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7. 10. 12. 01:30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것

 

 





프랑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

 

첫째는 프랑스인들이 매일 먹는 빵인 바게트이다. 바게트는 막 대기 모양의 빵이다. 바게트는 밀가루와 물, 소금, 효모 외에는 따로 들어가는 것이 없는 지극히 단순한 빵이다. 화덕에서 구 워내는 이 빵은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식당에서 고기요리를 먹을 때에도 바게트를 잘라서 곁들여 먹고 샌드위 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먹는 네모난 식빵을 갖고 만드 는 것이 아니라 바게트 속에 치즈나 햄, 토마토 등을 넣어서 만 든다. 바게트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딱딱해져 먹기가 힘들 다. 갖 구운 바게트를 구입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은 아침부터 바 게트를 사러 동네 빵집에 들른 다. 식사에서 바게트가 중요한 음식이므로 동네 빵집은 프랑 스인들의 생활에서는 필수적인 존재이다.

 


둘째는 포도주다. 포도주를 즐 겨 마시는 것은 지중해 지역의 공통된 것인데 로마제국 시대 에 포도 재배와 포도주가 널리 퍼졌다. 포도주는 일조량이 적 은 북부 프랑스를 제외하면 프 랑스 도처에서 재배된다. 프랑 스 포도주는 두 종류로 나뉜 다. 서남부산 보르도 포도주는 떫은맛이 강한 짙은 색깔이고 프랑스 동부와 론강 유역에서 나는 부르고뉴 포도주는 떫은맛이 덜하고 색깔과 맛이 가볍 다. 식사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오랜 전통이며 미사의식에 서도 포도주는 필수품이다. 포도주를 증류하면 증류주인 코냑 이 된다. 코냑은 알콜 도수가 보통 40도 이상 되기 때문에 아 주 조금씩 마신다. 혀에 코냑을 살짝 올려 향을 음미하며 목으 로 넘기는데 우리나라 소주처럼 들이키다가는 정신이상자 취 급을 받기 십상이다. 포도주 외에도 지방마다 특산주가 더러 있는데 유명한 것이 프랑스 서북부의 노르망디 지방의 사과주 다. 사과주를 ‘시드르’라고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의 사이다도 여기서 온 말일 것이다. 알콜 도수가 약한 술이지만 이 시드르 를 증류하면 알콜 도수가 매우 높은 ‘칼바도스’가 된다(칼바도스는 노르망디 지방의 한 도의 이름이다).

 

셋째 프랑스 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으로는 치즈(불어로는 ‘프로마주’라 고 한다)가 있는데 지방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구린 냄새가 지독 한 치즈도 있고 겉에 파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어 있는 치즈도 있다. 치즈는 요리에 넣기도 하지만 정찬에서는 주된 요리 후 에 여러 종류의 치즈를 생으로 먹는다. 치즈는 포도주의 안주 로도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보르도 포도주에는 노르 망디산 카망베르 치즈가 제격이다.

 

넷째 프랑스인들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페 문화이 다. 프랑스인들은 시간이 나면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신 문이나 책을 읽거나 담소를 하는 등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한다. 날씨가 좋으면 바깥 테이블은 만석이 된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시간보내기를 좋아하는 데서도 나타나지만 프랑스인 들은 중소도시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파리에서 사는 것도 일자리 때문이지 대도시인 파리가 좋아서가 아니라고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1. 22:03






 

 

프랑스 문화의 특성

 

 

 

프랑스는 원주민인 켈트계 갈리아인, 로마인,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족은 물론이고 이후 이탈리아인 등 수많은 민족들이 뒤 섞여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민족간의 갈등이 거 의 없고 사고방식 또한 다양한 가장 안정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켈트족(Celtes)으로부터 개인주의를, 로마인 으로부터 법과 질서를 사랑하는 마음을, 게르만족으로부터 건 축제조 재능을, 노르망족으로부터 진취적 기질을 이어받았다 고 말한다. 또한 풍부하고 다양한 국토와 천혜의 기후 아래 조 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갖게 된 점도 민족성 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인은 이러한 민족적 특성을 바탕으로 지성과 사고를 중 시하고 명석한 논리와 표현을 좋아하며,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정신을 선호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 만 이런 성향이 지나쳐서 정작 행동으로 옮길 때는 사고의 과 정에 집착하여 눈앞의 사실을 분석하는 측면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가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오히려 ‘원형原型(prototype)의 나라’이고 ‘양산量産의 나라가 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국가를 권력을 두뇌로 하는 유기체로서 이해하 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창조력을 소생시켜 헤쳐 나가야 할 ‘우리 프랑스’라는 관념을 강하게 갖 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인은 쇼비니즘(chauvinism, 배타적 애국심)이 있다거나 이상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추상적 관념이 법률주의로 정착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프랑스인은 현실적이고 검소하며, 인생을 즐기고 자녀교 육이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벼룩시장이 활성화되어 있 고, ‘전통’과 ‘낡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또한 타인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고 유럽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해 있으며, 예술적인 감각과 활동이 탁월하고 음식문화는 영국 다음으로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가족에 대 한 의무가 약화되고 이혼율이 높은 편이며, 노령화 현상과 높 은 실업률, 공해, 주택부족, 사회계층 간의 신분 차로 인한 문 제가 증가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0. 9. 21:00




 

 

나라의 가장 큰 명절

개천절開天節

 




 

개천절 노래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개천절이 되면 개천절 노래를 부르곤 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개천절 노래, 정인보 작사·김성태 작곡)

 

하늘이 열린다

‘하늘이 열린다’는 뜻을 가진 개천절이란 공휴일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렇듯 우리는 우주와 하늘을 숭상하면서, 하늘의 이치에 따라 살고자 했던 민족이었습니다. (천문학자 박석재 박사)

 

개천開天이란?

 <삼성기 하>에 환웅천황이  무리 3천명을 이끌로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웠다(개천입교開天立敎)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개천이란 개국의 의미이다. 또 <신시본기>를 보면 성인聖人을 보내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개천이라 한다(遣往理世之謂開天)고 하여 개천開天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그 밖에도 개천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더 있는데 ‘神市開天之道 亦以神施敎’(단군세기),  ‘神市開天 以土爲治’(삼한관경본기), ‘桓雄開天 主祭天神’(소도경전본훈) 등이다.  즉 개천은 환웅천황이 신도(神道, 삼신의 도)로써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께 제사를 지내고,  토土의 중정中正의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상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개천절이 개천이란 말도 이런 의미이다.

 

개천절 제정의 유래

1909년 1월 15일 나철羅喆에 의해 대종교大倧敎가 중광中光(다시 교문敎門을 염)되면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하였습니다. 음력 10월 3일은 3월 16일과 함께 신시 배달 이래로 우리 민족이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던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음력 10월 3일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0월 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천사상 나는 대한민국이 컴퓨터라면 다시 포맷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개천사상을 바탕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용이 승천하는 그날이 오면 ‘개천가’는 드높게 울려 퍼질 것이다. (박석재 전 한국천문연구원장)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10. 9. 00:04







 

개천절은 왜 10월3일인가 

 

 

 

 

개천절은 BCE 2333년 음력 10월 3일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여 제정한 국경일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가람문고본에 조선시대 무당에 대한 기록을 한 <무당내력(巫黨來歷)>이란 책이 있다. 19세기 ‘무당내력(巫堂來歷)’은 “상원갑자 10월3일에 신인(神人) 단군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교를 세우고 백성을 가르쳤다”고 썼다.

 


구한말 대종교 중광의 근거가 되는 ‘단군교포명서’의 서두에는 “오늘은 우리 대황조단군성신(大皇祖檀君聖神)의 4237회 개극입도지경절야(開極立道之慶節也)라. 우형(愚兄) 등 13인이 백두산 대숭전에서 … 우리 동포형제자매에게 삼가 고하노니”라고 적혀 있다. 포명일자를 ‘단군개극입도 4237년(1904) 10월3일’이라고 끝에 명기했다.

 


 10월 3일은 단군왕검이 개국 천제를 올린 날

<단군세기>를 보면 “배달 신시 개천 1565(단기 원년, BCE 2333)년 10월(上月) 3일에, 신인왕검께서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백명을 거느리고 단목 터에 와서 백성과 더불어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셨다(至開天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하야 有神人王儉者가 五加之魁로 率徒八百하시고 來御于檀木之墟하사 與衆으로 奉祭于三神하시니)는 구절이 있다.  10월3일에 단군왕검이 천제를 올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4. 01:00




 

 

영국왕조 변천사

스튜어트, 하노버, 윈저 왕조의 계승

 

 




자녀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를 사촌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에게 넘겼다. 제임스 6세는 처음으로 두 나라 를 통일하고 스코틀랜드계인 스튜어트 왕조 (1603~1649)를 연 제임스 1세가 되었다. 뒤이어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의 회와 왕 간의 내전 결과, 영국의회는 왕을 처형하여 왕가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 포하였다. 1660년 왕정복고 시기까지 공화 정을 이끈 것은 크롬웰이었다.

