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6. 3. 24. 08:00





북방 유목민에 의해 세워진 나라 불가리아





고대 불가리아 지역에는 약 2만년 전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트라키아Thracia인(불가리아인의 조상)이 최초로 거주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CE 480년경에는 트라키아인에 의해 도시국가가 건설되었고, BCE 46년 로마제국이 트라키아인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대다수 트라키아인들이 모에지아 및 트라키아 지역에서 이탈해 분산되었다. 로마제국의 몰락 후에는 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으로 발칸지역이 황폐화되었다. 


‘불가리아’라는 나라를 세운 주체는 불가르Bulghar족이다. 불가르족에 대한 언급은 480년 비잔틴의 제노 황제가 고트족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동원하였다는 비잔틴 사서의 기록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 불가르족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었던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유목민이라는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기원은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신용하 교수 같은 경우 불가르족이 부여夫餘족이었다는 주장도 내어놓고 있다. 4세기 후반 부여족의 일파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프카즈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불가르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체로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사료상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단지 부여가 ‘부르’라고도 불렸다는 등 몇 가지 명칭이 유사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좌우간 7세기 이전에는 카프카즈 북부로부터 흑해 북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과 약탈, 비잔틴 제국의 용병 등으로 활동하며 살았던 불가르족은 7세기에 들어와 동유럽 역사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불가르족의 한 우두머리인 쿠브라트Kubrat라는 인물이 불가리아라는 이름의 나라를 635년경에 세웠던 것이다. 비잔틴 역사가들의 기록에는 쿠브라트가 세운 나라를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라고 부르고 있다. 그 영토가 매우 넓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흑해 북안의 땅에 세워진 나라였다. 대불가리아가 세워질 당시 이 일대는 무주공산이 아니라 또 다른 아시아 유목민인 아바르Avar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바르인들은 그 이전의 훈Hun족처럼 6세기 중반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으로 들어와 흑해 북안에서부터 헝가리 평원 일대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는데 바로 이 아바르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불가르인들이 세운 나라가 대불가리아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비잔틴의 한 연대기 기록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에 발견된 『불가리아 칸 명부』라는 문서에 의하면 쿠브라트는 훈족의 아틸라Attila 왕의 후손이다. 옛 슬라브어로 기록되어 있는 이 문서에서는 쿠브라트 가문이 아틸라로부터 전해져 왔으며 2대가 아틸라의 막내 아들인 이르니크이고 4대가 바로 쿠브라트라고 한다.

아틸라가 453년 돌연사 한 후 그 지배하에 있던 게르만 족속들이 대거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거대한 훈 제국이 무너졌는데 아틸라 왕의 세 아들들에 대한 기록이 라틴 사서들과 비잔틴 사서들에 남아 있다. 그 기록들에 의하면 이르니크(혹은 에르나크)는 형들과는 달리 비잔틴 제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세력 보존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다뉴브 강 하구 도브루자 지역에 정착하여 조용히 세력을 확대해갔는데 그 후손이 쿠브라트였던 것이다. 7세기 말에 씌어진 이집트 콥트파 주교 요한의 기록에는 쿠브라트는 어릴 때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그곳 황궁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쿠브라트는 비잔틴 사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훈족의 양대 부족인 우티구르 훈족과 쿠트리구르 훈족을 통일하여 그를 기반으로 대불가리아를 세웠다.


그러나 대불가리아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브라트의 사후인 670년경 하자르Khazar인들의 공격으로 대불가리아는 멸망하였다. 그 아들들은 불가르족을 이끌고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장남은 볼가 강과 카마 강 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라는 나라를 세웠다. 쿠브라트의 3남 아스파루크Asparukh는 다뉴브 델타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앞에서 말한 그의 선조 이르니크가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이 불가르족 집단이 다뉴브 강을 넘어 도브루자 지방으로 진출하자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 4세는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패한 콘스탄틴 4세 황제는 681년 아스파루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도브루자 지방의 점령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다뉴브 강과 발칸 산맥 사이에 위치한 모에시아 주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땅에 불가르족의 나라가 세워졌다. 이것이 ‘다뉴브 불가리아’ 혹은 ‘불가리아 제1 제국’이다. 발칸 반도의 이 불가르족 국가는 9세기 말에 마자르Magyar족에 의해 세워진 헝가리Hungary와 더불어 대표적인 북방 유목민 국가였다. 불가리아는 정확히 말해서 유목민 출신의 군사엘리트인 불가르족과 일반 백성을 이룬 슬라브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러나 그 지배층이 훈족의 후예인 기마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성격 역시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 국가의 성격을 띠었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의 왕은 아시아 유목민들의 왕 호칭인 ‘한汗(칸Khan)’으로 불렸다.

9세기 초에는 영토가 서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드디어 유럽의 최강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크룸Krum(그리스 사서에서는 ‘크루모스’라고 한다) 칸은 아바르인들, 비잔틴 제국과 싸워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그리하여 당시 불가리아 제국은 오늘날의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루마니아의 영토를 포괄하여 남쪽으로는 비잔틴 제국, 서로는 프랑크 제국과 어깨를 겨루는 큰 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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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6. 3. 24. 07:30




불가리아 영토와 자연환경




불가리아Bulgaria는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로서 남쪽으로는 그리스, 터키, 동쪽으로는 흑해, 북쪽에는 루마니아, 서쪽에는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와 접한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넓은 11만㎢ 정도이나 인구는 우리보다 훨씬 적다. 2014년 통계로 692만 명 정도로 남한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는 소련의 위성국가의 하나로서 우리에게는 머나 먼 나라였다. 1989년 소련이 무너지고 난 후 이 나라는 급속히 서방 진영에 가까워졌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고 2007년에는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전의 종주국 러시아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 




직사각형 모양의 불가리아는 두 개의 큰 평원과 두 개의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루마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다뉴브 강을 따라 다뉴브 평원이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그 평원 남쪽으로 동서로 뻗어 있는 것이 발칸 산맥이다. 발칸 산맥은 세르비아와의 국경 지역부터 동쪽 흑해 연안까지 560㎞ 가량 길게 뻗어 있는데 발칸 반도라는 지명도 이 산맥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발칸 산맥은 고대에는 ‘하에무스 산’이라고 불렸다. 이는 이곳에 오랫동안 살던 트라키아 인들의 이름인데 불가리아 사람들은 이 산맥을 ‘스타라 플라니나’라고 부른다. ‘오래된 산’이라는 뜻이다. 발칸 산맥 남쪽에 동쪽으로 세모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평야가 트라키아 평원이다. 그리스 역사서에도 많이 등장하는 트라키아 지방이 바로 이 평원을 말한다. 또 하나의 산맥인 로도페 산맥은 그리스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길이가 240㎞이다. 로도페 산맥 서쪽 끝에는 또 릴라 산지가 높이 솟아 있는데 여기에 우리나라 백두산보다 높은 무살라 산(2925m)이 있다. 이 산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불가리아의 유명한 릴라 수도원 역시 릴라 산맥 깊은 골짜기에 있다. 


불가리아 땅은 상당한 높이의 산맥들이 가로지르기때문에 산지의 비율도 높다. 고도 600m 이상의 산지가 국토의 30%를 점하며 여기에 높이 200~600m의 구릉지대를 합치면 그 비율은 70%나 된다. 수도 소피아 역시 큰 산에 인접해 있다. 비토샤 산이라는 이름의 높은 산이 소피아를 감싸고 있는데 그 높이가 2,300m에 달하는 덩치가 큰 산이다. 그러나 높은 산에 인접한 소피아에서부터 트라키아 평원이 시작된다. 이 트라키아 평원은 동쪽으로 뻗어 터키 이스탄불까지 이어진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소피아(당시 이름은 세르디카였다)에서 이스탄불(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군사도로가 놓여 있었다. 유럽 대륙에 큰 제국을 세웠던 훈족이 몇 차례에 걸쳐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였을 때 이용하였던 도로가 이 군사도로였다. 


