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7. 9. 7. 00:26

 




프랑스의 별칭

엑사곤의 지정학적 위치

 

 



프랑스는 영국, 독일과 더불어 유럽의 중심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독일과 더불어 유럽통합을 주도해왔다. 현재 27개국으로 구성된 초국가연합 유럽연합(EU)이 그 노력의 결과다. 프랑스는 인구(6,500만)도 상당할 뿐 아니라 영토도 약 55만㎢로 한반도의 두 배 반이나 된다.

 


프랑스 땅을 프랑스 인들은 흔히 ‘엑사곤’(Hexagone)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땅이 6각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육각형의 3면은 지중해와 대서양, 북해 등 바다에 연해 있으며 다른 2면은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그리고 나머지 한 면은 라인 강과 접해 있다. 프랑스는 위치상 남유럽과 북유럽에 걸쳐 있다.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지중해성 기후가, 서부와 북부는 대체로 서안해양성 기후라서 겨울에도 온화한 편이다. 동부로 갈수록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짙어진다. 프랑스의 이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인종도 금발을 주종으로 하는 북유럽 인종과 검은 머리나 갈색 머리의 남유럽 인종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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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9. 6. 23:24

 




골족에서 비롯된

프랑 시원 역사




 

프랑스라는 나라 이름은 중세초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 땅(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갈리아’로 불렸다)으로 쏟아져 들어온 프랑크 족의이름에서 기원하였다. 갈리아에 그리스 로마 문명을 가져다준 로마인들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BCE 125년경인데 지중해 연안의 프로방스 지방이 처음으로 로마 속주가 되었던 곳이다. 프로방스라는 이름은 로마의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키아’에서 나온 말이다. BCE 1세기 중엽에는 갈리아 전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갈리아 땅에는 로마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고 도처에 로마식 도시가 세워졌다.


원래 갈리아(프랑스어로는 ‘골Gaul’이라고 한다) 땅의 원주민은 켈트 족이다.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르네 고시니와 알베르토우르데조의 만화 『아스테릭스』시리즈는 바로 BCE 1세기 중반 로마정복기의 골족을 그린 만화이다. 로마군대를 골탕먹이는 골족 영웅 아스테릭스는 이제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문화캐릭터가 되었다.

 



골족은 ‘드루이드’라는 사제가 주관하는 다신교를 숭배하였다. 드루이드들은 농업과 밀접히 연관된 달력을 보관하고 축제일을 결정하였으며 심지어는 전쟁을 결정하는 데도 관여하였다. 드루이드들은 매년 한차례 총회를 열었는데 이 총회를 통해 다양한 도시들간의 갈등이 해결되었다고 하니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것이다.


드루이드교는 후일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쇠퇴하였으나 이 시기 골족의 몇 가지 관습들은 지금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는 영혼불멸의 상징이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겨우살이를 리본에 묶어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갈리아에는 일찌감치 그리스인들도 바다를 건너와 정착하였다. 이오니아 지방의 포카이아 인들이 그들인데 현재의 남부 해안지역에 정착하여 마르세유를 세웠다(BCE 6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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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9. 4. 06:00




찰스다윈의 진화론과 

자연과학적인 유물론




17세기 영국의 경험주의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고, 이로 인해 19세기에 이르러 유물론적인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1854년에 괴팅겐에서 열린 자연과학자회의는 19세기 유물론의 시대정신을 확증하는 계기가 됐다. 결국 유럽인들의 사고는 감각적인 데이터(datum)라고 하는 부분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치의 증대와 인간성의 내적인 빈곤은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유물론에 입각해서 사고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고, 유물론이 탄생하게 되는 간접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헤겔 좌파의 유물론은 이러한 사회적 풍조의 영향으로부터 출범하게 된 것이다.

 

유물론적인 사고를 대변하는 자연과학적 저서로는 1845년에 나온 카알 포크트Karl Vogt의 『생리학적인 편지들(Physiologische Briefe)』, 1852년에 출간된 야콥 몰레쇼트Jakob Moleschott의 『생명의 순환(Kreislauf des Lebens)』, 1855년에 나온 루우트비히 뷔히너Ludwig Büchner 『힘과 물질(Kraft und Stoff)』, 1855년에 나온 하인리히 쏠베Heinlich Czolbe의 『감각론 신설(Neue Darstellung des Sensualismus)』 등이 유명하다.

 

당시의 자연과학적 저술은 고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 볼 수 있는 유물론적 사고가 기본 바탕에 깔려 있다. 세계는 생성의 과정에 있으며, 물질과 운동의 힘만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운동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제시된 아낙사고라스의 “정신(Nous)”,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나 이를 본떠서 세계를 창조한 “데미오우르고스Demiourgos 신神”, 아리스토텔레스가 궁극의 운동인으로 제시한 “부동의 원동자”, 그리스와 로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모든 신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학문을 탐구하는 인간의 의식이나 영혼은 물질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뇌腦의 작용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정신에서 나오는 사상과 물질적인 뇌의 관계를 육체에서 흐르는 땀[汗], 간에 붙어 있는 쓸개, 콩팥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오줌에 비유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사유하는 정신은 신체적인 감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뇌 활동의 부수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물학의 진보는 유물론적 사고를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 1858년에 차알스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은 『자연도태에 바탕을 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을 간행하여 모든 종은 하나의 유일한 원세포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진화론을 도입했다. 1871년에 그는 『인간의 기원과 종에 관한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을 출판하여 인간도 진화해 왔음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9세기 말의 시대정신은 유물론적인 “일원론(Monismus)”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즉 1906년에 발족된 “일원론자협회(Monistbud)”는 ‘많음이 근원의 하나(das Eine)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부르짖었다. 근원의 ‘하나’를 에른스트 핵켈Ernst Haeckel(1834~1919)은 “실체(Substanz)”라고 했고,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wald(1853~1932)는 “에네르기(Energie)”라 했다. 특히 핵켈은 원자가 기계론적으로 진화하여 오늘날의 인간에 이르렀다고 함으로써 다윈보다 더 급진적인 진화론을 주장했다. 그는 1868년에 펴낸 『자연적인 창조의 역사(Natürliche Schöpfungsgeschichte)』에서 생명의 변종은 저절로 생긴다는 , 원생동물이 계속적으로 분화함으로써 고등생물이 생겨났다는 것,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은 유인원類人猿이라는 것 등을 주장했다.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연과학적 유물론은 범신론汎神論(Pantheismus)으로 흐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즉 전통적으로 분리되어 각자 유지되어 왔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즉 초월적인 신과 현실세계라는 이원성은 하나로 융합되어 기계론적 일원론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일원론은 오직 하나의 실체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일원론에서는 물체와 정신, 신과 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만이 실재할 뿐이라는 얘기다. 그 하나는 바로 신이요 곧 세계이다. 그런데 만일 초월적인 신과 자연세계가 분리된다면, 인격적 유신론이 설 자리가 있겠지만, 일원론의 입장에서는 무신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근대에 발생한 범신론의 부활은 이런 입장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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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9. 3. 03:30



 

감각주의와 유물론의

철학자 이에르바흐

 

 

 

19세기 중반은 헤겔 좌파의 유물론이 출범하는 시기였다. 헤겔 좌파의 사상적인 혁명은 슈트라우스D.F Strauß가 1835년에 『예수의 생애(Leben Jesu)』를 출판하면서 비롯된다. 책에서 그는 초자연적인 , 영혼이나 초월적인 등이 모두 사라지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들과 그 변화의 법칙들만이 남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해서 신의 계시가 해석되고 인간이 종교적인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자연종교가 말해 주듯이, 19세기에는 유물론이 득세하게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일등공신은 바로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1804~1872)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포이에르바흐의 사고는 어떠했을까? 그는 1839년에 “절대자”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을 담은 논문을 발표하면서 헤겔철학에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당시 헤겔의 철학은 독일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중심이념은 절대정신이었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과정이란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국가란 절대정신의 대변이자 실현도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즉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이 현실적인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규정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극적으로 반기를 든 철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헤겔을 극단적인 관념론자라고 비판한 포이에르바흐이다. 그는 헤겔이 말하는 절대자란 자신의 철학적 사고 안에서 말라 죽어 버린 채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빈껍데기의 신학적 성령聖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절대관념론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향하게 된다. 포이에르바흐는 모든 존재란 원초적으로 개념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알려지는 물질이고, 물질적인 토대에서 철학적 사유가 비롯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신체를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의 권리를 부활시키게 될 수밖에 없었고, 로마시대에 스토아학파 창궐 이후 오랫동안 경멸을 당해 왔던 유물론을 철학적 사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정신(영혼)과 물질(신체)의 관계에 대해서도 포이에르바흐는 ‘신체가 영혼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헤겔의 근본철학에 대립한다. 헤겔의 관념론에서 보면, 현실적인 인간의 모든 것은 영혼과 정신으로부터 나온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육체적인 것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헤겔은 인간의 정신적인 사고가 인간 삶의 전반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란 그저 먹는 바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핵심내용은, 정신이 육체를 의식적으로 규정하지만, 정신 자체가 이미 육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정신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포이에르바흐는 또한 헤겔의 관념론을 “위장된 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절대이념의 외적 전개[외화外化]로 인해 현실적인 존재가 형성된다고 하는 헤겔의 주장이란 단지 절대자인 ‘신에 의해 자연적인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 하는 전통적인 신학적 학설을 합리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토대로 해서 포이에르바흐는 헤겔이 말한 “무한자(das Unendliche)” 또한 현실적으로 유한한 것, 감각적인 것, 정해진 것이 추상화되고 신비화되어서 그리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헤겔의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조차 포이에르바흐에 의해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진정으로 실재하는 현실적인 것이란 신도 아니고, 추상적인 존재도 아니고, 관념도 아니며, 오직 감각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흐는 감각주의와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을 버리고, 무신론(Atheism)을 바탕으로 인간주의를 내세우게 된다. 그는 최고의 존재를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요, 인간에게는 곧 “인간이 신이다(homo homini deus)”라는 얘기다. 만일 신이 인간의 주主라면 인간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고 신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러한 주장은 포이에르바흐가 인간의 존재를 신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기초 또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이 국가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흐의 감각주의와 유물론은 19세기의 새로운 질서가 개벽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칼 마르크스Karl Heinlich Marx(1818~1883)는 유물론을 전개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의 정치와 문명사가 결정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9. 2. 03:30




 

서양철학사에서의

칼 마르크스 등장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그는 독일의 유서 깊은 로마가톨릭 도시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교 랍비의 후예였고, 개신교로 개종한 변호사였다. 아버지는 마르크스가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한 나머지 그를 본Bonn 대학의 법학과로 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법학에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인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결국 그는 진로를 바꾸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베를린 훔볼트Humboldt 대학교로 전학하여 역사와 철학의 배움에 몰두하게 된다. 당시 베를린에는 헤겔의 기본 사상의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해석하여 인간성의 해방을 주도하려는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청년헤겔학파가 그것이다. 베를린에 온 마르크스는 이 학파에 속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에 물들면서 헤겔 좌파의 길로 발을 옮기게 된다. 1841년 마르크스는 예나대학교(Universität Jena)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란 제목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843년에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써서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인간의 생존에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뜬구름 잡는 관념론을 비판하게 된다.

