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에 해당되는 글 173건

  1. 2017.08.09 아프리카 세네갈의 역사와 기원
  2. 2017.08.08 아프리카 세네갈의 영토와 자연환경
  3. 2017.08.06 미국의 남북전쟁
  4. 2017.08.05 미국의 식민지 시대와 미국의 탄생
  5. 2017.08.04 미국의 국토 자연환경
  6. 2017.07.10 아프리카 수단과 한국과의 관계
  7. 2017.07.09 아프리카 수단의 관광명소
  8. 2017.07.08 북유럽 덴마크의 근·현대역사
  9. 2017.07.07 북유럽 덴마크의 중세시대역사
  10. 2017.07.02 아프리카 수단의 종교와 교육
  11. 2017.07.01 아프리카 수단의 사회와 문화
  12. 2017.06.29 덴마크의 고대 역사 바이킹시대
  13. 2017.06.28 유럽 덴마크의 자연환경
  14. 2017.06.27 복지와 행복의 선진 부국 유럽 덴마크
  15. 2017.06.22 아프리카 수단의 경제
  16. 2017.06.21 아프리카 수단의 정치 및 행정
  17. 2017.06.18 아프리카 회교국 수단의 역사
  18. 2017.06.17 아프리카 국가 수단의 자연환경
  19. 2016.08.16 흔들리는 ‘불의 고리’ 일본에 이어 에콰도르에서도 강진
  20. 2016.03.28 수도 소피아와 플로브디브
  21. 2016.03.28 장미, 요구르트, 포도주의 나라 불가리아
  22. 2016.03.28 불가리아의 한류 바람
  23. 2016.03.27 한국과 불가리아의 관계
  24. 2016.03.27 불가리아 사회와 문화
  25. 2016.03.27 불가리아 경제 개선책 및 향후 전망
  26. 2016.03.26 불가리아 경제구조와 동향
  27. 2016.03.26 불가리아 정치상황
  28. 2016.03.26 불가리아 공산화와 민주화의 정치 과정
  29. 2016.03.25 불가리아의 독립과 발칸전쟁
  30. 2016.03.25 불가리아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세계정보2017. 8. 9. 01:00

 

 




아프리카 세네갈의

역사와 기원

 

 




 

세네갈은 다카르 부근에서 석기 시대의 도끼나 화살촉 등이 발굴되고 있으나 9세기에 세네갈 강 유역에 투쿨로르Tukulor족族이 정착하면서 세네갈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11세기 중엽 북쪽의 베르베르계족의 일파인 제나가족族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파됐다. 이 종족의 이름에서 ‘세네갈’이란 국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나의 배(舟)’라는 의미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1050년대 말~1140년대 말 무렵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알무라비트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 후 나이저 강 유역의 비非이슬람교도가 강대해지면서 분쟁이 계속되었다. 14세기에는 윌로프Wolof족이 대서양 연안에 왕국을 세웠고, 15세기에는 풀라니Fulani족이 세네갈 강 중류에 왕국을 세웠으나 1444년 포르투갈 항해자가 베르데곶(串)에 내항한 무렵에는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

포르투갈은 세네갈 하구河口와 다카르 항 앞바다에 있는 고레 섬 등지에 무역기지와 가톨릭 포교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때 세네갈의 해안 왕국들은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접촉을 하며 나라를 유지했다.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도 진출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밀어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내고 미국으로 보낼 노예들을 수합하는 중요 지점인 생루이와 고레 섬(Gorée Island)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1633 창립된 프랑스의 세네갈 회사가 1659 생루이에 상관商館을 설치하면서 이곳을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차지하게 됐다. 프랑스는 1677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고레 섬을 빼앗았다. 한편 영국은 감비아 강 유역에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17~18세기의 세네갈 지역은 영국·프랑스 간에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어 모든 프랑스 기지는 영국에 점령되기도 했지만, 1816년 고레 섬과 생루이가 다시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식민지화에 노력했다. 세네갈은 프랑스의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 기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1854년 L.L.C 패데르브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투쿨로르족의 지도자 오마르 알하디의 저항 전쟁을 제압하는 등 강력한 팽창 정책을 취하여 내륙의 프랑스 식민지화가 추진되었다. 1859년부터 1865년 사이 세네갈 내 각 부족 왕국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말 프랑스는 세네갈 전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 1886년에는 포르투갈령領 기니와, 1904년에는 감비아와의 경계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었다. 생루이, 고레 섬, 루피스크 및 다카르는 ‘4개의 코뮌’으로서 1887년 이래 프랑스 본국의 지방자치제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1895년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하나의 통치 단위가 되고 생루이가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대한 동화정책同化政策과 침략의 기지로서 세네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902년에 수도를 다카르로 옮겼으며 1908년 도시 건설이 완료되면서 다카르는 서아프리카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제1·2 세계대전을 거쳐 세네갈은 다른 프랑스령 아프리카 국가와 함께 1946년 프랑스연합 내의 해외 영토가 되었고, 1956년에는 프랑스 공동체 내에서 자치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58년 12월에는 말리Mali, 니제르Niger,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와 연합하여 말리연방(Republic of Mali)을 수립하였다.

 



독립 이후

1960년 8월 세네갈은 말리 연방에서 탈퇴하여 단독 국가로 독립을 선포하였고, 9월에는 세네갈 사회당(PSS)의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1906~2001)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프랑스 온건 개혁 노선을 택하며 1980년까지 장기 집권한 셍고르는 시인이자 문화이론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아프리카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 지식인 중 1명으로 평가된다. 1976년 4월 세네갈은 제한적인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80년 12월에는 셍고르 대통령이 사임하였고, 이듬해 1월에 압두 디우프Abdou Diouf 수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세네갈은 1981년에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93년 2월에는 디우프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였다.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 사회당이 총 의석 120석 중 85석을 차지하면서 승리하였고, 1998년 5월 총선에서도 총 의석 140석 중 93석을 획득하여 다시 승리하였다. 1998년 8월에는 1992년에 제정되었던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3회 이상 연임 제한을 철폐하였다. 1999년 1월에는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사회당이 압승하였으며, 2월 18일자로 세네갈의 상원이 공식 출범하였다.

 

2000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3월에는 대통령 선거 2차 투표가 실시되어 야당 후보인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와데 대통령은 2000년 4월에 취임하였다. 2001년 1월에는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새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2월에는 새 헌법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었다. 4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여당이 120석 중 89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세네갈은 1996년 중국과 단교하였으나 2005년 10월 타이완과의 단교 이후 중국과는 재수교를 단행하였다.

 

2007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와데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6월에는 총선이 실시되어 여당이 하원 160석 중 130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009년 3월에는 세네갈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세네갈은 201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4월부터 마키 살Macky SALL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8. 00:30


 

 

아프리카 세네갈의

영토와 자연환경

 

 



 

세네갈 공화국Republic of Senegal은 아프리카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다. 현지어(프랑스어)로는 레퓌블리크 뒤 세네갈(Republique du Senegal)이라고 한다. 수도는 인구 약 352만 명 규모의 다카르Dakar이다. 다카르는 그리니치 표준시 기준으로 서울보다 9시간이 느리다. 세네갈의 총인구는 2016년을 기준으로 약 1,432만 명이며, 국토의 총면적은 196,722㎢로 영국보다 조금 작다. 국토의 대부분은 해발 고도 100m 이하의 평지이다. 남으로는 기니Guinea, 기니-비사우Guinea-Bissau, 동으로는 말리Mali, 북으로는 모리타니Mauritania, 서로는 북대서양과 접한다. 아프리카 대륙을 흔히 사람의 두개골 모양으로 여기는데, 그렇게 보면 세네갈은 볼록 나온 뒤통수 해당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수도 다카르는 그 중 가장 튀어나온 부분에 위치해 있다. 세네갈 내부에는 대서양으로부터 감비아Gambia 강을 따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감비아Gambia가 북부 세네갈과 ‘카자망스Casamance’라 불리는 남부 세네갈을 분리하고 있다. 그런 지형 탓에 세네갈은 마치 감비아를 입에 가득 물고 깔깔거리며 웃는 턱이 네모난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세네갈의 국기는 세로로 된 삼색기로 초록색, 금색, 붉은색 순이다. 그리고 중앙에 5개의 가지를 가진 초록색 별이 있다. 초록색은 삼림에서 온 것으로 희망을 의미하며, 금색은 초원(savane)을, 붉은색은 세네갈 투사들이 흘린 피를 각각 상징한다. 중앙에 위치한 별의 다섯 가지는 5대륙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세네갈 국가 문장에서 사자는 힘을 나타내며, 바오밥(Baobab)은 장수를 의미한다. 매년 4월 4일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날로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세네갈의 국가이념은 한 민족(Un Peuple), 한 목적(un But), 한 믿음(une Foi)이다.

 

세네갈은 산을 보기 힘든 저지대로 대부분 지역이 평평하다. 전반적으로 해발고도 100m 이하의 평탄지이다. 유일하게 솟아 있는 지역은 남동부에 있는 해발 400m의 푸타잘롱 산악 지대의 줄기이다. 평평한 모래사장으로 덮여 있는 대서양 해변은 길이가 약 500km이고 시네 강, 살룸 강, 카자망스 강 하구의 삼각주는 넓은 맹그로브 숲으로 덮여 있다. 긴 사주, 석호, 소금이 덮인 모래 언덕이 북부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다.

 


 

남부를 중심으로 전국토의 54%는 삼림을 이루고 있으나 세네갈 강 유역은 사하라 사막에 접하는 건조 지대로 페를로 사막을 형성한다. 그 밖의 지역은 사바나성性 기후를 나타낸다. 북부 사헬 지역의 가시나무 덤불 사바나에서 독특하고 마디가 있는 바오밥과 빨간 꽃이 피는 플랑부아양 나무가 자라는 건조 사바나를 지나, 케이폭수樹, 야자나무, 유칼립투스, 망고 등으로 이루어진 카자망스의 습윤 사바나 그리고 습윤 삼림 지대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세네갈에는 3개의 강江이 흐른다. 북쪽 모리타니와의 국경을 형성하는 이 나라 최대 강인 세네갈Senegal 강, 극동쪽의 발원지만 제외하고는 감비아에 의해 둘러싸인 중앙의 감비아Gambia 강이 있다. 감비아는 세네갈의 국토로 둘러싸여 세네갈 남부 카자망스 지역을 북부와 남부로 갈라놓고 있다. 또 하나의 강은 인근 지역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고 지역 명칭의 유래가 되기도 했던 남쪽의 카자망스Casamance 강이다.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며 하류는 대형선박의 항행이 가능하다.

 

국토 북부 전체에 걸친 사막화 현상은 계속 확대되는 문제로, 세네갈 강의 마난탈리 댐만이 부분적으로 이 현상을 저지하고 있는 사정이다. 사하라 사막 남부의 반 건조대인 사헬에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다양함을 보여주는 나라인 세네갈은 550종 이상의 동물군을 자랑한다. 또한 철새들-특히 물새 종류-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매해 겨울 유럽에서 많은 수가 떼를 지어 돌아와 생루이Saint-Louis 북쪽에 있는 세계 주요 조류보호지구 중의 하나인 빠르 나씨오날 오 외주 두 쥬지(Parc National aux Oiseaux du Djoudj)에 머문다. 세네갈은 지반이 안정적인 곳으로 지진 피해는 발생하지 않으며, 태풍 등 천재지변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높은 파도로 인한 해안침식 현상은 어느 해안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기후는 우계(6~11월)와 건계(12~5월)로 나누어지는데 우계에는 사하라 사막 쪽으로 습기가 많은 남동 계절풍이 불며 국토 전역에 비를 몰고 온다. 건계에는 카나리아 한류寒流의 영향으로 북서쪽에서 서늘한 무역풍이 불어와 연안부에서는 기온이 낮아진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사하라에서 하르마탄이라는 건열풍乾熱風이 불어오므로 기온이 내려가지는 않는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mm 미만인데 북부와 북동부는 적은 양의 비가 오는 반면 남부의 카자망스는 최대 2,000mm의 비가 오는 습윤 열대성 기후이다. 또 남부의 우기는 북부보다 현저히 길다. 가장 더운 달은 9월~10월로 기온이 섭씨 30℃~35℃를 보이며,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섭씨 18℃~26℃를 보인다. 가장 건조한 달은 4월~5월로서 평균 강우량이 1㎜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습한 달은 8월로 평균 강우량이 254㎜를 보인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6. 07:00

 






미국의 남북전쟁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미국은 점차적으로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1803년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루이지애나Louisiana주를 사들여 국토 규모를 2배로 확장한 것을 시발로, 병합·할양·구매 등을 통해 미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59년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0개 주가 성립되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미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American Civil War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쳐야만 했다.

 

흔히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노예 문제는 표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노예제로 대변되는 남과 북의 생활 방식, 특히 경제 구조의 근본적 차이에 있었다. 이미 17세기부터 미국의 남부는 전원적이며 농업 위주였고, 북부는 도시적이고 공업 위주의 경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하여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북부와 동부지방에서는 제조업과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이 둘이 그런 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 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입지는 자꾸만 좁아져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으로 몰려갔으며, 급기야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 기반을 붕괴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남부는 앉아서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연방의회는 이미 북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1860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남부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링컨Abraham Lincoln이 당선됨으로써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남부 7개주가 반발하며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를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북부에 맞섰다.


