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2018. 12. 13. 03:03

댄 애리얼리, 제프 크라이슬러 지음 |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돈의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꼭 키워야 할 감각들

『상식 밖의 경제학』의 저자이기도 한 댄 애리얼리Dan Ariely는 부의 감각을 키우기 위해 꼭 알아야 할 10가지를 든다. 기회비용, 상대성, 연결성, 고통을 회피하려는 심리, 자신에 대한 과한 믿음, 소유한 것의 가치에 대한 과대평가, 공정함과 노력보다 실제 가치, 언어와 제의의 마법, 기대치에 대한 과대평가, 돈에 대한 지나친 강조, 이상 10가지다. 행동경제학으로 살펴본 돈에 대한 의사 결정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 돈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결국 지혜로운 사람이다. 세계 유수의 경제지로부터 강력 추천을 받은 책!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18. 03:00






 

 

사회철학(Social Philosophy)

 

 

 



 

1997년대에 우리는 IMF 관리체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사회 각 부분의 구조조정으로 말미암아 직장인들이 일터에서 쫓겨나야 하는 수난을 겪은 바 있다. 최근에는 일터로 뛰어들어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젊은 청년들이 직업난으로 말미암아 또 한 번 고충을 겪고 있다. 외연을 확장해 보면 지구촌에는 인종갈등, 이념의 대립, 산업화에 따른 기술과 무역경쟁 등으로 말미암아 전란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배후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와 공정하지 못한 생업활동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의 분과는 사회철학의 범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역사를 조망해볼 때 사회철학의 발단은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을 밝혀, 줄기차게 실현하려고 노력해온 한 가지 주제에서 시작한다. 그 주제는 바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궁극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정의로운 인간, 정의로운 사회 혹은 정의로운 국가 건설에서 보는 “정의”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어떻게 하면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규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에 충족되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인간 삶의 생존권 보장, 다양한 인간에게서 표출되는 적절한 욕구충족, 각자에게 부여되는 자아실현의 기회를 보장받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을 본질적이고도 통합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경제적 가치의 공정한 분배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면 누구나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욕구와 각자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물질적 가치가 기본적으로 확보되어야 하고, 이를 근간으로 해서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얘기다.

 

경제의 물질적 가치에 대한 분배문제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한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정책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대표적인 학자는 사회철학자이자 고전경제학자로 불리는 스미스Adam Smith(1723~1790)이다. 그는 1776년에 출간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서 최초로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했다. 자유시장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인은 각자 사익을 추구하고, 자원 또한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이로부터 사회전체 또한 생산성이 높아져 이익이 증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 사회정책은 결국 ‘가난한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자본가는 더욱 부자가 되는’[貧益貧 富益富] 기형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극단적으로 반대적인 평등주의 사회정책이 출현하게 된다.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사회정책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정책도 결국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최근에는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수정자유주의 사회정책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롤즈John Rawls(1921~2002)이다. 그는 1971년에 출간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빈부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소득 재분배 정책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여러 국가에서 검토되고 있는 편이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사회철학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산업사회에서 노동의 문제와 물질적인 재화의 재분배 문제로 집약된다. 사유재산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노동과 관련된 허점을 날카롭게 파헤치면서 마르크스K. Marx(1818~1883)는 “소외疏外”(Entfremdung)의 문제를 제기하였고, 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재화의 분배문제를 다룬 롤스는 『정의론』에서 어떻게 하면 공정한 재분배가 실현될 수 있는가를 제기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17. 02:00




 

 

인류의 정의사회구현은 가능한 것인가

존 롤스의 의관

 

 

 


어떻게 하면 정의로운 사회(국가)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일찍이 세심하게 분석한 최초의 인물이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다. 그는 『국가론』(Politeia)에서 ‘누가 정의로운 사람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성의 분별력이 달리는 사람은 ‘정의’를 알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정의를 쉽게 알아내기 위한 방편으로 플라톤은 우선 덩치가 커서 식별하기 쉬운 정의로운 국가를 논리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생산자 계급, 무사 계급, 통치자 계급이 맡은 바 업무를 질서 있고 통일적인 조화로서 수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롤스의 정의관은 플라톤의 입장과 다르다. 롤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정의가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실질적인 기회평등을 보장하여 각자가 최선의 자아실현을 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본 것이다. 그러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의 기본구조가 공정한 원칙에 입각해서 짜여져야 하고, 다음으로는 모든 제도가 공정한 원칙에 따라서 정립돼야 한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는 학자는 사회의 기본구조를 위한 규범을 밝힐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여야 한다. 정의의 원칙이란 규범체계에 있어서 직위와 직책이 규정되고, 그에 대한 책임과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방식으로 여러 제한사항을 정식화하는 것이다.

 

롤스가 말하는 정의의 원칙은 인간의 삶에 미리 주어져 있다고 보지 않고, 인간이 주체적으로 구성해야 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사회의 기본구조에 대한 정의사회의 원칙은 원초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합의로부터 나온다. 즉 정의사회의 원칙은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람들이 대표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입장에서 공정하고 타당성이 있는 공동체의 기본조건을 규정하기 위해 채택하는 원칙들이다. 사회정의의 원칙은 두 측면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 그것이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시민의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의 기본적인 자유란 요컨대 정치적 자유(선거권과 피선거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사유재산 및 신체의 자유, 그리고 법의 테두리로 규정되어 있는 바 부당한 체포 및 구금을 당하지 않을 자유 등이다. 정의로운 사회의 시민들은 누구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둘째, ‘차등의 원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사회적 내지 경제적 불평들을 규정하는 체계를 말하는데, 소득 및 재산의 분배와 권한, 책임과 명령계통 등에서 차등을 두는 규정이다. 롤스는 첫 번째의 기본적인 자유에 관한 평등의 원칙을 설정하였지만,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분배문제에 있어서는 차등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의 차등은 직위와 직책상의 차별이 아니라 그것에 직간접적으로 결부되는 특권이나 부, 혹은 과세에 대한 부담, 강제적 봉사 등의 이득과 부담을 달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등이 적용됨으로써 사회적 경제적 배분에 있어서 더 많은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차등의 원칙’은 다시 “기회균등의 원칙”과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으로 세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기회균등의 원칙’은 일률적인 분배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에게 공정한 게임이 되도록 정당한 경쟁조건을 마련하여 실질적인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자는 것이다. 요컨대 특수한 이익을 가져오는 직책에 오르는 것을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실행될 수 있도록 한다든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함에 있어서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불평등이 초래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의한 것이므로 문제될 것은 없다.

 

다음으로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의 원칙’은 사회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하고, 이들의 처지가 개선될 수 있도록 실제적인 기회균등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원칙에 근거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개선하기 힘든 빈민이나 실업자, 노령이나 장애인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역차별적(逆差別的)인 분배를 실시할 수 있게 된다. 역차별적 분배란 이들에게 무상교육이라든가, 각종 연금을 통한 생계유지라든가, 최대한의 의료보장 등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정의의 원칙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런 원칙들이 요구하는 것 간에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느냐이다. 이에 대해서 롤스는 충돌을 해결하기에 필요한 우선순위의 규칙을 마련한다.

 

첫 번째의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두 번째의 사회적, 경제적 가치분배에 있어서 ‘차등의 원칙’에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이는 부와 소득의 분배 및 권력의 계층화는 반드시 동등한 시민권의 자유와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한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정의사회 구현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유는 사회적 경제적 이익과 교환될 수 없다는 얘기다. 두 번째의 ‘차등의 원칙’은 효율성이나 이익의 극대화를 동반하는 어떠한 원칙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 또한 ‘차등의 원칙’에서 ‘기회 균등의 원칙’은 ‘최소 수혜자 최대이익의 원칙’에 우선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롤스의 정의론은 평등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 모두가 행복하게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를 토대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을 비롯하여 불공정한 사회문제들이 우후죽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여 수정자유주의를 옹호하게 됐던 것이다. 특히 사회구성원의 기본적인 자유가 평등하게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게 되고, 국가의 업무란 누진세, 상속세, 직접세를 늘려 경제적 자본을 확보하여 이를 사회구성원들의 복리증진에 힘쓰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정한 정의사회구현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 롤스의 입장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16. 18:00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인간의 소외

마르크스 철학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소외를 일으키는 근원과 그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데서 인간의 소외가 비롯된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한다. 자본주의에서 돈의 가치는 소유주에게 무한한 힘을 부여하는 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돈의 가치는 모든 가치를 지배하여 전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실을 불성실로 불성실을 성실로 전도시킬 수 있다든가, 미덕을 죄악으로 죄악을 미덕으로 바꿀 수 있다든가, 무지를 지성으로 지성을 무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든가, 노예를 주인으로 주인을 노예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이 바로 돈이라는 얘기다. 이와 같이 가치의 정상에 군림하는 돈의 위력은 인간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유를 박탈당하며, 비인간화로 전락한다. 이와 같이 돈의 가치에 대한 숭배는 소외의 토대이자 근원이 된다.

 

둘째로, 임금노동자는 노동의 이윤으로부터 소외가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계급은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양분될 수 있는데, 자본가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 된다. 특히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합리적으로 배치하려고 한다면, 임금노동자나 새로운 기계의 도입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만일 임금노동자를 선택하였을 경우 자본가는 생산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노동자에게 지불하고 잉여분을 챙긴다. 임금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노동을 하지만, 잉여가치는 결국 자본가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는 노동을 하면 할수록 이윤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내면적인 가치가 더욱 빈약해지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셋째로, 임금노동 자체가 소외의 원천이 된다. 사실 노동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임금노동자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노동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고역이고, 자발적으로 행하는 창조적인 노동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기계적이고 즐거움이 없는 반복적인 작업의 연속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은 인간에게 자유로움과 보람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강요된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과 무관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이런 노동자는 동물처럼 단지 먹고 마시고 번식하는 기능을 할 때만 오히려 편안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넷째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산출해낸 상품은 노동자 자신과 전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려 소비되기 때문에, 임금노동자는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는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자본가의 생산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는 자기와 같은 종족을 생산해내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임금을 받아 생존해 나갈 뿐이다.

 

다섯째, 임금노동자는 생산 활동과 자신의 본질로부터 소외되고, 결국엔 본질이 속하는 유적존재(類的存在)로부터 소외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고립된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 간의 유대관계를 통해 사회적인 유(類)를 반영하는 유적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은 노동을 통한 생산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본질을 실현시키게 되지만,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창조적인 자기 활동성과 자유로운 활동성이 사라지고, 오직 삶을 위한 노동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로부터 소외된다. 결국 그러한 인간은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 분리되어 사회적 관계인 유적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여섯째, 유적존재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동료들로부터 소외된다. 특히 노동의 분업은 노동자들의 소외를 더욱 가속화시키기 마련이다. 즉 노동의 분업으로 인하여 개인의 이익은 공동체의 이익으로부터 분리되고, 개인들의 관계는 이기적인 타산의 관계로 변질되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간행위로부터 소외되어 결국 인간은 서로서로 이방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방인으로 전락한 인간들 간의 관계는 인격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맺어지게 마련이다.

 

일곱째, 인간의 소외는 노동자만의 특권이 아니고 노동자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자본가도 마찬가지이다. 임금노동자는 노동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외되고, 자본가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소외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자기 소외는 결국 인간이 자주성을 상실하는 데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즉 인간은 자유롭고 능동적인 창조활동이나 자기 본질의 표현으로서 노동해야 하는데, 노동으로부터 산출된 상품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고, 인간의 본질이 유적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인간들로부터의 소외가 초래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을 폐기하여 노동자와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16. 00:00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분석한

마르크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소비의 만능시대다. 자본가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상품을 창출하여 소비자의 구매를 유혹하고 있고,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소비자는 원하는 대로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기호 가치를 표현하면서 자유를 누린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상품들은 소비자에게 자아실현의 물질적 조건으로 여겨지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상품소비의 자유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에게만 허용된다. 그런 물질적 조건을 충족함으로써 자아실현의 추구라고 믿는 소비자는 결국 시장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돈이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자아실현의 물질적 조건이 되는 금전의 사익추구는 인간본연의 의식과 태도를 변화시켜 이기심과 탐욕을 더욱 부추기게 되고, 이기심과 탐욕에 물든 인간은 순수한 사랑, 고귀한 명예심, 꺼림칙한 마음을 일으키는 양심, 지극히 존귀한 사람의 가치조차도 오직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된다.