불가리아는 지중해성 기후와 대륙성 기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발칸 산맥은 대륙의 기단들이 넘어오는 데 방벽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북쪽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이 크고 남쪽은 지중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은 영하로 살짝 내려가는 정도이며 여름 7,8월의 평균기온은 20도를 살짝 넘어선다. 연평균 강우량은 630㎜로 우리의 절반 정도이다. 장마나 태풍처럼 많은 비를 내리는 기상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강우량의 분포 역시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겨울은 월평균 40~55㎜, 여름은 30~45㎜ 로서 지중해의 영향으로 여름보다 겨울이 조금 많지만 대체로 연중 골고루 비가 내리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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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8. 1. 22:56



러시아 전승戰勝 70주년 기념행사






5월 9일 오전 10시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2,000만 명의 영혼을 달래는 종소리가 울렸다. 러시아의 ‘대조국전쟁大祖國戰爭’(the Great Patriotic War) 전승戰勝 70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조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 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대大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날 ‘승리의 깃발’로 불리는 옛 소련기를 앞세운 차량을 선두로 군인들이 줄을 맞춰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가로질러 행진했다. 이날 군사 퍼레이드에는 전투기와 장갑차 수백 대와 군인 만 6천여 명이 동원되어 러시아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러시아 우방국 10개 나라의 군인들이 동참했으며, T-14 전차와 신형 대륙 간 탄도미사일 등 그동안 개발한 신무기들도 공개되었다. 이번 행사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을 이유로 서방 국가 정상들은 대부분 참석하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박근혜 대통령도 불참하는 등 러시아가 초청장을 보낸 68개국 정상 가운데 27개국 지도자만 자리를 함께했다. 이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앞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데에 이어 행사장에서도 나란히 앉아 긴밀한 협력 관계를 과시해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이 5월 9일이다. 반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은 5월 8일이다. 처음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프랑스 랭스 연합군사령부에서 “5월 8일 오후 11시부터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역할은 소련군이 했고, 나치의 심장부는 베를린이기 때문에 항복 문서는 베를린에 있는 소련군사령부에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를 받아들여 8일 오후 10시 43분 베를린 근교 소련군사령부에서 빌헬름 카이텔 독일군 총사령관이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군 총사령관 앞에서 항복문서에 다시 서명했다. 이 시간이 모스크바 시간으로 9일 0시 43분이었다. 



많은 이들이 2차대전을 미국과 독일이 싸운 전쟁으로 알지만 이는 냉전과 할리우드 영화가 만든 오해다. 미·영 연합군의 유럽 전선 전사자는 40만 명 정도였고 러시아군 전사자는 800만 명 이상이었다. 독일은 러시아 전선에 전력의 80~90%를 투입했고, 300여만 명이 전사했다. 미·영과 싸움에서 나온 피해의 4배가 넘는다. 소련군은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바다 건너서 구경하는 사이 동유럽 전선에서 고군분투했다. 러시아인들은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굶어 죽어가면서도 지켜낸 레닌그라드 봉쇄전,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린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쿠르스크 격전 등이 2차 대전의 승기를 잡는 분수령이었다고 믿는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미영 연합군은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56만 명과 싸웠을 뿐이지만,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홀로 450만 명의 독일군과 싸웠다. 전쟁 막바지 베를린 점령 작전에서만 소련군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소련 인구가 1억 6,000만 명이었는데 2,700만~2,800만 명이 전쟁 중 사망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전승기념일인 5월 9일이 공식적인 2차 세계대전 승전일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 제패를 꿈꾸던 최강 나치 독일군을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단결해 물리치고 세계도 구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러시아는 아무리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매년 승전 기념일 행사만큼은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 국제 역학관계상 주목할 장면은 중국 인민해방군 의장대 112명의 참석이다. 러시아 승전 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에 중국이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미국과 일본의 관계 강화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의 협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두 나라의 관계가 더 긴밀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 북한을 위에 두고 주변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로서는 썩 밝지 않은 그림이다. 상제님의 상씨름 천지대세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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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29. 00:30



 

노르웨이의 의회 옴부즈맨ombudsman 제도




노르웨이 의회는 총선이 치러진 다음해 1월 1일부터 4년 임기로 의회옴부즈맨Parliamentary Ombudsman을 임명해 운영하고 있다. 옴부즈맨은 변호사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의원일 필요는 없다. 옴부즈맨 제도는 1809년 스웨덴 정부에서 행정부의 독주를 막고자 고안한 것으로, ‘행정감찰관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정부(국가, 주, 시정부)의 부당한 행위로 고통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을 취지로 한다. 옴부즈맨은 정부와 개인 사이에서 독립적이고 공정한 중재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옴부즈맨의 판정은 명령이 아닌 권고이다. 





옴부즈맨은 제출된 불만사항을 검토하고 성명을 발표하는데, 만약 정부의 행위가 위법이거나 명백히 부당하다고 옴부즈맨이 판정할 경우 해당 관청이나 관료는 해당 건을 재고하고 일반적으로 옴부즈맨의 권고를 따르게 된다. 1962년 옴부즈맨법은 옴부즈맨이 의회에 매년 보고서를 제출토록 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옴부즈맨은 의회의 감시 기능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이외에도 군인 또는 공익근무요원을 위한 옴부즈맨 제도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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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28. 00:30

 

 

한국과 노르웨이의 관계

 

 

 

노르웨이는 NATO 회원국으로 친서방노선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는 1959년 3월 2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우리나라는 1972년 12월 노르웨이에 상주공관을 설치하였고, 노르웨이는 1980년에 주한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노르웨이는 6.25전쟁 발발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외과 병원단을 파견한 바 있으며, 그후 메디컬 센터Medical Center 운영 지원 등을 통하여 양국관계는 계속 발전되어 왔다. 메디컬 센터는 국립의료원의 전신으로,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과 유엔한국재건단(UNKRA) 및 우리 정부가 공동으로 1958년에 설립했고 1968년 우리 정부가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노르웨이는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1973년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남북한 수교 후 대남북한 형평관계 유지를 표방하고 있어 친서방이라고는 하나 실리가 없는 한 우리나라에 편중된 관계유지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의 경제관계가 증진됨으로써 한-노르웨이 관계는 점차 심화되고 있다. 최근 2006년 한국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회원국: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간에 체결된 한-EFTA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한-노르웨이 양국간 교역량이 4배, 투자 규모가 15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상호보완적인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어 향후 경제 통상 협력의 잠재력이 매우 큰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2009년 한-노르웨이 수교 50주년을 계기로 향후 50년간의 새로운 협력 동반자 관계를 위해 지속 협력키로 하고, 특히 녹색성장이라는 양국의 미래 공동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녹색미래를 위한 파트너쉽’을 구축 모색해 나가기로 하였다.

 




한국과 노르웨이 간의 무역 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해운과 해양이다. 1979년 이후 노르웨이인 소유의 선박 중 280척이 한국에서 제작되었으며, 노르웨이 도로에서는 지금 한국 브랜드의 자동차를 많이 볼 수 있다. 2014년 한국 기준 교역 현황을 보면, 수출은 선박, 해양구조물, 승용차, 타이어 분야에서 16.69억 달러를 기록했고, 수입은 선박용 부품, 펌프, 배전 및 제어기, 자동제어기 부품을 중심으로 28.41억 달러였다. 2013년 신고 기준 투자 현황을 보면 대노르웨이 투자는 54건 18.56억 달러, 대한국 투자는 138건 4.74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노르웨이는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에 참가하였고, 한국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때 노르웨이에 선수단을 파견한 바 있다. 

 

2014년 현재 노르웨이에 체류 중인 한국 교민은 692명이다. 그 중 시민권자 및 영주권자가 440명이고, KOTRA를 비롯하여 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현대미포조선 STX조선 등에서 진출한 일반 체류자가 252명이다. 노르웨이의 한인 교민단체로는 1972년 결성된 주노르웨이 한인회(Korean Resident's Association)가 있고, 입양인 단체로는 한국인 입양인 협회(Forum for Korean Adoptees, Norway)가 있다. 한국전 이후 1954년경부터 시작된 노르웨이의 한인 입양인은 현재 약 6,800~6,9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NATO 회원국으로 친서방 노선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나, 동서긴장완화 및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1973년 6월 22일 북한과 상호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1973년 8월 노르웨이에 상주 공관을 개설하였으며, 노르웨이도 북경주재 대사로 하여금 겸임토록 하였다. 노르웨이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실질협력관계로 성장하고 있는 반면, 북한과의 관계는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다. 1976년 북한 공관원의 마약 및 술, 담배 밀수사건, 1983년 KAL기 폭파 사건 및 미얀마사건, 김일성 우상화 체제, 북한의 허구적인 선전 책동 등으로 인하여 노르웨이는 북한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대사는 1991년 3월 경제사정으로 오슬로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고, 스웨덴에서 겸임하기로 하였다고 노르웨이에 통보한 후 4월 30일 북한대사관을 완전 철수하였다. 북한의 폐쇄성과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경제적 파탄 및 권력 세습 등으로 북한에 대한 노르웨이의 인식은 매우 나쁘나, 일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노르웨이인들은 북한을 옹호하고자 하는 태도를 아직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노르웨이는 북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개발원조를 하지 않고 있으나, 인도적 차원에서는 매년 대북지원을 해오고 있다. 2008년 현재 주스웨덴 북한대사가 노르웨이 대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주한 노르웨이대사가 북한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북한간의 교역은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7. 07:41




노르웨이의 국기






노르웨이는 덴마크와의 동맹 기간인 1380~1814년 사이에 사회·문화적으로 덴마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 형태인 붉은색 바탕에 그려진 하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 안에 파란색 스칸디나비아 십자가 그려져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그것은 덴마크의 국기인 ‘단네브로Dannebrog’를 바탕으로 청색 십자가를 첨가한 형태이다. 청·백·적색은 1814년에 제정된 ‘에이츠볼(Eidsvold) 헌법’에서 강조한 기본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를 각각 상징한다.

