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보2017. 7. 8. 17:45




 

 

북유럽 덴마크의

근·현대역사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1863~현재)

덴마크는 1863년 왕위에 오른 크리스티안 9세Christian IX(1863~1906년 재위)에 의해 세 번째 왕조인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가 창설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크리스티안 9세가 등극한 1863 덴마크 의회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킨 뒤에 독일연방에 속해 있던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지역을 덴마크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과 농업의 집단화(협동농장)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1898년 전국 노동자연합과 고용주협회가 구성되는 등 근대사회로의 이행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근대적 정당으로서 1871년 사회민주당(노동자 중심)과 1880년 자유민주당(농민 중심)이 창당되었고, 이들 두 정당을 주축으로 한 개혁주의자들이 1901년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근대 입헌정치가 개막되었다.

 

1914년 6월 28일에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의 후계자가 세르비아의 국민주의자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내리면서 1차 세계대전World War Ⅰ(1914~1918)이 발발했다. 덴마크는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 상선들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는 고초를 겪게 됐다. 1918년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의해 패전하자 전쟁이 끝나고, 1920년 덴마크는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북 슐레스비히를 되찾을 수 있었다. 덴마크는 세계대전 중인 1915년 헌법 개정을 통해 보통선거제도(25세 이상 남·여에게 투표권 부여) 도입됨으로써 민주제도가 출범하였다. 사회민주당과 급진 자유당(1905년 창당, 소지주·지식층 중심) 오랜 연정(1929~1940) 지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1940년~현재)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World War Ⅱ(1939~1945)이 시작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및 재산을 파괴한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1940년 4월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함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필요한 물자들은 독일군에 빼앗겼고, 덴마크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색출되어 끌려갔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에 의해 종식되자 덴마크의 영토였던 아이슬란드가 독립하게 되었고, 1945년에는 덴마크 전체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덴마크는 인적·물적 희생이 컸으나, 전후 미국의 대외원조계획인 마샬 플랜Marshall Plan 혜택으로 파괴된 기간산업시설, 전력부문, 농업분야 등의 복구가 이루어졌다. 전후에 덴마크는 종래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공동방위를 통한 국가안보 확보 차원에서 스웨덴, 노르웨이와의 방위동맹을 모색하였으나 동 협상이 실패함에 따라 1949년 NATO에 가입하였으며, 그 후 유럽제국과의 경제협력증진을 위해 EFTA(1960), EC(1973)에 각각 가입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유지해 오고 있다.

 

덴마크는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글뤽스브르그Glüksburg 왕조가 창설된 이후 크리스티안 9세, 크리스티안 10세, 프레데릭 9세에 이어 현재는 마르그레트 2세Margrethe Ⅱ(1972년 즉위) 여왕이 덴마크의 국가 원수로 위상을 점하고 있다. 마르그레트 여왕은 프레데릭 9세의 장녀이다. 그녀는 영국과 네덜란드 여왕 즉위에 영향을 받아 1953년에 개정된 새로운 헌법에 따라 여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덴마크 왕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실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덴마크는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사회복지정책이 비교적 발달되어 있으며 특히 산업기계분야와 낙농분야 등이 우수한 선진국으로서 북유럽 지역과 유럽 본토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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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보2017. 7. 7. 17:42





 

 

북유럽 덴마크의

중세시대역사

 


 

 

에스트리스Estrith 왕조(1047~1447년)

크누트 대왕이 죽자 3국은 분열되었고,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의 조그만 세력으로 전락하였다. 크누트 왕의 조카 스벤(스웨인) 2세Svend(Sweyn) Ⅱ(1020?~1074)는 덴마크를 노르웨이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1047년에 잉글랜드 교회로부터 벗어나려고 로마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신 덴마크 왕국 건설을 지향하면서 최초의 왕조인 에스트리스Estrith 왕조를 창설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후 몇 번의 왕이 교체되면서 다시 왕권이 약화되었고, 덴마크 교회는 함부르크의 세력 하에 있다가 1104년에 독자적인 국교회를 갖게 된다.

 

이후 교회와 국가 내의 분열이 거듭되자 1157년에 크누드 리바르의 둘째아들 발데마르Valdemar den Store 1세(1131~1182)가 일어나 국내를 통일하고 발데마르 왕조를 일으켰다. 발데마르 왕은 신성로마 황제에 복종할 것을 맹서하고, 군사력을 증진하고 재편성하여 독일을 견제하면서 발트 해의 슬라브 세력과 싸웠다. 그때 셸란 섬에 구축한 성채가 바로 오늘의 코펜하겐Copenhagen의 기원이 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발데마르 2세(1170~1240)가 즉위하면서 덴마크는 경제적 측면에서 안정이 되었으나 왕과 교회, 귀족 사이의 투쟁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왕국의 힘이 점점 사그라졌다. 12세기 중반부터 전국적으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교회가 확대됨에 따라 국왕, 귀족 및 교회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1282년 국왕에 대한 견제 기능을 보유한 국정 협의 기관으로서 귀족원(다네호프Danehof, 후에 Rigsråd 개칭) 설치되기도 했다.

 



발데마르 4세가 죽자 외손자인 올라프 2세Olaf Ⅱ세(1376~1387 재위)가 1380년 노르웨이 및 아이슬란드를 합병(1814년까지 지속)했고, 이어 발데마르 4세의 둘째 딸 마르그레테Margrete 1세(1387~1397 재위)가 등장하여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섭정하다가 1387년에 덴마크 및 노르웨이의 군주로 승인받았고, 1389년에 스웨덴 왕을 겸함으로써 3국을 다스렸다. 그럼으로써 1397년 비로소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3국 연합체인 칼마르 동맹Kalmar Union(1397~1523)이 결성되었으며, 마르그레테 1세는 정식으로 3국의 북해 제국을 다스리는 여왕이 되었다.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1448~1863년)

1448년 덴마크는 크리스티안 1세Christian Ⅰ(1448~1481년 재위)에 의해 창설된 제2의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1448~1863년)로 교체되지만 3국 연합국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스웨덴에 독립의 기운이 일어나 연합체의 결성이 약화되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Ⅱ는 스웨덴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의 독립군을 격파하고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독립조직을 와해시켰지만, 끝내 스웨덴은 봉기를 거듭하여 1523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다.

 

1526년 즉위한 크리스티안 3세Christian Ⅲ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루터교를 받아들였고, 자치 능력을 상실한 노르웨이를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원로원과 귀족세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 여러 분야의 학자를 배출하여 나라가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프레데릭 2세Frederik II가 집권하면서 덴마크는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스웨덴과 폴란드, 뤼벡 사이의 전쟁에 끼어들었고, 후에 노르웨이 왕이면서 덴마크의 왕인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Ⅳ가 등장하여 상공업을 진흥시키고,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폈다. 그렇지만 1625년 독일과의 전쟁, 1643년 스웨덴과 네덜란드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의 손실과 국력의 쇠퇴를 가져왔다. 1660년에 덴마크의 프레데릭 3세Frederik Ⅲ가 나와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도시 부르주아 및 루터교 성직자와 결합하여 왕위의 세습제를 승인 받고 1665년에 국왕의 절대주권을 승인받아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1788년에 덴마크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덴마크는 1797년 자유무역의 원칙에 입각한 관세법을 제정하고, 경제적인 활력에 주력을 가했다. 그러나 유럽의 동맹연합에 대립하여 벌인 나폴레옹 전쟁The Napoleonic Wars(1803~1815)에서 프랑스 편에 서게 된 덴마크는 영국, 러시아, 스웨덴의 동맹국과 싸웠으나 패하게 됐다. 결국 덴마크는 1814년 킬Kiel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와의 연합을 파기하고,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여 4세기에 걸친 노르웨이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영토는 현재 덴마크와 덴마크령 아이슬란드, 패로제도, 그린란드로 국한되었다.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덴마크의 프레데릭 왕정은 국민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1830년 프랑스 혁명 직후 왕권이 크게 약화되면서 1842년에는 덴마크에 입헌적 대의정치를 주장하는 국민자유당이 결성되었다. 1849년에 절대왕정 폐지 및 의회(Rigsdag : 상원 Landsting 및 하원 Folketing으로 구성) 신설을 골자로 하는 최초의 『헌법』이 채택되었고, 마침내 프레데릭 7세Frederik Ⅶ는 왕정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헌법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귀족대표 중심의 상원과 소규모 자본가와 평민대표 중심의 하원간의 주도권 경쟁으로 덴마크의 국내 정국은 불안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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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7. 7. 6. 17:36






 

 

모악산 청련암에서

증산상제님의 행적

 



『도전』 성구

* 계묘癸卯(道紀 33, 1903)년 4월에 상제님께서 모악산 안양동安養洞 청련암靑蓮庵에 머무르시며 공사를 보시니 이때 박금곡이 수종 드니라. 상제님께서 11일 해 돋기 전에 공사를 마치시고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에 ‘용봉龍鳳’ 두 글자를 상하上下로 대응시켜 크게 쓰신 뒤에, 그 왼편에 작은 글씨로 ‘독존석가불獨尊釋迦佛’이라 써서 금곡에게 주시니, 금곡이 상제님의 친필을 공손히 받아 먼저 깨끗한 종이로 싸고 다시 비단으로 고이 감아 보물처럼 보관해 두니라. (6:8:1~4)

 

계묘癸卯년(1903년) 4월 초에 상제님이 여기 청련암에 오셔서 공사를 보셨다. 4월 11일 새벽에 공사를 보시고서 해가 떠오를 때 두 글자를 쓰셨다. 아래에다 용龍 자를 쓰시고, 그 다음 봉鳳 자는 뒤집어 가지고 거꾸로 쓰셨다. 용과 봉이 서로 머리를 맞대는 모습으로 그리셨는데 용과 봉은 누가 높다 누가 낮다 할 수가 없다. 용봉龍鳳 두 글자를 쓰셔서 대원사 주지 박금곡에게 주셨다. 그런데 왼쪽에 다섯 글자가 더 있다. 조금 작은 글자로 ‘독존석가불獨尊釋迦佛’ 다섯 글자를 쓰셨다. 선천 부처와 후천 대불大佛이 있다. 상제님의 도통을 전수받으신 태모님께서 후천 대불도수를 보셨지 않나. 선천의 지존이신 석가불보다도 더 큰 부처님, 우주의 지존이신 상제님이 미륵불의 도를 여는 것을 말한다. 용봉은 미륵님의 도법정신을 상징하고 또 미륵불의 도를 여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가 안양동安養洞인데 안양은 안양安養 양신養神에서 왔다. 평안한 마음을 기르고, 몸을 새롭게 하고 불멸의 몸을 길러 낸다는 의미다. 그래서 안양동은 바로 천지의 조화로운 생명의 마음, 부처의 마음을 기른다는 뜻이 있다. 안양동은 직접적으로 종통하고도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용봉도수는 상제님 태모님의 대행자를 상징한다. 용은 천지의 물을 맡아 다스리고, 봉황은 천지의 불새, 태양새라고 해서 태양의 불기운을 맡는다. 용과 봉은 이 세상에서는 없지만 영적인 4차원 세계에서는 자연신으로 있다. 용이 중간 하늘에서 바닷물을 끌어올려 비를 내려 준다. 용과 봉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 천지부모의 대행자이다. 순수 양, 하늘을 대행하는 것은 감坎괘다. 감괘는 중앙에 양이 있고 천지의 물을 상징한다. 불이라는 것은 땅 어머니의 순수 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용문화, 용토템은 태호 복희씨가 처음 가지고 오셨다. 태호 복희씨는 바람 풍風가로 인류 최초의 성씨다. 봉의 문화를 처음 가지고 오신 분은 바로 염제 신농씨다. 신농씨는 강姜가로서 인류 성씨의 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미륵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강姜씨로 오셨다. 강씨는 그 문화가 봉황이다. 중국의 염제신농씨 사당에 가보면 봉황새가 꽉 차 있다. 복희씨와 염제 신농씨, 인류 성씨의 뿌리 족속의 상징이 용과 봉이다.

 

여기서 보면 제비산이 보이고 제비산 뒤에 구성산이 보이고 오른쪽에 계룡봉이 보인다. 계룡봉에서 상제님의 친구, 영원한 인간 세상의 친구, 안필성 성도가 저기서 살았다. 그 아래 조금 내려가다 보면 용화동인데 그 왼쪽 환평에서 김형렬 성도가 살았다. 위아래 마을에서 그렇게 두 양반이 친구처럼 살았다. 김형렬 성도가 안필성 성도보다 여덟 살이 많다.

 

여기 청련암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셨는데 아미타불은 무량광, 무량수불이다. 수명이 제한이 없고 광명이 경계가 없는 온 우주의 광명 부처님이다. 불가에서는 안양정토安養淨土라고 해서 아미타불의 정토낙원을 말한다. 아미타불은 미륵님과 함께 이 세상에 오셔서 미륵님의 지상선경 용화낙원을 건설하시는 그런 부처님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에서 나무라는 것은 돌아간다는 의미다. 아미타 부처님에게 돌아간다 말이다. 결국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아미타 부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아미타불이 된다. 우리는 아미타불이다! (복창) 이 아미타불은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그 부처 세상을 완성하는 부처님이다. 그럼 모든 걸 완성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상제님의 일꾼들 초립동草笠童이다. 우리 초립동이들이 바로 이 태을주 조화주문을 받아가지고 태을선, 태을 부처가 된다. 이번에 1만 2천 명의 도통 부처들이 나온다.

 

저 하늘을 봐. 하늘은 동서남북, 위아래 아무것도 없어. 하늘은 어떤 성질이 있는 게 아니다. 불교는 하늘 마음, 하늘의 도를 근본으로 해서 생겨났다. 그래서 괴로울 때, 자기 한계를 느낄 때, 자기가 어리석다고 느껴질 때 맑은 하늘을 보라. 이것이 바로 본래 자연의 마음이고 부처의 마음이고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들 생명의 본성은 나이가 많고 적고,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키가 작거나 크거나에 전혀 관계없다. 우리 마음이 본래 우주의 마음이고 우리는 우주 자체다. 나는 살아 있는 우주다. 나는 살아 있는 천지다! 여기 안양동에서는 이걸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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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7. 7. 5. 17:33




 

 

모악산 금산사는

태을주의 2 고향

 

 




인류 구원의 실제 첫 발걸음을 떼신 날

상제님은 성수 31살 되시던 해, 신축辛丑년(도기 31년, 1901년) 음력 7월 7일 가을 천지의 도통문을 여시고 미륵부처님의 도를 이루셨다. 해가 바뀌어서 32살 되시던 해, 임인壬寅년 음력 4월 4일 바로 저 앞에 있는 원평 장터에서 김형렬 성도를 만나셨다. 김형렬 성도가 식구들 밥 먹이려고 양곡을 팔러 온 돈을 상제님께 다 드렸다. 상제님이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큰 감동을 하셨다. 형렬에게 “내가 지금은 충청도에 볼일이 있어 가니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를 참이네.”(도전 3편 8장) 그러셨다. 그러고서 9일 후에 바로 여기에 오셨다. 그날 깊은 밤에 상제님이 여기서 “형렬아, 형렬아!” 외치셨다. 그때 태운장은 바로 서전재 너머 제비창골에 있는 집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귓가에 대고 부르는 것처럼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밖에 나가서 보니까 금산사 쪽에서 들려왔다.


상제님이 천지 성령으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기운을 받아서 상제님께서 금산사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김형렬 성도가 호롱불을 들고 서전재를 넘어 여기에 와서 상제님께 절을 하고 상제님을 만나셨다. 얼마나 반가웠겠어. 아마 그때 시간이 하늘 문이 열리는 자시子時가 아니냐. 여기서 상제님을 모시고 이쪽 아래로 용화동으로 해서 제비창골 집으로 가셨다. 집에 들어가시기 전에 감나무 아래에 앉으셨다. 천하사에 마음을 변하지 않겠느냐고 세 번 언약을 받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셨다.(3편 11장) 그래서 임술壬戌생 태운장 김형렬 성도는 인간으로 오신 도솔천 천주님, 상제님의 분신이면서 상제님의 대행자이시다. 상제님이 무지개문에서 인사의 주인공 김형렬 성도의 집으로 가신 사건은 뭐냐? 가을 천지개벽기에 인간으로 오신 도솔천의 천주 미륵님이 인류 구원의 실제 첫걸음을 인간 세간사를 향해서 내딛으신 것이다. 천지 개조 역사를 보시는 실제 첫걸음을 떼신 것이다.

 

 



금산사는 태을주의 제2고향

미륵불은 개벽불이다. 미륵님은 하늘과 땅, 인간과 천상 신들의 세계를 새 질서로 바꾸어 놓으시는 부처님이다. 미륵불은 궁극의 부처님, 종불宗佛이다. 구원의 부처, 희망의 부처 미륵불은 서 있는 부처님이다. 금산사 미륵불을 보면 미륵전 안에 금불이 서 있다. 세계에서 실내불로서 가장 큰 미륵부처님이다. 미륵불은 신선이 되시는 부처님이다. 앞으로 미륵부처님의 도를 받는 일꾼들, 제자들은 어떤 부처가 되느냐? 신선이 된 부처, 신선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상제님이 동학혁명이 패망당하는 24세 전후에 여기 금산사에 오셨는데 누구를 만나셨나? 바로 신선이 되게 하는 주문, 태을주를 전수해 주신 김경수 대성사를 만나셨다. 김경수 대성사가 미륵불을 참배하고, 여기서 상제님을 뵈었다. 김경수 집안의 후손들은 김경수 할아버지가 상제님보다 2세대 내지 3세대 나이가 많으셨다고 한다. 상제님이 20대였다면 김경수라고 하는 분은 최소 70대에서 80대 초였다.

