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11. 30. 01:00




 

본질을 알기위해서는

현상을 정확 파악해야 한다는 철학자 후설

 








철학자로서 후설의 고민은 우리가 의식 밖의 대상을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가 제창한 철학적 사유의 중심은 무엇이 참된 지식의 근거를 제공하는가 하는 인식認識에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사실과 사실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후설은 인식에 있어서 먼저 경험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임을 받아들인다. 이는 영국의 경험주의 입장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 의해 경험되는 사물에 집중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본질개념(Wesensbegriff)”에 대한 인식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서의 본질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에서 추구했던 그런 불변하는 실재, 즉 현상의 배후에 근원으로 실재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띤 객관적인 의미 요소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 요소는 바로 현상의 사태(Sache)와 짝이 되는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본질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으로 드러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만일 의식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태는 없을 것이고, 현상 또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에 주어져 있는 사태를 직시하고 그것을 해명하면 되는 방법론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상학의 목표는 사태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기술할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이다. 이것을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이라고 했다. 그런데 의식의 대상은 우리의 의식과 독립하여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식에 없는 대상은 존재한다고 말하거나 사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천인 의식의 내부로 돌아가야 한다.

 

의식 내부로 돌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인식론에 있어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주관으로 전환하는 선험적 태도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서 ‘선험적’이란 인식을 형성하는 궁극의 원천, 즉 주관으로 되물어 가려는 동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이라 부른다. 방법을 통해 우리는 의식 내부로 돌아가 사태 자체, 사물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환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상적 환원(eidetishe Reduktion)”과 “선험적 환원(transzendental Reduktion)”이 그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사물을 인식비판적으로 검토함이 없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인데, 세 가지 태도로 구분된다. 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그것이다. 자연적 태도는 대상을 자명한 존재로 확신하여 지각하지만, 지각의 주체인 인격을 아주 도외시하는 태도이고, 인격주의적 태도는 지각주체인 인격을 중심으로 사물을 지각하기 때문에 소박하게 확신하는 태도이고, 자연과학적 태도는 모든 대상을 일정한 방법이나 기구를 매개로 하여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성질이나 구조를 설명하는 태도이다. 이들 세 가지 태도는 경험적인 대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확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 인식에 중요한 것은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은 자연적 태도의 일반 정립을 비판하고, 모든 인식의 형성과 인식하는 자기 자신과 인식 생활에 관한 자기 반성의 최종 근거를 반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후설은 철학을 엄밀한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태도를 비판하고 선험적 태도로 돌아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선험적 태도에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판단중지(Epoche)이다. 여기에서 판단중지는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자(피론Pyrrhon, 기원전 360~270년 경)가 말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론의 회의론은 모든 사물에 대해 단지 속견俗見만을 가질 뿐 진리 인식이란 불가하기 때문에 단정적인 판단을 중지하고 진리 탐구를 체념함으로써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설이 제안한 판단중지는 객관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낯선 사람이 지나간다,’ ‘호랑이가 개에게 접근하고 있다’, ‘개가 배가 몹시 고프다’, ‘누군가 개를 괴롭히고 있다’는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의식 내부로 들어가 그 본질을 직시해 보라는 뜻이다.

 

후설의 판단중지는 앞서 말한 “형상적 태도(자연적 태도, 인격주의적 태도, 자연과학적 태도)”가 취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배제하고 괄호 침(주체와 대상의 ‘한데 묶기’)을 의미한다. 판단을 중지해야 일종의 사유 실험을 통한 자유로운 변경이 가능하며,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 같은 성질을 가진 요소들을 분류하여 이것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도록 정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현상학적 잔여(Residium)”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판단중지를 통해 얻어 낸 불변하는 본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형상적 환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형상적 환원”은 판단중지, 자유로운 변경, 기술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절차이기 때문에 본질적 환원이라 불린다.

 

“형상적 환원”을 통해 얻어낸 본질을 다시 의식내재로 환원하는 절차가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선험적 환원”이다. “선험적 환원”이란 무엇인가? “형상적 환원”은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 현실성을 넘어서 초월적인 것이 되기 쉽다. 여기에서 후설은 초월적 존재를 순수의식으로 내재화하는 절차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선험적 환원”이라 하는데, 이는 ‘현상학적 잔여’들을 순수의식으로 직관하여 사상 자체, 즉 순수의식의 보편적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고 현상에 대한 참된 본질 인식이 산출된 것은 아니다. 순수의식은 각 개인의 주관적인 것이므로, 그 체험 내용의 객관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설은 이런 문제점을 ‘상호주관성’과 ‘생활세계의 이론’으로 보완하고 있다. ‘상호주관성’이란 사회공동체적 의식을 말한다. 즉 우리의 인식 주체는 순수한 개인의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호주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인정된다면, 이는 진리임이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공동체적 사회인식에 의해 결정됨을 말한다.

 

후설은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호주관성’을 내세웠고, 그 기반이 되는 것을 ‘생활세계Lebenswelt’에서 찾고 있다. 생활세계란 어떤 세계인가? 우리의 판단의 근원적 토대는 개별적 대상이고, 개별적 대상이란 언제나 어떤 전체 속에 있는 개체인데, 개별적인 대상을 파악할 때는 그 대상이 이미 생활세계 속에 주어져 있다. 그러한 생활세계는 무질서하거나 막연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활세계는 지평구조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결국 개체는 생활세계 속에서 부각되어 개인에게 촉발되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은 이렇게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활세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활세계 속의 동형으로서 파악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식의 명증적 토대를 찾고자 하는 현상학자는 모든 개별적 경험의 보편적 기반으로서 우리 눈앞에 주어져 있는 ‘생활세계’로 귀환하여야 한다. 본질에 대한 진리 인식은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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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11. 29. 02:00






 

본질보 실존을 우선시한

철학자 사르트르

 

 






독일의 실존철학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까지 크게 유행하다가 1933년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9월에 프랑스 출신의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자 이때부터 실존철학은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갑작스럽게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던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실존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출범하게 된다. 그의 실존사상은 1943년에 출간한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책에서 사르트르는, 1940 나치의 침공으로 패망한 프랑스인들이 적의 침략 앞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기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 대해 불신과 울분과 회의에 젖게 됐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사르트르는 그들이 적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항쟁심抗爭心에 불타 융합된 저항의 힘을 보여 주었다고 밝힌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철학이 부정적 사고를 적극적인 행동의 가능성과 융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철학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엄성과 극단적으로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러한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다소 난해한 면이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평생 동안 “계약결혼”을 시작하여 끝을 맺었고, 1945년에 그와 함께 『탕 모데른(Le Temps Modernes)』라는 월간지를 편집하였으며, 실존주의에 대한 주요 주제를 해설했던 시몬느 보봐르Simone de Beauvoir의 소설 『초대받은 여자(L’nvitée)』를 통독하면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어떻게 출범하게 되는가에 대한 기본 토대를 잠깐 들여다보자. 그는 인간의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것과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구분하고 있는데, 의식 밖에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즉자卽自(en-soi)”라 하고, 대상에 관계하는 의식을 “대자對自(pour-soi)”라고 말한다.

 

‘즉자’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사르트르에게서 ‘즉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潛勢態(dynamis), 신의 합목적성과 같은 어떤 존재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체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창조되거나 다른 존재와 관계된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진리, 신적인 것, 최고의 초월자 같은 것도 아니다. 그는 이러한 ‘즉자’를 무의미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는데, 자신의 저서인 『구토(La Nausee)』에서 주인공을 통해 표현한 구토증으로 기술되고 있다.

 

‘대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의 특성을 지칭한다. 의식이란 항상 무엇에 대한 것으로 지향적 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원래 자기 자신을 벗어나 자기가 아닌 것을 향하기 때문에 탈자적인 초월적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못되고 언제나 즉자와의 관계에서 그의 존재성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의식의 성격을 사르트르는 ‘대자’라 했다.

 

앞서 밝혔듯이 의식은 의식 밖에 있는 ‘즉자존재’에 관계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가 만일 의식만을 떼어내서 생각해 본다면 의식은 자체로 ‘없는 것[無]’이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 ‘무無’는 중요한 의미를 점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작용은 자신이 간직한 ‘무’를 즉자 존재에 침투시켜 존재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의 무화작용(의식작용)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가 규정됨을 뜻한다. 이러한 의식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있다. 하나는 대상을 지각하는 의식과 다른 하나는 그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자신을 향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즉자’인 존재는 충실充實이지만, 분열된 의식은 존재의 충실을 결여하고 있다. 이는 ‘대자’인 의식이 무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의 결여이고, 그러한 결여(공허)를 메꾸기 위해 욕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한 ‘즉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대자’로 있으면서 ‘즉자’로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즉자’로서의 충실성을 누리면서 의식적인 ‘대자’의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그러나 ‘즉자’이면서 ‘대자’인 신神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즉자-대자(en-soi-pour-soi)”는 자기 모순적인 개념으로 절대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즉자’라면 신은 존재의 충만성을 소유하게 되겠지만 의식이 없으므로 선善의 실행이나 어떤 합목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신이 ‘대자’라면 신은 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무’가 침투하여 결여를 메꾸고자 활동할 것이다. 이러한 신은 완전성과 합목적적인 인격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순된 측면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완전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트르는 창조주로서의 충만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실존사상을 전개한다. 신이 없기 때문에 신이 설계한 세계도 없고, 신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여 인간에게 부여한 고정된 본질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L’homme n’est rien d’autre que ce qu il se fait).” 따라서 ‘대자’로서의 인간은 실존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초월해 가는 자각적 주체로서 언제나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 밖으로 자기를 내던져 미래를 향해 현재를 뛰어넘는 기획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 미리 내던진 가능태를 향해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계획하여 자기를 실현해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입장을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표현을 쓴다. 인간의 의식은 ‘무’를 간직하고 있어서 빈 공허를 메꾸려는 욕구가 있고, 이러한 욕구는 곧 자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유다.

 

운명적으로 타고난 자유는 맹목적이거나 방종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사르트르는 오히려 행동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는 각자의 실존이 스스로가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각자의 존재 방식에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이러한 책임과 관련하여 실존자는 각자의 선택과 동시에 전 인류의 존재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선택은 선택되는 것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전제하고, 이러한 가치 평가는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는 언제나 인류 전체의 선택이라는 귀결이 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28. 01:00




 

 

기즈칸의

군사조직

 

 

 

 

군사 조직

여기에 더해 칭기즈칸은 기존 부대를 개편하였다. 애초의 친족 위주 구성을 해체하여 10진법에 근거한 군사 조직을 만들어 냈다.

 

우선 10명으로 이루어진 ‘아르반’(십호)이라는 분대를 만들었다. 호칭은 분대지만 기병의 전투력은 보병의 5배에서 15배 이상이다. 전투력만으로는 최소 중대 이상이었다. 바투르라는 무관이 지휘했다. 대원 중 한 사람이 포로가 되면 반드시 구출해 내야 했다. 그래서 아르반은 한 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종교와 언어 정도는 공유해야 한다. 이들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고 내왕한 지인들로 구성된다.

 

10개 아르반을 모아 ‘자군’이라는 100명 단위의 중대를 만들었다. 이 자군을 지휘하는 대장부터가 전투 전문가다. 출신 계급과 종족에 상관없이 능력 순으로 선발된다. 자군 10개를 모아 1,000명의 ‘밍간’을 두었고, 밍간 10개를 모아 10,000명의 ‘투멘’을 두었다. 투멘이 우리가 아는 만호萬戶이다. 투멘의 지휘관부터 장군이다.

 

하나 이상의 투멘을 관장하면 대장군을 뜻하는 ‘노얀’의 칭호가 붙는다. 칸이 관장하는 쿠릴타이에 노얀이 참석하여 각 단위 지휘관에 전술을 전달하는 시간은 불과 몇 분이면 충분했다.

 

이 투멘이 몽골군의 한 전략 단위였다. 이런 체제는 기동전을 펼치는 기병에게 주효한 편제 단위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칸의 명령이 그대로 십호장에게 전달되는 일사불란한 명령 전달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통제되는 10여 개의 투멘으로 전혀 적이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과 방법, 방향에서 기습을 하는 현대적인 전격전을 몽골군은 구사하였다.

 

여기에 몽골군 조직은 기존 부족 관계를 해체하고 모든 부족을 서로 섞어 놓았다. 모든 부족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였으며, 공동체 속에선 승리한 부족과 패배한 부족의 구별이 없었다. 패배자들에게도 동등한 시민권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투를 거듭하면서 칭기즈칸의 군대는 줄어들지 않았다.

 

 



정보 통신망

또 하나의 강점은 뛰어난 정보 전달력이었다. 13세기의 세계에는 몽골제국에 의한 평화가 존재했다. 유라시아대륙 거의 전부가 하나의 정치 권력에 의해 통일되어 반세기 이상 평화를 유지하였다. 평화가 지속되자 동서양 교류가 역사상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동의 안전 보장과 더불어 엄청난 물자가 동서로 이동하였다.

 

이 교류를 확대시킨 획기적인 수단이 바로 잠jam(역참)이었다. 본래 잠은 체계화된 릴레이 시스템이었다. 1,000km 밖의 군대를 통제 지휘가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50km마다 역참을 설치하고 약 400마리의 말을 대기시켰다. 제국의 끝과 끝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일종의 #통신 우편망#이었다.