 

스튜어트 왕조의 부활(1660~1714) 시기 마지막 왕인 앤은 1707년 스코틀랜드, 웨일즈 의 회를 병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을 만 들었다. 앤은 후계자가 없이 죽었다. 앤의 유지를 받든 슈루즈버리 공작은 하노버 선 제후의 부인이자 제임스 1세의 손녀인 소 피아와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프로테스탄 트 자녀들이 왕위를 잇도록 하는 법을 선 포했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왕위는 독일 하노버 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조지 1세로부터 시작되는 하노버 왕조 (1714~1901)는 정치적으로 의회 민주주의 정 치를 처음으로 실현하였고, 식민지도 많이 개척하여 영국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던 때(1837~1901)에 영 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영국은 아편전쟁(1839~1842)으로 중국의 쇄국을 깼고, 1857년 인도의 세포 이 반란을 진압하여 인도를 직할지로 만들 었으며, 1856년부터 7년 전쟁을 통해 캐나 다를 점령하는 등 식민지 제국을 이룩하였 다.

 

한마디로 영국은 세계의 많은 나라를 정복한 제국이었고, 산업혁명을 통해 가장 잘 사는 국가였으며, 무역을 통해 엄청난 자본을 축적한 나라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왕이다.

 

1901년 하노버 왕가의 여왕 빅토리아가 세 상을 떠나자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 황혼 기인 59세에 에드워드 7세로 왕위에 올랐 다. 빅토리아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즉위 후 빅토리아의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의 성性 인 작센-코부르크-고타가 왕조명이 되었다.

 

이어 에드워드 7세의 차남인 조지 5세에게 왕권이 넘어갔는데, 그는 독일계 작위 칭호 를 버리고, 1917년에 왕궁 소재지의 이름 을 따라 왕조명을 윈저로 바꾸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함 으로써 영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 의 영국은 윈저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엘리 자베스 2세가 1952년부터, 우리의 전통으 로 말하면, 사람이 환갑을 맞은 긴 세월을 통치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3. 22:01




 

 

 

영국의

플랜테저넷 왕조

 






플랜테저넷 왕조의 에드워드 3세는 유럽 대륙을 지배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당 시 프랑스 왕실의 적통이 끊긴 것을 빌미 로 삼고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인 점을 내 세우며, 외척 혈통인 자신이 프랑스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잉글랜드가 브리튼 섬에 갇혀 있다가 대륙으로 날개를 활짝 펴려는 시도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을 벌였다. 당시 쓰러져가는 프랑스를 구한 것이 누구나 잘 아는 잔다르크였다.

 

리처드 2세를 끝으로 플랜테저넷 왕조가 끝났다. 플랜테저넷 가家의 분가로 플랜테 저넷 왕조 에드워드 3세의 손자 헨리 4세 가 랭카스터 왕조(1399~1471)를 개창했다. 헨 리 6세 때 요크 공 에드워드는 타우턴 전 투에서 승리하고, 자신을 에드워드 4세라 칭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요크 왕조(1471~1485) 의 첫 주인이 된 것이다.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3세가 조 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랭카스터 가계의 왕위 계승권자이며 프랑스에 망명 해 살고 있던 헨리 튜더가 가만히 있지 않 았다. 1485년 보스워스 평야에서 양군 사 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것은 붉은 장미 를 상징으로 하는 랭카스터 가문과 흰 장 미를 상징으로 하는 요크 가문이 사생결 단을 내리는 전투였다. 흔히 장미전쟁(1455- 1485)이라고 하는 전쟁을 두 가문은 30년 간 계속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헨리 튜더 가 리처드 3세를 죽임으로써 전쟁이 끝났 다. 헨리가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함으 로써 요크 왕조가 막을 내리고 튜더 왕조 (1485~1603)의 문이 열렸다.

 

튜더 왕조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영국의 기 틀은 헨리7세-헨리8세-에드워드6세-메 리1세-엘리자베스1세로 이어지는 이 튜더 왕가에 의해 잡혔다.

그 중 헨리 7세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를 만들었고, 헨리 8세는 절대군주제 의 확립 및 종교개 혁을 통해 성공회 를 국교로 만들었 다. 대륙의 거대한 문화적 끈인 교황 과 결별하여 성공 회를 만들어 스스 로 영국 국교의 수 장이 된 것이다.

 

뒤를 이어 에드워 드 6세와 큰 딸 메리 1세를 거치며 잉글랜 드는 다시 장미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하면서 그런 기우는 사라졌다. 그녀는 풀리지 않 을 것 같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 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강국이었던 스페 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는 등 대영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10. 1.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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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톡릭과

중국화교 갈등

 






 

1500년간 기독교 국가였던 프랑스에는 마을마다 교회요 동네 마다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교회당이 많다. 교회는 오랫동안 프랑스인들의 생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문화적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나면 교회에 출생신고를 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결혼식도 교회에서 올리고 죽으면 사망신고도 교회에 하였다. 이는 교회가 동네마다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 지만 지금은 이러한 호적기록은 모두 국가의 몫이 되었다.


프랑스의 무수한 교회당은 프랑스 문화유산 가운데서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의 주교좌 성당을 불어로는 ‘카테 드랄’이라고 하는데 주교가 앉는 의자를 의미하는 그리스 말 ‘카테드라’에서 온 말이다. 프랑스에는 이러한 대성당 외에도 수도원들이 곳곳에 있다. 원래 수도원은 인생을 오로지 신에게 바치고 평생을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집을 의 미한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찰과 같은 것이 수도원인데 프랑스 의 수도원들도 다양한 집단에 속해 있다. 수도원 건물들도 오 래된 것이 많지만 수도원들은 학문의 전수와 서적의 필사와 보 관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옛날에는 많은 학자와 교사들이 이들 가운데서 배출되었다.

 


회교의 신장에 따른 종교갈등

현재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예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우선 미사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는데 특히 젊 은이들이 교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사제가 되려는 성 직자 지망생들이 줄어 가톨릭 교회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반 대로 전통적으로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워온 회교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북아프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이 늘어 남에 따라 프랑스 종교지형에서 차지하는 회교의 비중은 날로 커지고 있다.


회교도들의 경우 기독교도들에 비해 세속화의 세 례를 훨씬 적게 받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그 힘이 갈수록 강해진다는 느낌을 준다. 기독교를 프랑스의 주요한 정 체성의 요소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간혹 회교 사원(모스크) 건립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원주민들과 회교 이민자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최근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라는 극우정당의 지지율이 점 점 높아가는데 이것도 이러한 종교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여겨 진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30. 01:00






 

 

TED강의

스트레스가 당신의 뇌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경쟁 스포츠를 하거나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와 같이 여분의 에너지와 집중력이 필요할 때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되는 스트레스는 실제로 우리의 두뇌를 바꾸기 시작한다. 이 영상은 만성 스트레스가 어떻게 뇌의 크기, 구조 및 기능, 심지어 유전자 수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만성 스트레스는 뇌의 크기와 뇌의 구조, 뇌의 기능, 그리고 유전자 수준까지도 바꾼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편도체 내의 신경망 수가 증가하고 활성화되어 정서적(특히 공포와 잠재적 두려움에) 과잉반응을 보인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학습과 기억, 스트레스 조절과 관련된 뇌 영역인 해마의 기능이 저하되고 해마에서 만들어지는 새 뇌세포의 수도 감소한다.

 

또 뇌의 크기가 줄어들고, 뉴런 사이 시냅스 연결이 손상된다.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집중, 의사결정, 사회적 상호작용 등의 행동을 조절하는 전전두엽피질이 줄어든다.

어릴 때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평생 동안 스트레스에 더 민감한 유전자를 갖게 된다.


이러한 후생적(epigenetic) 변화는 후세에 유전될 수 있다.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해마의 크기를 증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과 명상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29. 01:30






 

 

프랑스혁

종교개혁과 정교분리 과정

 






 

가톨릭을 국교로 강제하였던 프랑스에도 ‘종교개혁’(Reformation)시대에는 가톨릭을 거부하고 루터와 칼뱅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단들이 생겨났다. 소위 ‘위그노’들이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자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웠다. 16세기 후반 위그노와 가톨릭 세력 사이의 내전이 근 40년간 계속되었다.


