 United Kingdom이라고 한다.

 



흔히 GB, UK로 간단히 표기한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세 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인 그레이트 브 리튼 섬 남동부의 잉글랜드England, 북부의 스코틀랜드Scotland, 남서부의 웨일즈Wales, 그리고 아일랜드 섬 북동부에 위치한 북 아일랜드Northern Ireland라는 네 자치 국가로 이루어진 연합 왕국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국英國’은 ‘잉글랜드 England’의 한자 표기이다. ‘영英’은 잉글랜드 의 잉Eng을 음역音譯한 것이고, ‘국國’은 랜드 land를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고 영국이 곧 잉글랜드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잉 글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홈 네이션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브리튼Britain 혹은 유케이 UK라고는 하지만 잉글랜드라고 하지는 않 는다. 특히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북아일 랜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8. 01:30




 

로마제국의 지배와

프랑크족의 등장

 




 

갈리아는 기후도 온화하고 땅도 비옥한 편이어서 번영을 누렸다. 귀금속 장신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골족 장인들은 유리와 비누, 도자기 등을 만들었다. 골족은 평화스럽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골족 전사들은 적의 머리를 베어 허리춤에 달고 다니곤 하여 아주 용맹스런 사람들로 인식되어 여러 나라의 왕들이 이들을 용병으로 이용하였다. BCE 385년에는 알프스를 넘어온 골족 전사들이 로마 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갈리아는 수세에 서게 되었고 로마의 정복대상이 되었다.

 

프로방스를 속주로 지배하던 로마는 BCE 1세기 중엽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 정복전쟁을 ‘갈리아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그 전쟁을 지휘한 인물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갈리아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갈리아의 도시들을 기하학적인 설계에 따라 정연한 모습으로 건설하였다. 열주들이 늘어선 광장, 신전, 공회당, 대규모 극장, 원형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이 세워졌다. 토목에 능한 로마인들은 상수도도 설치하고 포석으로 포장된 견실한 도로를 건설하였다.

 



골족은 점차 로마의 지배에 동화되었다.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귀족들은 자제들을 학교에 보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만들었다. 그 결과 골족의 과거보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사상에 물든 골족 엘리트층이 형성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는 5세기에 끝이 났다. 게르만족의 일파로서 라인강을 건너온 프랑크 족이 갈리아를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다.

 

이들의 나라는 로마제국처럼 법체계를 갖춘 정연한 기구와는 거리가 멀어 왕이 아들들에게 왕국을 상속재산으로 분할해 주었다. 그래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결국 동서 프랑크 왕국(프랑키아)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이 프랑스가 되고 동프랑크 왕국이 독일 즉 신성로마제국이 되었다.

 

10세기 말에는 파리와 그 주변지역을 영지로 갖고 있던 카페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파리는 프랑스의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었다. 카페 왕가의 왕들은 지방의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수도 파리에 행정기구와 사람 그리고 돈이 몰리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 그 과정은 가속되어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다. 그 결과는 오늘날의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인구의 5분의 1, GDP의 4분의 1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프랑스의 철도노선과 고속도로 노선도 파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방사형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프랑스의 중앙집권적 경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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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7. 00:26

 




프랑스의 별칭

엑사곤의 지정학적 위치

 

 



프랑스는 영국, 독일과 더불어 유럽의 중심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독일과 더불어 유럽통합을 주도해왔다. 현재 27개국으로 구성된 초국가연합 유럽연합(EU)이 그 노력의 결과다. 프랑스는 인구(6,500만)도 상당할 뿐 아니라 영토도 약 55만㎢로 한반도의 두 배 반이나 된다.