 

대칸 직할령에만 60,000km의 도로에 1,400개 이상의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다. 칸의 파발꾼은 수도 #카라코룸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일주일 만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6,00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일주일에 완주하려면 하루에 거의 1,000km 가까이 달려야 했다. 요즘에는 전파를 이용하거나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동차로 달린다면 가능할까? 하지만 교통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에 이는 상당한 모험을 안고 있다. 지금 우리가 유라시아 횡단을 하려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체첸, 우크라이나 같은 분쟁 지역을 지나가야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27.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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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칭기즈칸

몽골군의 무기들

 

 




몽골 활

몽골 활은 우리나라 각궁처럼 복합 재질로 되어 있는 작고 가볍지만 강력한 활이다. 300m의 최대 사거리로 150m에서 실전 사용하였고, 50m로 근접해서는 어떤 갑옷도 관통하였다. 몽골군 기병 1인당 활 2~3개와 60발의 화살을 보유하였다. 화살은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여기에 최소한의 보급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능력으로 보급 문제가 거의 없었다. 끌고 다니는 말의 젖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다. 놀라운 기동력과 생존 능력을 지닌 이들에게 약점은 경기병이 지닌 약한 방어력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면충돌보다는 활을 이용한 사냥 원진을 활용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효율적으로 공격해도 결국 정면 공격과 백병전으로 승패를 가늠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몽골군은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유연성 있게 대처했다. 즉 이민족 출신의 중기병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래도 희생이 클 수 있는 정면 돌격에서 핵심 전력인 몽골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자신이 잘할 수 없는 분야에서 거리낌 없이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는,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거나 자기들끼리의 힘만으로 해결하겠다는 태도는 몽골인들과는 가장 거리가 먼 방식이었다.

 

몽골인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피정복민들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였다.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배정하면서 이들에게 그에 적합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인, 아랍인 공병대의 활약이다. 이들은 공성 무기를 끌고 다니지 않고 적의 요새 근처에서 주변 재료를 활용해 공성 무기를 제작해 냈다. 이런 몽골인들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1258년 몽골군의 바그다드 포위 공격(티그리스강 도하 다리 설치, 초대형 투석기)이나 남송 정벌전(기병 중심 기동전에서 보병과 수군 위주로 전투 방식 변경, 회회포라 불린 투석기와 공성 무기와 고려 수군들)이었다.

 



 

몽골 말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몽골 기병의 힘의 근원은 몽골 말이다. 몽골군에게 말은 생사를 결정하는 존재로 영원한 동반자였다. 말 중 제일 멋있고 빠른 말은 오늘날 아랍종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 계통의 말이다.

 

이에 비해 몽골 말은 우리 조랑말과 비슷하다. 조랑말보다 체격이 약간 클 뿐, 머리는 크고 몸은 펑퍼짐해서 둔하고 느려 보인다. 몽골 말은 순간 속도는 처지지만, 뛰어난 지구력을 자랑한다. 말은 의외로 까다롭고 참을성이 부족한 동물이다. 하지만 몽골 말은 혹서와 혹한을 모두 견디며 산과 평지, 정글과 사막을 횡단한다. 몽골군은 이 말을 타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후대와 모든 지형을 정복했다(산악, 평원, 사막, 정글, 초원).

 

몽골 말의 이런 장점은 천성만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엄격한 훈련으로 길러진 것이다. 몽골인은 말에게 어려서부터 강한 인내심과 복종을 요구했다. 어미로부터 떼어 낸 새끼 말을 밤새 초원에 혼자 묶어 두어 공포감을 이겨 내게 하고, 언 땅을 파서 풀뿌리와 물을 찾게 하는 훈련을 시킨다. 추위와 더위를 이겨 내는 훈련, 굶주림을 참아 내는 훈련,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소리를 내지 않는 훈련이다. 춥다고 무섭다고 짜증난다고 울면 돌아오는 건 무시무시한 체벌이다. 칭기즈칸은 말이 더 빠르고 강하게 멀리 갈 수 있게 마구를 최대한 가볍게 했고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 재갈을 물리지 않는 건 폐활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장거리를 달리다 멈춘 말에게 곧바로 물과 풀을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방금까지 뛴 말의 앞발과 뒷발을 묶어서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 말의 숨이 가라앉고 나서야 물과 풀을 먹였다. 격렬한 운동 뒤 몸을 잠시 긴장하게 하여 근육이 제자리에 잡히도록 하는 것이다. 말에게는 지옥이었다. 피나는 훈련과 노력으로 전투에 적응하고 기수에 복종하게 했다. 칭기즈칸은 이런 방식을 엄한 명령으로 시행하며 지침을 강요했다. 말은 건강하고 빠르고 유연해졌으며 말 자신이 전사가 되어 갔다.

 

몽골군은 1인당 3마리 말을 데리고 다녔고, 암말을 선호했다. 말의 젖을 발효시켜 음료 쿠미스kumis를 얻었다. 언제나 말과 교감하며 살았고 자신의 말을 지극히 사랑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한 뒤 화가에게 자신과 말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뛰어난 말의 두개골을 유품으로 간직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몽골군은 말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칭기즈칸은 말의 기본권을 배려했다. 군용마 퇴역 제도였다. 일정 기간 전쟁을 겪거나 한 번 이상 장거리 원정에 참여한 말은 초원으로 보내 버렸다. 말 그대로 ‘전역’한 것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군용의 삶이 끝나면 고기와 가죽의 재료가 되었는데, 칭기즈칸은 자신의 울루스에 태어난 죄로 갖은 고생을 한 말을 예우한 것이다. 훈련과 전쟁에서 해방돼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여생을 살게 해 준 것이다. 초원에서 가장 중요하고 한정된 자원인 풀을 복지 차원에서 퇴역마에게 내어 준 것이다. 그것도 기꺼이!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26. 22:51




 

 

세계 최강 칭기즈칸

몽골군의 비밀

 

 

 

13세기 세계 정복에 나섰던 몽골군은 사실 몽골인으로만 구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몽골군은 그들이 정복한 지역 어디에서나 새로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켰다. 순수 몽골인뿐 아니라 무수한 이방인들이 결합한 집단이 몽골군의 실체였다.

 

 

경기병

몽골군의 주력군은 경기병輕騎兵이다. 이들은 몽골 초원 유목민으로 태어나 걷기도 전에 말을 타기 시작한 이들이다. 몽골 경기병들은 적의 화살을 달리는 말 두 마리의 틈이나 말의 옆, 배에 붙음으로써 피한다. 심지어 적의 창과 도끼 공격도 이런 방식으로 피한 뒤, 말의 배나 꼬리로 나와 적을 찔러 쓰러뜨린다.

 


몽골군은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려 쏘는 배사背射, 즉 파르티안 사법을 구사하였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 자세가 눈에 익지만, 당시 서양 기사들에게는 공포이자 경이였다. 몽골군은 경기병을 보내 무질서하고 조잡한 전투를 벌이다가 퇴각하는 척하며 적군을 끌어내곤 했다. 그들은 이런 퍼포먼스를 위해 ‘망구다이’(위장 공격과 도망을 겸한 겁에 질린 공격이란 의미 또는 신의 소유물이라는 의미)라는 특수부대를 양성했다.


망구다이는 원래 정예 기병으로 이들의 역할은 형편없는 전투 능력을 보여 적이 방심하게 하는 것이다. 이들이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오른 부대가 추격에 나서면 몽골 기병은 말 위에서 뒤로 돌아 화살을 날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추격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적군은 몽골 본대를 만나게 된다. 몽골 본대는 적군을 에워싸면서 섬멸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돌격하지 않고 초원에서 사냥법을 응용하여 적중률 높은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몽골군은 개개인을 쏘지 않고, 특정 장소를 목표로 살상구역(kill zone)을 정했다. 모든 화살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모든 사람을 마치 사냥감처럼 가운데에 몰아넣고 학살하였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22. 01:00





 

 

독일의 실존철학자

야스퍼

 




 

 

“중은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이 상잡相雜하야 종경도임주從境途任走하야 타생장소병몰墮生長消病歿의 고苦하고 철哲은 지감止感하며 조식調息하며 금촉禁觸하야 일의화행一意化行하고 개망즉진改妄卽眞하야 발대신기發大神機하나니 성통공완性通功完이 시是니라.” -『桓檀古記』 「蘇塗經典本訓」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1960년대 초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 기간 중에 그는 교토에 있는 일본의 국보 제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친견하고서 “이것은 지상의 모든 시간적인 것, 속박을 넘어 달관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영원한 평화와 이상을 실로 아낌없이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야스퍼스는 그 불상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까? 그것은 불상이 바로 인간 실존(Existenz)의 최고 경지를 조금의 미혹도 없이 완벽하게 표현해 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3년에 독일의 나치Nazi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독일에는 야스퍼스를 중심으로 하는 실존철학이 풍미를 이룬 바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이 인기가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인간의 진정한 실존은 현존재(Dasein)의 인간이 참다운 자아로 돌아가 일체一切의 존재 양식을 초월超越하여“포괄자(Das Umgreifende)”에 다다름으로 규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초월성이란 말은 비대상적非對象的으로 완전히 은폐되어 있어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실존자의 경지에 다다른 경우에만 상징적인 시사示唆를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괄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포괄자는 존재의 모든 대상을 안에 포괄하는 무한한 지평地坪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사유를 통해 그런 무한한 지평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언제나 새삼스럽게 우리를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포괄자의 의미란 얘기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절대적 존재인 포괄자는 결국 매듭지어질 수 없는 무애无涯의 상태로 세계에 노정露呈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영구히 완결된 전체로서의 그런 존재를 조망眺望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현존재現存在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존재가 궁극의 절대적인 포괄자에 의해 감싸인 상태에서 그 참뜻이 밝혀질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초월성이다. 결국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에서 포괄자는 실존적인 인간이 그 경계에 도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현존재인 인간은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실존자가 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는 실존을 삶과 정신에 합쳐진 작용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포괄자의 모든 방식 안에서 현존재는 양극성을 갖고 있는데, 이성이 없는 실존(vernunftlose Existenz)과 실존이 없는 이성(existenzlose Vernunft)이 그것이다. 만일 이성이 없는 실존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감정과 느낌, 본능과 충동에 충실하게 되지만 맹목적인 폭력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실존이 없는 이성만을 고집하는 삶이라면 지성적인 보편자, 도식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을지언정 인격을 잃고 역사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공허하고 자의적이 될 수 있다.

 

이성과 실존은 분리될 수가 없다. 이성이 무너지면 실존이 상실되고, 실존이 없으면 이성이 무너진다. 이성은 기존의 것을 고집하여 관철하기 위해 실존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되고, 실존은 스스로를 투명성으로 이끌기 위해 이성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실존은 이성에 의해 밝혀지고, 이성은 실존에 의해 내용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실존이란 한편으로 체험된 것, 삶으로부터 결단으로 받아들여진 것, 자유와 역사적인 일회성 속에서 개인적으로 얻어낸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논리적인 것, 정신적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 학문적인 의식으로 높여진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실존조명(Existenzerhellung)”의 길로 나아가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는 실존이란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실존인식’이라 하지 않고 ‘실존조명’이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실존을 조명한다는 뜻은 “실존이 자기 자신이 된다(sich selbst werden)”,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sich selbst bewußt werden)”는 뜻이다. 결국 실존이란 삶과 정신이 합쳐진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밝혀감으로써 참된 자기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완결된 체계 내에서 활용되는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가 없다. 오직 실존철학에 고유한 범주를 통해서 실존이 “조명”될 수 있을 뿐이다. 야스퍼스에게서 실존범주란 바로 ‘자유(Freiheit)’, ‘상호관계(Kommunikation)’, ‘역사성(Geschichtlichkeit)’으로 집약된다.

 

실존은 고정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되어가는 가능적 존재이다. 이는 실존적인 인간이 자기 상실과 자기 보존을 겪으면서 끊임없는 선택의 도정道程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결단을 재촉받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실존은 자유로운 선택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원천으로부터의 자기창조自己創造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자유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또한 실존적인 인간은 어떤 독단적인 진리나 개념, 체계 등을 고집하지 않고 타인에게 항상 마음을 열어 두어 배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실존이 타자他者의 자아와 진솔한 유대 관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상호관계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리고 실존은 언제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즉 역사성을 안고 있는 특수자로서의 자기존재를 의미한다. 역사성 안에 있다는 뜻은 단순히 시간성으로서의 역사성(필연적 계열을 의미함)만이 아니라 실존적 현존재가 자유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의미한다. 역사성으로서의 실존적인 인간은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의 순간에 대한 충실充實에, 즉 영원한 현재로 초월에 직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성에 의한 실존조명이다.

 

그럼 이와 같은 실존은 어떻게 자각되고 실현될 수 있을까? 야스퍼스에 의하면 그것은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 에 대한 자각에서 출범한다. ‘한계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재인 인간은 일정한 역사적 사회적 시대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자신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이러한 상황을 변경할 수도 회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다. 다름 아닌 죽음, 고뇌, 싸움, 죄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다. 이것을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라 부른다.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有限性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유한적임을 깨달은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동시에 포괄자가 주재하는 현실에 눈을 돌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식을 변혁시켜 본래의 자기 존재에로 회생回生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상황’은 인간의 실존을 각성하게 하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계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할 때 모든 것은 초월자를 지시하는 암호暗號로 나타난다. 암호란 실존이 청취할 수 있는 초월자의 언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종류는 무수하게 많다. 모든 현존재, 자연과 역사, 세계와 인간의 통일, 인간의 자유 등은 모두 초월자의 암호일 수 있다.