 

 

후천 5만 년 신선으로 살아가는 부처님들의 새 세상이 바로 용화낙원이다. 앞으로 5만 년 지상 조화선경, 미륵불 세상을 만드는 심법을 전수받는 조화의 주문이 태을주이다. 50년 동안 기도해서 그 주문을 천상에서 받아 내린 분이 김경수 성인이다. 그가 금산사 미륵불을 참배하고 나서 상제님을 뵈었다. 그리고 상제님께 직접 태을주를 전수해 주셨다. 바로 그 사건이 금산사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금산사는 이런 우주사적인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금산사는 태을주의 제2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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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7. 7. 4. 02:30





 

 

모악산 금산사 천왕문 앞에서

증산상제님의 행적

 



 

용소에 대한 성구

* 하루는 상제님께서 형렬과 호연을 데리고 금산사 용소龍沼에 이르시어 호연에게 “내 손 잡아라.” 하고 손을 내미시거늘, 호연이 손가락을 잡자마자 상제님께서 용소 안으로 쑥 들어가시니라. ··· 잠시 어디선가 “오빠, 오빠~ 하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늘, …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거꾸로 빠져서 죽은 사람인데 자기 오빠를 슬프게 부르고 있구나.” 하시고, 용소 밖으로 나오시어 제물을 차리고 친히 제를 지내 주시며 신도에 칙령을 내려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가라고 명하시니라. (9:81)

 



천왕문 먹구렁이 공사

* 하루는 상제님께서 금산사 천왕문天王門의 상량을 커다란 구렁이로 만드시니 중들이 무섭고 징그러워 근접을 못하는지라 … 커다란 구렁이로 만드시니 중들이 무섭고 징그러워 근접을 못하는지라 … “구렁이라고 이 상량을 짐승으로 알지 말아라.” 하시고 … 잠시 후 상제님께서 간짓대 앞에 서시어 구렁이 흉내를 내며 춤을 추시니 구렁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함께 춤을 추거늘, 상제님께서 “용마龍馬내려졌다!” 하고 소리치시니라. (9:38:1~5)

 

* 4월 초파일에 … 사천왕상 꼭대기에서 커다란 먹구렁이가 기어 나와 혀를 내두르며 “남의 것 훔쳤거나 훔쳐 먹은 사람들, 죄지은 사람들은 다 나와라.” 하고 … “남의 길쌈해 주고 실꾸리 도둑질해서 옷 해 입고 온 사람은 비켜서라.” 하니,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아이고, 참말로 맘씨 옳은 사람이나 다닐까, 맘씨 궂은 사람은 여기 못 오겠네.” 하고 수군거리니라. (9:39)

 


 

용소龍沼에서의 천도식

우리가 금산사 경내에 들어와서 천왕문天王門 앞에 서 있다. 왼쪽에 있는 다리가 무슨 다리? 다 함께 해탈교解脫橋.(복창) 예전에 해탈교 바로 위 한 10미터 지점에 용소가 있었다. 도전에 보면 어느 날 상제님이 형렬과 호연을 데리고 저 용소 앞에 오셨다. 상제님이 저 용소 앞에 서셔서 갑자기 호연의 손을 잡고 용소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셨다. 호연이 무서워서 상제님 손을 꽉 잡았는데 갑자기 급류가 나타났다. 예로부터 여기의 물이 깊어 가지고 한번 빠지면 살아 나오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속에서 10대 소녀 같은 젊은 여인이 “오빠, 오빠.” 하면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그 죽은 영혼의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그래서 상제님이 그 죽은 여자 신명을 데리고 나오셔서 천도식을 올려주셨다. 그 여인이 물에 빠져서 거꾸로 서서 죽었는데 그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가지고 수신이 돼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니까 오빠, 오빠 찾으면서 그 숱한 날들을 살려 달라고 절규를 하는 거여. 지금 세월호 사건도 그런 거와 같은 거야. 바닷속에서 “엄마 아빠 살려 주세요.” 하고 절규를 한다 말이여. 우리가 천도식의 중요성을 이 용소에서 크게 배우게 된다. 영혼을 건져 내는 것은 인사人事를 통해서,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건져지는 것이다. 인간이 죽은 뒤에 그 신명들의 억울한 죽음과 고통이라는 것은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불가에도 천도식 문화가 아주 잘 정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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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7. 7. 3. 17:30



 

 

증산도 성지

모악산의 풍수지리

 




모악산은 청짐관운형

가을천지의 어머니 산으로 태어나기 전에 모악산은 지금 기운이 어떠냐? 『도전』에 보면 “모악산 치맛바람을 아느냐?”(4편 148장)라는 성구가 있다. 치맛바람은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니다. 모악산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술어를 빌리면, 청짐관운형靑鴆貫雲形이다. 푸른 짐새가 구름을 꿰뚫은 형이다. 독사가 천 년 묵으면 짐새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한나라를 창업한 한고조 유방의 아내가 여태후인데 시기 질투가 많고 심성이 좋지 않았다. 한고조의 또 다른 아내 척부인을 질투해서 사지를 잘라 버리고, 돼지우리에다 집어넣었다. 나중에 척부인을 죽일 때 짐새의 독을 풀어 가지고, 독주를 먹여서 죽였다는 말이 있다. 짐새가 그렇게 독을 품고 있는 새다. 모악산 기본 형국이 그런 짐새가 구름을 꿰뚫은 형국이다. 천지의 어머니 산이지만 그런 살기를 품고 있어서, 상제님이 선천 상극세상을 정리하시는데 그 기운을 전부 풀어 쓰셨다.

 

 


모악산은 금산이다

여기가 금제군(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 금미륵불. 전부 ‘금’ 자가 들어간다. 음양의 이치로 보면 서방 금金 자를 썼다. 모악산은 금산金山이다. 금金은 가을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는 가을 산이다. 이 천지의 원 주인 아버지가 오시는데 바로 천지의 가을 산에 오시는 거다. 가을철 기운을 몰고 오신다. 그것을 사자성어로 서신사명西神司命이라고 한다. 서신은 우주의 가을철에 오시는 천지의 추수자 하나님을 말한다. 그것을 음양오행 원리로는 가을을 나타내는 금 기운을 써서 금신金神이라고 한다. 공간적인 방위로 말할 때는 서신西神이라고 그런다. 가을철에 인류 지구문명을 추수하시는 분이 바로 서신, 금신으로 오신다. 지구 어머니 모악산에 올 때는 이런 큰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금산사에 오면 인류 문화, 역사, 생명의 근원을 찾는 회귀본능을 느낄 수 있다.

 

 


인류 문화의 틀이 바뀌는 대사건

상제님께서 여기 금산사를 집처럼 자주 오셨다. 지금 우리가 금산사 입구 돌무지개문에 와 있다. 지금 모습은 상제님 계셨을 때 당시 모습으로 최근 복원된 것이다. 자료집에 보면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그림이 있다. 거기에 상제님 당대의 금산사 모습이 나와 있다. 그게 아주 소중한 자료다. 거기에 보면 돌무지개문이 있고, 그 위에 전각이 있다. 이 돌무지개문 바로 위 전각에 상제님이 앉으셔서 누구를 불렀나? “형렬아, 형렬아, 형렬아!” 이렇게 세 번을 부르셨다. 이 사건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틀, 인류 문화사의 큰 틀이 바뀌는 대사건이다. 그때가 상제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31살 되시던 해다. 상제님이 이 위에 앉으셔서 북서쪽 제비창골에 살고 있었던 김형렬 성도를 향해서 “형렬아, 형렬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신 거다. 증언을 들어 보면 그때 시간이 낮이 아니고 깊은 밤이었다고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7. 2. 17:25




 

 

아프리카 수단의

종교 교육

 




종교

전체 인구 중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일부가 수단 성공회, 개신교, 로마 가톨릭 등의 기독교와 토착신앙을 믿는다. 총인구에 대한 종교 분포는 이슬람교가 64%, 기독교는 27% 중 카톨릭이 60%이고 신교가 40%이며, 원시종교는 9% 정도이다. 남부인의 종교 분포로는 기독교가 50%이며 원시종교가 40%, 이슬람교가 10%이다.

이슬람교의 분포는 대부분 수나Sunna파로서 말리키Maliki파 73%, 샤피Shafi파 1%, 안사랄 수나Ansaral-Sunna파 20%, 하나피Hanafi파 5%, 한발리Hanbali파 1%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연유는 서기 1,500년경 수단 서쪽 다르푸르Darfur 지방에서 수단 중남부 세나르Sennar 지역과 소바Soba 왕국을 병합해 세력을 확장한 푼지Funj 왕조가 스페인 계통에서 발생한 말리키 이슬람을 채택하여 그 파가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 언론

수단의 라디오 중파 방송은 5개 지역(옴두르만, 소바, 라이바, 스이냐, 니알라)에서 하루 18시간 방송하고 있으며, 수단 전역의 70 %가 청취 가능하다. TV 방송국으로는 Sudan National Broadcasting Corporation과 Khartoum TV방송국 등 2개가 있으며 1일 8시간 방송하고 있다.

 

신문은 대부분 정부 통제 아래 발행되는데, 아랍어판으로 Al Anbaa(일간), Akhbar Alyoum(일간), Al Wan(일간), Al Anbaa Weekly Review(주간) 등이 있고, 영어판으로는 sudanow(월간), Sudan Vision(일간) 등이 있다.

수단은 초등학교(7~12세), 중학교(13~15세), 고등학교(16~18세), 대학교(19세 이상)의 교육 과정이 있고 교육비는 대부분 국가부담이다. 대학은 대부분 카르툼에 집중되어 있으며 국립 카르툼대(학생 25,000명)가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7. 1. 17:22




 

아프리카 수단의

사회와 문화

 




수단은 이슬람 원리주의 지배하에 있는 보수사회이므로 사회 문화적 특성도 이슬람의 율법과 풍습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수단의 사회 정서를 이해하려면 라마단, 살라트, 이프타르 율법 문화와 복식, 음주 및 여가 문화 등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라마단Ramadan(금식) 매년 이슬람력 라마단월에 일출부터 일몰까지 식음을 금지하는 단식 기간을 의미한다. 이는 무함마드가 라마단 달(음력인 이슬람력의 9번째 달)에 처음으로 신의 계시를 받은 것에서 유래하며, 이슬람 각국에서 첫 초승달 관측 후 라마단을 발표하므로 국가별로 하루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라마단 한 달간 일출부터 일몰까지 물을 포함한 음식 음료의 섭취, 흡연, 성행위는 물론 폭력, 화, 시기 등이 금지된다. 라마단의 목적은 단식과 금욕을 통해 굶주린 자들의 고통을 체험하고, 인내와 자제력을 연마하면서 신에게 순종하고, 과실과 악행을 속죄함으로써 신앙을 공고히 하는 데 있다.

 

살라트Salat 수단은 코란과 하디스에 나오는 규칙들과 원리들을 판례들과 율법으로 편찬한 ‘샤리아 법’을 적용하는 나라이다. 이슬람은 믿음과 실천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실천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으로 신앙고백(샤하다), 기도(살라트), 자선(자카트), 단식(사움), 메카순례(하지)를 의미한다. 이 다섯 기둥 중, 살라트는 매일 5번 새벽 해뜨기 전, 정오, 오후 중간쯤, 해질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해야 한다. 시간은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고, 해당 시간대 안이면 개인이 선택하여 기도를 드리면 된다. 살라트를 시작하기 전 ‘우두(부분 세정)’를 해야 한다. 우두는 손, 입, 코, 얼굴, 팔, 머리, 귀 그리고 발을 씻어야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외적 청결을 넘어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결심도 의미하며, 바닥에 양탄자 또는 수건 등을 깔고 메카 지역의 카바 신전을 향해 행해야 한다.

 

이프타르Iftar 이프타르란 ‘금식을 깬다’는 의미로, 이슬람 신자들이 라마단 기간 동안 일몰 전까지는 금식을 하고 일몰 후에 가족 및 친지와 함께 푸짐한 식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음식의 종류에는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

 

음주 이슬람에서 금기해야할 사항을 하람Haram 이라한다. 음주가 이슬람에서 하람이 되기까지는 몇 가지의 단계가 있었다. 그 중 마지막 단계가 코란 ‘알-마이다’장에 나오는 “믿는 자들이여. 술과 도박과 우상숭배와 점술은 사탄이 행하는 불결한 것들이거늘 그것들을 피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번성하리라.”는 구절이다. 이슬람에서 음주자는 신과 그의 사도들에게 저주를 받는다고 보며, 술자리에 동석하는 것도 하람으로 본다. 또한 음주를 하면 40일간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음주에 대한 하람은 수단 내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내국인, 외국인을 불문하고 수단 내에서의 음주는 불법이다.

 


 

히잡Hijab 이슬람 여성 전통의상은 부르카, 니캅, 히잡, 차도르가 있다. 각 의상들마다 몸을 가리는 정도와 형태가 다르다. 부르카는 눈을 포함하여 전신을 가리는 의상으로, 얇은 천으로 장갑까지 착용하기도 하며 아프가니스탄, 이집트의 여성들이 주로 착용한다. 니캅은 눈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의상으로 파키스탄과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의 여성들이 주로 착용한다. 차도르는 얼굴만 내놓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리는 의상으로 이란의 여성들이 주로 착용한다. 히잡은 얼굴만 내어놓는 두건 모양으로, 머리와 귀, 목, 어깨를 가리는 의상이다.

 

수단에서는 주로 히잡을 착용한다. 이 히잡은 코란에도 언급된 의상으로 코란 제24장 ‘빛의 장’ 제31절 중 “가슴을 가리는 머릿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들과 남편의 아들과 그녀의 형제와 그녀 형제의 아들과 그녀 자매의 아들과 여성 무슬림과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하녀와 성욕을 갖지 못한 하인과 그리고 성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외에는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는 부분에 근거한다.

 


여가생활 수단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코란에 있는 안식일에 맞춰 주말을 지정한다. 코란에서 지정하는 안식일은 금요일이며, 이에 따라 여러 이슬람 국가들은 금요일을 휴일로 지키고 있다. 수단은 본래 목요일~금요일 주말제를 시행했으나, 타 문화권 간의 무역 및 금융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근무일의 차이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재계와 금융권을 중심으로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주말 변경 요구가 계속되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금요일~토요일, 또는 토요일~일요일 주말제로 변경하였고, 2008년부터는 금요일~토요일 주말제로 변경하였다. 금요일은 많은 상점과 식당들이 영업을 하지 않으며, 특히 오후 12시~3시 사이에는 대형 몰까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수단은 기본적으로 날씨가 더워 장시간 야외 활동이 쉽지 않고, 여가를 보낼 만한 즐길 거리들이 많지가 않다. 수단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이 나면 가족 및 친구를 방문하는 것으로 여가를 활용한다. 또 결혼식과 장례식의 참석 역시 일종의 여가 활용이다. 왜냐하면 수단 사람들의 결혼식은 음식을 차려 놓고 밤늦게까지 음악을 틀고 춤추고 즐기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많이 꼽히는 현지인들의 여가 활용법은 축구이다. 여가 시설 면에서는 많이 낙후되어 있는 수단이지만, 인공잔디가 깔린 풋살장이 꽤 많다. 젊은 사람들은 유럽 축구 클럽의 유니폼을 외출복으로 즐겨 입으며, 유럽 축구 빅 매치가 있을 때면 큰 TV가 있는 호텔이나 식당에 모여 축구를 시청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30. 17:07

 

서양철학사상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인식론 순서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2.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3. 진리인식에 대한 경험주의 접근방식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은 자연법사상을 비롯하여 자연의 합리적인 질서를 찾아 나섰고, 그러면서 그리스 사상을 받아들이고 보존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자 로마 제국은 정복민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되자, 결국 로마인의 삶은 개인의 영적구원靈的救援에 대한 관심으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새롭게 일어난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침투해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됐고, 중세 교황敎皇의 신권정치神權政治가 시작되었다. 중세 초기 교부철학은 그리스-로마 문화를 수용하여 그리스도 교리를 공고화하기에 이르렀지만, 중세 말기에 접어들면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절정을 이룬 스콜라철학은 사물을 파악하는 데에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진리를 체계화하는 신학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즉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던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는 확고했던 중세의 신 중심체제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유럽 문명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일명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고 일컬어지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그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화, 예술, 건축 등의 전반에 걸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재인식과 수용이 유럽을 주름잡게 됐다. 이로써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한 그리스도교의 사고와 정치적인 체계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일어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결정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유럽은 르네상스로 인해 중세시대의 막을 내리게 됐고,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본성상 알기를 욕망”하는 인간 이성의 자유로운 탐구활동은 여러 분야에서 그 진가를 보이게 된다. 즉 자연과학, 수학, 생물학, 화학, 천문학, 예술 및 건축 등 여타의 학문이 우후죽순처럼 부흥하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성적 사고에 절대적인 신뢰를 둔 그리스 합리주의 사상이 다시 부활한 셈이다. 철학의 사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합리주의 철학으로 근대의 문을 최초로 열어젖힌 철학자는 바로 프랑스 출신 데카르트Renē Descartes(1596~1650)이다. 그의 사상을 계승 극복하여 동일 철학을 전개한 인물로는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1632~1677)와 형이상학적 단자론을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쯔Leibniz(1646~1716)가 있다.