 




독일에서 급진적인 좌파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론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그리고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는 비밀 결사 단체인 “정의의 동맹(Bund der Gerechten)”에 가입한다. 1844년 말경에 파리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만나 함께 노동운동의 세계관을 완성하게 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이후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급진적인 인물로 찍혀 추방될 위기에 처하게 됐고, 결국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영국으로 건너간 마르크스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청년헤겔주의자들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본주의 자체에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잉태되어 있다고 보고, 이로부터 역사유물론에 대한 체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1846년에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하게 됐는데, 여기에서 유물론의 기본적인 원칙을 정해 놓은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확립한다. “소외론疎外論(Entfremdung)” 또한 이 시기에 작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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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9. 1. 08:00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과 “역사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으로 구분된다. 변증법이란 우리가 자연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태도와 그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고,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자연현상에 대한 파악과 해석을 유물론적으로 이론화한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변증법적인 주된 명제들이 사회적인 생활 현상이나 사회적인 역사에 확대된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핵심과제는 “역사적인 유물론”에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란 곧 왕이나 국가의 정복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 조건으로 만들어진다. 역사를 이루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은 사회의 생산양식(사회의 경제)에서 찾아져야 한다. 사회의 생산양식은 도구, 인간, 생산경험을 일컫는 “생산력(Produktivkräfte)”과 인간이 안에 모여서 생산하는 집단인 “생산관계(Productionsverhältness)”로 분석된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유물론이란 단순히 비인간화된 물질이 아니라 물질적인 생산관계 안에 있는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서 역사과정이 전개되는데, 이는 원시공동체 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이상적 공산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진행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인간의 전체적인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곧 물질적인 경제에 관계하는 인간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역사적 유물론은 바로 인간의 감각 안에서 물질과 인간이 서로 적응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언제나 실천적인 면이 요청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산업사회에서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적인 경제론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단순한 존재론적인 유물론이 아님을 뜻한다. 여기에서 그는 경제적 관계에서 인간의 경험과 정신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게 되는데, 그의 역사적 유물론의 새로운 특징은 바로 계급투쟁론階級鬪爭論(Klassenkampf)으로 집약된다.

 




계급투쟁론이란 무슨 의미인가? 계급투쟁론의 기초는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Mehrwert)에 있다. 잉여가치란 상품생산에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이윤을 말한다. 노동의 생산품에 대한 효용가치가 크면 클수록 잉여가치는 많아진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자들에게 최소의 임금만 지불한다.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손에 들어간다. 즉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는 노동자의 이윤을 착취하게 마련이고,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점점 더 큰 부富를 축적해 나간다. 자본가는 이윤착취로 인한 부의 축적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지(Bourgeoisie) 유산계급이 되고, 이윤을 빼앗긴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계급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은 서로 대립해 있으면서 결국 모두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疏外(Selbstentfremdung)”에 직면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상품세계에서의 소외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소외를 문제 삼았다. 여기에서 ‘자기소외’란 인간다운 삶이 노동 이외의 장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소외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사적소유私的所有와 사적노동을 버리고 사회적 소유와 공동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실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꿈꿔 온 진정한 인간의 삶이다. 그러한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마르크스는 대립도 없고 계급도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라 부른다.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경제 개혁론자이다. 세계사의 과정에 있어서 관념의 영원한 생성, 대립의 지양止揚, 새로운 것에로의 전진을 내세운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물질에 바탕을 둔 자본의 사회질서(These),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사회질서(Antithese), 계급 없는 이상적 공산사회(Synthese)로의 전진이라는 실천적인 역사유물론을 내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31. 06:00




 

 

절대관념론을 뒤집어 버린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은 헤겔에서 출발했지만 헤겔의 절대관념론과는 정반대인 유물론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된다. 그는 헤겔의 이념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대신에 물질적인 현실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바꾸려면 정신의 관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헤겔이라면, 물질의 경제적인 상황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다. 이념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을 규정한다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조건과 변화가 바로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물질적인 존재와 그 현실이야말로 진정으로 참된 존재가 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관습, 윤리, 법, 종교나 문화 등의 이념적인 것은 물질에 따라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유물론적 사고”의 핵심이 된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유물론(Materialism)”은 어떤 의미일까? 유물론은 현실적인 모든 것이란 관념이나 의식이 아니라 오직 물질적인 것임을 전제한다. 물질은 가장 근원적인 존재요, 감각, 표상, 의식 등은 물질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思考라는 것은 뇌腦라는 물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연, 실재, 물질의 세계가 1차적인 것이고, 의식과 사고는 제2차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과 그 존재가 일차적인 근원이며, 정신적인 삶과 사고는 거기로부터 이끌어 내어진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의식과 사유와 이데올로기(관념)는 물질적인 생활 조건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인간의 실천적인 활동은 바로 사회의 물질적인 생활의 발전을 요구하는 데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헤겔의 유신론을 무신론으로 전환한 것이 포이에르바흐였다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실천적인 유물론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즉 헤겔이 체계화한 종교적인 관념의 세계를 감각적인 요인들로 해체시킨 것이 포이에르바흐의 공헌이었다면, 마르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감각적인 활동이란 실천적이며, 곧 공동적인 활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그는 능동적이며 실천적인 개혁을 자신의 과제로 삼은 것이다.

 

실천적인 유물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인간이 감각으로 보는 것, 정신으로 생각하는 것, 몸으로 행위 하는 것 등은 인간 역사의 전 과정을 규정하는 조건들이다. 이것들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생성의 기초는 생산관계의 총체인데, 이는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Überbau) 가진 사회의 현실적인 바탕이 된다. 정신적인 상부구조에 따라 역사, 철학, 종교, 예술, 정치 등은 그의 부수 현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30. 05:30



 

미국의 정신을 세운

실용주의實用主義사상

 

 

실용주의 또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진리관을 거부하고 현상으로 드러난 경험적인 세계에만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실용주의 진리관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를 통해 ‘유용성이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행동과 실천을 중요시함을 뜻한다. 그래서 실용주의는 ‘삶의 행동이 인식을 결정짓는 것이지 인식이 삶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바탕에 깔고서 삶의 유용성을 추구하는 철학으로 나아간다.

 

실용주의적 사고를 처음으로 창시한 자는 차알스 퍼어스Charles Peirce(1839~1914)이고, 이를 발전시킨 자는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1842~1910)라 볼 수 있다. 나아가 실용주의를 계승하여 새로운 철학, 일명 도구주의(Instrumentalism)로 전개해 나간 자는 존 듀이John Dewey(1859~1952)이다.

 

퍼어스는 사물을 지각하는 관념을 명료화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실천(pragma)”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여기로부터 실용주의란 말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지성 속에 개념으로만 있는 관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관념이 실천으로 규정되어 현실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행동으로 실현된 관념만이 의미가 분명해지고 알려질 수 있다. 이는 관념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실천의 차이를 관찰하면 된다는 뜻이다.

 

퍼어스의 실용주의적 특성은 1877년에 발표한 “신념의 고정화(The Fixation of Brief)”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의심에서 시작하여 탐구의 과정을 거쳐 신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의심은 모르는 것, 생소한 것을 알기 위해서 탐구로 이끌기 때문이다. 탐구의 결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구란 의심에서 시작하여 신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사고과정이며, 그 목적은 신념의 확립에 있는 것이다. 퍼어스에 의하면, 신념의 확립에 기여하는 중요한 방법은 과학적 방법이다. 이와 같이 그는 ‘관념을 명료하게 하고 신념을 고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실용주의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제임스는 퍼어스가 말한 관념이나 신념이 인간의 경험에서 어떤 몫을 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사고한 철학자다. 제임스는 미국 특유의 또 다른 실용주의적 사고를 내놓게 되는데, 실용주의를 어떤 연구 성과가 아니라 연구방법론으로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학설이나 관념이 참된 것이냐 아니냐는 그것이 가져오는 실제적인 효과에 의해서 보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학설이나 관념은 사람에게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용하고 만족스런 효과를 주는 것이야말로 실제적인 결과로서의 사실로 판명되는 것이다.

 

제임스는 경험으로 검증 가능하면 그 관념은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검증이란 진리화의 과정이며, 진리는 관념이 경험에 의해 사실과 일치되는 것을 뜻한다. 진리는 항상 결과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관념은 언제나 경험에 의해 부단히 검증되어 새롭게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관념은 개인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 구체적인 활동에 가치가 되는 것, 행위로 옮겼을 때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관념은 개인에게 유용할 때 참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거짓이라는 얘기다. 만일 실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없는 관념이라면, 이는 무의미한 것이거나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듀이의 경험주의 철학은 전통적인 감각경험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확대된다. 경험은 감각적인 활동을 포함하여 생리적, 인류학적, 문화적 활동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경험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뜻에 가깝다. 경험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질서 있는 맥락을 가지고 연속되면서 성장한다. 경험이란 즉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이면서 지속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듀이가 말하는 경험은 상호작용의 원리요 지속성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다양한 환경 속에서 유기체로 살아간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기도 하고, 환경을 개척해서 바꾸기도 한다. 이 경우에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 혹은 도구가 되는 것은 개념, 지식, 사고, 논리, 학문이다. 듀이에 의하면 지성의 인식작용은 환경에 대한 적응작용의 발전 형태이며, 관념이나 개념은 이러한 적응작용을 돕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생명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개념이나 관념이라면, 이는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검증되고 끊임없이 수정돼야 마땅하다.

 

듀이는 환경에 적응하는 도구로서의 관념이나 개념이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리로 인식되고 있는 개념이나 관념은 인간이 환경에의 적응과정에서 능동적인 지성이 만들어 낸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환경에 접하여 적응하기 위해 개조된 실험적 행위의 성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나 관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해결을 위한 도구로서 개조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개념, 관념, 사상 등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듀이가 말하는 탐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어떤 관념을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검증을 통해 진리화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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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8. 29. 02:30

 





국의

리주의公理主義사상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인 흄D. Hume 이후 경험론은 새롭게 변질되어서 그 명맥이 유지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적 현상주의이다. 공리주의적 현상주의는 존 스튜어트 밀J.S. Mill(1806~1873)의 사상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밀은 철학에서 추구하는 객관적인 본질이나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존재란 없고, 또한 지성의 선천적인 내용이나 개념도 없으며, 오직 순간적으로 지각되는 것만이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전적으로 경험론의 입장을 깔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에서 다루는 것이란 경험적인 자료들뿐이고, 이로부터 귀납적인 법칙을 얻어내는 것이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귀납추리가 보편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밀은 그 보완책으로 “자연의 과정이란 한결같다”(자연의 제1성질)는 전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이로부터 경험적 명제로부터 귀납추리의 학문적 타당성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것이다.