위그노 세력의 영수 앙리 드 부르봉이 가톨릭 세력과 타협을 벌여 앙리 4세로서 프랑스 왕좌를 차지하였다. 타협의 결과 위그노들은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나(낭트 칙령)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자유는 계속 위협을 받았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국이 하나의 신앙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위그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였다. 당시 많은 위그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 신교도 국가로 이주하였는데 그 수가 3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프랑스 국내의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신민으로서 공식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고 국가로부터 갖가지 협박과 탄압에 시달렸다. 이들의 종교적 자유와 시민적 권리가 인정된 것은 프랑스혁명으로 인해서였다. 프랑스혁명은 종교와 신분상의 차별을 일소하고 시민들의 법적 평등을 확립하였다. 혁명지도자들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였는데 이 선언은 현재 프랑스헌법의 전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만방의 헌법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해 혁명세력 내에서도 온 건파와 과격파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과격파들은 왕 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려 하였으며 부르봉 왕가를 지지 하는 가톨릭 교회를 적대시하였다. 심지어는 기독교의 신 대 신 인간 이성을 신성시하는 종교도 급조되었다. 가톨릭 교회 는 그 토지와 건물 등 막대한 재산을 국가 재정문제 해결을 꾀한다는 명분하에 국가에 빼앗겼다. 혁명이 종식된 후에도 교회는 그 재산을 되찾지 못했다. 많은 부동산이 이미 일반인 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혁명기에 가톨릭 교회는 반혁명 진영을 지원하는 바람에 그 위신이 크게 추락하였다. 혁명 이전부터 계몽사상이 확산되 면서 사회상층부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이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혁명으로 인해 교회의 신망은 큰 상 처를 입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정략상 교황청과 화해하였지 만 가톨릭은 예전과 같은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성직자 들은 국가가 지불하는 봉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국가에 충성 을 맹세하였기 때문에 국가 공무원처럼 되었다.

국교가 아니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가톨릭의 이러한 지위 는 19세기 내내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공화파들은 국가와 교 회간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였다. 종교가 개인양심의 문제가 된 만큼 국가를 종교와 무관한 제도로 만들자는 것이 공화파 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1905년 국가가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4대 공인종교(가톨릭교, 칼뱅교, 루터교, 유대교)에 대한 일체의 자금지원 을 못하게 하는 정교분리법이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로써 정 교분리의 오랜 과정이 완성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28. 22:58





프랑스문화의 정체성

카톨릭 문화

 






프랑스의 지배적인 종교인 구교(로마 가톨릭 교회)의 힘은 지금은 예전만 못하다. 중세와 근대초 가톨릭 교회의 지배력은 그야말로 막강하였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생활도 지배하였다. 기독교는 1세기부터 프랑스 땅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갈리아가 프랑크족에 의해 정복되었던 5세기경에는 갈리아 주민들은 거의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다.


클로비스를 비롯하여 프랑크족의 왕들은 골족 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왕들이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지켜주고 성직자들과 교회에 면세 혜택을 주는 등 친교회 정책을 취한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 교황도 프랑스 왕권을 신성한 것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것은 물론이다.




후대에 프랑스 왕들은 ‘기독교 왕’이라는 교회에서 부여한 칭호를 자랑스레 사용하였다. 프랑스 왕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들의 도전을 앞장서 진압하였다. 중세기 프랑스 남부에는 알비(Albi) 파를 비롯한 다양한 이단들이 등장하였는데 국가가 무자비하게 이들을 탄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가 계속 원만했던 것은 아니다. 14세기 초에는 성직자에 대한 과세문제를 놓고 프랑스 왕과 교황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주교 임명권을 놓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루이 14세 시대에 주교임명권은 왕에게로 넘어갔는데 그래서 프랑스 교회에 대한 지배권도 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왕이 갖게 되었다. 향후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는 거리가 있는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이러한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경향을 ‘갈리카니즘’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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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27. 01:00




영국

 노르만 왕조의 등장

 





8세기 말부터 외부로부터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북게르만족의 일파로 서 바이킹인 데인족Danes의 습격이 잦았다.

비록 알프레드 대왕 때 앵글로색슨족이 이들과 맞서 하나로 뭉치기도 하였으나, 데 인족의 침입이 계속되더니 1016년에 덴마 크 왕의 아들인 크누트 왕이 잉글랜드 왕 위에 올랐다. 덴마크 바이킹계 크누트 왕 과 두 명의 왕이 더 통치한 뒤에는 노르망 디에 망명 중이던 브리튼계의 참회왕 에드 워드가 잉글랜드 왕권을 복원함으로써 바 이킹 시대는 끝났다.


23년간 통치하던 에드워드가 1066년에 죽 자 귀족들은 에드워드의 처남인 해롤드를 후계자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에 에드워드 의 사촌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노르만 족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그리 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영국 해롤드 왕을 물리치고 1066년에 영국의 새로운 왕 윌리 엄 1세로 등극하였다. 영국 역사에 프랑스 계 노르만 왕조(1066~1154)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로써 영국 귀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노르만 왕조는 영국 영토를 완전하게 지배 하는 사실상 최초의 왕조였다. 윌리엄은 브 리튼을 정복하고 대륙의 봉건제도를 잉글 랜드에 도입하였다. 이로써 브리튼 섬은 비 로소 유럽의 일부가 되었다. 노르만 왕조가 열림으로써 프랑스에서 많은 노르만인들과 다른 부족들이 영국에 건너와 정착하였는 데, 그로 인해 기존의 영국 문화가 크게 바 뀌었다. 이를테면 지배계급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면서, 이 말이 앵글로색슨족의 말과 섞여 오늘날 영어의 바탕이 되었다.


노르만 왕조는 직계 왕위를 그리 오래 유 지하지 못했다. 3대 스티븐에서 끊어졌다. 노르만 왕조 헨리 1세의 외손으로 프랑스 인 아버지를 둔 헨리 2세가 스티븐을 이어 왕위에 오름으로써 성이 바뀐 것이다. 이 로써 플랜테저넷 왕조(1154~1399)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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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26. 00:30






영국의 역사

시원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의유입

 

 



 

 

유럽의 정복국가인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에 브리튼 섬에는 기원전 수백년 전에 원 주민을 정복하고 유럽에서 이주해 온 켈트 Celts족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켈트족 중 게일족과 브리튼족이 영국 땅에 정착하였 으며, 브리튼족은 영국의 이름인 ‘브리튼 Britain’의 어원이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55 년부터 브리튼을 침입하고 약 100년 뒤 잉 글랜드 땅을 정복한 로마제국은 이들 켈트 족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약 400년간 스 코틀랜드 북부를 제외한 브리튼 전 지역을 지배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브리튼 땅을 ‘브리타니아’라고 하였으며, 당시 로마 군대 는 템즈 강 주변을 기지로 쓰며 항구 이름 을 ‘론디니움Londinium’이라 하였는데, 이곳 이 뒷날 영국의 수도 런던이 되었다.




그런데 5세기 들어 브리튼 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로마제국이 위협받자 로마 황제 호노리우 스는, 로마 본토를 지키기 위해 “브리튼 의 제국민들이여! 로마를 위해 자신의 지 역을 스스로 방어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로마군을 철수시켰다. 로마인이 떠 난 뒤 브리튼 섬에는 독일, 덴마크, 네덜란 드에서 이전부터 침입하던 게르만 계열의 주트족, 앵글족, 그리고 색슨족이 들어와 지배한 것이다.


이들은 브리튼 땅을 차지하며 7세기 초까지 각각 켄트 왕국, 에식스 서식스 웨식스 왕 국, 이스트 앵글리아, 머시아Mercia, 노섬브리 아Northumbria 왕국 등 7개 소규모 왕국을 세 웠다. 잉글랜드라는 말은 이들 중 세력이 강하였던 ‘앵글족의 나라’라는 의미에서 시 작되었다. 브리튼 섬이 앵글로색슨족의 땅 이 된 것이다.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이들 앵글로색슨족이 지금 영국의 뿌리이다.


이들 여러 왕국이 패권 싸움을 한 결과, 8 세기에 이르러 머시아, 노섬브리아, 웨식스 세 왕국만 남게 되었고, 829년에는 이것도 웨식스 왕 에그버트Egbert에 의해 하나로 병 합되었다. 에그버트는 잉글랜드 통일의 바 탕을 마련하였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25. 22:24






영국과

럽대륙과의 관계






주변 국가를 보면 영국은 영국해협을 사 이에 두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마 주한다. 대륙과 가장 짧은 거리는 약 34 ㎞에 지나지 않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약 50㎞의 채널 터널Channel Tunnel; Le tunnel sous la Manche(영국과 프랑스간의 도버 해협을 연결하는 해저 터널) 로 이어져 기차로 통행할 수 있다. 유로스 타를 이용하면 런던에서 파리까지는 두 시 간 조금 더 걸린다. 다른 나라를 보면 덴 마크나 노르웨이와는 북해를 사이에 두고 있고, 본토를 중심으로 반대쪽으로는 아 일랜드 해를 두고 섬나라 아일랜드 공화 국과 접하고 있다.

 




변덕스러운 기후 환경

영국은 서울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그래 서 서울보다 더 추울 것 같지만, 더 온화 하다. 멕시코 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체적으로 온난한 기후를 나타낸다. 연간 강수량은 많지 않으며 1년 내내 날씨가 흐 리고 지나가는 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연중 비오는 날이 반 이상인데, 비가 많이 오는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부슬부슬 온 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우산을 준비하 지 않기도 한다. 그 정도면 그냥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습한 날씨가 특징이지 만, 날씨가 맑다가 갑자기 비가 오거나 추 워지기도 하는 등 영국 날씨는 급변한다. 아이슬란드 저기압의 영향 때문인데 아주 변덕스럽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파카를 입 는 사람도 입고 겨울에 반팔 티셔츠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누가 힐끔거 리며 보지도 않는다. 어떤 때는 거리 사람 들의 옷차림에서 하루에 네 계절의 옷을 동 시에 볼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는 가을~겨울에 비가 많이 오고, 런던은 겨울 에 안개가 많이 끼는 특성을 보인다.