 


프랑스 땅을 프랑스 인들은 흔히 ‘엑사곤’(Hexagone)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땅이 6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육각형의 3면은 지중해와 대서양, 북해 등 바다에 연해 있으며 다른 2면은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그리고 나머지 한 면은 라인 강과 접해 있다. 프랑스는 위치상 남유럽과 북유럽에 걸쳐 있다.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서부와 북부는 대체로 서안해양성 기후라서 겨울에도 온화한 편이다. 동부로 갈수록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짙어진다. 프랑스의 이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인종도 금발을 주종으로 하는 북유럽 인종과 검은 머리나 갈색 머리의 남유럽 인종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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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6. 23:24

 




골족에서 비롯된

프랑 시원 역사




 

프랑스라는 나라 이름은 중세초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땅(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갈리아’로 불렸다)으로 쏟아져 들어온 프랑크 족의이름에서 기원하였다. 갈리아에 그리스 로마 문명을 가져다준 로마인들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BCE 125년경인데 지중해 연안의 프로방스 지방이 처음으로 로마 속주가 되었던 곳이다. 프로방스라는 이름은 로마의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키아’에서 나온 말이다. BCE 1세기 중엽에는 갈리아 전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갈리아 땅에는 로마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고 도처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졌다.


원래 갈리아(프랑스어로는 ‘골Gaul’이라고 한다) 땅의 원주민은 켈트 족이다.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르네 고시니와 알베르토우르데조의 만화 『아스테릭스』시리즈는 바로 BCE 1세기 중반 로마정복기의 골족을 그린 만화이다. 로마군대를 골탕먹이는 골족 영웅 아스테릭스는 이제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문화캐릭터가 되었다.

 



골족은 ‘드루이드’라는 사제가 주관하는 다신교를 숭배하였다. 드루이드들은 농업과 밀접히 연관된 달력을 보관하고 축제일을 결정하였으며 심지어는 전쟁을 결정하는 데도 관여하였다. 드루이드들은 매년 한차례 총회를 열었는데 이 총회를 통해 다양한 도시들간의 갈등이 해결되었다고 하니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것이다.


드루이드교는 후일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쇠퇴하였으나 이 시기 골족의 몇 가지 관습들은 지금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영혼불멸의 상징이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겨우살이를 리본에 묶어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갈리아에는 일찌감치 그리스인들도 바다를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오니아 지방의 포카이아 인들이 그들인데 현재의 남부 해안지역에 정착하여 마르세유를 세웠다(BCE 6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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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24. 08:30




 

대한민국과

아프리카 세네갈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과 세네갈은 1962년 10월 19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주세네갈 한국공관은 1973년 5월 4일에 개설되었다. 2007년 8월에는 주한 세네갈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한국과 세네갈 간에는 1975년 4월 무역협정, 1979년 문화협정·경제기술협력협정, 1984 투자보장협정, 1997 청년봉사단 파견협정, 2008 5월에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 기본협정이 각각 체결되었다.

 

양국 간에는 1979년 4월에 세네갈의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있으며, 1982 8월에는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세네갈을 방문하였다. 1984 7월에는 압두 디우프Abdou Diouf 대통령이, 2009년 11월에는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대통령이, 2015년 6월에는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이 한국을 각각 방문하였다.

세네갈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한국과는 1962년 10월 19일, 북한과는 1972년 9월 12일에 각각 수교하였다. 한국의 상주 공관이 설치되어 있고 북한측 상주 공관은 폐쇄하였다가 2013년 7월 재개설하였다.

 

 


경제문화 관계

한국과 세네갈 사이에는 최근 8년여 동안 교역량이 4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동원그룹이 세네갈 국영 참치 통조림 공장을 인수하는 등 양국 간 교역 및 투자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세네갈의 대한對韓 수입은 1억 4,618만 달러, 수출은 6,268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어류, 육어류 조제품 등 수산물이 87% 이상을 차지하고, 주요 수입품은 전자제품, 인조섬유, 고무, 유기화학품 및 화장품 등 화학제품, 종이류, 사진용 재료, 인쇄물, 생활 잡화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동원산업, 삼성전자, 미성상사 등의 한국 업체가 세네갈에 진출하여 총 20건에 걸쳐 654만 달러(2015년 누계)의 투자를 하고 있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며, 연해에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우리 원양어선은 물론 우리 교민의 상당수가 수산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수산업 분야 외에도 한국 기업들은 가발업, 잡화 및 문구점, 사진업, 요식업, 보석산업 등의 분야에 진출해 있다.