자본가는 경제주의 입장에 충실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 인정사정을 두지 않으며, 이윤 증식을 위해서는 무엇이 바람직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지 않고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한다. 반면에 무한한 물질적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한다고 믿는 소비자는 돈벌이에 동분서주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가 말하는 인간의 “소외”(疏外)라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소외”란 어떤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소원(疏遠)해진 것을 일컫는다. 인간의 소외란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의 소외에 대해 헤겔G. W. Hegel(1770~1831)은 대자태(對自態)인 자연으로 외화(外化)된 의식을 말했고, 포이에르바흐L. Feuerbach(1804~1872)는 소외를 종교(宗敎)에서 찾았으며, 프롬E. Fromm(1900~1980)은 인간의 우상숭배에서 소외를 언급했고, 마르크스K. Marx(1813~1883)는 노동자가 겪는 산업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소외를 통찰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10. 02:52




 

 

 

한국과 싱가포르의 관계

 

 




 

한국은 1970년 11월 5일 주駐싱가포르 통상 대표부를 설치하고 1972년 7월 5일 대표부를 총영사관으로 승격시켰으며 1975년 8월 8일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싱가포르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어 1978년 11월 9일 당시 도쿄에 주재하던 주한 싱가포르 대사의 신임장을 제정했다. 1990년 10월부터 주한 싱가포르 상주 대사가 부임했다.

 

한국은 싱가포르와 1975년 8월 수교 이래 긴밀한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정상 및 고위 인사가 상호 빈번하게 방문하며 2006년 3월 한국·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발효 이후 양국 교역이 매년 25% 증가했으며 양국 투자도 확대되었다. 양국의 인적 교류를 살펴보면 2009 기준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한 한국인이 27만 2000명, 한국을 방문한 싱가포르인이 약 9만 7000명으로 총 약 37만 명이 교류했다. 양국은 각각 동북아 및 동북아의 중견 국가로서 서로 상대 지역 진출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 및 지역·국제 협력 동반자로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1981년 7월 전두환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996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방문했으며 2000년 1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국빈 방문 및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Nations)+3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아세안(ASEAN)+3정상회의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대한민국, 일본, 중국 3개 국가를 포함시킨 정상회의이다. 이후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빈 방문했으며 2007년 11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아세안+3 및 동아시아정상(EAS, East Asia Summit) 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2009년 11월 이명박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했고, 2010년 6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공식 방문하고 샹그릴라 대화 기조 연설을 하였다. 2015년 3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리콴유 전 총리 장례식에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하였다.

 

싱가포르 인사의 한국 방문은 1979년 10월 리콴유李光耀 총리의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리콴유 총리는 그 이후 1986년 7월, 1988년 7월에도 한국을 방문했으며 1993년 11월에는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1999년 6월에는 정상회담을 위해 고촉통 총리가 방한했으며 2000년 10월에 고촉통 총리가 샨무감 자야쿠마르Shanmugam Jayakumar 외무장관과 함께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Asia EuropeMeeting)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으며 2002년 4월에는 셀라판 라마 나단Sellapan Rama Nathan 대통령이 국빈 방문했다. 2005년 11월에는 리셴룽李顯龍 총리가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 참석했으며 2009년 6월에는 리셴룽 총리가 한·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 정상회의 참석차 공식 방한했다. 이밖에도 리셴룽 총리는 2010 11 서울 G20 정상회의 참석차, 2012 3월에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2013년 12월에는 한-싱 정상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1972년 2월 항공 협정을 체결하고 1979년 11월 이중과세 방지 협정을 체결했다. 1981년 5월에는 해운 협정을 체결하고 1982년 11월에 비자 면제 협정을 체결했다. 1995년 8월 예술·문화·체육 협력 협정을 체결했으며 1995 5 통신 협력 양해 각서에 서명했다. 1997 2 과학·기술 협정을 체결했고 1997 6 체육 교류 약정을 맺었다. 2000 11 중소기업 협력 약정과 표준 협력 약정을 맺었으며 2006년 3월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을 체결했다.

 

2010년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 수는 약 1만 6000명으로 이 가운데 시민권 및 영주권자가 2,000명이며 6개월 이상 장기 체류자가 1만 4000명이다. 2010년 4월 기준으로 싱가포르 내에 있는 한국 기관 및 지·상사는 정부 유관 기관 5, 금융 회사 10, 해운·조선 10, 종합상사 7, 항공 2, 건설·중공업 6, 정유 4, 전자·전기 7, 일반 무역 및 기타 9개이다. 싱가포르 내 동포 단체로는 동포 사회 특성상 지·상사 주재원이 다수 회원으로 있으며 1963년에 창립된 ‘재싱가포르 한인회’, 1997년 10월 한국경제인협회가 창립한 뒤 2002년 9월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로 개편한 ‘싱가포르 한국상공회의소’가 있다.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학교는 1993년 3월 개교하였다.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으며 1973년에 설립된 부설 토요한글학교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2010년 현재 학생 수는 1학년~6학년까지 108명이고 토요한글학교의 학생 수는 초등 270명, 중등 40명으로 총 310명, 한국어 강좌 수강생 수는 180명이다.

 




경제문화 관계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중동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라는 특성을 바탕으로 동남아의 교역 중심지로 발전해왔으며, 한국은 싱가포르와 교역, 투자, 건설 부문에서 긴밀한 경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5년 기준, 한국의 對싱가포르 수출은 150억 달러, 수입은 79억 달러로 전년 대비 각각 36.8%, 29.7% 줄어들어 그동안 꾸준히 증가했던 전체 교역규모가 34.5% 축소되었다. 우리나라의 對싱가포르 주요 수출 품목은 석유, 직접회로반도체, 선박류이고 주요 수입 품목은 직접회로반도체, 석유화학중간원료, 반도체 제조용 장비 등이다.

 

싱가포르는 일찍이 전문한 부존자원을 타계하고 지역적 이점을 활용하여 개방경제정책을 지향해 왔으며, 이에 따라 안정되고 일관된 정부 정책, 친기업 정책을 펼침으로써 글로벌 기업들을 싱가포르로 유치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2015년 기준 기업하기 좋은 국가 1위인 싱가포르는 경제개발청EDB(Economic Development Board)을 중심으로 외국 기업 유인 수단으로서 우수한 비즈니스 인프라를 건설하는 등 친기업 정책뿐만 아니라, 원활한 기업 활동 여건을 위해 각종 인센티브를 부여해 왔다. 외국자본을 자국자본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안정적인 투자처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자본이동에 제한이 없어 외국인 투자가의 송금이 자유롭다. 평균 3일 이내에 법인 설립이 가능하고, 최소 자본금 1싱가포르 달러, 현지 거주 이사 최소 1인 등 설립 요건이 최소화되어 있는 것도 장점이다. 고급인력이 풍부하며 탄력적인 인사가 가능한 동시에 노사 분규가 적어 안정적인 노동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강점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싱가포르 투자 진출 규모는 1968년부터 2015년 누적 기준 총 76.4억 달러(US$)로 투자 진출국 11위 규모에 해당한다. 연도별 투자금액은 2012년부터 매년 크게 증가해 2015년 약 14억 달러(US$)로 최대 투자규모를 기록했다. 일반 종합상사 분야에서는 삼성물산, LG상사, 현대상사, 포스코대우, 건설 분야에서는 현대건설, 쌍용건설, GS건설, 선박 분야에서는 SK해운, 한진해운, 현대상선, 정유 분야에서는 SK에너지, GS칼텍스, S오일, 식품 분야에서는 CJ 등이 진출해 대기업 대다수가 여러 분야에 걸쳐 진출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9. 01:00







 

증주의 선구자

프랑스 철학자 꽁

 




실증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출신 꽁트Auguste Comte(1798~1857)는 경험될 수 있는 실증적인 사실들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하려 했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단숨에 거부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형이상학적인 주제가 사변적이거나 초경험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에, 인식론적으로 전혀 무의미하여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음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정의적인”(emotive) 명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들에 의하면, 언어로 표현되는 진술이 의미가 있으려면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명제여야 하는데, 이러한 명제는 자연과학에서 추구하는 ‘종합명제’(綜合命題)와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다루는 ‘분석명제’(分析命題)뿐이다. 이외의 다른 명제들은 형이상학적인 명제이거나 단순한 정의적인 감정표현에 불과하므로 모두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진술이라는 얘기다.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명제는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종합명제와 의미 있는 분석명제이다. “철수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진술은 종합명제의 예이다. 이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철수가 과연 청바지를 입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다. 분석명제는 그 진술에 사용된 개념의 정의(definition)에 의해서 타당성이 증명될 수 있다.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진 다각형이다”는 진술이 그 예이다. 이 진술의 진위 여부는 ‘삼’, ‘선분’, ‘다각’의 개념 정의로 인식되는 명제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종합명제도 아니고 분석명제도 아닌 명제란 인식론적으로 무의미한 사이비 진술들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저 여자는 정말 아름답다”와 같은 미학적 진술, “저 여자는 참으로 착하다”와 같은 윤리적 진술, “전지전능한 신은 인류에게 전적으로 자애롭다”와 같은 종교적 진술 등은 모두 그 타당성이 검증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주장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의미 있는 진술은 오직 자연과학의 언어들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이 밝혀야 할 탐구주제는 오직 과학적 언어의 용법에 나타나는 개념을 분석하여 명료하게 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논리실증주의는 철학이란 단지 과학의 논리학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카르납은 “과학의 명제 이외에 철학만의 고유한 명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탐구한다는 것은 과학의 개념 및 명제를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명확하게 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한 도구가 새로운 기호 논리학이다.”(『Erkenntnis』)라고 주장한다.

 

논리실증주의의 두 번째 작업은 검증의 원리(the verification principle)를 확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진술을 안다는 것은 그 진술이 참이 될 조건과 거짓된 조건을 아는 것이며, 그것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약은 달콤하지만 생명을 죽이는 독약이다”라는 진술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이를 검증해보면 된다는 것이다. 검증은 바로 경험을 통한 실험 관찰이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진술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검증할 방법이 없다. 경험으로 검증될 수 없는 이러한 명제는 언제 참이고 언제 거짓이 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명제는 분석해보면 ‘신’과 ‘존재한다’라는 단순한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논리실증주가 제시하는 의미 있는 진술과 무의미한 진술의 구분,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실험 관찰을 통한 검증원리는 후대의 사상과 학문적 탐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오늘날 철학적 활동에 있어서 검증될 수 없는 주장이란 무의미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는데, 이는 바로 논리실증주의 사고방식에 기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8. 1. 8. 20:38




 

 

비엔나 학단의

논리적 실증주의

 

 

 



금세기에 내적으로 단단하게 짜여진 하나의 학파를 이루어 철학적 운동을 새롭게 전개한 단체가 있다. 바로 비엔나 학단의 논리적 실증주의가 그것이다. 이 단체는 1929년 비엔나에서 『과학적 세계관』(Wissenschaftliche Weltanschauung)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일군의 철학자들이 동참하면서 논리적 실증주의가 출범하게 된다. 자칭 비엔나 학단이라 칭하는 이 단체는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프레게와 러셀의 논리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그 학단의 중심에는 세미나를 주재해가던 저명한 학자 슐리크Moritz Schulick(1882~1936)가 있었다. 슐리크는 독일에서 출생하여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귀납적 과학철학의 교수로 활동한 인물이다.