영국에서는 기온이 영하10° 밑으로 내려가 거나 32°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혹시라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씨라도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공원이나 집 정원 또는 옥상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웃 통을 벗어던진 남자들, 비키니를 입은 여 자들이 남의 시선 마다하지 않고 이런 저 런 자세로 햇살을 즐기는 모습이 우리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24. 00:30






 

 

 

카와카미 타카후미 선사 TED강의

명상을 하면 감성지능이 높아진다

 

 






마음챙김으로 현재에 머무르는 법

교토 슌코인椿光院 사원 주지스님인 카와카미 타카후미 선사는 선불교와 명상의 핵심을 마음챙김으로 보고, 미친 듯이 바쁜 우리의 삶의 속도를 늦추어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해준다.

 

*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면 감성지능(EQ)과 관련된 뇌의 영역의 활동과 질량이 증가한다.

*명상을 20분 동안 하면 6시간 정도 잠을 잔 것만큼 산소 소비량이 줄어든다. 즉, 수면보다 명상이 더 깊은 휴식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마음챙김은 수 세기 동안 불교 전통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판단을 하지 않고 현재에 머무르도록 도와주는 연습이자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이 이곳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 또는 미래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갇혀 있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현재에 머문다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고통의 주요 공급원이 우리의 주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은 우리를 어떻게 깨어있게 하는가

마음챙김의 주된 훈련은 명상입니다. 명상은 여러분을 더 주의 깊게 만들고 판단하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불교 수행법은 최근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기업 및 경영 대학교에서 명상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구글, 링크드인, 포드 등 다양한 기업에서 명상을 기업 웰빙 프로그램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경과학을 통해  명상이 우리의 뇌 및 정서적 지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명상을 하면 감성지능이 높아진다.

감성지능(EQ)은 자기 인식, 자기 조절, 사회적 인식, 대인관계, 주의집중 및 세계관 등 6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면 이 감성지능과 관련된 뇌의 영역의 활동과 질량이 증가한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에서 입증되었습니다.

 

특히 자제력과 주의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방해받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휴식을 취할 때, 실제로 주의력과 자기 통제와 관련된 두뇌의 일부 영역의 활동이 증가합니다 . 그리고 실제로 뇌의 산소 소비가 느려집니다. 따라서 6시간을 자면 정말 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분 동안 명상을 하면 6시간 정도 잠을 잔 것만큼 산소 소비량이 줄어듭니다. 그것은 정말로 휴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명상을 하면 뇌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서 세로토닌이 방출된다

 

또한 명상을 20분 이상 하면 뇌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합니다. 그리고 뇌의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뇌간을 자극하여 세로토닌이 방출되기 시작합니다. 세로토닌은 우리를 더 이완시키는 신경전달물질입니다.

 

*세로토닌 : 뇌의 시상하부 중추에 존재하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 행복을 느끼는 데에 기여한다고 하여 "행복호르몬"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규칙적인 명상 훈련은 여러분을 더 편안하게 하고 주의력과 자기 통제력을 향상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순간을 충분히 주의 깊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순간에 달려있으며, 그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9. 23. 00:30




 

 

요가 호흡의 과학

 순다 바라슈브라마니안 TED강연

 




방사선 종양학 연구원 순다 바라슈브라마니안은 호흡의 효과에 대해 연구한다. 그는 깊은 호흡은 긴장을 풀어주며 생리학적으로 관련된 생물지표에서 중요한 유익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핵심

*요가호흡을 하면 신경생장인자(Nerve Growth Factor)가 많아진다.

*신경생장인자란 세포가 성장하고 생존하고 스트레스에 견디고 더 오래 살게 해주는 단백질이다.

 

시작

박사 : 호흡조절은 많은 건강상의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흡 조절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요가 호흡은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호흡법을 학습할 때마다 항상 침샘 자극이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침은 단지 소화액이 아닙니다. 침에는 단백질, 호르몬, 생장인자 등이 들어있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신경생장인자입니다.

 

신경생장인자란 신경세포가 성장하고 생존하고 스트레스에 견디고 더 오래 살게 해주는 단백질입니다.

 

*생장인자(GF) : 각종 세포분열이나 발달(분화)을 촉진하는 폴리펩티드의 총칭

*신경생장인자 : 신경조직의 분화, 생장 활성을 나타내는 시토카인성 펩티드인자

 

실험 테스트

편집자 : 박사는 요가의 어떤 요소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인지,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궁금해 졌습니다.

 

박사는 요가호흡을 한 후 실험실에 타액 샘플을 가져 와서 테스트 하게 됩니다. 개인적 특성 일 수도 있기에 타인의 샘플도 테스트 하죠. 더 나아가 요가호흡 그룹과 일반 대조그룹을 비교하는 그룹임상 실험도 진행합니다.

 

결과는 요가호흡을 한 사람들은 신경생장인자가 더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암 , 면역반응, 스트레스 및 통증을 비롯한 다양한 상태에 관여함을 밝혀 냅니다.

 

박사 : 요가호흡은 타액 분비를 자극합니다. 신경생장인자 등 타액 내의 화합물 또는 원소들은 특정 수송 메커니즘을 통해 중추신경계로 전달되거나, 또는 혈류에 흡수되어 신체 전체에서 이용 가능하거나, 또는 빈 공간에 머무르면서 우리가 세균과 싸우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을 바꾸거나 어떤 훈련을 함으로써 몸의 구성 요소를 변화시키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며

박사 : 마음은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수레를 끄는 말馬이 있습니다. 그 말은 바로 여러분의 호흡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승객을 제어하려면 그 운송수단인 말馬 , 즉 호흡을 다스려야 합니다. 호흡을 유의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건강을 향상시킬 것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9. 22. 01:00



 

 

명상의 과학

엠파 세팔라박사 TED강연

 






 

숨쉬는 즐거움

우리는 자신의 행복감을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데 필요한 도구를 이미 갖고 있다. 엠파 세팔라 박사는 우리 마음의 경계를 활용하는 과학적 방법이 어떻게 결과적으로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는가를 연구한다.

 

세팔라 박사는 건강 심리, 복지 및 질병 회복력에 대한 전문가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사이콜로지 투데이 및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마인드 등에 기사를 쓰고 있다.

 

또한 행복의 과학을 다루는 뉴스 사이트 풀필먼트 데일리의 설립자이자 편징장이다.

 

박사는 우리 삶에 행복의 과학을 적용하는 법을 공유한다. "알고 보니 행복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세팔라 박사는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인지심리학과 신경과학의 발견을 사용하여 행복을 단순화한다.

 

 


강연 시작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스탠퍼드 대학원생 출신이며 현재 스탠퍼드대의 심리학자이자 연구과학자로서 학교 캠퍼스의 아름다움, 매일 캠퍼스를 물들이는 태양, 그리고 주위의 뛰어난 학자들을 보며 항상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사실에 당황스러웠습니다. 학생들이 비참해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습니다. 그들은 불안하고,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원생으로서 보낸 첫 해 캠퍼스에서는 세 명이 자살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저는 동료 교수인 건강증진학과 학장 캐롤 펄토프스키와 함께 학생들의 웰빙을 증진시키기를 기대하며 ‘행복의 과학’ 수업을 개설했습니다.

 

 

성공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라야 하는가

어느날 학생 한명이 캐롤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수강을 취소해야겠어요. 이 수업은 내가 배운 모든것에 반대됩니다."

 

캐롤이 "그게 무슨 말이죠?" 라고 물었습니다. 학생은 "부모님은 제가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세요. 어떻게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는지 여쭤보자 부모님께서는 '매우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학생이 "제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라고 묻자 부모님은 "네가 고통스럽다면" 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웃음)

 

이것은 매우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오해를 어느 정도 믿고 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을 희생하거나 최소한 연기해야한다고 오해합니다.

 

특히, 스트레스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죠. 이런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여러분도 동의하실 것 같아요.

 

 

마음은 통제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스트레스 요인에 직면하게 됩니다. 과거에도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상태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새로운 방법

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갖고 사는 사람들, 즉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고 돌아온 재향군인들과 함께 일해 왔습니다.

 

이들은 스트레스 반응이 꺼지지 않는 것 같은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립니다.

 

낮에는 과거 사건을 회상하는 플래시백이 일어납니다. 학교생활은 물론 직장 생활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재향군인에게 제공되는 치료법과 약물은 많은 경우 효과가 없으며, 또한 많은 경우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여러분 모두가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

호흡은 실제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율 기능입니다. 호흡은 원할 경우 자신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호흡을 깊이 천천히 하면, 특히 숨을 오래 내쉬면, 심장 박동수가 감소하고 혈압이 떨어지며, 부교감신경계(휴식과 소화영역 담당 신경계)를 작동시켜 신경계 전체를 안정시킵니다.