 

 


1) 합리주의 선구자 데카르트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프랑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1596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출생한 지 14달이 채 되기도 전에 폐병으로 세상을 떴다. 갓난아기인 그도 병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마음씨 좋은 간호사의 극진한 돌봄으로 생명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몸이 무척이나 허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일찍 눈을 뜰 수 없었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즐겨했으며, 형제들과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한 채 혼자 조용한 곳에서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다.

 

1606년에 그는 지방에 있는 꼴레즈(Collège la Flèche) 입학하여 8 동안 중세식 인본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게 되었는데, 5년간은 라틴어, 수사학, 고전작가 수업을, 3년간은 변증론을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 철학 수업을 받았다. 학교생활에서 그는 부지런했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했으며,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파리로 가서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과학, 법률학, 스콜라철학을 배우고 1616년에 졸업한다. 졸업하자 그는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로 들어가 30년 전쟁(가톨릭교회 국가와 개신교 국가 간에 벌어진 최초의 국제 전쟁)에 출정했다. 전쟁 때에도 틈만 있으면 그는 병영의 침대에 누워 조용한 사색에 잠겼는데, 천장에 붙어 있는 지도에서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 애쓰다가 처음으로 수학에서 사용되는 ‘좌표’라는 개념을 발견하기도 했다. 제대 후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1620년).

 

1627년에 그는 다시 종군한 후, 사색의 지유를 찾아 1628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있던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는 약 20년간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정신지도의 법칙”을 집필하여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1637년부터 그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를 사색하면서 프랑스어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을 출판했고, 1641년에 라틴어로 『성찰(Meditationes)』을, 1644년에는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를 출판했다. 그리고 1649년에 보헤미아 왕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을 모아 그의 마지막 저술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을 출간했다. 같은 해에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Drottning Kristina(1626~1689)는 데카르트를 스톡홀름에 있는 황궁으로 초청하여 철학을 강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여왕은 일주일에 세 번 새벽 5시에 강의하도록 데카르트에게 명했기 때문에, 그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스웨덴의 찬 공기를 쏘이면서 여왕의 서재로 찾아가 철학을 강의했다. 그 때문에 늦잠을 즐기지 못한 그는 감기에 걸렸고, 1650년 2월 폐렴의 악화로 세상을 등진다.

 

데카르트가 아침 늦도록 침대에 누워서 끊임없는 사색을 통해 이루어낸 가장 뛰어난 업적은 무엇일까? 그는 철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에서 탁월함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학의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순수 이성적 사유를 근간으로 해서 근대철학의 새로운 틀을 확립한 비조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철학이란 바로 전통적인 존재론과 대비되는 인식론 분야이다. 그의 인식론은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우세했던 것과는 달리 유럽 대륙에서 우세한 합리주의적 방식이라 불린다. 극단적인 경험주의는 모든 앎이 외적인 감각과 내적인 감각을 통해 얻어낸 관념이라 보기 때문에, 지식이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관점이다. 반면에 합리주의는, 수학과 기하학에서 자명한 원리가 보여주듯이, 인식론 상의 근본원리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원칙들로부터 나머지 모든 지식들을 연역적으로 추론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쯔의 철학에 계승되고 있다. 철학사에서 이들을 묶어 대륙의 합리주의 철학자라 부른다.

 

수학의 분야에서 데카르트의 빛나는 업적은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것이고, 수학적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x{displaystyle x}’를 사용하였고, 좌표계(직교 좌표계)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숫자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수학을 ‘불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기하학을 ‘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보았으나, 해석기하학을 창시함으로써 이 둘 간의 장벽이 간단하게 해결됐다. 또한 그가 창안한 직교좌표계는 이전까지 독립적으로 다루어졌던 대수론과 기하학을 융합하여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했고, 뉴턴 역학을 비롯한 근대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물리학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현대물리학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연장(extension)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감각적 특성들을 하나하나 지우게 되면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색, 무취, 무미의 어떤 것이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그가 말하는 기하학적 공간은 물질적인 원소로 ‘꽉 차 있는 공간(plenum)’이다. 그에 의하면 실제적인 사물의 크고 작은 운동변화란 기하학적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원소들이 충돌하고 이동하고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은 데카르트가 제시한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특히 자연계가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그의 기계론적 운동관은 중세의 신 중심적 자연관을 밀어내는 데에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생물학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생리학의 기초가 되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한데 있다. 그는 다양한 동물의 머리를 해부해 봄으로써 해부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상상력과 기억이 위치하는 곳을 찾아 연구를 계속했다. 또한 그는 가설적 방법을 통해 육체 전체를 일종의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로 간주하고, 우리가 의지에 따라 자동적으로 걷는 현상과 눈의 깜빡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을 기계적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설명방식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근대 생리학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2) 근대 합리주의 전통은 어떻게 출범하게 될까?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인 권위를 둔 데카르트는 청년기부터 끊임없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겠노라고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학문이란 다름이 아닌 새로운 철학을 일컫는다. 그것은 인식론(epistemology)으로 수학과 기하학적 방법을 모범으로 하는 단순하면서도 엄밀한 철학을 의미한다. 데카르트가 이러한 사고를 하게 된 까닭을 우리는 어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진리 탐구에 관한 한 오늘의 진리가 내일에는 거짓이 되고, 이렇게 말했다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그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신뢰할 수 없는 거짓을 말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참인 확실한 앎”의 탐구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앎이야말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참된 진리에 대한 인식을 제공함에 틀림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확실성의 인식만이 진리의 반열에 들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진리인식을 ‘형상形相(eidos)’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게 되는데, 형상이야말로 참된 인식을 제공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형상은 지속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어야 하고, 영원히 불변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식은 가장 확실하고 참된 진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대상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불변적인 형상을 찾아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들은 항상 가고 오는 것이어서 그 형상들이 수시로 변형이 되므로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형상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에 주어지는 경험 세계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저렇게 말할 수도 있어서 확실한 진리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상대주의 지식론을 전개한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는 명구에서 명백히 제시한 바 있다. 즉 개별적인 감각에 주어지는 경험 세계란 항시 유동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얻어내는 인식은 때로는 참이지만 때로는 거짓으로 판명되어 결과적으로 인간을 쉽게 기만하게 된다. 또한 개별적인 감각 세계는 엄밀하게 말해서 감각하는 주체가 각자의 주관적인 구미에 맞는 앎을 갖게 되므로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고정적인 형상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디에서 찾으면 될까 하고 고민한 끝에 언어로 표현되는 보편적인 개념槪念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이 인간’, ‘저 인간’, ‘그 인간’과 같은 경험적인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쓰이는 보편 개념인 ‘인간’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플라톤에 의하면 보편 개념인 ‘인간’은 현실적인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 즉 이데아에 대한 개념이다.

 

이데아에 대한 탐구 작업은 보편적인 개념에 대한 명확한 경계를 확정하는 정의(definition)이다. 정의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요컨대 누군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인간’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 자체’는 이데아에 실재하고, 인간에 대한 보편적 형상은 ‘이성적 동물’(이성적은 종차, 동물은 최근 유개념)로 정의된다. 이러한 정의는 경험적인 감각 대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통해서 따지고 분석하여 공통적인 본성을 찾아낸 후, 이성의 직관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이러한 인식 과정을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상기想起(anamnesis)라 했다.

 


플라톤이 제안한 형이상적 탐구는 최고의 보편 개념으로부터 최하위 개념에 이르기까지 종차를 가지고 쪼개내어(diairesis) 정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방식은 수학이나 기하학학적 탐구 방식에서 기원한다고 볼 수 있다. 수학이나 기하학에서는 “선제”(hypotheseis)로서 자명한 원리에 대한 ‘공리(axiom)’를 설정하고, 이를 가지고 ‘정리(definition)’를 내세운다. 공리 및 정리와 같은 근본 원리가 설정이 되면, 이로부터 수학이나 기하학의 복잡한 지식들을 연역 추리해 낼 수 있게 된다.

 

수학이나 기하학에서 근본 원리가 되는 ‘공리’와 ‘정리’들에 대한 인식은 물론 감각적인 세계에서 찾아낼 수 없는 “선천적”(apriori)인 것들이다. 반면에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얻어낸 인식은 “후천적”(posteriori)인 것들이라고 한다. 선천적인 인식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순수 이성을 통해 자명한 것으로 직접(직관적으로) 얻어낸 지식이다. 그 예들로 “전체는 그 어느 부분보다 더 크다”고 하는 기하학적 원리라든가, “A는 A이면서 동시에 B일 수 없다”(즉 이 자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개일 수 없다)는 논리적인 원리와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논증적”(demonstrative)인 지식인데, 이는 오직 논리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서 결정지을 수 있는 지식, 즉 유클리드Euclid(BCE 330~275) 기하학의 정리와 같은 지식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선천적인 지식들로서 가장 확실하고 필연적인 진리들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형상에 대한 “상기설”(anamnesis)을 인식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형이상학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탐구 방식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으로 전수되어 부활한다. 플라톤이 제시한 탐구 방식을 이어받아 그 단초를 마련한 합리주의가 수학을 여타의 학문의 범형範型으로 삼으려 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수학과 기하학적 탐구 방법론을 신봉하는 합리주의가 내세우는 선천적인 진리관은 그 정당성이 확립될 필요가 있다. 이에 데카르트는 자명한 진리를 인식해 낼 방법론을 찾아야 하는 기로에 서 있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전통을 계승한 근대의 합리론자 데카르트는 수학이나 기하학을 모범으로 하여 엄밀하면서도 아주 단순하게 철학을 하기 시작한다. 수학이이나 기하학적 탐구방식으로 철학을 한다면, 이는 매우 단순하고 쉬운 논리의 꼬리를 더듬어 착실하게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쉬운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쉬운 철학은 전적으로 선명하고 분명한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명한 원리가 되는 선천적 진리를 탐구해 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탐구된 것을 가장 확실하고 필연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지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먼저 이렇게 새롭게 학문하는 방법으로 누구나 탐구에 착수하기 전에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고 한다. 그 규칙은 명증성의 규칙, 분석의 규칙, 종합의 규칙, 매거의 규칙으로 4가지인데, 이를 데카르트는 자신의 주요 저서 『방법 서설』에서 설정하고 있다.

 

내가 분명한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경우라도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속단과 편견을 피하고, 그리고 조금의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명”(clara)하고 “분명”(distincta)하게 나의 정신에 나타나는 것 이외는 결코 나의 판단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 명증성의 규칙

 

내가 검토하려고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필요한 만큼의 많은 부분들로 분할하여 검토할 - 분석의 규칙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단계를 밟아 복잡한 것을 인식하도록 것이며, 자연적으로 나의 사고를 질서 있게 인도해 - 종합의 규칙

 

분석하고 종합하는 과정에서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는가를 충분하게 재검토하여 완벽하게 열거할 - 매거枚擧의 규칙

 

확실한 진리인식을 위해 이상의 규칙들을 정신이 잘 준수하면서 차근차근 진행해 간다면, 그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자명한 진리의 인식을 얻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3)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진리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기억의 창고에 쌓아 두고 이를 활용하면서 생을 이어 가고 있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태아 시절의 태교로부터 시작하여, 유아원과 유치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대학의 전문적인 교육과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교육을 통해 너무도 많은 지식을 짊어진 채 지식의 인도 하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렇게 많은 지식들 중에 어느 것이 거짓일까? 그리고 진정한 진리인식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탐구의 규칙들을 설정한 까닭은 많은 지식들 중에서 진정한 진리 인식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진리 인식을 가려내기 위해 그는 우선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을 진리 인식을 위한 ‘방법적 회의’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과연 이것들이 과연 참된 진리 인식인지 아니면 그릇된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 중 하나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으면 가차 없이 버리고, 오직 추호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장 확실하고 자명한 명증적인 인식이 있다면 이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이고, 가장 명확한 진리를 바탕으로 여타의 모든 진리를 연역 추리하겠다는 심산이 깔려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의 주요 저서 『성찰』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 왔던 지식들을 우선적으로 철저한 검토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데카르트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지식들이란 셀 수 없이 많아서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함은 평생을 해도 끝이 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들을 쉽고 간단하게 검토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것은 수십 층으로 지어진 고층빌딩을 단숨에 허무는 방식과 같다. 그는 그 방법을, 고층빌딩이 전적으로 기초에 의존하여 존립하기 때문에, 기초가 무너지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이다. 진리 인식을 위한 방법적 회의는 바로, 많은 지식들이 결정적으로 의존해 있는 기초적인 지식을 확실하게 검토하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단번에 검토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 확실한 진리라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많은 지식 또한 진리이고, 진리가 아니라면 거기에 의존해 있는 수많은 지식 또한 진리가 아니다. 이 방법적 회의를 위해 데카르트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에 의존하는 것들을 각기 정리해 본 결과 세 가지로 분류한다. 즉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감각을 통해 들어온 지식, 감각적 지식으로부터 일반화된 지식, 그리고 누구나 진리로 믿고 있는 보편적 지식이 그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만 의심하여 철저하게 검토해 보면 되는 것이다.

 

첫째, 감각적인 지식에 대한 회의 :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하는 대부분의 지식은 시각이나 청각, 촉각 등 오감五感 내지는 내부 감각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얻은 것들이거나, 혹은 감각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여러 방식으로 결합하여 나온 것들이다. 이런 지식을 우리는 진리라고 믿고 있고, 또한 이를 편리한 방식으로 일상에서 유익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감각을 통해 형성된 지식에 대하여 조금만 반성해 본다면, 감각적 지식은 대체로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 즉 감각 지각의 기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서 나온 지식은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런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예로 평상시에는 달콤하던 꿀맛도 감기에 걸렸을 적에는 미감을 잃게 되어 쓰게 감각되기도 하며, 물속에 비스듬하게 꽂혀 있는 곧은 막대기는 굴절 현상 때문에 항상 휘게 보임을 안다. 또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그대로 정확하게 감각되지 않고 달리 보인다. 더욱이 세밀한 관찰을 통하여 우리가 사물들을 아무리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지각뿐만 아니라 이들의 복합들로 이뤄진 지식들은 모두 확실하지 않다.

 

둘째로 일반화된 감각적 지식에 대한 회의 :

우리가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이 손’ ‘이 머리’ 등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들로부터 일반화된 지식, 즉 ‘이 손’이 아닌 ‘손’ ‘이 머리’가 아닌 ‘머리’ 등의 일반적인 지식은 어떠한가? 어떤 화가가 “사튀로스Satyros”(반은 인간의 머리이고 반은 양으로 이루어진 숲의 신)를 그릴 때, 우선 그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일반적인 ‘머리’와 ‘입’이 어떻게 생겼고, 개별적인 양들을 감각함으로써 양의 일반적인 ‘발’ ‘꼬리’ 등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그가 이런 것들을 모른다면 그는 신화에 나오는 가상적인 사튀로스를 그려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감각하는 부분들을 가지고 상상을 통해 쪼개고 결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개별적인 감각 물들의 결합으로부터 이뤄진 상상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상상하여 그려낼 수 있는 ‘외눈박이 귀신’, ‘도깨비’, ‘인어 공주’, ‘스핑크스’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유형의 것들이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확실한 진리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이는 얼마나 허황된 것이겠는가?

 

셋째로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회의 :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장 확실하고 객관적인 진리라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은 어떤가? 보편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들은 물체의 연장, 형태, 수, 공간, 시간 등을 말하거나, “1 + 2 = 3”과 같은 수학적인 지식, 또는 누구나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자기 자신의 실재”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확실한 진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세상 어딘가에 전능하고 사악한 그런 악령惡靈이 있고, 그가 사람들의 정신을 꿈의 환상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치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홰나무 밑에서 잠들어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자신은 나비가 되어 우주를 훨훨 날아다녔는데, 꿈을 깬 후 내가 지금의 나인지 꿈속의 나비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 꿈속에서 사는 환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도 원래 꿈의 환상인데 사악한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믿게 한다던가, ‘1 + 2’는 원래 ‘3’이 아니고 ‘5’ 인데 사악한 악령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1 + 2’를 계산할 때 항상 ‘3’ 이라고 믿도록 배후에서 정신을 조작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근거에서 본다면 우리가 실제로 누구나 다 인정하는, 그래서 확실한 진리라고 믿고 있는 보편적인 지식조차도 의심할 수 없는 명증적인 진리로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진리 탐구에 대한 방법적 회의는 극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명증적인 진리 인식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진술은 과연 없는 것인가? 다행히도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 위에서 바로 언급한 사악한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고, 그가 나를 항상 속이기 때문에 내가 기만을 당하고 있고, 항상 그릇된 것에로 이끌리고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나를 속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의 존재조차도 꿈의 환상으로 속이고 있다 할지라도, 그 속임이 참인 것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속임을 당하는 나의 존재가 참인 것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나의 생각이 전부 속임을 당하기 때문에 그릇된 것일지라도 속임을 당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한, 나는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는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확고하게 주장한다. 이 진술만은 필연적인 진리 인식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최초로 진리 인식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내가 사유하는 한에서 존재한다는 진술은 자명한 명증적 진리이고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 진리가 되는 셈이다. 즉 사악한 악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정신을 조작하여 속일지라도 속임을 당하는 사유 주체만큼은 진정으로 실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 실체”이다.