 

경험적 진리를 토대로 해서 전개되는 영국의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인가’의 물음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겠다. 대표적인 인물은 벤담Bentham, J.(1748~1832)과 밀을 꼽을 수 있다. 벤담이나 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는가’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행복한 삶에 대한 문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행복幸福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행복이란 궁극적으로 선善(good)한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선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삶이야말로 즐거움[快樂]이 함께 따라다니고, 곧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는 선한 삶을 살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것이지, 즐겁게 살기 때문에 선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됨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나 벤담이나 밀은 행복한 삶이란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苦痛이나 악惡을 피하고 즐거움[快樂]을 추구함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쾌락이 유일한 선이고, 고통이 유일한 악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쾌락만이 유일하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이 선이요 곧 행복이라는 등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쾌락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따라야 할 윤리적인 삶의 목적은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이것이 곧 공리公利의 준칙準則이다. 그래야만 인간 모두가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흄이 마련한 행복주의幸福主義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행복주의는 벤담과 밀의 윤리학적 토대에 그대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행복론을 말하지만, 벤담과 밀의 행복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벤담은 모든 쾌락이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쾌락의 양量만이 다를 뿐이지, 질적으로 고급의 쾌락이나 저급의 쾌락이란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벤담은 행복의 척도를 쾌락의 양으로 계산해 낸다. 쾌락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반복성, 순수성, 빈도성이 그것이다. 쾌락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더 좋은 것이요 더 옳은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쾌락의 양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불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벤담의 공리주의는 사람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까? 요컨대 나라를 폭력으로 통치하는 독재자가 가난에 찌들어 굶주린 삶을 살고 있었던 국민에게 먹을 것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여러 면에서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를 요구했다고 해 보자. 독재자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풍부하게 공급해 주자 많은 사람들은 많은 양의 쾌락을 누려 모두 행복해 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를 달라고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먹는 것만으로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독재자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쾌락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밀은 벤담이 제시하는, 감각적으로 충당되는 양적 쾌락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충당되는 질적인 쾌락을 내세우게 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훨씬 더 많은 쾌락을 향유할 수 있고, 따라서 그만큼 더 행복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진리에 대한 갈급증에 시달려 온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충당되는 쾌락보다 정신적인 쾌락이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주고 더 많은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밀은 감성적인 만족을 통해서 계산되는 벤담의 양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통해서 느끼는 질적인 쾌락이 더 강도가 있고, 쾌락의 영원한 지속성과 순수성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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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8. 28. 01:00






 

서양철학사의

현상주의現象主義(Phänomenalismus) 출현

프랑스의 실증주의實證主義

 

 




19세기의 철학은 한마디로 “현상주의現象主義”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현상주의란 사물의 배후를 드러내는 본질적 탐구도 아니고 근원의 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도 아닌, 말 그대로 현실적으로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진정한 실재라고 여기는 입장이다.

 

사상적인 틀에서 보자면, 존재란 현상現象일 뿐이라는 19세기 현상주의는 프랑스에 일어난 실증주의(Positivism)와 독일에서 일어난 유물론(Materialism)이고,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포함하며, 그리고 미국에서 붐이 일어난 실용주의(Pragmatism)와 변질된 귀납적 형이상학이 현상주의에 속한다.

 

오늘날에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까지도 실증주의 사상이 파고들어 널리 유포되어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역사관 또한 실증주의에 물들어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는 어떻게 태동해서 오늘날 인류의 정신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일까?

 

실증주의 사상을 개념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오구스트 꽁트August Comte(1798~1857)이다. 그는 인류의 정신사를 검토하여 세 시기로 나누는데, 1단계는 신화적인 시기, 2단계는 형이상학적인 시기, 3단계는 실증주의 시기가 그것이다. 마지막 실증주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과학적 탐구의 중요성을 간파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1단계의 시기 :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원시적인 상태에서 맨 먼저 신화적인 혹은 신학적인 단계에 접어든다. 이는 자연의 모든 현상이 보다 높은 인격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시기이다. 먼저 인격적인 힘이 특별한 사물 안에 살아있다고 믿는 페티시즘(Fetischismus), 다음은 그 힘을 가진 인격적인 신이 여러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던 다신교(Polytheismus), 마지막으로 전능한 유일신이 온 세계를 지배한다고 믿는 유일신교(Monotheismus)가 여기에 속하는 시기로 나타난다.

 

2단계의 시기 : 다음은 인간이 비판적 탐구능력이 발현되면서부터 시작한 형이상학적 시기이다. 대표적으로 아테네 시대의 철학적 탐구 시대가 그것이다. 철학은 신화적인 시대에서 탈피하여 창조변화의 힘을 추상적인 개념, 즉 사물의 본질, 형상, 영혼 등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꽁트의 눈에 여전히 허구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3단계의 시기 : 마지막 단계는 실증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 즉 현실적인 경험적 대상으로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인간이 진리 탐구로 간주하게 되는 시기이다. 실증적인 것들만이 실재이고 허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학문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두 가지 업무에 주력하게 되는데, 첫째는 현상들로부터 언제나 반복적이고 동일한 것을 밝혀내어 개념을 창출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상들이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일어나게 되는 법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하여 20세기에 새롭게 일어난 신실증주의新實證主義가 등장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7. 05:30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는 누구인가? 그는 1844년 프러시아Prussia의 뤼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슈울포르타를 졸업한 후 라이프찌히에서 고전학을 공부했다. 이때에 그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고, 22살쯤부터 바그너R. Wagner와 친하게 지냈으며, 24세에 바아젤Basel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가 되었다. 1870~1871년에는 지원병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위생병으로 몇 달을 지냈는데, 이 때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호되게 앓게 되자 휴가를 얻어 제대했다. 그는 휴양하러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1889년에 진행성마비증에 걸려 정신착란에 빠지고 말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극진히 간호했지만 그는 결국 1900년 8월에 별세하게 됐다.

 

니체의 초기 사상은 새로운 교양(Bildungsideal)을 형성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의 이상은 아름답고 영웅적인 인간상에 있었고, 그 원형을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즉 헤라클레이토스, 테오그니스, 아이스킬로스 등의 비극적인 시대성에서 찾았다. 특히 그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의 예술과 비극을 새로이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비극은 두 요소, 즉 현실적인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상징하는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요인과 삶의 근원적인 의지를 찢어 버리는 표상을 상징하는 “아폴론Apollon”적인 요인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디오니소스적인 삶에 푹 빠져 있었고, 진정한 삶의 가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았다.

 

그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내놓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세계를 제시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란 새로운 가치 창조를 암시하는 신호탄이다. 이는 1883년 이후에 나온 『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초인(Übermensch)”을 등장시켜 극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자이고, 초인은 가치들을 창조하는 자이고, 디오니소스는 가치들을 상징하는 자이다. 이 가치에 대립하는 것은 모두 십자가에 매달린 죽은 자로 상징된다.

 




니체의 고민은 진정한 철학자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 인간이 나아갈 길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세계를 열어주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는 먼저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외치면서 기존의 모든 가치를 파괴하는 망치를 든 철학자로 변신한다. 그는 기존의 모든 도덕적 규범들을 파괴하고, 인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가치 창조로 나아가는 삶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이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그가 부수고자 하는 확립된 기존의 도덕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은 이러저러해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도덕적 규범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도덕적 규범이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풍부한 가치를 마비시켜 왔다고 보았다. 또한 니체는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발명하여 삶의 본능, 삶의 기쁨과 풍부함을 억압하였고, 천국이라는 저세상[피안彼岸]을 발명해내어 이 세상[차안此岸]의 가치를 말살하였으며, 구원받는 영혼을 발명해 내어 신체적인 모든 것을 비방하였고, 죄와 양심을 발명해 내어 삶의 창조의지를 빼앗아 버렸다고 말한다.

 

삶은 일회적이요 살과 피로 형성된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기존의 도덕은 새로운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은 허구요, 참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는 도덕현상이란 없다고 한다. 즉 열등한 사람들이 삶과 삶의 현상을 잘못 해석한 것이 도덕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얘기다. 니체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적나라한 생존 자체요, 순수한 자연적인 모든 생성이다. 또한 사랑, 동정, 겸손, 자신을 낮춤, 희생정신을 강요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노예의 도덕이요, 삶에 적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삶에 대한 저주’라고까지 말한다.

 

기존의 도덕적 규범이나 이념이 모두 부서졌으니, 이제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은 죽었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이다. 사실 이 초인 안에 니체의 의욕 전체가 응집해 있다. 초인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유일한 것이며, 인간도 아니고 괴로워하는 자도 아니고, 가장 착한 자도 아니다. 초인은 이상理想으로서 나타나는 일체의 피안의 세계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대지大地를 위하여, 생生 자체를 위하여 스스로를 바치면서 이에 기꺼이 순응하는 자이다.

 

니체는 그리스도의 자리에다 “디오니소스”를 올려놓는다. 초인은 세계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영원히 새로 솟아오르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인식과 창조의 가치 확립을 가져오지만 스스로 파탄에 직면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한 초인은 모든 가치란 삶을 위해서이고, 진정한 삶이란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초인은 자신이 이 세계의 한 부분인 동시에 “힘에의 의지”를 뜻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초인은 생生 자체의 가장 요원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모순을 견디어 낼 줄도 알고 있었다.

 

끝으로 초인은 “영겁회기永劫回歸(die ewige Wiederkunft)”의 사상도 체득할 수 있는 인간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한 윤회輪迴를 거듭한다.”(『짜라투스트라는 또한 말하였다』 제3부). 다시 말해서 세계란 일정한 크기를 지닌 힘의 덩어리며, 여기에는 무수하게 많은 존재자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무한히 지속하는가? 아니다. 무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뿐이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무한한 시간 계열에서 수없이 생겨나고 없어진다. 만물은 반복적으로 영원히 회귀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이라는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6. 08:00






서양철학사에서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의 태동

키에르케고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시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교회와 국가라는 대립적인 것을 조화하여 시민사회의 안정성을 추구한 헤겔의 절대관념론은 19세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와해되었다. 심지어 헤겔철학의 절대이념에 반기를 든 쇠렌 키에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1813~1855)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복轉覆을 꾀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적 사고를 무너뜨렸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zsche(1844~1900)는 신에 기원하는 도덕적 가치를 뒤집음으로써 신[主]과 인간[客]에 대한 주객을 전도顚倒시켰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체主體의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인간의 실존實存을 드러냈고, “신 앞에 선 단독자單獨者”라 하여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태동시켰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변증법적 신학”과 카알 야스퍼스Karl Jaspers(1883~1969)의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반면에 니체는 초인超人의 철학을 내놓음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드러냈고, “신은 죽었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실존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신 앞에 선 단독자”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했다. 1841년에는 베를린에서 셸링Schelling의 강의를 들었고, 그 후에 문필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와의 논쟁에 휘말려 들었고, 교회와의 타협을 보지 못하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그는 고독한 삶을 보내다가 얼마 살지 못하고 42세가 되던 1855년에 젊은 나이로 코펜하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헤겔이 말한 절대적인 이념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를 위해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진리는 전통적인 학문에서 밝혀져 전수되어 온 것도 아니요, 영원한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짜여진 교리를 깨닫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 앞에 당당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객관적으로 규정된 진리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 안에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완전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완전한 인간적인 삶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실존實存”의 가장 깊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은 동양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과 유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진리는 바로 신적인 것 안으로 성장해 들어가 실존자實存者가 되는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실존”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삶을 살아가게 마련이다. 오직 일회적인 존재인 각자는 내면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야 실존자가 될 수 있다. 보다 깊은 내면에 이른 자신의 존재는, 빛이 모여들고 내어 주는 광원光源과 같으며, 신이 받아들이고 내어 주는 중심체와도 같은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모여들고 거기로부터 퍼져 나가는 독자적인 자기활동의 주체적인 개별자는 바로, 어느 누구도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신 앞에 선 “단독자(Das Einzelne)”이다. 단독자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실존자가 되는 셈이다.