1861년 4월 남부의 섬터 요새Fort Sumter 공격으로 남북 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우수한 공업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북부가 우세를 보여 결국 1865년 4월 26일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은 종결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전쟁에도 승리했으나, 1865년 노예해방 반대론자 존 윌크스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5. 02:00

 

 




미국의  식민지 시대와

미국의 탄생






오늘날 미국의 역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 발견으로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유럽 지역에 소개된 이후, 16세기 유럽 각국은 남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게 되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Virginia주에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건설한 이후 1733년까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영토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캐나다, 5대호 및 미시시피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식민지들은 계속해서 이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고 경제도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남부에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이 세워지고 유럽, 카리브 해 제도, 아프리카 등과의 무역도 활발하였다. 남부 식민지에서 주로 재배한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은 유럽에서 수요가 많은 작물이었는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남부 농장들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를 구입하여 노동력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영국은 내전 및 명예혁명과 같은 국내의 혼란과 지리적 거리로 인하여 효과적 식민지 정책 집행에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지역의 식민지들은 영국 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았지만 18세기에 경제성장을 이루며 자치 확대의 욕구가 점차 커져갔는데 이를 억압하려는 영국 정부와의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식민지에 부과한 설탕조례Sugar Act(1764)와 인지조례Stamp Act(1765) 등 무리한 세금 정책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영국에서 수입되는 종이, 차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쉔드 법령Townshend Acts(1767)을 둘러싸고 영국과 식민지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5명의 보스턴 시민이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1770.3.5)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Lexington과 콘코드Concord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를 계기로 영국과 미 식민지 양자 간의 무력충돌로 발전하였으며, 1775년 5월에 소집된 식민지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버지니아Virginia주 출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전쟁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인들은 정식군대가 아닌 일종의 민병대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나, 과거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스파니아·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이 참전해 반反영국 진영에 서면서 영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결과로 드디어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열린 제 3회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개 주의 대표들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 공포하였는데 이 날이 후에 미국독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외국의 원조를 얻어 식민지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1783년 9월 3일에는 파리조약Treaties of Paris이 체결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은 공식 종결이 되고 영국은 미국 13개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미국은 강력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1787년 5월부터 9월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헌회의를 개최하였고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여 각주에 회부한 결과 13개의 주 중 9주가 비준을 완료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789년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1789년 4월 30일에는 독립 전쟁의 영웅인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듬해 수도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정해졌다가 1800년에는 워싱턴Washington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4. 17:45




미국의 국토

연환경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U.S.A.)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서, 영토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유럽과 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통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대서양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태평양 지역, 즉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동쪽에는 2,000미터 높이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고도 4,000m 이상의 험준하고 큰 봉우리들이 많은 로키 산맥Rocky Mountains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로키산맥에는 유명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다. 두 산맥 사이에 펼쳐진 대평원 지역에는 광대한 농경지가 존재하여 기계화 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영토가 크다보니 서부에는 사막Desert도 존재하는데,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도 네바다 주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기후 역시 다양하다. 중북부와 동부, 오대호 부근은 겨울에는 북극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대륙성 기후인데 비해 서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지중해 지역처럼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겨울에도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작물도 지중해지역처럼 오렌지와 포도를 많이 재배한다.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기후가 좋아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주는 플로리다Florida이다. 햇볕비치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별명이 ‘선샤인 스테이트sunshine state’이다. 플로리다 반도 남부에는 아열대기후가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열대식물들이 자라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지역은 온난한 기후로 인해 살기가 좋지만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해 있어 지진地震이 잦은 편이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의 많은 건물들을 파괴한 1906년의 지진(진도 7.8)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지진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자연재해로는 카리브 해 연안에서 발생, 멕시코 만으로 상륙하여 동부 연안을 휩쓰는 열대성 저기압 허리케인Hurricane과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빈발하는 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있다.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발생하여 집과 자동차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돌풍인데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강력한 뇌우를 동반하는 토네이도는 허리케인과는 달리 발생과 진행방향의 예측이 쉽지 않다. 최근 많은 피해를 남긴 허리케인으로는 2005년의 카트리나Katrina를 들 수 있는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남부의 뉴올리언스 시의 태반을 물에 잠기게 만들고 2,500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강은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이다. 그 이름 자체가 큰 강이라는 뜻이다. 오대호 근처의 미네소타 주에서 발원하여 미국의 중부 평원지대를 구불구불 만곡하여 멕시코 만으로 흘러가는데 길이가 3,700km에 달한다. 지나는 주들이 31개에 달하며 오하이오 강Ohio River, 미주리 강Missouri River, 아칸소 강Arkansas River, 테네시 강Tennessee River, 일리노이 강Illinois River 등 주 이름의 원천이 된 많은 지류를 갖고 있다. 미시시피 강은 철도시대 이전에는 증기선을 통한 중요한 내륙교통로였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의 무대가 바로 이 미시시피강이다. 미시시피 강에는 몇몇 지역에 얕은 여울이 있어 항해가 어렵지만 연방정부는 운하와 우회수로를 건설하여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대호의 하나인 미시간 호와 연결하는 운하(1848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도 건설하였다. 19세기 중엽 철도시대에는 미국에서 철도건설 붐이 불면서 많은 철도가 놓여 졌으나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광대한 자동차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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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7. 10. 17:51




 

 

 

아프리카 수단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과 수단은 1976년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1977년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77년 4월에 주수단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90년 11월에는 주한 수단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3년 3월 니메이리Gaafar Nimeiri 대통령의 방한과 1984년 10월 타예브El Tayeb 제1부통령의 방한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돈독해졌으며, 여러 분야의 협력관계가 증대되고 있다.

 

경제문화 관계

한국의 대對수단 교역량(2016년 11월 기준)은 수입이 0.1억 달러, 수출이 1.39억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목은 동,연, 알루미늄 스크랩, 식물성액즙 등이고,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및 부품, 건설중장비, 정밀화학원료, 전자부품 등이다.

 

향후 대對수단 진출 유망 분야로는, 먼저 수출유망품목으로 건설중장비 및 자동차부품, 승용차, 화물자동차, 배터리 등 자동차관련 품목이나, 원활한 교역 환경 조성에 따른 소비재 및 경제개발을 위한 기자재 분야의 수요 증가가 전망된다. 또 소비재 분야에서는 화장품, 축전지, 금고, 금전출납계(POS시스템...) 등 저품질의 중국산 제품을 기피하는 소비층 공략이 필요하며, 품질 및 경쟁력 있는 가격대의 제품을 선호하는 성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농·축·광산업 기자재 분야에서는 수단의 광활한 옥토를 활용한 농업 및 축산업 개발 수요의 증가세에 주목하여 트랙터, 콤바인, 이양기, 경운기, 발전기, 관계시스템, 태양광 시스템, 축산 영양제, 항생제 등을 집중 공략할 필요가 있다. 기타 각종 의료용 소모품, MRI, 심전계 등 한국산 의료기기에 대한 선호도도 높은 편이며, 수단 정부의 행정 자동화 및 투명화를 위한 전자정부 시스템 도입 수요에 대비하여 IT시스템 관련 분야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와 수단 간에는 1978년 6월에 무역 및 경제기술협력 협정, 1979년 10월에 문화 협정, 1993년 11월에 의료협력 협정, 2004년 5월에 체육·청소년교류 협정, 2004 9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을 체결하였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수단에서 9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또한 1974년 이래 수단 기술연수생 약 60명이 방한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한국의 섬유기술자 등 10명이 수단에 파견되어 기술지원을 실시하였다. 또한 수단에는 1978년부터 한·수단친선협회가 구성되어 있고, 양국 의원들 간의 한·수단의원친선협회도 1983년에 구성되었다.

 

2016년 현재 수단 내 한국 교민은 60여 명이며, 주요 진출 업체로는 삼성 및 LG지사, 대우 관련 합작회사 등이다.

 


북한과의 관계

수단은 1969년 4월 북한과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같은 해 6월 21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수단은 북한에 원면아라비아고무 등을 수출하고, 북한으로부터 면직·문방구 등을 수입하는 소량의 통상관계가 있으며, 북한이 수단에 청소년회관 건립지원 무상원조를 제공한 바도 있다.

 

수단의 대북한 관계는 중국의 태도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1992년 7월 주수단 북한대사관이 폐쇄(주이디오피아 대사가 겸임)된 이후 명목상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실제 교류는 활발하지 않은 실정이다. 2014년 10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수단을 방문한 바 있으며, 수단 내 친북한 단체로는 수단-북한 친선협회와 코리아 클럽이 있다.

 

수단과 북한 간에는 1969년 4월에 문화 협정과 과학기술협력 협정, 통신기술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0년 8월에 경제·문화 기술원조 협정, 1978 3월에 항공운수 협정을 체결하고, 1999 5월에 수단·북한 외무성간 협조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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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7. 9. 17:48




 

 

아프리 수단의

관광명

 

 




그랜드 모스크 카르툼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진 지 약 100년이 넘으며 적색암으로 지어져서 매우 아름답다.

 

옴두르만 시장Souq Omdurman 수크Souq는 아랍어로 시장을 의미한다. 옴두르만 시장은 수단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구역은 수공예품을 파는 구역으로 영어로도 간단한 의사 소통이 가능하며 흥정만 잘하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제품을 구할 수 있다. 옴두르만 시장은 내부로 들어가면 골목이 매우 좁고 사람이 많아 도난의 위험이 있으므로 방문 시 가급적이면 귀중품은 지참하지 않고, 현금은 잘 보관하여 도난에 주의해야 한다. 시장을 방문 후, 매주 금요일 밤 5시 옴두르만의 Tomb of Sheikh Hamed el-Nil 근처에서 열리는 Halgt Zikr라고 불리는 수피댄스를 보아도 좋다. 초록색과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기도를 드리고 알라를 찬양하며 춤을 추는데, 6시쯤부터 dervish들이 팔을 벌리고 맨발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흰색, 초록색, 호피무늬 옷들이 쫙 펴지고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다.

 

게벨 바르칼Gebel Barkal 카리마는 카르툼에서 약 4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리마에 가면 꼭 가야 할 곳은 게벨 바르칼과 그 주변에 있는 피라미드들이다. 게벨 바르칼은 과거에 이집트인들이 쿠시Kush 왕조를 정복하고 자신들의 신 아문Amun이 태어나고 살고 있는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현재는 고대 나파탄Napatan 유적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게벨 바르칼의 높이는 약 98m이고 위가 평지이며 올라가는 시간은 약 15분 정도 소요된다. 예전에 무역상이 주요 기점으로 활용하였다고 하며 외관이 코브라 모양이다. 누비아 영토로 알려진 건조 지역과 나일 강변 양쪽에 자리 잡은 5군데의 고고학적 유적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가 60km를 넘는다고 한다. 게벨바르칼, 엘쿠루, 누리, 사남, 주마등의 유적은 쿠시 2번째 왕국의 나파탄 문명과 메로에 문명을 보여준다.

 

낙타 사막 탐험 카르툼에서 북부의 카리마까지 약 400km에 달하는 사막을 낙타와 함께 탐험한다. 여행은 약 11일간에 걸쳐서 이루어지며 야간에는 텐트에서 잠을 잔다. 날씨 여건상 프로그램은 매년 3월에 운영된다. 메로에 피라미드 입구에서도 적은 비용으로 낙타를 타고 피라미드 근처를 돌아볼 수도 있다.

 


동골라Dongola 카르툼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수단 북쪽 주의 주도이다. 한때 고대 누비아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1964년부터 폴란드에 의해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고대 동골라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집트와 연관된 유적지가 많고, 현재도 계속해서 유럽 고고학자들의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그중 수단 북부 나일 계곡에서 6세기부터 약 900년 동안 번성했던 마쿠리아 왕국의 수도 ‘동골라’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미스터리 지하실’이다. 이 지하실에는 흰색 벽에 검은색 잉크로 그리스어와 고대 이집트 남부의 언어가 쓰여 있다.

 

누비아Nubia 사막 수단의 북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사하라 사막의 동단에 위치한다. 누비아 사막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은 누비안들로 불리는데. 그들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크고 다양하게 받았다. 수단의 관광 지역인 메로에, 동골라 지역을 방문하면 누비아 사막을 경험할 수 있다. 카리마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누리에 누비아 왕들의 피라미드가 남아있다. 누리의 피라미드는 작은 규모지만 고운 모래 위에 있는 피라미드들로 아름답다.