 

초월자를 지시하는 이런 암호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기술될 수도 없고, 논증될 수도 없고, 오직 실존의 참된 좌절에서 체험되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암호 해독은 어디까지나 실존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체험하는 실존에 따라 다양하면서도 독특하게 내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실존은 ‘한계상황’에서의 좌절을 통해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초월자의 절대적인 현실을 확인하게 되고, 본래적인 자기 존재로 회생回生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21. 23:16

 




 

체의

실존철학(Existential Philosophy)

 

 

 




“실존(實存, Existence)”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라틴어의 “existentia”에서 유래한다. 이는 원래 ‘밖이란 뜻’을 가진 ‘ex’와 ‘나타나다’란 뜻을 가진 ‘sistere’의 합성어로 ‘밖에 나와 있는 것’, ‘밖으로 나타나 있는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를 뜻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는 유한하며,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되는, 항상 변화의 도정에 있다. 이러한 현실적 존재와 대립하여 있는 말은 바로 “본질(essentia)” 개념이다. ‘본질’이란 개개의 구체적인 사물에 앞서서 영원히 존재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본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재성격만을 “실존”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실존을 중심으로 사상을 전개한 학문을 일컫는다. 이러한 실존철학은 전통적으로 사유를 지배해 온 합리주의(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지만, 결국 불안과 허무에 허덕이는 인간을 위한 사상으로 귀착한다. 이러한 실존철학은 19세기에 “신 앞에 선 단독자”를 제창한 유신론적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무신론적 실존철학자 니체Nietzsche에 의해 형성이 되어 유럽의 지성들을 사로잡은 바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실존을 강조하는 철학이 새롭게 정리되어 다시 한 번 유럽의 지성사를 장식하게 된다. 실존철학은 왜 반복해서 또다시 등장하게 됐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유럽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상황은 인간성 상실과 삶의 위기 의식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성 상실과 위기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유럽인들은 대중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존재에 대한 눈을 뜨게 되고, 자기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진정한 본질과 구조를 밝혀 보고자 출현하게 된 것이 실존철학인 것이다.

 

실존철학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첫째, 실존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한 존재 양식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인간의 실존’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동양의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깔려 있다. 둘째, 실존은 개별적인 인간의 고유한 존재 양식이므로 ‘개인의 실존’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실존철학은 지극히 ‘주관주의’라 볼 수 있다. 셋째, 실존철학은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개인 중심적이 아니라 ‘상호주관적相互主觀的’인 측면을 다룬다. 왜냐하면 인간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언제나 타자他者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넷째, 실존철학은 사물을 기준으로 인간의 실존을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물은 이미 확정된 성질로 고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존재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이룩하기 위해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실존철학은 역동적(力動的)이다. 왜냐하면 실존이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실존철학은 구체적인 ‘체험體驗’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실존철학자들은 ‘실존적 체험’을 자신의 철학적 동기로 삼기 때문이다. 실존적 체험으로 거론되는 것은 죽음, 고뇌, 투쟁, 한계상황, 혐오감 등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범하는 20세기의 실존사상은 실존문학, 실존예술, 실존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전개된다. 실존철학의 분야에도 많은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징적으로 두 철학자를 꼽아 볼 수 있는데, 키에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철학의 연장선상에서 ‘영원한 현존’을 말한 칼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와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선상에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가 대표적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9. 01:00




 

 

서구 몰락을 예견한 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해와 달이 나의 명(命)을 받들어 운행하나니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느니라. 천지개벽(天地開闢)도 음양이 사시(四時)로 순환하는 이치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천지의 모든 이치가 역(易)에 들어 있느니라.”

-『도전道典』2:20:1~5

 

슈펭글러는 2차 세계대전 후에 지은 『서구의 몰락(Untergang des Abendlandes)』으로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다. 이 책에 의하면 역사는 삶의 현상이다. 삶의 현상은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그러한 전형적인 형식은 식물의 생장과정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봄철에 씨앗을 심으면 싹이 터서 잎들과 가지들이 돋아나고, 여름철이 되면 무성하게 성장하고 꽃이 피며, 가을철이 되면 꽃이 지고 열매가 무르익으며 잎이 떨어지고, 겨울철이 되면 열매를 저장하고 휴식으로 들어가 다음 해를 준비한다. 식물의 경우에서 생명의 현상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순환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고 본 것이 슈펭글러의 입장이다. 요컨대 삶의 현상은 어떤 일정한 형식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이 형식들은 서로 비교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같은 과정으로 진행되는 순환 법칙이 발견될 수 있다. 순환 법칙은 인간의 생명이 탄생하면[生] 유아기를 거쳐 청년으로 성장하고[長], 청년기의 정점에 이르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는 장년이 되고[斂], 그 이후에는 반드시 쇠퇴의 길로 접어 노년에 이른다[藏].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는 이런 순환 형식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가올 것에 대한 예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슈펭글러의 입장인 셈이다.

 


이런 생물학적인 태도는 삶의 역사 현상이나 문화 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슈펭글러는 문화라는 것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집트 문화, 그리스의 문화, 로마의 문화, 이슬람 문화, 기독교의 문화 등이 그 예이다. 요컨대 맨 처음에 종교와 신화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게 되면, 탄생한 문화에 대한 정신적 각성이 일어남으로써 개혁이 되고, 계몽주의 시대와 같은 문화의 성숙 단계에 이른 다음에는 정신적인 창조성 고갈의 단계에 이르러 쇠퇴하는 주기를 반드시 거친다는 것이다.

 

슈펭글러는 새롭게 탄생하고 성장하여 전성기를 지나 몰락해 버린 문화에다 오늘날의 서구 문화를 적용함으로써 ‘서구의 몰락’을 예언한다. 그것은 그가 몰락한 문화에서 볼 수 있었던 몰락현상(Verfallserscheinung)이 서구 문화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몰락현상으로 그는 합리주의와 기술의 우위를 들고 있다. 몰락한 문화에서 최후에 오는 것은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의 문화가 지금 반성과 물질적 안락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민주주의, 세계시민주의, 휴머니즘사상, 평화주의, 인권과 동포애 등이 새롭게 생겨남으로써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서구의 몰락을 촉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슈펭글러가 밝히는 삶의 철학은 오직 ‘흐르는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헤겔의 철학에서처럼 하나의 절대자 안에서 모두 지양되는 삶도 아니고, 마르크스의 철학에서처럼 모든 사회적 · 역사적인 삶이 오직 하나의 유물변증법에 예속되는 것도 아니다. 슈펭글러의 삶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인 태도에 바탕을 두고서 역사의 과정을 추진해 나가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삶은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도 아니고, 베르그송이 말한 ‘삶의 약동’ 또한 아니고, 오직 생물학적인 생명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문제도 아니고, 영원한 진리의 발견도 아니라는 것이 슈펭글러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는 항상 보다 더 강하고, 보다 풍족하고, 보다 더 자신 있는 삶에게 권리를 부여해 왔기 때문이다. 이때의 권리는 생존의 권리이다.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는 생존을 위해 진리와 정의를 권력과 종족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삶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원초적인 삶이며, 언제나 종족과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의 개진凱陣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8. 02:00




 

 

해석학의 선구자

빌헬 딜타이

 

 

 




딜타이는 베르그송처럼 “지속持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일회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거나 블롱델처럼 이를 우주적인 넓은 의미에까지 확장하여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현실적인 삶에만 한정하여 그 자체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딜타이는 삶이란 현실적인 삶 자체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과정은 시간에 따른 순간순간의 흐름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실적인 모든 것은 반복되지 않고 일회적으로 지나가 버린다. 현실적인 삶은 그러한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로 이루어지게 마련인 셈이다. 이러한 일회적인 삶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논리적인 지성에 의거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딜타이에 있어서 현실적인 삶은 전체와 부분이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그런 것이다. 전체 없이 부분은 없고, 부분 없이 전체는 없다는 논리가 현실적인 삶에 적용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전체를 이루는 부분적인 삶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늘 새롭게 체험하게 되는 삶이다. 이러한 체험적인 삶의 바탕에는 실제로 무엇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삶에는 새로운 체험에 스며들어 개별적인 특징을 이루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의식상태(Bewußtseinsstand)이다. 그래서 딜타이는 삶의 체험과 이해를 전개해감에 있어서 먼저 인간의 심리적 구조(Struktur)의 분석으로 눈을 돌린다.

 

인간의 의식상태는 두 측면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의식의 횡적구조橫的構造인데,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생각의 내용을 체험하는가 하는 체험 내용을 받아들이는 의식상태이다. 다른 하나는 의식의 종적구조縱的構造인데, 내가 나의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여 체험하는가(나는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장차 행위하게 된다) 하는 총체적인 바탕으로서의 의식상태이다. 이 의식의 상태도 일정한 의지의 태도 또는 특별한 감정의 상태로서 체험된다. 이러한 의식의 구조를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심리적(영혼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영혼적)인 이해는 지성의 힘으로는 부족하고 심성心性이 송두리째 투입된 체험에서 체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 삶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법은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삶에 대한 이해는 바로 삶에서 삶에로의 운동이고, 삶의 과정은 곧 역사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삶은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심정적 힘의 협동과 그 연관에 의거해서 삶에서[정신과학의 역사] 삶에로의 운동이고, 이를 통해 이해된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 방식을 토대로 하여 통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딜타이의 해석학(Hermeneutik)은 바로 이러한 정신과학과 특히 인간의 자기성찰이 요구되는 역사의 영역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본다.

 

이러한 정신과학의 역사에서 심리적 구조에 적합한 것은 정신사적인 유형(Typus)이다. 유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 자체의 형식이다. 인간의 삶이란 이러한 형식(유형)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주의,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등의 여러 유형이 있는데, 정신사의 여러 현상은 이러한 유형들에 적용하여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들은 개별적인 삶의 과정을 꿰뚫고 있고, 개별적인 정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딜타이는 정신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간파하려고 했으나 결국 개별적인 유형들과 다양한 입장들만 발견해 내는 데에 그쳤다. 그는 이런 다양한 개별적인 유형들에서 정신적인 삶의 풍부함을 드러냈으나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뜻을 밝혀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요컨대 헤겔은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하나의 절대자를 드러냈으나 딜타이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상대주의적 입장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딜타이는 ‘이해’와 ‘유형’에 관한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정신과학적 방법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밝혀졌으나 상대주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전형적인 역사주의자로 머물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것은 삶이고, 삶이란 오직 시간에 따라서 흘러가는 일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새로운 개별적인 것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 딜타이의 입장이다. 이는 삶이란 보편적이고 구속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를 더해주는 그런 것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7. 01:00





 

삶의 근원을 우주적으로 파악한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

 

 

 



“하나는 시작이나 무에서 비롯된 하나요(一始無始一), 하나가 삼극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근본은 다함이 없느니라(析三極無盡本) … 하나가 오묘하게 뻗어 나가 우주만유가 오고 가고(一 萬來), 작용이 부동의 근본으로 변화하나니라(用變不動本). 근본은 밝고 밝은 태양에 바탕을 둔 마음이니(本心本太陽昻明), 사람이 천지 가운데 태일이 된 하나(人中天地一)이니라. 하나는 끝이로되 무에서 마무리 된 하나이다(一終無終一)”

-「天符經」

 

블롱델은 베르그송이 말한 ‘순수지속’과 ‘창조적 진화’에 반대하고, 삶의 근원을 밝히는 쪽으로 사유하기에 이른다. 그의 삶의 철학은 우선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러한 ‘행위’는 급진적인 삶의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행위’는 맹목적인 것도 아니고, 순수한 의지도 아니고, 이성에 대해 항거하는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정신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블롱델에 의하면 인식은 행위의 한 부분이요, 사고의 진보는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에서 행위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이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문제는 그 행위의 진보를 제약하는 사고의 정체가 무엇인가이다. 사고는 근원의 존재도 아니다. 사고는 단순히 힘이며 정신적인 삶의 동력 안에서 무엇을 밀어내고 끌어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블롱델은 사고의 근원이 바로 정신적인 삶의 전체요 모든 부분들에 앞서서 ‘밀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삶의 철학은 사고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사고의 근원이 되는 ‘밀고 나아간다’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행위’ 속에 나타나는 그런躍動 밀고 나아감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도했던 의미와 유사할 것이다. 즉 플라톤의 철학에서 ‘모든 것이 이데아를 닮으려고 노력한다’고 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질료가 형상을 실현하기 위해 형상을 그리워한다.’고 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최고의 진리요 모든 형상들 중의 형상인으로 신神에게로 나아가려는 본성적인 욕구’라고 했을 때, 그런 의미의 밀고 나아감이라고 보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밀고 나감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그것은 근원이요 완성이라는 “하나”를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세계는 하나다. 하나의 통일된 틀은 우주세계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 놓고 있다. 이 틀은 결국 우주세계를 이루는 여러 형상들의 형상[神]에 뿌리내리고 있는 질서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주세계는 고정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되어 감에 따라 완성의 진리는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완성에 대한 동경이고, 완성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神)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주체는 우주적인 존재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행위가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가고, 생명으로부터 밀고 나가 정신으로, 정신으로부터 신(神)으로 밀고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즉 정신은 자기 밑에 있는 불분명하고 혼란된 여러 단계를 벗어나 광명의 빛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행위의 철학적 과제는 정신과 가치 질서의 원천을 자연 안에서 밝히는 것이고, 타당한 질서라 불리는 행위와 사고의 관계, 즉 행위에는 사고가, 사고에는 행위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6. 01:30

 

 



생의 약동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삶의 철학자로는 생의 약동을 주장한 프랑스 출신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1859~1941)과 우주적인 삶으로 파악한 모리스 블롱델Maurice Blondel(1861~1949), 해석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독일 출신의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1833~1911), 서구의 몰락을 예견한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1880~1936)를 대표적으로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사유는 현상적인 물질에 근거하는 유물론적인 사유나 기계론적이며 결정론적인 사유를 반대하는 삶의 철학이다. 그는 존재를 “삶의 약동(élan vital)”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실증주의나 현상주의 철학을 비판한다. 오직 텅 빈 공간과 물질적인 연장을 바탕으로 해서 드러나는 외부적인 것, 즉 사물의 표면적인 현상만을 탐구하게 된다면, 인간의 생명과 내면에서 비롯되는 의식생활, 자유와 자발성 등이 본래의 빛을 찾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사장되어 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철학의 의미에서 볼 때 공간은 한결같이 동질적이다. 동질적인 무한한 공간 안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존재는 정적이고, 비연속성이며, 전체적으로 도식적이 된다. 마치 원자들의 인과적 운동과 기계적인 필연성만이 되풀이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삶의 내적인 존재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즉 삶에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른 시간이 있고, 의식의 흐름은 절대로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에 내면적인 시간 또한 언제나 이질적으로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것들에게서의 시간은 자유를 내포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창의적인 발전이 있을 뿐이다.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베르그송은 ‘진정한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이고, 인간의 시간이란 지속(durée)’이라고 하여 삶의 철학을 전개한다.