 

2008년 한국은 세네갈을 무상원조 중점 지원 대상국으로 선정하고 농업, 교육, 수산양식 등의 분야에서 9백만 달러 상당의 총 5개 프로젝트 사업을 지원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봉사단과 전문가들을 파견하고 있으며, 세네갈로부터 연수생을 초청하고 있다. 2015년 5월 기준으로 세네갈에는 한국 교민 약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과 세네갈의 문화 분야 교류는 전통예술단의 방문 공연 정도이다. 체육 분야에서는 세네갈의 아마두 바Amadou Ba 선수가 제24회 서울올림픽(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여 400m 남자 허들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2002년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세네갈이 동시에 8강에 진출하여 축구를 통해 양국 국민이 서로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에는 세네갈의 최고 대중 인기 가수인 유수 은두르Youssou N’dour와 이스마엘 로Ismaël Lô가 방한하여 공연하였다. 한국의 경우 퓨전 국악 실내 악단인 ‘슬기둥’이 세네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2008년 5월에 개최된 다카르Dakar 비엔날레에서는 한국 작가 8명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2012년에는 한-세네갈 수교 50주년 기념을 계기로 양국 정상 간 메시지 교환(2012년 1월), 문화행사(2012년 5월, 비보이/퓨전국악 다카르 공연, 2012년 7월 세네갈 민속공연팀 여수 공연), 학술 세미나(2012년 11월, 다카르), 한식 축제, 영화제 등을 개최한 바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22. 05:30




 

미국

이슬람 테러전

 




제37대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이전 정권과 달리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였으며 1970년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를 명시하고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국제외교관계에서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6년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에 제3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터Jimmy Carter는 경제문제와 자원보존을 정부개입주의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대외정책에서는 인권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79년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건 발생시 구출작전의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보수주의 성향이 강화된 미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을 안고 1981년 취임한 제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줄임으로써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공산주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군비를 확충했다. 레이건 노선을 승계한 제41대 대통령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국가 재정적자 증가 및 경제상황 악화가 지속되는 상황 하에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촉발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상승하게 되었다.

 




1992년 지속적인 경제침체 해결에 대한 기대로 정부개입과 복지국가노선을 추구하는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이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클린턴은 소수인권과 근로자 권익을 강화하고 의료보험혜택을 확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경제 호황에 힘입어 2차 대전 이후 민주당 출신 최초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적 규모의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2001년에는 항공기를 이용해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Pentagon)를 공격한 ‘9.11테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제43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행정부는 대對테러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2002.12)하고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2003.5)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고, 대테러전 차원에서 대량파괴무기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확산 저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하였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2008년 실시된 제44대 대통령 선거에서 ‘희망hope과 변화change’를 주창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했고 적극적, 전향적 대외 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12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는 2014년 4월 25일, 재선 후 처음으로 방한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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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20. 20:56




 

냉전체제와

미국의 번영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유럽권을 장악한 소련의 위협을 크게 인식하고 전후에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제33대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해 소련에 대한 포위정책을 수립, 1947년 3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는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제의하는 마샬계획Marshall Plan을 수립하고, 1949년에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서방 12개국을 규합해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크게 인식해 격렬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국가보안법인 매캐런법McCarran Act이 제정되었고,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이 미국을 휩쓸기도 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기본으로 복지국가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고, 한편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을 중심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본격화되는 등 민권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뿌리 깊은 인종차별 관습의 철폐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 되었다.


진보적 성향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하고 빈곤을 없애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하였으며, 1962년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단행해 소련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 쿠바 미사일 사건을 계기로 1963년 핵전쟁 방지를 위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TST(일명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어 미·소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36대 존슨Lyndon Baines Johnson 행정부 시절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 움직임이 강화되어 반체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층과 흑인 등 소수자 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과격한 흑인민권 운동과 급진적인 학생운동이 이어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19. 01:30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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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8. 20:50


 

 

 

아프리카 세네갈의

이슬람 문화

 

 

 

 

세네갈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94%, 개신교 및 천주교가 5%, 토속신앙이 1%를 차지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관계로 이슬람교 공동체(Brotherhood)가 사회 깊숙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마라부Marabout들이 이슬람교도들의 사회·경제생활을 인도하고 있다.