 

호흡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호흡이 우리의 감정과 굉장히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감정마다 독특한 호흡 패턴이 있다

피에르필리포(Pierfilippo)라는 심리학자는 정말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참가자들을 실험실에 초대해 행복, 슬픔 등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참가자들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길게 숨을 쉬는지 관찰하여 감정에 일치하는 호흡패턴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호흡 패턴의 측면에서 각 감정마다 아주 독특한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흡패턴과 일치하는 감정

 

더 흥미로운 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실험실에 불러 특정 감정에 일치하는 호흡을 하라고만 지시했습니다. 그는 첫 연구에서 발견한 호흡 패턴을 참가자들에게 지시한 후 "어떤 감정이 드세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참가자들이 그 호흡 패턴과 상응하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호흡패턴을 따라하는 것만으로 그 호흡패턴과 일치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것입니다.

 

 

호흡 프로그램 적용

우리는 재향군인들을 실험실에 초청하여 일주일간 호흡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몇 시간 씩 일련의 호흡 기술을 배웠는데, 일주일이 지난 후 불안장애 수치가 무증상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주간의 호흡 프로그램을 마친 후 우리는 이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후, 1년 후, 그들을 다시 테스트 했고, 그 효과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증상들이 영구적으로 개선된 것입니다.

 

호흡을 이용하여 우리 마음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언제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한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활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입니다. 집에 돌아가셔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21. 01:00







세계적인 성공학의 거장

나폴레온 힐 Napoleon Hill




프로필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1883~1970)은 미국 버지니아 주의 와이즈 컨트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 새어머니로부터 “너는 틀림없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적인 말을 들으면서, 지역의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비와 생계를 위해 잡지사의 기자로 취직하여 마침내 당대 세계 최고의 부자인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를 만나게 된다.

앤드루 카네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건네준 507명의 명단을 1908년부터 1928년까지 20년에 걸쳐서 직접 인터뷰 및 조사를 한 끝에, 누구라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는 성공의 원리를 정리하였다. 이렇게 성공학 역사의 위대한 걸작인 『Law of Success』(1928)를 완성하였고, 이후 일반인들을 위해 다이제스트 판으로 정리한 『Think and Grow Rich』(1937) 등은 성공학의 명작으로 손꼽히며 지금까지 5천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출생 1883년 10월 26일, 미국
사망 1970년 11월 8일
직업 작가
경력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고문관
미국 윌슨 대통령 홍보담당 비서관

성공 명언


패배가 찾아왔을 때, 가장 논리적이고도 쉽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포기다. 그것이 바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취하는 조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남는 이유다.

성공과 실패는 모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두드러진 특색이 있다. 그들은 실패의 이유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실패에 대한 완벽한 변명거리를 저마다 만들고 있다.

역경의 순간에 여러분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7가지 기본적 두려움은 가난, 비난, 쇠약, 실연, 노쇠, 구속,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단지 심적 상태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행동을 취함으로써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큰 실패 후에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여러분 앞에 놓인 역경에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러한 역경은 여러분에게 관용, 동정, 자제심, 인내 그리고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는 다른 몇 가지의 덕목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자신이 서 있는 곳과 나아가는 방향에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인생을 조종하고 변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변화시켜라. 여러분만이 이런 일을 할 힘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실패할 때마다 동일한 크기의 혜택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어서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여러분도 성공의 빛을 쪼일 수 있다.

단문 명언


*성격의 씨앗을 뿌리면, 운명의 열매가 열린다.
*승리는 노력과 사랑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승리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1퍼센트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다.
*우리가 어느 날 마주칠 재난은 오늘 우리가 소홀히 보낸 시간에 대한 보복이다.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
*비장의 무기가 아직 나의 손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설정한 것들이다.

생각을 디자인하라


만약 그대가 파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파멸하고 만다. 이기고자 할 때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승리는 그대에게 미소 짓지 않는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활한다면 그대는 실패한다. 성공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성공은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의 정신 상태에서 결정된다. 만약 그대가 낙오자가 될까 우려한다면 낙오자가 될 것이다. 당신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된다는 신념을 품어라. 기회가 언제나 힘이 강하고 재빠른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성공은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온다. -나폴레온 힐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20. 01:00






인류애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프로필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1875~1965)는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프랑스-독일 국경 지대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독일어로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에서 루터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이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899년 철학박사 학위, 그 이듬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5년 박애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선교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발표했고 1913년 의학박사가 되었다. 중앙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랑바레네Lambarene(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현재 가봉공화국)에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우고 당시 비참한 상태에 있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평생 의료 봉사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랑바레네가 프랑스령이 되자 독일 국적 때문에 전쟁 포로로 잡히는 등 수모를 겪었으나 결국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고,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출생 1875년 1월 14일 알자스 카이저스베르크Kaisersberg에서 출생(독일령이었다가 1차 대전 후 다시 프랑스령)
사망 1965년 9월 4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사망 (향년 90세)
별칭 세계의 위인, 인도人道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활동분야 의학, 종교, 예술
수상 괴테상(1928), 노벨평화상(1952), 적도성십자훈장(1960)

명언 모음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생생한 진리는 인간의 사색에 의해 산출된 것뿐이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지녔고 따라서 존중해야 할 의미를 지닌다.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베풀 수 있는지 터득한 사람뿐이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더 많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 사람이다.

*성공이 행복의 열쇠는 아니다. 행복이 성공의 열쇠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면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타인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것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밖이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올바른 것을 찾기 전에 한참을 기다려야 할지라도, 설사 몇 번의 시도를 해야 할지라도 용기만은 잃지 말라. 실망을 맞아들일 준비는 하되, 원하는 것을 포기하진 말라.
*성실성이란 정신생활의 기본이다. 성실성이 튼튼히 자리하는 곳에 평온이 깃든다. 평온은 성실성의 깃발이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원을 모든 생명에게로 넓히기 전까지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

*독서는 단지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다.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당신은 당신의 동료를 위하여 잠시라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해도 당신은 남들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에게 돈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자존심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일화


슈바이처가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때 기자들이 슈바이처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왔다. 1등칸과 2등칸을 살펴보았지만 슈바이처는 없었다. 그러다가 3등칸에서 사람들을 진찰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발견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박사님! 왜 3등칸을 타고 가십니까?” 그러자 슈바이처가 대답했다.
“이 기차에는 4등칸이 없더군요.” 기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슈바이처가 다시 말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1등칸이나 2등칸에 있는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9. 02:30






 

 

 

한국의 온돌문화

고려를 거쳐 조선에서 대중화

 

 






온돌이 가옥의 일반적인 구조가 된 것은 고려 시대이며, 전국으로 보급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라고 합니다. 온돌이라는 용어도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구들을 놓은 방 전체를 온돌방이라 불렀습니다.

 

온돌과 한옥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 고온 다습한 여름과 추운 겨울이 있기 때문에 한옥韓屋은 난방을 위한 온돌(구들)과 더위를 피하기 위한 대청마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루는 남방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 남쪽 지방에서 발전해 북쪽으로 전파된 반면, 온돌은 추운 북쪽에서 발달해 차츰 남쪽으로 전해진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합쳐서 한옥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구조적 특징이며 자랑입니다.

 

전통 방식의 온돌에서 개량 온돌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추운 계절인 설 명절이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불을 많이 지펴 따끈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오순도순 웃음꽃을 피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고향집이 이런 온돌 방식을 고수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온돌의 변형 방식으로 보일러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넣어서 방바닥을 데우는 한옥의 전통적인 난방 방법인 온돌이 ‘전통 온돌’이라면, 요즘 우리나라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온수 파이프에 의한 온돌을 ‘개량 온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아파트뿐 아니라 단독주택도 보일러를 설치하고 방바닥에 파이프나 호스를 매설하여 온수를 순환시키는 방식의 온돌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이것 역시 우리 전통의 온돌 난방 방식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개량 온돌’은 누가 개발한 것일까요?

 



개량 온돌 난방을 처음 적용한 미국의 건축가

현대 온돌의 역사를 논한다면 미국의 저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1916년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 설계를 맡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부호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1837~1928) 집에 머물렀습니다.

 

오쿠라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된 부산에 들어와 잡화점을 시작으로 금융(다이이치은행 조선 지점), 건설, 압록강 벌목으로 떼돈을 벌어 조선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긁어 갔던 인물입니다. 오쿠라는 1914년 총독부가 식민 통치의 치적을 홍보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궁궐 전각을 헐어 낼 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구워삶아 세자의 동궁東宮으로 사용되던 자선당資善堂을 뜯어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다시 세웠습니다.