 

메로에Meroe 카르툼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로서, 차량으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수단에는 총 216개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중 57개가 메로에에 있다. 근방의 나가Nagga 신전과 함께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메로에의 피라미드는 절반 이상이 꼭대기 부분이 폭파되어 있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탐험가 페를리니가 피라미드의 금을 꺼내기 위해 폭파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금들은 현재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프리카에는 두 개의 고대 문명이 확인되었는데, 이집트 문명과 메로에를 중심으로 하는 쿠시 왕국 문명이다. 쿠시 왕국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파라오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반대로 기원전 1000년경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고 레바논, 현재 수단의 카르툼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강국이었다.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호령했던 역사가 한국인에게 자랑스럽듯, 쿠시 왕국의 역사는 수단인들에게 큰 자부심과 긍지의 역사로 남아 있다.

 

메로에 방문을 원할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드라이버를 동반한 렌터카를 이용한다. 메로에는 사막에 위치해 있어 주변에 이렇다 할 숙박 업소가 없기 때문에 여행사에서 메로에 근처에 텐트 형태의 숙소를 마련해 놓고 있다. 날씨 문제로 5월 6일부터 10월 1일까지는 텐트를 폐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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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7. 8. 17:45




 

 

북유럽 덴마크의

근·현대역사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1863~현재)

덴마크는 1863년 왕위에 오른 크리스티안 9세Christian IX(1863~1906년 재위)에 의해 세 번째 왕조인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가 창설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크리스티안 9세가 등극한 1863 덴마크 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킨 뒤에 독일연방에 속해 있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역을 덴마크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과 농업의 집단화(협동농장)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1898년 전국 노동자연합과 고용주협회가 구성되는 등 근대사회로의 이행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근대적 정당으로서 1871년 사회민주당(노동자 중심)과 1880년 자유민주당(농민 중심)이 창당되었고, 이들 두 정당을 주축으로 한 개혁주의자들이 1901년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근대 입헌정치가 개막되었다.

 

1914년 6월 28일에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의 후계자가 세르비아의 국민주의자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내리면서 1차 세계대전World War Ⅰ(1914~1918)이 발발했다. 덴마크는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는 고초를 겪게 됐다. 1918년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의해 패전하자 전쟁이 끝나고, 1920년 덴마크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북 슐레스비히를 되찾을 수 있었다. 덴마크는 세계대전 중인 1915년 헌법 개정을 통해 보통선거제도(25세 이상 남·여에게 투표권 부여) 도입됨으로써 민주제도가 출범하였다. 사회민주당과 급진 자유당(1905년 창당, 소지주·지식층 중심) 오랜 연정(1929~1940) 지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1940년~현재)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World War Ⅱ(1939~1945)이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및 재산을 파괴한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1940년 4월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함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필요한 물자들은 독일군에 빼앗겼고, 덴마크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색출되어 끌려갔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에 의해 종식되자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게 되었고, 1945년에는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덴마크는 인적·물적 희생이 컸으나, 전후 미국의 대외원조계획인 마샬 플랜Marshall Plan 혜택으로 파괴된 기간산업시설, 전력부문, 농업분야 등의 복구가 이루어졌다. 전후에 덴마크는 종래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공동방위를 통한 국가안보 확보 차원에서 스웨덴, 노르웨이와의 방위동맹을 모색하였으나 동 협상이 실패함에 따라 1949년 NATO에 가입하였으며, 그 후 유럽제국과의 경제협력증진을 위해 EFTA(1960), EC(1973)에 각각 가입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유지해 오고 있다.

 

덴마크는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가 창설된 이후 크리스티안 9세, 크리스티안 10세, 프레데릭 9세에 이어 현재는 마르그레트 2세Margrethe Ⅱ(1972년 즉위) 여왕이 덴마크의 국가 원수로 위상을 점하고 있다. 마르그레트 여왕은 프레데릭 9세의 장녀이다. 그녀는 영국과 네덜란드 여왕 즉위에 영향을 받아 1953년에 개정된 새로운 헌법에 따라 여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덴마크 왕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덴마크는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사회복지정책이 비교적 발달되어 있으며 특히 산업기계분야와 낙농분야 등이 우수한 선진국으로서 북유럽 지역과 유럽 본토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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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7. 7. 17:42





 

 

북유럽 덴마크의

중세시대역사

 


 

 

에스트리스Estrith 왕조(1047~1447년)

크누트 대왕이 죽자 3국은 분열되었고,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의 조그만 세력으로 전락하였다. 크누트 왕의 조카 스벤(스웨인) 2세Svend(Sweyn) Ⅱ(1020?~1074)는 덴마크를 노르웨이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1047년에 잉글랜드 교회로부터 벗어나려고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 건설을 지향하면서 최초의 왕조인 에스트리스Estrith 왕조를 창설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후 몇 번의 왕이 교체되면서 다시 왕권이 약화되었고, 덴마크 교회는 함부르크의 세력 하에 있다가 1104년에 독자적인 국교회를 갖게 된다.

 

이후 교회와 국가 내의 분열이 거듭되자 1157년에 크누드 리바르의 둘째아들 발데마르Valdemar den Store 1세(1131~1182)가 일어나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왕은 신성로마 황제에 복종할 것을 맹서하고, 군사력을 증진하고 재편성하여 독일을 견제하면서 발트 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다. 그때 셸란 섬에 구축한 성채가 바로 오늘의 코펜하겐Copenhagen의 기원이 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발데마르 2세(1170~1240)가 즉위하면서 덴마크는 경제적 측면에서 안정이 되었으나 왕과 교회, 귀족 사이의 투쟁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왕국의 힘이 점점 사그라졌다. 12세기 중반부터 전국적으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교회가 확대됨에 따라 국왕, 귀족 및 교회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1282년 국왕에 대한 견제 기능을 보유한 국정 협의 기관으로서 귀족원(다네호프Danehof, 후에 Rigsråd 개칭) 설치되기도 했다.

 



발데마르 4세가 죽자 외손자인 올라프 2세Olaf Ⅱ세(1376~1387 재위)가 1380년 노르웨이 및 아이슬란드를 합병(1814년까지 지속)했고, 이어 발데마르 4세의 둘째 딸 마르그레테Margrete 1세(1387~1397 재위)가 등장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섭정하다가 1387년에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고, 1389년에 스웨덴 왕을 겸함으로써 3국을 다스렸다. 그럼으로써 1397년 비로소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3국 연합체인 칼마르 동맹Kalmar Union(1397~1523)이 결성되었으며, 마르그레테 1세는 정식으로 3국의 북해 제국을 다스리는 여왕이 되었다.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1448~1863년)

1448년 덴마크는 크리스티안 1세Christian Ⅰ(1448~1481년 재위)에 의해 창설된 제2의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1448~1863년)로 교체되지만 3국 연합국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스웨덴에 독립의 기운이 일어나 연합체의 결성이 약화되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Ⅱ는 스웨덴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의 독립군을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독립조직을 와해시켰지만, 끝내 스웨덴은 봉기를 거듭하여 1523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다.

 

1526년 즉위한 크리스티안 3세Christian Ⅲ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루터교를 받아들였고, 자치 능력을 상실한 노르웨이를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원로원과 귀족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 여러 분야의 학자를 배출하여 나라가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프레데릭 2세Frederik II가 집권하면서 덴마크는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스웨덴과 폴란드, 뤼벡 사이의 전쟁에 끼어들었고, 후에 노르웨이 왕이면서 덴마크의 왕인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Ⅳ가 등장하여 상공업을 진흥시키고,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그렇지만 1625년 독일과의 전쟁, 1643년 스웨덴과 네덜란드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에 덴마크의 프레데릭 3세Frederik Ⅲ가 나와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도시 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 받고 1665년에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1788년에 덴마크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덴마크는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을 제정하고, 경제적인 활력에 주력을 가했다. 그러나 유럽의 동맹연합에 대립하여 벌인 나폴레옹 전쟁The Napoleonic Wars(1803~1815)에서 프랑스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 러시아, 스웨덴의 동맹국과 싸웠으나 패하게 됐다. 결국 덴마크는 1814년 킬Kiel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와의 연합을 파기하고,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여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 덴마크와 덴마크령 아이슬란드, 패로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덴마크의 프레데릭 왕정은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1830년 프랑스 혁명 직후 왕권이 크게 약화되면서 1842년에는 덴마크에 입헌적 대의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1849년에 절대왕정 폐지 및 의회(Rigsdag : 상원 Landsting 및 하원 Folketing으로 구성) 신설을 골자로 하는 최초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마침내 프레데릭 7세Frederik Ⅶ는 왕정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헌법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귀족대표 중심의 상원과 소규모 자본가와 평민대표 중심의 하원간의 주도권 경쟁으로 덴마크의 국내 정국은 불안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7. 2. 17:25




 

 

아프리카 수단의

종교 교육

 




종교

전체 인구 중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일부가 수단 성공회, 개신교, 로마 가톨릭 등의 기독교와 토착신앙을 믿는다. 총인구에 대한 종교 분포는 이슬람교가 64%, 기독교는 27% 중 카톨릭이 60%이고 신교가 40%이며, 원시종교는 9% 정도이다. 남부인의 종교 분포로는 기독교가 50%이며 원시종교가 40%, 이슬람교가 10%이다.

이슬람교의 분포는 대부분 수나Sunna파로서 말리키Maliki파 73%, 샤피Shafi파 1%, 안사랄 수나Ansaral-Sunna파 20%, 하나피Hanafi파 5%, 한발리Hanbali파 1%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연유는 서기 1,500년경 수단 서쪽 다르푸르Darfur 지방에서 수단 중남부 세나르Sennar 지역과 소바Soba 왕국을 병합해 세력을 확장한 푼지Funj 왕조가 스페인 계통에서 발생한 말리키 이슬람을 채택하여 그 파가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 언론

수단의 라디오 중파 방송은 5개 지역(옴두르만, 소바, 라이바, 스이냐, 니알라)에서 하루 18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수단 전역의 70 %가 청취 가능하다. TV 방송국으로는 Sudan National Broadcasting Corporation과 Khartoum TV방송국 등 2개가 있으며 1일 8시간 방송하고 있다.

 

신문은 대부분 정부 통제 아래 발행되는데, 아랍어판으로 Al Anbaa(일간), Akhbar Alyoum(일간), Al Wan(일간), Al Anbaa Weekly Review(주간) 등이 있고, 영어판으로는 sudanow(월간), Sudan Vision(일간) 등이 있다.

수단은 초등학교(7~12세), 중학교(13~15세), 고등학교(16~18세), 대학교(19세 이상)의 교육 과정이 있고 교육비는 대부분 국가부담이다. 대학은 대부분 카르툼에 집중되어 있으며 국립 카르툼대(학생 25,000명)가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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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7. 1. 17:22




 

아프리카 수단의

사회와 문화

 




수단은 이슬람 원리주의 지배하에 있는 보수사회이므로 사회 문화적 특성도 이슬람의 율법과 풍습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수단의 사회 정서를 이해하려면 라마단, 살라트, 이프타르 율법 문화와 복식, 음주 및 여가 문화 등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라마단Ramadan(금식) 매년 이슬람력 라마단월에 일출부터 일몰까지 식음을 금지하는 단식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무함마드가 라마단 달(음력인 이슬람력의 9번째 달)에 처음으로 신의 계시를 받은 것에서 유래하며, 이슬람 각국에서 첫 초승달 관측 후 라마단을 발표하므로 국가별로 하루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라마단 한 달간 일출부터 일몰까지 물을 포함한 음식 음료의 섭취, 흡연, 성행위는 물론 폭력, 화, 시기 등이 금지된다. 라마단의 목적은 단식과 금욕을 통해 굶주린 자들의 고통을 체험하고, 인내와 자제력을 연마하면서 신에게 순종하고, 과실과 악행을 속죄함으로써 신앙을 공고히 하는 데 있다.

 

살라트Salat 수단은 코란과 하디스에 나오는 규칙들과 원리들을 판례들과 율법으로 편찬한 ‘샤리아 법’을 적용하는 나라이다. 이슬람은 믿음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실천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으로 신앙고백(샤하다), 기도(살라트), 자선(자카트), 단식(사움), 메카순례(하지)를 의미한다. 이 다섯 기둥 중, 살라트는 매일 5번 새벽 해뜨기 전, 정오, 오후 중간쯤, 해질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해야 한다. 시간은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고, 해당 시간대 안이면 개인이 선택하여 기도를 드리면 된다. 살라트를 시작하기 전 ‘우두(부분 세정)’를 해야 한다. 우두는 손, 입, 코, 얼굴, 팔, 머리, 귀 그리고 발을 씻어야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외적 청결을 넘어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결심도 의미하며, 바닥에 양탄자 또는 수건 등을 깔고 메카 지역의 카바 신전을 향해 행해야 한다.

 

이프타르Iftar 이프타르란 ‘금식을 깬다’는 의미로, 이슬람 신자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일몰 전까지는 금식을 하고 일몰 후에 가족 및 친지와 함께 푸짐한 식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음식의 종류에는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

 

음주 이슬람에서 금기해야할 사항을 하람Haram 이라한다. 음주가 이슬람에서 하람이 되기까지는 몇 가지의 단계가 있었다. 그 중 마지막 단계가 코란 ‘알-마이다’장에 나오는 “믿는 자들이여. 술과 도박과 우상숭배와 점술은 사탄이 행하는 불결한 것들이거늘 그것들을 피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번성하리라.”는 구절이다. 이슬람에서 음주자는 신과 그의 사도들에게 저주를 받는다고 보며, 술자리에 동석하는 것도 하람으로 본다. 또한 음주를 하면 40일간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음주에 대한 하람은 수단 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내국인, 외국인을 불문하고 수단 내에서의 음주는 불법이다.