 


비엔나 학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학자는 카르납Rudolf Carnap(1891~1970)이다. 이 학단은 1930년부터 『인식』(Erkenntnis)이라는 정기간행물을 기관지로 삼고 있었지만, 그 간행물은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히틀러 정권 치하로 병합되면서 중단되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비엔나 학파의 저명인사들은 각국으로 흩어져서 활동하게 된다. 카르납은 1931년부터 프라하에 정착하여 그곳의 독일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난경에 처하자 1935년에 유럽을 떠나 미국 시카고로 이주하여 교수생활을 새로 시작하였다. 1954년 이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대학교수로 활동하다 생을 마감했다.

 

비엔나 학단을 중심으로 활동한 논리실증주의의 철학적 주요 업무는 어떤 웅장한 이론체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진술되는 사상의 의미를 보다 논리적으로 분명하게 하는 데 있었다. 왜냐하면 일상 언어라는 것은 다의적이어서 애매하게 표현되어 사유에 많은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리적 실증주의는 이런 애매한 언어로 표현된 철학적 명제를 논리적으로 정밀한 언어로 환원함으로써 명제의 논리적 구조를 명확하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논리실증주의의 첫 번째 작업은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일언지하에 폐기처분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우주의 근원적인 실재, 우주의 존재 목적, 절대적인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 등 초감성적인 영역을 탐구대상으로 삼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6. 02:30




 

 

싱가포르의 교육시스템

 

 




싱가포르는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를 지양하기 위해 언론출판법(Newspapers and Printing Press Act)에 의거, 자유롭지만 책임 있는 기사를 쓰도록 하는 통제된 언론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내 언론의 수준 향상 및 경쟁 도입을 위해 2000년 6월 신문 분야를 관리하는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ingapore Press Holdings)와 방송 분야를 관리하는 싱가포르 미디어 코퍼레이션MCS(Media Corporation of Singapore)이 서로 상대 분야에 진출하여 제한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신문은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ingapore Press Holdings) Ltd.가 싱가포르 내 신문을 전부 소유하여 통합 관리하고 있다. 주요 신문으로는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비즈니스 타임스The Business Times, 리엔허 자오빠오Lianhe Zaobao(聯合朝報), 베리타 하리안Berita Harian 등이 있다.

 

텔레비전 방송은 싱가포르 미디어 코퍼레이션MCS이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을 통합 관리하고 있는데, 주요 TV 채널은 채널(Channel) 5, 채널 뉴스 아시아(Channel News Asia), 수리아(Suria), 채널(Channel) U 등이 있다. 라디오는 1936년에 방송을 개시한 싱가포르 라디오 코퍼레이션(Radio Corporation of Singapore)이 12개 국내 채널로서 영어 5개, 말레이어 2개, 중국어 3개, 타밀어 1개 등으로 시작했고 3개 국제 채널로는 싱가포르 국내 뉴스, 시사 등을 방송했다. 기타 방송 3개사로는 문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라디퓨전(Radiffusion), 예술 전문 방송인 국가예술위원회NAC(National Arts Counsil) 아트 라디오 스테이션(Arts Radio Station), 일반 뉴스와 국방 및 스포츠 뉴스, 대중가요를 방송하는 사프라 라디오(SAFRA Radio)가 있다.

 



싱가포르는 1998년 2월 CNBC(Consumer News and Business Channel)와 아시아 비즈니스 뉴스(Asia BusinessNews)가 제휴하여 아시아 지역에 최신 경제 정보를 제공하려는 취지로 CNBC 아시아를 설립, 싱가포르에 본부를 설치했다. 2010년 현재 CNBC 아시아는 아시아 1,800만 가구에 24시간 텔레비전 경제 정보 등을 전달하고 있다. 그 외 통신사, 신문, 잡지사, 방송사 등 70여 개 외신사에 300여 명의 언론인이 주재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로 구성된 복합 사회인 점을 고려하여 교육을 통한 국민 통합 의식 양성을 국가 존립 기반의 근본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세계화 및 지식 기반 경제에 적응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 실용주의적 교육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교과 과정은 2개 언어와 수리 과목에 치중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과정부터 대학까지 매 과정마다 경쟁을 통해 소수 정예만이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는 능력주의 교육을 실시한다.

 

싱가포르는 1970년대 중반부터 노동력 부족 현상이 발생하고 제조업 부문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연차적으로 대학의 이공 계열과 한국의 전문대학 격인 ‘폴리테크닉(Polytechnic)’을 증설하였다. 이후 국민의 소득 수준 향상과 높은 교육열로 인해 대학 진학 실패자들의 외국 유학 선호 현상이 급증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의 해외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싱가포르의 학제는 유아교육(유치원)-초등교육(초등학교 6년)-중등교육(중학교 4년~5년)-고등교육[주니어 칼리지(Junior College) 2년, 심화 학교(Centralized Institute) 3년] 또는 한국의 전문대학 격인 폴리테크닉[Polytechnic(3년)]-대학교로 이루어진다. 싱가포르에는 1980년 8월에 싱가포르대학교와 난양Nanyang(南陽)대학교가 합병되어 설립된 국립 싱가포르대학교와 1991년 설립된 난양기술대학교NTU(Nanyang Technological University, 南陽理工大學)가 있고, 그 외 싱가포르 경영대학교가 있다.

 

사회보장 연금제도

싱가포르의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원칙은 ‘자조’로서 일반 국민의 노후 생활, 주택 구입, 의료비 지출 등을 기본적으로 국민 각자의 저축을 통해 대비토록 함으로써 국가의 공적 부조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회보장제도는 중앙적립기금CPF(Central Provident Fund)으로 근로자 및 고용주가 임금의 일정 비율을 매월 강제 적립하여 정년퇴직 또는 노동 불능 상태가 되었을 경우 지급하거나, 근로자의 주택 구입 등 재산 형성 또는 입원비 등 의료비에 대한 지출을 허용하는 등 노후 연금, 의료비 보조, 재산 형성 저축 등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다.

 

싱가포르의 의료저축계좌는 가입자의 입원비 등 의료비 지출을 위한 용도로 쓰이나 고가의 치료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너무 미약하다는 평가에 따라 임의적 의료보험 제도인 메디실드Medishield 제도를 1990년에 도입했다. 정부가 정한 수가에 따른 진료비에서 기초 비용(일반 병원 등급에서 수술할 경우는 1,000싱가포르 달러)을 공제한 잔액의 80%를 메디실드 계좌에서 보전해주며, 나머지를 수혜 가입자가 부담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근로자와 고용주가 봉급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게 함으로써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며 연금 기금의 파산, 연금률의 정치적 결정 등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지나치게 높은 저축 강제로 소득이 낮은 근로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5. 02:00






 

 

싱가포르 문화적 특성

 

 





싱가포르는 다민족국가라는 특성상 각 민족의 고유 문화를 존중하며 다양성 속에 조화를 추구하며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 각 민족의 문화 행사를 장려하고 있다. 도교, 힌두교, 불교 및 회교 사원이 있으나 역사적인 문화유적은 많지 않다.

 

싱가포르는 다양한 문화의 유지와 우수한 예술 증진을 위한 환경 조성에 기본 목표를 두고 있으나, 대학에 예술학부가 없는 등 실용주의에 따른 통제, 자제된 예술 정책을 실시해왔다. 그러다 2000년부터 경제 발전과 문화 예술 증진을 연계하여 싱가포르를 경제와 관광, 문화의 국제 중심지로 복합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마련하고 “예술을 위한 글로벌 도시(Global City for the Arts)”, “르네상스 도시(Renaissance City)”, “국제적인 재능을 위한 역동적인 자성磁性(A Vibrant Magnetic for International Talent)” 등 장기적인 비전을 통해 싱가포르를 세계 유수의 문화 도시로 발전시키려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중이다.

 



싱가포르의 주요 문화 행사인 싱가포르 예술 축제(Singapore Arts Festival)는 1977년 이후 격년제로, 1999년 이후 연례 국제 예술 행사로 세계의 다양한 예술 단체를 초청하여 공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중국어 문화 축제(Chinese Cultural Festival), 연극을 담당하는 시어터워크스(TheatreWorks) Ltd., 싱가포르 무용 극장(Singapore Dance Theatre), 싱가포르 교향악단(Singapore Symphony Orchestra), 싱가포르 차이니즈 오케스트라(Singapore Chinese Orchestra) 등 다양한 행사, 예술 단체 등이 존재한다.

 

싱가포르의 주요 문화 시설인 에스플러네이드 해변 예술관(Esplanade-Theatre on the Bay)은 예산이 3억 5000만 미국달러에 달하는 세계적 수준의 복합 공연장으로, 2002년 10월 완공되었다. 그 밖에 공연장으로는 1만 2000석 규모의 싱가포르 인도어 스타디움(Singapore Indoor Stadium), 1만 2600석 규모의 싱가포르 국제 컨벤션 및 전시 센터(Singapore International Convention & Exhibition Centre), 6,000석 규모의 세계무역센터 하버 파빌리온(World Trade Centre Harbour Pavilion), 3,200석 규모의 래플즈 볼룸(Raffles Ballroom), 1,744석 규모의 칼랑 극장(Kallang Theatre), 940석 규모의 빅토리아 콘서트홀(Victoria Concert Hall) 등이 있다.

 

싱가포르는 오랜 기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국의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오늘날 아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모습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통체제 역시 영국식으로 도로에서 차량은 좌측 운행을 하며 운전석도 차량의 오른쪽에 있다. 뿐만 아니라 Beach Road, South Bridge Road, Coleman Street, Thomson Road 등 오늘날 싱가포르의 주요 도로명은 식민 시절 당시 영국에서 유래한 것이거나 싱가포르를 통치했던 저명한 주지사, 혹은 기타 유명 인사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만으로도 마치 영국 도시의 거리와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4. 01:00






 

싱가포르 사회구성

 






 

싱가포르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통합을 위하여 종교(불교, 회교, 기독교, 힌두교)에 따라 상이한 사회 관습을 존중하고 있다. 공동 질서 유지를 위하여 중벌금 제도를 실시하고 있으며 도시국가, 정원 국가를 표방하며 ‘동남아의 별’로 부르고 있다. 주택 자가 점유율은 2009년 말 88.8%로, 주택의 84%가 공공 아파트HDB(Housing and Development Board)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 구성과 인구

싱가포르는 국민의 74.7%가 중국계이고 말레이계 13.6%, 인도계 8.9%, 기타 2.8%로 이루어져 있다. 싱가포르는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로 구성된 복잡 사회인 점을 고려하여 국민을 통합하고자 1991년 ‘공유가치(Shared Values)’에 대한 백서를 발표하여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이라는 생태적 종족 명칭을 쓰기보다 ‘싱가포리언Singaporean’이라는 통합된 의미의 국민 정체성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2016년 7월 추정치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총 인구는 영주권자와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578만 명이다. 인종 구성은 중국계 74.7%, 말레이계 13.6%, 인도계 8.9%, 기타 2.8%이다. 싱가포르는 1987년 전까지 경쟁력 있는 국가 창출을 위해 고학력·고소득층에 대하여는 출산을 권장하고, 저학력·저소득층에 대하여는 출산을 억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1987년 이후 경제력에 따라 세 자녀 이상을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출산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점차 낮아지자 2000년부터는 자녀 수에 따라 국가에서 장려금을 지급하고 출산휴가를 부여하는 등의 정책을 적극 시행하고 있다.