 

세네갈의 이슬람교 공동체 중 무리드Mouride파의 영향력이 가장 크며, 그 밖에 티자니야Tijaniyya, 니아시야Niassiyya, 카디리야Qadiriyya, 라예네Layenne파 등이 있다. 최근에는 보다 조직적이면서, 종교 및 정치적 입장을 지닌 개혁적인 이슬람 조직들이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고 있다.

 

1990년대 세네갈의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은 마라부의 지원을 배경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대한 적이 있다. 이들 이슬람교 공동체는 지하 경제에 간여하고 있어 세네갈 국가 경제 발전의 저해 요소로 작용함으로써 개혁의 대상으로 거론되어 왔다. 하지만 각종 선거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역대 정부들은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전前 대통령도 무리드파 이슬람교 공동체 지도자들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었다. 와데 대통령은 각종 선거 전후에 무리드파의 성지인 투바Touba를 방문하는 등 자신의 정권 유지 기반으로 이슬람교 공동체를 활용하였다. 세네갈의 이슬람화는 442~1050년경 무라비뚠al-Murābiṭūn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제2단계(쑤피종단의 확장기)에 이 나라에서 도입되었다. 그 결과 현재 전 인구의 86%가 말리키 법학파에 속하는 무슬림이다. 물활론자들이 4%이고 나머지는 여러 그리스도교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다.

 

세네갈은 이슬람이 압도적이지만 신정국가는 아니다. 시민법은 프랑스식에 기초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종교적 관용성을 갖고 있다. 강경파라기보다는 생활형 종교에 가까워 사람들이 비교적 순박한 편이다. 라마단Ramaān 역시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라마단 기간 한 달여 동안 태양이 떠 있을 때는 물을 비롯해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기간에는 문을 여는 레스토랑도 줄어든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번째 달(현재로는 12월에 해당)에 실시되어 코란이 모하메드에게 전해진 달을 기념하는 이슬람 종교 의례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17. 07:00




 

아프리 세네갈의

민족 및 언어

 

 

세네갈의 인구 규모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간 정도에 속한다.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수도인 다카르Dakar로 약 352만 명의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 수명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평균보다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며, 인구 구조 상 전형적인 피라미드형을 보인다. 세네갈에는 많은 민족적 그룹이 존재하고, 각각 독자의 역사, 언어, 문화를 갖고 있다. 이러한 민족적 그룹 내의 교류, 아프리카 이외의 문화와의 교류 결과, 자신들의 출신에 긍지를 갖는 복합 문화가 국민들 사이에 형성돼 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족은 월로프족(44.3%), 풀라르족(23.8%), 세레르족(14.7%) 등이다. 그밖에 투쿨로르족 디올라족 말링케(만딩고)족 등이 있고, 프랑스인이나 아랍인도 있다. 주민의 73%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2001년 헌법)이다. 세네갈은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그러나 월로프어, 세렐레어 등 토속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이슬람교도가 전 인구의 94%, 가톨릭을 주로 하는 그리스도교도가 5%, 나머지는 전통적 부족종교를 신봉한다.

 

세네갈인은 대체로 대가족주의로 친척이나 친구를 중히 여기며 방문자에게도 친절하다. 인터넷 호스트의 수는 199개(2007년)이며, 약 65만 명의 인구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2006년). 문맹률은 60.7%(15세 이상, 2002년 추정치)로 높은 편이다. 2004년을 기준으로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는 0.460으로 조사 대상국 177개국 중 156위를 차지하여 아프리카 대륙 저개발국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도 같은 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하루 1미국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빈곤 인구는 전체 인구의 50.6%에 달하였다.