 

프랭크는 오쿠라가 자선당을 옮겨 놓은 ‘코리안 룸Korean Room’의 온돌을 운명처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온이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결코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봄이 온 듯했다. 우리는 곧 몸이 따뜻해지고 다시 즐거워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았다. 눈에 보이는 난방 시설도 없었고, 이것으로 난방이 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난방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Gravity Heat. 1943)

 

프랭크는 바닥을 데우는 난방 방식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 방식으로 보고 태양열보다 좋은 난방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큰 감동과 영감을 받은 프랭크는 미국에 돌아가 1930년대 후반부터 주택을 설계할 때 처음으로 온돌식 난방을 적용하면서 미국의 온돌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랭크는 자신이 ‘중력 난방(Gravity Heat)’이라고 명명한 이 난방 기술을 자신이 설계한 약 30동棟의 단독 주택에 적용했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 유산 세 가지를 들라 하면 ‘한글’과 ‘금속활자’ 그리고 ‘온돌’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계속적으로 온돌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한옥이나 궁궐의 온돌을 살펴보면 놀라운 과학적 발명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과학적인 온돌 문화를 우리 조상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발명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 출발한 이 온돌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것도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몫입니다. 인류의 주거 문화 개선을 위해서도 온돌 문화를 알리고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8. 09:40





 

 

한민 문화

온돌의 역사

 

 

 

 

한국인이 온돌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였습니다. 온돌의 시기는 지금부터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회령 오동의 구석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구들로 추정되는 형태의 바닥과 벽이 발굴됨으로써 그 시기가 구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흥륭와興隆窪문화는 BCE 6200년 ~ BCE 5200년 사이의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홍산紅山문화(요하문명)에 속하는 흥륭와문화는 동아시아 최초로 밭농사와 온돌 문화가 발생한 우리 문화의 기원지입니다. 이 흥륭와에 원시 온돌이 있었습니다.

 



고조선 온돌

북한에서는 영변군 세죽리, 시중군 로남리, 요령성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 등에서 고조선 시기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같은 온돌 유적은 중국 동북부의 무순시에서도 발견됐습니다. 온돌이 발견되는 지역은 중북 북부이거나 만주 지역인데 이들 지역은 홍산은 물론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뻗어 나간 흉노족도 온돌을 놓고 살았습니다. 실제 흉노족이 살던 시베리아의 현지 민속박물관을 보면 온돌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옥저의 온돌

북한 자강도 증강군 토성리 유적에서 고구려 초기의 4개의 온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4세기경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 온돌이 등장하고 안악 고분 3호와 약수리 무덤 벽화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고 또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는 ‘그 풍속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인들이 오래전부터 온돌 시설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옥저에도 온돌이 발달했습니다. 기원전 4~3세기 북옥저인들의 주거 유적에서 원시 형태의 온돌을 비롯,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쪽구들이 확인되었습니다. 북옥저인들이 발명한 쪽구들은 고구려 외곽을 거쳐 중심부로 유입됐으며 대진국(발해)의 지배층도 애용했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17. 01:30






이슬람문화

라마단Ramadan

 

 

아랍어語로 ‘더운 달’을 뜻한다. 이슬람교도는 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5번의 기도를 드린다. 여행자·병자·임신부 등은 면제되지만 대신 이후에 별도로 수일간 금식해야 한다. 이슬람 신자에게 부여된 5가지 의무 가운데 하나이며, ‘라마단’이라는 용어 자체가 금식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 물, 성관계도 금지된다.

 




라마단은 1년이 354일인 이슬람력의 9번째 달 첫날에 시작된다. 따라서 라마단의 기간은 해마다 열흘씩 빨라진다. 라마단은 약 1,400년 전 무함마드가 알라로부터 코란의 계시를 받은 것을 기려 헤지라Hegira 2년(623년)부터 9번째 달의 시작을 알리는 초승달이 나타난 다음 날부터 금식을 시작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라마단이 동시에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각국의 종교위원회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새로운 달을 알리는 초승달이 목격되는 시점을 기해 라마단의 시작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라마단 기간에는 관공서와 기업들이 출근 시간을 늦추고 퇴근 시간을 앞당기는 방식으로 근무시간을 단축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6. 01:30






호모데우스




신이 된 인간,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피엔스 신드롬’을 일으킨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신작이다. ‘호모데우스’는 7만 년의 역사를 거쳐 마침내 지구를 정복한 인류가 이제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이야기한다. 사이엔스 종이 협력이라는 도구로 집단을 만들고, 허구를 믿는 능력으로 사회를 이룬 과정처럼, 과학의 발달로 인본주의의 의미가 퇴색해 더 이상 신의 가치나 인간 중심 이데올로기의 의미가 사라질 미래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호모데우스Homo Deus’의 ‘호모Homo’는 ‘사람 속屬을 뜻하는 학명’이며, ‘데우스Deus’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신god’이라는 뜻이다. 즉,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지난 시기 인류를 괴롭히던 ‘기아, 역병, 전쟁’을 보기 좋게 진압하고, 이제껏 신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불멸, 행복, 신성’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 물결은 거세서 개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것인지, 어디까지 타협하고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지’를 논의해야 할 갈림길에 섰다.

1부에서는 인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존재의 특수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와 그 외 동물들의 관계를 살핀다. 2부에서는 인류가 지난 천 년 동안 이룩한 기이한 세계와 우리를 오늘날의 교차로로 데려온 길을 돌아본다. 3부에서는 21세기 초 우리가 처한 환경과 가능한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15. 02:30






 

영국에 연이은

IS테러

 

 

 

지난 3월 22일(이하 현지 시각) 영국 런던London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가 발생했다. 이날 오후 은색 옷을 입은 괴한 1명이 국회의사당을 지키던 경찰관 1명을 칼로 찔렀다. 범인은 국회의원들이 있는 의회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른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와 동시에 의사당 바로 옆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또 다른 괴한이 모는 재규어 승용차가 시민과 관광객들을 덮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총격 사건 발생 당시 국회의사당에는 하원 의원들이 있었고, 총 소리가 나자 긴급하게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가 발생한 곳은 관광 명소인 데다 주변에 레스토랑과 바 등이 몰려 있어 평소에도 관광객과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범인은 영국 남부 켄트에서 태어난 50대의 칼리드 마수드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슬람국가(IS)의 온라인 선전 매체 ‘아마크Amaq’는 마수드가 “IS의 전사”라며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자처했다.

 


지난 달 5월 22일에는 맨체스터Manchester의 한 공연장에서 폭탄이 터져 22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다쳤다. 이번에도 IS는 자신들이 테러 배후임을 주장했다. 범인은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리비아계 대학생 살람 아베디(22)로 밝혀졌다.

 

이어 6월 3일 오후 10시쯤에는 영국 런던 도심에 있는 런던 브리지와 인근 상가들이 소재해 있는 번화가에서 테러범 3명이 차량과 흉기를 이용한 테러를 자행했다. 범인들은 승용차를 몰고 사람들이 밀집된 인도로 돌진했다. 차에 받힌 사람들이 하늘로 튀어 올라 주변 일대는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범인들은 차가 돌진할 수 없게 되자 흉기를 들고 인근의 버러 마켓Borough Market으로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공격했다. 범인들은 “이것은 알라를 위한 일”이라 외쳤다고 한다. 이번 공격으로 시민과 관광객 7명이 숨지고 48명이 부상을 당했다. 런던경찰청은 5일 범인 2명의 신원을 공개했다. 그중 한 명은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시민권자였다. IS는 선전 매체를 통해 “IS에서 파견한 보안부대가 어제 런던에서 공격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테리사 메이Theresa May 총리는 4일 오전 비상대책회의를 마친 뒤 이슬람 극단주의를 잇따른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지금까지보다 훨씬 엄격

하게 이슬람 극단주의를 색출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말해 찬반 양론을 일으켰다. 테러 행위를 예방하고 처벌했던 종전의 대對테러 정책에서 벗어나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사상 자체를 억제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의 연이은 테러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IS가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라마단Ramaān 시작되던 시점인 지난 5월 26일 IS가 잡지나 유튜브 등을 통해 “IS의 땅에 올 수 없는 유럽의 이슬람교도 형제들이여, 본토에서 그들의 집이나 시장, 도로나 광장을 공격하라.”고 주문했다고 보도했다. 자생적인 ‘외로운 늑대’형 테러를 부추긴 것이다. 이슬람 금식禁食 성월聖月인 라마단 기간에 테러가 잇따르면서 ‘피의 라마단’이 재현되는 양상이다. 라마단이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IS가 2014년 이라크 북부 모스크에서 왕국 수립을 천명한 뒤 라마단을 테러와 양민 학살에 악용하면서부터다. 미국 워싱턴에 기반을 둔 중동미디어리서치기구(Middle East Media Research Institute, MEMRI)에 따르면 지난해 라마단 기간은 9·11 테러 이후 세계적으로 테러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한다. 요르단, 미국, 프랑스, 레바논, 터키, 방글라데시 세계 각지에서 테러가 발생했고 420명이 숨지고 730여 명이 다쳤다. 올해 라마단은 지난 5월 27일 시작됐으며 6월 25일 끝났다. 올해 라마단 무렵 발생한 테러 사망자만 180명에 육박한다. 거룩해야 할 종교 성일이 피로 얼룩져 버렸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14. 01:30




지구촌 이상 기후로 몸살

지중해에선 폭염暴炎,

인도에서는 폭우暴雨 피해

 






지구촌이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다. 터키와 그리스 등 지중해 지역에서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됐고, 몬순기에 접어든 인도에선 평년보다 훨씬 많은 양의 비가 내려 침수 피해가 속출했다.