 

언어와 종교

싱가포르는 헌법으로 각 인종 간 평등주의를 규정하므로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타밀어(Tamil)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다. 언어 교육을 매우 중시하므로 각 인종의 고유한 언어 외에 영어를 필수 언어로 하여 반드시 2개 언어를 이수해야 하는 2중 언어 정책을 시행하고 있으며, 특히 1997년 홍콩이 중국 본토로 반환된 뒤로는 중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표준어 배우기를 권장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다민족국가로서 각 인종의 전통적 종교를 존중하면서 인종 간의 화합을 추구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국교는 없으나 각 종교별로 최소한 1개 이상의 법정 공휴일을 지정하고 있으며 전 국민의 85% 정도가 종교를 갖고 있다. 종교 구성비는 2009년 기준으로 불교·도교가 51%, 이슬람교(주로 말레이계) 14.9%, 기독교(주로 중국계) 14.6%, 힌두교(주로 인도계) 4.0%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8. 1. 3. 22:47




 

 

싱가포르의

경제 동향과 전망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Information Technology) 거품(bubble)과 사스SARS(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영향으로 극심한 부진을 보였던 싱가포르 경제는 2004년 이후 세계 경제 호조에 따른 수출 증대와 각종 서비스 산업의 호조로 상승세를 탔고, 2008년 들어 경기가 하강 국면으로 진입하는 가운데 하반기에 발생한 국제 금융시장 불안이 세계경제 위기로 연결되면서 2008년 성장률이 1.1%로 크게 하락하기도 했다. 2009년에도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되었으나 정부의 확대 재정 정책과 세계경제의 회복 추세에 힘입어 하반기에는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하였다. 최근 싱가포르의 경제성장률은 2014년 3.6%, 2015년 1.9%, 2016년에는 2.0%를 기록했다.

 

2017년 일사(1/4)분기 중 싱가포르 경제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2.7%로 전前 분기(2.9%)에 이어 경기 회복세가 지속되고 있다. 이는 반도체 및 반도체 관련 정밀기계, 운수창고업이 수출 증가에 힘입어 호조를 보인 데 주로 기인한 것이다. 산업별로는 건설업이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였으나, 제조업이 높은 성장을 보이고 서비스업도 다소 회복된 상태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올해 미국과 ASEAN 경제 성장률이 내수를 중심으로 상승하면서 글로벌 경제가 2016년보다 다소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반면 중국 경제는 중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성장세가 소폭 둔화되고 유로 지역은 민간소비 부진으로 완만한(modest)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내 경제는 글로벌 경제 회복에 따른 반도체 수출 증가 등으로 반도체 및 관련 정밀기계 부문과 운수창고업을 중심으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는 반면, 건설업은 민간 부문을 중심으로 부진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노동시장 부진에 따른 민간소비 제약으로 음식 및 소매업도 어려움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2017년 싱가포르의 경제성장률은 2016년 경제성장률인 2.0%를 다소 웃돌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반反세계화 확산에 따른 글로벌 무역 위축 가능성,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및 트럼프 미대통령 관련 정치적 불확실성, 긴축적 통화정책 시행에 따른 중국 경제 경착륙 가능성을 하방리스크로 지목하고 있다. 특히 반세계화로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될 경우 글로벌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중국이 금융 부문 레버리지 및 위험 축소를 위해 긴축적 통화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민간신용(credit)이 급격히 감소할 경우 중국 경제 성장률이 예상보다 급격히 둔화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2016년 싱가포르의 총 교역은 8,702억 달러(싱가포르 달러 기준)로 전년 동기 대비 4.9%가 하락했다. 그중 수출은 4,669억 달러, 수입은 4,033억 달러를 기록했다. 싱가포르는 2017년 일사(1/4)분기 중 수출 및 수입 증가율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7.0% 및 15.6%로서 전 분기(2.1% 및 6.1%)에 비해 크게 상승하였다. 일사분기 중 종합수지 또한 경상수지 흑자 폭이 확대되고 자본수지 적자 폭은 축소되면서 166억 달러 흑자로 전환되었다. 2017년 IMF 기준 싱가포르의 명목 GDP(국내총생산)는 2,919억 달러(US$)로 세계 40위 규모이고, 1인당 GDP는 51,431달러로 세계 11위를 기록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30. 02:00






 

 

 

일상 언어학파의 대표자

비트겐슈타인

 

 

 




1889년 4월 오스트리아 수도인 비엔나(Wien)의 명문가에서 언어분석철학의 천재가 탄생했다.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2년 동안 베를린에서 기계공학도 공부했다. 그는 1908년에 항공공학 연구소에 잠깐 있다가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Manchester)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에 엄청나게 어려운 러셀의 『수학의 원리』(1903)를 읽고서 감명을 받아 1911년에 공학을 포기하고 러셀이 교수로 재임하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에 들어갔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운명적인 만남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루어졌다. 러셀은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배우는 학생의 신분이었다. 고대 아테네시대에 플라톤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소크라테스를 운명적으로 만나 제자가 되었듯이, 러셀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적 모험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트겐슈타인을 알게 된 것이라고 극찬할 만큼, 철학의 천재를 제자로 삼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가르쳐야 할 모든 것을 금방 알아버렸다”고 러셀이 술회했을 정도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천재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수제자로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독일로 건너가 예나(Jena) 대학에 들어간다. 거기에서 그는 수학자이며 논리학자였던 프레게F. L. G. Frege(1848~1925)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프레게는 명제논리와 술어논리의 기호화 및 공리화를 이룩하여 근대 수리철학과 분석철학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조국인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였고, 이탈리아 군의 포로로 수감되었을 때 그 유명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를 저술하여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자신은 더 이상 분석철학을 할 것이 없다”고 선언한 후 고향 오스트리아 시골마을로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초등학생들과 생활하면서 그는 새로운 언어세계를 체득하고, 지금까지 자신의 철학이 오류가 있음을 깨닫게 되자 1929년에 다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그는 1947년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분석철학의 장을 열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후기 사상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1951년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후기 사상은 사후 1953년에 출간된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 집약돼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철학에 대한 논의는 크게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으로 나뉜다. 전기 사상은 그가 전쟁터에서 작성하여 출간한 『논리철학논고』에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스승의 논리적 원자론을 토대로 나온 “언어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 of language)이 핵심이다. 후기 사상은, 그가 오스트리아 시골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과 어울리면서 깨달은 것인데, 논리적 원자론을 토대로 하여 전개된 자신의 언어분석철학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언어의 “의미 용도론”(use theory of meaning)을 토대로 하여 새롭게 전개되는 “언어게임”(language game) 이론이 핵심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29. 01:00



 

 

논리적 원자론을 제창한

러셀

 

 

오늘날까지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철학자는 단연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러셀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원래 수학자로서 출발했으나 수학의 근본 원리가 흔들리게 된 후로 새로운 기초 정립에 진력하면서 철학적 문제들을 아주 간명하고 명쾌하게 서술한 자로서 그 명성을 날리게 된 인물이다.

 

러셀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자연언어는 애매모호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세계의 구조에 대해 추리했을 경우 누구나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지만 자연언어가 애매할지라도 조심스럽게 분석하면 세계에 대응하는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입장이다.

 

논리적 분석을 통해 자연언어의 올바른 구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주장은 러셀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것은 자연언어의 구조를 인공(人工)언어로 이루어진 기호논리 체계로 환원하는 방식이다. 러셀은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와 함께 저술하여 1913년에 펴낸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그들은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에 대한 파악이 수학적인 논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러셀은 단연코 영국 경험주의 전통을 기저에 깔고서 무어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사유로 뛰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인 것이란 보편적 관념이 아니라 오직 개별적인 “감각사실”(sense-data)들 뿐이다. 이들 각각은 서로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도 없다. 어떤 고정적인 물질이나 절대적인 정신 또는 자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감각사실만이 존재한다고 여긴 러셀은 흄의 경험론적 입장을 연상시킨다. 이로부터 그는 객관적인 감각세계가 상호 독립적인 원자적 사실들과 그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이에 대응하는 언어체계의 구조를 분석하게 된다.

 

러셀의 분석철학은 논리적 원자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논리적 원자론의 기본체계는 원자적 사실들과 그 결합이 언어로 진술될 수 있다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언어적 진술의 최소 단위는 “원자적 명제”(atomic Proposition) 혹은 “요소명제”(elementary Proposition)들이다. 원자적 명제는 언어체계이고 원자적 사실은 객관적인 세계인데, 양자는 일대일 대응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원자적 사실들의 결합에 대응하는 명제는 복합명제이고, 복합명제는 원자적 명제들이 ‘그리고’, ‘또한’, ‘혹은’ 등의 연결사에 의해 결합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언어와 실재의 세계가 서로 대응관계라는 것은, 대상의 세계와 언어세계의 구조가 같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대상의 실재세계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밝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실재세계가 아무리 복합적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응하는 복합명제는 논리적인 분석을 통해 원자명제로 분해될 수 있고, 원자명제의 참과 거짓에 따라 그 진위(眞僞)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만일 “홍길동과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p·q) 복합명제가 있다고 하자. 명제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일단 원자명제로 분해해야 한다. “홍길동은 요술을 부린다”(p)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q)라는 원자명제가 그것이다. 원자명제인 “홍길동은 요술을 부린다”(p)와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q)가 모두 참이라면 복합명제의 진술은 참이다. 만일 한쪽만 참일 경우, 즉 “홍길동은 요술을 부린다”(p)는 참이지만 “손오공은 요술을 부린다”(q)가 거짓이든가, 아니면 (p)는 거짓이고 (q)가 참일 경우, 혹은 양쪽 모두가 거짓일 경우에 복합명제의 진술은 거짓이 된다.

 

러셀에 의하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복잡한 사실들은 상호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원자적 사실들로 환원될 수 있고, 언어적 표현은 최소한의 의미체인 원자적 명제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원자적 사실은 원자적 명제로 진술될 수 있다. 따라서 러셀은 철학의 과제가 이러한 원자적 명제들 간의 관계와 구조를 밝힘으로써 이로부터 세계의 본질적인 구조에 대해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28. 21:53






 

분석철학의 효시라 불리는

영국철학 조지 무어

 




 

분석철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철학자는 영국 출신의 무어일 것이다. 그의 철학적 동기는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형이상학적인 명제들, 즉 “신은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의 오묘한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논리적인 언어분석을 통해서 그 명제들이 터무니없음을 지적하여 시정하고자 함이었다. 그가 헤겔을 비롯하여 관념론의 기본전제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1903년에 발표한 “관념론 반박”(The Refutation of Idealism)은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요컨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말한 버클리G. Berkeley(1685~1753)의 주장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검토해 보자. 이 명제는 논리적으로 말해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가 그 존재의 ‘의미를 안다’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지각된다’는 것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버클리는 존재하는 대상을 의식 속에 병합함으로써 대상과 지각을 혼동하고 있다고 무어는 비판한다.

 

우리가 무엇을 지각한다는 것은 의식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대상이 존재하고 이것을 경험하여 안다는 뜻이다. 이를 무어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증명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요컨대 “이것이 나의 한쪽 손이고, 이것이 또 다른 한쪽 손이다”라는 진술은 직접 경험함으로써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사례들은 지극히 상식에 맞는 명제들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무어는 영국 경험주의 전통에서 관념론을 분석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사료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26. 01:30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

 

 

 

 

 

싱가포르는 국토가 좁고 부존자원이 거의 전무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대외 개방형 경제를 추구함으로써 세계적인 비즈니스 중심지로 발전하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1970년대에 외자를 이용한 수출 주도형 공업화를 추진하여 높은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1980년대에 들어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전자·기계·제약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구조 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제조업과 금융, 물류, 통신 제반 서비스가 통합된 국제적 비즈니스 도시가 있도록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공동 발전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식 기반 위주의 경제 구조 전환을 추진하여 미래 산업 개척 전략을 마련하고 있으며 연구 개발, 교육, 의료 분야에서의 허브를 추진하고 있고 복합 리조트 건설을 통한 관광 산업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싱가포르 경제의 주요 특징