 

실존을 말하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이데아에다 생명을 가진 개별자를 맞세웠듯이, 헤겔의 사고로부터 추상된 보편자에다 개별적인 의미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맞세운다. 개별자는 절대로 보편자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개별자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깊숙한 내면內面에 이름으로써 언제나 자립적으로 실존하며, 고유하게 활동하는 존재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한 개별자는 완결되지 않은 채 언제나 고유하게 행동하는 존재이다. 고유하게 행동하는 개별자는 항상 “비약飛躍(Sprung)”을 감행敢行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삶의 과정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 감으로써 전진前進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진에는 하나하나의 결단決斷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결단에는 ‘가능성’이 언제나 현존해 있다. 거기에는 ‘이리할까 저리할까’하는 선택의 망설임이 있고, 절망과 한계에 부딪힌 좌절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결단에는 항상 불안不安이 따라다니고, 신앙信仰이 떠오른다. 불안은 결과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앞질러 가 있고, 앞질러 가 있는 불안의 바탕에는 자유自由가 버티고 있다. 자유는 의지의 선택으로 무한한 것이며, 무無에서 생겨난다. 여기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이 없이는 비약을 감행하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계에 대한 기분, 감행, 불안, 무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유 등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범주들이다.

 

하나하나의 상태에서 순간순간 확고한 결단을 주도하는 것은 내면의 주체이고, 주체적 결단은 곧 비약을 감행함으로써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내면에 이르는 길은 세 방식이 있다. 첫째는 이미 있었던 것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명상하는 “감성적인 길”이다. 둘째는 결단을 내리는 행위와 자유로운 선택, 즉 개별자의 독자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윤리적인 길”이다. 여기에는 이미 자신이 혼자(單獨)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마주치게 된다. 불안은 완전히 혼자인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홀로 감당해야 하므로 결단이 요구된다. 세 번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맡겨짐으로써 궁극적인 내면에 이른 “종교적인 길”이다.

 

종교적인 신앙은 현존재(Dasein)와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神]에 매달려 그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역설(Paradox)은 여기에서 나온다. 역설적이면 역설적일수록 신앙은 그만큼 더 커지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무조건 순종順從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역설은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때에 인간은 절망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럴 때 신앙을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최고의 확증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실존자는 결국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세계에서 풀려나 하나님에게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진정한 실존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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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8. 25. 21:08




 

 

흑인 노예무역의 상흔을 간직한

고레Gorée

 

 


 

세네갈은 일 년 내내 관광이 끊이지 않는 나라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항공교통이 편리한 지역으로 서아프리카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하고 남쪽의 카자망스 평원은 원시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의 끝자락이 이어졌는데, 파리에서 출발하는 유명한 자동차레이스 파리-다카르 랠리의 종점이기도 한 나라다. 기후와 거리가 유럽과 비교적 가까우며 역사적 관계도 깊다.


세네갈은 2007년~2008년 시즌에 유럽 등지로부터 약 8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였고 2015년에는 방문 관광객이 총 3백만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네갈에는 대서양 해변을 따라 외국인을 위한 관광 리조트들이 개발되어 있다. 유럽에서 겨울철인 12월~2월 기간에는 따뜻한 기후를 즐기고 싶은 유럽인의 방문이 많다. 이 기간에는 월동을 위해 세네갈에 도래하는 철새도 볼 수 있다. 또한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국립공원을 선정하고 문화보호 정책과 관광개발 정책 등을 추진함으로써 관광지로서 가치를 높이고 있다. 세네갈의 관광산업은 재외국민 송금, 어업과 함께 세네갈의 주요 외화 획득원이며, 각종 레저단지는 면세 혜택을 받고 있다. 세네갈의 주요 관광지로는 고레 섬(노예 수출 기지), 쥬지 국립공원(철새 도래지), 생루이(구 프랑스 식민지 수도), 살리(휴양지) 등을 꼽을 수 있다.

 



고레 섬은 다카르 동쪽의 3㎞ 앞 바다에 길이 900m, 폭 300m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이전에는 노예무역의 중계지였다. 지금은 인구 10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는 평화로운 곳으로 아스팔트 길도, 자동차도 없다. 단철로 만든 발코니가 있는 식민지풍 집들, 구 공회당, 멋진 해변, 또 섬과 다카르의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바위투성이 고원으로 지금은 마리화나 중독자들이 차지한 르 카스텔 등이 있다. 섬 북쪽의 역사박물관은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멋진 그림과 여러 전시물들이 현재에 이르는 세네갈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비참한 노예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고레 섬 방문에서 빠질 수 없는 일정은 메종 데 에스끌라브(노예의 집)에 가는 것이다. 노예들이 생활하고 있었던 집으로 노예 무역의 상흔을 간직한 이곳은 1786년 세워졌으며 1990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새롭게 꾸며졌다. 노예의 집과 이에 얽힌 이야기는 그 야만적인 상행위에 세네갈이 연루되었던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기려 그 이름을 붙인 생루이. 한때 세네갈의 수도였던 생루이에는 도시의 중심이기도 한 세네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을 끼고 우측 본토인 소르지구, 좌측에 랑고 드 바르발리라고 하는 모래톱에 위치한 응다르 투트 등이 있다. 또한 이 도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리가 이 세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쥬지 조류공원이 이곳에 있는데 이곳은 수만 마리의 철새들의 휴식처이다. 또한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Saint-Exupéry가 묵던 호텔도 있다.

 

“살람 말리쿰” 세네갈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인사말이다. ‘안녕하세요.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답례의 말은 “말리쿰 살람”이다. 일찍이 식민지 역사와 내전의 아픔을 겪은 아프리카 서쪽 끝나라 세네갈에도 따뜻한 안정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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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24. 08:30




 

대한민국과

아프리카 세네갈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과 세네갈은 1962년 10월 19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주세네갈 한국공관은 1973년 5월 4일에 개설되었다. 2007년 8월에는 주한 세네갈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한국과 세네갈 간에는 1975년 4월 무역협정, 1979년 문화협정·경제기술협력협정, 1984 투자보장협정, 1997 청년봉사단 파견협정, 2008 5월에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 기본협정이 각각 체결되었다.

 

양국 간에는 1979년 4월에 세네갈의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있으며, 1982 8월에는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세네갈을 방문하였다. 1984 7월에는 압두 디우프Abdou Diouf 대통령이, 2009년 11월에는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대통령이, 2015년 6월에는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이 한국을 각각 방문하였다.

세네갈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며, 한국과는 1962년 10월 19일, 북한과는 1972년 9월 12일에 각각 수교하였다. 한국의 상주 공관이 설치되어 있고 북한측 상주 공관은 폐쇄하였다가 2013년 7월 재개설하였다.

 

 


경제문화 관계

한국과 세네갈 사이에는 최근 8년여 동안 교역량이 4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동원그룹이 세네갈 국영 참치 통조림 공장을 인수하는 등 양국 간 교역 및 투자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015년 기준으로 세네갈의 대한對韓 수입은 1억 4,618만 달러, 수출은 6,268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어류, 육어류 조제품 등 수산물이 87% 이상을 차지하고, 주요 수입품은 전자제품, 인조섬유, 고무, 유기화학품 및 화장품 등 화학제품, 종이류, 사진용 재료, 인쇄물, 생활 잡화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동원산업, 삼성전자, 미성상사 등의 한국 업체가 세네갈에 진출하여 총 20건에 걸쳐 654만 달러(2015년 누계)의 투자를 하고 있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며, 연해에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우리 원양어선은 물론 우리 교민의 상당수가 수산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수산업 분야 외에도 한국 기업들은 가발업, 잡화 및 문구점, 사진업, 요식업, 보석산업 등의 분야에 진출해 있다.

 

2008년 한국은 세네갈을 무상원조 중점 지원 대상국으로 선정하고 농업, 교육, 수산양식 등의 분야에서 9백만 달러 상당의 총 5개 프로젝트 사업을 지원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봉사단과 전문가들을 파견하고 있으며, 세네갈로부터 연수생을 초청하고 있다. 2015년 5월 기준으로 세네갈에는 한국 교민 약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과 세네갈의 문화 분야 교류는 전통예술단의 방문 공연 정도이다. 체육 분야에서는 세네갈의 아마두 바Amadou Ba 선수가 제24회 서울올림픽(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여 400m 남자 허들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 2002년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세네갈이 동시에 8강에 진출하여 축구를 통해 양국 국민이 서로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에는 세네갈의 최고 대중 인기 가수인 유수 은두르Youssou N’dour와 이스마엘 로Ismaël Lô가 방한하여 공연하였다. 한국의 경우 퓨전 국악 실내 악단인 ‘슬기둥’이 세네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2008년 5월에 개최된 다카르Dakar 비엔날레에서는 한국 작가 8명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

 

2012년에는 한-세네갈 수교 50주년 기념을 계기로 양국 정상 간 메시지 교환(2012년 1월), 문화행사(2012년 5월, 비보이/퓨전국악 다카르 공연, 2012년 7월 세네갈 민속공연팀 여수 공연), 학술 세미나(2012년 11월, 다카르), 한식 축제, 영화제 등을 개최한 바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3. 01:00




 

 

한과

아프리카 세네갈의 관계

 

 

 

 

 

세네갈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비동맹 중립 외교노선을 견지, 원칙적으로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표방하고 있으나, 한국과의 경제 협력을 보다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 북한은 1972년 9월 세네갈과 수교하고, 같은 해 11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1974년 셍고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세네갈은 한때 친북한 경향을 띠기도 했다.


하지만 친서방 실리 외교를 추구하는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98년 2월 북한은 경제 사정으로 인해 주세네갈 상주 대사관을 폐쇄하였다가 2013년 7월에 상주공관을 재개설하였다. 상주 대사관 폐쇄 기간 동안에는 주기니 대사관에서 관련 업무를 겸임하였다. 세네갈은 주일본 대사가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북한의 만수대 해외사업부가 2011년 LSS 국제공항에서 다카르 시내로 진입하는 언덕에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탑’을 건설하여, 세네갈의 상징물로 자리 잡고 있다. 2015년 5월 현재 북한은 건축기술협력 대표부 및 만수대 해외사업부 세네갈 지사를 설치, 기술자 및 100명 가량의 노동자를 세네갈에 파견하고 있으며, 이들은 다카르 시내 및 인근에서 각종 건물 신축 사업에 투입되고 있다. 북한과 세네갈 간에는 경제기술 협력 협정(1974), 무역 협정(1974), 혼성위 창설 협정(1986), 정보교류 협력 협정(1994) 등이 체결되어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22. 05:30




 

미국

이슬람 테러전

 




제37대 대통령 닉슨Richard Milhous Nixon은 이전 정권과 달리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였으며 1970년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통해 베트남 철수를 명시하고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국제외교관계에서 강대국 중심의 세력균형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6년 미국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시기에 제3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터Jimmy Carter는 경제문제와 자원보존을 정부개입주의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대외정책에서는 인권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79년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건 발생시 구출작전의 실패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다.

