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2017. 8. 7. 01:00




 

 

 

활짝 열리는 AI시대

10억 대의 카메라로 인공지능 도시 구축,

뇌 속의 AI가 기억 복원해 내

 

 

 

지난 5월 9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州 새너제이San Jose에서 열린 ‘GTC(GPU Technology Conference) 2017’에서는 ‘인공지능(AI) 도시’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과 플랫폼들이 소개됐다. GTC는 그래픽칩(GPU) 제조 기업 엔비디아NVIDIA가 매년 AI·자율주행차 등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에서 활약하는 개발자와 전문가들을 초청하는 연례행사다. 엔비디아가 GTC 2017에서 선보인 ‘메트로폴리스 플랫폼Metropolis Platform’은 ‘인공지능 도시’의 구축을 돕는다. 이 플랫폼은 도로 위 카메라들이 인식한 행인·자동차·반려동물 등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학습한다. 도로 위의 수상한 물체나 차량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감지하여 그간 감지한 적 없는 얼굴이나 흉기 등 수상한 물체를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실시간으로 경찰에 통보할 수 있다. 2020년에는 전 세계 대중교통·도로 등 공공장소에 약 10억 대의 카메라가 설치될 것으로 예상한다. 카메라 10억 대는 1초에 약 300억 장, 1시간에 약 100조兆 장의 이미지를 찍는다. ‘메트로폴리스 플랫폼’은 이처럼 방대한 고화질의 이미지와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학습하고 분석한다. 이렇게 ‘딥 러닝deep learning’이 가능한 카메라들은 행인·강아지·자동차 등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이제 실종된 어린이나 반려동물을 찾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행인의 얼굴을 인식해 신원까지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카메라가 차주에게 주차할 구역을 제안해 주어 주차장에서 헤맬 필요도 없다. 슈퍼마켓에서는 손님들의 구매 패턴을 분석하고 재고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24시간 무인 마트도 쉽게 운영할 수 있다.

 


인간이 컴퓨터의 일부가 되고 컴퓨터도 인간의 일부가 된다. 이제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들이 현실이 된다. 뇌와 컴퓨터가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구상을 엘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모터스 최고경영자(CEO)가 현실로 구현하겠다고 나섰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머스크가 ‘뉴럴링크Neuralink’라는 회사를 설립했다고 3월 27일 보도했다. 전기 차 양산에 이어 민간 우주여행, 화성 식민지 개척을 시도하는 머스크가 이번엔 ‘뇌와 컴퓨터가 결합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뉴럴링크는 ‘전자그물망(neural lace)’이란 기술에 주목한다. 이것은 액체 상태의 전자그물망을 뇌에 주입하면 특정 뇌 부위에서 액체가 최대 30배 크기의 그물처럼 펼쳐지는 기술이다. 이 그물망은 뇌세포들 사이에 자리 잡아 전기 신호·자극을 감지할 수 있다. 뇌에 일종의 인공지능(AI) 컴퓨터를 심겠다는 발상의 시작인 셈이다. 머스크는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면 인간은 AI가 시키는 대로 하는 ‘애완 고양이(house cat)’가 될 것”이라며 “전자그물망을 두뇌에 삽입해야 인간이 AI에 지배당하지 않고 공생한다.”고 말했다.

 

뉴럴링크의 우선 목표는 뇌질환 문제 해결이다. 간질·우울증 등 만성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뇌 삽입 물질이 뉴럴링크 최초의 제품이 될 것으로 외신은 전망한다. 나아가 뉴럴링크는 공각기동대처럼 컴퓨터와 뇌를 연결해 인간이 원하는 정보를 뇌에 입력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 기술이 성공하게 되면 반대로 인간의 기억을 PC의 서버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확인할 수 있다. 인지력·사고력 등 뇌의 특정 기능을 향상시키는 ‘뇌 미용 성형 수술’도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뇌 과학 연구가 효과적으로 결합한다면 의외로 빠른 시간 안에 신세계가 열릴 수 있다. 앞으로 뇌에 칩만 심으면 안 배운 외국어도 할 수 있고,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처럼 뇌에 매뉴얼 프로그램을 접속하면 헬기를 처음 타는 사람이 헬기 조종법을 익히는 세상이 펼쳐질 수도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6. 07:00

 






미국의 남북전쟁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후 미국은 점차적으로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1803년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루이지애나Louisiana주를 사들여 국토 규모를 2배로 확장한 것을 시발로, 병합·할양·구매 등을 통해 미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1959년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0개 주가 성립되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영토 확장과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미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American Civil War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쳐야만 했다.

 

흔히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제도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노예 문제는 표면적이고 상징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노예제로 대변되는 남과 북의 생활 방식, 특히 경제 구조의 근본적 차이에 있었다. 이미 17세기부터 미국의 남부는 전원적이며 농업 위주였고, 북부는 도시적이고 공업 위주의 경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남부 지방에서는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하여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북부와 동부지방에서는 제조업과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이 둘이 그런 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라가 커지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북부의 생활 양식이 남부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입지는 자꾸만 좁아져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으로 몰려갔으며, 급기야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의 생활 기반을 붕괴 지경으로 몰아가면서 남부는 앉아서 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연방의회는 이미 북부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1860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남부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노예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링컨Abraham Lincoln이 당선됨으로써 마지막 희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남부 7개주가 반발하며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며,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를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북부에 맞섰다.


1861년 4월 남부의 섬터 요새Fort Sumter 공격으로 남북 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우수한 공업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북부가 우세를 보여 결국 1865년 4월 26일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은 종결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전쟁에도 승리했으나, 1865년 노예해방 반대론자 존 윌크스부스John Wilkes Booth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5. 02:00

 

 




미국의  식민지 시대와

미국의 탄생






오늘날 미국의 역사는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West Indies 발견으로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이 유럽 지역에 소개된 이후, 16세기 유럽 각국은 남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식민지 건설에 주력하게 되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Virginia주에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타운James Town을 건설한 이후 1733년까지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영토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캐나다, 5대호 및 미시시피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식민지들은 계속해서 이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났고 경제도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남부에서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이 세워지고 유럽, 카리브 해 제도, 아프리카 등과의 무역도 활발하였다. 남부 식민지에서 주로 재배한 사탕수수, 담배, 면화 등은 유럽에서 수요가 많은 작물이었는데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남부 농장들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를 구입하여 노동력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 영국은 내전 및 명예혁명과 같은 국내의 혼란과 지리적 거리로 인하여 효과적 식민지 정책 집행에 각종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지역의 식민지들은 영국 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았지만 18세기에 경제성장을 이루며 자치 확대의 욕구가 점차 커져갔는데 이를 억압하려는 영국 정부와의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영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식민지에 부과한 설탕조례Sugar Act(1764)와 인지조례Stamp Act(1765) 등 무리한 세금 정책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급기야 영국에서 수입되는 종이, 차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쉔드 법령Townshend Acts(1767)을 둘러싸고 영국과 식민지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5명의 보스턴 시민이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1770.3.5)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Lexington과 콘코드Concord 전투(Battle of Lexington and Concord)를 계기로 영국과 미 식민지 양자 간의 무력충돌로 발전하였으며, 1775년 5월에 소집된 식민지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버지니아Virginia주 출신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전쟁과 함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인들은 정식군대가 아닌 일종의 민병대로 이루어진 부대였으나, 과거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패배한 프랑스·에스파니아·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 등이 참전해 반反영국 진영에 서면서 영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이러한 독립전쟁의 결과로 드디어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열린 제 3회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개 주의 대표들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 공포하였는데 이 날이 후에 미국독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외국의 원조를 얻어 식민지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1783년 9월 3일에는 파리조약Treaties of Paris이 체결되어 미국의 독립전쟁은 공식 종결이 되고 영국은 미국 13개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미국은 강력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1787년 5월부터 9월에 걸쳐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가 모여 제헌회의를 개최하였고 연방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여 각주에 회부한 결과 13개의 주 중 9주가 비준을 완료함으로써 헌법으로서의 효력이 발생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1789년 연방의회가 구성되고, 1789년 4월 30일에는 독립 전쟁의 영웅인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듬해 수도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정해졌다가 1800년에는 워싱턴Washington으로 옮겨졌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8. 4. 17:45




미국의 국토

연환경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U.S.A.)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서, 영토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유럽과 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통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대서양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태평양 지역, 즉 동아시아와의 관계는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동쪽에는 2,000미터 높이의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이 있고 서쪽에는 해발고도 4,000m 이상의 험준하고 큰 봉우리들이 많은 로키 산맥Rocky Mountains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다. 로키산맥에는 유명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Grand Canyon National Park이 있다. 두 산맥 사이에 펼쳐진 대평원 지역에는 광대한 농경지가 존재하여 기계화 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영토가 크다보니 서부에는 사막Desert도 존재하는데, 도박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Las Vegas도 네바다 주의 사막 한가운데에 있다.