 

7월 2일(현지 시간) 터키 남부 안탈리아Antalya에선 수은주가 섭씨 45.4도까지 올랐다. 이스탄불Istanbul은 사상 최고 기온인 39.2도를 기록했다. 이즈미르 지방에선 고온에 산불까지 발생해 500여 헥타르의 숲이 불에 탔다. 기상학자들은 북아프리카의 더운 공기가 북상하여 유럽 지역에 이상 고온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스에서도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됐다. 수도 아테네Athens를 포함해 대부분 지역에서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졌으며 오존 수치 또한 매우 높았다. 불가리아도 44도의 기록적인 폭염으로 수도 소피아Sofia에서만 5명이 숨졌다.

 


중동도 폭염에서 예외가 아니다. 아랍에미리트UAE 기상센터에 따르면 지난 6월 15일 아부다비Abu Dhabi 부근 리와 사막 마디나트 자예다트 지역의 낮 최고 기온은 50.8도를 기록했다. 6월 16일 낮과 17일에는 리와 사막 메자이라 지역의 기온이 각각 51.5도, 50.5도까지 치솟았다. 이란 아흐바즈Ahvaz, 쿠제스탄Khuzestan 등 이란 남부 지역의 낮 최고 기온도 50도 안팎까지 오르면서 이 지역 한 대학 기숙사에서는 학생들이 에어컨 설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영국과 미국이 열대지방인 태국보다 수은주가 더 높이 올라가는 등 곳곳에서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이 깨지고 있다. 미국의 남서부 지역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네바다 주에는 기상청에서 ‘매우 위험한 수준의 폭염’이 몰려오고 있다는 경고를 내렸다. 지난 6월 18일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Sacramento의 평균 기온은 섭씨 41.1도로, 75년 만에 최고 기록이던 섭씨 40.5도를 경신했다. 애리조나 주는 최근 1990년에 기록했던 역대 최고 6월 기온 섭씨 ‘50도’에 근접한 49도를 기록했다. 애리조나 지역 주민들은 SNS에 ‘녹아버린 플라스틱 벽’, ‘더위에 쓰러진 우편함’, ‘자동차에서의 빵 굽기’ 등의 사진을 올리며 더위를 하소연하고 있다.

 

연교차가 크지 않은 영국도 유례없는 이상 고온 현상으로 열대기후 지역인 태국보다도 높은 평균 기온을 보이고 있다. 여름에 선선하고 겨울에 따뜻한 영국의 7월 평균 기온은 섭씨 16.4도, 런던은 17.6도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지난 6월 18일 런던의 최고 기온은 섭씨 31.9도를 기록하며 평년보다 10도 가량 상승했다. 특히 남부 지역의 현재 기온은 인도 방갈로Bangalore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물론 지중해성 기후인 그리스보다도 훨씬 높다. 이런 고온 현상은 유례없는 일로, 남부 및 남동부 지역의 기온은 평년보다 섭씨 10도가량 높은 편이다.

 


반면 몬순기에 접어든 인도에선 폭우가 계속되고 있다. 비는 6월부터 계속됐으며, 강우량은 기록적인 수준이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191.9㎜가 내렸는데 지난 2007년 150.9㎜의 강우량을 기록한 이후 10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또 평년 강우량 대비 289%에 달한다. 수도 뉴델리New Delhi뿐만 아니라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 북서부 라자스탄 주 등에서도 강우량이 평년 수준을 웃돌아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한편 세계기상기구WMO(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는 올해도 지난해에 이어 예외적으로 더운 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국NOAA(US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과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European Centre for Medium-Range Weather Forecasts)의 분석을 인용하여 지난 5월 한 달 동안 육지와 바다 표면에서 관측된 기온은 지난해에 이어 관측 사상 두 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이는 아직 엘리뇨El Niño 영향을 받지 않은 결과라고 하므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열기는 강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때 이른 불볕더위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미국 마노아 하와이대 연구팀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2100년쯤에는 세계 전체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매년 살인적인 폭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3. 02:00




 

 

 

서양에서 인정받는

우리민족의 온돌문화

 

 




대체로 서양식 난방은 히터의 난방 열기가 위로 그냥 날아가면서 실내는 여전히 춥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온돌을 제대로 경험해 본 외국인들은 방의 밑에서부터 골고루 열이 위로 올라와서 몸을 덥혀 주는 온돌을 그리워합니다.

 

서양인들이 온돌을 경험한 기록이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1690년에 발간한 『북과 동 타르타리아지』에서 네델란드의 위트센은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문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라고 온돌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미국의 과학자 퍼시벌 로웰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1885)에는 “온돌은 겨울철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일종의 화로 역할을 한다. 방 밖엔 난로용 구멍이 있는데 이것을 ‘아궁이’라 부른다. 불을 때면 더운 연기가 벌집처럼 돼 있는 미로를 따라 방바닥에 넓게 퍼진다. 아이디어가 뛰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록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과학기술연구소(CNRS)는 에너지 절약의 일환으로 온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온돌을 사용할 경우 입식 생활에 사용되는 강제 환기식 난방 방법보다 약 20% 이상의 에너지가 절약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자기들 중심으로 이미 바닥 난방 설비의 독자적인 ISO(국제표준화기구) 기준을 만들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지금 한창 연구하는 바닥 난방의 근원이 우리의 온돌임을 정확히 알리고 더 늦기 전에 온돌의 현대화와 산업화를 서둘러야 할 때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2. 01:00




 

리민족

온돌의 효능

 

 

서양에서 발달한 라디에이터radiator(방열기)를 이용한 공기 난방법은 더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가는 대류 현상 때문에 바닥을 따뜻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온돌은 바닥을 먼저 데웁니다. 그러므로 머리는 차게 하고 발은 따뜻하게(두한족열頭寒足熱) 하여 인체 면역력을 높여 줍니다.

 



두한족열이라는 말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말로 달리 쓸 수 있습니다. 수승화강이란 차가운 기운을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내려가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한의학의 원리이자 수행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동양은 수승화강水昇火降의 도道적 온돌 문화이지만, 서양은 침대식 화승수강火昇水降 주거 문화입니다.

 

구들은 불을 지피지 않을 때도 방바닥에 축적된 열이 방 안을 데우는 방식(고체축열식)이어서 에너지 효율적입니다. 또한 실내 온도를 공기 난방에 비해 낮게 유지해도 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를 줄일 수 있습니다. 구들의 재료는 열손실 계수가 낮아 대부분의 가정에서 쓰고 있는 온수 파이프 난방 시스템보다도 훨씬 적은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게다가 물리·화학적으로 안전한 자연 광물질 재질은 거의 영구적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11. 17:35






 

 

한국이 발명한 인류 최고의 난방

한옥의 온돌문화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 방식이다. 이것은 태양열을 이용한 복사 난방보다도 훌륭하다. 발을 따스하게 해 주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난방이다

-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

 

온돌은 한국 고유의 독특한 난방 방식이고 온돌 문화는 우리 겨레가 가진 삶의 예지와 숨결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보물이자 훌륭한 자산입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시골 마을을 회상해 보면 솥을 걸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불로 방은 뜨끈뜨끈했고 그 안에서의 잠은 정말 편안했던 꿀잠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전통 온돌방에 불을 피워 놓고 등을 지지러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아궁이 불이 굴뚝을 통해서 연기로 나오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정말 아름답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풍광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어렸을 적에는 그냥 그게 좋은 줄만 알았지 그걸 ‘온돌’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왜 방바닥에서 잠을 자나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은 케이팝K-Pop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대장금’이나 ‘주몽’ 열풍이 불었을 때 외국인 팬들의 온라인 토론장에서는 우리들의 난방 방식에 대해서 토론이 붙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침대에서 자고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데 한국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을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본 겁니다. 온돌은 주택의 실내 온도를 섭씨 1316도로 유지할 있을 정도로 뛰어난 난방 장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돌방에 신체를 최대한 접촉하기 위해서 신발을 벗는 좌식 생활을 주로 했습니다. 그런 거주 문화가 외국인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비쳤던 겁니다.

 

이는 또한 중국인과 일본인에게도 다르게 비춰졌을 겁니다. 일본의 이로리(いろり) 등은 직접 열을 이용하는 방식인 비해 온돌은 구들장과 고래(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길)를 데워 발생하는 간접 복사열을 난방에 사용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온돌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 동북부와 몽골 일부 지역에서도 온돌과 비슷한 원리로 난방을 했지만 잠자는 부분에만 구들을 설치한 중국 동북부의 ‘쪽구들’ 방식과 게르 바닥에 구들을 놓은 몽골 방식은 방바닥 전체를 데우는 ‘통구들’인 우리 온돌과는 분명 다릅니다.