 

보수주의 성향이 강화된 미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을 안고 1981년 취임한 제40대 대통령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줄임으로써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정책에서는 미국의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공산주의 팽창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군비를 확충했다. 레이건 노선을 승계한 제41대 대통령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국가 재정적자 증가 및 경제상황 악화가 지속되는 상황 하에서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촉발된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상승하게 되었다.

 




1992년 지속적인 경제침체 해결에 대한 기대로 정부개입과 복지국가노선을 추구하는 빌 클린턴William Jefferson Clinton이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클린턴은 소수인권과 근로자 권익을 강화하고 의료보험혜택을 확대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지만, 경제 호황에 힘입어 2차 대전 이후 민주당 출신 최초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냉전의 종식 이후, 국제적 규모의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2001년에는 항공기를 이용해 뉴욕 세계무역센터(WTC)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청사(Pentagon)를 공격한 ‘9.11테러’가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제43대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 행정부는 대對테러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축출(2002.12)하고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축출(2003.5)하는 등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진행했고, 대테러전 차원에서 대량파괴무기WMD(Weapons of Mass Destruction) 확산 저지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원칙에 입각한 미국통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다자차원에서의 다면적 무역자유화를 추구하였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2008년 실시된 제44대 대통령 선거에서 ‘희망hope과 변화change’를 주창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가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 역사상 최대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국내 경제문제 해결에 집중했고 적극적, 전향적 대외 정책을 통해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 및 새로운 대외정책 기조설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12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연임에 성공한 오바마는 2014년 4월 25일, 재선 후 처음으로 방한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1. 02:00

 


서양철학사

헤겔 좌파의 유물론

 

 

이성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전개된 인식론은 대륙의 합리론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진리인식이 감각적 경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국의 경험론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진영에서 주장된 내용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은 선험적 관념론에서 꽃을 피운다.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에서 태동하여 헤겔의 절대관념론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룬다.

 



헤겔 이후 19세기 중반은 자연과학의 진보에 따른 기술혁명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시대의 사조 또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풍조로 바뀌어 갔고, 지성사에서는 관념론이 밀려나고 유물론(Materialism)이 철학의 권좌를 차지하여 득세하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귀한 정신의 관념이 아니라 신체적인 생명을 보존하는 물질이었고, 물질적 가치의 창조와 변형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산업과 경제가 중심이 됐던 것이다.

 

유물론의 득세는 시대와 역사를 바꿔 놓았다. 국가체제는 강대국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바뀌었고, 물질문명에 따른 국부는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키게 되었다. 결국 헤겔의 관념적 정신사精神史는 유물론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어 버리고, 이로부터 또 다른 새롭고 다양한 사상이 출범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조를 거론해 보면, 헤겔 좌파의 유물론, 인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실존철학의 태동, 진리의 기준이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는 실증, 공리, 실용성을 내세우는 현상주의, 감각적 경험에 바탕을 둔 귀납적 형이상학을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20. 20:56




 

냉전체제와

미국의 번영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동유럽권을 장악한 소련의 위협을 크게 인식하고 전후에 소련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제33대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는 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기 위해 소련에 대한 포위정책을 수립, 1947년 3월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약속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에는 국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미국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대대적인 경제원조를 제의하는 마샬계획Marshall Plan을 수립하고, 1949년에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서방 12개국을 규합해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크게 인식해 격렬한 반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국가보안법인 매캐런법McCarran Act이 제정되었고,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일련의 반反공산주의 선풍이 미국을 휩쓸기도 했다.

 



1950년대에 미국은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기본으로 복지국가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누렸고, 한편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을 중심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이 본격화되는 등 민권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뿌리 깊은 인종차별 관습의 철폐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 되었다.


진보적 성향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운동을 인정하고 빈곤을 없애기 위한 경제원조를 추진하였으며, 1962년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단행해 소련의 철수를 이끌어냈다. 이 쿠바 미사일 사건을 계기로 1963년 핵전쟁 방지를 위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TST(일명 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어 미·소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36대 존슨Lyndon Baines Johnson 행정부 시절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계기로 1965년에 시작된 베트남전쟁이 확대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반전 움직임이 강화되어 반체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빈곤층과 흑인 등 소수자 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과격한 흑인민권 운동과 급진적인 학생운동이 이어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19. 01:30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의 성장

 






한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에 따른 영토확장의 움직임 속에 미국은 이에 대항하여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1823년 제5대 대통령 먼로James Monroe의 연두교서를 통해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것은 외부 세력(특히 유럽)이 미주 대륙에 간섭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담은 비동맹·비식민·불간섭을 골자로 한 고립주의 외교방침으로, 이후 미국은 중남미에 대해 정치적으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국 경제는 남북전쟁 이후 북부 자본을 중심으로 하여 풍부한 천연자원과 산업의 기계화가 결합된 급속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정부와 사회적 지원을 바탕으로 기업이 활성화되고 독점 기업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 후반부터는 금융자본이 활성화되었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 잠수함의 미국 기선 루시태니아Lusitania호 격침을 계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연합국측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28대 대통령 윌슨 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창설을 주장하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경제적 성장을 공고히 하고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제1차 대전 후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만성적 공급과잉 및 실업상태가 지속되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로 빠지는 대공황의 위기를 맞았다. 1933년 취임한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통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통제 정책을 도입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대공황의 시급한 위기를 넘기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며, 노동조합 결성 및 소외집단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치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였다.

 

미국이 대공황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규모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리가 명백해지자 처칠(영국), 루스벨트(미국), 스탈린(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전쟁 수행과 전후처리 문제, 국제연합 창설 등에 관해 합의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수행 과정에서 미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증대하는 경제적 발전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18. 20:50


 

 

 

아프리카 세네갈의

이슬람 문화

 

 

 

 

세네갈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94%, 개신교 및 천주교가 5%, 토속신앙이 1%를 차지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관계로 이슬람교 공동체(Brotherhood)가 사회 깊숙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마라부Marabout들이 이슬람교도들의 사회·경제생활을 인도하고 있다.

 

세네갈의 이슬람교 공동체 중 무리드Mouride파의 영향력이 가장 크며, 그 밖에 티자니야Tijaniyya, 니아시야Niassiyya, 카디리야Qadiriyya, 라예네Layenne파 등이 있다. 최근에는 보다 조직적이면서, 종교 및 정치적 입장을 지닌 개혁적인 이슬람 조직들이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고 있다.

 

1990년대 세네갈의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은 마라부의 지원을 배경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대한 적이 있다. 이들 이슬람교 공동체는 지하 경제에 간여하고 있어 세네갈 국가 경제 발전의 저해 요소로 작용함으로써 개혁의 대상으로 거론되어 왔다. 하지만 각종 선거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역대 정부들은 본격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전前 대통령도 무리드파 이슬람교 공동체 지도자들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었다. 와데 대통령은 각종 선거 전후에 무리드파의 성지인 투바Touba를 방문하는 등 자신의 정권 유지 기반으로 이슬람교 공동체를 활용하였다. 세네갈의 이슬람화는 442~1050년경 무라비뚠al-Murābiṭūn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제2단계(쑤피종단의 확장기)에 이 나라에서 도입되었다. 그 결과 현재 전 인구의 86%가 말리키 법학파에 속하는 무슬림이다. 물활론자들이 4%이고 나머지는 여러 그리스도교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다.

 

세네갈은 이슬람이 압도적이지만 신정국가는 아니다. 시민법은 프랑스식에 기초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종교적 관용성을 갖고 있다. 강경파라기보다는 생활형 종교에 가까워 사람들이 비교적 순박한 편이다. 라마단Ramaān 역시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라마단 기간 한 달여 동안 태양이 떠 있을 때는 물을 비롯해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기간에는 문을 여는 레스토랑도 줄어든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번째 달(현재로는 12월에 해당)에 실시되어 코란이 모하메드에게 전해진 달을 기념하는 이슬람 종교 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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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7. 07:00




 

아프리 세네갈의

민족 및 언어

 

 

세네갈의 인구 규모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간 정도에 속한다.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수도인 다카르Dakar로 약 352만 명의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 수명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의 평균보다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며, 인구 구조 상 전형적인 피라미드형을 보인다. 세네갈에는 많은 민족적 그룹이 존재하고, 각각 독자의 역사, 언어, 문화를 갖고 있다. 이러한 민족적 그룹 내의 교류, 아프리카 이외의 문화와의 교류 결과, 자신들의 출신에 긍지를 갖는 복합 문화가 국민들 사이에 형성돼 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족은 월로프족(44.3%), 풀라르족(23.8%), 세레르족(14.7%) 등이다. 그밖에 투쿨로르족 디올라족 말링케(만딩고)족 등이 있고, 프랑스인이나 아랍인도 있다. 주민의 73%가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2001년 헌법)이다. 세네갈은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그러나 월로프어, 세렐레어 등 토속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이슬람교도가 전 인구의 94%, 가톨릭을 주로 하는 그리스도교도가 5%, 나머지는 전통적 부족종교를 신봉한다.

 

세네갈인은 대체로 대가족주의로 친척이나 친구를 중히 여기며 방문자에게도 친절하다. 인터넷 호스트의 수는 199개(2007년)이며, 약 65만 명의 인구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2006년). 문맹률은 60.7%(15세 이상, 2002년 추정치)로 높은 편이다. 2004년을 기준으로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는 0.460으로 조사 대상국 177개국 중 156위를 차지하여 아프리카 대륙 저개발국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5년도 같은 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하루 1미국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빈곤 인구는 전체 인구의 50.6%에 달하였다.

 



복합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 역량

반면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하는 나라다. 각 부족은 흑인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도시에서는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구비 문학은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말리 제국 시대부터 내려온 음유시인 계층인 그리오griot들은 전사의 무용담을 담은 구비 전승시를 낭송한다. 레오폴드 셍고르Leopold Senghor, 부알라Boilat 신부 등 우수한 시인과 작가 그리고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 등의 영화감독들이 많이 배출된 국가다. 특히 1930~1950년대 레오폴드 셍고르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의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1913~), 기아나Guiana 레옹 다마스Leon Gontran Damas(1912~1978)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저항하면서 아프리카의 전통과 아프리카인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문학 운동인 네그리튀드Negritude 운동의 깃발을 들었다. 셍고르의 시는 아프리카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세네갈의 시인 비라고 디오프Birago Ishmael Diop(1906~1989)는 아프리카인의 삶의 신비를 다룬 시를 쓰는 한편, 월로프족의 전통적인 민담과 전설을 기록하였으며, 다비드 디오프David Diop(1927~1960)는 제국주의 유럽 열강들을 축출하고 아프리카인의 독립과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혁명적 시들을 썼다. 세네갈의 작가들은 일부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로 소설, 시, 드라마 등의 작품을 쓴다. 잘 알려진 영화감독 우스만 셈벤Ousmane Sembene은 서아프리카의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세네갈은 서부아프리카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로 평가받는다. 특히 다카르 대학(약 4만 명 등록)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인데, 문학, 법경제학, 과학, 의학, 언론, 공학, 사서학, 교육학 등 모든 분야가 이 지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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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6. 19:48




아프리 세네갈의

경제적 특성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불어권 국가 중 코트디부아르 다음으로 국민총생산 2위(149억 달러, 2016년)에 해당하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약 1,067달러(2016)인 최빈 개발도상국으로, 농수산물 및 인산염, 금 등 1차 상품 수출, 재외국민 송금(연간 약 10억 달러 수준) 및 해외 원조 수원 등이 주요 재정 수입원이다.