 

기후 역시 다양하다. 중북부와 동부, 오대호 부근은 겨울에는 북극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춥고 눈도 많이 오는 대륙성 기후인데 비해 서부 캘리포니아California 일대는 지중해 지역처럼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겨울에도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작물도 지중해지역처럼 오렌지와 포도를 많이 재배한다.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기후가 좋아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또 하나의 주는 플로리다Florida이다. 햇볕비치는 날들이 많기 때문에 주의별명이 ‘선샤인 스테이트sunshine state’이다. 플로리다 반도 남부에는 아열대기후가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열대식물들이 자라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지역은 온난한 기후로 인해 살기가 좋지만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해 있어 지진地震이 잦은 편이다.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의 많은 건물들을 파괴한 1906년의 지진(진도 7.8)은 역사에서 잘 알려진 지진이다. 미국에서 유명한 자연재해로는 카리브 해 연안에서 발생, 멕시코 만으로 상륙하여 동부 연안을 휩쓰는 열대성 저기압 허리케인Hurricane과 중서부 평원지대에서 빈발하는 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있다.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발생하여 집과 자동차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돌풍인데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기도 한다. 강력한 뇌우를 동반하는 토네이도는 허리케인과는 달리 발생과 진행방향의 예측이 쉽지 않다. 최근 많은 피해를 남긴 허리케인으로는 2005년의 카트리나Katrina를 들 수 있는데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남부의 뉴올리언스 시의 태반을 물에 잠기게 만들고 2,500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강은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이다. 그 이름 자체가 큰 강이라는 뜻이다. 오대호 근처의 미네소타 주에서 발원하여 미국의 중부 평원지대를 구불구불 만곡하여 멕시코 만으로 흘러가는데 길이가 3,700km에 달한다. 지나는 주들이 31개에 달하며 오하이오 강Ohio River, 미주리 강Missouri River, 아칸소 강Arkansas River, 테네시 강Tennessee River, 일리노이 강Illinois River 등 주 이름의 원천이 된 많은 지류를 갖고 있다. 미시시피 강은 철도시대 이전에는 증기선을 통한 중요한 내륙교통로였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들의 무대가 바로 이 미시시피강이다. 미시시피 강에는 몇몇 지역에 얕은 여울이 있어 항해가 어렵지만 연방정부는 운하와 우회수로를 건설하여 선박의 운항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대호의 하나인 미시간 호와 연결하는 운하(1848년 일리노이 미시간 운하)도 건설하였다. 19세기 중엽 철도시대에는 미국에서 철도건설 붐이 불면서 많은 철도가 놓여 졌으나 자동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광대한 자동차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3. 08:30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예수 공자 석가와 함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聖人중의 한사람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네 사람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예수가 약간 늦긴 했지만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고, 모두 남자이며, 돈벌이에는 별로 소질이나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결정적인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그들 모두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천이지 결코 이론이 아니었다. 예수가 주장한 사랑과 용서, 석가의 자비, 공자의 인仁 등은 모두 인간이 행해야 할 실천적 개념들이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일생동안 찾아 헤맨 것도 행위의 절대적 기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러한 윤리적 문제를 행동을 통해 직접 스스로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이 윤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목숨을 건 실천이야말로 그들의 이름이 빛나게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나 과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면 소위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정치제도란 있을 수 없으며, 과학에 있어 절대적 진리란 없기 때문이다.

 

기원전 339년, 71세에 독약을 마시고 평소에 주장하던 ‘영혼의 나라’로 돌아간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튀어나온 눈과 작은 키, 그리고 들창코에 대머리를 연상하게 되지만 그러한 외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악녀로 유명한 아내를 사랑한 애처가 였으며, 2박3일을 한자리에서 사색을 할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겨울에도 맨발에 얇은 외투를 걸쳤을 뿐이며, 말술에도 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사형장에서 독배를 마실 때 그의 아내가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다는데 이는 그의 탁월한 건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만큼 그의 아내 이름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처로 기록된 크산티페와 한평생(소크라테스가 50세에 결혼하였으니 사실은 20년)을 살았다는 것은 그의 인내심이 신적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친구들이 그에게 ‘자네같이 똑똑한 친구가 왜 크산티페 같은 악처와 사는가’ 라고 물었을 때, “크산티페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여자와도 결혼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서 그의 유머감각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담장 밑에서 동네청년과 철학적 담론을 즐기고 있을 때 크산티페는 담장 너머로 구정물을 끼얹었다고 한다.

 

4대 성인 중 나머지는 다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지만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예외다. 그는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여전히 위대한 철학자로, 사상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세 사람에 비해서 소크라테스의 레테르는 조금 딸린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예수를 기록한 『성경』은 세계 최대 베스트셀러이며, 불교의 경전이나 유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며 우리 문화의 한 틀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다. 그는 철학자라는 돈 안되는 직업을 가진(실제 직업은 좋게 말해서 조각가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석공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평민이었다. 아테네에서 열리는 모든 술자리에 기어코 참석하였으며, 매춘부와 잠자리도 거절하지 않았다. 시장이나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는 언제나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았던 그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너 자신을 알라” 라는 한마디를 통해서이다. 그래도 이 말 한마디 때문에 4대성인으로서 소크라테스는 겨우 체면을 살리게 되었다. 사실 할아버지의 유언은 몰라도 이 말은 누구나 알며, 영어시간만 되면 눈이 감기는 시절에도 “Know yourself"는 유창하게 발음하였다. 또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이 말을 인용하기까지 하였다. 필자도 어릴 때 종종 인용하였는데 그 때는 “니 꼬라지를 알라”는 말로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역시 성인의 말은 세월이 가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말의 의미는 소크라테스가 전하려고 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원래 뜻을 모르고 단지 그 문장의 의미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는 순간 바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보통 소크라테스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처음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당시 델포이 아폴론신전 현관기둥에 씌어져 있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의 정치인이나 문학가, 법률가 등 지식인들을 향해 “너 자신을 알라”라고 겁 없이 외쳐대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행동은 무모한 짓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곧 그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국가에서 인정한 신을 섬기지 않았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재판 결과 독미나리즙 한 사발을 받게 되었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기에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게 되었는가?

 

 


 

당시 그리스에서 활동하던 지식인들을 소피스트(sophist)라고 부른다. 물론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 중의 한사람일 것이다. 실재로 그는 소피스트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소피스트들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사상을 가진 자였고 그래서 소피스트가 아닌 철학자로 분류되었다. 그가 소피스트들과 구별되는 것은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주장하지 않고 절대적인 진리를 찾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델피Delphi 신탁의 예언을 들었다. 카이레폰이 델피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가 있는가’ 라고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진리탐험은 여기서 시작된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신이 가장 현명한 자라는 신탁의 대답은 그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본 검객 미야모토무사시(宮本武將)가 자신보다 고수를 찾아 일본열도를 헤맨 것처럼, 자신보다 더 현명한 자를 찾기 위해 아테네의 일류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이 자신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면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대답이 오류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당시 지식인들에게 던진 질문은 “용기勇氣란 무엇인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선善이란 무엇인가?” 등등의 윤리적 개념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신에 대한 불경죄로 고발되었기 때문에 ‘경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문 : 경건이란 무엇인가?

 

    답 : 잘못한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다.

 

    문 :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경건한 행동들 중 한 두 가지를 말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경건한 행동들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경건성의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답 : 신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경건한 행동이다.

 

    문 : 신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한 신에게 기쁜 것이 다른 신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답 :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이며, 모든 신이 싫어하는 것이 불경이다.

 

    문 : 신들은 어떠한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그 행동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신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행동은 경건한가?

 

    답 : 경건은 신들에게 바쳐야할 정성과 관계가 있다.

 

    문 : 어떠한 종류의 정성이 신에게 바쳐져야 하는가?

 

    답 : 소크라테스 난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이쯤 되면 바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방식을 변증술, 대화법, 산파술 등으로 부른다. 질문에 대답을 하였으나 소크라테스는 그 대답이 정답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다시 대답을 하도록 계속 유도한다. 상대방은 자신이 아는 대로 대답하였지만 사실은 그의 대답은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듣고자 한 것은 용기나 경건, 선 등의 윤리적 개념이 적용되는 갖가지 구체적 행동의 사례가 아니라 그 개념 본래의 의미였다. 경건한 행위가 아니라 ‘경건 그 자체’, 즉 모든 경건한 행위를 경건한 행위라고 생각하게 하는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경건성’(이를 우리는 경건의 ‘정의定義’라고 부른다), 즉 영원불변하는 경건의 이데아에 대해서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 당시 지식인들과의 문답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현명한 자인 이유를 깨닫게 된다. 당시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그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소크라테스 자신도 진리를 알고 있지는 못했다. 단지 그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자였다. 왜냐하면 진리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역설이 드러난다. 즉 자신은 자신이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면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으므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무지(無知)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진리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 스스로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 때(無知의 知), 그는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무지의 자각은 단순히 인식의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에서 더욱 중요하다.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무지로 인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신발 만드는 법을 알 때 그는 좋은 신발을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용기가 무엇인지 알 때 그는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善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는 곧 악덕惡德이다. 소크라테스에 있어서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은 바로 올바른 행위를 하는 것, 즉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개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가 바로 진리였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앎으로써 그에 따른 실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 철학이 갖는 위대성이다. 보통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한마디로 주지주의(主知主義),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소피스트의 변명을 들어보자. 당시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은 소피스트들로서는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란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의 대표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인간이 바로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즉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진리의 기준이 서로 달랐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자신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무식한 인간으로 낮추어 보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여름에도 내가 춥다면 추운 것인데 그걸 거짓이라고 몰아세우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를 그냥 두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멜레토스Meletos에 의해 고발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니 그는 자유인이 되어 영혼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에게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으니까.

 

플라톤이 스승의 재판을 지켜보고 쓴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마지막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변론을 끝맺는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중에 어느 편이 더욱 좋은 일을 만날는지, 그건 신밖엔 아무도 모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2. 07:30






 

 

알아두면 든든한 고사성어

覆水難收복수난수

 

 


 

 

오늘의 한자 ‘覆水難收(복수난수)’에서, ‘覆(복)’은 ‘엎어지다’, ‘뒤집히다’는 뜻이다. ‘넘어질 전(顚)’자와 결합된 ‘顚覆(전복)’은 ‘뒤집혀서 엎어지다’는 뜻이고, ‘뒤칠 번(飜)’자와 결합된 ‘飜覆(번복)’은 ‘이리저리 뒤쳐서 고치다’, ‘뒤집다’는 뜻이다.

 

 

 

‘水(수)’는 ‘물’을 말한다. ‘水滴石穿(수적석천)’이란 말이 있는데, ‘물방울 떨어질 적(滴)’자, ‘돌 석(石)’자, ‘뚫을 천(穿)’자로 구성된 이 말은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지면 돌이 뚫린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꾸준하게 오랫동안 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비유하는데 쓴다.