 

‘지속’이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 또한 계속적인 흐름 속에 있고, 흐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란 이미 있는 것과 함께 규정되어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일회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는 살아 움직이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지속’이다.

 

우리의 이성은 도식적이며 언제나 개념화하여 고착화시킨다. 그러나 현실적인 삶은 사건의 시간적인 흐름 속에 감정이 이입移入되어 유동적으로 지속한다. 이렇게 되면 현실적인 삶은 고착화된 보편적인 개념의 옷을 입지 않고 오직 유동적인 실재에 대한 직관(intuition)으로만 드러나게 마련이다. 직관이란 관조적인 입장에서 인식행위에만 주력하는 지적인 것이다. 이것이 체험體驗이고,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지속을 올바르게 파악하게 된다. 철학은 삶에 이러한 직관을 부여하기 때문에, 도식화된 표면을 꿰뚫고 나아가 내적이고 일회적인 삶의 지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보편적인 인과의 사슬을 벗어던지고 일회성과 자유를 되찾으려한다. 왜냐하면 직관으로서의 의식은 곧 자유요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모든 존재는 의식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이성적인 것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라 바로 삶과 체험, 충동, 지속, 자유, 창의적인 에너지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생성과 행위와 행동이고, 우리는 세계를 채우고 있는 물질과 삶의 모든 것 안에서 창조하는 힘들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삶의 약동(élan vital)”이라는 것이다. 삶의 약동이야말로 존재의 핵이요 삶의 정수精髓이다.

 

삶의 약동은 자유롭게 흘러간다. 삶의 약동은 기계론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흘러가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삶은 비약飛躍이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낳는다. 따라서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는 곳에서는 삶이 만들어 내는 자유와 활동과 약동躍動(Elan)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삶이 창조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곳에는 언제나 퇴락만이 있을 뿐이다. 미래의 보다 높은 발전을 위한 시작과 근원 또한 기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약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계 전체를 조망해 보자면, 삶은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파도처럼 생각되는 전진이다. 삶은 충동이요, 그 충동은 자유롭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삶의 의식이 인간에게서만 그 운동을 계속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식물의 경우는 모호한 의식과 물질의 세계를 겸하고 있어서 경직성이 있고, 동물의 경우는 많은 움직임과 의식이 있으나 종種과 환경의 습성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식은 자유롭고 무한히 자발적이고, 인간의 입지를 드높이게 마련이다. 이러한 의식은 인간에게 무한한 지평이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베르그송은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의 진화론을 뒤집고 바로 #“창조적 진화”#의 문제로 나아간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5. 01:00




 

 

세기의 기업 경영인

잭 웰치Jack Welch

 

 




 

 

프로필

‘경영의 달인’, ‘경영의 귀재’, ‘세기의 경영인’ 등으로 불리는 미국의 기업인. 매사추세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mpany, GE)에 입사하였다. 33세에 GE 역사상 가장 젊은 사업담당 총괄관리자가 되었으며 부회장을 거쳐 1981년 45세의 나이로 GE의 8대 회장이 되었다. 2001년 퇴임할 때까지 1,700여 건에 달하는 기업의 인수합병을 추진하였으며 회사의 가치는 부임 당시 120억 달러에서 4500억 달러로 40배 성장하였다. 세계 최정상만을 고집해 온 잭 웰치의 독특하면서도 탁월한 경영철학과 지속적인 경영혁신운동으로 세계 초일류 기업의 모범을 보인 GE는 현재까지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001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인’으로 선정하였으며, GE 역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출생 1935년 11월 19일, 미국

직업 전직 기업인

학력 ~1960 일리노이 대학교 화공학 박사

~1957 매사추세츠 대학교 앰허스트 캠퍼스

경력 1985 NBC 방송국 인수

1981~2001 GE 회장, 최고경영자

1960 제너럴일렉트릭GE 플라스틱비즈니스담당 총책임자

 



조직경영 명언

-자발적으로 변화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비록 잠시 동안 회사의 상당 부분을 총체적인 혼란 속에 몰아넣는 것을 뜻할지라도 강력한 것이다.

-변화의 힘을 활용하라. 변화를 적으로 인식하는 지도자는 조직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학습하는 지도자가 되라. 끊임없이 학습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해 노력하라. 실패를 통한 학습은 성공의 환희보다 훨씬 중요하다.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는 조직의 능력이야말로 궁극적인 경쟁의 이점이다.

-‘S’비법을 통해 생산성을 촉진해야 한다. 빠른 결정, 단순화된 조직 구조, 그리고 자신감이 그 비법이다. (Speed, Simplicity, and Self-Confidence.)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자원을 분배하라. 그리고 간섭하지 마라.

-비전을 제시하라. 그 다음 구성원들이 조직의 비전을 자기 스스로 실천하도록 하라.

-사람에게 투자하라. 가장 소중한 것은 당신과 일하는 사람이며, 그들의 능력을 개발하면서 함께 일해 나갈 수 있는 자질이다.

-기업이 잘 될 때 개혁을 하는 것이 지혜이다. 사실 꿈꾸던 것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경우 조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너무 사소해서 땀 흘릴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현되길 바라기엔 너무 큰 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하라! 열정은 천재의 재능보다 낫다. 열정은 당신의 최고의 경쟁력이다.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1등이나 2등이 될 수 없다면 그 사업은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세계 최고를 하고 있거나, 세계 최고를 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을 빼고는 모두 버려라.

 

잭 웰치의 인사 정책

1.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인지 파악한다. 인재와 직무의 조화에 포커스를 맞춘다.

2. 여러 후보 중에 선택함으로써 인사 정책에 소모되는 시간을 줄인다.

3. 인사 결정에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

4.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살펴본다.

5. 개인의 특징을 관찰한다.

6.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파악한다.

 

잭웰치의 4E 리더십

Energy(에너지) Energize(동기부여) Edge(결단) Execute(실행)

자신의 팀과 구성원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말고 소신껏 결단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든 실행으로 옮길 줄 알아야 한다. 4E는 하나인 ‘P’에 묶여 있다. 그것은 바로 ‘Passion(열정)’이다. 열정이 있어야 그 위에 4E가 존재하고 성립할 수 있다.

 

잭웰치의 2:7:1 시스템

전 조직원을 능력과 실적에 따라 상위 20%, 중간 70% ,하위 10%로 나눠 관리하는 인력관리 시스템이다. 여기서 20%의 조직원은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반면 하위 10%의 조직원은 조직에서 탈락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10% 조직원이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부족한 점을 개선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지 솎아 내는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잭 웰치가 중요하게 생각한 그룹은 바로 70%의 중간 그룹이다. 이들이 바로 조직의 심장, 핵심이라는 것이다. 20%의 상위 그룹처럼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묵묵히 직무를 수행한다. 훌륭한 수장이라면 이 중간 그룹을 20%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14. 21:57




 

 

20세기의 전설적인 주식투자가

워렌 버핏Warren Buffett

 



 

 

 

프로필

20세기의 대표적인 미국 기업인이자 전설적인 주식투자가. 26세 이후 고향 오마하를 벗어나지 않고 활동하며 주식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는 눈을 가졌다 하여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이라고 불린다.

 

사업가이자 투자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고 모으는 데 관심이 많았다. 11살 때 100달러의 자금으로 주식투자를 시작했으며, 17살부터 21살 때까지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 비즈니스 스쿨, 네브래스카-링컨대학,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1894~1976)의 가치투자(단기적 시세차익이 아닌, 기업의 내재가치와 성장률에 근거한 주식투자)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1965년 인수한 방직회사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의 최고경영자로 활동하고 있다. 재산의 85%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약정하는 등 적극적인 기부활동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지가 2006년 세계재력가 1위(재산 58조 8천억 원)로 선정했다.

 

출생 1930년 08월 30일, 미국 오마하

소속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

학력 1951 컬럼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제학 석사

1950 네브래스카 대학교 경제학과

1947~1949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졸업

경력 1996~2011 워싱턴 포스트 이사

1987 코카콜라 이사

1965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

1956 버핏 투자회사 설립

수상 2012 미국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2011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시상식 자유훈장

2010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

 


명언

-아기들이 배고프면 손가락을 빨며 ‘밥 달라’는 표현을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그런 나이가 지났다. 기회와 성공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말라. 그 기회와 성공을 찾고 직접 만들어야 한다.

-습관의 고리는 도저히 깰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지기 전까지 너무 가벼워서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과 행복이 무엇인지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라. 어떤 성공은 그 사람에게 성공이었을지 모르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행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투자에 있어서 본인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된다.

-평소에 큰돈이 나가는 것은 신경 쓰면서 사소하게 작은 돈이 나가는 것들은 신경을 덜 쓴다. 하지만 이게 반복되면 크나큰 지출로 이어진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같은 물건을 똑같이 만들어 낸다면, 남들과 똑같은 서비스를 한다면 현재로서는 통할지 모르나 결국에는 밀려나게 된다.

-위험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데서 온다.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나를 사랑하면 성공한 삶이 될 것이다.

-남을 움직이게 하려면 나부터 움직여라.

-정직은 아주 비싼 선물이다. 싸구려 같은 사람한테서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버려라.

-스스로 기회를 찾아서 쟁취해야 한다. 만약 결정하였다면 우유부단하게 있지 말고 신속히 결단해야 한다.

-성공한 사람은 모두 끈기가 있다. 한 가지 일을 할 때,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끝까지 밀어붙여라. 끈기 없이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끊임없는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상황도 이겨 낼 수 있다.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은 잘 할 필요가 없다.

-잠자는 시간에도 돈이 들어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당신은 죽기 전까지 일을 해야만 할 것이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

투자의 황제,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과의 점심 식사는 매년 경매에 붙여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전액 기부된다. 1999년부터 웨렌 버핏이 스스로 시작한 이 행사는 올해에는 30억 원에 낙찰되었다. 경매 시작 2분 만에 11억 원을 써낸 입찰자가 나왔다고 하는데, 낙찰가는 최종 267만 9001달러(원화 30억 원)를 써낸 사람에게 돌아갔다. 세계의 부호들은 그와의 대화만으로 수업이 된다고 느끼고 그 가치를 매겨 경매에 참석하는데, 경매 사상 최고가는 345만 달러로 원화로 환산하면 40억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13. 01:30




 

 

칭기즈칸의 사람들

4구四

 

 

 

 

네 마리의 개는 싸움개의 이미지가 강한데, 신임하는 부하를 개라고 하다니 하겠지만, 몽골에서 개는 욕설이 아니다. 애정 가득한 표현으로 개는 인간을 따르는 늑대이다. 몽골에서 늑대는 존경받는 토템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늑대는 소속과 주군이 생기면 개가 된다.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끈질긴 이들. 사납기도 하고 머리도 좋은 이들이다. 네 마리 개는 대장군으로 젤메 고아, 제베, 코빌라이 그리고 수부타이이다.

 

[젤메 고아]는 몽골 사람들 가슴에 충용의 상징이다.

‘고아’는 ‘기이한 능력을 갖고 있는 아름다운 무당’이라는 뜻이다. 젤메의 아버지 차르치오다이(대장장이 일도 하였다)는 대 샤먼으로 대를 이어 칭기즈칸 집안에 충성을 다했다. 칭기즈칸 가족이 보르칸 산에 숨어 있을 때 젤메를 칭기즈칸에게 맡겼다. 그는 1204년 나이만족의 타양 칸과 벌인 ‘알타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 이 전쟁에서 ‘4맹견’이란 호칭이 탄생한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임기응변이 능해 다양한 군사 작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칭기즈칸의 전략과 정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칭기즈칸의 ‘아바타’였다. 평시에는 칭기즈칸의 케식Kheshig(왕실친위대)을 지휘했다. 수도방위사령관과 청와대 경호실을 겸했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 함께 태어나고, 자랄 때 함께 자랐다”며 친형제처럼 지내던 그는 대몽골 제국이 출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전사한다. 수부타이의 친형이다.

 


[제베] 전투에 관한 한 프로 중 프로였다.

활을 잘 쏘는 몽골족 사이에서도 명사수였다. 원래 칭기즈칸의 적일 때, 활로 칭기즈칸 목을 꿰뚫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목을 관통한 화살촉은 훗날 유라시아 전역을 휩쓴다. 적군이었던 그를 받아들여 ‘화살촉 또는 날 끝’이라는 뜻으로 제베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답게 속도전의 대가로 빠르고 정확한 행동과 이동으로 지구상에 따라올 장수가 없었다.

 

서역 정벌에서 맹활약을 한다. 호라즘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함락시키고 술탄 무하마드를 추격한다. 추격전은 1만km 가까이 계속되었고, 무하마드는 카스피해 작은 섬으로 숨어들어 걸칠 옷도 없이 죽는다. 제베는 무하마드의 목을 들고 초원으로 귀환하던 1224년 삶을 마쳤다.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로, 전투에서 보여준 집요함은 ‘개’라는 별명에 딱 맞는다.

 

[코빌라이] 가장 덜 알려진 인물로 원 세조 쿠빌라이와 동명이인이다.

칭기즈칸이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공동 유목을 하다 갈라섰을 때, 칭기즈칸을 따랐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없지만 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와 함께 군율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임무를 받았다. 부여한 임무를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실현하였기에 건물의 뼈대처럼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1211년 금나라 정벌전에서 전사하였다.

 

[수부타이] 최고의 전략가이자 장군이다.

전쟁의 신이라 불렸다. 전차 부대를 지휘하였다. 그의 철제 전차 부대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녔다(또는 이 철제 전차 부대는 철제 무기와 갑옷, 도구 수리를 위한 이동식 대장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정통 몽골 부족이 아닌 삼림지대 부족원이었기 때문에 말을 타거나 활쏘기에 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젤메를 비롯한 칭기즈칸 수하 최고 지휘관들이 벌이는 토론과 거기서 오고 가는 질문들을 직접 보고 들었다. 10년 동안 지휘관들의 전투 계획과 그에 따른 수행 능력에 대한 사후 보고, 분석을 둘러싼 논의 과정을 통해 탁월하고 매우 실용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다. 전쟁 계획을 구체화하고 대규모로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 셈이었다. 외부 문화나 기술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고 이를 즉시 군사 전략과 전술에 반영하여 몽골군이 더 강해지는데 기여했다(이런 태도는 수부타이뿐만 아니라 몽골 지도층의 기본 태도였다).