싱가포르 경제의 주요한 특징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무역 자유화 및 외자 유치를 통한 세계적 비즈니스 센터 수립이다. 싱가포르는 중개 무역항이라는 입지 조건을 활용하기 위해 무역 자유화에 나서는 한편,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지속적인 투자 환경 개선과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무역액은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의 3.5배로, 40% 이상이 중개무역이며, 주류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한 모든 물품이 무관세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싱가포르가 세계적인 교통, 물류, 금융, 원유 거래의 중심지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총 5개 컨테이너 터미널과 45개 선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항으로 세계 환적량의 5분의 1 이상을 처리하고 있다. 2009년에 2,587만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s)의 컨테이너를 처리하여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창이Changi 공항은 85개 항공사가 주 5,000회 이상의 정기 항공편을 운항하는 세계 항공 허브로서 60개국, 200개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외환 거래 및 자산 운용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국제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2010년 런던 금융 특구 발표에 따르면 세계 제4위를 기록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외환 시장은 런던, 뉴욕, 취리히, 도쿄에 이은 세계 5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009년 말을 기준으로 110개 외국 은행이 소재하여 외국 은행 기준으로는 세계 4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자산 운용 규모는 1조 싱가포르 달러(670억 미국 달러) 내외이며, 이슬람 금융 등 새로운 금융 영역으로 확장 전략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 싱가포르는 뉴욕, 런던에 이은 세계 3대 원유 거래 시장이며, 세계 최대의 선박용 석유(bunkering oil) 거래 시장이고, 아시아 최대의 석유제품 공급 센터(아시아 지역 석유제품 가격 설정 시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셸Shell, 에소Esso, 칼텍스Caltex, 브리티시 페트롤륨BP(British Petroleum), 모빌Mobil 등 세계 메이저 석유 회사가 진출해 있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두 배가 넘는 1,0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 대국으로 적극적인 관광객 유치를 하며 연중 각종 국제회의, 전시·박람회가 개최된다. 의료 허브 교육 허브 육성 정책을 통해 외국인 유치를 도모하며 지속적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 리조트를 건설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서비스 중심의 산업구조이면서 제조업도 높은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9년 기준으로 싱가포르는 서비스업이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의 68.9%로 산업의 주종을 이루며, 그 외 제조업이 18.2%, 건설업 6.2% 순으로 비중이 높으며, 농림·어업이나 광업은 거의 전무하다. 서비스산업은 싱가포르 경제의 중심이며 정부는 인프라를 확충하고 자유화 조치 및 인센티브 제공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서비스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제조업은 다국적기업의 유치 및 국내 기업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다국적기업의 판매망 이용 등을 통해 발전하고 있다. 석유화학과 전기·전자가 제조업의 중심이었으나 2009년 들어 바이오 허브, 항공 허브 육성에 중점을 두면서 기계류 및 생의학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2009년 총 산출액을 기준으로 한 제조업 업종별 비중을 살펴보면 화학이 27.4%(이 가운데 원유 제품은 14.9%, 화학제품이 12.4%를 차지), 전기·전자 31.5%( 가운데 반도체가 17.8% 차지), 생의학 10.0%( 가운데 제약이 8.5% 차지), 정밀 기계 9.1%, 운송 기계 13.4%, 일반 기계 8.8% 차지한다.

 

네 번째로 국영기업과 다국적기업이 경제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싱가포르는 정부 투자회사인 테마섹 홀딩스Temasek Holdings가 주요 기간산업의 최대 주주이며, 순수 민간 기업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 즉, 항만에 싱가포르 항만공사PSA(Port of Singapore Authority), 통신에 싱텔SingTel(Singapore Telecommunications), 항공에 싱가포르 항공(Singapore International Air Line), 금융에 싱가포르 개발은행DBS(Development Bank of Singapore), 방송에 미디어코프MediaCorpia 등 이들 기업의 최대 주주가 테마섹 홀딩스이며 이 기업들은 많은 자회사들을 거느리고 있어 정부 연관 기업GLS(Government Linked Companies)이 1,000여 개가 넘는다. 그러나 정부 연관 기업 등도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 전문 경영인이 경영하고 있으며,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외국 자본, 기술, 고급 인력의 유입 정책으로 7,000여 개 이상의 다국적기업이 진출하면서 국내총생산GDP(Gross Domestic Product)의 40% 이상이 외국 기업 및 외국인으로부터 발생하고 총 투자의 90% 가까이가 외국인 투자로 구성되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25. 02:00




 

 

싱가포르 외교정책

 

 

 

싱가포르는 ASEAN 국가와의 선린 우호관계 유지를 골자로 하는 중립과 균형의 현실주의 외교를 추구하며 외교정책을 뒷받침하는 신뢰성 있고 억지력을 갖춘 국방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아세안ASEAN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지역 통합 강화를 통한 대외 발언권을 확보하며, 동남아시아 및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 평화로운 환경 조성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제 무역체제 구축을 통한 싱가포르의 경제발전과 지속적 번영 확보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 외교정책의 결과로 유엔, 77그룹 등 다자무대에서도 국가 규모를 넘어선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고 있고 유엔에서 소규모 국가그룹인 3G(Global Governance Group)의 리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제기구에서의 확고한 위상을 확립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동아시아-라틴아메리카협력포럼(FEALAC)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국제적 주요 이슈별 의제 설정 시 주도권 확보를 통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소국으로서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제의 세계화 전략을 추진함으로써 다자기구를 통한 경제관계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국제기구 유치 노력을 지속하며 미국, 일본, 한국, 호주, 뉴질랜드, 중국, 인도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체결 및 중국의 WTO 가입 지원 등을 통하여 세계의 주요 경제국과의 양자 경제 협력관계 증진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에 유리한 국내 환경을 조성하여 싱가포르가 국제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도록 노력한 결과 7,000여 개의 다국적 기업이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다(60% 이상이 지역본부 역할).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24. 01:00




 

 

싱가포르의

입법부 사법부

 




싱가포르는 인종 간 화합과 공동체 의식 고양을 위해 국민협회PA(Peoples Association), 시민 자문위원회CCC(Citizen’s Consultative Committee), 커뮤니티클럽 관리위원회CCMC(Community Club Management Committee) 등과 같은 일선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국민협회PA는 1800여 개의 민간조직 등에 대한 행정을 지원하며 2010년 6월 현재 의장은 리셴룽李顯龍 총리이다. 시민 자문위원회CCC는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수렴하여 정부에 전달하는 기능을 맡고 있으며, 커뮤니티클럽 관리위원회CCMC는 문화, 스포츠, 교육 등을 관할한다.

 


입법부

싱가포르의 입법부는 1955년 제정된 랜들헌법(Rendel Constitution)에 따라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회는 21세 이상 유권자의 직접 비밀투표에 의해 선출된 임기 5년의 국회의원(현 84석), 무선거구 의원(1석), 대통령이 임명하는 임기 2년 6개월의 지명 국회의원(9석) 등 총 94명으로 구성된다. 입법부의 기능은 법률안 및 예산안 심의·의결 주요 국정을 논의하는 것이며 특징은 장관(Minister), 국무장관(Minister of State), 정무차관(Parliamentary Secretary) 등으로 임명된 국회의원 이외의 의원은 일반 직업의 겸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의 직위를 가지지 않은 국회의원(backbencher)에게는 수당만 지급한다.

 

싱가포르 입법부의 특이한 점은 무선거구 의원NCMP(Non-Constituency Member of Parliament) 제도로 야당이 총선에서 3석 미만의 의석을 획득했을 때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한 야당 입후보자를 의원으로 추천하는 제도이다. 싱가포르 입법부는 특권 위원회, 선출 위원회 등 7개의 상임위원회를 두고 있다.

싱가포르의 주요 정당은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 노동자당WP(The Worker’s Party), 싱가포르인민당(Singapore People’s Party)이다. 인민행동당은 1961년에 창당했으며 2010년 6월 현재 82석을 차지하고 있다. 인민행동당은 평상시에는 활동도 없고 별도의 사무국 조직도 없다. 노동자당은 1961년에 창당했으며 의석은 하나이다. 싱가포르인민당은 1993년에 싱가포르민주당SDP(Singapore Democratic Party)에서 탈퇴하여 창당했으며 마찬가지로 의석은 하나이다.

 

사법부

싱가포르의 사법부는 대법원과 하급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은 고등법원과 항소법원이며, 하급법원은 지방법원·치안법원·소년법원·검시법원(Coroners Court) ·소액청구사건법원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장은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고, 여타 대법원 판사는 총리가 대법원장과 협의를 거쳐 제청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23. 23:38




 

싱가포르의

정치 및 행정

 

 




싱가포르는 영국 의회정치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의회주의식 공화제 정부 구조를 취하고 있는 바, 대통령 직선제하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는 단원제이다. 국가원수는 대통령이지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1991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했으며 의회 의원 선거법 개정을 통해 복수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투표로 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고 대통령이 다수당 소속 국회의원 가운데서 임명하는데, 총리는 실질적인 정권을 위임받은 내각의 대표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위치에 있다.

 

정치체제의 특징

싱가포르는 집권당인 인민행동당PAP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인민행동당은 리콴유 전 총리가 “인민행동당은 곧 정부이고, 정부는 곧 싱가포르”라고 언급할 정도로 1959년 이래 의회 내에서 압도적 다수의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장기 집권을 유지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인민행동당에 대응할 만한 정치적인 대안 세력이 없을 뿐 아니라, 인민행동당이 집권 여당으로서 주택, 취업, 사회복지와 같은 일반 대중의 현실적 요구를 적기에 파악해 정책에 반영시키고 있어 전폭적인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인민행동당이 장기 집권을 함으로써 싱가포르는 과도한 정치 과정에 따른 사회적 비용 지출이라는 단점을 해소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또한 집권당에 유리한 선거 구조 및 언론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선거구는 의원 2인 이상 선출의 집단선거구(GRC, Group Representation Constituency) 및 1인 선출의 단독선거구(Single-seat Wards)로 구분되나, 집단선거구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동일 정당에서 1개 집단선거구 선출 의원 수인 5 내지 6명과 동일한 수의 후보자 명단을 제출하도록 제한하고 있어 군소 정당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언론출판법(Newspaper and Printing Press Act)에 따라 신문 및 방송 분야를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PH(Singapore Press Holdings) 및 싱가포르 미디어 코퍼레이션MCS(Media Corporation of Singapore)을 통해 정부가 관장함으로써 통제된 언론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행정부

대통령 싱가포르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지만 상징적이거나 실질적 권한이 없는 직책이었다가, 1991년 헌법 개정에 따라 권한이 대폭 확대되었다. 헌법 제22조를 통해 대법원장 및 대법원 판사, 검찰총장, 군 참모총장, 경찰청장, 부패행위조사국장 등 주요 공직자의 임명에 대한 거부권과 정부의 예산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권한을 보장받았다. 부패행위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이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청렴한 사회를 만들고자 총리실 직속의 부서로 설치된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한 직선제로 선출되고 임기는 6년이다. 2017년 8월 현재 싱가포르의 대통령은 2011년 8월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9월 1일에 취임한 토니 탄 켕 얌Tony Tan Keng Yam(陳慶炎)이다. 싱가포르는 2017년 9월에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내각 싱가포르 행정부의 수반은 총리이며 행정부의 구성원인 총리와 각 부처의 구성원들은 의회 의원이어야 한다. 총리는 대통령이 다수당 소속 국회의원 가운데 임명하며, 총리는 정치 및 행정 각 분야에 대해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이다. 그러나 헌법에는 총리의 자격에 관한 어떠한 조항도 없으며 임무와 권한도 상당히 제한적으로 명시되어있다. 총리는 내각회의를 주재主宰하고, 내각의 어떠한 행정부처의 장관직을 유지할 수 있다. 내각은 총리실과 14개 부로 구성되며 장관은 대통령이 총리의 추천에 따라 임명한다. 2017년 현재 싱가포르의 총리는 2004년 8월 12일에 취임한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이다. 총리실의 기능은 각 부처의 활동과 정부 일반 정책에 대한 조정과 주요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공무원 채용과 임용·보수·교육 훈련 공무원 관련 업무와 국기와 국가, 선거 관련 업무도 총리실 관할이다.