 

세네갈은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과 긴밀한 협의 하에 경제구조 조정계획을 추진, 2000년~2013년도 연 평균 약 4~5%대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외국 투자 유치, 공기업 민영화, 시장경제 육성 등을 통한 경제 개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 중이다. 정부는 민간 투자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2000년 S&P’S 신용등급을 신청하여 B+/B를 처음으로 부여받고 2014년에도 B+/B 등급을 유지하였다.

 

마키 살Macky SALL 대통령은 취임 후에 효율적인 공공자금 운영, 정부 규모 축소, 부정 축재 척결 특별재판소(CREI) 부활, 감사원 개혁 등 대대적인 정부 구조개혁에 나서는 한편, 동년 11월 입안한 ‘경제사회개발 국가전략(SNDES)’을 수정 보완해 2035년 개도국 도약을 목표로 ‘세네갈 부흥계획(PSE)’을 수립, 적극적인 해외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높은 국가채무 비율(2013년 GDP 45%), 비효율적인 공공자금 운영, 만성적 재정적자 등으로 인해 외국인 투자의 유치 및 효율적인 경제개발 추진에 애로가 상존하고 있으며, 가시적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전력 식수 등 사회 인프라 부족 사태가 심화되고, 실업률 확대, 식량 부족에 따른 곡물가격 상승, 지속적인 물가 불안 등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등 세계 경제의 불안, 역내 에볼라 사태의 장기화 등으로 경제 불황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으며, 최근 지역 강수량 급감에 따른 곡물 작황이 감소하면서 식량 안보 문제도 심화되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다.

 



경제구조와 교역

세네갈은 1차 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가전제품과 자동차는 물론 식기, 플라스틱류 등 생활필수품인 공산품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전형적인 개발도상국형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2007년(추정치) 기준 GDP 비중에 의한 산업 구조를 살펴보면, 농업 16.7%, 제조업 18.9%, 서비스업 64.4%이다.

 

노동력 비중 기준으로 보면, 약 75%인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업 생산 품목은 땅콩, 진주조, 면화, 쌀 등이 있다. 특히 ‘세네갈의 황금’으로 불리는 땅콩은 프랑스가 식민지 시대에 가지고 들어와 재배를 장려하기도 하였고, 세네갈 총수출액의 25%를 차지하고 있어, 땅콩을 재배하는 농사는 사실상 이 나라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60년대에 독립할 무렵에는 노동 인구의 87%가 종사하는 규모였다. 어업은 참치, 문어, 오징어, 가다랑어, 새우가 중심이며, 이들의 대부분은 수출된다. 광업(인광석)과 공업은 인광석을 원료로 하는 화학 공업과 상호 관계를 가지며, 관광, 서비스업이 주요 산업이다. 세네갈은 세계 10대 인광석(phosphate) 생산 수출국이고, 아프리카 50개 금생산국 중 1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세네갈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천연가스 시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4년 IMF 기준으로 세네갈의 수출은 25.7억 달러, 수입은 60.5억 달러를 기록하여 극심한 무역수지 적자를 보이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수산물, 땅콩 및 땅콩기름, 석유제품, 비료 등이고, 주요 수출대상국은 말리(19.2%), 프랑스(8.3%), 인도(5.8%), 감비아(5.3%), 스페인(5.1%), 이탈리아(4.9%) 등이다(2006년). 수입품은 사탕·쌀·밀 등의 식료품, 소비재, 석유제품 등이고, 주요 수입대상국은 프랑스(25.1%), 영국(5.2%), 태국(4.8%), 중국(4.5%), 스페인(4.0%) 등 이다(2006년).

 

경제개발에서는 자금 조달을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는 미개발 철광산 개발, 다카르 자유무역지대의 설치, 세네갈 강 유역의 개발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고, 또한 인광석 개발에도 노력하고 있어 땅콩에 편중된 외화수입원의 다양화를 모색하고 있다.

 

교통은 전체길이 906km의 철도, 세네갈 강의 항로, 1만 3,576km의 도로 외에 다카르·카올라크·생루이 주요 항구가 있다. 국제공항은 다카르에 있고 공항은 모두 20개이다(2006년). 세네갈 강 유역의 모리타니·말리·기니 등과는 경제협력기구를 구성하고 있고 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ECOWAS)의 가맹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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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5. 10:30




이스라엘의 건국

 




유대인들의 이민과 건국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측에 가담하였는데 그 때문에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싸웠던 영국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용의가 있음을 선언한 ‘벨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이 전쟁에 협력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인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를 맡은 영국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이주는 계속되었다.


특히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독일에서 많은 난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영국 위임 통치 당국과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발생 하였다. 유대인들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영국과 싸워 결국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유엔UN(국제연합)에 위임하였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어 독립시킨다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아랍 국가들은 모두 이 안에 반대했지만 소련이 적극 찬성하고 동구권 국가들도 찬성표를 던져 안건이 쉽게 통과되었던 것이다. 이는 소련이 소수민족의 독립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소련은 이스라엘이 친미 국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미소의 냉전이 조금만 일찍 시작되었더라도 소련과 동구권의 반대로 이 스라엘의 건국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국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곧 바로 전쟁이 시작되었 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 주변 아랍권 국가 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75만명 정도였는데 주변의 아랍국가들 인구는 3천만이 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일 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호언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초반의 불리한 전세를 뒤엎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점령하였다. 전쟁은 유엔의 중 재로 다음 해 봄에 끝이 났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그 후에도 서너 차례 이상 계속되었다. 시나이 전쟁(1956), 6일 전쟁(1967), 욤 키푸르 전쟁(1973)이 있었고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여 일어난 소규모 레바논 전쟁도 있었다. 이 다섯 차례의 전쟁 가운데 독립전쟁과 욤키푸르 전쟁을 제외하면 나 머지는 모두 이스라엘의 선공으로 일어났다. 6일 전쟁은 단 6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기습공격을 통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구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골란고원Golan Heights은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이 있는 높은 산지로 이스라엘의 방어를 위한 전 략요충지로서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시 리아에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점령하고 있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상실한 영토를 되찾기 위한 복수전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 때 이집트는 수에즈운하까지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스라엘은 1979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하였다.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문제로 남부 레바논을 공격, 점령한 전쟁으로 이전 전쟁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존립이 문제된 것은 아니었다.

 

1988년에는 이스라엘의 건국에 의해 내쫓긴 팔 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을 선언하였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회담을 통해 국가의 지위를 달성하였다(2012년). 그 전까지 PLO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 았으나 그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이스라엘이 점 령하고 있던 요르단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자 치권을 획득하는 타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 해결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하마스 Hamas 같은 단체가 테러 활동을 그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지속함으로써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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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4. 18:52

 

 

 

이스라엘 시온주의Zionism 운동의 등장

 




로마의 탄압 속에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고향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새로운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 벌어졌을 때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 수는 수만 명에 불과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종교 때문에 현지인들에 잘 동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게토ghetto(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 강제 격리를 위해 만든 거주 지역)에 모여살고 직업선택에 제한을 받는 등 천민 취급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이 살던 곳의 주민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기 시작한것은 프랑스혁명기부터였다. 프랑스는 혁명의 주된 이념인 자유와 평등에 입각하여 프랑스 유대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이것이 유대인 해방의 첫걸음이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서유럽에서는 점차 철폐된 반면 동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정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더 나아가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논의와 운동이 19세기말 시작되었다. 이러한 운동을‘시온주의Zionism’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시온’ 산에서 온 말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60-1904)에 의해 명확한 강령과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896년 『유대 국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세계 시오니스트 총회가 스위스 바벨에서 개최되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어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영국 정부가 추천하는 아프리카의 우간다, 시나이 반도에 있는 엘 아리쉬 등이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오로지 팔레스타인만이 유대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었다.

 

그리고 시온주의 운동 내에서 실용주의적 입장이 우세해져 일단은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는 것보다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정착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20세기 초에 들어 유럽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주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것은 러시아 유대인들이었는데 당시 러시아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유독 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이 등장할 무렵 팔레스타 인에는 유대인들이 3만 5,000명 정도 살고 있었는데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물결이 있었는데 도합 45만명 정도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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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8. 13. 08:30

 




이스라엘의 시원민족과

국가의 형성

 





이스라엘Israel 지역은 고대에 가나안Canaan이라 불리우는 땅이었다. 이 땅에 살았던 원주민인 가나안족은 BCE(기원전) 7000년 경부터 농경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지역은 고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위치하여 두 문명이 자주 충돌했던 관계로 셈족, 히타이트족 등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BCE 17세기에 족장 아브라함이 이끄는 히브리족(헤브라이족, Hebrew)이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의 시원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데, 히브리족은 엄청난 기근 때문에 이집트의 나일 강 하류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집트에서의 탄압과 노예 생활에 견딜 수 없었던 히브리족은 BCE 13세기 경 다시 모세Moses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출애굽 사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후 BCE 1020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Saul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이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다윗David 왕과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설한 솔로몬Solomon 왕이 뒤를 이으면서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로마의 지배와 유대인의 추방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위 다툼으로 인하여 BCE 930년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E 722년에 앗시리아 왕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E 586년 신新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면서 유대인(유태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바빌론 유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Cyrus II 때 유대인들은 풀려나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E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해 그리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속주屬州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BCE 1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동방으로 세력을 뻗치던 로마가 유대 왕국의 내란에 개입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유대 왕국은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유대 지방이 로마의 정식 속주가 되어 로마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CE 6년이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의 종교와 전통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유대인들은 66년에 로마의 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와 유대인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수년 동안 벌어지다 결국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으나 일부 극렬파 유대인들은 사해 인근의 마사다 요새에서 최후까지 저항을 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73년 집단자결로 끝이 났다. 이 전쟁 때 이스라엘 왕국의 도성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신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는데 이제 이 성전이 사라져 하나님에게 예배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이후 유대교는 회당(시나고그) 중심의 종교가 되었다. 131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고 옛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터에 로마의 주신 유피테르를 제사하는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유대 속주의 이름도‘팔레스티나’로 바꿔버렸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이러한 조처에 대해 시몬바르 코크바를 지도자로 하여 맹렬히 저항하였으나 반란은 진압되었다(CE 135년).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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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2017. 8. 12. 01:00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盛和夫

 

 


프로필

이나모리 가즈오(いなもり かずお, Inamori Kazuo) 일본의 기업인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 쇼이치로와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기업가’로 꼽힌다. 교세라, 다이니덴덴(현 KDDI)의 창업주이며, 일본 대표 항공사인 일본항공JAL의 회장을 역임했다. 가고시마 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쇼후 공업에 입사한 후, 1959년 교세라를 설립했다. 10년 뒤에 주식 상장을 했으며, 파인 세라믹 기술로 성장했다. 1984년 다이니덴덴을 설립했다. 같은 해 재단법인 이나모리 재단을 설립했으며, 교토 상을 제정했다. 2010년 일본항공이 파산하자 단 세 명의 측근만 데리고 투입되어 13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2012년 3월에는 역대 최고액을 경신했다. 2013년 3월에 일본항공의 회장에서 물러나 교세라에 복귀했다. 주요 저서로는 『아메바 경영』, 『카르마 경영』, 『소호카의 꿈』, 『성공을 향한 정열』, 『이나모리 가즈오의 철학』 등이 있다.