 


온돌의 난방 방식과 구조

그럼 본격적으로 온돌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돌은 그야말로 ‘따뜻한 돌’입니다. 구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구들은 ‘구운 돌’의 약자입니다. 요즘에는 추울 때 핫팩hot pack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에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논두렁 밑에서 돌을 구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곤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달궈진 돌은 난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아마도 거주하는 공간의 아래쪽을 달궈야겠다는 생각도 이런 돌을 달구는 것과 같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온돌 시스템은 아궁이, 방고래, 개자리, 구들, 굴뚝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옥의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기가 아궁이 아궁이 후렁이 부넘기 구들개자리 방고래 고래개자리를 거쳐 굴뚝으로 빠져나갑니다.

 

고래

온돌의 핵심은 ‘고래’에 있습니다. 고래는 방구들을 구성하는 돌 사이의 빈 공간으로 뜨거운 연기가 지나가는 길입니다. 구들은 이 고래 위에 놓이게 됩니다. 방바닥을 데우는 것은 구들을 어떻게 놓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궁이 쪽이 깊고, 굴뚝 쪽이 얕아 옆에서 보면 꼭 고래등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불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뜨거운 공기가 고래 속을 빙빙 돌아 구들장을 달구는 구조입니다.

 

아랫목은 뜨거운 연기가 지나는 고래와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윗목에 비해 따뜻합니다. 또한 아랫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습니다 그리고 열의 전달이 미약한 윗목은 좀 더 빨리 달구기 위해서 얇은 돌을 놓습니다.

 

부넹기(부넘기)

불과 뜨거운 연기는 아궁이에서 ‘부넹기(부넘기)’라는 구멍을 통해 고래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부넹기는 ‘불이 넘어가는 고개’, ‘불을 넘기는 고개’란 뜻으로 ‘불목’이라고도 불리는데, 방고래가 시작되는 어귀에 조금 높게 쌓아 불길이 아궁이로부터 골고루 방고래로 넘어가게 만든 작은 언덕입니다. 구멍이 작아 열기가 바깥으로 새지 않고 고래로 잘 빨려 들어가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구들 개자리, 고래 개자리

고래를 통과한 열기는 ‘구들 개자리’로 이동합니다. 구들 개자리는 부넘기 너머에 파놓은 골로서 이곳에서 고래로 열기가 균등하게 전해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이 고래 전체로 골고루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래 개자리’는 굴뚝과 구들 사이에 있는 벽 바로 안쪽에 깊게 파인 고랑입니다. 개자리는 그 중에서 굴뚝에 이르기 직전에 깊이 판 통로를 말하는데 이것은 열과 연기가 좀 더 오래 머물도록 하며, 재티 등을 걸러 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구들과 고래가 제대로 놓아져야만 따뜻한 온돌방이 됩니다. 우리 선조들은 열이 이동하는 방향과 가열된 열기의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게 굴뚝을 고안하는 등 과학적인 방식으로 한옥을 지켜 왔습니다. 구들을 놓을 때 아궁이, 고래 구멍 및 굴뚝의 배치는 지역의 바람 방향, 기후 조건에 따라 절묘하게 맞출 수 있는 과학적 슬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을 잘못 맞추면 굴뚝으로 빠져나가야 할 열과 연기가 거꾸로 아궁이로 되돌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10. 02:00




 

 

영국의

연합왕국의 형성과정

 

 

영국을 이루는 이들 네 나라를 홈 네이션 Home Nation이라고 하는데, 웨일즈는 1282년 에 에드워드 1세가 정복한 뒤 반포한 러들 랜 법Statute of Rhuddlan에 의해 잉글랜드 왕 국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재위 군주의 왕세자에게 웨일즈 공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지금의 웨일즈 공은 엘 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 로, 1969년에 봉해졌다.

 

웨일즈가 잉글랜드에 공식적으로 합병된 것은 16세기이다. 헨리 8세가 1536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한 의회로 통합하였 다. 그동안 웨일즈에는 자치권이 거의 없 었으나, 1999년에 웨일즈 국회가 공식적 으로 다시 개원되었다.

 



스코틀랜드는 1603년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 스 6세가 잉글랜드 및 웨일즈 왕국의 통합 왕 제임스 1세로 등극하기 전까지 자국의 왕 정과 국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1707년 에 잉글랜드와 연합하였다.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 여왕은 스튜어트 왕조라는 한 줄기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따로 통치되던 것을 연합법을 통해 서로의 자치권 을 보장하며 통합한 것이다. 이로써 그레이 트 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지금까지 영국의 홈 네이션으로 남아 있다.

 

1801년 연합법으로 아일랜드 왕 국이 잉 글랜드 왕국에 편입되어 그레이트 브리튼 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2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남부의 아 일랜드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였 고 북아일랜드는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그 대로 남았다. 북아일랜드는 이후 독립의 과정을 거치다 지금은 독자적인 의회를 가 지면서 영국의 홈 네이션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국의 국호는 지금의 그 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바뀌었다. 영국의 현재 국기인 유니온 기The Union Flag, Union Jack 또한 이를 반영하였는데, 먼 저 잉글랜드 기와 스코틀랜드 기가 통합되더 니, 이것이 다시 아일랜드 기와 합쳐졌다. 국 기에도 세 국가가 연합한 흔적이 선명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9. 23:50




 

영국명의 유래

 





유럽 대륙 서북쪽에 있는 섬나라 영국. 영 국의 진짜 이름은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 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줄여서 Great Britain 혹 은 United Kingdom이라고 한다.

 



흔히 GB, UK로 간단히 표기한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세 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인 그레이트 브 리튼 섬 남동부의 잉글랜드England, 북부의 스코틀랜드Scotland, 남서부의 웨일즈Wales, 그리고 아일랜드 섬 북동부에 위치한 북 아일랜드Northern Ireland라는 네 자치 국가로 이루어진 연합 왕국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국英國’은 ‘잉글랜드 England’의 한자 표기이다. ‘영英’은 잉글랜드 의 잉Eng을 음역音譯한 것이고, ‘국國’은 랜드 land를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고 영국이 곧 잉글랜드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잉 글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홈 네이션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브리튼Britain 혹은 유케이 UK라고는 하지만 잉글랜드라고 하지는 않 는다. 특히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북아일 랜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9. 8. 01:30




 

로마제국의 지배와

프랑크족의 등장

 




 

갈리아는 기후도 온화하고 땅도 비옥한 편이어서 번영을 누렸다. 귀금속 장신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골족 장인들은 유리와 비누, 도자기 등을 만들었다. 골족은 평화스럽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골족 전사들은 적의 머리를 베어 허리춤에 달고 다니곤 하여 아주 용맹스런 사람들로 인식되어 여러 나라의 왕들이 이들을 용병으로 이용하였다. BCE 385년에는 알프스를 넘어온 골족 전사들이 로마 시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갈리아는 수세에 서게 되었고 로마의 정복대상이 되었다.

 

프로방스를 속주로 지배하던 로마는 BCE 1세기 중엽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 정복전쟁을 ‘갈리아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그 전쟁을 지휘한 인물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갈리아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갈리아의 도시들을 기하학적인 설계에 따라 정연한 모습으로 건설하였다. 열주들이 늘어선 광장, 신전, 공회당, 대규모 극장, 원형경기장, 공중목욕탕 등이 세워졌다. 토목에 능한 로마인들은 상수도도 설치하고 포석으로 포장된 견실한 도로를 건설하였다.

 



골족은 점차 로마의 지배에 동화되었다. 로마식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귀족들은 자제들을 학교에 보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게 만들었다. 그 결과 골족의 과거보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사상에 물든 골족 엘리트층이 형성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는 5세기에 끝이 났다. 게르만족의 일파로서 라인강을 건너온 프랑크 족이 갈리아를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다.

 

이들의 나라는 로마제국처럼 법체계를 갖춘 정연한 기구와는 거리가 멀어 왕이 아들들에게 왕국을 상속재산으로 분할해 주었다. 그래서 프랑크 왕국은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다가 결국 동서 프랑크 왕국(프랑키아)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이 프랑스가 되고 동프랑크 왕국이 독일 즉 신성로마제국이 되었다.

 

10세기 말에는 파리와 그 주변지역을 영지로 갖고 있던 카페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파리는 프랑스의 명실상부한 수도가 되었다. 카페 왕가의 왕들은 지방의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수도 파리에 행정기구와 사람 그리고 돈이 몰리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 그 과정은 가속되어 프랑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다. 그 결과는 오늘날의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인구의 5분의 1, GDP의 4분의 1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프랑스의 철도노선과 고속도로 노선도 파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방사형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프랑스의 중앙집권적 경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이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