 

제베의 부관이었다가 금세 제베와 같은 등급의 대장군으로 성장했다. 제베와는 전설적인 콤비를 이뤘다. 제베는 기동전의 명수였고, 수부타이는 회전(회전會戰은 두 군대가 적당한 장소에 결집해 총력 대결을 펼치는 전투로, 특성상 국운을 건 모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명장이라도 일생 5회 이상 회전을 경험하기 힘들다)의 천재였다. 결정적인 대전투의 설계자로 전쟁의 큰 그림을 그리고 현실화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칭기즈칸 사후 유럽 정벌의 실질적인 사령관이었다. 1221년부터 러시아 정복을 주장하고 추진한 인물로 단 2만 병력으로 쉴 새 없는 기습전을 통해 러시아를 단기간에 초토화시켰다. 1236년 마침내 12만 명이 동원된 러시아 본 원정에서 3년 만에 러시아를 정복하였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실패한 러시아 정복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정복한 나라는 32개국에 달하고, 61번 회전에서 승리한다. 그가 이룬 제국의 영토는 헝가리 국경부터 동해까지, 노브고로드 외곽으로부터 페르시아만까지, 바이칼호부터 양쯔강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었다. 당대 중국인들은 그를 ‘신의와 불변의 장수’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는 대몽골제국의 3대에 걸친 칸-칭기즈칸, 오고타이칸, 구육 칸-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특히 수부타이는 제베와 함께 호라즘 술탄 무하마드 추격전을 통해 몽골의 복수의 끝판을 보여주었다. 그는 칭기즈칸에게는 더없이 충직한 부하였는데, 서역을 정벌하던 그에게 칸이 귀환 명령을 내렸다. 뚱뚱한 수부타이는 1주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칸에게 돌아왔다. 말의 반동을 견뎌 내려고 자기 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였다. 72세로 다뉴브 강가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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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12. 01:00




 

칭기즈칸의 사람들

4준四駿

 




칭기즈칸은 희대의 영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이룬 개척의 역사를 혼자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에게는 함께 열망을 품고 온몸을 불사른 동지들이 있었다. 칭기즈칸은 남의 재능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데 어떤 편견도 없었다. 출신과 계급에 관계없이 오직 능력 순으로 선발했다. 여기에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칭기즈칸의 성격 덕분에, 그의 부하들은 빨리 결과를 보여 줘야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실력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칭기즈칸은 유달리 너커르(평생동지), 안다(평생친구)가 많았다. 칭기즈칸에게 너커르는 부하나 참모가 아니라 동지였다. 동지들끼리 뭉쳐서 일하지만 그래도 단일 창구가 필요한데, 칭기즈칸은 그런 유형의 리더가 되기를 희망했다. 오갈 데 없는 사람, 어려운 사람, 꿈은 품고 있지만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칭기즈칸의 제국 건설의 주역이 되었다.

칭기즈칸 곁에는 전설로 기록되는 ‘네 마리의 준마駿馬’ 와 ‘네 마리의 개’라는 여덟 명의 인물이 있었다. 이 이름은 칭기즈칸과 싸웠던 적들이 붙여 준 것이다.

 

네 마리 준마는 참모를 겸한 장군이다. 보르추, 무칼리, 칠라온, 보로쿨을 말한다.

 


<보르추>

는 칭기즈칸이 말을 잃어 버렸을 때 그를 도와 말을 찾아준 부잣집 막내아들 출신이다. 칭기즈칸은 신세를 진 대가로 말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보르추는 단호히 거절했다. “벗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벗의 의무다. 도움의 대가로 말을 받는다면 그가 무슨 벗이겠는가.”

 

물질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만남이며, 거짓과 배신이 춤추는 땅에서 믿음과 의리가 깃발을 올리는 첫 발자국이었다. 10대 칭기즈칸은 그 관계를 신성하게 여겨 다음과 같이 속마음을 전했다. “그림자 말고는 다른 친구가 없을 때 친구가 되어, 나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꼬리 말고 다른 채찍이 없을 때 채찍이 되어 나의 심장을 편안케 했다.”

 

칭기즈칸 최초의 너커르로 제국의 공동 2인자이자 최고 개국공신이다. 젤메와 마찬가지로 칭기즈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로, 사적으로는 격의 없는 친구 사이였다. 칭기즈칸은 보르추에게 위험한 임무를 맡길 때 자신이 끔찍이 아끼는 애마를 내어 줄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칭기즈칸은 몽골 통일 후 의리의 사나이 보르추에게 알타이 부근 만호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고, 보르추는 칸 옆에서 거침없는 충고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무칼리>

는 노예 씨족인 잘라이르 출신으로 주르킨족 노예로 살다가 칭기즈칸이 주르킨을 정벌하자 부하가 되었다.

 

프랑스 학자 펠리오와 앙비스는 그가 고려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전투에 뛰어난 재능도 없고 성과를 내는 데도 느렸지만, 정밀하게 사고하는 능력이 있었다. 신중하고 끈기가 있어서 장기적인 전략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몽골초원 통일의 분수령이 된 옹칸과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선두에 서서 돌격해 들어갔다. 대몽골제국 총사령관이 되었고, 칭기즈칸이 내린 결정도 바꿀 수 있고, 9가지 죄 말고는 어떤 죄도 물을 수 없는 공신 중의 공신이 되었다.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정벌한 뒤 그에게 권權 황제라는 칭호를 내려 황하 이북을 통치하게 했는데, 고려 사람이라면 권씨였을지도 모른다. 무칼리는 너무 열심히 싸우다 탈진하여 1223년 봄, 53세에 풍운의 삶을 접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과로사 할 정도로 충성을 다했다.

 

<칠라온>

칭기즈칸이 타이치우드족에 포로로 있을 때 그를 도와준 소르칸 시라의 아들이며 사적으로는 친구 사이이다. 형제 칠바이도 칭기즈칸의 중요한 부하였다. 용맹한 칠라온은 한번 문 목표물은 절대 놓지 않았다. 한번은 전투 중 낙마하자 적들이 덤벼들었다. 초원 전투에서 낙마하고 보병으로 싸운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칠라온이 창을 고쳐 잡고 적 기병과 맞서 싸우니 기세에 밀려 적들이 달아났다고 한다.

 

금나라 정벌에 참가했다가 죽었다. 훗날 칭기즈칸이 포상할 때, 칠라운의 아버지 소르칸 시라가 아들들을 대신해 천호장을 제수받는다.

 

<보로쿨>

4준마 중 가장 젊다. 칭기즈칸이 주르킨족을 정벌할 때 적진에서 거둬들인 전쟁고아였다. 칭기즈칸은 어머니 후엘룬이 그를 거둬 양자로 삼게 했다. 즉 칭기즈칸과 의붓형제가 된 것이다. 방패를 들고 칭기즈칸을 호위하는 측근 중 측근이다. 칭기즈칸은 그를 동생처럼 여겼다. 그는 칸의 음식을 맛보는 사람(부케울)과 요리사(바우르치)역할을 했다. 전투 이상으로 중요한 임무로, 급한 원정 중에도 비오는 밤에도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도 늘 음식을 제공해 칸의 속을 든든하게 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와 절친한 사이였다.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았지만 요절하였다. 그의 딸 우시진은 원 세조 쿠빌라이칸의 아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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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11. 01:00




 

 

기즈칸의 인품과 미덕

 

 




 

칭기즈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제국을 건설한 삶의 과정을 통관해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대업을 이뤄 냈는지 그려볼 수 있다. 칭기즈칸의 인품과 자질, 상황에 대응하는 자세와 미덕 등에 대해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련을 견디고 이겨내는 강인함이다. 칭기즈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 시절의 고난을 겪으며 몸에 밴 테무친의 고독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어진 모든 악조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사람으로 그가 지닌 미덕을 말이다.

 

그는 드넓게 트인 대지 같은 마음을 지녔다. 개방적 성격과 행동은 그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아내 보르테가 약탈당했을 때 자신의 힘없음을 원통해하며 참담한 현실을 슬퍼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력 확장의 천재일우 기회로 활용하고,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적의 아이를 낳았을 때도 운명을 감수한다. 그리고 나그네라는 뜻의 몽골어 ‘주치!’라고 맏아들 이름을 지어 준다. 적의 아이조차 자신의 아내의 뜨거운 자궁에서 나왔기에 신이 주신 손님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위기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정신은 불행을 완벽하게 뒤엎는 기능을 한다. 그는 불행 앞에서 분노나 복수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았다. 좌절에 빠져 넋을 놓지 않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힘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명을 직시하고 운명과 싸운 진정한 영웅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신에게 무엇이 없고, 무엇이 필요하며 어디를 향해 가고 어떻게 그 길을 내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였다. 인내, 포용력, 냉정함을 가슴에 길렀다. 모친인 후엘룬은 테무친의 장점을 “테무친은 가슴에 재능이 있다”고 했다. 소박하지만 확고한 장점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이는 다정한 사람,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가 외유내강 형 지도자였음을 말해 준다.

 

둘째, 부족의 운명을 사랑하여 구원해 내는 모습이다. 칭기즈칸의 보르치긴 씨족은 가련하고 위기에 처한 굶주린 늑대와 같은 부족이었다. 언제라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가혹한 환경 속에 내버려진 채 지도자도 없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이 연약하고 분열된 부족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과정, 그게 바로 테무친이 칭기즈칸이 되는 과정 속에 있었다. 칭기즈칸은 시련의 악순환을 끝매듭 짓고 평화를 가져온 왕 중의 왕이었다.

 

셋째, 평화를 위해서 훌륭한 군인이 되어야 했다. 칭기즈칸은 유목민 사회를 통합하고 정착민의 성벽을 무너뜨린 대전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전쟁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최대로 활용하는 집단이 승리하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효율적인 군사 제도와 행정 제도를 중시하였다. 유연한 자세로 정복지 포로들을 언제라도 끌어들여 보충하였다. 군대는 표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토와 인구가 확장되어도 전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대와 전쟁의 역사는 칭기즈칸 이후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넷째, 제국을 건설한 후 위대한 정치인이 되었다. 지도자 칭기즈칸은 유목민의 틀 안에서 벗어나 사려 깊은 심성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균형 잡힌 사람이자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었다. 행정가의 자질도 보여, 법령을 선포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이끌어 냈다. 또한 세종대왕처럼, 위구르어를 약간 수정하여 몽골인의 민족 문자가 되게 했다. 칭기즈칸 일가 3대에 걸친 통치로 유라시아는 보기 드물게 안정을 누렸다. 상업을 진흥시켰고, 역참제를 통해 문서와 서신, 물자들이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하여 진정한 동서양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했다. 이로 인해 14세기에는 위대한 여행가들의 대륙 여행이 가능해졌다.

 

다섯째, 신앙인으로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들 자신은 유일신인 천신을 숭배하였다. 천신을 텡그리라 하였다. 유일신을 믿었다고 해서 다른 하위의 신들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신과 접해서 그 뜻을 알아내는 샤먼을 두었는데, 그중 우두머리는 ‘천상에 가까운 자’란 의미로 텝 텡그리라 하였다. 칭기즈칸은 그의 곁에 자신이 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 코코추라는 샤먼을 두어 의견을 경청하였다. (그를 따랐던 뭉릭의 넷째 아들은 무당이며 이름이 텝 텡그리로, 텡그리의 메신저가 칭기즈칸 옆에 있다는 의미로 당시 사람들은 인식했다)

 

칭기즈칸은 영원한 푸른 하늘의 의지를 받드는 샤머니즘이란 의미로 ‘텡그리즘’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언제나 텝 텡그리, ‘푸른 하늘’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푸른색靑色을 숭상하였고 연관을 짓기도 하였다. 쫓기던 아이 시절, 숨어 지낸 호수는 푸른 호수였고, 그의 군대는 푸른 군대, 모두 푸른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그 푸른 하늘의 뜻으로부터 그의 성품과 기질이 나온다. 우주 삼라만상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우열의 층차가 없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모두 푸른 하늘의 뜻이니…. 이런 종교적 인식에 영향을 받아 칭기즈칸은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관용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칭기즈칸은 세상 사람 누구나가 각자의 신을 알아서 믿을 수 있도록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그의 통치 아래서 모든 종교는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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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10. 15:50




 

 

 

동서통일제국을 건설한 최초의 세계인

칭기즈칸의 장과정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 -몽골비사

 

수많은 별을 가진 하늘도 돌고 있었다. 모든 나라는 우리를 배반하였다. 편안히 침대위로 들어가 자지도 못하고 서로 노략질했다. 푸른 풀로 덮인 대지도 구르고 있었다. 온 나라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편안히 이불 속에 들어가 눕지도 못하고 서로 공격했다. - 몽골비사

 

단기 197년 서력기원 BCE 2137년, 갑신 단군조선 4세 오사구 단군 재위 원년에 아우皇弟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는데, 혹자는 지금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 말한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

 

 

칭기즈칸Chingiz Khan(成吉思汗, 1162~1227)

1162년 - 오논 강 유역 숲에서 탄생, 보르치긴족으로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1171년 9세 - 아버지 예수게이 사망, 두 엄마와 7형제가 떠돌이 신세가 됨

1178년 16세 - 부르테와 결혼

1189년 27세 - 씨족, 부족 회의인 쿠릴타이를 소집해 칸의 칭호를 얻음

1196년 34세 -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둠

1204년 42세 - 몽골 고원 통일

1207년 45세 - 서하(탕구트) 복속시킴

1219년 57세 - 호라즘 원정

1223년 61세 -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 건설

 


12세기 초 몽골 고원은 언제나 흉흉한 긴장의 바람 속에 놓여 있었다. 땅에서 생산된 것으로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것을 뺏어야 했고, 뺏기 위해 죽여야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해서만 겨우 살아가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기 위한 싸움은 한층 더 치열해져 갔다. 당시 몽골 고원 절반은 광활한 대초원 지대였지만, 나머지는 원시림과 호수, 그리고 반半 사막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유목 부족들 간에 거주 지역에 따라 사육하는 가축의 종류와 생활양식에 차이가 있었다.