 



복합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 역량

반면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나라다. 각 부족은 흑인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도시에서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구비 문학은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말리 제국 시대부터 내려온 음유시인 계층인 그리오griot들은 전사의 무용담을 담은 구비 전승시를 낭송한다. 레오폴드 셍고르Leopold Senghor, 부알라Boilat 신부 등 우수한 시인과 작가 그리고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 등의 영화감독들이 많이 배출된 국가다. 특히 1930~1950년대 레오폴드 셍고르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의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1913~), 기아나Guiana 레옹 다마스Leon Gontran Damas(1912~1978)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저항하면서 아프리카의 전통과 아프리카인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문학 운동인 네그리튀드Negritude 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셍고르의 시는 아프리카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세네갈의 시인 비라고 디오프Birago Ishmael Diop(1906~1989)는 아프리카인의 삶의 신비를 다룬 시를 쓰는 한편, 월로프족의 전통적인 민담과 전설을 기록하였으며, 다비드 디오프David Diop(1927~1960)는 제국주의 유럽 열강들을 축출하고 아프리카인의 독립과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혁명적 시들을 썼다. 세네갈의 작가들은 일부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로 소설, 시, 드라마 등의 작품을 쓴다. 잘 알려진 영화감독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은 서아프리카의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세네갈은 서부아프리카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로 평가받는다. 특히 다카르 대학(약 4만 명 등록)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인데, 문학, 법경제학, 과학, 의학, 언론, 공학, 사서학, 교육학 등 모든 분야가 이 지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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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6. 19:48




아프리 세네갈의

경제적 특성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불어권 국가 중 코트디부아르 다음으로 국민총생산 2위(149억 달러, 2016년)에 해당하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약 1,067달러(2016)인 최빈 개발도상국으로, 농수산물 및 인산염, 금 등 1차 상품 수출, 재외국민 송금(연간 약 10억 달러 수준) 및 해외 원조 수원 등이 주요 재정 수입원이다.

 

세네갈은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과 긴밀한 협의 하에 경제구조 조정계획을 추진, 2000년~2013년도 연 평균 약 4~5%대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외국 투자 유치, 공기업 민영화, 시장경제 육성 등을 통한 경제 개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 중이다. 정부는 민간 투자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2000년 S&P’S 신용등급을 신청하여 B+/B를 처음으로 부여받고 2014년에도 B+/B 등급을 유지하였다.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은 취임 후에 효율적인 공공자금 운영, 정부 규모 축소, 부정 축재 척결 특별재판소(CREI) 부활, 감사원 개혁 등 대대적인 정부 구조개혁에 나서는 한편, 동년 11월 입안한 ‘경제사회개발 국가전략(SNDES)’을 수정 보완해 2035년 개도국 도약을 목표로 ‘세네갈 부흥계획(PSE)’을 수립, 적극적인 해외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높은 국가채무 비율(2013년 GDP 45%), 비효율적인 공공자금 운영, 만성적 재정적자 등으로 인해 외국인 투자의 유치 및 효율적인 경제개발 추진에 애로가 상존하고 있으며, 가시적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전력 식수 등 사회 인프라 부족 사태가 심화되고, 실업률 확대, 식량 부족에 따른 곡물가격 상승, 지속적인 물가 불안 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등 세계 경제의 불안, 역내 에볼라 사태의 장기화 등으로 경제 불황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으며, 최근 지역 강수량 급감에 따른 곡물 작황이 감소하면서 식량 안보 문제도 심화되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다.

 



경제구조와 교역

세네갈은 1차 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가전제품과 자동차는 물론 식기, 플라스틱류 등 생활필수품인 공산품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형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2007년(추정치) 기준 GDP 비중에 의한 산업 구조를 살펴보면, 농업 16.7%, 제조업 18.9%, 서비스업 64.4%이다.