 

4) 사유실체를 보증하는 무한실체로서의 신神

 

夫三神一體之道(부삼신일체지도)는 在大圓一之義(재대원일지의)하니,

造化之神(조화지신)은 降爲我性(강위아성)하고

敎化之神(교화지신)은 降爲我命(강위아명)하고

治化之神(치화지신)은 降爲我精(강위아정)하나니,

故(고)로 惟人(유인)이

爲最貴最尊於萬物者也(위최귀최존어만물자야)라.

 

(무릇 삼신일체의 도는 ‘무한히 크고 원융무애하며 하나 되는 정신’에 있으니, 조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성품이 되고, 교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목숨이 되며, 치화신이 내 몸에 내려 나의 정기가 된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된다.)

 

夫性者(부성자)는 神之根也(신지근야)라.

神本於性(신본어성)이나 而性未是神也(이성미시신야)오

氣之炯炯不昧者(기지형형불매자)가 乃眞性也(내진성야)라.

 

(무릇 성이란 신의 뿌리다. 신은 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성이 곧 신인 것은 아니다. 기가 환히 빛나 어둡지 않은 것이 곧 참된 성이다.)

 

是以(시이)로 神不離氣(신불리기)하고 氣不離神(기불리신)하나니

吾身之神(오신지신)이 與氣(여기)로 合而後(합이후)에

吾身之性與命(오신지성여명)을 可見矣(가견의)오.

 

(그러므로 신은 기를 떠날 수 없고, 기 또한 신을 떠날 수 없으니, 내 몸 속의 신이 기와 결합한 후에야 내 몸 속의 본래 성품과 나의 목숨을 볼 수 있게 된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 서檀君世紀 序」) -

 

나의 주체가 사유하는 한에서 꿈의 환상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실체 관념은 확실한 진리 인식이다. 이제 사유 실체인 자신이 사유하여 획득하는 다른 관념이 참된 인식인가 아니면 거짓된 것인가를 검토해 가면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어떤 사악한 악령이 있어서 나를 속여 나의 생각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이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나의 사유가 모두 꿈의 환상이라면, 사유를 통해 더 이상의 탐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그러한 사악한 악령 따위란 없다는 것, 설혹 있다 하더라도 나의 사유에 대한 영향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 탐구를 수행할 때 사유를 기만하는 어떤 연원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존재가 사유를 통해 인식을 획득하는 우리의 능력에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영향력을 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사유를 통해 우리가 수행하는 탐구가 진리임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은 사악한 악령의 영향력을 차단시키고, 사악한 악령에 의해 우리가 기만을 절대로 당하지 않도록 하는, 어떤 전능全能하고 전지全知하며 전선全善한 존재가 있음을 추호의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증명하는 것이다.

 

탐구하는 나의 올바른 사유가 거짓이 아니라 참된 것임을 입증해 주는 절대적으로 선善한 존재(신)에 대한 증명은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지는 사실을 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처럼 오직 순수한 이성만을 사용하여 명증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증명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6단계에 걸쳐 연쇄적으로 진행해 간다. :

 

(1)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관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하다. 이들 관념을 분류하여 묶어 보면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감각적 경험을 통해 외부로부터 들어와 형성된 “외래 관념”, 내 자신이 이런 관념들을 근거로 해서 마음대로 상상하여 만든 “인위적 관념”, 그리고 외부의 감각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나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구비하고 있었던 “본유 관념本有 觀念”(innata idea)이 그것이다.

 

“외래 관념”은 우리가 통상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부터 형성된 경험적인 관념들의 총체를 지칭한다. “인위적 관념”은 감각으로부터 형성된 관념들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조작한 관념들이다. 인어(머리와 팔다리는 사람이고 몸과 다리는 물고기로 이루어진 형상)나 스핑크스(머리는 사람, 팔은 날개, 몸과 다리는 동물로 이루어진 형상)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본유 관념”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 논리학의 ‘동일률’이나 “전체는 항상 그 부분보다 크다”는 기하학적 관념, 또는 ‘크다’, ‘같다’와 같은 비교 관념들이다.

 

세 종류의 관념들 중 본유 관념에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이 있다. 데카르트는 분명히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에서 ‘완전한 인격자’는 전적으로 선한 존재로서의 신을 말한다. 이제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을 논증의 대상으로 삼아보자.

 

(2) 결과로서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없는 것, 즉 무無에서 나올 수 없다. 또한 결과로서 갖고 있는 모든 관념에는 어떤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결과로서 확실히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도 반드시 어떤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은 결과보다도 더 크고,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원리이다. 이 원리로서의 원인을 데카르트는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명증적인 관념이라 부른다.

 

(3) 그런데 결과로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일까? 이 원인은 부모로부터 나온 것일까? 아니면 자연 또는 유한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그러나 모두 아니다.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오직 ‘완전한 존재’, 즉 절대적인 신神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결과로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질적인 의미에서 적어도 결과와 같은 것이어야 하거나 결과보다 더 커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래서 결과가 그 원인보다 크다면, 우리가 어떻게 결과로서의 그런 관념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분명하고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리이며, (2)의 단계에서 언급한 원리와 같이 선명하고 분명하며 자명한 원리이다.

 

(4)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으로서의 ‘완전한 존재’는 어떠한 한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추리는 (3)의 단계에서 주장된 자명한 원리에 의해 가능하다. 만일 ‘완전한 인격자’라는 관념이 완전한 인격자 자신 이외에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이는 (3)의 단계에서 설명된 “원인이 더 크다”는 원리에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성이라는 관념의 원인은 그 관념 자체와 마찬가지로 완전해야 하며, 완전하게 실재해야 한다. 이러한 존재는 우리의 정신을 넘어서 실재하는 자이고, 또한 우리의 정신에 그런 완전성의 관념을 넣어 줄(산출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격자’는 관념에서뿐만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한다.

 

(5)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자’는 사유실체를 있게 하는 유일한 가능적 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생명의 힘은 바로 창조의 힘과 맞먹는 것이고, 다른 유한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증명해 보였듯이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물론 나는 감각적인 것들을 수용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사유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나의 정신은, ‘완전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물질들과는 달리 어떤 유한성을 지닌 자에 의해 창조됐을 리가 없다. 즉 ‘완전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나의 정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지하고 전능한 능력을 가졌으며 또한 완전한 정신을 가진 자(신神)가 실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자는 완전한 존재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부모는 나의 신체가 생겨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원인을 제공했을런지는 모르지만, 나의 지속적인 생명력으로서의 나의 정신을 있게 한 원인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 속에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완전한 존재에 의해서만 존립 가능한 것이다.

 

(6) 완전한 존재가 나를 창조할 적에 여러 가지 능력들을 함께 주었는데, 이들 중 하나는 내가 감각적 지각을 믿게 하는 강한 경향성이다. 완전한 인격자는 전지하고 전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항상 기만을 당함으로써 빚어지는 신뢰할 수 없는 그런 능력을 부여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또한 나를 항상 기만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이끌려는 사악한 악령이 있다 해도 전적으로 선한 완전한 인격자는 내가 악령의 속임수에 끌려가도록 창조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로 내가 만일 실수를 범한다면, 나의 잘못이지 결코 ‘완전한 인격자’ 즉 절대적인 신의 잘못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완전한 인격자가 부여한 순수한 이성을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결코 실수를 범할 리 없을 것이며,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인식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5) 연역 추리의 빛과 그림자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주의적 방식의 진리 탐구는, 인식을 획득하는 데에 있어서 상식이나 감각적 경험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수학이나 기하학의 진리 탐구와 같은 방식으로 연역적 추리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정신(사유) 실체를 찾아냈다. 사유 실체는 의심할 여지가 추호도 없는 명증적인 것이었다. 이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진리들을 연쇄적으로 연역하여 증명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첫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증적인 사유 실체를 기반으로 하여 참이라고 여겨지는 다른 것, 즉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런 관념의 원인이 틀림없이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이 타당성을 갖는 근거는 바로 모든 결과란 반드시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로부터 각 단계의 논의는 사슬의 고리와 같이 타당한 추리의 규칙에 의거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이끌어 낸 의심할 수 없는 명증적 진리는 보다 진전된 어떤 명제를 끌어내기 위한 논리적인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추리가 만일 규칙을 전혀 어기지 않고 타당하게 진전되고, 추리의 진행 과정에 거짓된 진술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확실성의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진리 탐구에 관한 한 확실성의 인식을 위해서는 감각적 관찰로부터 들어오는 경험적인 지각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관점이 그렇듯이 합리주의적 인식론은 명확한 증명을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불확실한 것들을 마땅히 배제하고 있고, 경험적인 지각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라 볼 수 있다.

 

셋째, 다른 합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설을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의 학통을 이어받은 근대 합리주의의 인식 방법에 의거해 보면,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이라든가 ‘자아 실체’ 관념, 수학과 기하학적 진리에 대한 관념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 창조주에 의해 사람의 정신 속에 ‘선천적’으로 이미 심어진 상태이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관련된 개념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들인데, 이러한 관념들은 감각적인 경험의 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본유 관념들은 어떻게 하면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하다. 이러한 관념들은 원래부터 정신 속에 갖고 태어난 것들이기 때문에, 흩어짐이 없는 일심의 경계(사유 실체 자체)에서 정신 안에 있는 관념들을 온전히 “상기想起(anamnesis)”하기만 하면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가 제시한 합리주의 진리 인식에 문제가 전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사유 실체가 명증적인 ‘제1원리’로 확립되고, 이로부터 ‘생각하는 자아’가 이성의 규칙을 잘 순수順守하여 사유의 연역적 추리의 사슬을 밟아 탐구해 나아가면 필연적인 진리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사악한 악령이 속일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유를 통한 연역이 사악한 정신에 의해 기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전지하고 전능한 선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논증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증에 결정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

 

첫째, 데카르트의 논의가 순환론循環論에 빠졌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 있다. 순환 논법이란 A임을 증명하기 위해 B를 가지고 논의하고, B를 증명하기 위해 A를 가지고 논의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성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다’와 같이 말하는 것을 순환 논법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순환 논증 과정은 이렇다 : 그는 ‘사유하는 자아 실체’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필연적이고 명증적인 진리라고 확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명증적 진리임을 보증하기 위해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는 사유하는 자아 실체의 정신에 선험적으로 있는 본유 관념, 즉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이 명증적으로 실재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는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전에 ‘완전한 인격자’가 ‘생각하는 자아의 추리’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주장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그는 증명하려는 진술을 확실성 인식의 기초로 사용했기 때문에, “순환 논법”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둘째,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연역 추리의 과정에서 그는 관념의 “원인이 최소한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원인’이 어떤 근거에서 ‘결과’보다 커야만 하는지, 또한 이 원리가 어떤 근거에서 확실한 원리일 수 있는지가 불명확하다. 원인이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것 또한 사악한 정신의 조작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고, 나아가 이 원리를 사용하여 증명하는 여타의 진술들이 진리임을 어떻게 보증받을 수 있을지 또한 상당히 의심스럽게 된다. 따라서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그 결과만큼 커야 한다.’는 사용된 원리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밝힌 후에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 원리의 진술이 선명하고 분명한 논증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를 통하여 ‘완전한 인격자’의 존재가 증명되는 각 단계의 인과적 역할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셋째, 정신의 외부로부터 들어온 감각적인 관념들과 정신의 내부에서 생겨난 인위적인 관념들 외에 정신 안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유 관념”이 있다는 전제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들 본유 관념은 ‘자아’라는 실체 관념이나 ‘완전한 인격자’의 관념, ‘크다와 작다’와 같은 비교 관념, ‘인과 법칙因果法則’이나 ‘추론 법칙’ 등인데, 이런 본유 관념설이 전적으로 타당하다면, 한 살 박이 어린 애도 이런 본유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 한 살 박이 어린 애는 말도 못하는데, 우리는 어린애가 본유 관념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설사 어린애가 이해하고 있으니까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데카르트는 어린애가 본유 관념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고는 주장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지적인 성숙이 있을 때까지 아마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유 관념이 이런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더욱 더 불투명해진다. 왜냐하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유 관념이 평생 동안 현실적으로 알지 못하고 마냥 ‘잠재적’으로만 가지는 것만으로 생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완전한 인격자’에 대한 본유 관념이 정신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는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을 것이다.

 

6)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의 선구자

데카르트의 기본 사상은 실체實體(substantia)의 철학이다. 그가 말하는 실체는 존재성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며,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완전한 신神만이 독립적으로 자존하며, 자기원인自己原因(causa sui)으로서의 실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유한한 존재, 즉 정신(사유)과 사물(연장)도 실체라고 주장한다. 정신과 사물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고, 비록 신에 의존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체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실체는 무한 실체(substantia infinita)로서의 신과 유한 실체(substantia finita)로서의 정신 실체와 사물 실체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철학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이원론二元論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즉 자연”이라는 사상과 라이프니쯔의 “단자 형이상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 실체란 무엇인가? 정신은 유한한 존재로서 사유하는 실체를 말한다. 정신의 본성은 완전히 비물질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다. 정신 실체의 본성은 사유이고, 그 속성(attributum)은 의식 작용(cogitans)이다. 만일 정신의 본성인 사유가 전혀 없다면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정신에서 의식 작용이 일어날 때, 감정, 욕구, 의지 등이 쏟아져 나온다. 즉 “나는 생각한다(cogito)”와 함께 주어지는 사유 작용은 결국 사유된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의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정신 실체의 부차적인 성질들, 즉 사유의 양태(modus)가 되는 셈이다.

 

사물 실체란 무엇인가? 사물도 유한한 존재로서 연장되어 있는 실체이다. 사물의 본성은 완전히 물질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사물 실체의 본질은 연장(extensa, 퍼져 있음)이고, 그 속성은 크기, 모양, 넓이이다. 만일 사물의 본성인 연장이 없다면, 사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연장 실체는 사유 실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신이 사유 활동으로 드러나듯이, 사물은 연장으로 드러난다. 사물은 항상 모양에 의해 한계가 지어지고 장소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사물들 간에 서로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채워진 공간(plenum)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본질적인 속성으로 길이, 넓이, 부피라는 성질을 필연적으로 가진다. 그리고 사물의 위치, 상태, 운동 등은 사물 실체의 양태들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들과 양태들을 통하여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물체의 운동은 데카르트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유 실체와 사물 실체가 완전히 다르듯이, 영혼과 물체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명의 원리인 영혼은 데카르트의 사유에서 볼 때 물체의 운동 원리가 될 수 없게 된다. 여기로부터 데카르트는 물체의 운동이 기계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치게 되는데, 기계적인 운동은 마치 누군가가 벽시계에 태엽을 감아 놓으면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면 우주 자연의 물질적인 세계가 기계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운동의 최초 원인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데카르트는 무한 실체로서의 신神을 말한다. 태초에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 우주 자연의 물질 세계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도록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가 내놓은 자동적인 기계론은 고대 원자론자들이 제시한 원자들의 필연적인 운동 방식과 다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텅 빈(vacum) 공간이란 없고, 오직 물질로 채워진 공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채워진 공간에서 물체들은 서로 접촉해서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이것들의 운동은 서로의 위치 이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로 채워진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가 헤엄쳐서 이동하는 방식과 같다.