 

지방행정 싱가포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국가여서 별도의 도시 개념보다는 여러 개의 ‘도시계획구역’을 정해 관리하는 방식으로 행정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라는 하나의 큰 도시 안에서 여러 마을 단위로 분할하여 구역을 나누고 행정을 집행한다고 보면 된다. 전체적으로는 크게 서부, 북부, 북동부, 동부, 중부의 5개 지역으로 나뉘며, 베독Bedok, 주롱웨스트Jurong West, 퀸즈타운Queenstown 등 55개의 도시 계획 구역으로 분할되어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정 여건상 좁은 면적, 적은 인구의 도시국가로서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치 개념이 부재하다. 따라서 시·구청,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행정 조직은 없으며, 주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결정 과정에서 의견 수렴 등을 목적으로 지역개발 협의회를 설치하여 자치 서비스와 주민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20. 01:30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에 응답하는 철학자

 






철학이 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논리학에서처럼 정확성이나 사리(事理)에 일치하는 것만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학문만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돌이켜 사유하는 “추념”(Andenken)이란 뜻에서 존재의 가르침과 그의 부름에 충실하려는 사유(Denken)를 철학이라고 말한다.

 

존재의 가르침이나 부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가르침이나 부름을 받는 탈존자는 사유를 전제한다. 탈존자의 사유란 무엇이고, 무엇이 사유하도록 하는 것일까? 사유는 “이성”(Vernunft)이 한다. ‘이성’은 “귀담아듣는다"(Vernehmen)라는 뜻에서 나왔다. 무엇을 귀담아듣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眞理)에 대한 것이다. 진리는 바로 스스로를 은폐하면서도 동시에 살짝 드러내 보이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유는 ‘존재에 대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역으로 본다면 존재가 그 진리를 이성으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한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이라는 두 방식으로 구분하여 의미를 해석해볼 수 있다. 전자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사유가 존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에로 귀속될 수밖에 없는 사유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유가 존재에 귀속되어 있으면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존재가 걸어오는 말에 대한 사유다. 가르침과 부름은 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이나 교제의 수단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의 집이다. 존재의 집은 탈존자가 몸담고 있는 집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빛을 발하면서 말을 하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탈존자의 사유란 오직 존재의 가르침과 부름에 응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경모하는 사유이다. 만일 사유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존재의 말이 일상적인 언어적 표현으로 형용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시(詩)의 세계로 접근해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독일의 시인 휄더린Friedrich Hoelderin(1770~1843)의 시어(詩語)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다양한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위대한 시인들 중에서도 휄더린을 동양의 도연명陶淵明(365~427)만큼이나 최고로 위대한 시성(詩聖)으로 여겼고, 휄더린이 존재자체가 걸어오는 말을 가장 순수하게 시어로 표현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19. 02:00






 

 

마틴 하이데거의

무(無)를 꿰뚫어가는 탈존자(脫存者)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존재자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엔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럼에도 실존적인 인간만은 어디론가 사라지게 될 대상이 없는 불안 속에서 마침내 텅 빈 ‘무’와 마주치게 된다. 텅 빈 ‘무’의 상태와 마주한 현존재는 일체의 존재자를 벗어나 초탈(超脫)한 상태일 것이다. ‘무’를 향해 초탈한 현존재의 실존은 스스로 ‘무’ 속으로 함몰해 있다는 의미에서 “탈존자”(Ek-sistenz)라고 할 수 있다. 탈존자는 일체의 존재자에게서 초연(超然)한 상태로 있으면서 존재자의 근원을 묻는 자로 임하게 된다.

 

존재자의 근원에 대한 탈존자의 물음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신(神)’의 존재로 귀착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마저도 사유를 통해 대상화되는 ‘존재자’에 속하며, 신도 결국 ‘무’에 근원하는 존재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존자는 신의 존재 근원에 대해서도 같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이데거는 무신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는 정말 무신론자였을까?

 



어쨌든 탈존자는 모든 존재자의 근원을 묻는 상태에서 ‘무’를 꿰뚫어나가는 과정에 처할 것이고, 이럴 때 비로소 ‘존재’ 그 자체를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무’는 존재자에 대한 무화(無化)로서의 ‘무’이고, 일체의 존재자와 전적으로 상이한 극단적인 타자(他者)를 뜻한다는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면사포”(der Schleier des Sein)라고 표현했다. ‘존재의 면사포’란 탈존자가 ‘무’를 꿰뚫어가는 과정에서 존재가 스스로 참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는 단면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면사포에 감춰진 ‘존재자체’는 대상화될 수도 없을뿐더러 존재자로 규정되는 여하한 개념이나 표상적인 사유에 의해서도 파악될 수 없다. 하지만 ‘존재자체’는 모든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밑받침하는 지주(支柱)이며, 만유 속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존재의 의미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18. 01:00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의 실존론적 분석

 






‘존재론적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저서에서 ‘존재’의 참뜻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를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존재자를 찾아낸다. 그런 존재자를 그는 “현존재(Dasein)”라 불렀다. 현존재란 ‘거기(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인간을 뜻한다.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물론 책상, 집, 고양이, 나무 등과 같은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존재자들 중에서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명확하게 대답하기란 어렵지만 어렴풋이나마 조금 알고 있기에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자들은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없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현존재’라 하지 않고 ‘도구적 존재’라 불렀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어떤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이거나 논리적이고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그런 보편적인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개별인간을 지칭한다. 개별적인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와는 달리 자신의 존재를 언제나 문제 삼고 그것에 관심을 쏟는다. 이런 현존재를 하이데거는 실존(Existenz)이라 부른다.

 

존재론의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 즉 인간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제시한 ‘존재범주(Category)’에서가 아니라 “실존범주(Existenzialien)”에서 다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현존재의 존재이해 방식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는 존재이해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분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밝히는 실존분석만이 존재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존재론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고 본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첫째, 실존론적 분석에서 볼 때,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Being-in-the-world)이다. 이는 인간이 세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이 세계에는 다양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인간은 이것들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에 관심을 갖고, 이것들을 유용한 도구(Zeug)로 간주하여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살아간다. 또한 인간은 사물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공동세계존재(Mitweltsein)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사물에 대한 배려(Besorge)이건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Fürsorge)이건 결국 “관심(Sorge)”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관심”을 세계 내에 있어서의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라고 규정한다.

 

둘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실존자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적인 자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세상 사람”(das Man)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상 사람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는, 어느 누구도 아닌,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표적으로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고 그저 풍문이나 잡담에 귀를 기울이며, 유행이나 호기심에 사로잡혀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인을 가리킨다. 이런 일상적인 세상 사람으로서의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가 가리워져 있는 존재방식으로 퇴락(頹落)한 사람이다. 퇴락한 사람은 비본래적인 자기로부터 본래적인 자기로의 실존을 회복하여야 하는데, 실존을 회복하거나 비본래적인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Angst)이다.

 

셋째, 불안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恐怖)와 다르다. 공포는 그 대상이 존재하지만 불안은 아무런 대상이 없다. 그럼에도 불안이 생기는 까닭은 현존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 즉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외부로부터 현존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현존재에게 붙어 있다. 인간의 생존은 죽음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부서짐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불안은 인간에게 숙명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본래적인 세상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락, 스포츠 등의 즐거움에 탐닉하기 마련이다. 즉 죽음에 대한 불안이 현존재로 하여금 비본래적인 일상의 존재로 타락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깊이 통찰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결국 죽는다”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피를 통하여 세상 사람은 불안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라도 초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넷째, 인생의 시작과 종말은 무(無)에 놓여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Nichts)’에서 수동적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이다.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는 완전히 ‘무’이다. 무위에 떠 있는 유한한 존재는 죽음에의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능동적으로 미래를 향해 자신을 설계하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기투”(Entwurf)라 한다. 던져져 있음이 필연적이라면 기투는 미래를 향하여 기획하고 계획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무’에서 그냥 던져진 채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얘기다. 미래를 기획하는 인간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소위 “양심”(Gewissen)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하다. 양심이란 세상 사람의 일상성 속에 잊혀져 있던 본래의 자기 자신을 되찾으려는 부르짖음이다.

 

다섯째, 현존재는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거나 죽음의 불안을 도피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앞질러 죽음을 결의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다. 죽음의 가능성을 앞당기는 것은 인간의 존재를 그 전체성에서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양심의 결단을 통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깨우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와 같이 죽음에의 선구(先驅)와 일상적인 자기의 비본래적인 모습을 버리고 자신의 본래성을 되찾으려는 결단성을 합친 것이 “선구적 결단”(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이다. 이러한 태도는 현존재의 근거가 ‘무’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와 같이 현존재의 실존은 유한성의 자각을 토대로 하여 죽음에의 선구를 결의함으로써 본래적인 자기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2. 17. 20:52





 

변종 존재론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

 




 

20세기에 동서양에 걸쳐 너무도 잘 알려진 사상가를 한 분 꼽으라 하면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4)가 단연 선두를 점유할 것이다. 그의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는 저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념에 대한 조어(造語)로 말미암아 논쟁의 여지가 더러 등장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실존주의자인가 아니면 존재론자인가를 가름할 때, 후대의 사상가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1927년부터 연재되었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만으로 그의 사상을 평가하게 되면, 실존범주의 개념들이 등장하면서 실존문제에 대한 해석이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는 명백히 실존철학자로 불리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초지일관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존재란 무엇인가”하는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1929년에 출간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Was ist Metaphysik)』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주제는 그가 실존철학자라기보다는 존재론자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통적인 의미의 존재론자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아마 사상의 핵심주제가 다소 생소하게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존재

고대 서양에서 철학적인 사유가 시작된 이래 탐구의 중심과제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존재론(Ontology)이었다.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Thales)로부터 시작하여 고대 자연철학자들은 역동적으로 생장하는 자연(physis)에 대한 존재를 물었고,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이성에 의한 고도의 추리를 통해 탐구해낸 추상적인 수(數)를 존재로 보았고, 아테네 시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은 문명사적인 규범(nomos), 즉 윤리적인, 정치적(사회적)인 규범에 대한 존재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중세시대에는 신의 존재에 대해 체계적으로 탐구했고, 근대 이후부터는 인간의 삶에 관련된 존재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전통적인 존재론의 역사를 뒤집어 관점의 전환을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도대체 왜 존재자는 있고 오히려 무(無)는 없는가? 이를 묻는 것이 철학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연구과제가 존재에 대한 탐구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어서 그는 유럽전통의 철학이 ‘존재자’에 대한 탐구였지 ‘존재’에 관한 사유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존재론의 역사가 모두 존재망각(存在忘却)의 길을 걸었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존재일반이 자명하고 명석하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존재’에 대한 물음은 한 번도 올바르게 제기된 일이 없었기에 존재망각의 역사 속에 내버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존재론을 파괴하고, 존재자체의 의미를 물어 새롭게 밝히려 시도하게 되는데, 우선 “존재(das Sein)”와 “존재자(das Seiende)”를 명백히 구분 짓는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존재론은 모두 ‘존재자’에 대한 물음이었지만, 자신이 새롭게 제기하는 존재론은 존재자가 ‘무(無)’ 가운데서 개시되는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서 ‘존재자’는 사물의 현상이나 존재양식을 말하는 것으로, 하늘, 땅, 바다, 책상, 나무, 행위 등,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에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하는 것’을 ‘존재’로 규정한다면, ‘존재’는 종래의 철학이 추구했던 전체적인 근원으로서 ‘신(神)’을 말하는 것일까? 하이데거에 의하면 ‘신’도 한낱 ‘존재자’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개념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단지 ‘존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고의 존재자인 신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자가 어떻게 참다운 존재자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 즉 존재자의 근원이 되는 의미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존재 자체를 묻는 그러한 ‘존재’는, 단순히 객관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거나 일상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과 구별되기 때문에, 개념화된 대상으로 객관화될 수 없는 공허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언제나 간과되어 왔고 망각의 역사로 떨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망각의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존재론적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란 이성적 사유의 영역으로 들어와 개념화된 일상적인 존재자와 근원적인 의미의 존재자체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본질적인 차이를 뜻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12. 02:00






 

싱가포르 현대역사의 시작

리콴유총리

 

 




 

리콴유 시대(1965~1990)

독립 국가로 재출범하면서 리콴유李光耀 자치정부 총리는 다시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26년간 재임을 했다. 리콴유는 확고한 신념과 냉철한 현실 감각, 그리고 유연한 정치 감각을 갖춘 지도자로서 싱가포르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능수능란하게 해결해 나가는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아시아는 물론 세계 수준의 금융과 물류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고, 싱가포르가 세계 최고의 깨끗한 정부로 발돋움하는 데에도 절대적 역할을 한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1965년 9월 21일에 국제연합UN(United Nations)에 가입했고 같은 해 10월 15일에는 영국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 가입했다. 곧이어 12월 22일에는 헌법을 개정해 국명을 싱가포르공화국(The Republic of Singapore)으로 바꾸고 국가 원수를 대통령으로 개정하여 유소프 빈 이샥Yusof bin Ishak 초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67년 8월 13일 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결성했으며 1968 4 13 총선거를 실시해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 58 의석을 차지했다. 1970 11 23 유소프 이샥 대통령이 사망하고 1971 1 2 벤저민 시어스Benjamin Henry Sheares 제2대 대통령이 취임했다.