 


 

히잡Hijab 이슬람 여성 전통의상은 부르카, 니캅, 히잡, 차도르가 있다. 각 의상들마다 몸을 가리는 정도와 형태가 다르다. 부르카는 눈을 포함하여 전신을 가리는 의상으로, 얇은 천으로 장갑까지 착용하기도 하며 아프가니스탄, 이집트의 여성들이 주로 착용한다. 니캅은 눈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의상으로 파키스탄과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의 여성들이 주로 착용한다. 차도르는 얼굴만 내놓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리는 의상으로 이란의 여성들이 주로 착용한다. 히잡은 얼굴만 내어놓는 두건 모양으로, 머리와 귀, 목, 어깨를 가리는 의상이다.

 

수단에서는 주로 히잡을 착용한다. 이 히잡은 코란에도 언급된 의상으로 코란 제24장 ‘빛의 장’ 제31절 중 “가슴을 가리는 머릿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들과 남편의 아들과 그녀의 형제와 그녀 형제의 아들과 그녀 자매의 아들과 여성 무슬림과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하녀와 성욕을 갖지 못한 하인과 그리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외에는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는 부분에 근거한다.

 


여가생활 수단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코란에 있는 안식일에 맞춰 주말을 지정한다. 코란에서 지정하는 안식일은 금요일이며, 이에 따라 여러 이슬람 국가들은 금요일을 휴일로 지키고 있다. 수단은 본래 목요일~금요일 주말제를 시행했으나, 타 문화권 간의 무역 및 금융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근무일의 차이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재계와 금융권을 중심으로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주말 변경 요구가 계속되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금요일~토요일, 또는 토요일~일요일 주말제로 변경하였고, 2008년부터는 금요일~토요일 주말제로 변경하였다. 금요일은 많은 상점과 식당들이 영업을 하지 않으며, 특히 오후 12시~3시 사이에는 대형 몰까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수단은 기본적으로 날씨가 더워 장시간 야외 활동이 쉽지 않고, 여가를 보낼 만한 즐길 거리들이 많지가 않다. 수단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이 나면 가족 및 친구를 방문하는 것으로 여가를 활용한다. 또 결혼식과 장례식의 참석 역시 일종의 여가 활용이다. 왜냐하면 수단 사람들의 결혼식은 음식을 차려 놓고 밤늦게까지 음악을 틀고 춤추고 즐기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많이 꼽히는 현지인들의 여가 활용법은 축구이다. 여가 시설 면에서는 많이 낙후되어 있는 수단이지만, 인공잔디가 깔린 풋살장이 꽤 많다. 젊은 사람들은 유럽 축구 클럽의 유니폼을 외출복으로 즐겨 입으며, 유럽 축구 빅 매치가 있을 때면 큰 TV가 있는 호텔이나 식당에 모여 축구를 시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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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6. 29. 10:30




 

 

덴마크의 고대 역사

바이킹시대

 

 

현재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살펴보면, 덴마크 지역에 인간이 활동한 흔적은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가 겹치는 BCE 10000~BCE 1500년 사이에 덴마크의 주민들은 사냥이나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점차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정착생활로 전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CE 500년경에는 농경을 주로 하는 ‘앵글Angles’ 및 ‘주트Jutes’라는 부족이 처음으로 집단부락을 형성했다.

 

고트족의 한 역사가는 덴마크인들이 원래 스웨덴 지역에 살던 데인Dane족으로 덴마크로 넘어와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덴마크를 세운 민족은 북유럽 바이킹Viking(고대 노르드어로 Vikingr) 계통의 후손인 데인족이라 볼 수 있다. 북유럽의 바이킹족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덴마크를 더하여 세 나라 민족은 모두 바이킹 계통의 정통 후손이라 볼 수 있다.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작은 만’, ‘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vik”에서 ‘작은 만의 거주자’,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란 뜻에서 유래한 것 같다. 노르드어 “비킹르viking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에 남겨진 고대 금석문에서 많이 발견된다.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는 바이킹 족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세기경에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떠나 항해하여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해상무역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바이킹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서 약탈 및 교역을 주도적으로 하면서 활보한 바닷사람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덴마크를 세운 데인족의 바이킹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이다. 이민족(해안가의 노르만족, 동남부의 헝가리족, 마자르족, 슬라브족 등)의 침략에 위협을 받고 있었던 프랑크 왕국의 2대 왕 카롤루스 대제Carulus Magnus(일명 샤를마뉴Charlemagne 대왕, 742?~814)는 북진정책을 펴게 되었다. 그때부터 덴마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792년 카롤루스 대제가 북방의 노달빙기아Nordalbingia를 정복하자 프랑크 왕국의 국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접경하게 된다. 이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던 덴마크족과 핀란드 족은 카롤루스가 정복민을 이상한 종교로 세뇌시킨다는 소문에 분노와 공포감을 품게 됐다. 808년에 덴마크의 고드프리Godfred 왕은 카롤루스 대제의 침략으로부터 덴마크를 보호할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다. 장성이 다 쌓아질 무렵 덴마크의 해적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인 프리슬란트와 플랑드르를 습격하고 돌아갔다. 고드프리 왕은 프랑크 족의 보복이 두려워서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다가 아헨에서 갑자기 살해당하고 만다. 이 시기에 침략을 계획한 카롤루스 대제는 출병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고드프리 왕의 조카이자 계승자인 헤르만 왕은 811년 하순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여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힐리겐 조약을 체결한다.

 


10세기경에 기독교가 북유럽에 전파되었다. 이때에 덴마크의 옐링 지역을 중심으로 고름Gorm 왕조(936?~958)가 일어났다. 고름 왕조의 1세(고름의 아들)가 되는 하랄Harald 왕조(958~986)는 아버지가 시작한 국가 통일을 완수했고, 덴마크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리고 1016년에 덴마크 출신 크누트Knut(크누드Knud) 왕(995?~1035)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는 덴마크의 하랄드 블라톤 왕(940~986)의 손자이며 스베인 튜쿠스케 왕의 차남이다. 잉글랜드의 크누트 왕은 1018년에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세 나라의 왕을 겸하는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크누트 왕은 재위기간에 잉글랜드와 덴마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두 나라 간의 문화가 융화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고, 또한 덴마크 문자와 앵글로 색슨 문자가 혼용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덴마크 출신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국 왕이 되었고, 3국의 왕이 된 것은 크누트 대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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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6. 28. 08:30



 

 

유럽 덴마크의

자연환경

 

 


덴마크의 공식 명칭은 덴마크 공화국Kingdom of Denmark이다. 덴마크는 단마르크 왕국(덴마크어: Kongeriget Danmark)에서 기원한다. 고대에 덴마크 땅에 데인Dane 족이 살았는데, 덴마크라는 국명은 고대 노르드어로 ‘데인인의 땅(Danernes mark)’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G.J.C. Augustus(일명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재위 BCE 27~CE 14)와의 전쟁 때 덴마크에 사는 민족은 왕의 아들 단Dane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승리로 단을 왕으로 모시고 이름을 단마크Danmark로 명명했다는 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평평한 숲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접두사 단dan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국기國旗는 ‘덴마크의 힘’이란 뜻을 지닌 ‘다네브로그Dannebrog’이다. 다네브로그는 1219년 에스토니아와의 전투가 벌어질 때 덴마크 왕 발데마르Valdemar 2세가 전투 중에 하늘에서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를 봤다는 데서 그려졌다는 설이 있다.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의 국기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덴마크 국기와 유사하게 하얀 십자에 파란 십자를 더하여 만든 노르웨이 국기도 등장한다. 아무튼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국가의 국기들 중 덴마크의 국기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는 북해와 발틱 해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본토가 스웨덴 남쪽, 독일의 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윌란Jylland 반도이고, 동쪽으로 퓐Fyn 섬 및 스웨덴 남단 쪽의 셸란Sjaelland 섬을 비롯하여 443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덴마크의 총 면적은 43,094㎢이고, 한반도의 5분의 1 크기로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서일까?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7,314㎞나 될 정도다. 그 외에 덴마크의 자치령으로 북쪽 지방에 그린란드Greenland와 패로Faroe 제도가 있다.

 

덴마크의 평균 고도가 해발 30m로 저지대이다. 빙하에 의한 침식으로 인해 모래와 자갈이 많은 서부 윌란드와 비옥한 평야가 있는 동부 윌란드 지역으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지대가 낮고 모래나 습지, 평야가 많으며 산이 별로 없는 편이다. 최고 높은 산이라고 불리는 곳은 몰레회이Molleǿj인데, 기껏해야 173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지대가 낮은 까닭에, 우리나라 무창포 해수욕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바다가 갈라지는 신기한 현상을 보이는 동네도 있다고 한다. 수도는 코펜하겐Copenhagen(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ǿbehavn)이다. 코펜하겐은 윌란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셸란 섬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에 외레순Ǿresund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의 남단 말뫼Malmö와 인접해 있다.

 

덴마크 땅이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전국에는 많은 철도와 고속도로 및 포장된 도로가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약 420㎞에 달하는 내륙 수로가 있다. 덴마크 국영철도회사가 운영하는 연락선들이 덴마크 여러 섬들과 유틀란트 반도를 연결하고 있으며,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에도 취항한다. 여러 훌륭한 항구들이 15개의 주요 선박회사들에게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준다. 코펜하겐 중심부에서 약 10㎞ 동남쪽에 있는 카스트로프에 국제 공항이 있다.

 


덴마크는 서북지역에서 몰아치는 강한 바람을 맞는 반도 국가이다. 연중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이 특색이기 때문에 바람의 나라라 할 수 있다.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서북부 지역의 농지 주변이나 주택 주위에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 바람을 이용하여 동력을 만들어 내는 풍차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덴마크 서북부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좁은 경작지들을 넓히기 위해 윌란 반도 북쪽 습지를 개척하고 메마른 땅을 개간하여 가축의 사료를 많이 재배하면서 목축업에 종사한다. 여기에서 질 좋은 치즈 및 많은 육류와 달걀 등이 많이 산출되어 덴마크는 낙농업 국가로 발돋움하게 됐다.

 

덴마크의 기후는 북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온난한 편에 속한다. 북대서양 해류(멕시코 만류) 및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 때문이다. 겨울에는 날씨의 변덕이 좀 심하지만 대체로 온난한 편이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의 1월 평균기온이 0.1℃이다. 전체적으로 기온의 연교차는 적은 편이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이 -1.5℃이고 가장 더운 7월의 평균기온이 17℃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다만 겨울이 습하고 일교차가 적어 체감온도는 춥게 느껴진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7. 06:30



지와 행복의 선진 부국

덴마

 



덴마크는 북유럽 바이킹 계열의 데인족이 세운 나라이다. 고대 바이킹 시대의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쳐 8세기경 역사에 본격 등장한 이후, 덴마크는 여러 왕조를 거치며 부침을 겪다가 19세기 중엽에 입헌군주제를 확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덴마크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영위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산업기계 분야와 낙농 분야 등이 우수한 선진국으로서 북유럽 지역과 유럽 본토를 잇는 가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나라이다.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광범위한 사회복지제도를 운영 중이고, 높은 시민의식과 함께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국민성을 갖고 있으며, 국민들이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2. 11:00




아프리카 단의 경제

 

 

 

경제 구조 및 특성

수단경제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경제체제로써 농·축산업(49%), 제조업(16%), 서비스업(35%) 산업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도로, 항만, 전기 사회 간접시설의 불비와 숙련노동력의 부족으로 경제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단은 1989년 6월 30일 혁명 정부 수립 후 과격 이슬람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걸프전에서의 이라크 지지, 남부 내전 난민, 인권문제 등으로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국가재정의 75%에 달하는 대외원조의 중단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어 왔다. 수단은 그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이상 지속된 내전으로 전 국토의 피폐화와 전비지출에 매몰된 경제로 국가재정의 75% 이상을 대외원조에 의존하는 최빈국 중의 하나로 평가되어 왔다. 빈사 상태의 수단 경제를 구한 것은 원유 개발로 1999년 중국 자본에 의해 남부 유전지대와 홍해 석유수출항인 포트 수단을 잇는 1,600km의 파이프라인 완성과 8월 원유 수출 개시로 연 6% 이상의 경제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새로운 유전 발견과 수출확대로 2000~2008년까지 연평균 6%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나 물가급등, 빈부격차 심화, 석유 수입 자금의 인프라 투자 연계 미약 등 문제점도 상존하고 있다.