 

데카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 자연에는 텅 빈 공간이 없이 물질적인 것과 에테르(aether)로 꽉 차 있다. 여기에서 물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위치 이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수학적인 점과 그 경계선이 옮겨갈 뿐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운동은 사물의 활동이 아니라, 오직 수학적인 함수가 우주 전체에 그려져 있고, 언제나 위치 이동에 의한 새로운 함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계선으로서의 좌표계의 이동이 바로 운동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운동은 기하학적인 기계론이지 원자론자들이 주장하는 질량質量의 기계론이 아니다. 기하학적인 기계론에서 운동은 공간을 점유한 물체의 좌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짐으로써 자동적으로 서로서로의 영향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물들과 식물들 모두의 운동은 좌표 상에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들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정신과 사물이라는 완전히 다른 성질들로 결합되어 있는 존재에서 발생한다. 특히 인간의 경우에서 비물질적인 정신(心)과 물질적인 신체(身)는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신체에 강한 자극을 주면 정신에서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정신이 목적하는 의지가 있게 되면 의지에 따라 신체가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다른 ‘마음과 신체’ 간의 상호 관계 작용의 문제를 데카르트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정신과 신체가 상호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연결하는 관계의 끈이 필수적이다. 관계의 끈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인 특성을 가져야 한다. 해부학에 능통했던 데카르트는 이것이 인간 두뇌頭腦 안에 있는데, “송과선(anarium)”이라고 불렀다. 정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송과선을 통해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전달될 수 있고, 정신의 의지에 따라 신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신경계神經系로 전달되어 송과선을 통해 정신이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한 “심신 상호작용설”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철학은 정신 실체와 사물 실체, 즉 영혼과 신체라는 이원론二元論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인간의 경우에서 영혼과 신체라는 대립된 두 실체 때문에, 합리적인 체계를 구축하려는 데카르트의 철학은 결정적인 취약점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후대에 스피노자Spinoza가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사유와 연장이 진정한 의미에서 실체가 아니라 무한 실체인 신의 본질적인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정신과 신체가 조화 통일된 동일철학同一哲學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심신이원론으로 말미암아 유물론과 기계론이 짝이 되어 사물 실체만을 인정하거나, 관념론과 심리주의가 짝이 되어 정신 실체만을 인정하는 철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9. 10:30




 

 

덴마크의 고대 역사

바이킹시대

 

 

현재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살펴보면, 덴마크 지역에 인간이 활동한 흔적은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적어도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가 겹치는 BCE 10000~BCE 1500년 사이에 덴마크의 주민들은 사냥이나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점차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정착생활로 전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CE 500년경에는 농경을 주로 하는 ‘앵글Angles’ 및 ‘주트Jutes’라는 부족이 처음으로 집단부락을 형성했다.

 

고트족의 한 역사가는 덴마크인들이 원래 스웨덴 지역에 살던 데인Dane족으로 덴마크로 넘어와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덴마크를 세운 민족은 북유럽 바이킹Viking(고대 노르드어로 Vikingr) 계통의 후손인 데인족이라 볼 수 있다. 북유럽의 바이킹족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덴마크를 더하여 세 나라 민족은 모두 바이킹 계통의 정통 후손이라 볼 수 있다.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작은 만’, ‘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vik”에서 ‘작은 만의 거주자’,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란 뜻에서 유래한 것 같다. 노르드어 “비킹르viking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에 남겨진 고대 금석문에서 많이 발견된다.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는 바이킹 족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세기경에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떠나 항해하여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해상무역 활동을 시작한다. 이 시기에 바이킹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서 약탈 및 교역을 주도적으로 하면서 활보한 바닷사람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덴마크를 세운 데인족의 바이킹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이다. 이민족(해안가의 노르만족, 동남부의 헝가리족, 마자르족, 슬라브족 등)의 침략에 위협을 받고 있었던 프랑크 왕국의 2대 왕 카롤루스 대제Carulus Magnus(일명 샤를마뉴Charlemagne 대왕, 742?~814)는 북진정책을 펴게 되었다. 그때부터 덴마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792년 카롤루스 대제가 북방의 노달빙기아Nordalbingia를 정복하자 프랑크 왕국의 국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접경하게 된다. 이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던 덴마크족과 핀란드 족은 카롤루스가 정복민을 이상한 종교로 세뇌시킨다는 소문에 분노와 공포감을 품게 됐다. 808년에 덴마크의 고드프리Godfred 왕은 카롤루스 대제의 침략으로부터 덴마크를 보호할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다. 장성이 다 쌓아질 무렵 덴마크의 해적이 프랑크 왕국의 영토인 프리슬란트와 플랑드르를 습격하고 돌아갔다. 고드프리 왕은 프랑크 족의 보복이 두려워서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다가 아헨에서 갑자기 살해당하고 만다. 이 시기에 침략을 계획한 카롤루스 대제는 출병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고드프리 왕의 조카이자 계승자인 헤르만 왕은 811년 하순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여 프랑크 왕국과 아이더 강을 국경으로 하는 힐리겐 조약을 체결한다.

 


10세기경에 기독교가 북유럽에 전파되었다. 이때에 덴마크의 옐링 지역을 중심으로 고름Gorm 왕조(936?~958)가 일어났다. 고름 왕조의 1세(고름의 아들)가 되는 하랄Harald 왕조(958~986)는 아버지가 시작한 국가 통일을 완수했고, 덴마크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리고 1016년에 덴마크 출신 크누트Knut(크누드Knud) 왕(995?~1035)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는 덴마크의 하랄드 블라톤 왕(940~986)의 손자이며 스베인 튜쿠스케 왕의 차남이다. 잉글랜드의 크누트 왕은 1018년에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세 나라의 왕을 겸하는 북해 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대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크누트 왕은 재위기간에 잉글랜드와 덴마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두 나라 간의 문화가 융화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고, 또한 덴마크 문자와 앵글로 색슨 문자가 혼용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덴마크 출신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국 왕이 되었고, 3국의 왕이 된 것은 크누트 대왕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8. 08:30



 

 

유럽 덴마크의

자연환경

 

 


덴마크의 공식 명칭은 덴마크 공화국Kingdom of Denmark이다. 덴마크는 단마르크 왕국(덴마크어: Kongeriget Danmark)에서 기원한다. 고대에 덴마크 땅에 데인Dane 족이 살았는데, 덴마크라는 국명은 고대 노르드어로 ‘데인인의 땅(Danernes mark)’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G.J.C. Augustus(일명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재위 BCE 27~CE 14)와의 전쟁 때 덴마크에 사는 민족은 왕의 아들 단Dane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 승리로 단을 왕으로 모시고 이름을 단마크Danmark로 명명했다는 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평평한 숲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접두사 단dan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국기國旗는 ‘덴마크의 힘’이란 뜻을 지닌 ‘다네브로그Dannebrog’이다. 다네브로그는 1219년 에스토니아와의 전투가 벌어질 때 덴마크 왕 발데마르Valdemar 2세가 전투 중에 하늘에서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를 봤다는 데서 그려졌다는 설이 있다. 빨간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국기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의 국기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덴마크 국기와 유사하게 하얀 십자에 파란 십자를 더하여 만든 노르웨이 국기도 등장한다. 아무튼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국가의 국기들 중 덴마크의 국기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는 북해와 발틱 해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본토가 스웨덴 남쪽, 독일의 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윌란Jylland 반도이고, 동쪽으로 퓐Fyn 섬 및 스웨덴 남단 쪽의 셸란Sjaelland 섬을 비롯하여 443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덴마크의 총 면적은 43,094㎢이고, 한반도의 5분의 1 크기로 그리 넓지 않은 편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서일까? 해안선의 길이가 무려 7,314㎞나 될 정도다. 그 외에 덴마크의 자치령으로 북쪽 지방에 그린란드Greenland와 패로Faroe 제도가 있다.

 

덴마크의 평균 고도가 해발 30m로 저지대이다. 빙하에 의한 침식으로 인해 모래와 자갈이 많은 서부 윌란드와 비옥한 평야가 있는 동부 윌란드 지역으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지대가 낮고 모래나 습지, 평야가 많으며 산이 별로 없는 편이다. 최고 높은 산이라고 불리는 곳은 몰레회이Molleǿj인데, 기껏해야 173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지대가 낮은 까닭에, 우리나라 무창포 해수욕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바다가 갈라지는 신기한 현상을 보이는 동네도 있다고 한다. 수도는 코펜하겐Copenhagen(덴마크어로는 쾨벤하운kǿbehavn)이다. 코펜하겐은 윌란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셸란 섬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에 외레순Ǿresund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웨덴의 남단 말뫼Malmö와 인접해 있다.

 

덴마크 땅이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전국에는 많은 철도와 고속도로 및 포장된 도로가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약 420㎞에 달하는 내륙 수로가 있다. 덴마크 국영철도회사가 운영하는 연락선들이 덴마크 여러 섬들과 유틀란트 반도를 연결하고 있으며,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에도 취항한다. 여러 훌륭한 항구들이 15개의 주요 선박회사들에게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준다. 코펜하겐 중심부에서 약 10㎞ 동남쪽에 있는 카스트로프에 국제 공항이 있다.

 


덴마크는 서북지역에서 몰아치는 강한 바람을 맞는 반도 국가이다. 연중 바람이 많이 부는 것이 특색이기 때문에 바람의 나라라 할 수 있다.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서북부 지역의 농지 주변이나 주택 주위에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 바람을 이용하여 동력을 만들어 내는 풍차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덴마크 서북부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좁은 경작지들을 넓히기 위해 윌란 반도 북쪽 습지를 개척하고 메마른 땅을 개간하여 가축의 사료를 많이 재배하면서 목축업에 종사한다. 여기에서 질 좋은 치즈 및 많은 육류와 달걀 등이 많이 산출되어 덴마크는 낙농업 국가로 발돋움하게 됐다.

 

덴마크의 기후는 북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온난한 편에 속한다. 북대서양 해류(멕시코 만류) 및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 때문이다. 겨울에는 날씨의 변덕이 좀 심하지만 대체로 온난한 편이고, 여름에는 서늘하다.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의 1월 평균기온이 0.1℃이다. 전체적으로 기온의 연교차는 적은 편이다. 가장 추운 1월의 평균기온이 -1.5℃이고 가장 더운 7월의 평균기온이 17℃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다만 겨울이 습하고 일교차가 적어 체감온도는 춥게 느껴진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7. 06:30



지와 행복의 선진 부국

덴마

 



덴마크는 북유럽 바이킹 계열의 데인족이 세운 나라이다. 고대 바이킹 시대의 국가 형성 과정을 거쳐 8세기경 역사에 본격 등장한 이후, 덴마크는 여러 왕조를 거치며 부침을 겪다가 19세기 중엽에 입헌군주제를 확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덴마크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를 영위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고, 산업기계 분야와 낙농 분야 등이 우수한 선진국으로서 북유럽 지역과 유럽 본토를 잇는 가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나라이다.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광범위한 사회복지제도를 운영 중이고, 높은 시민의식과 함께 사교적이고 낙천적인 국민성을 갖고 있으며, 국민들이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독서2017. 6. 26. 11:20



새책맛보기

그해, 역사가 바뀌다




그해, 역사가 바뀌다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300쪽



1492, 1820, 1914, 1945 그해, 인간은 어디로 향했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수사는 진부한 만큼 진실의 무게를 갖는다. 인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문명을 만든 결정적 도전과 성찰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에서 찾은 4가지 결정적 순간, 그 문명의 풍경을 인류의 변곡점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해 이후 문명의 방향을 탐문해 본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로부터 근대 유럽 문명의 약진을 살피고, 1820년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를 기점으로 동양과 서양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확인하며, 1914년 인간과 자연 간 평화의 파괴를 상징하는 생물종의 멸종을 고찰하고, 1945년 ‘섬멸의 전쟁’ 이후 인간 지성이 느끼는 문명과 야만에 대한 고민을 함께 탐사해 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난 역사로부터 길어 올린 담대한 질문과 마주 선다.


Posted by 천연감성
독서2017. 6. 25. 11:16

 


새책맛보기

'리씽크(Re think)'

 






리씽크(Re think), 오래된 생각의 귀환

스티븐 풀 지음 / 김태운 옮김 / 샘앤파커스 / 400쪽

 

혁신을 위한 가장 ‘쿨’한 방법은 어쩌면, 가장 ‘올드’한 방법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 책은 ‘통섭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저널리스트 스티븐 풀Steven Poole이 쓴 책으로,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모든 낡은 생각에서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 낸 수많은 ‘생각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인간의 짧은 시야를 뛰어넘어 몇천 년, 몇백 년의 시간 속에서 과거에는 비웃음을 당하고 헛소리 취급을 받았던 주장과 발견이 시간이 지나서 타당성을 인정받거나 혁신적인 것으로 판명된 것들이 있다.


마음 둘 곳 없는 현대인의 심리치료의 주류가 된 고대 스토아 철학, 이미 200년 전 용도 폐기된 줄 알았던 전기차의 부활, “인류 역사상 가장 멍청한 철학”으로 평가받던 범심론의 극적인 도약, 첨단 비즈니스 방법론으로 다시 부각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 핵전쟁을 억제한 군사학으로 다시금 평가받고 있는 손자병법….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모든 낡은 생각에서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 낸 수많은 ‘생각에 관한 통찰’이 녹아 있다. 비즈니스 관점뿐 아니라 ‘아이디어’가 필요한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흥미롭게 읽힐 수 있는 책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6. 24. 09:30



금산사 돌무지개문 앞에서

 





 

모악산에 대한 성구

* 전주 모악산母岳山은 순창 회문산回文山과 서로 마주서서 부모산이 되었나니, 부모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모든 가족을 양육 통솔하는 것과 같이 지운地運을 통일하려면 부모산으로부터 비롯해야 할지라. (증산도 道典 4:19)

 

* 모악산 치맛바람을 아느냐? 모악산 치맛바람이 장차 천하를 진동케 하리라. 모악산은 청짐관운형靑鴆貫雲形인데 그 살기殺氣를 피워 내는 바람에 세계가 물 끓듯 하리라. (증산도 道典 4:148)

 



금산사에 대한 성구

*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증산도 道典2:30)

* 천황지황인황후天皇地皇人皇後에 천하지대금산사天下之大金山寺라 (2:66)

*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이요 청풍명월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라

문명개화삼천국文明開化三千國이요 도술운통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라

만국을 살려낼 활방은 오직 남쪽 조선에 있고

맑은 바람 밝은 달의 금산사로다.

가을의 새 문명은 삼천 나라로 열려 꽃피고

도술 문명의 대운은 우주 저 끝까지 통하리라. (증산도 道典5:306)

 

미륵불이 어찌 모악산에 있을까?

금산사金山寺는 미륵부처님의 고향, 미륵신앙의 고향이다. 이것을 꼭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금산사하면 무슨 산이 생각나요? (모악산) 모악산母岳山은 문자 그대로 어머니 산이다. 그럼 아버지산은 어디에 있어? 오선위기五仙圍碁가 있는 회문산. 전라남북도 경계에 있는 회문산回文山이다.

 

회문산과 모악산은 서로 마주 보고 부모산父母山이 되었다. “미륵불이 어찌 모악산에 있을까?”(증산도 道典 2편 67장) 그 말씀을 생각해 보면 모악산이 지구의 어머니 산이 된다는 것은 이 지구가 바뀌는구나, 천지개벽이 되어서 지구의 어머니 산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늘 금산사를 자주 집처럼 드나드셨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이곳이 아주 정겨운 곳이다. 여기는 우리 참동학 무극대도 닦는 사람들의 고향이고 앞으로 후천 5만 년 지구촌 인류와 천지신명들의 진리 고향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6. 23. 09:00



증산도 진리의

고향 금산사





천상 도솔천兜率天에 계신 미륵불의 명命을 받고 이 세상에 내려온 석가불은, 자신의 불법이 인류 교화력의 한계에 이를 때, 진정으로 온 인류를 건져 내시며 새 진리ㆍ새 법을 내려 주시는 미래의 부처님, 인류 희망의 부처님, 구원의 부처님으로서 도솔천의 천주이신 미륵님이 이 동방 땅에 내려오실 것을 아들 라훌라와 종통 전수의 계승자 가섭迦葉 등에게 미래의 역사적 사건으로 선언하였습니다.

 



바로 그 미륵불이신 상제님께서 금산사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상제님은 평소 금산사를 당신님의 집처럼 자주 왕래하셨습니다. 9년 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천상 옥좌로 돌아가실 때에도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노라.” 증산도 도전 하시며, 금산사를 통해 환궁還宮하셨습니다. 금산사는 가을 문명의 무극대도의 첫 관문입니다. 상제님께서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고 하셨는데, 미륵전을 참배할 때 상제님의 이 말씀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됩니다.

 

오늘 금산사 순례를 통해서, 그동안 준비해 온 불교 3천 년 역사문화 경전사經典史, 또 역사적인 불ㆍ보살들과 조사들의 깨달음의 정수를 정리하면서, 이제 인류 문명사가 본격적으로 개벽불開闢佛이신 미륵부처님의 새 진리의 길로 접어들게 됨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또한 『증산도 도전』 강독을 앞두고 오늘 실시되는 후천선경의 주인공인 초립동 제2차 성지순례, 금산사 성지 답사는 우리 모두에게 후천 가을 문명의 중심주제인 태을랑太乙郞의 태을선太乙仙 도심주道心柱를 체득하는 데 잊을 수 없는 큰 추억과 현장 문화체험이 될 것입니다.

 

우선 금산사로 들어서기 전에, 상제님께서 모악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가 옆에 우뚝 서 있는 (윗)상나무쟁이에서 개벽사의 미래 주인공 초립동과 더불어 상씨름 공사를 보시고, 그 마지막 한판 승부를 열흘 후 어천하시기 4일 전인 기유년(도기 39, 1909) 6월 20일에 지소촌紙所村에서 초립동과의 생사를 겨룬 최후의 상씨름 역사 전쟁 공사를 보셨습니다.

 


그 (윗)상나무쟁이 성지를 뒤로 하고 금산사 길로 올라서면, 상제님의 분신이요, 도道의 종통이며, 대두목의 상징인 임술생 태운장 김형렬金亨烈 성도가 태어난 환평環坪 마을이 있고, 이어서 김형렬 성도와 친구처럼 지냈던 인물로서, 상제님이 천상에서 데리고 내려오신 유일한 지상의 친구, 하나님의 영원한 친구인 안필성安弼成 성도가 살았던 계룡鷄龍마을이 있습니다.