 

1971년 10월 31일 영국 극동사령부가 폐쇄됨에 따라 1972년 9월 2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인민행동당이 65석 전全 의석을 차지했다. 이후 1976년과 1980년 총선에서도 인민행동당이 전 의석을 차지함으로서 패권 정당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화하였으며, 1981년 안손Anson 선거구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노동자당WP(Workers’s Party) 사무총장인 조슈아 벤저민 제야레트남Joshua Benjamin Jeyaretnam이 당선됨으로서 최초로 야당의원이 원내에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1년 5월 12일 벤저민 시어스 대통령이 사망하고 10월 24일 챙가라 비틸 드반 나이르C. V. Devan Nair 제3대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나 1985년 3월 29일 알코올 중독으로 사임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9월 2일 위킴위Wee Kim Wee(金辉, 黃金輝) 4 대통령이 취임했다. 1986 국내 문제에 간섭하는 외국 언론의 싱가포르 배포 부수를 제한하기 위한 ‘언론출판법(Newspaper and Printing Press Act)’ 개정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같은 해 10월, 법무전문직법(Legal Profession Act)을 개정하여 자격정지 전력이 있는 자의 변호사협회 간부직 취임을 제한함으로써 변호사협회 회장인 프란시스 소우Francis Seow(添寿) 자동 해임되었으며, 11 10 제야레트남 의원이 노동자당 회계 허위 신고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7년 5월 21일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가톨릭 활동가, 전문 직업 종사자 등 16명을 공산주의 활동 혐의로 구금했고, 6월에 20명을 추가 구금하였다가 12월까지 순차로 주동자 빈센트 챙Vincent Cheng(鄭海泉)을 제외한 21명을 석방했다. 1988년 5월 7일 싱가포르 정부는 주駐싱가포르 미국 대사관 핸드릭슨E. M. Hendrickson 1등 서기관을 국내 정치에 간섭한다는 이유로 추방했고, 전날인 5월 6일에는 프랜시스 소우 전前 변호사협회 회장을 핸드릭슨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구금했다. 이어 5월 18일 연대 출마 방식의 집단 선거구 제도에 관한 헌법 및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9월 3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81석 중 인민행동당이 80석을 차지하고 치암시통Chiam See Tong(詹) 싱가포르민주당SDP(Singapore Democratic Party) 사무총장이 재선에 성공했다.

 

고촉통 시대(1991~2004)

1990년 11월 28일 리콴유 총리가 사임하고 고촉통Goh Chok Tong(吳作棟) 부총리가 총리에 취임했다. 1991년 1월 3일 헌법을 개정하여 6년 임기의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하고 같은 해 8월 31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81석 중 인민행동당이 77석, 싱가포르민주당 3석, 노동당이 1석을 차지했다. 9월 7일에는 고촉통 총리 내각이 출범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선임장관(Senior Minister)에, 리콴유 전 총리의 장남인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은 부총리 겸 통상산업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93년 8월 28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옹텡청Ong Teng Cheong(王鼎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9월 1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7년 1월 2일 총선거를 실시해 총 83석 중 인민행동당이 81석, 노동자당이 1석, 싱가포르인민당SPP(Singapore People’s Party)이 1석을 차지했다. 1999년 8월 2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셀라판 라마 나단Sellapan Rama Nathan이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9월 1일에 취임했다. 2001년 11월 3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총 84석 중 인민행동당 82석, 노동자당 1석, 싱가포르인민당이 1석을 차지했다. 무선거구 의원은 국민단결당NSP(National Solidarity Party)이 1석이고 지명 국회의원은 9석이었다. 2002년 3월 25일 제 10대 국회가 개원하였고 국회의장으로 압둘라 타르무지Abdullah Tarmugi를 선출했다.

 

2003년 5월 6일 싱가포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에 서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4일 말레이시아와 페드라 브랑카Pedra Branca 섬 영유권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공동 회부했다.

 

리셴룽 시대(2004 ~ 현재)

2004년 8월 12일에는 리셴룽Lee Hsien Loong(李顯龍)이 총리에 취임했다. 리콴유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에, 고촉통 전 총리는 선임장관에 임명되었다. 2005년 8월 1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 나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2007년 8월 2일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의장국을 수임했고 2009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의장국을 수임해 그해 11월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2011년 5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승리하여(총 87석 중 인민행동당 81석, 노동자당 6석) 5월 20일 리센룽 내각이 출범하였고, 리콴유 고문장관과 고촉통 선임장관은 내각에서 공식 퇴진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토니 탄Tony Tan Keng Yam(陳慶炎)이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9월 1일 취임하였다. 이후 2012년과 2013년 실시된 2차례의 보궐선거에서 여당인 인민행동당이 노동자당 후보에게 패배하였고, 2012년 11월 버스노동자 파업, 2013년 2월 정부의 인구정책에 대한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하였다. 가장 최근인 2015년 9월 싱가포르 총선에서는 리센룽 총리의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이 70%에 육박하는 69.9%의 지지율로(2011년 총선보다 10% 포인트 가량 지지율 상승) 89개 의석 중 83개 의석을 차지하며 승리함으로써 앞으로 5년 동안 더 집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선거는 싱가포르 총선 사상 처음으로 야권이 모든 선거구에 입후보하면서 여야간 사상 최대의 접전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야권의 선두두자였던 노동자당WP의 득표율은 지난 선거보다 6.8% 하락한 39.8%를 기록해 6개 의석을 얻는 데 그친 반면, 여당은 독립 이래 역대 최저를 기록했던 2011년 때의 득표율(60.1%)을 10% 가까이 회복(69.9%)시키면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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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11. 02:00






 

 

가폴의 근대역사

 

 




자치정부 시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함에 따라 싱가포르는 1946년 총독이 지배하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로 환원되었으며, 영국은 크리스마스Christmas 섬과 코코스Cocos 섬을 관할하였다. 이후 싱가포르 주민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태동함에 따라 영국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단계적으로 자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형태의 식민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948년 최초의 선거가 실시되어 22명의 입법 의원 중 6명을 직선제로 선출하였고(나머지는 총독 또는 상업회의소가 임명), 1951년에는 25명의 입법 의원 중 직선 선출 의원 수를 9명으로 증원하였는데 진보 정당(Progressive Party)에서 6명, 노동당(Labour Party)에서 2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되었다. 1955년에는 신헌법을 채택하여 32명의 입법 의원 중 직선 선출 의원 수를 25명으로 선출하기로 결정(코코스 섬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관할권 이전)하였다.

 

1957년 런던에서 개최된 헌법 회의는 원칙적으로 싱가포르가 독립국가가 된다는 데 동의하고 싱가포르에 대해 완전한 국내 자치권을 인정하되, 외교 국방 및 헌법 정지에 관한 권한만 영국 정부가 보유하기로 결정하였다. 1958년 싱가포르 국가 법(The State of Singapore Act)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싱가포르 국가 성립 및 싱가포르 시민권 부여 등에 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며 크리스마스 섬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관할권이 이전되었다. 1959년 5월 30일에는 전체 입법 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어 총 51석 중 인민행동당PAP(People’s Action Party)이 43석을 차지하여 자치 정부를 구성하였고 같은 해 6월 5일에는 8선 국회의원인 리콴유Lee Kuan Yew(李光耀)가 자치 정부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말레이시아 연방 시대

1961년 5월 27일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man 말레이 총리는 말라야Malaya 연방, 싱가포르Singapore, 사라왁Sarawak, 브루나이Brunei 및 북보르네오北Borneo(현 사바Sabah)로 구성된 말레이시아 연방 설립을 제의하였고 싱가포르 정부는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1962년 8월 1일 영국과 말라야 연방은 1962년 8월 말까지 말레이시아 연방을 설립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싱가포르는 이에 대한 국민투표를 1962년 9월 1일에 실시하였다. 투표 결과 73%가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원이 되는 데 찬성하여, 1963년 7월 9일 말레이시아 협정 서명으로 인해 같은 해 9월 16일에 말레이시아 연방이 성립됨으로써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연방 창설 이후 연방정부와 싱가포르 주정부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정책에 대해 이견을 보였으며, 1964년에는 인종 문제로 인한 폭동이 싱가포르에서 발생하였다. 결국 싱가포르는 인종 정책에 관한 갈등과 이념적인 차이로 인해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하여 독립국가로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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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10. 01:00




 

 

가포르의 초기역사

 

 




 

싱가포르에 관한 역사적 기술로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경 중국 문헌의 기록 ‘파라주婆(Pu Luo Chung)’이다. 이는 ‘반도 끝의 섬’이라는 뜻으로 말레이어의 플라우 우종Pulau Ujong(섬 끝의 땅)에서 음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3세기에 싱가포르 국명에 대한 기록이 중국 문헌에 나오는데, 수마르다 지역 스리위자야 왕국Srivijaya Kingdom의 트리부아나 왕이 표류하여 지금의 싱가포르에 상륙한 후 사자獅子Lion를 목격하고는 싱가푸라Singapura(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고 명명한 것이 싱가포르 국명의 유래이다. 싱가포르의 플러톤 로드에 위치한 관광 명소인 머라이언 공원에 가 보면 머리는 사자, 몸은 물고기 형상을 한 높이 8.6m의 ‘머라이언Merlion’ 동상이 입에서 분수처럼 물을 내뿜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이 동상은 싱가포르의 국가적 상징물처럼 여겨지고 있다.

 

1365년에는 자바인의 문헌에 싱가포르를 테마섹Temasek(sea town, 항구도시)으로 기록한 것이 나타난다. 테마섹은 다양한 나라의 선박이 기항하면서 중요한 무역도시로 떠올랐으나 14세기경에는 쇠락의 길을 걷는다. 14세기 후반경에는 싱가푸라Singapura라는 표현이 통칭적으로 사용되었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레이반도 서쪽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 말라카Malacca를 점령하자 말레이 제독이 싱가푸라로 도망한 후 조호르 라마Johor Lama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싱가푸라에는 별도의 관헌을 유지했다. 그러다 1587년 포르투갈이 조호르 라마를 멸망시키고 이어 1613년 싱가푸라를 불태워 싱가포르에 관한 모든 자료와 기록이 소실되었다. 이후 싱가포르는 16세기 동안에는 포르투갈Portugal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네덜란드Netherlands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영국식민지 시대(1819~1941)

1818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총독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남서쪽에 있는 벵쿨루Bengkulu 주 부총독인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경에게 지금의 싱가포르 지역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가했다. 래플스 경은 1819년 조호르Johor 왕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싱가포르를 국제무역항으로 개발했으며, 이때부터 싱가포르는 크게 성장하였다.

 

1824년 조호르 국왕은 싱가포르를 영국 동인도회사에 영구 할양했고 1826년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서쪽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믈라카Malacca 및 말레이시아 서북부에 있는 항구도시 페낭Penang에 흡수되어 동인도회사 지배하의 해협식민지(The Straits Settlements)를 구성했다. 해협 식민지의 관할권은 1830년 인도의 뱅갈Bengal 총독에게 이전되었다가 1851년 인도 총독의 직속 관할이 되었으나, 이후 싱가포르가 지속 성장함에 따라 인도 총독의 행정력 부족 등으로 인해 1867년 싱가포르의 관할은 영국 식민지청으로 이관되어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Crown Colony)로 편입되었다.