 


그러나 이 국기는 스웨덴의 지배 하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사용될 수 없었다. 1905년 독립을 하면서 비로소 노르웨이는 이 국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노르웨이 국기 하나에는 7나라의 국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세계에는 비슷한 국가가 많은데,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노르웨이 국기 1장이면’이라는 제목으로 노르웨이 국기 사진이 한 장 게재되었다. 

 

아래 그림은 노르웨이 국기인데, 검은색 네모로 다른 나라 국기를 표시해놓았다. 노르웨이 국기에는 ‘인도네시아’, ‘폴란드’, ‘핀란드’, ‘프랑스’, ‘네덜란드’, ‘태국’의 국기가 숨겨져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6. 00:30

 

 

극동에도 뻗친 프랑스 침략사

 

 

 

19세기 프랑스는 극동에도 세력을 뻗쳐 영국과 함께 중국에 대해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에 대해서는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응징을 명목으로 강화도를 일시 점령하였다(1866년의 병인양요). 그러나 조선이 미국과 영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1886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당시 조불조약에서는 천주교의 선교가 조선에서 허용된다고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조선 정부가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실질적인 포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위에서 보듯이 제2제정기(1852~1871)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해외영토와 세력을 세계 도처에서 확대하려는 제국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가 가장 야심차게 추진한 대외정책의 하나가 멕시코의 보수파들과 손을 잡고 멕시코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친프랑스적인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주의적 모험은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군사적 패배로 끝났다. 그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 제국을 부활하려는 시도는 좌절되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국한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25. 14:36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프랑스 식민지배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대였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욕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프랑스는 알제리 태수와 프랑스 영사의 외교적 마찰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알제리를 점령하였다(1830). 당시 알제리는 오토만 투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제 300여년간의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대신하여 프랑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점령에 이어 프랑스인들을 위시한 유럽 이민자들이 알제리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토지를 많이 차지함에 따라 많은 알제리 원주민들이 고향에서 떠나야 하였다. 회교도 알제리인들은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에 비해 법적인 차별을 받았다. 알제리인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가 알제리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알제리전쟁은 프랑스 내부에도 큰 갈등을 불러일으켜 알제리 독립 허용을 반대하는 프랑스 장군들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프랑스 정부(제4공화국)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의 투쟁과 국제적 압력에 굴복하여 1962년에 독립을 허용하였다.

 


19세기에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도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말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동기에서였으나 차츰 영토획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월남에서 영토와 큰 영항력을 획득한 프랑스는 월남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불전쟁(1884~1885)이 그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월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었다.

 

인도차이나인들의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투쟁은 영불전쟁 직후부터 있었으나 2차대전 이전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인도차이나는 2차대전시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프랑스의 수중에서 잠시 벗어났으나 일본이 패전한 후 프랑스가 다시 인도차이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과 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호치민의 베트민 세력과 힘든 싸움을 벌이다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프랑스 군대가 참패함으로써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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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24. 00:30

 

 

 

프랑스 정치체제




프랑스는 임기 7년으로 연임이 허용되는 대통령 중심제이며 의회는 지역구에서 인구비례로 선출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하원(Assemblee Nationale)과 간접선거로 뽑힌 상원(Senat)으로 구성된다. 상원보다는 하원이 더 큰 권한을 갖는다. 상원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은 지방의회 의원과 시의원, 시장 등으로 구성된다. 지방자치는 최상위 단위인 26개의 지방(region) 의회를 통해 이뤄진다. 지방의회는 주민의 선거로 선출되는 것은 물론이다. 한 지방에 몇 개씩 있는 도(데파르트망departement)는 대통령이 임명한 지사가 관장하는 행정단위로 중앙권력을 대변한다. 모두 101개나 되는 도청은 내무부에 소속되어 있다. 프랑스의 가장 기초 행정단위는 ‘코뮌’(commune)이다. 코뮌의 수는 36,000개가 넘는다. 재미난 것은 인구 2백만이 넘는 파리도 시골마을처럼 하나의 코뮌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코뮌의 수장인 ‘메르’(maire)는 큰 코뮌의 경우는 시장이라 번역해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코뮌의 경우는 촌장 정도이다.

 



제국주의 식민정책으로 확보된 해외영토

프랑스는 해외 영토도 많이 갖고 있다. 태평양 지역의 뉴칼레도니아, 남미의 가이아나와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 인도양의 레위니용 등이 그러한 해외영토이다. 모두 근대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과의 경쟁에서 확보한 해외식민지 가운데 독립하지 않고 남아 있는 땅들이다. 프랑스 인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도 일찌감치 발을 들여놓아 17세기초 현재 캐나다에 위치한 퀘벡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곳을 기지로 삼아 프랑스인들은 오대호를 거쳐 미시시피강 유역으로 탐사를 하였다. 17세기말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인들은 미시시피 연안의 광대한 지역을 프랑스 영토로 만들고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아나’라고 지었다. 그리고 교역거점과 요새가 세워지고 뒤이어 정착식민지가 세워졌는데 이 지역의 중심지 뉴올리언스가 건설된 것은 1718년이었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유럽 내의 영토확장을 놓고 싸웠을 뿐아니라 해외무역과 식민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프랑스의 주적은 영국이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두 나라는 유럽의 정치적 주도권을 넘어서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7년전쟁(1756~1763)이라고 역사에서 알려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퀘벡 식민지를 영국에 넘겨줘야 했다. 루이지아나 식민지는 나폴레옹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생국가인 미국에 팔아넘겨 북미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는 모두 사라졌다. 퀘벡의 경우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 주민들은 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프랑스계 사람들이다. 프랑스에 대해 문화적 애착이 강하고 일부는 캐나다로부터의 독립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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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23. 00:30




프랑스혁명에서 태동한 현대사

 

 



현재 프랑스 국가의 정식명칭은 ‘프랑스 공화국’이다. 프랑스는 프랑스혁명기인 1792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였지만 혁명이 끝나면서 왕정이 다시 복위하였다. 19세기에는 공화국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는 공화파와 왕정을 지지하는 왕당파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줄곧 계속되었다. 1848 혁명으로 2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공화국도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제정으로 바뀌었다(1852). 나폴레옹 3세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다시 수립되었다. 이것이 3공화국으로 이후 왕당파들의 도전이 더러 있기는 했지만 공화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공화국은 드골 때의 헌법개정으로 5공화국으로 불린다.



현재 프랑스 공화국은 프랑스혁명기에 등장한 삼색기를 국기로 삼고 있으며 국가國歌로는 프랑스혁명기 때 군가로 사용되었던‘라 마르세이예즈’를 사용한다. 라 마르세이예즈의 가사는 군가에서 나온 것이라서 내용이 좀 살벌하다. “폭군을 향하여 피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대오를 짜자. 진격하자. 진격하자. 저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땅을 적시도록...” 그래서 일부 프랑스인들은 국가의 개정을 주장한다.