 

오늘 증산도 성지순례의 첫 말씀은 금산사의 정문인 돌무지개문(홍예문虹霓門)인데, ‘상제님은 왜 9일 동안 충청도에 다녀오신 후 돌무지개문에서 깊은 밤에 김형렬 성도를 부르셨는가?’ 하는 문제를 정리해 봅니다. 미륵전 앞에서는 금산사의 역사적 의미와 미륵전에 대해서, 또 불법의 근본정신과 불교의 정수, 석가불과 미륵불, 미륵님으로 오신 상제님의 진법의 핵심 정수와 총 결론인 태을랑 문화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자, 다 함께 “만국활계 남조선 청풍명월 금산사”란 말씀에서 이 “청풍명월 금산사淸風明月 金山寺”의 참뜻을 깨쳐보는 금산사 순례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2. 11:00




아프리카 단의 경제

 

 

 

경제 구조 및 특성

수단경제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경제체제로써 농·축산업(49%), 제조업(16%), 서비스업(35%) 산업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도로, 항만, 전기 사회 간접시설의 불비와 숙련노동력의 부족으로 경제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단은 1989년 6월 30일 혁명 정부 수립 후 과격 이슬람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걸프전에서의 이라크 지지, 남부 내전 난민, 인권문제 등으로 미국, 영국 등 서방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국가재정의 75%에 달하는 대외원조의 중단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어 왔다. 수단은 그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이상 지속된 내전으로 전 국토의 피폐화와 전비지출에 매몰된 경제로 국가재정의 75% 이상을 대외원조에 의존하는 최빈국 중의 하나로 평가되어 왔다. 빈사 상태의 수단 경제를 구한 것은 원유 개발로 1999년 중국 자본에 의해 남부 유전지대와 홍해 석유수출항인 포트 수단을 잇는 1,600km의 파이프라인 완성과 8월 원유 수출 개시로 연 6% 이상의 경제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새로운 유전 발견과 수출확대로 2000~2008년까지 연평균 6%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나 물가급등, 빈부격차 심화, 석유 수입 자금의 인프라 투자 연계 미약 등 문제점도 상존하고 있다.

 

수단중앙은행 통계에 의하면 2015년 말 기준 수단의 교역 규모는 수출이 31억 달러, 수입이 95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석유제품, 원면, 땅콩이며, 주요 수입품은 식료품, 공산품, 수송장비 등이다. 주요 수출대상국은 일본(48%), 중국(31%), 한국(3.8%) 등이며(2006년), 주요 수입대상국은 중국(17.7%), 사우디 아라비아(9%), 아랍에미리트(5.6%), 이집트(5.2%), 독일(5.1%), 인도(4.5%) 등이다(2006년 기준).

 


최근 경제 동향 및 향후 전망

수단은 아프리카에 위치하고 있으나 종교, 문화 등 특징은 아랍 영향권에 속하며, 인구, 면적, 1인당 GDP 등 고려 시 상당한 내수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비옥한 옥토 및 원유, 금 등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농업 및 광물 자원 생산 시장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으로 인한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수단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 대한민국의 10대 수출국가이다.(2016년 11월 기준 1.39억 달러 규모)

 

수단은 경제 제재 장기화로 인한 외환보유고 고갈과 무역적자 지속, 원유가격 하락, 그리고 남수단 원유 수출 분배로 얻던 재정 수입의 대폭 감소 등으로 경제 여건 악화가 지속되어 왔다. 자원 의존적 경제구조로 산업기반이 취약하고, 고정투자 및 FDI 감소, 외채 누적, 경상수지 적자 등으로 경제발전이 지체되고 있으며, 실질적 경기도 후퇴 국면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경제 환경에서 수단은 재정 확보를 위해 곡물 수출을 활성화하고 제조업 투자 유치를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신흥 수출 품목으로 금광 산업을 수출 시장 견인차로 육성하고 있다. 수단은 남아공과 가나에 이어 아프리카 3위의 금 매장량을 주장하고 있는데, 2015년 수단의 금 생산량은 약 80톤 규모이고 향후 매년 45~50톤을 생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단 경제의 향후 미래를 전망해 보면, 약한 경제 기반 및 장기 경제제재로 경제 발전을 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외환보유고 고갈, 무역적자 지속, 원유가격 하락, 남수단과 원유 수출 분배로 재정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수단 정부의 성장 동력 산업 육성 및 정부의 변화 관리 능력 제고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경제제재 해제로 인한 기대심리 상승 및 단기적 물가 상승, 달러화 부족 현상 심화 등 고립경제의 체질 변화가 요구된다. 수단은 앞으로 잠재 해외투자의 유입 확대 및 달러화 거래 자유화로 인한 교역 활성화 등을 통해 경제 발전 기반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21. 09:00





아프리카 수단의

정치 및 행정

 





 

정치체제 및 행정

수단의 국체는 공화정이며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계속 연임에 성공해 장기 집권 중인 오마르 하산 아마드 알 바쉬르Omar Hasan Ahmad al-Bashir이다. 바쉬르는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총리직을 없애고 대통령이 총리를 겸하면서 대통령 아래에 두 명의 부통령을 두는 체제로 행정을 운영해 왔다. 그런데 최근 수단 의회가 표결을 통해 총리직 복원 등을 포함한 헌법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28년 만에 처음으로 총리를 임명하였다. 2017년 3월 2일 수단의 새 총리에 임명된 바크리 하산 살레Bakri Hassan Saleh 부통령은 바쉬르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인물로, 부통령직을 유지하며 즉각적으로 새 내각 구성에 착수할 것이라고 집권 국민의회당(NCP)이 밝혔다.

 


바쉬르 대통령은 2003년 2월 수단 서부 다르푸르Darfur 주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3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과 관련하여, 상설 전쟁범죄재판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의해 전범 등 6가지 혐의로 2008년 7월 체포 영장이 발부된 바 있다. 그런데 2015년 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50여 개국의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를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최하면서 ICC 검찰 당국이 반인륜 범죄 피고로 체포 영장을 발부한 오마르 바쉬르 수단 대통령을 초청했다. ICC 회원국은 체포장이 발부된 피고를 붙잡아 ICC에 인계할 의무가 있는데 남아공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2008년까지 다르푸르 지역에서 자국민 30만 명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바쉬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남아공 정부와 달리 한 지방법원이 인권 단체의 요청대로 바쉬르의 체포를 명했고 이 소식을 들은 바쉬르는 정상회의 도중 몰래 남아공을 빠져나와 귀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는 주권 침해를 이유로 ICC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하고 ICC에 가입 철회를 통고했으나, 지난 2월 22일 남아공 법원으로부터 ‘위헌 및 무효’ 판결을 받아 가입 철회 통고를 취소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지방행정

수단은 18개 주州로 구성되어 있다. 홍해Al-Baḥr al-Aḥmar 주州, 알자지라Al-Jazīrah , 알카르툼Al-Kharṭūm , 알카다리프Al-Qaḍārif , 백나일강An-Nīl al-Abyaḍ , 청나일강An-Nīl al-Azraq , 북부Ash-Shamālīyah , 서부 다르푸르Gharb al-Dārfūr , 서부 쿠르두판Gharb Kurdufān , 남부 다르푸르Janūb Dārfūr , 남부 쿠르두판Janūb Kurdufān , 카살라Kassalā , 나일강Nahr an-Nīl , 산나르Sannār , 북부 다르푸르Shamāl Dārfūr , 북부 쿠르두판Shamāl Kurdufān , 동부 다르푸르Sharq Dārfūr , 중앙 다르푸르Wasaṭ Dārfūr 등이다.

 

입법부

수단의 입법부인 국회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회의에 450석, 상원에 해당하는 연방의회에 50석이 배당되어 있고 임기는 모두 6년이다. 의회의 권한으로는 입법권, 정부예산 심의권, 각료해임 건의권, 선전포고, 비상사태선언 등 모든 입법권을 보유하고 있다.

 

사법부

수단의 사법기관에는 최고재판소, 고등법원, 지방법원, 특별군사 재판소, 종교재판소가 있다. 최고재판소는 위헌입법 심사부(재판장 1, 판사 7명으로 구성), 민사부, 형사부, 행정부, 이슬람교도 신분 관계부, 비이슬람교도 신분관계부(각각 3명의 판사로 구성) 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등법원은 각 주에 지방법원은 주요 도시에 소재하고 있다. 특별군사 재판소는 국가반역죄, 치안유지 위반사건 등을 취급하고, 종교 재판소는 이슬람법에 의거 이슬람교도의 신분소송을 취급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20. 02:30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찌민胡志明


 

 


프로필

호찌민(Ho Chi Minh, 胡志明)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阮生恭)이다. 1890년 프랑스 치하의 베트남에서 태어났으며,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사회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1941년부터 30여 년간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부터 1969년까지 북베트남 대통령을 지냈다. 열강들의 손에 의해 갈라진 조국 베트남의 통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하였으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69년 사망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공산주의 지도자로 꼽힌다.

 

출생 1890년 5월 19일

사망 1969년 9월 3일

국적 베트남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베트남 게친 주州

 


대표명언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식민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혁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강물은 둘로 나눌 수 없다. (베트남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

 

어려운 것이란 없다. 산을 파고 바다를 메울 수 있다. 단지 흔들리는 마음이 두려울 뿐,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할 수 있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

사회를 개조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개조해야 한다. 자신의 속마음을 엄숙하게 검열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 우선 자신을 갈고닦아야 그 다음에 조직 내부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대중을 감동시킬 수 있다.

 

사랑은 보물과 같다. 조국을 사랑한다거나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이는 각자가 소유한 귀중한 보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보물들을 꼭꼭 숨기기를 좋아한다. 집 안에 금고를 두고 지하 비밀창고를 만들고 이를 숨기려고만 한다. 이를 끄집어내어 자랑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You will kill 10 of our men, and we will kill one of yours,

and in the end it will be you who tires of it.”

(우리가 당신네 한 사람을 죽이는 동안 당신들은 열 사람을 죽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땅에서 먼저 없어지는 것은 당신들이 될 거요.)

-1946년 9월, 프랑스 장 생트니 소령을 만난 호치민

 

호찌민의 유언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시키고, 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다만 단순하고 넓으며 튼튼한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라.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19. 10:38




 


아시아 최대갑부 리자청李嘉誠

 


 

프로필

리자청(리카싱 Li Ka Shing, 李嘉誠)은 중국 광둥 성에서 태어난 기업인으로, 중국 최대의 기업, 청쿵그룹[長江實業(集團)有限公司, Cheung Kong (Holdings) Limited]의 창시자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며, 중국인 중 세계 최대의 부자 중 한 사람이다.

 


2011년 《포브스Forbes》 선정 세계의 억만장자 11위, 2007년 《포춘Fortune》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 12위 등에 선정되었다. 현재 허치슨왐포아, 창장개발, 에어캐나다, 홍콩전력, 홍콩텔레콤, 허스키오일, 파나마운하·부산항·광양항의 컨테이너 터미널 총 460여 개에 달하는 기업에 관계하고 있다.

 

출생 1928년 7월 29일, 중국

소속 청쿵그룹(회장)

경력 청쿵그룹 회장

1981 중국 산터우대학교 설립

1980 리카싱 재단 설립

1945 청쿵 플라스틱 공장 설립

 



명언 모음

운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일이 천시, 지리, 인화에 부합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경솔하게 일을 하다가 실패한 후, 운명을 탓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품덕과 재능을 알고 합리적으로 등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각각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곳이 있다. 능력을 살펴보고 사람을 쓴다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인생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생활의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성공이 무엇인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나는 인생의 힘든 시기에 제일 많이 단련을 받았다. 특별히 판촉사원으로 근무할 때, 적지 않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경험과 교훈은 지금 10억, 20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초인이라 부르지만, 사실 나는 타고난 경영자가 아니다. 많은 좌절과 역경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경영의 비결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재는 아무리 취하여도 다함이 없고,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그들도 당신에게 좋게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모두 다 당신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는 한 발짝 더 앞서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는 올림픽 경기에서 1, 2, 3등이 결정 나는 것이 한 발짝의 차이인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조심스럽고 면밀하게 연구해야 한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용기를 가지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

 

사업의 성공은 절대적인 공식은 없다. 그러나 일련의 원칙을 따른다면 성공 가능성을 상당히 높일 수 있다.

 

옛 친구든 새 친구든 친구를 사귈 때는 성실을 의지하고 호언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했다면 행하여야 하고, 공포탄을 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총명하고 재빠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를 믿고 따르며 나와 왕래하기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100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는 200에 버금가는 힘으로 공격했고 아무렇게나 도박을 하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인류에 공헌한 사람들을 나는 존경하며, 그들에 관한 책 읽기를 아주 좋아하였다. 의료, 정치, 교육, 사회복지 등 분야를 막론하고 전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보면 탄복해 마지않는다.

 

더 많이 양보할수록 더 많이 돌아온다.

 

나만 돈을 벌고 상대방은 빈손인 사업이란 절대 불가능하다.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한 푼이라도 더 차치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에게 이익이 없다면 내게 돌아올 이익도 없다. 다른 사람이 먼저 이익을 얻도록 양보해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나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촌철활인

도덕경에는 ‘얻고자 한다면 먼저 내놓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먼저 다른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야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 리차청 회장은 아들에게 “다른 사람과 동업할 때 상대가 이익의 7할이나 8할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그렇게 해 주어라. 우리는 2~3할만 가져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18. 10:34






아프리 회교국

수단의 역사

 

 




선사시대와 쿠시왕국

수단 지역에는 BCE 8000년경 신석기 문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일 강 지역을 중심으로 어업과 사냥 등으로 생활하던 이들은 BCE 5000년경 사하라 사막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의 인도로 나일 강 계곡에서 농업을 영위하다가, BCE 1070년경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누비아Nubia지방에 쿠시Kush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이외에 고대 문명의 존재가 확인된 곳이 현재의 수단 지역임을 의미한다. 쿠시왕국은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이집트 신왕국의 분열 이후에 세워졌으며 건국 초기에 나파타Napata에 중심을 두었는데, 쿠시 문명은 철기 제련 기술을 사용하던 세계 최초의 문명 중 하나이다. 고전시대에 쿠시 왕국의 수도는 메로에Meroë였으므로, 쿠시 왕국은 메로에 왕국, 누비아 왕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쿠시인인 카시타Kashta 왕은 기원전 8세기에 이집트를 침공해 정복하였다. 이후 쿠시인들은 아시리아가 그들을 쫓아낼 때까지 쿠시인 파라오가 ‘에티오피아 왕조’라 불렸던 25번째 왕조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쿠시 왕국은 기원후 4세기까지 존속하다가 에티오피아 북부에 있던 악숨 왕국에게 정복되어 멸망하였다. 쿠시 제국의 멸망 이후 몇몇 나라들이 이전의 영토에서 세워졌고 그 중에 누비아Nubia도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6세기 경, 메로에 왕국의 정치적 문화적 후계자로서 노바티아, 무쿠라, 알라와 등 50개의 국가가 세워졌다. 540년경에는 비잔틴 황후 테오도라가 보낸 선교사가 노바티아에 도착해 기독교를 설파하기 시작했고 이후 16세기 초까지 수단 지역에는 누비아 기독교 왕조 시대가 이어졌다.

 

7세기 중반부터 수단 지역에 아랍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후 1315세기에는 그리스도교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슬람은 긴 시간에 거쳐 이종결혼(intermarriage)과 아랍 상인들, 수피교 수행자와 정착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수단 지역에 스며들었다. 이들 아랍인들은 원주민들과 뒤섞여 수단인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아랍어를 사용하였다. 오늘날의 북수단 문화에서도 자주 누비아와 아랍의 문화 요소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6세기 경, 푼지Funji라 불리는 부족이 아마라 둔쿠스Amara Dunqus라는 지도자 아래 남 누비아에서 나타나 오래된 크리스천 왕국인 알와의 일부를 탈취해 앗살타나 앗자르카(푸른 술탄국) 혹은 센나르 술탄국(Sultanate of Sennar)이라 불리는 이슬람 국가를 세웠다. 푸른 술탄국은 결국 푼지Funji 술탄국의 뼈대가 된다. 이 왕국은 19세기 초까지 이어지다가 후계 분쟁과 왕족의 쿠테타가 계속되며 쇠락해졌다.

 


오스만 통치기와 마흐디 수단

1821년, 이집트를 정복한 오스만 터키계의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총독이 수단을 침공하여 마지막 푼지 술탄 바디 7세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수단은 이집트의 1개 주로 전락하여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집트 총독 정부의 통치하에서 실행된 부패와 농부들에게 과해진 모진 세금 징수 등의 폐단이 쌓이면서 반정부 저항 활동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1881년 6월 개혁주의적 인물인 알-삼마니야al-Sammaniyya 종단의 지도자 무함마드 아마드 압둘라Muhammad Ahmad Abdulla가 스스로를 마흐디Mahdi(회교에서 구세주)라 선언하고 수단 혁명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는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서구 지배로부터 벗어나 수단의 진정한 독립과 자유, 이슬람으로의 회기를 주장하며 투쟁 세력을 규합해 종교적 폭동을 일으켰다.