 

 

 

‘難(난)’은 ‘어렵다’는 뜻이다. ‘관문 관(關)’자와 결합된 ‘難關(난관)’은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을 말하며 ‘어려운 고비’를 비유하여 쓰인다. ‘풀 해(解)’자와 결합된 ‘難解(난해)’는 ‘풀기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收(수)’는 ‘거두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담다’로 번역한다. ‘가을 추(秋)’자와 결합된 ‘秋收(추수)’는 ‘가을에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뜻하여 ‘가을걷이’를 말하고, ‘돈’을 의미하는 ‘쇠 금(金)’자와 결합된 ‘收金(수금)’은 ‘받을 돈을 거두어들이다’는 뜻이다.

 

 

 

그래서 ‘복수난수’는 ‘엎질러진 물은 되 담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 성어는 『습유기(拾遺記)』란 책에 나온다.

 

『습유기』는 중국의 전설을 모은 지괴서이며, 작자는 동진(東晋) 때의 왕가(王嘉)이다. 이 책은 신선(神仙)과 방술(方術)을 선전하는 내용을 10권으로 엮은 책이며, 『왕자년습유기(王子年拾遺記)』라고도 한다.

 

왕가(王嘉)는 자가 자년(子年)으로 동진과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 350-394) 때에 활동하였으며 농서(隴西) 안양(安陽; 지금의 감숙성 위원) 사람이다.

 

 

 

강태공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낚시꾼을 떠올릴 것이다. 이야기의 소재는 바로 그 강태공이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을 훌쩍 넘긴 주(周) 나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 나라를 세운 사람이 무왕(武王) 희발(姬發)이라고 하나 실제로 주 나라의 건립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무왕의 아버지 문왕(文王) 희창(姬昌)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연의』에서, 삼국시대의 위(魏)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무제(武帝) 조조(曹操; 155-220)와 문제(文帝) 조비(曹丕; 187-226)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공식적으로 위 나라를 세운 사람은 아들 조비이지만 실제로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은 아버지인 위왕 조조였던 것이다.

 

참고로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국지』는 실제로 『삼국지연의』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삼국지(三國志)』는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정통 역사서 즉 정사(正史)이고, 『삼국지연의』가 바로 명대 초기의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에서 삼대(三代)라고 하면 상고시대의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를 가리킨다. 상나라는 후에 도읍이 은허(殷墟)로 옮겨지면서 은(殷)나라로 불리게 된다. 그 상나라 말기에 지혜가 풍부하고 계략이 많은 한 인물이 있었다. 이 사람의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이며, 자는 자아(子牙)라고 한다. 주 민족의 지도자 희창에게 중용되기 위하여 그는 항상 위수(渭水)가에서 미끼 없는 곧은 낚시를 강물에 드리우고 남보란 듯이 낚시를 하였다. 성이 희(姬)요, 이름이 창(昌)인 희창은 당시 서방 제후의 패자란 의미로 서백(西伯)으로 불렸다.

 

강태공이 만날 온종일 낚시만을 하러 가기 때문에 집안의 생계는 늘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마(馬)씨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너무 싫었고 미래도 불확실하자 강태공과 함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나려고 하였다. 강태공은 아내에게 떠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만류하면서 지금은 가난하게 살지만 때가 되면 부귀해질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마씨는 그가 빈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여기고 아무 말도 믿지 않았다. 강태공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그녀가 떠나가도록 했다.

 

훗날 강태공은 마침내 서백의 신임과 중용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을 잠깐 이야기하자.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겠다. 하루는 서백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점을 쳤다. 점괘는 이러하였다.

 

“얻는 것은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고, 범도 아니고, 곰도 아니다. 얻는 것은 바로 패왕(覇王)을 이루게 해 줄 보필자이다.”

 

서백이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의 남쪽에서 강태공을 만났다. 강태공과 얘기를 나누어 본 서백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 태공께서 ‘성인이 주(周)에 가면 주가 흥성하리라’라고 하셨는데, 선생이 바로 그 분이시군요! 우리 아버지 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리신지 오래되셨습니다.”

 

그리고는 수레를 함께 타고 돌아와 강태공을 스승으로 삼았다.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에서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후에 그는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즉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에 제후로 봉해져 그곳의 시조가 되었다.

 

마씨는 그가 부귀를 누리고 또한 지위가 높아진 것을 보고 당초에 그를 떠난 것을 후회하였다. 이윽고 마씨는 강태공을 찾아와 옛날처럼 부부로 살자고 간청했다.

 

강태공은 이미 마씨의 사람됨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부부의 연을 잇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물 한 병을 땅에 쏟으면서 마씨에게 주워 담아보라고 하였다.

 

마씨는 재빨리 엎드려서 물을 주워 담았으나 약간의 진흙물만을 담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태공이 냉랭하게 마씨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미 나를 떠났기 때문에 다시는 함께 합칠 수가 없소. 이는 땅에 떨어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소.”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고금을 통해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한나라 무제(武帝: 기원전141-기원전87) 때 승상을 지낸 주매신(朱買臣)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도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강태공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하면, 그는 동해 사람이다. 동해는 당시 동이족이 살던 곳이다. 순 임금과 우 임금 시절에 그의 조상이 공을 세워 여(呂)라는 곳에 봉해져 여상(呂尙)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70세까지 평범하게 살다가 70세부터 80세까지 10년 동안 서백을 기다리기 위하여 위수가에서 낚시를 드리웠다고 한다.

 

그래서 강태공과 관련해서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는 말도 있다. ‘궁할 궁(窮)’자를 쓰는 궁팔십은 강태공이 서백을 만나기 이전 80년 동안의 궁핍한 생활을 이름이요, ‘달할 달(達)’자를 쓰는 달팔십은 강태공이 왕조 개창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80년 동안 풍족한 삶을 산 것을 말한다.

 

 

 

우리 속담의 ‘쏘아 놓은 화살이요 엎지른 물이다’ 혹은 ‘깨진 거울은 다시 비춰지지 않는다’를 떠오르게 하는 이 성어는 한 번 저지른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음을 말해 준다. 일반적으로 한 번 헤어진 부부나 친구는 다시 결합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성어로는 ‘어려운 난(難)’자 대신 ‘아닐 불(不)’자를 쓰는 ‘복수불수(覆水不收)’가 있고, ‘돌아올 반(返)’자, ‘동이 분(盆)’자를 써서 ‘엎질러진 물은 물동이에 되 담을 수 없다’는 뜻을 가진 ‘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 ‘잔 배(杯)’자를 써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覆杯之水(복배지수)’ 등이 있다.

 

 

 

또한 유사한 성어로는 ‘이미 쏜 화살’이라는 ‘이발지시(已發之矢)’, ‘시루가 이미 깨졌다’는 뜻의 ‘甑已破矣(증이파의)’, ‘한번 떨어진 꽃은 나뭇가지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낙화불반지(落花不返枝)’ 또는 ‘낙화난상지(落花難上枝)’, ‘깨어진 거울은 다시 비추지 못한다’는 ‘파경부조(破鏡不照)’, ‘깨진 거울 조각을 들고 하는 탄식’이라는 뜻의 ‘파경지탄(破鏡之歎)’ 등이 있다.

 

 

 

【단어】

 

覆(복): 엎어지다. /(덮을아)부, 총18획, fù/

 

水(수): 물. /水(물수)부, 총4획, shuǐ/

 

難(난): 어렵다. /隹(새추)부, 총19획, nán/

 

收(수): 거두다. /(등글월문)부, 총6획, shōu/

 

 

 

【출전】

 

동진(東晋) 때 왕가(王嘉)의 『습유기(拾遺記)』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8. 1. 02:00






 

 재미있는 한자

三人成虎 삼인성호

 

 

 

 

 

오늘의 한자 ‘三人成虎삼인성호’에서 ‘三삼’은 숫자 ‘3’을 뜻한다. ‘세 가지 효도’라는 뜻의 ‘三孝삼효’라는 말이 있다. 제일 큰 효는 부모가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하는 것이고(尊親존친), 그 다음은 부모의 명성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弗辱불욕), 맨 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다(能養능양).

 

 

 

‘人非木石인비목석’이라는 말이 있다. ‘人인’은 ‘사람’을 말한다. ‘아닐 비非’, ‘나무 목木’, ‘돌 석石’자로 이루어진 ‘人非木石’은 ‘사람은 목석이 아니다’는 뜻이다. 사람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成성’은 ‘이루다’는 뜻이다. ‘모양 형形’자와 결합된 ‘形成형성’은 ‘어떤 모양을 이루다’는 뜻이고, ‘합할 합合’자와 결합된 ‘合成합성’은 ‘둘 이상을 합쳐서 하나를 이루다’는 뜻이다.

 

 

 

‘虎호’는 ‘범’, ‘호랑이’를 말한다. ‘가죽 피皮’자와 결합된 ‘虎皮호피’는 ‘호랑이의 털가죽’을 말하고, ‘용 룡龍’자와 결합된 ‘龍虎용호’는 ‘용과 범’이라는 뜻으로 ‘실력이 비슷한 두 영웅’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삼인성호’는 ‘세 사람이 호랑이를 이루어낸다’는 뜻이다. 헛소문이나 와전된 말이 여러 차례 중복해서 나타나면 듣는 사람이 진짜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음을 비유해서 쓴다.

 

 


 

이 말은 『전국책戰國策』「위책魏策」에 나오는 말이다. 『전국책』은 중국 전국시대의 작품으로 원저자는 알 수 없으며 서한西漢 때 유향劉向(서기전77-서기전6)이 편찬하였다. 주로 중국 전국시대에 활약한 책사策士와 모사謀士들의 문장을 모아 놓았다. 서주西周동주東周진秦제齊초楚조趙위魏한韓연燕송宋위衛중산中山 등의 12책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나라 원왕元王(?-서기전469)에서부터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서기전259-서기전210)까지 2백40여 년간 살았던 여러 인사들의 주장이 실려 있다.

 

‘삼인성호’라는 고사의 내용은 이러하다.