국기와 국가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늘날의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에서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현대사를 1789년의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잡고 교과서도 그렇게 되어 있다. 프랑스 역사교육과정은 중학교에서는 고대사부터 시작해서 중세사와 근대사를 배우고 고등학교에는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시작하는 현대사를 배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등학생들은 매우 상세한 내용의 현대사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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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22. 00:30

 




 

노르웨이 문화 예술


 

 


노르웨이 문화예술
계의 대표적 인물로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미술),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음악), 그리고 헨리크 입센Henrik Ibsen(문학) 3인을 꼽고 있다. 오랜 식민역사로 인해 전통문화의 취약성을 안고 있는 점 때문에 노르웨이는 현대 문화예술 진흥에 역점을 두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는 문화예술진흥부문에 GDP의 3%를 지원하고 있고 베르겐 국제 페스티벌, 노르웨이 국제영화제 등 국제행사 외에도 지역별로 각종 행사를 펼치고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국제펜클럽 노르웨이 지부, 노르웨이 작가연맹 등을 중심으로 시, 소설, 희곡작품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음악 부문은 국립 오슬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비롯 크리스챤산드, 베르겐, 트론하임 등지에 시립 심포니오케스트라를 두고 정기 및 부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갖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솔베이지 송”의 작곡가 에드워드 그리그의 생전의 예술활동을 기리는 그리그 기념 사업회는 매년 베르겐에서 ‘그리그 추모음악제’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한편 노르웨이 서중부에 위치한 Molde시에서 매년 여름 세계 유명 재즈 음악인을 초대하여 대규모 재즈음악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12월에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주관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위한 축하 음악회를 열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 국민화가로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는 에드워드 뭉크의 이름을 본따서 만든 오슬로 소재 뭉크박물관에서는 그의 생전에 작품들을 장르별로 연중 전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소수의 민간화랑과 국립박물관 등지에서 국내외 현대 작가의 작품 전시회를 자주 갖고 있어, 1~2년 전에 전시 계약을 해야 할 정도이다. 


 

영화 부문은 노르웨이 국제영화제, 노르웨이 단편영화제 및 Film from the South등 주요 영화제를 개최하고 세계작품 초청 시사회를 갖고 있다. 정부의 영화산업 진흥을 위한 투자에 비해 외국 작품의 범람과 당지의 높은 인건비로 인한 대외 경쟁력이 약해 노르웨이 작품 활동은 미미한 편이다. 한편, 노르웨이 정부는 현재 소수민족인 사미Sami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영화 제작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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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21. 22:00




 

 

노르웨이 종교

 

 

 




노르웨이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헌법상 루터 복음교를 국교로 한다. 2013년 현재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82% 정도인데, 그중 국교인 루터교 인구가 76.1%를 차지한다. 그 다음이 로마가톨릭으로 2.4%이다. 기독교는 10세기경 주로 해외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왕족들에 의하여 전래 포교되었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늦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가운데 하나다. 1539년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를 루터교로 개종시켰다.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늦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나라에 속한다. 노르웨이에서는 루터교 의식에 따라 교회에서 왕의 즉위식부터 세례, 결혼, 장례 등이 다 행해진다. 부활절, 성령강림주일, 성탄절처럼 기독교 교회력에 나오는 절기들은 공휴일로 인정된다. 

 

노르웨이 국교회는 노르웨이 국왕이 교회장이며 의회(Storting)가 최고 집행부이다. 왕실은 의무적으로 복음 루터교를 실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왕이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정부 통제를 책임지고 있다. 문화교회부는 행정적인 책임을 지며, 의회는 교회 관련 법안과 예산안을 채택하는 일을 담당한다. 모든 주교와 주임 사제들은 정부가 임명한다.

 




개신교 국가이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이슬람, 불교, 로마 가톨릭 등의 종교가 다 보장된다. 최근 수십 년 간 노르웨이에 많은 기타 종교단체들이 생겨났다. 1964년 헌법 제2조가 개헌되어 노르웨이 내에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었고, 1969년에는 종교 및 생활신조 단체들에 대한 국가 보조금 지급 계획이 도입되었다. 

 

2013년 말 노르웨이 국교 신도는 총인구의 약 75%를 차지하는 384만 명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국교 루터복음교가 아닌 다른 종교 생활을 한다. 2014년의 경우 그 숫자가 587,000여 명에 이른다. 국교 이외 종교의 인구 지형을 보면, 루터복음교가 아닌 여타 기독교도가 57.4%를 차지하여 가장 많다. 비기독교 중 가장 많은 종교 인구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교로 22.5%를 차지한다. 이어 불교가 2.9%, 힌두교가 1.3%, 시크교가 0.6%를 차지하였다. 그 외에 바하이교, 유대교도 800~1,100여 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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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20. 00:30






Norway 교육과 언론

 




교육

노르웨이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10년을 의무교육으로 한다. 초등 과정은 6~13세, 1~7학년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등 과정은 13~16세, 고등 과정은 16~19세로 나뉘어져있다. 전체 학생 수는 약 90만 명에 이르고, 총 학교 수는 3,400여 개이다. 대학은 70여 개 정도이고, 학생 수는 23만 명 정도이다. 특징적인 것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정부지원으로 무상교육(외국인도 동일)이 실시된다는 점이다. 다만 대학 중에서 University는 모두 국가 보조금으로 운영되나 college 및 사립대학 등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한다. 영어는 기초 교육 과정에서 의무이고, 반수가 넘는 학생들이 불어와 독어를 추가로 선택하고 있다. 




 

언론

노르웨이는 언론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한다. 매체를 보면, 먼저 신문의 경우 전국적인 독자망을 갖고 있는 것은 3개(Verdens Gang, Aftenposten, Dagbladet)다. 그러나 전국에는 200개가 넘는 신문사들이 있다. 전체 신문 발행부수는 약 300만부이다. 방송으로는 국영 NRK(노르웨이 방송협회)를 비롯하여, 민방 TV 2, TV Norge, TV 3 등 다양한 채널이 있다. 노르웨이 최대 통신사는 1867년 설립된 NTB(Norsk Telegrambyraa)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19. 00:30

 

 

 

노르웨이 복지

 

 

 

 

노르웨이는 1997년 2월 ‘국가 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 제정을 계기로 노르웨이 사회복지제도의 근간인 국가보험제도(National Insurance Scheme)를 시행하고 있다. 국가보험제도는 국민연금(National Pension Insurance), 실업보험(Unemployment Insurance), 국민의료보험(National Health Insurance), 직업재해보험(Occupational Injuries Insurance), 출산·아동보험 등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 거주자는 외국정부 또는 국제기구에 고용되어 근무하는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국적에 관계없이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노르웨이는 이웃나라인 스웨덴 덴마크와 더불어 세계 최고수준의 복지국가이다. 이는 풍부한 자원 덕분에 복지 재정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 기반을 둔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는 세계 142개 나라를 대상으로 '2014 세계 번영 지수'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노르웨이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에 선정되었다고 하였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평균 수명은 물론 인간개발지수(HDI)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에서 남녀 평등 지수가 가장 높다. 최근 징병제를 여성에게도 확대하는 법안이 통과돼 2015년부터 시작될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는 1978년 양성평등법(Gender Equality Act)을 제정하여 교육 고용 등 사회 제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방지 및 제거하고자 한다. 양성평등법은 채용 승진 해고 시 성별에 따른 차별 및 임신을 이유로 한 해고를 금지하고 있다. 양성평등법 및 기업법은 550여개에 달하는 공기업 및 상장기업에게 이사진의 40% 이상을 여성에 할당할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기타 결혼법, 상속법, 성명법姓名法, 시민권법 근로관계 법령 등에서 양성 지위 평등 여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들을 두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결혼 후에도 부부는 별성別姓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자녀의 성도 부모 일방의 것을 선택할 있다. 

 

그리하여 정치 분야의 경우 여성에 대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은 일찍이 20세기 초(1913년)에 주어 졌고, 정치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 신장으로 여성들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다. 2008년 기준 여성의 공직 점유 비율을 보면, 중앙의회의 경우 총 169명 중 64명(38%), 중앙정부에는 약 40%에 이른다. 2013년 고용 인력 현황을 보면, 총인구 중 직장을 다니는 사람 수가 약 270만 명으로 약 절반이다. 총 노동 인구 중 여성이 약 47%를 차지한다. 여성은 전체 여성인구의 약 68%, 남성은 전체 남성인구의 74%가 고용되어있다. 직장을 다니는 여성 중 풀타임으로 일하는 여성은 약 6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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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8. 00:30




 

 

노르웨이 민족과 언어

 




 

노르웨이 주민은 금발과 파란 눈을 지니며 키가 큰 사람이 많다. 또한 장수長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균 수명은 남자는 73.6세이며, 여자는 80.3세이다. 그리고 랩Lapp족은 북부 노르웨이에만 살며 용모, 언어, 문화가 모두 이색적이다. 인구의 98%는 게르만계(북유럽인, 유럽중부인, 발트해 연안인) 노르웨이인이며 최대 소수민족은 약 0.6%를 차지하는 랩족이다. 노르웨이인을 구성하는 주체는 장신長身 장두長頭 금발 벽안碧眼 게르만계 북유럽인종이나, 최북부 지방의 핀마르크주에는 유사 이전부터 살아온 2만의 라프인 있다. 남서부에는 단두형短頭型 다갈색 모발과 눈을 가진 알프스계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핀마르크주에는 라프인과의 혼혈족인 단두에 얼굴이 넓은 주민들을 있다. 