 

노동력 비중 기준으로 보면, 약 75%인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업 생산 품목은 땅콩, 진주조, 면화, 쌀 등이 있다. 특히 ‘세네갈의 황금’으로 불리는 땅콩은 프랑스가 식민지 시대에 가지고 들어와 재배를 장려하기도 하였고, 세네갈 총수출액의 25%를 차지하고 있어, 땅콩을 재배하는 농사는 사실상 이 나라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60년대에 독립할 무렵에는 노동 인구의 87%가 종사하는 규모였다. 어업은 참치, 문어, 오징어, 가다랑어, 새우가 중심이며, 이들의 대부분은 수출된다. 광업(인광석)과 공업은 인광석을 원료로 하는 화학 공업과 상호 관계를 가지며, 관광, 서비스업이 주요 산업이다. 세네갈은 세계 10대 인광석(phosphate) 생산 수출국이고, 아프리카 50개 금생산국 중 1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세네갈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천연가스 시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 IMF 기준으로 세네갈의 수출은 25.7억 달러, 수입은 60.5억 달러를 기록하여 극심한 무역수지 적자를 보이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수산물, 땅콩 및 땅콩기름, 석유제품, 비료 등이고, 주요 수출대상국은 말리(19.2%), 프랑스(8.3%), 인도(5.8%), 감비아(5.3%), 스페인(5.1%), 이탈리아(4.9%) 등이다(2006년). 수입품은 사탕·쌀·밀 등의 식료품, 소비재, 석유제품 등이고, 주요 수입대상국은 프랑스(25.1%), 영국(5.2%), 태국(4.8%), 중국(4.5%), 스페인(4.0%) 등 이다(2006년).

 

경제개발에서는 자금 조달을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는 미개발 철광산 개발, 다카르 자유무역지대의 설치, 세네갈 강 유역의 개발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또한 인광석 개발에도 노력하고 있어 땅콩에 편중된 외화수입원의 다양화를 모색하고 있다.

 

교통은 전체길이 906km의 철도, 세네갈 강의 항로, 1만 3,576km의 도로 외에 다카르·카올라크·생루이 주요 항구가 있다. 국제공항은 다카르에 있고 공항은 모두 20개이다(2006년). 세네갈 강 유역의 모리타니·말리·기니 등과는 경제협력기구를 구성하고 있고 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ECOWAS)의 가맹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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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5. 10:30




이스라엘의 건국

 




유대인들의 이민과 건국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측에 가담하였는데 그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싸웠던 영국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용의가 있음을 선언한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이 전쟁에 협력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인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를 맡은 영국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이주는 계속되었다.


특히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독일에서 많은 난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영국 위임 통치 당국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발생 하였다. 유대인들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영국과 싸워 결국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유엔UN(국제연합)에 위임하였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어 독립시킨다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아랍 국가들은 모두 이 안에 반대했지만 소련이 적극 찬성하고 동구권 국가들도 찬성표를 던져 안건이 쉽게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는 소련이 소수민족의 독립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소련은 이스라엘이 친미 국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미소의 냉전이 조금만 일찍 시작되었더라도 소련과 동구권의 반대로 이 스라엘의 건국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국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곧 바로 전쟁이 시작되었 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 주변 아랍권 국가 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75만명 정도였는데 주변의 아랍국가들 인구는 3천만이 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일 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호언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뒤엎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점령하였다. 전쟁은 유엔의 중 재로 다음 해 봄에 끝이 났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그 후에도 서너 차례 이상 계속되었다. 시나이 전쟁(1956), 6일 전쟁(1967), 욤 키푸르 전쟁(1973)이 있었고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여 일어난 소규모 레바논 전쟁도 있었다. 이 다섯 차례의 전쟁 가운데 독립전쟁과 욤키푸르 전쟁을 제외하면 나 머지는 모두 이스라엘의 선공으로 일어났다. 6일 전쟁은 단 6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을 통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구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골란고원Golan Heights은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이 있는 높은 산지로 이스라엘의 방어를 위한 전 략요충지로서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시 리아에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점령하고 있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상실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복수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 때 이집트는 수에즈운하까지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1979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하였다.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문제로 남부 레바논을 공격, 점령한 전쟁으로 이전 전쟁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존립이 문제된 것은 아니었다.