 

 

 

중국 전국시대에 위魏나라 혜왕惠王(서기전400-서기전319) 때의 일이다. 위나라의 태자가 인질이 되어 조趙 나라의 도성인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위나라 혜왕은 중신 방총龐葱을 파견하여 태자를 모시고 가도록 결정하였다.

 

방총은 역사상 유명한 손빈孫臏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서기전400-서기전320)에게서 병법을 배운 방연龐涓(?-서기전341)의 조카이다.

 

방총은 줄곧 혜왕의 신임을 얻어왔으나 조 나라로 떠난 뒤 누가 등 뒤에서 자신에 대한 나쁜 말을 하여 혜왕이 자신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길을 떠날 때 일부러 궁궐로 가서 혜왕에게 물었다.

 

“대왕, 만일 어떤 사람이 대왕께 아뢰기를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한다면 대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혜왕이 즉시 대답하였다.

 

“나는 물론 믿지 않소.”

 

방총이 이어서 물었다.

 

“만약 두 번째 사람이 대왕께 아뢰기를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한다면 대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혜왕이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반신반의할 것 같소.”

 

방총이 다그치듯 이어서 물었다.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대왕께 아뢰기를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한다면 대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혜왕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였다.

 

“그땐 믿을 것이오.”

 

방총이 이 상황을 분석하여 말하였다.

 

“길거리에 호랑이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그곳에 호랑이가 있다고 말하면 호랑이가 있는 것이 됩니다(夫市之無虎明矣, 然而三人言而成虎.) 이제 저는 태자를 모시고 한단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우리 도성인 대량大梁과의 거리는 궁궐에서 저자거리와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멉니다. 게다가 등 뒤에서 제가 옳지 않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세 사람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금후에 이러한 말들을 잘 살펴서 가볍게 믿지 마시옵소서.”

 

혜왕이 마지못해서 말하였다.

 

“공의 뜻을 잘 알겠소. 공은 염려 말고 태자를 모시고 갔다 오시오.”

 

방총이 조 나라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과연 혜왕에게 그에 관한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 혜왕은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그에 관한 험담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혜왕은 마침내 그들의 말을 믿게 되었다.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같은 사실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이해능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남의 말을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총명한 사람이 된다. ‘총명聰明’은 ‘귀 밝을 총聰’자에, ‘눈 밝을 명明’자이다. 귀가 밝아야 시비를 정확히 분별할 수 있고, 눈이 밝아야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 고사에서 보듯이, 세 사람이 저자거리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진짜라고 믿게 할 수 있다. 헛소문이나 와전된 말이 여러 차례 중복해서 나타나면 듣는 사람이 진짜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게 된다는 말이다.

 

이 성어는 ‘저자거리’를 의미하는 ‘市시’자를 써서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라고도 한다.

 

 

 

【단어】

 

三삼: 셋. /一(한일)부, 총3획, sān/

 

人인: 사람. /人(사람인)부, 총2획, rén/

 

成성: 이루다. /戈(창과)부, 총7획, chéng/

 

虎호: 범. 호랑이. /(범호밑)부, 총8획, hū/

 

 

 

【출전】

 

『전국책戰國策』「위책魏策」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31. 13:00





 

고사성어

塞翁之馬새옹지마

 

 

 

 

 

  오늘의 한자 ‘塞翁之馬새옹지마’에서, ‘塞새’는 변방, 변경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의 북쪽 변경을 말한다. 특히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塞北새북’이라고 한다. 이 글자가 ‘막다’는 의미로 쓰이면 ‘색’으로 읽는다. 예를 들면 동의어 ‘窒질’과 결합된 ‘窒塞질색’은 ‘몹시 싫어해서 기가 막히다’는 뜻이다.

 

 

 

  ‘翁옹’은 ‘노인’이라는 말로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도 성 뒤에 붙여 ‘김옹’이니, ‘최옹’이니 하는 표현을 쓴다. 그러니 ‘새옹’은 ‘변방에 사는 노인’이라는 의미가 된다.

 

‘지之’는 한정어와 중심어 사이에 쓰는 구조조사이다. 본문에서는 한정어 ‘새옹’과 중심어 ‘마’ 사이에서 ‘-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馬’는 ‘말’이다. 우리말의 ‘말을 타다’는 의미로 ‘乘馬승마’와 ‘騎馬기마’란 한자어가 있다. ‘乘승’은 ‘오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말에 오르다’는 뜻이고, ‘騎기’는 ‘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새옹지마’는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새옹지마’는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고사는 《회남자淮南子》〈인간훈人間訓〉편에 나온다.

 

  《회남자》는 중국 전한前漢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서기전179-서기전122)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책이다. 회남왕이란 중국 고대의 왕작王爵 봉호封號 명칭이다. 역대로 이 봉호를 받은 사람은 20여 명이라고 한다. 유안은 우리가 잘 아는 고조 유방劉邦(서기전256-서기전195)의 손자이다. 유안이 소비蘇飛, 이상李尙, 좌오左吳, 전유田由, 뇌피雷被, 모피毛被, 오피伍被, 진창晉昌 등 이른바 ‘팔공八公’ 등과 함께 편찬한 이 책은 도가 사상을 위주로 해서 유가법가음양가 등의 학설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그래서 잡가雜家로 본다.

 

 

 

  자 그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자.

 

 

 

  옛날 중국의 서북쪽 변방 요새 부근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기르는 말이 갑자기 변방 밖으로 달아나서 찾을 길이 없었다. 이 때문에 아들은 큰 낙심을 하였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일을 알고 난 후, 모두 와서 그를 위로하며 그렇게 병이 날 정도로 너무 지나치게 상심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말 주인의 아버지는 오히려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말 한 필을 잃어버린 것이 좋은 일이 될지 어찌 알겠소?”

 

  사람들은 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묻기가 곤란하여 할 수 없이 돌아갔다.

 

  수개월이 지난 후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달아났던 말이 홀연히 돌아왔던 것이다. 게다가 키가 크고 몸집이 큰 준마를 한 필 데리고 왔다. 인근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축하를 하였으며 아울러 노인이 이전에 한 말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의 축하에 대해 기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냉랭하게 말했다.

 

  “달아난 말이 돌아왔고 또 준마 한 필을 데리고 왔지만 이것이 좋지 않은 일이 될지 어찌 알겠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의혹이 생기며 답답하였다.

 

  ‘이 노인은 너무 괴상하다. 분명히 좋은 일인데 어째서 또 좋지 않은 일을 생각하는 것일까?’

 

  노인의 말은 또 한 번 적중했다. 노인의 아들은 그 준마를 매우 좋아해서 항상 타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 말을 타고 방심하다가 떨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불행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또다시 모두 위문을 하러 왔다. 사람들이 예상 외로 노인은 또다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였다.

 

  “다리뼈가 부러진 것이 좋은 일이 될지 어찌 알겠소?”

 

  과연 일 년 후에 변방 바깥에 사는 흉노가 군대를 이끌고 침입을 하였다. 노인의 집 인근에 사는 젊은이들은 모두 국가의 부름에 응해 군대에 가서 전쟁을 하였다. 그 결과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전사하는 바람에 여느 집안의 노인들은 돌봐줄 사람이 없게 되었으며, 어떤 노인들은 이 때문에 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졌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았으며 따라서 노인과 함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새옹지마’는 세상만사는 변화가 많아 어느 것이 화禍가 되고, 어느 것이 복福이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인생人生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어 변화가 많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시적인 손실을 입더라도 이로 인해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또 세상일이란 변화가 많아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할 수 있음을 종종 경험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즉 ‘잃다’는 의미의 ‘실失’자를 써서 ‘새옹실마塞翁失馬’라고 한다. 이 말은 ‘변방의 노인이 말을 잃다’라는 뜻이다.

 

또 이 말은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라고도 쓰며, 새옹득실塞翁得失·새옹화복塞翁禍福 또는 단순히 새옹마塞翁馬라고도 한다.

 

 

 

  【단어】

 

  塞새: 변방. /土(흙토)부, 총13획, sàì/

 

  翁옹: 늙은이. /羽(깃우)부, 총10획, wēng/

 

  之지: 조사. /丿(삐침)부, 총4획, zhī/

 

  馬마: 말. /馬(말마)부, 총10획, mǎ/

 

 

 

 【출전원문】『회남자淮南子』「인간훈人間訓」

 

 夫禍福之轉而相生, 其變難見也.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能爲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髀.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30. 09:30






 사자성어

朝三暮四 조삼모사

 

 

 

 

 

   금주의 한자 ‘朝三暮四조삼모사’에서,

 

   ‘朝조’는 ‘아침’이라는 말이다. ‘저녁 석夕’자와 결합된 ‘朝夕조석’은 ‘아침과 저녁’이란 뜻이고, ‘책 펴낼 간刊’자와 결합된 ‘朝刊조간’은 ‘아침에 발행하는 신문’을 말하고, 저녁 신문은 ‘夕刊석간’이라고 한다.

 

   ‘三삼’은 숫자 ‘3’을 말한다. ‘잊을 망忘’자를 쓰는 ‘三忘삼망’이란 말이 있는데, 장수가 출정해서 전투에 임할 때 잊어야 할 세 가지 일을 말한다. 즉 출정의 명령을 받은 날엔 집을 잊고(忘家), 전투가 벌어질 때는 부모를 잊고(忘親), 북소리가 급박할 때는 자기 몸을 잊어야 한다(忘身)는 것이다.

 

‘暮모’는 ‘저녁’을 뜻한다. ‘朝令暮改조령모개’라는 자주 쓰인다. ‘명령 령令’자, ‘고칠 개改’자로 구성된 이 말은 ‘아침에 명령을 내렸다가 저녁에 다시 고친다’는 뜻으로 법령을 자주 고쳐서 갈피를 잡기가 어려움을 이른다.