 

수단중앙은행 통계에 의하면 2015년 말 기준 수단의 교역 규모는 수출이 31억 달러, 수입이 95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석유제품, 원면, 땅콩이며, 주요 수입품은 식료품, 공산품, 수송장비 등이다. 주요 수출대상국은 일본(48%), 중국(31%), 한국(3.8%) 등이며(2006년), 주요 수입대상국은 중국(17.7%), 사우디 아라비아(9%), 아랍에미리트(5.6%), 이집트(5.2%), 독일(5.1%), 인도(4.5%) 등이다(2006년 기준).

 


최근 경제 동향 및 향후 전망

수단은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으나 종교, 문화 등 특징은 아랍 영향권에 속하며, 인구, 면적, 1인당 GDP 등 고려 시 상당한 내수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비옥한 옥토 및 원유, 금 등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농업 및 광물 자원 생산 시장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으로 인한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수단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 대한민국의 10대 수출국가이다.(2016년 11월 기준 1.39억 달러 규모)

 

수단은 경제 제재 장기화로 인한 외환보유고 고갈과 무역적자 지속, 원유가격 하락, 그리고 남수단 원유 수출 분배로 얻던 재정 수입의 대폭 감소 등으로 경제 여건 악화가 지속되어 왔다. 자원 의존적 경제구조로 산업기반이 취약하고, 고정투자 및 FDI 감소, 외채 누적, 경상수지 적자 등으로 경제발전이 지체되고 있으며, 실질적 경기도 후퇴 국면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경제 환경에서 수단은 재정 확보를 위해 곡물 수출을 활성화하고 제조업 투자 유치를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신흥 수출 품목으로 금광 산업을 수출 시장 견인차로 육성하고 있다. 수단은 남아공과 가나에 이어 아프리카 3위의 금 매장량을 주장하고 있는데, 2015년 수단의 금 생산량은 약 80톤 규모이고 향후 매년 45~50톤을 생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단 경제의 향후 미래를 전망해 보면, 약한 경제 기반 및 장기 경제제재로 경제 발전을 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외환보유고 고갈, 무역적자 지속, 원유가격 하락, 남수단과 원유 수출 분배로 재정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수단 정부의 성장 동력 산업 육성 및 정부의 변화 관리 능력 제고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경제제재 해제로 인한 기대심리 상승 및 단기적 물가 상승, 달러화 부족 현상 심화 등 고립경제의 체질 변화가 요구된다. 수단은 앞으로 잠재 해외투자의 유입 확대 및 달러화 거래 자유화로 인한 교역 활성화 등을 통해 경제 발전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1. 09:00





아프리카 수단의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및 행정

수단의 국체는 공화정이며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계속 연임에 성공해 장기 집권 중인 오마르 하산 아마드 알 바쉬르Omar Hasan Ahmad al-Bashir이다. 바쉬르는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총리직을 없애고 대통령이 총리를 겸하면서 대통령 아래에 두 명의 부통령을 두는 체제로 행정을 운영해 왔다. 그런데 최근 수단 의회가 표결을 통해 총리직 복원 등을 포함한 헌법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28년 만에 처음으로 총리를 임명하였다. 2017년 3월 2일 수단의 새 총리에 임명된 바크리 하산 살레Bakri Hassan Saleh 부통령은 바쉬르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인물로, 부통령직을 유지하며 즉각적으로 새 내각 구성에 착수할 것이라고 집권 국민의회당(NCP)이 밝혔다.

 


바쉬르 대통령은 2003년 2월 수단 서부 다르푸르Darfur 주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3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과 관련하여, 상설 전쟁범죄재판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전범 등 6가지 혐의로 2008년 7월 체포 영장이 발부된 바 있다. 그런데 2015년 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50여 개국의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를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하면서 ICC 검찰 당국이 반인륜 범죄 피고로 체포 영장을 발부한 오마르 바쉬르 수단 대통령을 초청했다. ICC 회원국은 체포장이 발부된 피고를 붙잡아 ICC에 인계할 의무가 있는데 남아공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2008년까지 다르푸르 지역에서 자국민 30만 명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바쉬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와 달리 한 지방법원이 인권 단체의 요청대로 바쉬르의 체포를 명했고 이 소식을 들은 바쉬르는 정상회의 도중 몰래 남아공을 빠져나와 귀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는 주권 침해를 이유로 ICC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하고 ICC에 가입 철회를 통고했으나, 지난 2월 22일 남아공 법원으로부터 ‘위헌 및 무효’ 판결을 받아 가입 철회 통고를 취소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지방행정

수단은 18개 주州로 구성되어 있다. 홍해Al-Baḥr al-Aḥmar 주州, 알자지라Al-Jazīrah , 알카르툼Al-Kharṭūm , 알카다리프Al-Qaḍārif , 백나일강An-Nīl al-Abyaḍ , 청나일강An-Nīl al-Azraq , 북부Ash-Shamālīyah , 서부 다르푸르Gharb al-Dārfūr , 서부 쿠르두판Gharb Kurdufān , 남부 다르푸르Janūb Dārfūr , 남부 쿠르두판Janūb Kurdufān , 카살라Kassalā , 나일강Nahr an-Nīl , 산나르Sannār , 북부 다르푸르Shamāl Dārfūr , 북부 쿠르두판Shamāl Kurdufān , 동부 다르푸르Sharq Dārfūr , 중앙 다르푸르Wasaṭ Dārfūr 등이다.

 

입법부

수단의 입법부인 국회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회의에 450석, 상원에 해당하는 연방의회에 50석이 배당되어 있고 임기는 모두 6년이다. 의회의 권한으로는 입법권, 정부예산 심의권, 각료해임 건의권, 선전포고, 비상사태선언 등 모든 입법권을 보유하고 있다.

 

사법부

수단의 사법기관에는 최고재판소, 고등법원, 지방법원, 특별군사 재판소, 종교재판소가 있다. 최고재판소는 위헌입법 심사부(재판장 1, 판사 7명으로 구성), 민사부, 형사부, 행정부, 이슬람교도 신분 관계부, 비이슬람교도 신분관계부(각각 3명의 판사로 구성) 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등법원은 각 주에 지방법원은 주요 도시에 소재하고 있다. 특별군사 재판소는 국가반역죄, 치안유지 위반사건 등을 취급하고, 종교 재판소는 이슬람법에 의거 이슬람교도의 신분소송을 취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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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6. 18. 10:34






아프리 회교국

수단의 역사

 

 




선사시대와 쿠시왕국

수단 지역에는 BCE 8000년경 신석기 문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일 강 지역을 중심으로 어업과 사냥 등으로 생활하던 이들은 BCE 5000년경 사하라 사막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의 인도로 나일 강 계곡에서 농업을 영위하다가, BCE 1070년경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누비아Nubia지방에 쿠시Kush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이외에 고대 문명의 존재가 확인된 곳이 현재의 수단 지역임을 의미한다. 쿠시왕국은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이집트 신왕국의 분열 이후에 세워졌으며 건국 초기에 나파타Napata에 중심을 두었는데, 쿠시 문명은 철기 제련 기술을 사용하던 세계 최초의 문명 중 하나이다. 고전시대에 쿠시 왕국의 수도는 메로에Meroë였으므로, 쿠시 왕국은 메로에 왕국, 누비아 왕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쿠시인인 카시타Kashta 왕은 기원전 8세기에 이집트를 침공해 정복하였다. 이후 쿠시인들은 아시리아가 그들을 쫓아낼 때까지 쿠시인 파라오가 ‘에티오피아 왕조’라 불렸던 25번째 왕조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쿠시 왕국은 기원후 4세기까지 존속하다가 에티오피아 북부에 있던 악숨 왕국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쿠시 제국의 멸망 이후 몇몇 나라들이 이전의 영토에서 세워졌고 그 중에 누비아Nubia도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6세기 경, 메로에 왕국의 정치적 문화적 후계자로서 노바티아, 무쿠라, 알라와 등 50개의 국가가 세워졌다. 540년경에는 비잔틴 황후 테오도라가 보낸 선교사가 노바티아에 도착해 기독교를 설파하기 시작했고 이후 16세기 초까지 수단 지역에는 누비아 기독교 왕조 시대가 이어졌다.

 

7세기 중반부터 수단 지역에 아랍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후 1315세기에는 그리스도교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슬람은 긴 시간에 거쳐 이종결혼(intermarriage)과 아랍 상인들, 수피교 수행자와 정착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수단 지역에 스며들었다. 이들 아랍인들은 원주민들과 뒤섞여 수단인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아랍어를 사용하였다. 오늘날의 북수단 문화에서도 자주 누비아와 아랍의 문화 요소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6세기 경, 푼지Funji라 불리는 부족이 아마라 둔쿠스Amara Dunqus라는 지도자 아래 남 누비아에서 나타나 오래된 크리스천 왕국인 알와의 일부를 탈취해 앗살타나 앗자르카(푸른 술탄국) 혹은 센나르 술탄국(Sultanate of Sennar)이라 불리는 이슬람 국가를 세웠다. 푸른 술탄국은 결국 푼지Funji 술탄국의 뼈대가 된다. 이 왕국은 19세기 초까지 이어지다가 후계 분쟁과 왕족의 쿠테타가 계속되며 쇠락해졌다.

 


오스만 통치기와 마흐디 수단

1821년, 이집트를 정복한 오스만 터키계의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총독이 수단을 침공하여 마지막 푼지 술탄 바디 7세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수단은 이집트의 1개 주로 전락하여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집트 총독 정부의 통치하에서 실행된 부패와 농부들에게 과해진 모진 세금 징수 등의 폐단이 쌓이면서 반정부 저항 활동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1881년 6월 개혁주의적 인물인 알-삼마니야al-Sammaniyya 종단의 지도자 무함마드 아마드 압둘라Muhammad Ahmad Abdulla가 스스로를 마흐디Mahdi(회교에서 구세주)라 선언하고 수단 혁명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서구 지배로부터 벗어나 수단의 진정한 독립과 자유, 이슬람으로의 회기를 주장하며 투쟁 세력을 규합해 종교적 폭동을 일으켰다.

 

그가 이끄는 마흐디군은 마침내 1885년 1월 카르툼을 함락시켜 수단의 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수단의 터키-이집트 정부에 승리를 거두었다. 카르툼 정복 후 몇 달이 지나 무함마드 아마드가 병으로 사망하자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Abdullah Ibn Muhammad가 뒤를 이어 마흐디 운동을 이끌었다. 마흐디 운동을 통해 수단은 처음으로 여러 부족들에 의한 분열된 통치 구조에서 통합된 근대국가로 넘어갈 수 있는 중앙집권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는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1899년 9월 2일 마흐디 군대는 카라리Karari 전투에서 영국 식민주의 토벌대의 키체너Kitchener 장군에게 패했으며, 곧이어 마흐디 국가의 수도로 정했던 움두르만Umm Durmān 함락되고, 지도자인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도 사망함으로써 마흐디 운동은 막을 내렸다.

 


영국-이집트 수단

1899년 수단을 정벌한 영국은 영-이집트 간에 수단 공동통치협정을 맺어 수단 지역을 ‘앵글로이집트수단’이라고 불렀다. 영국과 이집트는 이집트에서 임명한 총독을 영국이 승인하는 식으로 선출한 총독이 수단을 운영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수단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효율적으로 통치되었다. 1924년에 영국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수단인과 수단에 대한 이집트 지배권을 주장하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반발로 수단 총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저항 운동이 극심한 북부 수단에 대해서는 Native Administration제를 도입하고, 남부 수단에 대해서는 Southern Policy를 채택하여 영어, 토착어 장려 및 기독교 포교를 강화함으로써 남북 간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 관계를 단절시켜 상호 괴리를 심화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독립 이후

하지만 계속된 영국의 수단 통치로 인해 이집트에선 갈수록 민족주의자들의 거친 반발이 일어났고 저항운동이 날로 격심하여짐에 따라 이집트와 영국은 북수단과 남수단의 주민들이 영국의 철수를 원하는지 자유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53년 2월 영-이집트 협정에서 수단의 자치 독립을 위한 3년간의 준비기간이 합의되었고, 마침내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11년 만인 1956년 1월, 수단은 영국과 이집트 승인 하에 수단공화국으로 독립을 성취하였으며, 뒤이어 AL(Arab League: 아랍연맹)과 UN(United Nations: 국제연합)의 가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 식민 정책의 결과로 남부와 북부 간의 지역 대립 및 다수 정당의 난립으로 국정의 혼란이 계속되었고, 1958년 11월에는 이브라힘 아부드Ibrahim Abboud 장군이 무혈 쿠테타로 군사 정권을 수립하고 정통 이슬람 국가를 선언하였다. 1964년에는 하르툼 대학생들을 선두로 한 군정반대운동인 10월 시민혁명이 일어나 아부드 정권을 무너뜨렸고, 민간 정치인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어 의회정치 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당쟁과 남부 문제 등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회복치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자 1969년 5월 가파르 니메이리Gaafar Nimeiri 대령이 이끄는 두 번째 쿠데타가 일어나 다시 군정으로 복귀했다. 니메이리의 새 정부는 수단사회주의를 선언하고 국호를 수단민주공화국으로 개칭하였으며, 구정치인 및 반대파에 대한 대 숙청을 단행했다. 외국인 자산과 은행을 국유화하고 경제 원조 및 군사 원조의 대공산권 의존도를 급속히 높였다. 1972년에는 좌익 장교단 쿠테타 음모를 분쇄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타도하고 총선에서 니메이리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수단 사회주의 연맹(SSU)을 창립하고 단일 정당제를 채택했다.