 

1988년에는 이스라엘의 건국에 의해 내쫓긴 팔 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선언하였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회담을 통해 국가의 지위를 달성하였다(2012년). 그 전까지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 았으나 그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이스라엘이 점 령하고 있던 요르단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자 치권을 획득하는 타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 해결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하마스 Hamas 같은 단체가 테러 활동을 그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속함으로써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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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4. 18:52

 

 

 

이스라엘 시온주의Zionism 운동의 등장

 




로마의 탄압 속에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고향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 벌어졌을 때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수는 수만 명에 불과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종교 때문에 현지인들에 잘 동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게토ghetto(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 강제 격리를 위해 만든 거주 지역)에 모여살고 직업선택에 제한을 받는 등 천민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살던 곳의 주민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것은 프랑스혁명기부터였다. 프랑스는 혁명의 주된 이념인 자유와 평등에 입각하여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것이 유대인 해방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서유럽에서는 점차 철폐된 반면 동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더 나아가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논의와 운동이 19세기말 시작되었다. 이러한 운동을‘시온주의Zionism’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에서 온 말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60-1904)에 의해 명확한 강령과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896년 『유대 국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세계 시오니스트 총회가 스위스 바벨에서 개최되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영국 정부가 추천하는 아프리카의 우간다, 시나이 반도에 있는 엘 아리쉬 등이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오로지 팔레스타인만이 유대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그리고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 실용주의적 입장이 우세해져 일단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정착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 초에 들어 유럽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주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것은 러시아 유대인들이었는데 당시 러시아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유독 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이 등장할 무렵 팔레스타 인에는 유대인들이 3만 5,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물결이 있었는데 도합 45만명 정도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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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3. 08:30

 




이스라엘의 시원민족과

국가의 형성

 





이스라엘Israel 지역은 고대에 가나안Canaan이라 불리우는 땅이었다.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인 가나안족은 BCE(기원전) 7000년 경부터 농경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지역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위치하여 두 문명이 자주 충돌했던 관계로 셈족, 히타이트족 등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BCE 17세기에 족장 아브라함이 이끄는 히브리족(헤브라이족, Hebrew)이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의 시원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데, 히브리족은 엄청난 기근 때문에 이집트의 나일 강 하류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집트에서의 탄압과 노예 생활에 견딜 수 없었던 히브리족은 BCE 13세기 경 다시 모세Moses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출애굽 사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후 BCE 1020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Saul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이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David 왕과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설한 솔로몬Solomon 왕이 뒤를 이으면서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로마의 지배와 유대인의 추방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위 다툼으로 인하여 BCE 930년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E 722년에 앗시리아 왕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E 586년 신新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면서 유대인(유태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바빌론 유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 때 유대인들은 풀려나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E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해 그리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속주屬州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BCE 1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동방으로 세력을 뻗치던 로마가 유대 왕국의 내란에 개입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대 왕국은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유대 지방이 로마의 정식 속주가 되어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CE 6년이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와 전통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유대인들은 66년에 로마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수년 동안 벌어지다 결국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으나 일부 극렬파 유대인들은 사해 인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까지 저항을 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73년 집단자결로 끝이 났다. 이 전쟁 때 이스라엘 왕국의 도성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신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 이 성전이 사라져 하나님에게 예배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이후 유대교는 회당(시나고그) 중심의 종교가 되었다. 131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고 옛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터에 로마의 주신 유피테르를 제사하는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유대 속주의 이름도‘팔레스티나’로 바꿔버렸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시몬바르 코크바를 지도자로 하여 맹렬히 저항하였으나 반란은 진압되었다(CE 135년).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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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0. 02:00




 

 

아프리카 세네갈의

최근 정치상황

 

 