 

출생 1932년 1월 21일(만 85세), 일본

소속사 교세라

학력 가고시마 대학교

경력 1997 교세라 명예회장

1984 다이니덴덴 설립

1984 이나모리 재단 설립

1959 교토세라믹 설립

(1982년 교세라로 변경)

 


명언 모음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다. 성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차이는 끈끈함과 인내심이다. 실패하는 사람은 벽에 부딪혔을 때 형편 좋은 핑계를 찾아서 노력하는 것을 그만둬 버린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관리하라.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당신의 운명을 정해 버린다.

 

신이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일에 전념하라.

 

마음의 등불이나 나침반이 되는 것은 바로 강렬한 의지이다.

 

사람은 영감을 밖에서 추구한다. 하지만 나는 안에서 추구한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가능성을 맘껏 추구하고 개량을 더해 가면 상상도 안됐던 큰 혁신을 도모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천직이라는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어진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일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생을 보다 잘 살고자 한다면 평소보다 더 잘 살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낙관적으로 구상하고 비관적으로 계획하며 낙관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사물을 성취시키고 바람을 현실로 바꿔 내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자신이 못하는 것이고, 장래의 자신이라면 가능하다고 미래진행형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짧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자신의 마음과 맞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인생이란 자기 자신이 각본을 쓰고 주역을 맡은 드라마다. 어떠한 드라마를 그릴지는 본인이 하기 나름이며, 마음이나 사고방식의 수준을 높임으로써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한 깨끗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신념, 소원은 꼭 성취된다. 반대로 사리사욕을 바탕으로 한 ‘흐려진 원망’은 한 번은 실현되더라도 일시적인 효력으로 끝나고 만다.

 

리더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겸손한 리더만이 협조성 있는 집단을 구축해 그 집단을 조화롭고 영속적인 성공으로 유도할 수 있다. .

 

1,155일간의 투쟁 명언들

(일본항공JAL의 회생 과정 1,155일 동안의 명언)

 

*나는 매일 ‘나의 동기는 선한가? 사심은 없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집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지금의 세 배로 일해야 합니다. 임원은 열 배로 일하고, 저는 그 이상으로 일하겠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 욕심부리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 남에게 친절히 대해라.” 어릴 적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배운,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규칙들, 그런 것을 규범 삼아 경영을 하면 됩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한 번이라도 품게 되면 정말로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11. 00:30






아마존닷컴의 CEO

제프 베조스

 

 

프로필

제프리 프레스턴 베조스Jeffrey Preston Bezos는 미국의 기업가이자 투자자이며, 아마존닷컴을 설립한 CEO(Chief executive officer, 최고경영자)이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에 아마존닷컴을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인터넷 상거래를 통해 책을 판매하였지만, 이후에 넓고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에 아마존닷컴을 설립하였다. 199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2000년 블루 오리진Blue Origin이라는 민간 로켓 회사를 설립하고 우주여행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3년에는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해 전 세계 언론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출생 1964년 1월 12일(만 53세), 미국

소속 아마존

학력 프린스턴 대학교

수상 1999 타임지 올해의 인물

경력 現 아마존 CEO

1994 아마존 설립, 회장

1994 디이쇼DE Shaw(데이비드 E 쇼 컴패니) 수석 부사장

1990 뱅커스트러스트 부사장

 


통찰력 넘치는 명언

만족 회사는 화려하게 보이는 데 연연해서는 안 된다. 빛나는 것은 지속되지 않는다.

 

혁신 다른 통제 요소와 마찬가지로 절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혁신을 채찍질한다. 비좁은 박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빠져나가는 특별한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

 

발전 경쟁자만 바라본다면, 경쟁자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고객에 집중하면 보다 선구자가 될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 발명을 하다 보면, 늘 예기치 않은 행운이 따르기 마련이다.

 

동기 나는 선구자가 더 좋은 제품을 만든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더 많이 고민한다. 선구자에게는 어떤 일이 단순한 사업이 아니다. 돈이 돼야 하고, 말이 돼야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선구자는 자신을 설레게 만드는, 가치 넘치는 일을 한다.

 

전략 아마존은 18년 동안 3가지 생각으로 성공을 이룩했다. 고객을 우선 생각하라, 개발하라, 그리고 인내하며 기다려라.

 

성장 모든 사업은 계속해서 젊어져야 한다. 고객이 당신과 함께 늙어 간다면 당신은 지루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방향 선회 당신이 고집스럽지 않다면 실험을 너무 빨리 포기할 것이다. 당신이 유연하지 않다면 벽에 머리를 박기만 할 뿐, 문제를 풀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마케팅 과거에는 멋진 서비스를 만드는 데 30%, 이를 알리는 데 70% 시간을 썼다. 새 시대에는 반대다.

 

가격 세상에는 두 종류의 회사가 있다. 고객에게서 돈을 더 받기 위해서 일하는 회사와 덜 받기 위해서 일하는 회사. 아마존은 후자다.

 

기타 명언 모음

*아마존이 혁신하는 방법은 소비자 중심으로 생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게 아마존이 혁신하는 방법의 기준이다.

 

*보통 회사들은 매일 어떻게 경쟁 회사보다 앞지를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우리 회사는 어떻게 소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혁신을 만드는가를 고민한다.

 

*부재가 혁신을 부른다. 무엇인가(인력, 시간, 자금 등이) 부재한 어려운 상황은 결국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하는 실험 횟수를 2배로 늘리면 창의력이 2배가 된다.

 

*창조란 오랫동안 오해를 받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진심으로 믿는 일을 해도 도와주려는 사람들조차 때로는 비판을 할 것이다. 이때 사람들의 비판이 맞는다면 그들의 말을 수용해야 되고, 반대로 그들이 맞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오랜 시간 동안 오해를 받을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게 창조의 핵심이다.

 

*다른 회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시장 조사를 해야 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저거 베껴야 되겠다” 하지 말고, “저거 괜찮은데? 저거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무엇을 만들어 볼까?”라고 생각해서 당신만의 유일한 색깔을 만들어라.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10. 02:00




 

 

아프리카 세네갈의

최근 정치상황

 

 




세네갈은 1960년에 독립을 선포한 이후 1963년 3월에 공포된 헌법에 따라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세네갈은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고, 총리는 각료를 임명하는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대통령의 서명 없이는 법률이 통과될 수 없으며, 대통령은 특히 외교, 국방, 사법 등의 분야에서 큰 권한을 지니고 있다. 1968년 2월 국민의회 총선거에서는 80의석 전부를 세네갈 진보동맹(UPS)이 독점하면서, 1966년 야당인 아프리카 재편당(PRA)을 통합한 이래 실질적으로는 1당제 국가가 되었다. 1978년에는 UPS를 세네갈 사회당으로 개칭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을 표방하였다. 독립 후 줄곧 대통령직을 맡은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가 1980년 사임을 하자 압두 디우프Abdou Diou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디우프는 3선 연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2000년 2월 2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세네갈 민주당(PDS)의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 후보가 디우프를 꺾고 1960년 독립 이후 40년 만에 최초의 수평적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며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집권 사회당 체제가 무너졌다. 이에 따라 세네갈은 서부아프리카 민주주의의 창구라는 명성을 확인하였다. 2000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이유는, 세네갈 국민들이 사회당의 장기 집권에 따른 부정부패와 여당 내 자리 다툼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성적인 실업 문제 등 경제·사회적인 어려움도 정권 교체의 원인이 되었다. 세네갈은 2000년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세계를 놀라게 정도로 차분하게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와데 당선자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선거 공약대로 자신을 지원한 야당연합(Coalition 2000) 참여 인사와 지인들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세네갈은 2001년 1월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개정안을 채택하였다. 헌법 개정안은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부여, 상원 폐지, 여성권리 강화 등의 내용을 주요 골자로 채택하였고 1998년 폐지되었던 3선 제한이 재도입되었으며 대통령 임기도 7년에서 5년으로 축소되었다. 이어서 와데 대통령은 구 집권당인 사회당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던 국회를 해산하고 2001년 5월 29일에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결과 와데 대통령 소속당인 세네갈 민주당을 축으로 한 Sopi연합(coalition Sopi)이 국회 총 의석 120석 중 89석을 획득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여 개혁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와데 대통령은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식량 자급, 자원 개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16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신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로 보건, 교육, 고용 창출을 표명하였다. 또한 당초 2006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2005년 수해복구 예산 확보 등의 이유로 2007년 대선과 통합하여 국회의원 임기를 8개월 연장하였다.

 




와데 대통령은 취임 이후 국내외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해외순방 등을 통해 해외자본 유치, 개발 프로젝트 구상 등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40년에 걸친 사회당의 장기집권으로 인해 누적된 실업, 빈곤, 교육, 전기·수도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의 노후화 등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은 집권 1기 기간 동안 경제·사회문제 해결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치러진 2007 대통령 선거에서도 55.9%의 지지율로 재선되어 집권 2기를 맞았고 그 해 6월에는 집권 여당을 중심으로 한 Sopi 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150석의 의석 중 130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사회문제 해결에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세네갈 국민들의 지지도가 크게 하락하였다. 특히 자신의 아들인 카림 와데Karim Wade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무리한 조치들을 시행한 결과, 국민들의 비판이 가중되었다.

 

압둘라예 와데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한 결과, 2009년 3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다카르Dakar, 티에스Thies, 카올라크Kaolack 등 주요 도시 지역에서 패배하였으며, 다카르 Point-E 선거구에 출마한 와데 대통령의 아들 카림 와데가 낙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2009년 10월에는 또 다시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 임기가 2012년 선출되는 차기 대통령부터 7년으로 다시 연장되고 하원의장의 임기는 5년에서 1년으로 축소되는 변화가 발생했다.