 

노르웨이의 공식 언어는 노르웨이어이다. 노르웨이어는 북게르만어(또는 노르드어)에 속하며 덴마크어와 스웨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래서 단일어가 아니다. 현재 노르웨이에는 2개의 공용어가 있다. 하나는 보크몰Bokmål(‘책 속의 언어’), 속칭 리크스몰로 부르는 언어인데 이는 과거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을 노르웨이어화한 덴마크어이다. 덴마크어 문어체를 노르웨이 동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언의 음운 조직으로 번안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니노르스크Nynorsk(‘신 노르웨이어’), 속칭 란스몰로 부르는 언어이다. 이는 19세기 중엽 민족주의에 자극되어 노르웨이어와 지방의 방언을 정리하여 만든 언어로 1885 의회의 승인으로 공용어가 되었다. 보크몰과 니노르스크는 공식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고 있지만 보크몰은 오슬로를 중심으로 대도시 상류계층의 사람들의 일상어이다. 니노르스크는 전체 인구의 10~15% 사용하고 있으며, 주로 서부 해안에서 사용되고 정부 문서, 문학 작품, 희곡, 방송, 교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약 2만여 명의 노르웨이인들은 사미Sámi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미어는 핀란드·우그리어족에 속한다. 북사미어의 경우 노르웨이 북부 지역에서는 노르웨이어와 동등한 자격의 공식 언어로 자리 잡았다. 모국어가 노르웨이어가 아닌 이주민들과 난민들의 숫자 때문에 현재 노르웨이 초등학교에서는 110가지의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영어는 노르웨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국제적 언어로 사용되며,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뒤를 잇는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17. 00:30




노르웨이의 경제




2014년 기준 노르웨이의 국내총생산(GDP)은 5,116억 달러로 세계 26위 규모이다. 이는 1조 4,495억 달러로 세계 13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보다 적은 수치이다. 그러나 한 국가 국민들의 1인당 소득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지표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 per capita)을 보면 다르다. 노르웨이는 99,295 달러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이지만 우리나라는 28,739 달러로 29위이다. 우리나라보다 약 3.5배나 높다. 이는 에너지, 해운, 해양, 수산업 강국으로서의 노르웨이 위상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경제 안정화를 우선시하는 노르웨이의 경제정책은 높은 고용률, 지속가능한 개발정책, 공평한 수입의 분배 그리고 잘 구성된 복지시스템 구축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친환경과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전략적 바탕 위에 이루어지고 있다. OECD의 노르웨이 경제보고서(2012.2.15)에 따르면 노르웨이 경제는 석유관련 막대한 수익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 규모를 석유관련 수입으로 적립된 펀드(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 GPFG)의 일정 규모(4%) 이하로 유지하는 재정규칙을 대체로 잘 준수하는 가운데 건전한 거시정책을 수행함으로써 현재 유로위기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양호한 경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노르웨이 경제 발전의 기초는 제조업이 아닌 원유 개발(1969년 에코피스크Ekofisk 유전에서 처음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노르웨이 경제의 특성상 국민 경제는 석유산업 의존도가 매우 높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의 경우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반면, 서비스 부문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주요 부존자원은 원유, 천연가스, 철광석이며, 경제적 강점은 에너지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지만 약점은 국내시장이 협소하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산업을 종사자를 기준으로 보면 1차 산업이 약 2%, 2차 산업이 20%, 3차 산업이 78%를 차지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면 1차 산업이 약 1%, 2차 산업이 40%, 3차 산업이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전국토의 4%만이 경작 가능하여 농업생산이 미미하다. 

 

노르웨이의 2013년 무역 흑자는 323 billion NOK인데, 그 효자 수출품이 역시 석유와 가스이다. 노르웨이의 가장 큰 수출국은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 독일 순이고, 수입은 스웨덴, 독일, 중국, 영국 순이다. 노르웨이의 수출과 수입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는 스웨덴인데, 수입의 14% 수출의 9%를 차지한다. 노르웨이 수출의 약 80%, 수입의 60%는 EU(유럽연합) 국가와 이루어진다. 개발도상국에서 수입되는 것은 18%에 지나지 않으며, 주목할 만한 점은 최근 중국이 3위의 수입국일 정도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석유와 가스이고 그 뒤를 이어 어업과 수산물, 금속(특히 알루미늄)이다. 노르웨이 연어와 고등어는 우리나라로도 많이 수출되고 있다. 노르웨이가 수입하는 품목으로는 산업기계, 컴퓨터, 전기, 자동차 엔진 등이 많다. 

 

중요 기업과 산업으로는 세계 최대 특수 선박 제조회사인 에이커 솔루션즈Aker Solutions, 세계 4대 선급협회 중 하나인 데트 노르스케 베리타스Det Norske Veritas, 선박용 통신 장비 기기업체인 네라NERA, 수중음향탐지장치인 소나Sonar를 제조하는 심라드SIMRAD, 잠수정 업체인 아르구스Argus, 마린 패션 업체인 헬리 한센Helly Hansen 등 해운과 북해 유전 관련 산업이 활발하다. 웹 브라우저 Opera를 만들고 있는 오페라 소프트웨어Opera Software도 노르웨이 기업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16. 00:30




 

노르웨이 정치정세의 특징

 

 




노르웨이는 입헌군주국으로서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제도적 관행상 영국과 유사한 정치체제이다. 비례대표제도로 인해 군소정당이 난립하고는 있으나,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보수계)로 구분되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이 운영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2차 대전 후 국내정치의 주안점은 경제정책이었는 바,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 간에 사유재산권의 범위, 공업화 및 도시화에 따른 장단점이 주요 논쟁대상이 되었고, 특히 1960년대에는 북해에서 원유와 가스가 발견됨에 따라 개발을 둘러싼 국가의 역할문제가 큰 논란거리를 형성하였다. 세금, 사회보장문제, 북해유전문제 등 경제문제 이외에 교육문제, 노인복지, 의료개혁, 환경, 대NATO 정책, EU 가입문제 등이 오랜 정치 쟁점이라 할 수 있다.

 




사법부

사법부는 대법원Høyesterett, 고등법원, 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17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고, 내각의 권고에 따라 국왕이 임명하며 종신제로 운영된다. 개별 사건 심의시, 법원은 5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며, 이들 5명중 1명이 위원장 역할을 수행한다. 

 

고등법원은 항소법원으로의 역할만 담당한다. 법률 적용 및 소송 절차, 판결 등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항소 가능하며, 통상적인 항소심의 경우, 3인의 법관과 4명의 법률비전문가(lay people)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하며, 징역 6년 이상의 중대한 범죄의 항소심의 경우, 3인의 법관과 10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한다. 

 

지방법원은 민사 및 형사사건의 제1심 법원이다. 통상적인 경우, 1인의 법관과 2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하며, 중대한 형사사건의 경우, 2인의 법관과 3인의 법률비전문가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한다. 민사사건의 경우, 통상 1인의 법관이 심의하나, 일방 당사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 3인의 법관으로 구성되는 법원이 심의할 수 있다. 또한 3인의 법관으로 법원이 구성되는 경우, 일방 당사자의 요청이 있으면 4인의 법률비전문가가 심의에 참여할 수 있다.