 

그가 이끄는 마흐디군은 마침내 1885년 1월 카르툼을 함락시켜 수단의 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수단의 터키-이집트 정부에 승리를 거두었다. 카르툼 정복 후 몇 달이 지나 무함마드 아마드가 병으로 사망하자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Abdullah Ibn Muhammad가 뒤를 이어 마흐디 운동을 이끌었다. 마흐디 운동을 통해 수단은 처음으로 여러 부족들에 의한 분열된 통치 구조에서 통합된 근대국가로 넘어갈 수 있는 중앙집권 형태의 정부를 수립하는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1899년 9월 2일 마흐디 군대는 카라리Karari 전투에서 영국 식민주의 토벌대의 키체너Kitchener 장군에게 패했으며, 곧이어 마흐디 국가의 수도로 정했던 움두르만Umm Durmān 함락되고, 지도자인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도 사망함으로써 마흐디 운동은 막을 내렸다.

 


영국-이집트 수단

1899년 수단을 정벌한 영국은 영-이집트 간에 수단 공동통치협정을 맺어 수단 지역을 ‘앵글로이집트수단’이라고 불렀다. 영국과 이집트는 이집트에서 임명한 총독을 영국이 승인하는 식으로 선출한 총독이 수단을 운영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수단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효율적으로 통치되었다. 1924년에 영국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수단인과 수단에 대한 이집트 지배권을 주장하는 이집트 민족주의자의 반발로 수단 총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은 저항 운동이 극심한 북부 수단에 대해서는 Native Administration제를 도입하고, 남부 수단에 대해서는 Southern Policy를 채택하여 영어, 토착어 장려 및 기독교 포교를 강화함으로써 남북 간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 관계를 단절시켜 상호 괴리를 심화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독립 이후

하지만 계속된 영국의 수단 통치로 인해 이집트에선 갈수록 민족주의자들의 거친 반발이 일어났고 저항운동이 날로 격심하여짐에 따라 이집트와 영국은 북수단과 남수단의 주민들이 영국의 철수를 원하는지 자유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53년 2월 영-이집트 협정에서 수단의 자치 독립을 위한 3년간의 준비기간이 합의되었고, 마침내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11년 만인 1956년 1월, 수단은 영국과 이집트 승인 하에 수단공화국으로 독립을 성취하였으며, 뒤이어 AL(Arab League: 아랍연맹)과 UN(United Nations: 국제연합)의 가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 식민 정책의 결과로 남부와 북부 간의 지역 대립 및 다수 정당의 난립으로 국정의 혼란이 계속되었고, 1958년 11월에는 이브라힘 아부드Ibrahim Abboud 장군이 무혈 쿠테타로 군사 정권을 수립하고 정통 이슬람 국가를 선언하였다. 1964년에는 하르툼 대학생들을 선두로 한 군정반대운동인 10월 시민혁명이 일어나 아부드 정권을 무너뜨렸고, 민간 정치인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어 의회정치 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당쟁과 남부 문제 등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회복치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자 1969년 5월 가파르 니메이리Gaafar Nimeiri 대령이 이끄는 두 번째 쿠데타가 일어나 다시 군정으로 복귀했다. 니메이리의 새 정부는 수단사회주의를 선언하고 국호를 수단민주공화국으로 개칭하였으며, 구정치인 및 반대파에 대한 대 숙청을 단행했다. 외국인 자산과 은행을 국유화하고 경제 원조 및 군사 원조의 대공산권 의존도를 급속히 높였다. 1972년에는 좌익 장교단 쿠테타 음모를 분쇄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타도하고 총선에서 니메이리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수단 사회주의 연맹(SSU)을 창립하고 단일 정당제를 채택했다.

 

1985년 3선의 니메이리 대통령이 외유 중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다하브Abdel Rahman Swar al-Dahab 장관은 1986년 민정 이양과 동시에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이어 1989년에는 오마르 알 바쉬르Omar al-Bashir가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바쉬르는 이후 연이은 집권 연장에 성공하여 2017년 3월 현재까지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수단은 1983년부터 내전內戰을 시작했다. 주로 남부 아프리카계 함족인 기독교도와 토속 정령신앙을 믿는 주민들로 이루어진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아랍계 셈족으로 이루어진 북부 중앙 정부의 지나친 이슬람 원리주의와 차별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인데, 남부 반군측은 남부 지역의 자치권과 자원 이용 확대를 요구하면서 반정부 분리 무장 투쟁을 개시했다. 그간 이 내전의 과정에서 200만 명 이상이 죽고, 400만 명 이상이 강제 추방, 구타, 강간 혹은 고문의 고통을 체험하거나 노예로 팔린 것으로 전해진다. 2005년 1월 남부 반군과 북부 정부군 간의 포괄적 평화협정으로 내전은 종료되고 평화협정에 따라 수단 정부는 남부에 반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그 후 2011년 7월 9일 남부는 독립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률로 남수단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남부와 북부의 인종, 종교적 갈등이 어느 정도는 해결됐으나, 아직도 수단 내에서는 정치의 혼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6. 17. 03:30






아프리카 국가

수단의 연환경

 

 




 

수단 공화국Republic of Sudan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나라로, 국명인 수단은 아랍어로 ‘흑인들의 땅(빌라드 앗수단)’을 뜻한다. 수단은 ‘남수단 공화국Republic of South Sudan’과 구분하는 의미로 흔히 ‘북수단 공화국Republic of NorthSudan’, 약칭 ‘북수단’으로도 불리는데, 2011년 7월에 국민투표 결과를 수단 정부가 수용함으로써 ‘남수단’이 평화적 과정을 통해 독립 국가로 분리되었으므로, 동독-서독이나 남한-북한의 분단 개념과는 다른 경우라 할 수 있다.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에 있으며 홍해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1,861,484㎢로 세계에서 16번째(2016년 기준)로 넓은 나라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알제리, DR콩고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한반도의 약 8.6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해안선은 853km이며, 북쪽으로 이집트, 북동쪽에 홍해, 동쪽에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남서쪽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남쪽에 남수단, 서쪽에 차드, 북서쪽으로는 리비아와 접경하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 나일Nile 강이 수단을 동쪽과 서쪽으로 가르며 흐르고 있다.

 


국토는 나일 강 연안을 제외한다면 평야와 고원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남부에는 1,500m 이상의 이마통Imatong 및 누바Nuba 산맥, 서부에는 자벨 마라라Jabel Marrah 라는 3,024m의 사화산, 그리고 북동부에는 레드 시 힐Red Sea Hill 등이 있다.

 

백나일 강과 청나일 강이 수단에서 합류하여 이집트와 지중해를 향해 흘러간다. 청나일 강은 길이가 800km로 이어지며 딩다 강과 만나기도 한다. 백나일 강은 뚜렷한 지류가 수단 내에서 없다. 댐이 여럿 있으며 누비아 호수 인근에 이집트와 국경을 맞닿고 있다. 나일 강 부근의 지나친 경작과 계속적인 사막화로 인하여, 농경지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수단의 교통 상황은 영국 통치시대에 건설된 철도와 나일의 수로가 전통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공업화 정책에 따라 도로의 정비가 추진되고 있으나 현재에도 우기에는 간선도로 이외의 곳에서는 교통이 곤란하다. 차량은 우측 통행이며, 도로가 협소하고 노후 차량들이 많은 관계로 도로별 속도 제한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안전벨트 착용을 하지 않으며, 시내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편리한 곳에 주차하면 된다. 로타리 회전 시 좌측 차량에 우선권이 있다. 최근 중고차 수입으로 거의 50%의 차량이 한국차이다. 햇볕이 강하므로 창문은 썬팅을 하는 게 좋으며, 열악한 도로 사정과 수명 연장을 위해 내구성이 강하고 잔고장이 적은 디젤 차량를 구입, 운행하는 것이 유리하다. 비가 내리면 수도인 카르툼 전역에 도로가 통제되고 대중교통이 운영되지 않기도 하는데, 이는 배수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아 도로 침수가 심해 운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기후는 남부가 열대성 기후이고, 사막에 접해 있는 북부는 건조한 사막기후(습도 15% 이하)로 1~2월을 제외하고는 연중 고온의 매우 더운 날씨가 지속된다. 여름에는 온도가 40도 후반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습도가 낮아 그늘에 가면 지낼만 한 수준이다. 사막, 스텝, 사바나, 열대우림성으로 바뀌며 남하할수록 강우량이 많아지고 기온도 높아진다. 3~6월, 8~11월은 고온 건조하고 자외선이 강하다. 낮에는 뜨거워서 야외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야간에도 30도 중반을 유지한다. 7~8월에는 우기로 습도가 높고 갑자기 다량의 소나기가 내리기도 하지만 몇 차례 되지 않는다. 남부지방의 경우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12~2월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유사하며 건조하지만, 밤낮 기온차가 상당히 크다.

 


수단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기상 현상으로 하붑Haboob이라는 것이 있다. 하붑Haboob은 아랍어로 강풍, 폭풍, 또는 먼지폭풍을 뜻하는 말로, 수단에 불어오는 모래폭풍을 의미한다. 하붑은 주로 여름철에 뇌우가 최종 단계에 다다랐을 때 생기는 하강 기류에 의해 발생한다. 하강 기류가 강하하는 공기를 지표면에 부딪치게 해 사하라 사막에 있는 대량의 먼지를 들어 올리게 되고, 이렇게 모인 먼지 구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하붑을 형성하게 된다. 하붑은 사막지형인 수단에서 매년 나타나며, 중동지역, 미국에서는 기온이 높은 애리조나나 텍사스 등지에서 가끔 나타나기도 한다. 수단에서는 보통 4~6월 사이에 하붑이 불며, 때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지만 심한 경우에는 초속 17~25m의 강풍이 수백 미터의 높이로 불어 한 시간 이상 지속되기도 한다. 하붑이 불어올 때의 먼지 농도는 한국에서 부는 황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짙어 건강에도 매우 좋지 않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6. 16. 01:00

 

 

 

태을주도공중

할머니의 목소리 "마음도 하늘에 닿아야한다"

 



 

광주오치도장 김00 도생님

 

 

도공을 하는데 하단전이 들썩이면서 움직였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 같지만 회음부와 항문이 움직이면서 약간 흥분이 되더니 갑자기 등 줄기, 허리 끝으로 물줄기 같은 것이 뒤쪽으로부터 쭉 올라와서 인당으로 내려오더니 '훅'하고 코로 바람이 들어가면서 다시 목으로 타고 내려왔습니다.

 

 

그것이 중단전에서 멈추더니 가슴 아픈 통증으로 싹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하단전 밑으로 기운이 돌면서 아팠던 허벅지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터널처럼 싹하고 용천혈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러고나니까 엄청 시원해졌습니다.

 

 

계속 "지기금지 원위대강, 지기금지 원위대강"을 했는데 갑자기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북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을 '쿵쾅 쿵쾅' 치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래도 좀 답답한거예요.

 

 

 

 


그래도 집중을 했는데 갑자기 친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면서

 

 

"이것아! 일어나라. 그렇게 방댕이만 앉아서 붙이고 있으면 니가 도공의 기운을 받겠냐. 마음도 하늘에 닿아야하고, 천하사를 할 때도 온 몸으로 움직여서 정성이 닿아야 되는데, 천지인 아니냐. 일어나라. 그래야지 통증이 없어진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아.. 할머니 너무 창피 합니다.’ 했더니 “창피할게 뭐가 있냐! 일어나야지 천지인의 기운을 받아야지”

 

 

그래서 일어났습니다. 진짜 할머니 뜻대로 일어나서 했는데, 그전에는 답답하고 막 상충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온몸이 뜨끈뜨끈하고...

 

 

일어나서 도공을 했는데, 진짜 폭풍이 불듯이 바람이 제 몸을 휘감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슴도 편해지고 허벅지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6. 15. 19:22

 



 

태을주수행중

전쟁에 참전해서 싸우다 죽은 군인 신명들을 봤습니다

 




부산광안 허00 도생님

 

 

* 147년 4월 17일 부산지역 월요도공시 체험 사례

 

 

6.25 전쟁때 각 나라에서 와서 참전해서 싸우다 죽은 군인들 신명을 봤습니다. 양쪽으로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서, 평지에서 내려서 소극장처럼 생긴 곳으로 모이는데 각자 철모와 총기류, 패찰, 담요 등이 들어있는 배낭 그리고 부품이나 식량같은 것은 한쪽으로 모아놓게 했습니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터키등 각국 군인들과 우리나라 군인들도 있었는데, 팔, 다리가 없는 등 몸에 상처를 입은 군인과 외상이 없는 군인들을 따로 모이게 했는데 아마 상처를 치료해주기 위해서인 것 같았습니다.

 

 

 

 


워싱턴 한국전 참전 기념비 동상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군인들은 헤아릴수도 없이 끝도 없는 행렬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태상종도사님이 안보였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니, 태상종도사님께서 올라오는 군인들을 향해 '애썼다,고생했다' 하시는듯 박수를 쳐 주시고 군인들은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인사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 147년 5월 8일 부산지역 월요도공시 체험 사례

 

 

지난번 도공때 봤던 6ᆞ25때 참전용사들이 이번에는 태을궁 성전 신단위에 모였는데 한쪽으로는 그 군인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월남전때의 군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양편 군인들은 서로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나눴고 삐죽하게 생긴 장교들 쓰는 모자를 착용한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시는 태상종도사님께서 박수를 쳐 주시다가 홀연 사라지시고, 종도사님께서 평소 도훈하시는 성전 자리에 나타나셔서 박수를 치고 계셨습니다.

 

 

성전 커튼이 반쯤 닫혀지니 군인들이 왜 그러냐고 하자 다시 열리고 또 닫히기를 장난치듯 하는데 거기 누가 와 있다고 하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멕아더 장군이 평소 모습처럼 썬글라스를 끼고 웃고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군인들이 환호와 박수를 쳤고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님도 보였습니다. 작년 도공때는 서로 사이가 안좋았었는데 그동안 서로 화해를 했는지, 두 분이 서로 악수를 하고 맥아더 장군과도 악수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생전의 군복에 썬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고 케네디 대통령도 보였습니다. 끝날 무렵에 전부 일어나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 147년 5월 22일 부산지역 월요도공시 체험사례

 

회관같은 곳에서 초립동이들 십여명이 태사부님과 손을 잡고 돌고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야구장같이 아주 큰 운동장에 가운데 모닥불을 피워놓고 아주 많은 수의 초립동이들이 강강술래하듯 서로 손을 잡고 돌고 있었고 관중석에는 몇천명인지도 모를 흰옷 입은 사람들이 꽉 차서 앉아있었고 태상종도사님께서도 앉아 계셨습니다.

 

 

시골에 정월 대보름때 풍물하는 사람들이 동네를 돌듯, 머리에 고깔 모자를 쓰고, 빨간색 파란색 등의 테를 두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꽹과리를 치며 돌아나가고 있었고 관중석에 앉아있던 흰옷입은 사람들이 도공을 하는 듯한 동작을 하는데, 몸이 많이 아픈 듯한 사람들은 입에서 피를 토하는 사람도 있고 뭐를 자꾸 토해내고 있었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닦아주곤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예전 6ᆞ25때 구걸을 해서 얻어먹던 애들 같이 깡통이나 바가지 등을 차고 있는 애들이 비스듬한 산비탈 언덕에 줄을 쭉 서서 풀장 같은 데 들어가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고있던 깡통이나 바가지등은 걷어서 소극장같이 생긴 곳에 모아두고 그렇게 아주 많은 애들이 목욕을 해서 물이 더러워지니 각설이 같은 복장의 어른들이 그 애들을 나오게해서 더 위로 올려보내니 거기에는 또 풀장 같은게 두 개가 있었고 거기서 몸을 헹궈서 올려보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살려줘서 감사하다며 태상종도사님께 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14. 17:33






대화 중 여러분의 뇌의 모습입니다

by Uri Hasson

 

 

 


by Uri Hasson 우리 하슨 신경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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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천지의 지혜와 능력이 있어 위대하니, 그 도는 천지의 업을 이루는 것으로 원융무애하고, 그 해야 할 일은 서로 협력하여 온 세계가 하나 되게 함이니라.' 「염표문」 中

 

연결된 우리 모두의 합이 우리의 부분의 합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소통을 통해 하나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소통은 어떤 매커니즘을 가지고 진행되는 걸까요?

 

호기심 많은 과학자인 우리 하슨(Uri Hasson)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섯 명의 두뇌를 스캔해봤습니다.

 

청중들은 재미있는 대목에서 매우 유사한 모양의 변화 패턴을 보이는데요, 이것을 ‘신경동조현상’ 이라고 합니다. 

 

또한 청자들의 뇌 패턴은 말하는 화자의 뇌 패턴과도 동일했습니다.