 

   ‘四사’는 숫자 ‘4’를 말한다. ‘근심 환患’자를 쓰는 ‘四患사환’이란 말이 있는데, 정치를 하는데 네 가지의 폐단이란 뜻이다. 즉 ‘거짓’을 뜻하는 ‘僞위’, ‘사사로움’을 뜻하는 ‘私사’, ‘방종’을 뜻하는 ‘放방’, ‘사치’를 뜻하는 ‘奢사’를 일컫는다.

 

 


 

   조삼모사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의미이다. 원래는 수단을 사용해서 남을 잘 우롱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나중에는 수법을 바꾸어서 남을 속이거나 혹은 생각이 정해지지 않고 반복무상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 이 말은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하거나 남을 농락하여 자기의 사기나 협잡술 속에 빠뜨리는 행위를 이르는 말로도 사용된다.

 

 

 

   이 말은 《열자列子》〈황제黃帝〉편에 나온다. 여기서 잠깐 《열자》라는 책이 어떤 책인가 알아보자.

 

   초기 황로도가老道家의 경전에 속하는 이 《열자》라는 책은 열어구列御寇 즉 열자가 썼다고 전해지는데, 사실은 중국 전국시대 초기에 열자와 그의 제자 및 후학이 지은 것이다. 이 책은 사상적으로 도가와 매우 가까우며, 후에 도교에서 경전으로 받들었다. 전한 초기에 매우 성행하였으나 한 무제 유철이 백가를 물리친 후에 민간에서만 관심을 받다가, 서진 시기에 다시 중시되었으며 당송唐宋 시기에 이르러서는 정점에 도달했다. 당 고종高宗 이치李治는 건봉乾封 2년인 667년에 노자老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로 존봉하였으며 현종玄宗 이륭기李隆基는 개원開元 25년인 737년에 현학박사玄博士를 설치하고, 《노자老子》, 《열자列子》, 《장자莊子》, 《문자文子》를 필독서로 지정하였는데, 당시에 이를 ‘사현四玄’이라고 불렀다. 또 천보天寶 4년인 745년에는 열어구冲虛眞人으로 추봉하였고, 《열자》를 《충허진경冲虛眞》으로 격상시켰다. 송대에 와서, 진종眞宗 조항趙恒은 ‘충허’ 뒤에 다시 ‘지덕至德’이라는 두 글자를 덧붙여 《충허지덕진경冲虛至德眞》이라고 불렀다. 휘종徽宗 조길趙佶은 정화政和 6년인 1116년에 《황제내경黃帝內經》, 《도덕경道德經》(즉 《노자》), 《열자》, 《장자莊子》에 대해 박사를 설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렇게 중시된 《열자》는 쉽고 우아한 산문으로 쓰여졌으며. 우언寓言을 통해서 사람에게 지혜를 열어주고, 많은 예지叡智와 철리哲理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조삼모사의 이야기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서 도가의 대표 인물인 장주莊周(서기전369-서기전286)의 저작인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도 나온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송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에는 원숭이 떼를 기르는 노인이 한 명 있었는데, 사람들은 원숭이 ‘저狙’자를 붙여서 그를 ‘저공狙公’이라고 불렀다. 저공은 가정 형편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원숭이를 매우 좋아해서 차라리 자신이 먹는 것을 줄이고 쓰는 것을 절약하며 돈을 벌어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사 줄지언정 이제까지 한 번도 원숭이들의 배를 굶게 한 적이 없었다.

 

   저공과 원숭이들은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냈으며 서로 간에 사이가 매우 좋았다. 원숭이들이 무엇을 생각하면 저공은 원숭이를 보는 순간 곧바로 그들의 생각을 알았으며, 저공이 무엇을 말하면 원숭이들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저공은 원숭이들의 먹이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원숭이들의 먹성이 대단해서 한도 끝도 없이 먹어대니 마침내 저공은 먹이를 공급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원숭이들의 먹이를 줄이려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원숭이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하나의 꾀를 생각해냈다.

 

   얼마 후 저공이 원숭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다.

 

   “앞으로 너희들에게 도토리를 줄 때,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면 되겠니?”

 

원숭이들은 이 말을 듣고 도토리를 적게 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날뛰면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저공이 말투를 바꾸어서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아침에는 네 개를 주고 저녁에는 세 개를 주겠다. 이렇게 하면 충분하지?”

 

이 말을 들은 원숭이들은 모두 도토리를 많이 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땅에서 펄쩍 뒤며 기뻐했다.

 

 

 

 

 

【단어】

 

朝조: 아침. /月(달월)부, 총12획, cháo/

 

三삼: 3. 셋. /一(한일)부, 총3획, sān/

 

暮모: 저물다. /日(날일)부, 총15획, mù/

 

四사: 4. 넷. /(큰입구몸)부, 총5획, sì/

 

 

 

【출전】

 

《열자列子》〈황제黃帝〉

 

宋有狙公者, 愛狙, 養之成, 能解狙之意; 狙亦得公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匱焉, 將限其食. 恐衆狙之不馴於己也, 先誑之曰: “與若茅, 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茅, 朝四而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物之以能鄙相籠, 皆猶此也. 聖人以智籠愚, 亦猶狙公之以智籠衆狙也. 名實不虧, 使其喜怒哉.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 何謂‘朝三’? 狙公賦茅,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9. 11:00






 

脣亡齒寒순망치한

 

 

 

  금주의 한자 ‘脣亡齒寒순망치한’에서

 

  ‘脣순’은 ‘입술’을 뜻하며, ‘입술과 이’를 ‘이 치齒’자를 써서 ‘脣齒순치’라고 한다. 후에 ‘입구口부’의 ‘순’자를 쓰기도 하나 양자는 형체만 다를 뿐 자음과 의미는 똑같은 이체자 관계이다.

 

  ‘亡망’은 ‘잃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잃는 것’을 ‘나라 국國’자를 써서 ‘亡國망국’이라 하고, ‘망해서 없어지는 것’을 ‘멸망할 멸滅’자를 써서 ‘滅亡멸망’이라 한다.

 

  ‘齒치’는 ‘이’를 뜻한다. 갑골문을 보면, 원래는 입속의 이를 본뜬 상형문자였는데, 전국시대에 소리를 나타내는 성부 ‘止지’자가 추가되어 형성문자로 변했다. 보통 ‘이’를 ‘齒牙치아’라고 표현하는데, 원래 ‘齒치’는 ‘앞니’를 가리키고, ‘牙아’는 ‘어금니’를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구별 없이 쓰게 되었다.

 

  ‘寒한’은 ‘차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시리다’로 번역한다. ‘추위와 더위’를 ‘더울 서暑’자를 써서 ‘寒暑한서’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순망치한’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뜻이다.

 

  이 성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5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는 공자가 노魯나라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를 기록하면서 선악善惡을 논하고 명분과 대의를 밝혀서 후세에 존왕尊王의 길을 가르친 책이다. 이 책은《시경》, 《서경》, 《주역》, 《예기》와 함께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춘추》를 해설한 책으로는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씨전》, 공양고公羊高의 《춘추공양전》, 곡량적穀梁赤의 《춘추곡량전》 등이 정평이 있는데, 이를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한다. 즉 《춘추좌씨전》은 좌구명이란 사람이 이 《춘추》를 해석한 책으로 인물묘사가 정확하여 사학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나 고문古文의 모범이 되는 책이다.

 


  순망치한에 얽힌 이야기는 기원전 658년경 춘추시대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다.

 

  흔히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두 시대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춘추시대는 주 왕조가 동쪽으로 천도한 동주시대 전기, 즉 기원전 770년부터 약 삼백년 동안인 기원전 476년까지를 말하고, 전국 시대는 춘추시대 후 기원전 476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약 250년간 지속된 시기를 말한다. ‘춘추春秋’라는 명칭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유래하였고, ‘전국戰國’이라는 명칭은 당시의 여러 나라 사료를 편집하여 완성한 《전국책》에서 유래하였다.

 

  이 시기동안 중국에서는 중원대륙의 패권을 잡기위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다.

 

춘추시대에는 무력으로 천하의 패권을 잡은 다섯 명의 패자가 있었는데 이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부른다. 춘추오패는 일반적으로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왕吳王 합려闔閭,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말한다, 이들은 제후이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무력으로 제패하여 천하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본 고사는 기원전 658년에서 기원전 655년 사이에, 중국 춘추시대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제나라 환공은 중원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고, 초나라 성왕(成王)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이때 진晉나라의 문공도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지형조건이 나빠 산과 강에 의해 길이 막혀 있었다. 진나라 남쪽 중조산中條山 아래는 우虞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고, 이 우나라 남쪽의 황하가에는 괵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니다. 진나라가 만약 우와 괵을 복속시킨 후에 그곳에 거점을 두고 중원에 진출하면 공격하기도 수월하고, 지키기도 쉬웠다. 그러나 우와 괵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지세가 워낙 험한데다 길이 좁고 강폭이 넓어서 쉽게 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진나라는 어떻게 했을까?

 

   진나라는 괵나라와 우나라를 함께 칠 목적으로 먼저 괵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진나라 군사가 괵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우나라를 거쳐야만 했는데, 만일 우나라가 출병을 해서 저지하거나 심지어 괵나라와 연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한다면 진나라의 목적은 달성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대신들과 상의한 진나라의 헌공獻公은 대부 순식荀息의 계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순식의 계책은 다음과 같았다.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천리마 네 필과 세상에서 가장 값나가는 옥 한 쌍을 우나라에 선물로 보내서 진나라가 괵나라를 공격하는데 길을 빌려 줄 것을 요청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계책은 성공했다.

 

  기원전 658년, 우나라 왕은 이 두 가지 보물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진나라 사자의 부탁, 즉 진나라 군사가 괵나라를 칠 수 있도록 길을 빌려달라는 청을 냉큼 받아들였다. 우나라에도 현인이 있어 대부 궁지기宮之奇가 진나라의 흉계를 알아차리고 절대로 길을 빌려줘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국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3년이 지난 뒤 진나라가 다시 길을 빌리러 오자 궁지기는 또 왕에게 간언을 했다.