 

몽골족은 칭기즈칸의 증조부인 카불칸 때 몽골 울루스ulus라는 정치적 독립체를 결성하여 인근 타타르와 금나라 변방을 침입하기도 하였다. 결국 몽골족은 금나라와 타타르족의 집중 견제로 2대 칸인 암바가이(보르치긴 씨족이 아닌 타이치우드 씨족 전사)가 사로잡혀 당나귀 형틀에 못 박혀 죽는 사건이 있었다. 뒤를 이은 키야트 씨족 출신 괴력의 용사 코톨라는 13번에 걸쳐 타타르족과 싸웠지만 패배하고 몽골 울루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때 몽골고원에 개입한 중원의 금金나라 세종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잔인한 대북방 정책을 감행한다. 몽골 남자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는 금나라의 감정減丁 정책은 몽골족들에게 골수에 박힌 원한을 심어 주었다. 이는 금나라 여진족이 자신들의 확고한 세력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3년마다 어김없이 벌인 유목민 학살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냉혹한 부족 궤멸 위기의 와중에 몽골족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자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강철은 시련 속에서 단단해진다

1203년 테무친(鐵木眞)이라는 키는 작고 눈은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몸에서는 말과 낙타의 노린내가 배어 있는 중년의 사나이가 몽골 동부지역에서 최강 케레이트 부족을 꺾고 패자가 되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테무친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테무친은 몽골부 보르치긴 씨족의 수장인 예수게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테무친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직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쥔 채였는데, 주먹 안에는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그것도 새끼 양의 복사뼈만 한 핏덩이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용기, 전투, 그리고 승리의 표시로 해석되었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족 족장인, 테무친(바다나 호수처럼 ‘넓게 퍼진 상태’를 뜻하는 중세 몽골어)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인간 테무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타고난 두뇌는 그저 평균치 정도였고, 어린 시절 개를 무서워하기도 하는 소심한 겁쟁이였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지 못했고,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도 없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평생을 생활했으면서도 외국어는 구사하지 못했고, 최고 수준의 학자에게 집중 과외를 받았지만 문맹이었다. 그의 가족은 문맹에서 벗어났는데도 말이다. 무쇠처럼 단단한 성품의 남자도 아니었다. 자주 울었고, 특히 여자들의 호통에 정신을 번쩍 차리기도 하고 판단력도 뛰어나지 못했다. 때로는 의심하고 화내기도 하였다.

 

아버지 예수게이는 주변 타타르족과 대립한 용사였다. 예수게이는 테무친이 9살 무렵(혹은 13세라고도 한다) 혼인을 위해 옹기라트족인 보수쿠르의 데이 세첸을 방문하고 그의 딸 보르테와 혼인을 약속하고 돌아오는 도중 숙적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당했다.

 

부친의 죽음은 테무친에게 닥친 역경의 시발점이었다. 초원에서 정치적 권력이란 어떤 확립된 제도에서 발생하기보다는 개별적 지도자들의 인물 됨됨이에서 나온다. 즉 강한 자 아래에 모이게 되어 있는 구조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들은 분열하였다. 친족들은 테무친의 가족들을 버리면서 재산인 가축들도 모두 빼앗아 갔다. 이는 다가올 겨울에 굶어죽으라는 것이었다. 오논 강

(★)

가는 초원에서도 북쪽 끝에 위치한 곳이다. 추위는 더 혹독하고 먹거리는 부족했다. 하지만 이 가족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테무친 일가는 강철 같은 여인 후엘룬

(★)

을 중심으로, 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유목민의 일상 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했고 풀뿌리와 생선, 들쥐 등으로 연명하였다.

 

테무친은 연이어 지옥 같은 포로 생활에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고,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가 하면 화살에 목이 꿰어 죽기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는 몇 번의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절대적인 위기에 몰렸을 때는 불과 19명의 동지만 살아남았고 그들은 초원 끝 흙탕물로 갈증을 풀며 테무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부족은 이미 와해되었기에 테무친은 부족을 따지지 않고 조금씩 세력을 모으며 성장해야 했다. 그러면서 혈연과 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능력과 인망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인재를 평가하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이런 경험들은 테무친에게 씨족 중심 사회가 아닌 동료들의 충성심과 우정을 더 믿게 만들었다.

 

극렬한 고난을 겪고 나면 그 고난이 트라우마로 남아 나쁘게 작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난이 더 큰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사람도 있다. 테무친은 후자의 전형이었다. 그는 믿을 사람과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친구들과의 우정에 주목했고, 진정 의지해야 할 가치는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한 우정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믿음은 혈연이나 지연, 종교 같은 선천적이거나 이념적인 진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마련이다. 건강한 개방성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부족의 분열과 배신 사건으로 테무친은 조직 내부에서 불화와 불만이 있는 자, 이탈자를 탐지해 내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역경은 테무친에게 배신하는 자와 의리를 지키는 자가 있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많이 얻어야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래서였는지 테무친은 이후 한 번도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 더불어 실제 조직 경영에 있어 칭기즈칸이 등용한 전투 지휘관의 조건은 용맹함, 두뇌, 인내심과 현장판단력 등의 능력 위주였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7. 03:00




 

 

선조말

천주교유입에 대한 우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나 할까? 민중들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금수와 같은 삶으로 전락하게 된 조선사회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학의 유입이 그것이다. 천주학은 조선왕조의 윤리의식을 근본부터 어지럽히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천주학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중국을 통해서이다. 당시 천주학은 서학의 가톨릭을 지칭하는데, 천주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천주학은 로마 가톨릭의 예수교 선교자인 마테오리치Matteo Ricci(1552-16010)가 중국에 들어와 서교西敎를 포교하게 되었고, 포교의 일환으로 리치가 중국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를 펴낸 데서 연유한다. 조선 선조 말년(1608년)부터 『천주실의』를 비롯한 많은 서양 책들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오면서 천주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천주학이 퍼지기 시작하자 1783(정조 7년)에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사신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게 됐으며,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천주교회로 찾아가 교리를 익히고(1784년), 그 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됐다.

 


천주교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실제적으로 중국에서 선교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천주 개념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후 재주 있는 많은 젊은이들은 천주교를 믿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조선왕조를 지태해온 유교의 사회질서 체제를 위협하고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1860년(경신)에 글을 지을 당시에 수운은 서학을 표방하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이 무력으로 동양을 침범하고 강제로 국권을 침탈하는 것을 보고 천주학에 대한 위력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주교가 세상을 구할 올바른 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깨닫게 된다. “지난 경신년에 이르러 전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양인들은 천주의 뜻으로 부귀는 바라지 않고 온 세상을 처서 빼앗아 (서학을 믿는) 교당을 세워 서도를 행한다고 하더라. 나는 또한 ‘그럴 수 있을까 어찌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글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천주학에 대한 수운의 두려움은 다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운은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칭하고, 학을 천주라 칭하며, 교를 성교라 하니, 이는 천시를 알고 천명을 수용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를 하나하나 열거해 보아도(그들이 펼치는 서학의 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알 수 없는 까닭에(그들이 이렇듯 강성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나 역시 두려워하여 늦게 태어난 것이 한스러울 즈음에”라고 그는 말한다.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는 천주학의 도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으나 천주학 또한 서양인들이 천시에 따라 천명을 받아 나온 것이므로 그 위력이 대단할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그가 “서양 사람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 그 조화를 부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언급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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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11. 6. 02:00




 

 

영국 사람들의 사랑방,

펍(Pub. Public House)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영국 어디에서나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펍Pub이다.

펍을 우리나라의 것으로 말하면 선술집 정 도라고 할 수 있다. 말이 술집이지 펍은 단 지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다. 영국 사람들 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비즈니스를 위해, 쉬기 위해, 때로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펍 을 찾기도 한다. 특히 시골의 펍은 마을의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영국에서는 신문을 배달하지 않기 때문에 신문을 사기 위해 서는 매일 주변 가게에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펍을 통해 온갖 소식을 접할 수 있 다. 펍은 여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야 말로 펍은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하나로 묶는 일상적 생활공간이다. 펍을 중심으 로 생활문화가 소통된다.

 


펍에서는 맥주는 물론 와인이나 쥬스 및 탄산음료, 그리고 몇 가지 음식도 판다. 그 러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것은 맥 주이다. 맥주는 비터, 라거, 스타우트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영국 사람들은 쓴 맛 이 강하고 약간 진한 색깔인 비터를 가장 즐긴다. 맥주는 대개 안주 없이 서서, 또는 둥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마시는 경우 가 많다. 우리나라 술집과 달리 웨이터가 없기 때문에 팁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날 씨가 좋을 때 펍 밖에서 마시는 맥주는 또 다른 맛을 낸다.

 

500cc 조금 넘는 맥주 한 잔을 들고, 안주 없이 이따금은 싼 감자튀 김을 안주로 삼아, 날씨를 시작으로 축구 나 정치 얘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영국식 당구인 스누커를 치거나 스카이 채널을 통해 축구를 보기 도 한다. 특히 라이벌 축구팀과 경기가 있 을 때면 펍은 온갖 응원의 고함소리로 들 끓는다.

 

펍에서 가장 많이 보는 음식은 피쉬 앤 칩 스Fish and Chips이다. 피쉬 앤 칩스는 대구나 가자미 등 흰살 생선을 기름에 튀겨서 소 금과 식초를 뿌린 피쉬와 다소 굵게 썰어 튀긴 감자를 곁들인, 영국의 가장 대표적 이고 싼 서민 음식이다. 어느 펍을 가더라 도 이 메뉴는, 가격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만,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영국에서 서민들을 많이 만나려면 펍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펍의 출입이 누구 에게나 항상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14살 이하의 청소년은 펍에 갈 수 없으며, 주로 남자들로 붐빈다. 개방 시간은 대체 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그 리고 잠시 문을 닫았다가 오후 5시 30분 부터 저녁 10시 30분 또는 11시까지 문을 연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5. 17:33




 

 

영국의 국교, 성공회

(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

 

 

 

영국에서는 두 가지 기독교파가 국교로 인 정되고 있다. 성공회와 스코틀랜드의 스코 틀랜드 장로교가 그것이다. 국교가 있다고 해서 여타 종교를 배타시하는 것은 아니 다. 영국은 현재 모든 사람이 종교의 자유 를 누릴 권리를 가진 다종교 사회이다.

영국의 주된 종교는 기독교이지만 세계 종 교 대부분이 있다.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 교를 믿는 다소 규모가 큰 공동체도 있고, 유대교나 불교와 같은 소규모 공동체도 있 으며, 신종교 추종자들도 있다. 또한 종교 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모든 형태의 종교적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잉 글 랜 드- 웨일 즈 에 는 기 독 교 도 가 33,243,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9%를 차 지하여 가장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지난 10년 사이에 신도가 준 유일한 종교이며, 무려 12.4%, 약 4,095,000명이나 줄어들 었다. 그 뒤를 잇는 종교 인구를 보면, 무 슬림 2,706,000명, 힌두교, 시크교, 유대 교, 불교 순이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무종교 인구가 14,097,000명으로, 2001년 에 비해 6,388,000명, 비율로는 10.3% 증 가하였다는 점이다.

 

기독교도를 지역적으로 보면 노스 이스트 지역에 가장 많고 런던에 가장 적게 산다. 그러나 런던에는 시크를 제외한 무슬림 (1,000,000명), 힌두(411,000명), 유대교(149,000명), 불 교(82,000명) 등 대부분의 개별 종교인구가 가 장 많이 살고 있다. 시크교도는 약 30,000 명이 사는 웨스트 미들랜즈에 가장 많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가장 많은 지역은 웨 일즈, 사우스 웨스트, 이스트, 사우스 이 스트, 이스트 미들랜즈의 순이다.

 

기독교 내의 신도 수 변화 양상을 보면 이런 경향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보아 국교인 성공회 교도가 지 배적이고,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순이다. 또 특징적인 점은 기독교가 점차 세속화 경향 을 보인다는 것이다. 총인구에서 종교 인 구가 차지하는 비율,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 교 회 참여자들은 나이든 여성들이 많다.

 

 


영국 국교회라고도 하는 성공회는 1534년 헨리 8세가 가톨릭 교회와 손을 끊고 스 스로 성공회 수장이 됨으로써 영국의 국 교가 되었다. 한때 열렬한 로마 교황의 추 종자였던 헨리 8세는 결혼을 6번이나 하 였는데, 자신의 결혼과 이혼 문제에 로마 가톨릭이 개입하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되 자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만들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인 첫 왕비 커서린의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광신적인 가 톨릭교도여서 아버지가 세운 성공회를 부 정하고 교황권을 재확인하여 잉글 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고 했 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와 신교도들을 무 차별 학살하였다.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558년에 메리 여 왕이 자녀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것은 헨 리 8세와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사이에서 난 딸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녀는 다시 성 공회 부활을 선언하고 가톨릭과 신교도를 박해했다. 성공회는 헨리 8세에 의해 시작 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고, 지리한 종교 분쟁도 막을 내렸다.


헨리 8세의 이혼 소송과 성공회의 탄생은 명목상으로는 바람둥이 군주의 이혼 문제 때문에 불거진 분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시의 최강 스페인과 교황의 간섭에서 벗 어나기 위한 영국의 정치적인 종교 독립이 었다. 성공회는 구교와 신교 사이의 극 단적인 것을 지양하고 서로의 장점을 포용하려고 한다. 또한 최초의 교회 분열인 동서교회(로마교회와 정교회)의 분 열 이전의 초대교회의 신앙 을 지킨다. 성공회는 성서 의 최상성, 근본적 교리 와 신조를 강조하면서 가톨릭적 의례와 직 제 등을 유지한다.