세네갈은 1960년에 독립을 선포한 이후 1963년 3월에 공포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세네갈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는 각료를 임명하는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대통령의 서명 없이는 법률이 통과될 수 없으며, 대통령은 특히 외교, 국방, 사법 등의 분야에서 큰 권한을 지니고 있다. 1968년 2월 국민의회 총선거에서는 80의석 전부를 세네갈 진보동맹(UPS)이 독점하면서, 1966년 야당인 아프리카 재편당(PRA)을 통합한 이래 실질적으로는 1당제 국가가 되었다. 1978년에는 UPS를 세네갈 사회당으로 개칭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을 표방하였다. 독립 후 줄곧 대통령직을 맡은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가 1980년 사임을 하자 압두 디우프Abdou Diou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디우프는 3선 연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000년 2월 2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세네갈 민주당(PDS)의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후보가 디우프를 꺾고 1960년 독립 이후 40년 만에 최초의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며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집권 사회당 체제가 무너졌다. 이에 따라 세네갈은 서부아프리카 민주주의의 창구라는 명성을 확인하였다. 2000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이유는, 세네갈 국민들이 사회당의 장기 집권에 따른 부정부패와 여당 내 자리 다툼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실업 문제 등 경제·사회적인 어려움도 정권 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세네갈은 2000년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세계를 놀라게 정도로 차분하게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와데 당선자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선거 공약대로 자신을 지원한 야당연합(Coalition 2000) 참여 인사와 지인들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세네갈은 2001년 1월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개정안을 채택하였다. 헌법 개정안은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부여, 상원 폐지, 여성권리 강화 등의 내용을 주요 골자로 채택하였고 1998년 폐지되었던 3선 제한이 재도입되었으며 대통령 임기도 7년에서 5년으로 축소되었다. 이어서 와데 대통령은 구 집권당인 사회당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던 국회를 해산하고 2001년 5월 29일에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결과 와데 대통령 소속당인 세네갈 민주당을 축으로 한 Sopi연합(coalition Sopi)이 국회 총 의석 120석 중 89석을 획득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여 개혁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와데 대통령은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식량 자급, 자원 개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16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신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로 보건, 교육, 고용 창출을 표명하였다. 또한 당초 2006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2005년 수해복구 예산 확보 등의 이유로 2007년 대선과 통합하여 국회의원 임기를 8개월 연장하였다.

 




와데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내외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해외순방 등을 통해 해외자본 유치, 개발 프로젝트 구상 등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40년에 걸친 사회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누적된 실업, 빈곤, 교육, 전기·수도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노후화 등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은 집권 1기 기간 동안 경제·사회문제 해결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치러진 2007 대통령 선거에서도 55.9%의 지지율로 재선되어 집권 2기를 맞았고 그 해 6월에는 집권 여당을 중심으로 한 Sopi 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150석의 의석 중 130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사회문제 해결에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세네갈 국민들의 지지도가 크게 하락하였다. 특히 자신의 아들인 카림 와데Karim Wade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무리한 조치들을 시행한 결과, 국민들의 비판이 가중되었다.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한 결과, 2009년 3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다카르Dakar, 티에스Thies, 카올라크Kaolack 등 주요 도시 지역에서 패배하였으며, 다카르 Point-E 선거구에 출마한 와데 대통령의 아들 카림 와데가 낙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2009년 10월에는 또 다시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 임기가 2012년 선출되는 차기 대통령부터 7년으로 다시 연장되고 하원의장의 임기는 5년에서 1년으로 축소되는 변화가 발생했다.

 

결국 2012년 3월 2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결선투표를 치른 끝에 전 세네갈 총리이자 야당 연합 후보인 마키 살Macky SALL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4월에 취임하였다. 살 대통령은 2012년 9월 상원 폐지 등 개혁을 단행했고 11월에는 전임 와데 대통령 아들(전 장관)의 부정부패 및 비리 수사, 처벌을 위한 특별법정을 설립했다. 하지만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는 연립 여당이 패배하였다. 2014년 8월에는 제15차 불어권 정상회의가 수도 다카르에서 개최되었으며, 2015년 5월 세네갈은 ECOWAS(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 의장국으로 선출되었다. 2016년 1월 세네갈에서는 치안 불안과 함께 테러 위험이 고조되었는데, 카올락 및 뤼피스크 지역에서 테러 용의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개헌안 국민투표가 62.6% 찬성으로 통과되어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다시 5년으로 축소되고 3선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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