 

1985년 3선의 니메이리 대통령이 외유 중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다하브Abdel Rahman Swar al-Dahab 장관은 1986년 민정 이양과 동시에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이어 1989년에는 오마르 알 바쉬르Omar al-Bashir가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바쉬르는 이후 연이은 집권 연장에 성공하여 2017년 3월 현재까지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수단은 1983년부터 내전內戰을 시작했다. 주로 남부 아프리카계 함족인 기독교도와 토속 정령신앙을 믿는 주민들로 이루어진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아랍계 셈족으로 이루어진 북부 중앙 정부의 지나친 이슬람 원리주의와 차별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인데, 남부 반군측은 남부 지역의 자치권과 자원 이용 확대를 요구하면서 반정부 분리 무장 투쟁을 개시했다. 그간 이 내전의 과정에서 200만 명 이상이 죽고, 400만 명 이상이 강제 추방, 구타, 강간 혹은 고문의 고통을 체험하거나 노예로 팔린 것으로 전해진다. 2005년 1월 남부 반군과 북부 정부군 간의 포괄적 평화협정으로 내전은 종료되고 평화협정에 따라 수단 정부는 남부에 반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그 후 2011년 7월 9일 남부는 독립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률로 남수단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남부와 북부의 인종, 종교적 갈등이 어느 정도는 해결됐으나, 아직도 수단 내에서는 정치의 혼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17. 03:30






아프리카 국가

수단의 연환경

 

 




 

수단 공화국Republic of Sudan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나라로, 국명인 수단은 아랍어로 ‘흑인들의 땅(빌라드 앗수단)’을 뜻한다. 수단은 ‘남수단 공화국Republic of South Sudan’과 구분하는 의미로 흔히 ‘북수단 공화국Republic of NorthSudan’, 약칭 ‘북수단’으로도 불리는데, 2011년 7월에 국민투표 결과를 수단 정부가 수용함으로써 ‘남수단’이 평화적 과정을 통해 독립 국가로 분리되었으므로, 동독-서독이나 남한-북한의 분단 개념과는 다른 경우라 할 수 있다.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에 있으며 홍해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1,861,484㎢로 세계에서 16번째(2016년 기준)로 넓은 나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알제리, DR콩고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한반도의 약 8.6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해안선은 853km이며, 북쪽으로 이집트, 북동쪽에 홍해, 동쪽에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남서쪽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남쪽에 남수단, 서쪽에 차드, 북서쪽으로는 리비아와 접경하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Nile 강이 수단을 동쪽과 서쪽으로 가르며 흐르고 있다.

 


국토는 나일 강 연안을 제외한다면 평야와 고원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남부에는 1,500m 이상의 이마통Imatong 및 누바Nuba 산맥, 서부에는 자벨 마라라Jabel Marrah 라는 3,024m의 사화산, 그리고 북동부에는 레드 시 힐Red Sea Hill 등이 있다.

 

백나일 강과 청나일 강이 수단에서 합류하여 이집트와 지중해를 향해 흘러간다. 청나일 강은 길이가 800km로 이어지며 딩다 강과 만나기도 한다. 백나일 강은 뚜렷한 지류가 수단 내에서 없다. 댐이 여럿 있으며 누비아 호수 인근에 이집트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나일 강 부근의 지나친 경작과 계속적인 사막화로 인하여, 농경지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수단의 교통 상황은 영국 통치시대에 건설된 철도와 나일의 수로가 전통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공업화 정책에 따라 도로의 정비가 추진되고 있으나 현재에도 우기에는 간선도로 이외의 곳에서는 교통이 곤란하다. 차량은 우측 통행이며, 도로가 협소하고 노후 차량들이 많은 관계로 도로별 속도 제한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안전벨트 착용을 하지 않으며, 시내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편리한 곳에 주차하면 된다. 로타리 회전 시 좌측 차량에 우선권이 있다. 최근 중고차 수입으로 거의 50%의 차량이 한국차이다. 햇볕이 강하므로 창문은 썬팅을 하는 게 좋으며, 열악한 도로 사정과 수명 연장을 위해 내구성이 강하고 잔고장이 적은 디젤 차량를 구입, 운행하는 것이 유리하다. 비가 내리면 수도인 카르툼 전역에 도로가 통제되고 대중교통이 운영되지 않기도 하는데, 이는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아 도로 침수가 심해 운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기후는 남부가 열대성 기후이고, 사막에 접해 있는 북부는 건조한 사막기후(습도 15% 이하)로 1~2월을 제외하고는 연중 고온의 매우 더운 날씨가 지속된다. 여름에는 온도가 40도 후반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습도가 낮아 그늘에 가면 지낼만 한 수준이다. 사막, 스텝, 사바나, 열대우림성으로 바뀌며 남하할수록 강우량이 많아지고 기온도 높아진다. 3~6월, 8~11월은 고온 건조하고 자외선이 강하다. 낮에는 뜨거워서 야외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야간에도 30도 중반을 유지한다. 7~8월에는 우기로 습도가 높고 갑자기 다량의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지만 몇 차례 되지 않는다. 남부지방의 경우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12~2월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유사하며 건조하지만, 밤낮 기온차가 상당히 크다.

 


수단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기상 현상으로 하붑Haboob이라는 것이 있다. 하붑Haboob은 아랍어로 강풍, 폭풍, 또는 먼지폭풍을 뜻하는 말로, 수단에 불어오는 모래폭풍을 의미한다. 하붑은 주로 여름철에 뇌우가 최종 단계에 다다랐을 때 생기는 하강 기류에 의해 발생한다. 하강 기류가 강하하는 공기를 지표면에 부딪치게 해 사하라 사막에 있는 대량의 먼지를 들어 올리게 되고, 이렇게 모인 먼지 구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하붑을 형성하게 된다. 하붑은 사막지형인 수단에서 매년 나타나며, 중동지역, 미국에서는 기온이 높은 애리조나나 텍사스 등지에서 가끔 나타나기도 한다. 수단에서는 보통 4~6월 사이에 하붑이 불며, 때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지만 심한 경우에는 초속 17~25m의 강풍이 수백 미터의 높이로 불어 한 시간 이상 지속되기도 한다. 하붑이 불어올 때의 먼지 농도는 한국에서 부는 황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짙어 건강에도 매우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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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8. 16. 23:54



흔들리는 ‘불의 고리’ 일본에 이어 에콰도르에서도 강진




지난 4월 14일 밤 9시 26분경 일본 구마모토 현熊本縣에서 진도 6.5의 강진이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최악의 지진이었다. 최초의 강진 이래 진도 1 이상의 여진이 470회 넘게 구마모토 현과 그 주변을 덮쳤다. 첫 지진으로 약해진 산과 집과 도로에 여진으로 추가 충격이 오고, 그 위에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기울어가던 집이 마저 무너졌다. 지진 피해자는 18일 오전 0시 현재 사망 42명, 부상 2,000여 명이다. 또 단수斷水와 단전斷電으로 19만 명 이상이 피난 길에 올랐다. 일본 국토지리원은 이번 지진의 파괴력이 1995년 오사카, 고베 지역을 덮친 한신 대지진의 1.4배였다고 분석했다. 이번 지진으로 이 지역 지각이 최대 97㎝ 남서쪽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피해자 숫자로만 따지자면 이번 지진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나 1995년 한신阪神 대지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번 지진으로 충격에 빠져 있다. 구마모토 현이 속한 규슈九州 지역은 지난 100년간 규모 5.0이 넘는 지진이 거의 일어난 적이 없는 ‘지진 안전지대’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번 지진은 일본인들에게 세 가지 면에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첫째로 강진 후 16배 더 강한 지진이 왔다. 이번 지진은 일반적으로 본진本震 뒤에 여진이 뒤따르는 ‘본진-여진형’ 지진 패턴이 아니고 이례적으로 강도가 큰 지진이 온 다음 그보다 더 큰 지진이 뒤따르는 ‘전진前震-본진형’이라는 것이다. 16일 지진(7.3)은 이틀 전 지진과 비교해서 파괴력이 16배나 더 컸다. 지진의 규모가 0.2 증가할 때마다 파괴력 규모는 2배씩 커지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신 대지진보다 1.4배 센 지진이었다. 지진 발생 시 에너지양을 나타내는 지진 규모는 한신이 7.2, 구마모토가 7.3으로 0.1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에 따른 파괴력은 구마모토 쪽이 1.4배나 더 강했다는 뜻이다. 만약 이번 지진이 대도시에서 발생했을 경우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셋 째로 이번 지진 이후 전국적으로 지진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구마모토 지진 이후 지진 발생지는 북동쪽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 16일 오전 3시 55분에는 아소에서 규모 5.8 지진이, 오전 7시 11분에는 오이타에서 규모 5.3 지진이 연달아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선 이번 지진이 이른바 ‘광역화 지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넓은 지역에서 큰 지진이 따로 이어진 것은 근대 지진 관측 시작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일본 구마모토 현의 2차 지진 발생 31시간 뒤 태평양 반대편 남미 에콰도르Ecuador에서도 강진이 발생했다. 4월 16일 저녁 6시 58분(현지 시각) 에콰도르 수도 키토Quito에서 서쪽으로 170㎞ 떨어진 태평양 해상에서 발생한 규모 7.8 지진으로 최소 233명(18일 0시 현재)이 숨졌다. 이번 지진은 1,000여 명이 넘게 숨졌던 1987년 규모 7.2의 지진 이후 에콰도르에서 발생한 가장 큰 규모다. 에콰도르 지진 7시간여 뒤 남태평양의 섬나라 통가Tonga와 피지Fiji에서 각각 규모 5.8과 4.9의 지진이 일어났다. 또 이에 앞서 16일 오후 8시쯤(현지 시각)에는 대만Taiwan 남동부 타이둥臺東에서 동쪽으로 80㎞ 떨어진 해상에서 규모 4.9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렇게 태평양 연안 지역에 강진이 잇따르자 환태평양 지진대를 일컫는 말인 ‘불의 고리(Ring of Fire)’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90%, 규모 7 이상의 대형 지진의 80%가 이 일대에서 발생한다. 특히 올 들어 불의 고리의 동서남북 곳곳에서 지진이 잇따르는 양상이다.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Vanuatu에서는 이달 들어 규모 6.0 이상의 지진이 네 차례 발생했다. 지난달에는 러시아 동부 캄차카반도와 알류샨열도에서 규모 6.0 이상의 지진이 일어났다. 미국지질조사국(USGS)이 ‘심각한(significant) 단계’로 분류한 규모 4.0 이상의 지진 발생 추이를 보면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총 39건이 발생했는데 그중 29건이 ‘불의 고리’에서 일어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지구촌 전역의 규모 4.0 이상 지진 발생 건수(26건) 및 불의 고리 지역 발생 건수(21건)를 넘어서는 수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6. 3. 28. 15:30



수도 소피아와 플로브디





수도 소피아Sofia는 유럽에서 매우 오래된 도시로 꼽힌다. 신석기 시대인 7천년 전의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소피아라는 이름은 투르크 시대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 도시에 있는 오래된 성소피아 성당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고대에 이 도시의 이름은 세르디카Serdica였다. 이는 세르디 부족이라는 이 지역에 살던 트라키아 부족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세르디카는 필립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다.(BC 29) 그 후 트라키아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가 로마식 도시로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 (98~117) 때였다. 로마식 광장과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신기두눔(현재의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과 비잔티움을 연결하는 군사도로 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3세기에는 다키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중요한 도시이다 보니 로마 황제들도 몇 명 배출하였다. 3세기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갈레루스 황제가 이곳 출신이다. 갈레루스 황제는 311년 기독교 박해를 끝내는 칙령을 이곳에서 발표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동로마의 수도를 정할 때 여러 후보 도시들을 고려하였는데 그 가운데 세르디카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세르디카는 447년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한 세기 뒤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 시대에는 근 4세기 동안 루멜리아 총독관구의 수도였다.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의 지배 하에서 소피아는 오스만 풍의 도시가 되어갔다. 성소피아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모스크로 탈바꿈하여 17세기에는 100 개 이상의 모스크를 헤아리게 되었다. 

1878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불가리아를 오스만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소피아 시내에 있는 큰 성당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은 바로 투르크와의 이 전쟁에서 죽은 러시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성당이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라는 이름은 키에프 시대에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러시아를 지킨 인물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반열에 오른 러시아의 영웅 이름이다. 이 성당은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성당으로 불가리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꼽힌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보다는 규모가 훨씬 작지만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성당이 성소피아 성당이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당과 비슷한 시기인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지어졌다. 소피아는 그리스 말로 지혜라는 뜻으로 지혜를 신격화하여 숭배한 초기 기독교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소피아 성당은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래서 내부 건축도 이슬람 양식으로 개조되었는데 그 자취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에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20세기에 복원한 것이다.