 

결국 2012년 3월 2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결선투표를 치른 끝에 전 세네갈 총리이자 야당 연합 후보인 마키 살Macky SALL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4월에 취임하였다. 살 대통령은 2012년 9월 상원 폐지 등 개혁을 단행했고 11월에는 전임 와데 대통령 아들(전 장관)의 부정부패 및 비리 수사, 처벌을 위한 특별법정을 설립했다. 하지만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는 연립 여당이 패배하였다. 2014년 8월에는 제15차 불어권 정상회의가 수도 다카르에서 개최되었으며, 2015년 5월 세네갈은 ECOWAS(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 의장국으로 선출되었다. 2016년 1월 세네갈에서는 치안 불안과 함께 테러 위험이 고조되었는데, 카올락 및 뤼피스크 지역에서 테러 용의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개헌안 국민투표가 62.6% 찬성으로 통과되어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다시 5년으로 축소되고 3선이 금지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9. 01:00

 

 




아프리카 세네갈의

역사와 기원

 

 




 

세네갈은 다카르 부근에서 석기 시대의 도끼나 화살촉 등이 발굴되고 있으나 9세기에 세네갈 강 유역에 투쿨로르Tukulor족族이 정착하면서 세네갈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11세기 중엽 북쪽의 베르베르계족의 일파인 제나가족族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파됐다. 이 종족의 이름에서 ‘세네갈’이란 국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나의 배(舟)’라는 의미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1050년대 말~1140년대 말 무렵 모로코를 중심으로 한 알무라비트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 후 나이저 강 유역의 비非이슬람교도가 강대해지면서 분쟁이 계속되었다. 14세기에는 윌로프Wolof족이 대서양 연안에 왕국을 세웠고, 15세기에는 풀라니Fulani족이 세네갈 강 중류에 왕국을 세웠으나 1444년 포르투갈 항해자가 베르데곶(串)에 내항한 무렵에는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

포르투갈은 세네갈 하구河口와 다카르 항 앞바다에 있는 고레 섬 등지에 무역기지와 가톨릭 포교 기지를 건설하였다. 이때 세네갈의 해안 왕국들은 포르투갈 무역상들과 접촉을 하며 나라를 유지했다.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도 진출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밀어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쫓아내고 미국으로 보낼 노예들을 수합하는 중요 지점인 생루이와 고레 섬(Gorée Island)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1633 창립된 프랑스의 세네갈 회사가 1659 생루이에 상관商館을 설치하면서 이곳을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차지하게 됐다. 프랑스는 1677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고레 섬을 빼앗았다. 한편 영국은 감비아 강 유역에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17~18세기의 세네갈 지역은 영국·프랑스 간에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어 모든 프랑스 기지는 영국에 점령되기도 했지만, 1816년 고레 섬과 생루이가 다시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식민지화에 노력했다. 세네갈은 프랑스의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 기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1854년 L.L.C 패데르브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 투쿨로르족의 지도자 오마르 알하디의 저항 전쟁을 제압하는 등 강력한 팽창 정책을 취하여 내륙의 프랑스 식민지화가 추진되었다. 1859년부터 1865년 사이 세네갈 내 각 부족 왕국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말 프랑스는 세네갈 전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 1886년에는 포르투갈령領 기니와, 1904년에는 감비아와의 경계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었다. 생루이, 고레 섬, 루피스크 및 다카르는 ‘4개의 코뮌’으로서 1887년 이래 프랑스 본국의 지방자치제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1895년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하나의 통치 단위가 되고 생루이가 수도가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대한 동화정책同化政策과 침략의 기지로서 세네갈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902년에 수도를 다카르로 옮겼으며 1908년 도시 건설이 완료되면서 다카르는 서아프리카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제1·2 세계대전을 거쳐 세네갈은 다른 프랑스령 아프리카 국가와 함께 1946년 프랑스연합 내의 해외 영토가 되었고, 1956년에는 프랑스 공동체 내에서 자치정부가 수립되었으며, 1958년 12월에는 말리Mali, 니제르Niger,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와 연합하여 말리연방(Republic of Mali)을 수립하였다.

 



독립 이후

1960년 8월 세네갈은 말리 연방에서 탈퇴하여 단독 국가로 독립을 선포하였고, 9월에는 세네갈 사회당(PSS)의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1906~2001)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프랑스 온건 개혁 노선을 택하며 1980년까지 장기 집권한 셍고르는 시인이자 문화이론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아프리카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 지식인 중 1명으로 평가된다. 1976년 4월 세네갈은 제한적인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80년 12월에는 셍고르 대통령이 사임하였고, 이듬해 1월에 압두 디우프Abdou Diouf 수상이 대통령직을 승계했고 세네갈은 1981년에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93년 2월에는 디우프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였다. 5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집권 사회당이 총 의석 120석 중 85석을 차지하면서 승리하였고, 1998년 5월 총선에서도 총 의석 140석 중 93석을 획득하여 다시 승리하였다. 1998년 8월에는 1992년에 제정되었던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3회 이상 연임 제한을 철폐하였다. 1999년 1월에는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사회당이 압승하였으며, 2월 18일자로 세네갈의 상원이 공식 출범하였다.

 

2000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3월에는 대통령 선거 2차 투표가 실시되어 야당 후보인 압둘라예 와데Abdoulaye Wade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와데 대통령은 2000년 4월에 취임하였다. 2001년 1월에는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새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2월에는 새 헌법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었다. 4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여당이 120석 중 89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세네갈은 1996년 중국과 단교하였으나 2005년 10월 타이완과의 단교 이후 중국과는 재수교를 단행하였다.

 

2007년 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와데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6월에는 총선이 실시되어 여당이 하원 160석 중 130석을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009년 3월에는 세네갈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세네갈은 201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4월부터 마키 살Macky SALL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8. 00:30


 

 

아프리카 세네갈의

영토와 자연환경

 

 



 

세네갈 공화국Republic of Senegal은 아프리카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다. 현지어(프랑스어)로는 레퓌블리크 뒤 세네갈(Republique du Senegal)이라고 한다. 수도는 인구 약 352만 명 규모의 다카르Dakar이다. 다카르는 그리니치 표준시 기준으로 서울보다 9시간이 느리다. 세네갈의 총인구는 2016년을 기준으로 약 1,432만 명이며, 국토의 총면적은 196,722㎢로 영국보다 조금 작다. 국토의 대부분은 해발 고도 100m 이하의 평지이다. 남으로는 기니Guinea, 기니-비사우Guinea-Bissau, 동으로는 말리Mali, 북으로는 모리타니Mauritania, 서로는 북대서양과 접한다. 아프리카 대륙을 흔히 사람의 두개골 모양으로 여기는데, 그렇게 보면 세네갈은 볼록 나온 뒤통수 해당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수도 다카르는 그 중 가장 튀어나온 부분에 위치해 있다. 세네갈 내부에는 대서양으로부터 감비아Gambia 강을 따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감비아Gambia가 북부 세네갈과 ‘카자망스Casamance’라 불리는 남부 세네갈을 분리하고 있다. 그런 지형 탓에 세네갈은 마치 감비아를 입에 가득 물고 깔깔거리며 웃는 턱이 네모난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세네갈의 국기는 세로로 된 삼색기로 초록색, 금색, 붉은색 순이다. 그리고 중앙에 5개의 가지를 가진 초록색 별이 있다. 초록색은 삼림에서 온 것으로 희망을 의미하며, 금색은 초원(savane)을, 붉은색은 세네갈 투사들이 흘린 피를 각각 상징한다. 중앙에 위치한 별의 다섯 가지는 5대륙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세네갈 국가 문장에서 사자는 힘을 나타내며, 바오밥(Baobab)은 장수를 의미한다. 매년 4월 4일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날로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세네갈의 국가이념은 한 민족(Un Peuple), 한 목적(un But), 한 믿음(une Foi)이다.

 

세네갈은 산을 보기 힘든 저지대로 대부분 지역이 평평하다. 전반적으로 해발고도 100m 이하의 평탄지이다. 유일하게 솟아 있는 지역은 남동부에 있는 해발 400m의 푸타잘롱 산악 지대의 줄기이다. 평평한 모래사장으로 덮여 있는 대서양 해변은 길이가 약 500km이고 시네 강, 살룸 강, 카자망스 강 하구의 삼각주는 넓은 맹그로브 숲으로 덮여 있다. 긴 사주, 석호, 소금이 덮인 모래 언덕이 북부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다.

 


 

남부를 중심으로 전국토의 54%는 삼림을 이루고 있으나 세네갈 강 유역은 사하라 사막에 접하는 건조 지대로 페를로 사막을 형성한다. 그 밖의 지역은 사바나성性 기후를 나타낸다. 북부 사헬 지역의 가시나무 덤불 사바나에서 독특하고 마디가 있는 바오밥과 빨간 꽃이 피는 플랑부아양 나무가 자라는 건조 사바나를 지나, 케이폭수樹, 야자나무, 유칼립투스, 망고 등으로 이루어진 카자망스의 습윤 사바나 그리고 습윤 삼림 지대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세네갈에는 3개의 강江이 흐른다. 북쪽 모리타니와의 국경을 형성하는 이 나라 최대 강인 세네갈Senegal 강, 극동쪽의 발원지만 제외하고는 감비아에 의해 둘러싸인 중앙의 감비아Gambia 강이 있다. 감비아는 세네갈의 국토로 둘러싸여 세네갈 남부 카자망스 지역을 북부와 남부로 갈라놓고 있다. 또 하나의 강은 인근 지역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고 지역 명칭의 유래가 되기도 했던 남쪽의 카자망스Casamance 강이다. 모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며 하류는 대형선박의 항행이 가능하다.

 

국토 북부 전체에 걸친 사막화 현상은 계속 확대되는 문제로, 세네갈 강의 마난탈리 댐만이 부분적으로 이 현상을 저지하고 있는 사정이다. 사하라 사막 남부의 반 건조대인 사헬에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다양함을 보여주는 나라인 세네갈은 550종 이상의 동물군을 자랑한다. 또한 철새들-특히 물새 종류-에게 중요한 지역으로 매해 겨울 유럽에서 많은 수가 떼를 지어 돌아와 생루이Saint-Louis 북쪽에 있는 세계 주요 조류보호지구 중의 하나인 빠르 나씨오날 오 외주 두 쥬지(Parc National aux Oiseaux du Djoudj)에 머문다. 세네갈은 지반이 안정적인 곳으로 지진 피해는 발생하지 않으며, 태풍 등 천재지변도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높은 파도로 인한 해안침식 현상은 어느 해안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기후는 우계(6~11월)와 건계(12~5월)로 나누어지는데 우계에는 사하라 사막 쪽으로 습기가 많은 남동 계절풍이 불며 국토 전역에 비를 몰고 온다. 건계에는 카나리아 한류寒流의 영향으로 북서쪽에서 서늘한 무역풍이 불어와 연안부에서는 기온이 낮아진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사하라에서 하르마탄이라는 건열풍乾熱風이 불어오므로 기온이 내려가지는 않는다. 연평균 강수량은 600mm 미만인데 북부와 북동부는 적은 양의 비가 오는 반면 남부의 카자망스는 최대 2,000mm의 비가 오는 습윤 열대성 기후이다. 또 남부의 우기는 북부보다 현저히 길다. 가장 더운 달은 9월~10월로 기온이 섭씨 30℃~35℃를 보이며,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섭씨 18℃~26℃를 보인다. 가장 건조한 달은 4월~5월로서 평균 강우량이 1㎜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습한 달은 8월로 평균 강우량이 254㎜를 보인다.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