 

  “우와 괵은 모두 작은 나라이며 서로 이웃하고 있으면서 입술과 이의 관계로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는 세상에 서로 의지해야지, 그렇지 않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의 처지도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식견이 좁은 우나라 왕은 간언을 듣지 않고 마침내 진나라 군사에게 길을 빌려주었고 그 결과 괵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괵나라를 병탄한 진나라는 군사를 돌려서 우나라에 머물다가 기회를 틈타 우나라를 습격하여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이것이 바로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망시킨다’는 ‘假道滅가도멸괵’의 고사이다. ‘빌릴 가假’, ‘길 도道’, ‘멸망할 멸滅’, ‘나라이름 괵’자를 쓴다. 또 순망치한에 얽힌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순망치한은 서로 의존하며, 이해가 상관됨을 비유하는데 쓰인다.

 

  비슷한 말로 ‘망(亡)’자 대신에 ‘다할 갈竭’자를 쓴 ‘脣竭齒寒순갈치한’을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 ‘竭갈’은 ‘亡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들 게揭’자를 써서 ‘脣揭齒寒순게치한’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입술을 들추면 이가 시리다’는 의미가 된다.

 

  우나라와 괵나라는 망한지 이미 2천6백여 년이 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망치한’의 역사적 교훈은 오늘날까지 줄곧 이어 내려오고 있다. 우나라가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괵 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했더라면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는 다시 쓰여 졌을 것이다.

 

  1956년에서 1957년 사이에 하남성 삼문협三門峽 상촌령上村嶺 일대에서 괵 나라의 묘지가 발견됐는데, 여기서 대규모의 문물이 출토되었다. 드러난 역사의 폐허는 다시금 우리에게 ‘순망치한’의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단어】

 

脣(순): 입술. /月(육달월)부, 총11획, chún/

 

亡(망): 잃다. /(돼지해머리)부, 총3획, wáng/

 

齒(치): 이. 치아. /齒(이치)부, 총15획, chǐ/

 

寒(한): 차다. 춥다. /(갓머리)부, 총12획, hán/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5년〉

 

虞師晉師滅夏陽, 非國而曰滅, 重夏陽也, 虞無師, 其曰師, 何也, 以其先晉, 不可以不言師也. 其先晉, 何也, 爲主乎滅夏陽也, 夏陽者, 虞之塞邑也, 滅夏陽而虞擧矣, 虞之爲主乎滅夏陽, 何也, 晉獻公欲伐, 荀息曰, 君何不以屈産之乘, 垂棘之璧, 而借道乎虞也. 公曰, 此晉國之寶也, 如受吾幣而不借吾道, 則如之何, 荀息曰, 此小國之所以事大國也. 彼不借吾道, 必不敢受吾幣, 如受吾幣而借吾道, 則是我取之中府, 而藏之外府, 取之中, 而置之外也, 公曰, 宮之奇存焉, 必不使受之也, 荀息曰, 宮之奇之爲人也, 達心而懦, 又少長於君, 達心則其言略, 懦則不能彊諫, 少長於君, 則君輕之, 且夫玩好在耳目之前, 而患在一國之後, 此中知以上, 乃能慮之, 臣料虞君, 中知以下也, 公遂借道而伐, 宮之奇諫曰, 晉國之使者, 其辭卑, 而幣重, 必不便於虞, 虞公弗聽, 遂受其幣而借之道, 宮之奇諫曰, 語曰, 脣亡則齒寒, 其斯之謂與. 其妻子以奔曹, 獻公亡, 五年而後擧虞, 荀息牽馬操璧而前曰, 璧則猶是也, 而馬齒加長矣.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8. 10:30






 

 

한자공부

守株待兎수주대토

 

 

 

우리 속담 중에 감이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감나무 밑에서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이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것을 꾸짖을 때 많이 쓰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감을 기다릴 때, 중국에서는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수주대토’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의 이야기, ‘금주의 한자’에서 만나보자.

 

금주의 한자 ‘守株待兎수주대토’에서,

 

‘守수’는 ‘지키다’는 뜻이다. ‘옛 제도나 관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는 것’을 ‘옛 구舊’자를 써서 ‘수구守舊’라고 한다. 또 ‘돈 전錢’, ‘종 노奴’자와 결합된 ‘守錢奴수전노’는 ‘돈만을 지키는 종’이라는 뜻으로 ‘돈에 인색한 사람’을 욕하여 일컫는 말이다.

 

‘株주’는 ‘그루터기’ 즉 나무를 베어낸 뒤에 남은 밑동을 말한다. 본뜻과는 상관없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주식’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신문지상에서 ‘주식株式’이니 ‘주주株主’니 ‘주가株價’니 하는 말들을 만나볼 수 있다.

 

‘待대’는 ‘기다리다’는 뜻이다. ‘몹시 기다리다’는 뜻으로 ‘쓸 고苦’자를 써서 ‘고대苦待’라는 표현을 쓴다. ‘학수고대鶴首苦待’란 말도 있는데 ‘학의 목처럼 목을 길게 빼어 기다리다’는 뜻으로 ‘몹시 애타게 기다리다’는 말이다. ‘학 학鶴’자, ‘머리 수首’자를 쓴다.

 

‘兎토’는 ‘토끼’를 말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있는데 ‘사냥에서 날쌘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소용없게 되어 삶아 먹힌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실컷 부리고 필요치 않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에 사용한다. ‘죽을 사死’, ‘개 구狗’, ‘삶을 팽烹’자를 쓴다.

 

이 성어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켜보며 토끼가 부딪치기를 기다린다는 뜻인데, 자신의 일방적인 경험을 고집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고도 요행히 성공할 수 있다고 망상하는 것을 비유한다.

 



이 고사는 《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편에 나온다.

 

《한비자》는 원래 이름이 《한자韓子》로서 총 5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법가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비의 저작이다.

 

한자韓子로 불리다가 나중에 한비자로 불리게 된 한비韓非(약 서기전280-서기전233)는 당시 한韓이라는 나라의 공자公子로서, 훗날 진시황秦始皇 영정(서기전259-서기전210)을 보좌한 재상 이사李斯(약 서기전284-서기전208)와 함께 순황荀況 즉 손자荀子(약 서기전313-서기전238)에게서 배웠다. 당시에 성행한 황로黃老와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좋아했던 그는 말더듬이라서 말을 잘 하지는 못했으나 글을 쓰는 데는 거침이 없었다고 하며, 문장도 대단히 웅변적이었다.

 

당시에 한나라는 국운이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왕에게 글을 올려 변법變法을 통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초야草野로 물러나서 글을 지었는데, 과거의 득실得失 변화變化를 총결산해서 지은 〈고분孤憤〉, 〈오두五蠹〉, 〈세난說難〉 등의 글들이 《한비자》에 수록되었다.

 

한비의 글을 읽고 난 당시 진왕秦王 영정은 그를 크게 칭찬을 했지만 만나볼 수 없어 이를 한스럽게 생각했다. 급기야 그를 얻기 위해 영정은 군대를 동원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한나라 왕은 일이 다급해지자 할 수 없이 한비를 보내 진나라의 군대 동원을 철회하도록 부탁하게 되었다.

 

한비는 영정에게 글을 올려 먼저 조趙나라를 치고 한나라에 대한 공격은 늦추어달라고 했지만, 이사에게 해를 당해 감옥監獄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한비는 자신을 변론辯論하려고 했지만 성사成事되지 않고, 마침내 이사가 보낸 독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한비는 전기 법가의 학설을 종합하고 법法, 술術, 세勢를 하나로 합쳐 선진先秦시기 법가사상의 집대성자로 후대에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부연설명하면, 법이란 성문법成文法과 공포된 법령法令을 말하며 그 내용은 공功 있는 자에게 상賞을 주고 죄罪 지은 자에게 벌罰을 주는 것이고, 술은 관리의 임면任免, 평가評價, 상벌을 시행하는 군주의 통치수단을 말하며, 세는 권세權勢나 위세威勢로서 절대적 권위의 강제력 즉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군주통치권을 말한다.

 

이 ‘수주대토’의 고사는 한비가 고대의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의 정치를 무조건적으로 본받지 말고 당시의 상황을 연구 고찰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한 이야기이다.

 

송宋나라에 농사를 짓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토끼 한 마리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산토끼는 광분해서 이리저리 날뛰다가 결국에는 한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히고 말았다. 농부가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산토끼는 이미 목이 부러져 죽어 버린 상태였다.

 

농부는 대단히 기뻐하며 죽은 토끼를 집으로 가져가서 아주 맛있게 요리를 해 먹었다.

 

이튿날부터 농부는 농기구를 내버려두고 더 이상 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곧장 어제의 그 장소로 갔는데요. 나무 그루터기 옆에 앉아서 또 다시 산토끼가 저 멀리서 달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다시 열흘 보름이 지나갔지만 다시 똑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농부는 더 이상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두 번째 산토끼를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밭에 있던 농작물은 이미 모두 못쓰게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비웃었으며 모든 나쁜 소문이 그렇듯이 이 소문도 매우 빠르게 송나라 전역으로 퍼졌다.

 

사실 산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은 것은 매우 우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농부는 우연을 필연으로 간주하고는 농기구를 내팽겨 버리고 자기의 밭을 황무지로 내버려 두고 우연한 수확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정말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성어는 곧 낡은 관습만을 고집하고, 새로운 시대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참고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제자백가서에서 이 송나라 사람들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수주대토 말고도 우리에게 익숙한 ‘알묘조장揠苗助長’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송나라 사람이다. ‘뽑을 알揠’, ‘싹 묘苗’, ‘도울 조助’, ‘자랄 장長’자로 구성된 알묘조장은 ‘빨리 자랄 것을 기대하고 벼의 싹을 뽑아 올려 자라는 것을 도왔는데 결국 그 벼가 말라 죽었다’는 내용이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上〉편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에 위치한 송나라는 당시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은殷나라 마지막 세 현인 중의 하나인 미자微子 자계子啓를 봉함으로써 비롯됐는데, 즉 송은 은나라를 계승하여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다.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도 사실 송나라의 후예이다.