 

하슨은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이 될 때 뇌 사이의 유사한 정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아주 소중한 영감을 하나를 얻게 되는데요,

 

'소통을 위해서는 공통된 기반, 이해, 공동의 신념체계를 구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소통이 공통점에 기반한다는 얘깁니다. 반대로 공통점을 잃으면 소통은실패하고 말겠죠. 그래서 하슨은  '그러니까 소통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자꾸 연결하세요. 자꾸 아이디어를 퍼뜨리세요!'  라고 강조합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6. 13. 17:23







강연을 시작하며: 나는 왜 요기가 되었나

Gunamuktananda




 

고맙습니다. 메리가 제 이름을 부를 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도 그보다 더 잘 발음할 수 없었을 겁니다. (웃음)

 

약 25년 전, 저는 의과대학 졸업학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꽤 오랫동안 제 직업 선택에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친절한 작은 할머니의 피를 뽑으러 갔는데 정맥 대신에 동맥을 건드렸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방에 피가 뿜어 나올 때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맞아. 넌 확실히 직업을 잘못 찾았어.” (웃음) 따라서 관계된 모든 것들의 이익을 위해, 저는 학교를 중퇴하고 대신 요기가 되었습니다. (웃음) (박수)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여러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요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개념, 즉 내면의 우주, 내면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와 외부의 우주, 우리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우주를 지구의 크기라고 하면 우리 지구는 핀 머리 크기의 약 10억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런 핀의 10억분의 1 크기란 말이죠.

 

저는 지금 핀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제 소품이에요. (웃음) 자, 보시죠. 같은 핀입니다. 실제로는 같은 핀입니다. 이런 핀들 중 하나의 10억분의 1크기인 거죠 우주가 지구 크기라면.

 

그런데 핀 머리의 십억 분의 일 크기는 모래 입자의 약 백만 분의 1 정도 또는 원자의 평균 크기 정도입니다. 둘 중 선택하세요.

 

어쨌든, 아이디어는 그것이 우주의 크기에 비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작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크기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되나요? 저는 이것이 우주의 크기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복잡한 우주는 어떤 의도도 없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전화기와 노트북 컴퓨터가 설계 또는 제작한 사람 없이 갑자기 생겼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물학자 루퍼트 쉘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적을 공짜로 주면 우리가 그 나머지를 설명해 주겠다.’라는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웃음) “그 하나의 기적이란 무로부터 한 순간에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수천 년 동안 요가 과학이 말해온 결론,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어 갈 우주에 대한 설명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과 의도는 우리가 보통 마음과 감각으로 느끼는 물질적 실재보다 더 깊은 실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실재는 의식(consciousness)입니다.  모든 사람과 만물에 내재된 보편적인 행복한 인식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여러분 마음의 본질이듯이, 우주 의식은 전체 우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만물 안에 존재하며 만물은 그 안에 존재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은 의식의 일부이며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우주를 물질주의적으로 보는 세계관 vs.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세계관

 

그러나, 그 이유를 지금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현대 세계관에서는 더 고차원적인 의식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현대과학은 현실을 매우 기계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물질, 공간이 모두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요? 

만약 모든 면에서 의식이 지금 우리 현실의 구성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고차원적 현실이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매우 심각한 단점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아주 실질적인 이점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주를 임의적이고, 기계적이며, 감각이 없다고 보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소외되고, 외롭고, 두려워하고, 우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문제들 속에서 그것을 너무 자주 봅니다. 물질주의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낙관론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행복한 의식을 가진 우주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세상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랑받고, 희망적이고, 행복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스승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께서는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고 무력하지 않다. 별을 인도하는 힘이 당신을 인도한다.”

 

그래서 저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세계관보다는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서 성취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세계관을 인정하려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다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관의 이점은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들 중 어느 것 보다도 유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의 본질은 의식이라는 전제는 우주의 본질이 물질이라는 전제와 마찬가지로 유효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는 감지되고 다른 하나는 감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과학적 측정을 통해 물질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의식은 내면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우리 자신 안에서 찾아야 만합니다.

 

나살 우템이라고 불리는 수피 신비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며칠 동안 터키에 있는 그의 고향에 실제로 머물렀죠. 그의 기괴하고 유머러스한 가르침의 방식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그가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내 집 열쇠를 찾고 있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어디에서 그것을 잃어버렸나요?”그녀가 물었습니다. “집안 어딘가에서요.” 행인은 당연히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왜 밖에서 찾고 있나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집안이 어둡기 때문이에요.” (웃음)

 

우리는 올바른 것을 올바른 장소에서 찾아야합니다. 비록 거기서 그것을 찾기가 어렵더라도 말이죠. 겉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속은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식은 내면에 있으므로 내면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머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게 함정입니다.

 

의식은 우리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구를 생각해보십시오. 방의 전구는 주위에 빛을 비출 수 있지만 그것을 빛나게 하는 힘, 전기에는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의식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고의 정상적인 기능과 말을, 심지어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핵심은 생각은커녕 말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데카르트의 이 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요가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멈추었을 때 나는 진실로 존재한다.” (웃음)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거나 과학적으로 무언가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는 생각으로 파헤쳐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과학으로는 결코 인간이란 무엇인지의 핵심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고차원적 실재로 규정한 과학자들

 

지금쯤이면, 여러분은 제 말씀이 조금 실체가 없고 뉴에이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웃음)

 

그래서 의식을 더 고차원적 실재일 것이라고 인정한 과학자들에 대한 간단한 예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합니다.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끝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웃음)

 

양자이론의 아버지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의식이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물질을 의식의 파생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가정한다.” 이것은 양자론의 선구자가 한 말입니다.

 

얼마 후,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James Jean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식의 흐름은 비물질적 실재로 향하고 있다. 우주는 위대한 기계보다는 위대한 생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설득력을 드리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웃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감정은 신비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모든 과학의 근원이다. 

 

무한의 우주 안에서 드러나는 최고 이성의 힘을 지닌 존재에 대한 깊은 감정적 확신이 내가 신에 대하여 지닌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더 높은 의식을 실제로 경험 한 현대 과학자의 예를 들어주고 싶습니다.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 박사는 많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뇌가 의식을 창출한다고 믿어온 신경과학자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매우 드문 뇌 감염에 걸려서 일주일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시 그는 임상적으로 뇌사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조되고 깨우친 의식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7일간의 혼수상태 동안 나는 완전히 의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평화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놀라운 세계를 여행했다. 나는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엄청난 경험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박사는 이제 뇌 과학계가 “유치원에서 졸업”하고 뇌가 현실을 창출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명상: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체험을 통해 고차원적 의식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과 저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개인적으로 의식을 확인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명상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상은 의식이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경험에 의해 구체화되는 직관적인 과학입니다. 명상을 통해, 지금 이 방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나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실재하는 고차원적 의식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저는 방 전체가 인식과 행복으로 진동하는 의식의 장으로 가득 차있다고 느꼈던 특별히 빛나는 명상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하고 실감났습니다. 당시 그것은 마치 칼로 자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당시에는 너무나 현실과 같아서 저는 아직도 그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상을 통해 우리를 궁극적으로 의식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그런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금 명상을 통해 더 높은 의식을 경험해보면 어떨까요? 함께 해 볼까요?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늘 여러분이 명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동안 여러분이 눈을 감아 주시길 권합니다.

 

숨 쉬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세요. 물론 긴 하루였을 테지만요.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중심을 느껴보십시오. (음악 재생 시작)

 

이제 여러분이 완전히 평화롭게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가득한 평화와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주위에 가득한 무한한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그 무한한 행복에 합류하는 것을 느껴 보세요. 여러분의 인식 감각이 여러분을 둘러싼 무한한 인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의식이 주변의 무한한 의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과 하나 되는 느낌. 여러분이 그것과 하나라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이 무한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몇 초간 계속하십시오.

 

좀 더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셨나요? 그런가요? 아닌가요? (청중: 네.)

 

어쨌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이 전체 우주의 의식과 하나라는 가능성에 대해 지금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의식이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을요. 또한 그것은 진짜이며, 정말로 노력한다면 느낄 수 있다는 것을요.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뿐만 아니라 여러분 존재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현실이 더 보편적인 현실임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서 더 큰 의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감, 존재감을 더 확장할수록 우리는 모든 존재에 더 큰 연결감을 느낍니다.

 

더 행복해지고, 덜 두려워하고 덜 외롭습니다. 만물이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가 만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내면을 향한 탐구는 모든 사람들, 동물, 식물 ... 모두의 포용을 용이하게 합니다. 행성, 다른 행성의 사람, 동물 및 식물도요. 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주 전체입니다.

 

저는 의사소통 및 운송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이 더 좁아지는 것처럼 명상 기술의 발전으로 우주도 더 좁아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은 개인의 존재감각, 즉 그의 가슴이 원하는 바에 머문다.”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

 

고맙습니다. (박수 갈채)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6. 12. 04:14


태을궁 수행을 하면서 천지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인천주안도장 김00 도생님


태을궁 수행을 하면서 천지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수행을 하는 도중에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면서 천지의 아들 딸을 한명이라도 더 많이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성지순례에서 종도사님께서 ‘천상에서 인간으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 20세 때 왜 슬피 우셨냐'고 하셨는데, 그때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을주 수행 


상제님이 아무리해도 다 살릴 수 없다고 하신 이유는 도생들이 깨어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저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고 저의 깨어남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빛이 바깥쪽에서 안쪽 중심으로 씨앗 모양으로 모여드는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뚜렷해지면서 중심 쪽으로 모여질수록 색이 진하게 보였습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카테고리 없음2017. 6. 12. 04:12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나도 태을주 읽고 있다"는 말씀을






경주노서 최00 도생님


저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평소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많고 성격도 소심해져서 자신감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직업이 안마사라 같은 일을 하는 안마사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으나,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태을주로 포교하라"는 말씀과 '내가 먼저 태을주 수행을 통해 체험을 가지고 있어야 자신있게 태을주를 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1일 1만독을 목표로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3천독 넘기도 힘들었는데, 휴일을 이용해 하루 종일 집중해서 읽어보니 8천독까지 읽어졌습니다. 


그렇게 한번 8천독을 넘어가고 난 다음은 평소 3천독 읽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게 되었고 좀 더 집중해서 1만독을 꼭 넘어 보리라 생각하고 집중을 했습니다. 


태을주 9천독을 읽었을때 그날 밤 꿈에 할머니께서 나타나셔서 ‘나도 태을주 읽고 있다’ 는 말씀을 해주시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해 1만독을 넘었을 때 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하늘에서 검은구름같은 것이 저에게로 몰려오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그냥 구름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신적인 기운(성령)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 기운이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허름한 집이 새집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운이 또 다른 여러 집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모두 새롭게 되는 것을 보면서 그 기운이 집으로도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사람들 명단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불려졌는데 저의 이름은 불려지지 않아서 부러운 마음으로 하늘 소리를 듣고있는데 나중에 어머니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단아해 보이는 어떤 중년아주머니가 나타나서 아주 굵은 알의 단주를 제게 선물로 주셨는데 저도 모르게 감사의 표시로 읍배를 세번 하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읍배를 하니까

제 몸 안에서 축구공 만한 어두운 기운들이 몸에서 빠져 나가는데, 원과 한 같은 기운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읍배를 올리니까 제 몸이 자꾸 커져서 아주 커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읍배를 올리는데 제 몸이 하늘로 날아올라서 빠르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꿈을 깬 후에도 실제처럼 아주 생생하고 신기한 체험이라 앞으로 더 열심히 태을주 읽어서 저의 두 눈도 완전히 고치고 가족과 이웃들을 많이 살리고 싶습니다. 보은!

Posted by 천연감성
우리 한민족역사2016. 8. 30. 14:16


동명은 신라의 옛 땅

 




삼성기전 상편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옛 땅은 부여의 옛 도읍이다.

고두막한이 을미년 한나라 소왕昭王시에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고 나라이름을 동명이라 일컬었는데 이 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삼성기전 상편>”

 

 

여기서 부여의 옛 도읍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백악산 아사달이다. 삼신오제본기에 의하면 삼신혹설에 은 백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 있어 신라는 그 단어의 머리가 백악산白岳山과 일치한다. 백악산이란 광명이 비추는 산을 의미한다. 더불어 신라는 광명이 환히 펼쳐지는 것을 뜻한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삼한의 민중들이 한수 이남으로 몰려든 때가 바로 도적 위만이 번한을 점령하면서부터다. 이 때 본국은 북부여 해모수 사후 모수리 단군 때의 일이다. 이 때로부터 진한의 백성도 또한 점차로 한수 이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들이 모여 새로이 나라를 이룬 것이 곧 남쪽의 진한이다. 이 때 남삼한은 번한의 유장 상장 탁이 세운 중마한의 명령을 따랐다.

 

다시 말해 남진한의 백성들은 원래 그 중심이 백악산에서 온 이들이다. 진한은 원래 옛 조선의 만주 일대를 가리키니, 고스란히 북부여가 되었고, 이제 그 북부여의 도읍은 백악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백악산 아사달은 신라의 옛 땅이 되니 부여의 옛 도읍지였던 것이다. 신라의 초기 국명이 진한辰韓 또는 사로斯盧. 그리고 그 땅에서 왕이 된 이는 박혁거세다. 원래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파소다.

 

박혁거세가 진한辰韓을 개국한 것이 갑자년이니 이 때 나이가 13세였다. 반면에 고구려의 고주몽은 23세 때는 계해년에 개국하였으니 갑자년이면 24세가 된다.

고주몽의 부인은 소서노이니 고무서의 딸이고, 고주몽이 장가든 나이인 22세와 비슷한 나이였다 하겠다. 실제 나이로 보았을 때 박혁거세는 고주몽보다 10살 정도 어리므로 혁거세의 어머니는 소서노의 고모뻘이 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성도산 성모로 잘 알려진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두막 단군의 딸이자 고무서 단군의 여동생이 된다.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거는 고구려국본기에 파소는 부여 帝室의 딸이었다.”는 기록이다. 이 시기 부여 제실은 곧 동명부여 밖에는 없다.

 

또한 이를 제외하고도 가장 유력한 심증을 낳게 하는 것은 삼성기상편의 기록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고 국명을 동명이라 일컬었는데, 이곳은 신라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음으로, 이는 동명부여에서 신라가 나왔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신라 건국의 주역은 부여 제실의 딸인 파소다.

대진국본기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안라安羅에는 본래 졸본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은 진한 일대에 라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더러 있었음을 뜻한다.

 

더불어 신시본기에 시라尸羅라는 관경이 보이니 고리국의 곁에는 신라新羅가 있었다.

처음 나라를 칭하여 조선朝鮮이라 하고 혹은 삼한三韓이라고 했는데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와 맥이 모두 그 관경이었다. 신시본기>

위 신시본기에 나열된 나라들은 모두가 한반도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고례를 제외한 조선, 마한, 진한, 번한, 고리, 시라, 옥저, 예맥은 모두가 한반도 안으로 들어온 국명들이다. 지명을 더듬어 보면 옛 고리국의 수도는 지금의 서요하 위에 있는 임황이니 지금의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

그리고 주몽 평락 11년 갑오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북옥저는 해성의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동부여는 통하 가섭 연안에 있는 분릉 땅에 있고, 북부여는 웅심산 근처 서란에 있다. 은 서융과 섞여 살던 동이족을 일컬음이고, 는 원래 구려하 서쪽의 좌원坐原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시라尸羅의 지명이 동요하 동쪽 일대의 땅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시라尸羅가 신라新羅일 가능성은 크지만 역사 속에서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파소婆蘇는 눈수嫩水에서 도망쳐 지금의 함흥인 동옥저에 이르고 다시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奈乙村으로 도망갔으니 이곳이 훗날 신라의 수도가 된 금성金城이다.

혹 반론反論으로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徐羅伐은 북부여의 도읍지였던 서란舒蘭의 벌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전북부여前北夫餘의 도읍은 모두가 서란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 외 중론中論으로 나을촌 奈乙村의 나을奈乙이란 단군세기에 판적을 주관하는 이를 那乙이라 하였음으로, 이 나을촌은 나을의 후예들의 촌락으로 진한의 후예가 옳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미 정론으로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중론은 정론에 반하지 않은 것이며, 반론만이 필자의 의견과 배치된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북부여의 역사가 그 만큼 소략되고 멸실됨이 심함이니 존중하고자 하며, 훗날 우리 민족이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내몽골 일대를 모두 되찾았을 때 반드시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돌이켜 보면 파소가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은 그가 삼한을 호령하는 고두막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 힘으로 그의 아들 박혁거세는 남진한왕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곧 신라의 기원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우리 한민족역사2016. 8. 28. 18:08


신라건국 과정에서의 삼국유사의 왜곡




<삼국유사>의 사대적 혈통 왜곡

 

[삼국유사]<감통感通>에는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 황실帝室(나라 8세 소제昭帝9세 선제宣帝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라고 하였고, 또 사소가 처음 중국에서 진한辰韓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파소와 박혁거세의 혈통을 중국 한족 혈통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 유민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 파소와 박혁거세는 부여 황실의 혈통이다. 이러 한 사실은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라고 한 데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삼국사기]<신라본기>

이보다 먼저 조선朝鮮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그러므로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辰韓 유민이다. 중화 한족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다면, ‘나라의 유망민, 진시황의 혹독한 동이족 탄압 정책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와 경주 지방에 정착한 유민이라 할 수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동이 조선족인 것이다.

 

경주시 서북쪽에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인에게는 더없이 신성한 산으로 존숭되었다. 선도산 정상 바로 밑,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유적지와 함께 성모의 위패를 모신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310일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드린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상생출판, 634>

Posted by 천연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