 

행정구역

노르웨이의 행정 구역은 필케Fylke(‘주’ ; County)를 가장 상위의 범주로 한다. 우리나라의 광역 자치 단체에 해당하는 필케는 19개이다. 주(오슬로는 전통적인 주로 간주하지 않음)는 국가와 지방자치제 사이의 행정적인 중간 단계를 제공하기 위해 1975년에 형성되었다. 각 주는 직접 선거에 의해 광역의회County Council를 구성한다. 필케는 기초 자치 단체인 코뮤네Kommune(‘군’ ; Municipality)로 세분화된다. 노르웨이에는 2012년 1월 기준, 429개의 지방자치체가 과세, 사회복지 정책 등에 있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가장 큰 지방자치체municipality는 수도 오슬로Oslo(647,676명)로, 유일하게 광역과 기초 자치 단체를 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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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5. 01:00





북유럽국가들 

입헌군주국 - 내각책임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이들의 공통점은 입헌군주국가라는 점이다. 모두 왕을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지구촌에는 지금도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군주제 국가가 적지 않지만, 노르웨이 국왕은 형식상 국가 원수이다. 노르웨이 국왕은 교회의 수장이며, 총리 및 각료 임명권, 법률거부권, 국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칙령은 국왕이 결제를 하고 총리가 부서한다. 정부에서 결정한 사항은 매주 금요일 국무회의에서 국왕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권한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의 국가 원수는 하랄드 5세King Harald Ⅴ 국왕으로 1991년에 즉위하였는데, 노르웨이 왕실은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서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인기를 향유하고 있다.

 




행정부: 내각

형식적 행정권은 국왕에게 있지만, 현실 정치의 실질적인 행정권은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가지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 조직(내각)은 총리실을 비롯하여 총 18개 부, 18명의 장관(외교부의 경우 장관 2)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각은 최고 책임자인 총리와 각료로 구성되며, 총리는 의회의 동의하에 형식상 국왕이 임명한다. 2015 현재 노르웨이 내각 총리는 2013 총선을 통해 우파 연정으로 집권한 보수당의 에르나 솔베르그Erna Solberg이다. 

 

입법부: 단원제 의회

노르웨이의 의회는 스투르팅Storting(노르웨이어로는 스토르틴게트Stortinget)이라고 불리며, 노르웨이 최상위 정치 조직이다. 노르웨이 의회는 원래 양원제였다. 19개의 주(필케)를 단위로 하는 대선거구제에서 선출된 169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169명의 의원 가운데 4분의 1이 상원에 해당하는 러그팅Lagting을, 나머지 의원들이 하원에 해당하는 오델스팅Odelsting을 이루는 양원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2009년 10월부터 이것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지금은 임기 4년의 단원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의회는 19개 주에서 선출되는 총 169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처럼 1인 2표제(인물과 정당에 각 1표)를 시행하고 있으며, 선거구별로 크기 및 인구수에 따라 4~15명의 인원을 선출한다. 특이한 점은 보궐선거가 없다는 점이다. 궐석 시에는 해당 정당의 비례대표 리스트 순위에 따라 승계된다.

 

노르웨이에는 노동당Labour Party,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중앙당Centre Party,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ic Party, 자유당Liberal Party, 사회주의 좌파당Socialist Left Party, 진보당Progress Party 등 여러 정당이 있다. 2013년 9월 선거 결과 보수당과 진보당 기독민주당 자유당 등 보수야당 연합이 총 169석 중 과반 이상인 96석을 차지하고, 여당인 노동당을 비롯한 3개 진보정당 연합은 72석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철의 에르나'로 불리는 에르나 솔베르그 보수당 당수가 노르웨이 사상 두 번째 여성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고 있다. 특징적인 점은 당시 의원 중 여성 의원이 전체의 40.8%인 69명이 선출된 것이다. 이는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높은 여성 비율이다. 이런 면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각의 40%가 여성, 기업 임원의 40%가 여성인 나라, 유엔이 ‘성평등의 천국’이라 부르는 나라, 그것이 노르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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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4. 00:03




 

 

1905년, 독립 군주국이 되다

 

 

 

1814년 독립이 좌절된 이후, 노르웨이는 지속적으로 연합 내에서 평등권 획득을 주장했다. 1890년대에 노르웨이가 독자적인 영사권을 주장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01년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영사제도에 관하여 협상을 하였으나 스웨덴 외무성의 감독을 받는 조건으로 영사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제안을 노르웨이측이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고, 1905년 6월에는 노르웨이 의회가 내각의 제안으로 독자적인 영사제도 수립을 결의하자 스웨덴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1905년 9월, 독자적인 영사제도를 둘러싼 양국간의 갈등은 양국이 각기 육군과 해군에 동원령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는데, 결국 양국 대표들이 회합을 가진 칼스타드Karlstad에서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완전한 독립과 연합의 분리를 승인하였다. 스웨덴의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 왕권을 양도했으며, 노르웨이는 공화국을 세우기보다는 독립된 군주국을 재수립하기로 결정했다. 14세기 말부터 1814년까지는 덴마크의 지배를, 1814년부터 1905년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 노르웨이는 이로써 완전 독립을 하여 입헌군주국으로 오늘날의 왕가를 이루게 되었다. 

 



노르웨이 홀로서기, 그 이후

1905년 독립 군주국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노르웨이는 1914년까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의료보험을 비롯해 1일 10시간 근무와 주당 48시간 근무 같은 많은 사회개혁을 법규화 했고, 1913년에는 여성들에게까지 투표권을 확대했다.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즉각 중립을 선포했다. 노르웨이는 중립이 존중되어 1차 대전의 직접적 피해를 겪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후 노르웨이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1935년 새로운 경제정책을 도입하고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세금 징수를 늘리고 공공사업을 확대하는 시책을 펴나갔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복지국가 건설 과정은 일시 중단되었다. 1940년 4월 독일군은 덴마크를 점령하고 노르웨이의 일부지역을 점령했다. 자체 군사력이 약했던 노르웨이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자 전 국토를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은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노르웨이 상선단 대부분은 연합국의 관리하에 편입되었다. 독일 점령기간 중 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으며 35,000명의 노르웨이인들이 집단수용소나 감옥에 수용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노르웨이는 UN(국제연합) 창설 회원국으로 참여하였고, 1949년에는 전통적인 중립정책에서 친서방 정책으로 전환하여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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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4. 00:03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 연합역사

 

 

 




1397년에는 스칸디나비아 3국인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이 칼마르 연합Union of Kalmar을 맺었다. 그것은 덴마크 왕이 다른 두 나라 왕을 겸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 호콘 6세의 미망인이며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의 딸인 마가레테Margarethe 여왕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통치하고 있었는데, 스웨덴을 포함하는 스칸디나비아 3국간 연합을 형성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칼마르 연합이 가능했던 것은 스칸디나비아 3국 왕실 간 친인척 관계, 문화적·언어적 유사성, 그리고 독일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 여러 가지 요인에 기인하였다. 연합의 국왕은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의 원로원 합의를 통해 선출하였는데, 국왕은 에릭왕King Erik이었다. 

 

그런데 1448년, 노르웨이 지배권을 둘러싸고 덴마크와 스웨덴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패권 경쟁에서 덴마크가 우세를 보임으로써 노르웨이는 덴마크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1523년에는 연합의 왕이던 크리스티안 2세의 폭정에 항거하여 스웨덴의 구스타프 바사Gustav Vasa가 봉기, 크리스티안 2세를 스웨덴에서 축출하고 스웨덴 국왕이 되자 스칸디나비아 3국 연합은 해체되었다. 

 



노르웨이·덴마크 연합(1523-1814) 

칼마르 동맹이 130여 년간 지속되다가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함으로써 와해는 되었으나, 덴마크 왕에 의한 노르웨이의 지배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덴마크 지배하의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항거하기도 하였으나 독립을 위한 투쟁은 모두 실패하였다. 16세기 초 오슬로의 아케르스후스Akershus성에서 덴마크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알브손Alvsson의 독립운동은 덴마크 군대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극작가 입센Ipsen은 ‘At Akershus’라는 시에서 알브손Alvsson의 죽음을 ‘노르웨이의 심장을 강타’한 사건으로 묘사했다. 덴마크의 지배는 노르웨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전에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던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도화가 이루어졌고,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노르웨이 지배층의 대다수가 덴마크 귀족들로 구성됨에 따라 덴마크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노르웨이는 이전까지 주로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1700년대부터 상업이 발달하면서 노르웨이 경제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스웨덴 연합(1814-1905) 