 

【단어】

 

守(수): 지키다. /(갓머리)부, 총6획, shǒu/

 

株(주): 그루터기. /木(나무목)부, 총10획, zhū/

 

待(대): 기다리다. /(두인변)부, 총9획, dài/

 

兎(토): 토끼. /(어진사람인발)부, 총7획, tu/

 

【출전】

 

宋人有耕田者, 田中有株, 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 不可復得, 而身爲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 治當世之民, 皆守株之類也.

 

-《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7. 23:10






 

 

 사자성어

傍若無人방약무인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겸손을 미덕으로 삼곤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거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자기자랑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면접에서는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PR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또 자식이나 아내자랑을 하는 사람은 가정적인 가장으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그래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적당한 선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금주의 한자는 겸손하지 못한 사람을 말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 ‘방약무인’이다.

 

금주의 한자 ‘傍若無人방약무인’에서

 

‘傍방’은 ‘곁’을 뜻한다. ‘도울 조助’자와 결합된 ‘傍助방조’는 ‘옆에서 도와주다’는 뜻이고, ‘볼 관觀’자와 결합된 ‘傍觀방관’은 ‘어떤 일에 관계하지 않고 옆에서 구경하다’는 뜻이다.

 

‘若약’은 ‘-과 같다’는 뜻이다. ‘위 상上’, ‘착할 선善’, ‘물 수水’자로 구성된 ‘上善若水상선약수’라는 말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에 나오는 말이다.

 

‘無무’는 ‘없다’는 뜻이다. ‘無依無托무의무탁’이란 말이 있는데, ‘의지할 의依’자, ‘맡길 탁托’자로 구성된 이 말은 ‘몸을 의지하고 맡길 데가 없다’는 뜻으로 ‘몹시 가난하고 외로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손수변’의 ‘托탁’자 대신에 ‘말씀언변言’의 ‘託탁’자를 쓰기도 하며, ‘依託의탁’, ‘無依託무의탁’이란 표현을 쓴다.

 

‘人인’은 ‘사람’을 뜻하는데, ‘화할 화和’자와 결합된 ‘人和인화’는 ‘여러 사람이 화합하다’는 뜻이고, ‘물결 파波’자와 결합된 ‘人波인파’는 ‘사람의 물결’이란 뜻으로 수많은 사람을 이른다.

 

‘방약무인’은 ‘곁에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이 행동한다’는 의미로, 주위의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마구 행동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이 성어는 《사기史記》〈자객열전刺客列傳〉에 나온다. 자객刺客은 지금말로 하면 암살자 혹은 킬러를 말함이니, 자객결전은 ‘킬러들의 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사기》는 전한 무제武帝 유철劉徹(서기전156-서기전87)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司馬遷(서기전145년?-서기전90년)이 저술한 책으로서 중국 최초의 기전체통사紀傳體通史이다. 기전체란 《사기》처럼 본기와 열전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방식을 말하며, 통사는 한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단대사斷代史와 달리 전 시대에 걸쳐 역사적 줄거리를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책에는 황제黃帝부터 한 나라 무제까지 약 3천 년 간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기록돼 있는데, 체제는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本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대를 표기한 ‘표表’, 경제, 정치, 천문, 지리 등을 기록한 ‘서書’, 제후왕에 대해 기록한 ‘세가世家’, 여러 뛰어난 인물에 대한 전기인 ‘열전列傳’ 등 다섯 가지 체제로 구성돼 있으며 총 130편입니다. 이 책은 중국의 사학과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수많은 뛰어난 인물 전기는 중국 고대 전기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중국의 걸출한 사학가요, 문학가이며 사상가인 사마천은 자가 자장子長으로서 지금의 섬서성 한성韓城 남쪽에 위치했던 용문龍門 출신이다. 사마가 성이고, 이름이 천이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사관인 태사령太史令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많은 역사문헌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고대에 사관은 대체로 세습을 하였기 때문에 20여세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훗날 그는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 유철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고 말았다. 그러다 사형과 궁형宮刑의 선택에서 학자에게 치욕스런 궁형을 택하고 발분해서 12년의 노력 끝에 불후의 저작 《사기》를 완성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궁형은 고대 중국에서 행하던 다섯 가지 형벌 즉 오형五刑 중의 하나로서 죄인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다.

 

그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형가荊軻는 위衛 나라 사람이다. 그는 평상시에도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또한 그는 검술을 좋아하여 매일같이 하루 온종일 친구들과 함께 검술과 무기를 익히며 무예 연마를 했다. 매일 새벽 날이 밝아오면 그는 곧바로 일어나 검술을 연습했으며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야 비로소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는 검술뿐만 아니라 글 읽는 것도 매우 좋아하여 좋은 시와 문장을 많이 읽었다. 항상 게을리 하지 않고 배움을 좋아하여 전국시대에 유명한 협사俠士가 되었다.

 

형가는 연燕나라로 온 이후에 은거해서 개고기를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고점리高漸離와 의기투합하여 지기知己가 되었다. 지기란 자기를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를 말하는데, ‘知己之友지기지우’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매일 두 사람은 연 나라의 저자거리에서 술을 마셨으며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될 정도로 취한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고점리도 용맹한 무사였다. 그 뿐만 아니라 고점리는 ‘축筑’이라고 부르는 옛날 악기의 연주도 잘했다. 축은 쟁箏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13줄로 된 현악기인데, 다른 현악기와 달리 대나무자로 현을 쳐서 소리를 낸다. 1996년에 상영된 <진송秦頌>이라는 영화를 보면 갈우라는 홍콩의 유명한 배우가 고점리 역을 맡아 이 축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항상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시끌벅적한 저자거리로 가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느 날, 형가와 고점리 이 두 사람이 시끌벅적한 저자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량의 8,9할 정도 되는 술을 마셨을 때 취기가 오르자 그들은 함께 제일 번화한 저자거리 한복판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고점리는 축을 치며 형가는 악기 소리에 맞추어 목을 놓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점점 더 흥에 겨워졌으며, 이에 따라 노래 소리도 갈수록 더 커졌다. 이들의 고성방가高聲放歌 때문에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구경꾼들을 보고도 못 본체하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노래가 슬프고 비분강개한 대목에 이르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듯이 대성통곡을 하는데 마치 이 세상에 자기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훗날 형가는 연燕 나라의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진왕秦王 영정 즉 훗날의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러 목숨을 걸고 길을 떠났다. 배웅해 주는 사람들 가운데는 고점리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드디어 역수易水가에서 헤어져야 했다. 그때 고점리는 축을 치고, 형가는 거기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디찬데 장사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눈을 부라리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았다고 한다. 결국 이 노래대로 형가는 일을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고점리도 뒷날 장님이 되어서까지 친구 형가의 원수를 갚으려고 진왕을 노리다가, 역시 실패하여 형가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방약무인한 행동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무례한 행동을 의미하나, 《사기》〈자객열전〉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 방약무인이라는 말로 표현했을 뿐 비난하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았다.

 

‘방약무인’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 말로는 ‘眼下無人안하무인’이 있다. ‘눈 안眼’자, ‘아래 하下’자를 쓰는 ‘안하무인’은 ‘눈 아래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 ‘輕擧妄動경거망동’이란 말도 있는데, ‘가벼울 경輕’자, ‘들 거擧’자, ‘망령될 망妄’자, ‘움직일 동動’자를 쓰는 ‘경거망동’은 ‘경솔하고 망령되게 행동하다’는 의미이다.

 

이 말들보다 좀 더 심한 표현으로 ‘傲慢無禮오만무례’와 ‘傲慢不遜오만불손’이 있다. ‘거만할 오傲’자, ‘게으를 만慢’자, ‘없을 무無’자, ‘예도 례禮’자를 쓰는 ‘오만무례’는 ‘태도나 행동이 거만하고 예의가 없다’는 의미이고, 또 ‘아니 불不’자와 ‘겸손할 손遜’자를 ‘오만불손’은 ‘태도나 행동이 거만하고 공손치 못하다’는 의미이다.

 

예의범절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 예의에 어긋나거나 예의가 없다, 무례하다는 말도 그 기준에 따라 정도가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기준이 있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아닐까?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닐진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미덕을, 각박해지는 요즈음 더욱 소중하게 새겨보게 된다.

 

【단어】

 

傍방: 곁. /人(사람인)부, 총12획, páng/

 

若약: 같다. /(초두머리)부, 총9획, ruò/

 

無무: 없다. /(연화발)부, 총12획, wú/

 

人인: 사람. /人(사람인)부, 총2획, rén/

 

【출전】

 

荊軻嘗游過楡次, 與蓋聶論劍, 蓋聶怒而目之. 荊軻出, 人或言復召荊卿. 蓋聶曰: “曩者吾與論劍有不稱者, 吾目之; 試往, 是宜去, 不敢留.” 使使往之主人, 荊卿則已駕而去楡次矣. 使者還報, 蓋聶曰: “固去也, 吾曩者目攝之!”

 

荊軻游於邯鄲, 魯句踐與荊軻博, 爭道, 魯句踐怒而叱之, 荊軻嘿而逃去, 遂不復會.

 

荊軻旣至燕, 愛燕之狗屠及善擊筑者高漸離. 荊軻嗜酒, 日與狗屠及高漸離飮於燕市, 酒酣以往, 高漸離擊筑, 荊軻和而歌於市中, 相樂也, 已而相泣, 旁若無人者. 荊軻雖游於酒人乎, 然其爲人沈深好書; 其所游諸侯, 盡與其賢豪長者相結. 其之燕, 燕之處士田光先生亦善待之, 知其非庸人也.