영국국교회는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특정 의무를 지니면서 동시에 특권 또한 부여받 는다. 영국의 왕은 반드시 성공회 교인이어 야 하고, 교리를 준수할 것을 약속하며, 모 든 성직자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는 30개의 주교 구 역을 관장하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14개의 주교 구역을 관장하는 요크 대주교이며, 그 밖에 런던, 더럼, 윈체스터 등을 관할하 는 24명의 주교가 있다. 대주교를 포함한 주교들은 모두 총리의 제청으로 국왕에 의 해 임명되며 상원 의원을 겸직한다.


성공회 신도는 2000년 현재 세계 166개 국가에서 약 9,960만 명에 이른다. 1990 년에 비하면 약 1,145만 명이 늘어났다. 2) 우리나라에는 1890년부터 선교가 시작되 었으며, 현재 전국에 100여개 교회, 약 5 만 명의 신도가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1. 4. 02:00

 






최수운의 시대

조선말의 내우외환內憂外患

 






수운은 유명한 유학자의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은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단봇짐으로 떠들어온 과부를 만나 수운을 낳았던 것이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과 기백이 비상했던 것은 물론이고, 비범한 안광을 가진 남다른 용모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자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부의 사랑과 귀염을 받으면서 유년시절부터 선비로 자랐고 상당한 학식도 쌓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통정할 수 없는 번민과 고독한 심정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유소시절인 7세 때쯤에 생모를 여읜 후, 16세 때에 부친인 근암공도 별세하여 3년 상을 마치자 18세에 집을 나가 호협들과 교류하면서 활도 쏘고, 술도 마시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21세(1844년)부터 31세(1854년)까지 무려 10년의 세월 동안을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게 된다.

 

수운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세태를 직접 목도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가 전국을 주유周遊했다는 사실은 천주의 가르침에 대한 화답和答을 노래한 시詩, 즉 「화결시和訣詩」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다 돌아보니 물이면 물, 산이면 산 모두를 다 알겠더라”. 그리고 그가 세태를 목도하게 됐다는 사실은 「권학가」의 “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을 「도원기서」에서는 ‘주유팔로周遊八路’라는 말로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세태를 둘러보면서 민중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주유팔로의 과정에서 수운은 무엇을 깨닫게 되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많은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했던 질서 체제의 붕괴와 열강 제국주의 침탈에 의한 국권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환이었을 것이다. 우선 이러한 문제를 수운이 얼마나 심각하게 통감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두려움이 수운의 정신을 에워싸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수운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수운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내적으로는 말 그대로 사회질서를 지탱해온 유교적 이념이 무너져 인심과 풍속이 없어진 사회였다. 「권학가」에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강산江山구경 다던지고 인심풍속人心風俗 살펴보니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있지마는 인심풍속人心風俗 괴이怪異하다. 세상世上구경 못한인생人生 출생이후 첨이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왕조는 지배층의 강요와 유교적 사회질서로 유지해왔던 윤리적인 가치체제의 기강이 무너져 많은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평생平生에 하는근심 효박淆薄한 이세상에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과 부불부父不父 자부자子不子를 주소간晝宵間 탄식歎息하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누구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을 따르지도 않고 돌보지 않으며 각기 제 맘대로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로부터 조선사회는 지배계급의 탐학과 부패로 물들어 있었고, 그로 인해 어느 성현 군자가 나와도 구제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몽중노소문답가」의 “매관매작賣官賣爵 세도자勢道者”, “전곡錢穀쌓인 부첨지富僉知”, “유리걸식流離乞食 패가자敗家者” 등이나 “아서라 이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不足施요 공맹지덕孔孟之德이라도 부족언不足言이라”는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은 궁핍과 핍박을 받아 왔으며, 유리걸식이 일상이었고, 일반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운이 살았던 조선사회의 민초들은 그야말로 금수禽獸 같은 삶 자체였다.

 

조선 왕조는 대외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당시 지구촌의 세태는 서양의 몇몇 열강 제국주의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상황이었다. 서양 제국주의는 18세기경에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갖추면서 탄생한다. 몇몇 국가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힘입어 정교한 기계를 발명하고, 신무기로 무장한 채 중상주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특히 서양의 제국주의는 동양을 넘보기 시작하면서 극동에까지 들어와 무력으로 국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840-1842년에 중국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은 그 시발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중국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충돌이 잦아지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7년에 광저우를 점령하여 텐진조약을 강요했고, 1860년에 청조가 조약의 비준을 반대하자 북경을 점령하기도 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나 할까? 중국이 그러하자 이어 조선왕조의 상황도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832년에는 영국 상선이 서해안에 들어와 통상조약을 체결을 요구하였고, 1845년에는 영국 군함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하였으며, 1850-53년에는 미국과 러시아 배들이 조선 연안에 출몰하여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왕조를 위협하는 서양 제국주의는 수운에게 국권이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겨주게 됐다. 이에 대한 수운의 생각은 “괴이하고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세간에 흉흉하게 떠도는데, 서양 사람들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져서 그 조화의 힘을 부리는 일에 있어서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고, 또 무기로써 공격하여 싸움을 하면 그 앞에 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니, (이와 같이 강성한 서양의 힘에) 중국이 망해버리면 어찌 우리나라도 따라 화를 당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수운은 조선의 정세가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국권이 풍전등하에 몰릴 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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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2017. 11. 3. 20:46


 



 

최수운이 동학을 창교한 배경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세계열강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동방 조선의 땅에서 1824년에 태어나 1860년에 득도得道하여 절대자인 천주天主로부터 천시天時에 맞는 도를 받아 내렸다. 이로써 그는 한민족의 새로운 종교, 즉 동학東學을 창교한 것이다.

 

동학의 창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수운이어야 했는가? 중요한 것은 절대자 천주가 지극 정성으로 대도를 구하는 수운을 만났고, 그로 하여금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했다.”(『도전』2:30:14)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천명과 신교를 받아 내린 새로운 대도에 대하여 수운은 “나의 도는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예전에도 듣지 못한 일이요, 지금도 (어느 도와도) 비길 수 없고 예전에 (어느 도와도) 비길 수 없는 법이다. 닦은 사람은 허한 것 같으나 실지가 있고 듣는 사람은 실지가 있는 것 같으나 허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수운이 제시한 도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개벽으로 열리는 새 시대의 시운에 맞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이다. 무극대도는 절대자 천주의 도이다. 그는 각고의 수행 끝에 득도하여 절대자 천주로부터 다시개벽의 도법을 직접 내려 받아 새로운 종교, 동학을 창교하게 됐던 것이다.

 


 

수운은 『용담유사』「교훈가」에서 “유도불도儒道佛道 누천년累千年에 운運이 역시亦是 다했던가”라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래 전에 유교, 불교, 도교가 창궐하여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수운이 태어난 조선의 백성들은 오래 동안 유교, 불교, 도교 등을 신앙해 왔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수운은 기존의 신앙체계를 다 버리고 새로운 종교인 동학을 창교하게 된 것이다. 결정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물론 여러 직접적인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조선왕조가 처했던 내우외환內憂外患과 천주학天主學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유입이 도화선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수운은 젊은 시절에 전국을 돌아보면서 민중들의 삶을 둘러보고 세태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당시의 조선사회는 열강 제국주의 침탈로 국권의 존립이 붕괴일로에 놓여 있었고, 조선왕조를 지탱해온 유교문화의 사회질서가 붕괴되어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음을 체험하게 된다. 조선의 민중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의식과 극도의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수운은 민중들을 태평곡 격양가가 울려 퍼지는 세상에서 살도록 해야겠다는 소명의식, 즉 새 시대의 종교문화를 창도해야하는 천명天命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수운이 곧 동학을 창교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1. 1. 20:49





영국인의 문화 특성






영국인들은 기독교Protestantism 사상을 바탕 으로 하는 근면성과 정직성이 있고 실용 적이며 매우 검소한 모습을 보인다는 평 을 받는다. 오래된 것도 잘 보전하고 아껴 쓰며 허례허식이나 명분에 얽매어 쓸데없 는 낭비를 하지 않는다. 기존의 전통과 연 속성을 중시하는 보수적 성향Conservatism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혁명보다는 점진적 변화를 선호하고 참을성이 강하며 냉정하 고 과묵한 감정의 억제Inhibitions 성향도 특징 으로 꼽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영국의 상징들로는 흔히 버버리 코 트, 패딩턴 맥주, 얼 그레이 차, 런던 택시, 웨그우드Josiah Wedgwood 등을 든다. 여왕의 경우 현재 머리 스타일을 50년 간 유지하 고 있고 찰스 왕세자는 한번도 청바지 차 림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 영국 통신업체 BT가 기존의 붉은색 공중전화 박스를 노란색으로 교환하려고 했을 때 조직적인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친 것도 그 러한 국민성에 기인한다.




또한 방어적인 프라이버시Privacy 중시 풍토 가 강해서 남에게 쉽게 자신의 집 방문을 허용치 않으므로 영국사람의 집은 하나의 성城(castle)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영국인을 대체로 거만하고 차갑고 쉽게 사귀어지지 않는다고 평하는 말은 이러한 특징들 때 문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질서의 규칙을 잘 지키는 장점을 갖고 있 으며, 문학 분야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 아서 코난 도일, 조앤 롤링 등의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한 예술적 성향 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보수적 성향과는 다른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외향성Outwardness 도 갖고 있어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힐러리 경, 남극을 탐험한 아문젠 등이 모 두 영국인이었으며 대영제국 건설의 과거 역사도 이러한 외향성이 바탕이 되어 이룩 된 것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영국인들은 규칙적인 성향Idiosyncratic이 강하다. 약속을 정할 때는 미리 상당한 시간을 두고 정하며, 휴가도 보통 1년 전쯤에 계획을 잡고 매년 같은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매 주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식사하는 습관, 비가 오더라도 매주 수요일에 세탁 을 하는 습관 등이 그런 유형에 속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31. 20:49






영국 경제와 한국과의 관계





영국은 세계에서 두 손 안에 드는 경제대 국이다. 비록 지금은 해가 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도 금융산업을 비 롯한 일부 산업은 세계 어떤 국가보다 경 쟁력이 강하다. 영국의 GDP는 2조 4,526 억 달러(2012 IMF 기준)로 세계 6위이다. 1조 1,635억 달러로 세계 15위를 차지하는 우 리나라와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다. 1인당 GDP는 38,891달러(2012 IMF 기준, 세계 24위)이다. 『포츈』지에서 선정한 2012년 세계 500대 글로벌 기업 보유 현황을 보면, 영국은 26 개 기업이 포함되어 6위를 차지하였다. 이 는 13개가 포함되어 8위를 차지한 우리나 라와 비교된다.


2011년 기준 교역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는 무선전화기, 선박, 승용차, 집적회로 반 도체, 금 등을 49.69억 달러 수출하였고, 강반제품, 의약품, 주류, 합성수지 등을 38.18억 달러 수입하였다. 영국은 우리나 라에게 수출입에 있어 대략 20-30위권의 교역국이다.



우리나라와 영국의 첫 만남은 19세기 말 이었다. 외세의 개방 강요와 조선의 개화 정책에 따라 조선은 여러 국가들과 조약 을 맺는데, 그 하나로 두 나라는 1883에 한-영 우호통상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어 진 영국과 우리의 만남도 결코 아름다운 만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계 각지에 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 의 조선 진출에 위기를 느껴 함대를 앞세 워 전라도에 있는 거문도를 강제적으로 점 령(1885년)하였기 때문이다. 교역이 거의 없 었던 두 나라가 가까워지게 된 것은 일제 로부터 해방된 이후 1949년에 양국이 수 교를 맺고, 영국이 한국전쟁에 유엔군으 로 참여한 이후부터였다. 영국은 북한과 도 2000년 말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 데, 2001년 7월에는 주 북한 영국대사관 이, 2003년 4월에는 주 영국 북한대사관 이 개설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8. 03:00






 

영국 인종의 구성

 

 

 




영국은 땅덩어리가 한반도의 1.1배로 약 244,000㎢이다. 브리튼 섬의 남부를 차 지하는 잉글랜드가 약 130,400㎢로 가장 넓고, 그 다음이 스코틀랜드 78,800㎢, 웨일즈 20,800㎢, 북아일랜드 13,600㎢ 순이다. 국토의 동서의 길이는 약 500km, 남북 연장은 1,000km 정도이다.

 

남부와 동부는 주로 저지의 농경지이고, 북부는 남부나 동부보다 산이 더 많다. 잉 글랜드의 척추라 할 수 있는 페나인 산맥 이 브리튼 섬 중부에 있지만 그리 높은 산 은 별로 없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1,343m의 벤 네비스 산이다.

 


잉글랜드 북서부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많 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는 가장 큰 윈더 미어 호수를 비롯하여 열 댓 개의 크고 작 은 호수들이 있는데, 해질녘에 바라보는 호수 경치는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민족이나 인 종, 국적이 매우 다양하다. 2011년 센서스에 의 하면 잉글랜드-웨일즈에 사는 사람의 86%, 48,200,000명은 백인이다. 기타 민족 구성을 보면, 인도 2.5%, 파키스탄 2.0%, 방글라데시 0.8%, 중국 0.7%, 기타 아시아인 1.5%, 아프리 카 1.8%, 카리브인 1.1%, 기타 흑인 0.5%, 흑백 카리브인 0.8%, 백인 아시아인 0.6%, 기타 혼혈 인 0.5%, 흑백 아프리카인 0.3%, 아랍 0.4%, 기 타 0.6%이다. 특히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지난날의 정치 적 배경에 기인한다.