노르웨이의 운명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또 바뀐다. 나폴레옹 전쟁시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함께 나폴레옹 진영에 소속되어 스웨덴과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패하면서 스웨덴과 영국은 덴마크 국왕 프리드리히 6세에게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이양하도록 압박했고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하며 킬Kiel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1700년대 말경부터 싹트기 시작한 노르웨이 국민의 독립 의식은 덴마크의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치달았고 킬 강화조약에서 노르웨이를 양도한 덴마크 왕의 권위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르웨이 정부는 에이츠볼Eidsvold에서 국가회의를 소집하고, 1814년 5월 17일에 독자적인 헌법과 왕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스웨덴의 칼 14세는 노르웨이를 전격 침공하였고, 노르웨이는 결국 스웨덴과의 연합 수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1905년까지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스웨덴과의 연합 동안 1814년 5월에 채택된 헌법을 간직하도록 허용되었고, 헌법상으로는 독립 국가였다. 스웨덴과의 연합 기간은 노르웨이에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다당제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경제적으로는 산업사회로의 진전 및 상업선단의 급성장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1825년 미국으로의 첫 이민이 이루어진 후, 1910년까지 약 40만명의 노르웨이인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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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3. 07:23




노르게 왕국의 시작, 9세기 하랄드 1세

 



노르웨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빙하기 말기인 BCE 90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노르웨이인의 조상은 바이킹Viking계 민족인 노르드인Norsemen이다. 노르웨이Norway라는 국명도 고대 노르드어로 ‘북쪽의 길(Norðvegr)’을 의미한다. 그들은 8세기 말까지 남부에서 여러 개의 작은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 국가는 일단의 무사들을 이끄는 족장이 지배했다. 이러한 분열된 공동체가 하나로 통일된 것은 9세기 후반이다. 885년경 하랄드 1Harald Fair Hair 처음으로 노르웨이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통일 기반을 조성하였다. 노르게Norge 왕국, 노르웨이Norway 왕국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통일국가의 완성은 이루지 못한 끊임없는 내란과 덴마크의 침략 등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고, 노르드인들은 강력한 해양 전사인 바이킹으로서 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9세기부터 노르드인은 해외로 진출하였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반세기에 걸친 노르드인의 지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바이킹의 해외 활동은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0세기 이후 노르웨이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지속되었으나, ‘해상의 왕’으로 유명했던 올라프 1세Olav Ⅰ Tryggvesson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기독교 전파에 노력하였다. 노르웨이의 재통일과 기독교로의 개종은 올라프 하랄드손Olav Haraldsson(재위 1016~1028년)을 기점으로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빠져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많은 노르웨이인들을 개종시켰다. 역사에서는 서기 1000년을 노르웨이에 기독교가 전래된 기점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로의 개종과정에서 올라프 하랄드손은 많은 적을 만들게 되고 1028년 덴마크의 카누테 왕King Canute과 결탁한 노르웨이 귀족들에 의해 축출되었다가 1030년 왕권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스베레 왕가 시대(1184-1319)

1130년부터 50년간 왕권을 둘러싼 귀족들 간의 내란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1184년 스베레 시구르드손Sverre Sigurdsson이 강력한 통일 국가를 완성하였다. 1184부터 1319년까지는 스베레 왕가 시대인데, 이 때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등으로 노르웨이의 영토를 확장하고 왕위를 장자가 상속하게 하는 등 국력이 신장되고 제도가 크게 정비되었다. 1217년 호콘 4세Håkon Håkonsson den Gamle 즉위하여 내란을 점차 평정하고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1217~1263년에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배하여 노르웨이의 국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권 대립 항쟁이 그치지 않아 왕권이 쇠퇴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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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5. 7. 12. 01:19






노르웨이 영토와 자연환경




노르웨이는 공식 명칭이 노르웨이 왕국(The Kingdom of Norway)으로,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서부에 자리 잡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국토는 북위 57도에서 72도에 걸쳐 남북으로 약 1,750 길게 늘어지고 동경 4도에서 32도에 걸쳐 동서로 좁은 형태의 모습이다. 면적은 39, 한반도의 1.7, 대한민국의 4배이다.

 

노르웨이 땅은 250만 년 전부터 여러 번 빙하로 뒤덮였고, 지금도 약 1,700여 개의 빙하가 있다. 국토의 72%는 빙하의 침식을 받은 평탄한 꼭대기를 지닌 산지이다. 특징적인 것은 서쪽에 섬이 많다는 것인데,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2,000여 개의 섬을 포함하여, 노르웨이에는 섬이 약 15만 개나 있다. 그러다보니 해안선이 매우 길며, 거대한 피오르드fjord(협만峽灣: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 지형이 발달하였다. 

 



인접국을 보면 동부로는 나라의 대부분이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부 지역은 남으로는 핀란드, 동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부의 스카게라크 해협 건너편에는 덴마크가 있다. 또 남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해, 북해가 위치해 있다. 

 

노르웨이의 산계山系는 영국 제도를 형성하는 칼레도니아Caledonia계의 연장으로, 최고봉인 갈트회피겐(2,470m)이 남쪽에 있다. 글로마Glåma (599km) 가장 주요한 강이며 뫼사 호가 가장 호수(368)이다. 노르웨이는 알래스카와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기후가 따뜻하다. 그것은 멕시코 만류 덕분이다. 만류가 협만의 동결을 막아준다. 우리나라와 같이 4계절이 나타나지만 겨울이 가장 길고 여름은 짧지만 덥다. 7 평균 기온은 남쪽의 17로부터 북쪽의 10까지 변화한다. 또한 1 평균 기온은 남동 해안의 영하 2로부터 내륙 골짜기의 영하 10까지 기온차가 있다. 

 

연평균 강우량은 동쪽의 750㎜ 이하로부터 서쪽의 약 2,052㎜까지 큰 차이가 있다. 빈번한 돌풍이 발생하며 날씨 변화가 심하다. 북부 노르웨이는 백야白夜의 지방이다. 5월 중순부터 7월말까지 한여름에는 시계가 한밤중인 0시를 가리켜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계속된다. 반대로 11월말부터 1월말까지는 해가 지평선 위로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 중 서너 시간만 해를 볼 수 있는 긴 밤이 지속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조화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5. 7. 11. 13:26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Norway

 

노르웨이는 세계지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나라이다. 이곳은 바이킹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고, 얼마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만화영화 ‘겨울왕국’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눈부신 설경과 스키의 나라, 자연이 준 마법 백야白夜와 피오르드fjord를 관광산업으로 하는 나라 등 노르웨이를 묘사하는 수사는 많다. 국기에 나타나 있는 자유·평등·박애 이념을 바탕으로 바이킹의 후손답게 해운, 해양, 수산업의 강국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노르웨이를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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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8. 4. 23:25




미합중국의 정치 체제의 특성






미합중국은 ‘연방공화국’이라는 국가체제를 토대로 하여, ‘대통령중심제’의 정치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다. 즉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하는 연방공화국 체제라 할 수 있는데, 미국 정부는 연방주의Federalism, 권력분립Seperation of Powers,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라는 헌법의 주요 원칙에 입각해 구성되고 운영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의 권한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에 나누어지고, 다시 각자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기관 사이에 나누어진다. 이유는 정부의 권한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건국 당시에 만든 헌법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계속해서 수정조항들이 추가되었는데 권리장전의 10개 조항을 제외한 17개의 조항(수정헌법 11조~27조)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노예제 금지(제13조 1865년), 대통령 3선 금지(제22조 1951년) 등이다. 현행 미국의 연방헌법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규정하여 두고 그 이외의 사항은 모두 주정부의 권한으로 해 두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연방정부가 주정부를 규제할 수 있는 사항은 연방헌법이 연방의회에 권한을 부여한 사항에 한정된다. 다만 연방법과 주법이 상충할 경우에는 연방법이 우선한다.

 



헌법상 미국의 국가원수이자 연방정부의 수장인 대통령The President은 직접 선거가 아니라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을 통한 간접선거로 선출이 된다. 특이한 것은 주에서 한 표라도 더 많이 얻는 후보가 주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간다는 승자독식 제도winner takes all이다. 그래서 실제 득표수와 확보한 선거인수가 어긋나 더 높은 표를 얻었지만 선거인단수에서는 지는 경우도 간혹 일어난다. 최근의 경우로는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엘 고어 후보가 국민들의 표는 더 많이 받았으나 선거인단 수의 차이로 공화당의 조지 부시에게 패배한 바 있다. 선거인단의 수는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수를 합치고 여기에 미국 연방정부가 소재한 컬럼비아 특별구에 배당된 몇 명을 합한것으로 현재는 538명이다.