 

1820년대 이후 싱가포르는 말라야 반도에서 생산되는 고무와 주석의 교역항으로서 발전하였고, 1842년 난징조약 체결로 인한 중국과의 통상 확대,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 등을 계기로 싱가포르는 국제무역항으로서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일본 점령 시대(1942~1945)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싱가포르는 ‘동방의 지브롤터Gibraltar’로 불리면서 동남아 주둔 영국군의 주요 교두보 역할을 하였으나, 영국군이 싱가포르 전투(Battle of Sinagpore)에서 패배함에 따라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경험하였다.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은 1942년 중국 국민당을 지원하는 싱가포르의 중국계 주민들을 반反일본 성향으로 간주하고, 약 5만~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학살(숙칭肅淸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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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9. 14:40




 

 

가장 유럽적인 아시아 국가,

싱가포르 Singapore

 

 



싱가포르는 중국 문헌에 3세기경 파라주婆(Pu Luo Chung)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고,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사자獅子의 도시라는 뜻의 ‘싱가푸라Singapura’라는 국명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싱가포르는 14세기에 무역도시로 떠올랐으며 16세기에 포르투갈,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간의 조약에 의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942년 일본에 의해 강점되기 전까지의 118년과 2차대전 이후부터 1959년 자치정부 수립까지 14년간 영국의 통치를 받았으며,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와의 다툼 끝에 연방을 탈퇴하고 마침내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동안 싱가포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국의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오늘날 아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모습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독립 이후 다인종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국제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린 정부의 결단과 강한 추진력으로 강력한 국가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영토와 자연환경

싱가포르Republic of Singapore는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섬나라이자 도시국가, 경찰국가, 기업국가이다. 북쪽의 조호르Johor 해협과 남쪽의 싱가포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각각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약간 분리되어 위치해 있으며, 싱가포르 섬과 60여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섬의 3분의 2 가까이가 해발 15m 미만의 낮은 언덕으로 되어 있고 영토의 2%만이 경작이 가능하나 생산성은 매우 높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조호르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북쪽은 조호르-싱가포르 코즈웨이Causeway 다리를 통해, 서쪽은 투아스Tuas 제2 연결점에 연결되어 있다. 주롱Jurong 섬, 풀라우 테콩Pulau Tekong, 풀라우 우빈Pulau Ubin, 센토사Sentosa가 주요 섬이며, 가장 높은 산은 부킷 티마 힐Bukit Timah Hill로 해발 166m이다. 본섬의 중심에 위치한 싱가포르 강의 남쪽이 원래 도시의 발단이었으며 현재 이곳은 금융 중심 지역인 다운타운 코어Downtown Core로 불린다. 이전에 그 외 지역은 농장과 열대우림이었으나 현재는 새로운 도시의 확장과 함께 거주와 쇼핑 그리고 산업 단지로 바뀌었다.

 

싱가포르는 계속적인 간척 사업으로 1960년대에는 국토 면적이 581.5㎢에서 현재는 719.1㎢로 확장되었다. 이는 서울(605.25㎢)보다 약간 큰 면적이다. 2030년까지 100㎢를 더 확장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작은 섬이 본섬과 연결되었는데, 주롱 섬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기후는 고온 다습한 열대성 기후로 연중 무더운 날씨가 지속된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여 매년 11월~1월까지는 북동몬순 시기, 6월~9월까지는 남서몬순 시기이다. 몬순 시기에는 비가 자주 오며 북동몬순 때는 기온이 2℃~3℃ 정도 낮아진다. 연평균 최고 기온은 31.0℃, 최저 기온은 24.1℃이고 연평균 강우량은 2,346㎜, 평균 습도는 오후 2 기준으로 84.2%이다.

 

싱가포르는 대체적으로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하다. 재해 등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 체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자연재해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단,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자주 오며 이에 따라 낙뢰로 인한 인명피해가 종종 발생하므로 야외 활동을 할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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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2. 4. 01:00





 

 

칭기스칸의 인연들

 

 

 



그가 세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 인연은 크게 셋이 있다.

 

첫 번째는 부인 보르테의 아버지 ‘데이 세첸’으로 테무친의 역량을 꿰뚫어 보고 정혼의 약속과 의리를 지켰다.

 


두 번째는 아버지 예수게이의 안다(의형제)인 케레이트 부족의 ‘옹 칸’이었다. 옹칸은 <삼국지>의 원소 같은 인물로 몽골을 통합하려는 야심도, 세력도 있었지만 우유부단했고, 손해를 보려 하지 않고 앉아서 이익을 챙기려 했다. 테무친의 곤경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다가 테무친이 결혼으로 얻은 지참금과 어느 정도 확보된 세력을 데리고 보호를 요청하자 비로소 그를 받아 주었다. 아무튼 그는 테무친이 성장하는 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세 번째는 테무친의 안다이자 최강의 적수가 되는 ‘자무카’이다. 자무카는 지략을 겸비한 인물로 출발선상에서 이미 테무친보다 앞서 있었다. 테무친의 아내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의 습격으로 약탈당했을 때, 이를 탈환하는 동맹군에 자무카가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2. 3. 23:21




 

테무친시대

몽골고원의 세력권

 

 




칭기스칸 당시 몽골고원은 크게 다섯 개의 주요 세력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동쪽의 야생의 사냥개 타타르족은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졌고, 사나웠기 때문에 주변 부족들과 척을 진 상태였다. 중앙의 사나운 늑대 케레이트족은 기독교의 네스트리우스교(景敎)를 받아들인 부족으로 일찍이 중앙집권이 이루어져 있었다.

 


서몽골 고원의 하이에나 나이만족은 유목 제국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잘 정비된 군사 행정 체제를 갖추었다. 이들은 옆 케레이트족이 타타르 등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빠지면 어김없이 습격하는 집단이었다. 북쪽의 여우 메르키트족은 결집력이 강하고 주변 부족들이 위기에 처하면 서슴지 않고 공격하는 기회주의적인 족속으로 칭기즈칸의 아내를 빼앗아 오기도 했다. 생존을 위한 이런 영악함은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칭기즈칸이 메르키트족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부족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굶주린 푸른 늑대 몽골족. 그들은 늘 굶주렸다. 과거 흉노제국의 3분의 1정도인 영토 안에서 사분오열해 있는 민족과 그 안에서 작은 부족별로 나뉜 채 전개되는 무서운 대립 갈등 배신의 참상. 몽골은 그 혼돈의 중심에 서 있었다.

 

본래 헤이룽 강(아무르 강; 흑룡강黑龍江) 중, 상류 유역에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몽골족은 8세기 중엽부터 역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의 어원은 ‘영원한 불’을 뜻하는 ‘몽고르’로 당대 기록에 ‘실위室韋’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라 불린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집단이 오늘날 우리가 몽골족이라고 보는 사람들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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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2. 1. 01:30




 

 

현상학(Phänomenologie) 완성한

막스 셀러Max Scheler

 

 

 

 

20세기 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인식론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운동이 일어난다. 바로 객관과 본질에로의 전환을 문제 삼은 현상학現象學(Phänomenologie) 그것이다. 현상학의 모토, “사태 자체에로 돌아가라(Zurück zu den Sachen selbst)!”는 구호는 이를 말해 주고 있다.

 

현상학은 본래 탐구 방법일 뿐이다. 이는 현상들이 본래 갖고 있는 본질, 즉 현상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럼 현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 한마디로 체험(Erlebnis)이다. 이렇듯 현상학은 의식에 나타나 있는 것을 철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태에 충실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직관과 발견의 도움을 받아 사태 그 자체의 본질 내용을 기술하는 처방이 바로 현상학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의미의 현상학은 진리인식의 명증적인 지반을 찾고, 이 지반이 모든 인식의 최종적인 원천임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으로 원동력이 된 철학자는 독일 출신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Gustave Albrecht Husserl(1859~1938)이고, 그가 제시한 내재적인 의식 현상의 영역을 넘어서 가치, 인간, 세계, 신(하나님) 등의 커다란 주제에로까지 확대하여 현상학을 완성한 철학자는 막스 셸러Max Scheler(1874~1928)이다.

 

“삼신 하나님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一神降衷] 사람의 성품은 삼신 하나님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性通光明] 삼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서[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弘益人間].”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극대로 확대하여 현상학을 완성한 철학자는 막스 셸러Max Scheler이다. 왜냐하면 그는 후설이 의식 내부로 들어와 사태의 본질을 밝히는 내재적 철학을 가치, 인간, 세계, 절대자(신)의 영역에까지 넓혀 나갔기 때문이다.

 


셸러가 수행한 철학적 주요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가치의 영역을 발견하여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점이다. 그에 의하면 원천적으로 낡은 가치도 새로운 가치도 없고, 그저 가치들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가치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직 발견되는 것이다. 이는 문화와 역사의 진보에 따라 인간의 시야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가치라는 얘기다.

 

그저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히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쳐다보더라도 가치를 볼 눈이 없는 사람은 가치를 알지 못한다. 요컨대 유물론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은 가치를 보는 눈이 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형식에 얽매여 있어도 가치를 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형식주의 때문에 윤리적인 선善의 가치 내용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셜러가 칸트Kant를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셸러에 의하면 사물은 자체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오로지 그 내용을 통해서 그 가치가 정당화된다. 요컨대 인간의 어떤 행위가 윤리적으로 가치 있게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사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경우에나 부모님께 효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로부터 후설이 말한 현상학적 본질직관은 셸러에게 있어서 가치직관으로 전환이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가치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을까? 셸러는 감각적인 사물이란 지각되는(wahrnehmen) 것이고, 그 개념이란 생각되는(denken) 것이고, 그 가치란 느껴진다(fühlen) 말한다. 가치를 느끼는 것은 바로 가치들을 냄새 맡는 지향적인 작용 때문이다. 이것을 셸러는 가치감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치를 느끼는 그러한 감각을 갖게 된다. 이는 심리학에서 즐거움[快]이나 즐겁지 않은[不快] 것을 느끼는 심리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양의 유가儒家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사단지심四端之心이 발현되는 상태에서 느껴지는 가치감각에 가깝다.

 

가치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은 인간다움이 형성된다. 인간다움에서 인격人格이 나온다. 인간은 여러 사물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인격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사물들과 현격하게 구분이 된다. 그러한 인격은 타고날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인격이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인격은 심리적인 작용의 총화와 같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심리적인 작용이란 인격이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은 가치감각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형성될 수 있고, 끊임없는 행위로 그 전모가 드러난다. 인격을 드러내는 행위는 다른 사물들처럼 인과적 결정이나 유전인자나 어떤 환경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인격은 자유로움 속에서 가치들을 실현해 감으로써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행위만이 마음의 내적인 질서와 부합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가치의 세계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고, 결국 최고의 가치존재인 근원의 인격적 존재, 즉 절대적인 신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셸러가 제시한 인격주의는 우주 전체에 있어서 인간의 지위를 굳히는 학설이 되는데, 이는 인간이 가치감각과 본질에 대한 앎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정신(Geist)이 되고, 이 정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구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타의 동물은 비록 생각하고 목적을 헤아리는 성향을 가질지라도 진리와 가치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본질과 가치를 직관하는 정신을 통해서만 인격적인 인간으로 되어 가는 존재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신은 세계의 과정 전체에 관여하고 있다. 헤겔이 말한 이념과 마찬가지로 정신은 세계에서 생겨나는 것을 순화하게 함으로써 세계화 과정이 완성된다. 그런 세계화 과정을 이루는 한 단체團體가 인간이다. 우주적인 삶이 세차게 발전해 가는 시간적인 지속 중에서 인간은 신적인 것 자체가 되어 가는 과정에 짜 넣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신적인 것이 아직도 진행 중인 한,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 속에서 가치실현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것이 완성되는 날 모든 가치실현 또한 완성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