 

2011년 현재 잉글랜드-웨일즈에 사는 사람 중 영국에서 출생하지 않은, 즉 외국에서 출생한 사 람은 인도(694,000명), 폴란드(579,000명), 파 키스탄(482,000명), 아일랜드(407,000명), 독 일(274,000명), 방글라데시(212,000명), 나이 지리아(191,000명), 남아공(191,000명), 미국 (177,000명), 자메이카(160,000명)의 순이다. 세 계 여러 나라에서 이민온 사람들은 런던, 맨체스 터, 버밍엄, 리버풀, 슬라우, 레스터, 울버햄튼 등 에 많이 살고 있다.

 

2011년 현재 영국에는 우리 교민이 약 46,829 명 살고 있다. 시민권자 및 영주권자가 13,009명 에 이르며, 체류자가 약 33,820명이다. 주로 런던 에 많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7. 02:30






 

프랑스의 자부

그랑제콜

 

 




프랑스 공교육제도는 중등학교 과정까지는 우리나라와 비슷 하다. 6세부터 들어가는 초등학교가 5년인 반면 중학교(콜레주) 는 4년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점이다. 고등학교(리쎄)는 우리 와 같은 3년이다. 그런데 고등교육 과정은 우리와 상당히 차이 가 난다. 대학은 일반대학과 ‘그랑제콜’(grandes ecoles)이라고 불리 는 특수대학으로 나뉜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그랑제콜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랑제콜은 프랑스 엘리트 배출 기관이 되어 있다. 프랑스혁명기에 만들어진 에콜 폴리테크닉 과 국립기술대학(CNAM)을 비롯하여 그랑제콜은 대부분 국가 에서 필요로 하는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학교들이며 문과계통 학교로는 역시 프랑스혁명 때 세워진 고등사범학교를 비롯한 몇몇 학교들이 있다.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는 장 폴 사르트르가 재수해서 들어간 학교로 프랑스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일반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반 때 보는 학력검증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면 되는데 합격자 비율은 80% 정 도이다. 바칼로레아 합격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원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학생들도 많 은 편이다. 반면 그랑제콜의 입학 정원은 보통 수백명에 불과 하고 입학생들에게는 국가에서 월급을 주고 공무원과 비슷한 대우를 해주기 때문에 입학경쟁이 치열하다.

 

고등학교를 졸업 하면 바로 그랑제콜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고교 성적을 토대 로 선발하는 그랑제콜 예비반에 들어가야 한다. 그랑제콜 예비 반은 2년 과정인데 학습량이 엄청날 뿐 아니라 매주 시험을 치 르기 때문에 힘든 과정이다. 그랑제콜 예비반은 그랑제콜이 아 니라 고등학교 내에 설치되어 있다.

 

고등사범학교는 리용에 한 곳, 파리에 두 곳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앞에서 말한 파리의 울므 가에 위치한 고등사범학교이다. 고등사범학 교 학생은 공무원으로서 월급을 받는 대신 학교생활을 포함해 서 10년간 국가기관에서 복무할 의무가 주어진다. 국가에서 필 요로 하는 고급인재를 일반대학과 달리 그랑제콜을 통해 확보 하는 프랑스 교육제도가 엘리트 위주의 교육제도로서 민주주 의적 가치와 배치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0. 16. 02:00






TED강의

다이애나 윈스턴의 명상의 과학

 






20년 이상 마음챙김 연구와 훈련을 해온 다이애나는,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어 현재에 머무는 연습이 일상생활과 인간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명상은 면역체계를 향상시킬 수 있으며, 특히 스트레스에 효과적이다.

 

*명상 연습과 치료를 병행한 건선(피부병)환자들이 명상을 하지 않고 치료만 받은 사람들보다 3배 빨리 치유되었다.

 

*장기간 수행을 한 사람들의 경우 노화로 인한 뇌 피질 축소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8주간 매일 27분씩 명상 연습을 한 사람들의 뇌에서 집행기능과 관련 있는 전두엽피질, 의사결정 및 유연한 사고와 관련된 뇌의 부위들에서 미세한 구조적 변화가 나타났다.

 

*깨어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타고난 권리다.

 

약 20년 전에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던 중 저는 그곳의 수도원에 가서 명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거 좋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도원 생활을 하게 되었죠.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으로 앉거나 걸으면서 한 번에 여러 시간 동안 명상 훈련을 하였습니다. 명상을 할 때 제 마음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제멋대로였죠. 저는 온갖 신경증과 걱정, 두려움, 공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내면적으로 뭔가 바뀌었음을 알았습니다.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삶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든 상관없이 저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명상에 대한 대중 인식의 변화

그것은 수 년 전이었고, 저는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돌아와서도 저는 명상을 계속했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마음챙김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20~25년 동안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았습니다. 마음챙김이 문화에 등장하는 것을 보았고 지금 우리는 학교,기업,의료계,법률,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마음챙김이 도입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훈련은 당신의 배경, 출신지,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명상에 관한 연구

마음챙김은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챙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상에 대해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학자들은 마음챙김을 지난 10년 간 연구했고 그전에 100개의 연구가 있었다면 지금은 1000개가 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마음챙김이 육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그리고 주의집중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건선환자 명상연구

건선(피부병)에 대한 일반적 치료법 중 하나는 태닝 부스와 같은 곳에 넣어서 UVB(ultraviolet B,중中파장 자외선) 광선을 쏘이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전형적인 치료를 받게 하고, 다른 한 그룹은 그와 동시에 명상 CD를 듣게 하였습니다.

 

CD를 들으며 명상 연습을 한 사람들은 나중에 결과를 보았을 때 명상을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3배나 빨리 치유되었습니다.

 

 

휴대폰 앱을 사용한 행복과 마음챙김의 상관관계 조사

연구팀은 전 세계 2,500명의 사람들에게 하루 중 아무 때나 휴대폰으로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세요?"  "지금 뭐하고 있나요? 거기 집중하고 있나요? 기분이 어떠세요?

 

사람들이 집중하지 않을 때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때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머무를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챙김은 불안, 우울증, 온갖 종류의 정신 건강 문제, 또는 21세기 인간의 정신 건강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명상과 연구

연구팀은 20년 또는 30년 동안 명상을 해온 사람들의 뇌를 조사했습니다.  그들의 뇌를 같은 연령대의 일반인의 뇌와 비교했는데 명상가들의 두뇌는 피질이 얇아지지 않았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두뇌의 피질 두께가 얇아집니다. 노화로 인한 피질 축소 현상입니다.

 

명상가들, 장기간의 명상가들의 뇌에서는 전두엽피질과 뇌섬엽피질이 얇아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대단하군, 난 명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하지만 연구팀은 단 8주 동안만 명상을 한 사람들의 뇌 구조도 살펴보았습니다.

 

결과는 8주간 매일 27분씩 명상 연습을 하자 사람들의 뇌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집행기능과 관련 있는 전두엽피질, 의사결정 및 유연한 사고와 관련된 뇌의 부위들에서 미세한 구조적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명상은 신체와 뇌에서 정보를 통합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 인식과 연민과 관련돼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발견됐습니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온전히 함께할 때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활력을 얻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지인들, 지역사회, 직장, 그리고 더 큰 세상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명상의 맛보기를 소개해드리고 실제 많은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이것은 그냥 몇분 동안만 하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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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5. 01:30




 

 

영국의 인구와 민족

 





영국을 이루는 네 나라는 비록 정치적 으로 단일 주권하에 있고, 영어를 공용 어로 하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구분된 다. 잉글랜드가 앵글로색슨족이 주를 이 룬다면 나머지 홈 네이션인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켈트족의 후예가 주류를 이룬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2010년 추정 영국 총인구는 62,262,000명이다.

잉글랜드는 크게 9개 지역(region)으로 나뉜 다. 2010년 잉글랜드 인구는 52,234,000 명인데, 9개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브라이 튼과 같은 도시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아 주 발전한 사우스 이스트 지역에 가장 많 이 거주하고, 약 800만에 가까운 사람들 은 런던에, 그 다음에는 맨체스터와 리버 풀을 중요 도시로 하는 노스 웨스트 지역 에 많이 산다.



그런데 2011년 센서스 1) 에 의하면 2011년 3월 현재 잉글랜드 인구는 53,107,200명, 웨일즈 인구가 3,063,800명이다. 두 지역 총인구는 56,171,000명으로, 2010년에 비 해 1년 사이에 931,200명이 증가하였다.

 

특징적인 것은 65세가 넘는 노인 인구가 920만 명으로, 16%, 즉 6명 중 1명이 노 인이라는 점이다. 영국은 65세 이상 인구 가 총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전형적 인 고령사회(Aged Society)이다.


스코틀랜드의 현재 행정 구역은 32개 주 (council area)로 구분되어 있다. 북서쪽 고원 지대는 하이랜드(Highland), 남동쪽 평야 지 대는 로우랜드(Lowland)라고 하는데, 큰 도 시들은 주로 로우랜드에 있고, 하이랜드 지역에는 애버딘을 제외하면 큰 도시가 없다. 2010년 추정 스코틀랜드 총인구는 5,222,000명이며, 그 중 가장 큰 도시인 서부의 글래스고에 1,800,000명 이상이 살고, 이어 수도인 에딘버러에 60만 명 이 상이, 에버딘에 20만 이상이 거주한다.


웨일즈의 행정 구역은 22개 주로 구성되 어 있다. 웨일즈의 2010년 추정 인구는 3,006,000명인데, 수도인 카디프가 60만 이상이 거주하는 가장 큰 도시이다.


북아일랜드는 26개 구(district)로 이루어졌 다. 북아일랜드의 2010년 추정 인구는 1,799,000명인데,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항구 도시 벨파스트에는 7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4. 03:00






 

 

영국의 치체재

 




 

입헌군주국

영국은 현재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 원수 로 하는 군주국이며, 의회민주주의를 펼 치는 나라이다. 왕정과 의회정치가 절묘 하게 결합된 입헌군주국이다. 왕위 세습 을 원칙으로 하는 영국의 군주인 국왕은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215년 대헌장, 1628년의 권리청원, 1689 년의 권리장전으로 이어지는 왕권을 제한 하려던 역사 흔적은 왕권이 얼마나 강하 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부터 군주의 역할이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개혁되었다. 지금도 국왕은 국가를 상징 한다. 법적으로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 이고, 군의 최고 사령관이며, 국교인 성공 회의 수장이다. 그러나 왕은 군림하되 통 치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역할은 의례적일 뿐이다.


 


양원제하의 내각

나라의 실제 행정은 선거를 통해 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당이 집권당·하원 1당이 되고, 관례에 따라 국왕이 당수를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이루어진 . 영국 정부는 총리를 행정 수반으로 내각책임제이다.

영국 정부의 공식적 명칭은 ‘여왕 폐하 정 부’(Her Majesty’s Government)이다. 영국의 모든 공공기관은 여왕 정부를 위해 봉사한다. 그래서 경찰이나 소방서, 우체국은 물론 형무소 등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자나 문서를 보면 흔히 ‘HM’이라는 문 구를 볼 수 있다.


총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의무의 하나는 하 원 내 다수당의 지도자로서 하원에 정기 적으로 출석하여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것이다. 하원에서 여야가 코를 맞댈 정도 로 가까이하며 열띤 논쟁을 벌이는 모습 은 매우 인상적이다. 누가 금방 한 대 치기 라도 할 듯한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지만 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야당 자리와 여 당 자리는, 칼을 빼 들어도 상대방에 닿지 않을 거리를 두고 마주본다. 각 진영의 앞 에는 어떠한 싸움이 나도 서로 절대 넘지 말아야 할, 붉게 그어진 두 선이 암묵적으 로 폭력을 막는 듯하다.


초기에 영국 왕은 종교 지도자와 귀족으 로 구성된 협의회의 자문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것이 발전하여 이 협의회의 귀족들이 상원이 되고, 기사들은 하원이 되었다. 오늘날 영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 으로 이루어진 양원제이다.


상원은 귀족으로 구성된다. 상원에는 작위 가 후손에게 승계되는 귀족이 있는가 하 면, 총리가 제청하여 왕이 임명하되 후손 에게 승계되지 않는 귀족, 고등법원 판사 중 대법관으로 임명된 종신 귀족, 성직 귀 족 등 여러 귀족이 있다. 지난날 상원 의 원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의원직을 물려 받은 귀족들이었다. 그야말로 조상만 잘 두면 상원 의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상원 의원의 세 습제가 폐지되었고, 그리하여 세습 귀족 수가 크게 줄었다. 상원 의원의 수는 고정 되어있지 않는데, 2012년 12월 현재 총 759명이다.


5년 임기의 하원은 2010년에 소선거구제 직접선거로 선출된 650명의 의원들로 구 성되었다. 이들의 지역구를 보면 잉글랜드 533석, 웨일즈 40석, 스코틀랜드 59석, 그리고 북아일랜드가 18석이다. 사실상의 가장 강력한 권한은 이 하원에 있다. 하원 을 중심으로 상원이 인준하는 형식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0. 13. 02:00


 

 

막달라 마리아의 전설과

다빈치코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여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 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갈 때도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 고 가까이서 지켜 보았으며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도한 사람이 라고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 막달라 마리 아에 대한 오랜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는 그 오라비 나사로를 비롯하여 유대 땅에서 쫓겨난 일단의 제자들 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 근처의 해안에 도달하였다. 그녀는 그곳 주민들에게 예수를 전 파하여 개종시켰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르세유 근처의 한 동굴 에서 30년 동안 고행의 삶을 살다 죽었는데 그 유해가 생막시 맹 마을 교회에 있다고 한다.

 



1279년에 도미니크 수도회가 그 곳에 수도원을 짓다가 석관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이 석관을 사 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것으로 믿었다. 그로부터 십수년 후 그녀를 기리는 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이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의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 전설에 여러 가지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졌다. 막 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사랑하던 여인으로서 예수와 결혼해서 자 식을 낳았으며 아이를 데리고 프랑스 땅으로 왔다고 한다. 프랑 스 왕가의 혈통은 이 자손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이야기도 만들어졌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이 그 대표적인 이야기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