성소피아 성당에서 걸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면 대통령 궁이 나온다. 대통령 궁 근처에는 국립고고학 박물관이 있는데 청동기시대 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고고학 발굴을 통해 얻은 로마시대와 비잔틴 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피아 교외 비토샤 산 밑에는 또 국립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시내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는 달리 널찍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가리아의 최고 명문대학 소피아 국립대학이 있다. 1888년에 설립되었지만 이 대학의 정식 명칭에는 중세 때의 인물인 ‘성클리멘트 오리드스키’의 이름이 붙어 있다. ‘성 클리멘트 오리드스키’는 오리드의 성클리멘트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보리스 칸 때에 성직자 양성을 맡았던 두 개의 학교 가운데 하나인 오리드 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오리드는 지금은 인접 국가인 마케도니아에 속해 있지만 당시에는 불가리아에 속했던 도시로 한 때는 365개의 성당이 있어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도시이다. 오리드에는 고대 로마의 유적 뿐 아니라 중세 불가리아 시대의 성벽과 성당들이 한 곳에 밀집해 있는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소피아 대학교는 처음에는 규모가 아주 작아서 일곱 명의 교수와 49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역사문헌학부와 수학물리학부로 출발하여 법학부, 의학부 등이 추가되어 현재는 16개 학부가 있으며 24,000 명 이상의 학생이 여기서 학문을 연마하고 있다.

수도 소피아가 인구가 122만에 달하는 도시라면 불가리아 제2의 도시인 플로브디프는 인구가 34만 정도의 도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소피아에 뒤지지 않는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이다. BCE 4천년의 신석기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이 도시는 트라키아인들의 도시였는데 BCE 6세기 말에는 다리우스 대왕에 의해 정복되어 페르시아의 지배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트라키아인들은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 필리포스 대왕이 이 도시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필리포폴리스’라고 부른 것이다. 플로브디프라는 현재의 이름은 필리포폴리스의 트라키아식 지명인 ‘풀푸데바’에서 왔다.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의하면 이 도시는 필리포스 대왕에 의해 추방된 범죄자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트라키아 인들 마케도니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위에서 실질적으로 이 도시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1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트리몬티움’(세 언덕의 도시)이라고 불리게 된 플로브디프는 트라키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세운 공공건축물들이 즐비한 도시가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구시가지에는 극장, 경기장, 수로 등 다양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로마시대에는 교역도 매우 번창하였는데 노예무역이 번창하여 ‘노예들의 도시’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이다. 많은 고대 유적지들을 가진 유수한 역사의 도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플로브디프는 번영을 구가하는 주요한 상공업 도시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상공업의 번영에는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유입된 해외자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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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8. 10:30



장미, 요구르트, 포도주의 나라 불가리아



우리나라에는 불가리아가 장미의 나라, 요구르트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불가리아 인들은 장미를 관상용이 아닌 향유생산을 위해 대량으로 재배한다. 발칸 산맥 남쪽 산록에는 ‘장미계곡’이라는 장미생산지가 있어 많은 양의 장미를 재배한다. 카잔라크 시 근처의 장미계곡은 기후로 볼 때 장미재배에 적합하다. 장미꽃은 5, 6월에 집중적으로 채취하는데 이 시기에는 장미축제가 열려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불가리아는 세계적인 장미유 생산지로서 전세계 생산량의 7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불가리아에 향유용 장미가 도입된 것은 오스만 시대 초기에 투르크인들이 이란으로부터 들여온 것이라 한다. 불가리아의 장미유는 그 품질이 세계 최고로 이 때문에 불가리아의 장미유 산업은 중요한 산업의 하나가 되었다.


요구르트(Kiselo Mlyako; Bulgarian Yoghurt)는 불가리아 인들의 주된 음식 가운데 하나이다. 불가리아는 요구르트를 자신들이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인이 어렵지만 불가리아에서 세계 최고의 요구르트가 생산되는 것은 맞다. 이는 불가리아가 유목민족에 의해 세워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가리아는 포도주로도 유명하다. 아마 유럽에서 가장 포도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오래 된 나라일 것이다. 고대 트라키아 인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축제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현재 질 높은 포도주가 생산되어 수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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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8. 02:23


불가리아의 한류 바람



불가리아에는 한류 바람이 불고 있다. 신맹호 주불가리아 대사가 지난 5월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불가리아의 한류는 학교교육과 밀접하게 엮여 있어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국립 소피아 대학에 한국학과가 있고 석박사 과정도 개설되어 있다. 또 불가리아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공립학교에는 2011년 고등과정에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공부하는 반이 생겼고, 초등과정에도 2013년 한국어반이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의 유수한 지방대학 세 군데에 한국어 과정이 개설되어 있고, 전국에서 세 번째 큰 지방 고등학교에서도 주말 한국어반을 조만간 정식 한국어반으로 개설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 때문에 개인적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다. 소피아에 2013년 세종학당이 생겼는데 수강생이 70명에서 100명으로 늘었으며, 한국어만 가르치는 사설학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큰 이유에 대해 신맹호 대사는 불가리아가 역사적으로 주변국들로부터 시달림을 많이 받은 데다 가족 간 유대가 강한 문화가 있어서 우리와 감정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으며, 휴대폰 등 한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와, 한국의 빠른 경제발전에 대한 경이감도 작용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한류는 문화적 현상일 뿐 아니라, 우리의 기술과 경제력까지 결합된 종합적 현상이며, 서양의 문화적 틀에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 자본과 기술을 조화롭게 섞어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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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7. 12:00




한국과 불가리아의 관계





북한과는 공산주의 시절부터 외교관계를 맺어왔던 불가리아는 1990년 한국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2년 후에는 한국어강좌가 소피아대학교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한국학과도 설치되어 있다. 최근 한류의 영향 때문에 한국학과도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아직 양국 사이의 경제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 양국 간의 무역액은 3억 달러 정도이며 한국은 불가리아의 중요한 무역상대국은 아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한국인들에게 점차 관심을 끌고 있다. 얼마 전부터 동유럽이 관광지로서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불가리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동유럽 진출을 원하는 삼성, LG 등 몇몇 대기업들이 이곳에 진출해 있다. 2013년 12월 현재 한국 교민의 수는 170여 명(공관원, 지상사원, 선교사, 유학생, 자영업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불가리아의 뿌리가 중앙아시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양국 간의 문화적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문화적 및 경제적 교류확대로 이끌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 생각된다. 

2015년 5월 14일, 로센 플레브넬리에프 불가리아 대통령은 한국과 불가리아 수교 25주년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 정상은 현재 양국 교역이 연간 3억 달러 규모에 불과하고 투자도 미흡한 상황이지만, 한ㆍEU FTA 및 양국간 보완적 산업구조 등을 감안할 때 교역과 투자가 확대될 여지가 크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 10월 양국 정부간 제1차 경제 공동위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4년째 개최되지 않고 있는 양국 산업부처간 산업협력위도 조속히 개재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양 정상은 교육ㆍ투자 등 실질협력 확대를 위해서 민간 차원의 협력 강화가 중요하다는데 공감하며 2004년 이후 중단된 한ㆍ불가리아 민간경제협력위원회도 재개되도록 양국이 관심을 갖고 노력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더불어 과학기술 MOU를 체결하고 기초과학이 뛰어난 불가리아와 응용과학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한국이 서로 윈-윈할수 있는 협력모델을 구축해 나가기로 했다. 양국 정상은 불가리아의 에너지, 교통, 물류, 전자정부 분야 각종 대형 인프라 사업에 높은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이 참여하는 것에 대해 인식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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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7. 07:30




불가리아 사회와 문화





인구, 언어 및 민족 특성
불가리아의 전체 인구는 692만 명(2014 통계)이다. 이는 EU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하며 EU 내 16위에 해당한다. 인구의 69%가 도시 거주로 집중돼 있으며 주요 도시별 인구는 소피아 120만 명, 플로브디프 34만 명, 바르나 33만 명 등이다. 평균 수명은 남자 70.6세, 여자 77.6세를 기록하고 있다. 

불가리아의 언어는 불가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러시아어와 영어, 불어, 독어, 터키어, 마케도니아어 등은 상용어로 쓰이고 있다. 불가리아어를 구사할 경우, 슬라브 민족 나라의 국민과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한 편이며, 최근 젊은층에서는 영어 구사자가 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불가리아는 북방유목민의 자취가 남아서인지 제천문화의 전통과 가족 단위의 유대감, 언어의 구조와 풍습 등에서 우리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또한 불가리아인은 서양에서 유일하게 갓난아기의 엉덩이에 반점(일명 몽고반점)이 있는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종교 및 교육
종교 분포는 인구 중 83%가 불가리아 정교이며, 12%는 회교, 기타 카톨릭 및 개신교로 구성된다. 종교적 차별 또는 분규는 없으나 개신교에 대해 비교적 배타적인 성향이 있다. 불가리아의 교육시스템은 16세까지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는데, 취학 이전의 교육과 초등(1~7학년) 및 고등 교육으로 구분이 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교육은 경영, 경제, 금융, 회계, 관광, 서비스 분야 2년의 과정으로 수료자에게 자격증(diploma)이 부여되며, 해당 분야 취업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대학교육은 전국 50여 개의 대학이나 전문 고등교육기관(Academy,Institute)에서 실시되는 바, 각 대학이 독자적으로 학생 수, 입학시험을 포함한 제반사항에 대해 결정하며, 각 과정은 시험 등 소정의 절차를 거쳐 입학한 이후에 각각 4년, 1년-2년, 3년 이상의 수학이 필요하도록 되어 있다.


한-불 문화교류
한국과 불가리아는 문화 협정과 한국과 불가리아 간 청소년 분야 협력 약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양국 간에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불가리아에서의 한국학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한국학 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불가리아 소피아 대학교에 한국학 센터를 두고 있으며, 매년 한국학 학생 교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고, 동유럽 한국어 교육학회 학술대회를 지원한다. 또한 불가리아 4개 도서관에 한국 소개 기초 자료를 배포하고 있으며, 18번 외국어고등학교에 한국어반을 개설하였다.


그밖에도 한국 정부는 최초로 불가리아에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 사업을 시행한 바 있으며, 2008년과 2010년 불가리아 국립문화궁전이 개최한 국제영화제에 한국 영화가 소개되었다. 그리고 정보통신협력센터(ITCC, Information Technology Cooperation Center)에서는 2011년 6월부터 매주 수요일 한국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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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7. 02:16




불가리아 경제 개선책 및 향후 전망





불가리아는 더욱 신속하고, 보다 포괄적이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 포괄적인 개혁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 보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모든 국가들의 장기 성장에 대한 주요 결정요인인 높은 생산성 증가가 요구된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2015년 국가 경쟁력 분석 자료에서는 불가리아가 법인세 등 저렴한 세금, 안정적인 생활비 수준, 경영인력 임금 수준 등은 강점으로 평가되지만, 경제탄력성 부족, 경쟁력 강화 입법 미비, 금융 규정 준수 취약, 대학교육, 교육경영 및 지식교류 저조 등은 약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2014년 은행위기, 정부지출 증가도 경쟁력을 약화시킨 요소로 평가되며, 실업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으나 여전히 높은 편에 속한다. 더불어 2015년 불가리아의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극복해야할 과제로는 부정부패 척결, 공공행정 효율성 향상, 혁신-성장을 추구하는 교육개혁, 에너지 복지 및 에너지원 다원화, 국가브랜드 구축 등을 들었다.

2015년 불가리아의 경제성장률에 대해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는 1.7%, IMF는 1.2%, EBRD(유럽재건개발은행) 및 EU 집행위원회는 1.0%로 각각 전망했다. 성장 요인으로는 유로존으로부터의 해외수요 증가, 낮은 국제유가, EU 자금 흡수 증가 등이 있으며, 성장 저하 요인으로는 그리스 사태, 높은 실업율, 저조한 국내수요, 높은 대출금리 등이 존재한다.



교역현황 
불가리아는 2014년 무역 적자 79억 레바를 기록했다. 수출이 전년 대비 0.7% 감소한 432억 레바, 수입은 전년 동기대비 1.2% 증가한 511억 레바였다. 한국과 불가리아의 2014년 교역규모는 총 3억 788만 달러로, 한국의 대對불가리아 수출은 1억 1780만 달러(합성수지 승용차 폴리에스텔섬유 타이어 및 기타 전자응용기기 등), 대對불가리아 수입은 1억 9008만 달러(판유리 사료 직물제의류 및 곡류 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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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6. 17:00



불가리아 경제구조와 동향




경제구조 불가리아의 경제구조는 국내총생산 가운데 서비스업이 54.3%, 공업이 32.1%, 농·임업이 13.6%를 차지하는 형태(2006 기준)로 이뤄져 있다. 불가리아의 농업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감소하고 있으나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작면적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곡물류와 채소· 과일 등 외에 장미유薔薇油 생산은 연간 약 1,000kg으로 세계 제일이다. 어업 외에 축산에서는 전통적인 양돈이 유명하다. 