 

현행 미국 행정부 내각Cabinet은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과 바이든Joseph Biden 부통령, 그리고 국무부를 비롯해 연방정부 집행기능의 주축을 이루는 15개의 중앙행정부처로 구성된다. 중앙 행정부처 각 부의 최고 책임자는 장관Secretary이며 연방 내각의 구성원이 되고 대통령에게 직접 책임을 진다.

 

또한 중앙정보국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이나 연방준비은행제도Federal Reserve System 등 대통령을 위해 일을 하는 독립 행정기관들이 있는데, 이는 업무가 특수하여 행정 각 부에 소속되기가 어려우며 그 업무가 초당적 입장에서 추진되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설치된 기관들이다. 4년 임기의 대통령은 헌법상 군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가지며 주요 권한으로는 공직임명권, 의회소집권, 의회법률안거부권, 조약체결권, 사면권 등이 있다.

 

연방의 구성원인 각 주State의 정부 수장은 주지사Governor라고 하며, 주정부는 외교권과 교전권 등을 제외하고는 주권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권력의 거의 전부를 보유하고 있다. 즉, 주정부에는 주 자체의 의회, 법원, 행정부가 있어 각주에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각 주가 담당하는 사항에 관하여는 각 주 스스로가 정한 방식에 따라 규제방식도 달라지게 되므로, 각 주에 따라 동일한 사항에 대한 규율방식이 조금씩 다른 경우도 많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4. 8. 2. 18:38



미국 데탕트에서 대 테러전까지






제37대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이전 정권과 달리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였으며 1970년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를 명시하고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국제외교관계에서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6년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에 제3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터Jimmy Carter는 경제문제와 자원보존을 정부개입주의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대외정책에서는 인권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79년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건 발생시 구출작전의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보수주의 성향이 강화된 미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을 안고 1981년 취임한 제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줄임으로써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공산주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군비를 확충했다. 레이건 노선을 승계한 제41대 대통령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국가 재정적자 증가 및 경제상황 악화가 지속되는 상황 하에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촉발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상승하게 되었다.

 

1992년 지속적인 경제침체 해결에 대한 기대로 정부개입과 복지국가노선을 추구하는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이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클린턴은 소수인권과 근로자 권익을 강화하고 의료보험혜택을 확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경제 호황에 힘입어 2차 대전 이후 민주당 출신 최초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적 규모의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2001년에는 항공기를 이용해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Pentagon)를 공격한 ‘9.11테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제43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행정부는 대테러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2002.12)하고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2003.5)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고, 대테러전 차원에서 대량파괴무기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확산 저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하였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2008년 실시된 제44대 대통령 선거에서 ‘희망hope과 변화change’를 주창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했고 적극적, 전향적 대외 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12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는 2014년 4월 25일, 재선 후 처음으로 방한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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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8. 1. 16:13




냉전체제와 아메리카의 번영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유럽권을 장악한 소련의 위협을 크게 인식하고 전후에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제33대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해 소련에 대한 포위정책을 수립, 1947년 3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는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제의하는 마샬계획Marshall Plan을 수립하고, 1949년에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서방 12개국을 규합해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크게 인식해 격렬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국가보안법인 매캐런법McCarran Act이 제정되었고,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일련의 반공산주의 선풍이 미국을 휩쓸기도 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기본으로 복지국가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고, 한편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을 중심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본격화되는 등 민권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뿌리 깊은 인종차별 관습의 철폐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 되었다. 진보적 성향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하고 빈곤을 없애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하였으며, 1962년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단행해 소련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 쿠바 미사일 사건을 계기로 1963년 핵전쟁 방지를 위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TST(일명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어 미·소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36 존슨Lyndon Baines Johnson 행정부 시절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 움직임이 강화되어 반체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층과 흑인 소수자 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과격한 흑인민권 운동과 급진적인 학생운동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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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8. 1. 16:12



USA의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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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31. 17:10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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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31. 17:09

호주의 사회적 특징






호주를 처음 개척한 건 영국인들이지만, 오늘날의 호주는 미국이나 캐나다보다도 이민자 비율이 높을 정도로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사는 다문화 국가이다. 백인과 비백인을 포함해서 이민 1,2세대가 무려 절반을 차지하는 나라가 호주다. 본래 호주 대륙의 원주민은 아직도 수렵시대의 생활을 영위하고 그 인구도 크게 감소하였으므로, 오늘날 호주 사회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럽계 백인의 천하라 해도 좋을 정도다. 호주는 식민지 개척 이래 지속적으로 이민에 의한 인구 증가를 꾀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원개발과 경제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이민 수용 정책을 편 결과 주로 이탈리아, 그리스, 네덜란드계의 이민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1850년대의 골드러시 때 중국인 광부들과의 사이에 일어난 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겨난 백호주의白濠主義(White Australia Policy) 정책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으나, 1973  정책이 공식 폐지되었고 1975년엔 인종차별금지법Racial Discrimination Act 제정되었다지금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히려 국민들 대다수가 다문화 정책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며 여러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호주에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다. 고령자, 장애인, 실업자, 병약자, 무주택자에 대한 지원이 눈길을 끈다. 또 오전과 오후에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으며, 크리켓, 론 볼링, 럭비 등의 스포츠가 활발하다. 골프나 경마, 수상스포츠, 캠핑을 즐기고 일요일 오후에는 ‘아르보’(오후라는 뜻)라는 정원 맥주 파티에서 서로 어울린다. 또 예고 없이 친구나 친척집을 방문하여 잡담하는 관습이 있고, 호주식 바비큐를 즐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동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일년에 4~5주의 휴가와 연중 다수의 공휴일이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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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4. 7. 30. 14:11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화







초기에 호주 대륙의 문화는 식민세력에 의해서 각인되었지만, 고유한 국가적 동질성이 생겨나면서 호주의 국가 문화도 생겨났다. 오늘날 호주의 문화는 다양한 집단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것이 원주민인 애버리진의 토착 문화와 혼합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즉, 현대 호주 문화의 정체성은 원주민 애버리진의 유산, 활기찬 문화의 융합, 혁신적인 사고와 활발한 예술 현장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모방예술의 가장 오랜 형태는 기원전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애버리진의 석굴묘다. 자연 안료로 나무껍질에 그린 그림에서 아크릴로 화포 위에 그리는 그림으로 바뀌면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고, 1960년대 이래 애버리진 예술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호주에 거주하는 최초 유럽인들의 회화는 동물이나 애버리진을 모티브로 삼고 있으나 톤과 색조에 있어서 유럽의 회화를 범례로 하고 있다. 멜버른에 있는 하이델베르크학파에 의한 프랑스 인상주의에 동화됨으로써 19세기 후반 경에 호주 예술은 처음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오늘날 호주 예술가들은 점차 아시아 나라들의 예술 형태에 영향을 받고 있다. 


 

자립적인 호주 문학의 발전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헨리 로슨이나 페터슨 같은 초기 작가들의 시는 ‘부시 발라드(bush ballad)’라 불리면서 호주 숲 속 농촌지역의 다채롭고 모험적인 생활을 다루었으며, 그 이후에도 초점은 호주 대륙과 그 주민들에 맞추어졌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많은 호주 작가들은 농촌 생활과 아울러 도시 생활에 관해서도 작품을 썼는데, 소설가 패트릭 화이트Patrick Victor Martindale White(1912~1990)는 ‘폭풍의 눈 The Eye of the Storm’이라는 소설로 1973년에 호주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세기 호주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칭송을 받고 있다. 

 

호주는 영화 산업을 선도하고 발전시킨 역사를 갖고 있다. 1896년 호주 시드니에서 최초의 영화관이 문을 열었으며, 1906년 호주의 구세군이 상영한 ‘십자가의 병사들’은 세계에서 최초의 진정한 영화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호주의 영화 산업은 20세기 초에 붐을 이루었다가 1930년대 말 이후 미국과 영국의 영화에 밀려 사실상 소멸했으나, 1969년에 호주 정부가 영화 산업의 촉진 정책을 강화하면서 부활했다. 이후 호주적인 테마를 취한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1975년 피터 와이어 작 ‘성 발렌틴제의 소풍’이다. 1998년 시드니에는 대형 영화촬영장인 폭스 스튜디오Fox Studios가 문을 열었으며, 이후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의 제작사가 호주로 옮겨졌다. 오늘날 호주는 1년에 20편 이상의 장편영화를 제작하며 갈수록 많은 작품을 해외에 배급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