1989년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도입 이후 농·공업부문의 생산 비중이 감소된 반면 서비스 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관광업도 성장 가능 산업으로 중시되고 있다. 석탄 석유 철 망간 납 아연 등의 광업은 개발 가능성이 높다. 전력電力은 90%가 화력발전이며, 에너지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가스 원유 석탄을 수입한다. 기계, 화학(비료 황산 등), 경전기輕電機 공업이 비교적 발달하였으며, 경공업은 면직을 중심으로 모직 견직 등의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이 두드러진다. 



경제동향 불가리아는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늦게 경제개혁에 착수한 나라였다. 후발 주자였던 데다가 공산권 시장의 붕괴, 높은 외채비율, 중요 교역국인 이란 이라크 리비아 등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로 인해 여러 가지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1989년에는 채무 상환의 어려움으로 지불 유예 조치를 선언했고 1987년부터 루세, 부르가스 등에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해 외국의 투자를 유도했으나 1990년대 초반까지는 불안정한 경제개혁으로 외국인 투자는 미미했다. 

세계은행의 국가진단보고서(2015년 7월)에 의하면 불가리아는 1997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1998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바뀌면서 소비증가, 소득증대, 고용확대가 계속되었고, 국내정치 및 경제가 안정된 2000년에서 2008년 사이에는 외국인 투자와 고정투자의 급증으로 PPP GDP(구매력평가 국내총생산) 9.1%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 위기의 해인 2008년 이래 경제발전은 부진하고 빈곤은 증가하였으며, 최하 40%의 소득 증가는 미미한 상태로서 현재 불가리아는 EU내 가장 빈곤이 심한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2009년 세계 경제 위기는 유로존의 위기와 자본 유입과 은행 대출을 활성화시키던 불가리아 투자붐을 중단시켰다. EU 통계청(Eurostat) 자료에 따르면 2008~2013년 불가리아의 PPP GDP(구매력평가 국내총생산) 성장이 1.2%까지 둔화되었다(같은 시기 주변지역은 평균 1.6% 달성).



불가리아가 경제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기업 자원과 산업 분야의 잘못된 분배와 그 정도의 심화 때문이다. 불가리아의 경우 산업 분야가 다양하지 않으며 2000년 이후 생산성이 낮은 분야인 산업 및 서비스업 분야에 고용이 증가했다. 타 국가의 경우 수출 분야의 증가가 많은 변화를 초래해 왔으나 불가리아는 1990년 중반 이후 이 분야 역시 침체되어 있다. 불가리아는 중/고 첨단기술의 활발한 수출에도 불구하고 그 수출량과 수출의 생산성 증가는 제한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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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6. 08:30




불가리아 정치





불가리아는 1947년 인민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공산정권이 붕괴된 이후인 1991년에는 자유 민주주의 신헌법을 제정했다. 현행 헌법에 의하면 불가리아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혼합형의 의회민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 중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의 주요 권한으로는 총선실시권(대통령이 총선 이후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 대해 3차례의 조각을 의뢰했으나 모두 실패할 경우, 의회 해산 및 총선실시권 행사), 법률 거부 및 공포권(의회에서 통과되어온 법률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으나, 의회 재통과시에는 대통령이 이를 공포), 기타 군 통수권, 외교사절 임명접수권, 사면권 등이 있다. 현재 불가리아 대통령은 2012년에 취임한 로센 플레브넬리에프Rosen Plevneliev이다. 




행정부
총리는 정부의 수반으로서 실질적 권한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총선 결과를 놓고 제1당, 제2당, 자신이 지명하는 정당에 대해 차례로 정부 구성 권한을 부여하는 바, 동 권한을 받은 정당은 총리와 내각 구성원(각료) 명단을 의회에 제출해 동의를 받아야 하며 의회 재적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면 내각이 성립된다. 내각(Council of Ministers)은 국가의 내정 및 외교 정책 이행을 총괄하고 공공질서와 국가안보를 보장하며 명령(Decree), 포고(Ordinance), 결의(Resolution) 등을 채택하고 시행한다. 민주화 이후 불가리아는 여러 차례의 총선을 통해 내각이 교체되어 왔는데, 최근 2014년 10월 치러진 총선 결과 유럽발전시민당(GERB)과 개혁블록(RB)의 연립정부 출범이 결정되어 11월에 보이코 보리소프Boyko Borisov(유럽발전시민당GERB)가 총리에 취임하였다.



지방행정
불가리아는 28개의 지역(region)으로 구분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가교 역할을 하는 각 지역별 지사(governor)는 내각에 의해 임명된다. 각 지역은 1개(소피아시) 또는 1개 이상의 자치 단체(municipality)로 구성되는데, 자치단체는 시장(mayor)과 지방의회(council)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시장과 지방의회 의원은 해당 지역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입법부
의회는 단원제로서 4년 임기의 의원 240명으로 구성된다. 선출 방식은 비례 대표제(209) 및 다수 대표제(31)가 혼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주요 정당들로는 유럽발전시민당(GERB), 사회당(BSP), 권리자유당(MRF), 불가리아부흥대안(ABV), 아타카Ataka당, 애국전선(PF), 검열없는 불가리아당, 개혁블록(RB), 푸른연대(The Blue Coalition), 사회정의당(OLJ) 등이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독립적 국가 기관이며, 법관의 독립이 헌법에 근거하여 보장되고 사법부의 예산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사법제도는 3심제로 운영되고 일반적으로는 시·군법원(Regional Court), 지방법원(District Court), 항소법원(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단계를 밟는다. 행정사건의 경우에는 항소법원과 대법원 대신 최고행정법원(Supreme Administrative Court)이 그 역할을 하며, 군사 사건의 경우에는 군사법원(Military Court), 군사항소법원(Military Appellate Court), 대법원(Supreme Court of Cassation)의 절차가 적용된다. 이외에도 특정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최고사법위원회, 검찰(Prosecuting Authorities), 수사기관(Investigation Services)을 사법부 내에 설치해 운영한다. 대법원장, 최고행정법원장, 검찰총장은 7년 임기로 임명되고 중임이 불가하며, 법관에 대한 임명, 승진, 파면 등의 인사 조치는 최고사법위원회에서 담당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6. 3. 26. 02:09




불가리아 공산화와 민주화의 정치 과정





영토상의 불만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섰던 불가리아는 결국 패전국이 되었고, 1919년 승전국과 맺은 뇌이Neuilly 조약으로 영토의 일부를 상실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1930년대 이후 독일과의 밀접해진 경제관계 때문에 독일 편에 서게 되었다. 그 결과 1944년 9월 소련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소련군의 침공에 맞춰 불가리아의 좌익 진영인 ‘조국전선’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46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공산당은 조국전선의 모든 세력들을 축출하고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마침내 1946년 9월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소련헌법을 모방한 헌법이 제정되었다. 농업과 산업이 국유화되고 불가리아는 이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소련의 가장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동구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소련 군대가 직접 주둔하지는 않았다.




공산당의 지배는 소련의 붕괴로 인해 종식되었는데, 1989년 11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있은 후 공산당은 일당독재를 포기하고 35년 동안 불가리아를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 공산당 서기장을 퇴진시키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민주화를 수용했고 당명도 사회당(BSP)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불가리아의 민주화 혁명은 루마니아의 유혈혁명과 구분지어 ‘푸른 혁명’이라고 불린다. 1990년 6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으며, 1990년 11월에는 국명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1990년 10월 민주세력동맹에 대한 지지율이 사회당의 지지율을 웃돌고 사회 정치적 불안이 가중됨에 따라 루카노프Lukanov 총리가 퇴진하였으며, 12월 포포프Popov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전후戰後 최초의 연립내각이 출범하였다. 1991년 7월에는 민주주의 신헌법을 채택하고 1991년 10월 신헌법에 의한 총선 및 지방 선거에서 민주세력동맹(UDP)이 승리하여 필리프 디미트로프Philip Dimitrov가 총리에, 공산주의 시절의 반체제 인사였던 젤류 젤레프Zelyu Zhelev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취임하는 민주 정부를 수립하였다. 불가리아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서방진영으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1999년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신청을 하여 2007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 당시 유럽연합은 경제의 민영화를 비롯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



불가리아 정부와 불가리아 국민들은 유럽연합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불가리아는 친서방 지향을 분명히 하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서방진영에 가담하였지만 불가리아는 아직도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천연가스를 러시아에 85%를 의존하고 핵발전소 연료의 경우 100% 의존하는 형편이다. 공산주의 몰락 후 불가리아의 경제는 레슬러 출신의 사업가들에 의해 대거 장악되었는데 이들은 폭력이나 부패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러시아는 이들 반불법적 기업가 집단과 밀접히 연계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논자들은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에 이러한 새로운 방식으로 불가리아에 영향력을 행사는 것을 일컬어 ‘러시아 신제국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많은 불가리아 인들은 불가리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 경제가 급속히 좋아질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현실은 기대와는 달랐다. 그 때문에 많은 불가리아 인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 현재 불가리아는 서유럽에 비해서는 경제수준이 아직은 크게 뒤떨어진다. 일인당 명목 GDP는 7,400 달러 정도로 유럽연합 평균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그래서 불가리아는 현재 유럽연합 국가 가운데서 최빈곤 국가라는 오명을 듣고 있다. 불가리아는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통화동맹에는 가입되지 않아 유로화를 쓰지는 않는다. 불가리아 화폐는 ‘레브’(복수는 레바)라고 한다. 현재 1유로에 1.95레바로 고정환율제를 시행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6. 3. 25. 09:30




불가리아의 독립과 발칸전쟁





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가리아 인들의 항거는 여러 차례 무장반란으로 터져 나왔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불가리아의 독립은 18세기 이후 같은 그리스 정교를 믿는 제정 러시아의 세력이 발칸 반도로 뻗쳐오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1768~1774년간의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토만 지배하에 있는 발칸 반도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얻어내었다. 이는 오토만 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권리였다. 1876년 4월에는 대규모 무장봉기가 있었는데 이 봉기는 잔학하게 진압되어 3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다시 투르크와 전쟁을 하여 산스테파노San Stefano 강화조약(1878)을 체결하였으며 그 결과 불가리아는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가 큰 나라로 독립하는 것을 영국이나 오스트리아 같은 강대국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해에 열린 열강들의 베를린 회의에서 불가리아로부터 동루멜리아East Rumelia, 마케도니아Macedonia를 분리하여 별개의 나라로 만들었다. 동루멜리아는 불가리아의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몇 년 뒤에는 불가리아에 합쳐졌다.



모두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공국이었다. (이 시기부터 2차 대전 직후까지 불가리아는 줄곧 왕정 체제를 유지하였다. 물론 입헌군주제였다. 왕정 초기에 불가리아인들을 독일인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반투르크 봉기를 계기로 1908년 투르크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12년에는 그리스, 세르비아와 동맹을 체결하고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하였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이다. 발칸 동맹국의 승리로 발칸에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사라졌다. 제2차 발칸전쟁(1913)은 영토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그리스와 세르비아 그리고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으나 이 전쟁에서는 져서 제1차 발칸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러시아와 사이가 크게 나빠진 불가리아는 적의 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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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5. 04:30



불가리아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불가리아는 1018년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Basilius 2세에 의해 정복되어 독립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불가리아는 공식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불가리아 속주(테메)가 되었는데 그 수도도 지금의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Skopje로 옮겨졌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지배는 불가리아 인들의 저항과 외침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1185년 아센Asen 형제가 일으킨 반란으로 제국의 지배는 종식되어 불가리아는 다시 부활하였다.




수도는 타르노보Tarnovo에 세워졌다. 이것이 제2 불가리아 제국이다. 아센 왕조가 지배하던 불가리아 제국은 발칸 반도의 태반을 지배한 강력한 국가였으나 봉건영주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위협이 재개되었다. 또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몽골족의 간섭도 빈번해지면서 일시적으로 몽골족이 지배한 적도 있었다.(1300년 차카의 지배)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에 진정한 위협이 된 것은 중앙아시아부터 소아시아를 차지하고 발칸으로 진출한 투르크Turk족이었다. 투르크인들의 발칸 침공은 134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1396년 최종적으로 불가리아를 멸망시켰다. 이후 불가리아는 ‘루멜리아 총독관구’로서 술탄이 파견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루멜리아Rumelia는 로마인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관구의 수도는 처음에는 오늘날의 터키 국경도시인 에르디네(고대의 아드리아노폴리스)에 두었으나 후일에는 불가리아의 소피아sofia로 이전되었다.

 


오 스만 투르크Osman Turk는 불가리아를 여러 개

의 군(빌라예트vilayet)로 나누어 태수(산자크베이sanjakbey)를 보내 다스렸다. 그리고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크기에 따라 ‘티마르Timar’ 혹은 ‘지야메트Zeamet’라고 불린 봉토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봉토는 봉토보유자가 죽은 후에는 그 점유권이 술탄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투 르크의 지배는 근 500년간 계속되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무슬림보다는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져야 하였다. 문화적 엘리트인 기독교 성직자들은 투르크의 지배를 피해 대거 인근의 슬라브 국가로 망명하였다. 투르크 당국은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을 비잔틴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두었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