 

-《사기史記》〈자객열전刺客列傳〉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6. 06:30




 한자이야기

안제미擧案齊眉

 

 

 

 

 

금주의 한자 ‘擧案齊眉거안제미’에서,

 

‘擧거’는 ‘들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받쳐 들다’는 뜻을 갖는다. 우리가 자주 쓰는 ‘擧手敬禮거수경례’라는 말은 ‘오른손을 오른쪽 눈썹까지 올려서 하는 경례’를 이른다. ‘손 수手’, ‘공경할 경敬’, ‘예도 례禮’자를 쓴다.

 

‘案안’은 ‘밥상’ 혹은 ‘소반’이라고 해석하는데, 음식을 받쳐 들고 갈 때 쓰는 다리 짧은 나무 탁반을 말한다. 또 ‘책상’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지금과는 달리 좁고 긴 탁자를 지칭하며, ‘문서’나 ‘안건’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齊제’는 ‘가지런하다’, ‘같다’는 뜻이다. 동의어인 ‘가지런할 정整’자와 결합된 ‘整齊정제’는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다’는 뜻인데, 이 말은 ‘옷을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다’는 뜻으로도 써서 보통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다’라고 표현한다.

 

‘眉미’는 ‘눈썹’을 말한다. ‘두 눈썹 사이’를 ‘사이 간間’자를 써서 ‘眉間미간’이라 하는데, 여기에다 ‘두 량兩’자를 넣어 ‘兩眉間양미간’이라고도 한다.

 

이 ‘거안제미’는 ‘밥상을 눈썹 높이로 받쳐 올린다’는 뜻으로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거나 또는 부부가 서로 간에 공경하고 사랑함을 형용한 말이다. 이를 줄여서 ‘齊眉제미’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동관한기東觀漢記》〈양홍전梁鴻傳〉과 《후한서後漢書》〈양홍전梁鴻傳〉에 나온다.

 

‘동관東觀’은 중국 후한 때 수도 낙양의 황궁에 있는 전각 이름인데, 황실의 도서가 보관돼 있었고 역사를 편찬하는 곳이었다.

 

《동관한기》는 초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서기전5-서기57)부터 제12대 영제靈帝 유굉劉宏(156-189)까지의 후한 왕조 역사를 《사기史記》의 경우처럼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 중국 최초의 관찬 사서인데,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황제의 사0관을 거쳐 완성되었다. 총 1백4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삼국시대와 양진 시대까지는 《한기》라고 불렸다가 남북조 때에 와서야 《동관한기》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 ‘세 가지 역사책’이라는 뜻의 ‘삼사三史’라고 하면 전한 사마천司馬遷(약 서기전145-약 서기전90)의 《사기》, 후한 반고班固(32-92)의 《한서漢書》 그리고 이 《동관한기》를 꼽았다. 그러다가 남조南朝 때 범엽范曄(398-445)의 《후한서後漢書》가 편찬되자 《동관한기》는 ‘삼사’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후한서》보다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록이 훨씬 자세하며, 《후한서》에 없는 내용도 기록돼 있어 후한 왕조를 연구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문헌이다.

 

그럼 양홍과 그의 아내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때는 후한 초, 부풍扶風 평릉현平陵縣(지금의 섬서성 함양咸陽)에 양홍梁鴻(자는 백란伯鸞)이라고 하는 가난한 서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부지런히 노력해서 당시의 최고학부인 태학太學에 당당히 들어갔다.

 

양홍은 학업을 마친 후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은 그의 품격이 높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수도인 낙양에서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모두들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태학생 출신이라는 티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농사꾼과 마찬가지로 밭에 나가서 농사일을 했다.

 

이렇게 수년 동안 생활하자, 마을 가까이 사는 사람이든 멀리 사는 사람이든 모두 양홍이 학식이 있는 농사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양홍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같은 현縣에 맹孟 대인이라는 갑부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딸이 시집을 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맹 대인이 화를 내며 딸에게 물었다.

 

“네 나이 이미 서른 인데 아직도 여기도 시집 안 간다, 저기도 시집 안 간다고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쩔 셈이냐? 설마 평생 시집 안 가고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

 

딸이 대답했다.

 

“양홍 같은 사람이라야 시집 갈 거예요.”

 

맹 대인은 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사람을 보내 양홍에게 딸의 마음을 전달했다. 양홍은 맹 소저小姐가 자신에 맞는 배필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통해 구혼을 하였고 맹씨 집에서는 자연히 즉각 수락을 하였다.

 

얼마 후, 양홍은 맹 소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결혼 첫날부터 이레가 될 때까지 양홍은 신부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맹 소저는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어째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에, 당신은 품격이 고상하며 아내를 고르는 것도 퍽 신중하여 일찍이 여러 사람이 혼담을 꺼냈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비록 얼굴이 예쁜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혼담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당신과 의기투합하여 부부가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레가 되었는데도 당신은 저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저에게 틀림없이 어떤 잘못이 있을 터이니 당신에게 용서를 빕니다!”

 

양홍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어서 이윽고 아내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결혼하려고 생각했던 사람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검소한 아내요. 그래야 나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은거 생활을 할 수 있소.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것은 능라주단綾羅綢緞이요, 머리에 하고 있는 것은 금은보화金銀寶貨이니, 이게 어디 내가 바라던 바이겠소?”

 

맹 소저는 남편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 몸에 입고 있는 것은 혼례복입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뜻을 알았다면 진작부터 평범한 옷과 신발을 준비했을 텐데, 당신은 어째서 이 때문에 마음을 쓰고 계셨습니까?”

 

양 소저는 그때까지 초야를 치르지 않아 미처 혼례복을 갈아입지 못했던 것이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맹 소저는 내실로 들어가더니 머리장식을 빼버리고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채소바구니를 팔에 걸고 나왔다.

 

양홍은 이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서 말했다.

 

“이제야 진정한 양홍의 아내로서, 나를 받들어 줄 수 있소!”

 

말을 마치고 그는 아주 흔쾌히 아내에게 이름과 자를 지어주었는데, 이름은 ‘빛 광光’자를 써서 맹광이라 하고, 자는 덕요德曜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 부부는 패릉覇陵이라는 곳의 산속으로 이사를 했다. 부부는 농사와 길쌈으로 생활을 했고 시간을 내서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비파琵琶도 탔다. 시간이 오래 되지 않아서 그들은 패릉에서도 이름이 나게 되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양홍이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친구들에게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중에 황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며, 그것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그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한동안 제齊와 노魯 지방에 가서 머물렀다가 맨 끝에는 오吳 지방에 가서 일부러 고백통皐伯通이라는 부자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의탁하여 방 한 칸을 빌려 머물렀다. 양홍은 매일 밖에 나가서 남의 집 쌀을 찧어주거나 밭갈이를 하였고, 맹광은 집에서 실을 뽑아서 베를 짰다.

 

매일같이 양홍이 집에 돌아올 때면 맹광은 밥과 반찬을 올려놓은 소반을 받쳐 들고 아주 공경스럽게 양홍의 면전으로 다가왔다. 남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맹광은 양홍을 쳐다보지 않았고 게다가 매번 소반을 눈썹 높이까지 받쳐 들고 건넸다. 양홍도 언제나 매우 예의 있게 두 손으로 소반을 받았다.

 

어느 날 고백통은 그들 부부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광경을 보고 양홍이 예사 농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곧 그의 일가를 자기 집으로 오게 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서 양홍이 마음 편하게 글을 읽고 글을 짓게 했다. 후에 자식들도 낳고 잘 살다가 양홍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때야 비로소 맹광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 맹광의 고사에서 ‘가시나무 비녀와 무명 치마’라는 뜻의 ‘형차포군荊釵布裙’이라는 말이 생겼다. ‘가시나무 형荊’, ‘비녀 차釵’, ‘베 포布’, ‘치마 군裙’의 ‘형차포군’은 부녀자의 소박한 옷차림을 말한다. 또 ‘아내 처妻’자를 쓰는 ‘형처荊妻’라는 말도 생겼는데, 이것은 남에게 자기 아내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단어】

 

擧거: 들다. /手(손수)부, 총18획, jǔ/

 

案안: 밥상. 책상. /木(나무목)부, 총10획; àn/

 

齊제: 가지런하다. /齊(가지런할제)부, 총14획, qí/

 

眉미: 눈썹. /目(눈목)부, 총9획, méi/

 

【출전】

 

里孟氏女, 容貌醜而有節操, 多求之不肯. 父母問其所欲, 曰: “得賢婿如梁鴻者.” 鴻聞乃求之. 女椎髻, 著布衣, 操作具而前. 鴻大喜, 曰: “此梁鴻妻也, 能奉我矣.” 字之曰德耀, 名孟光. 將妻之霸陵山, 耕耘織作以供衣食, 彈琴誦詩以娛其志. 鴻將之會稽, 作詩曰: “維季春兮華阜, 麥含金兮方秀.” 適吳, 依大家皋伯通廡下賃舂. 每歸, 妻具食, 不敢于鴻前仰視, 案常齊眉. 伯通察而異之, 曰: “彼傭賃, 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 《동관한기東觀漢紀》〈양홍전梁鴻傳〉.

 

遂至吳, 依大家皐伯通, 居廡下, 爲人賃舂. 每歸, 妻爲具食, 不敢於鴻前仰視, 擧案齊眉. 伯通察而異之, 曰: “彼傭能使其妻敬之如此, 非凡人也.” 乃方舍之於家. 鴻潛閉著書十餘篇. 疾且困, 告主人曰: “昔延陵季子葬子於嬴博之閒, 不歸鄕里, 愼勿令我子持喪歸去.” 及卒, 伯通等爲求葬地於吳要離. 咸曰: “要離烈士, 而伯鸞淸高, 可令相近.” 葬畢, 妻子歸扶風. - 《후한서後漢書》〈양홍전梁鴻傳〉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5. 02:30




 

 

숙능생교 熟能生巧

 

 

 

분수에 맞지 않게 값비싼 명품을 고집하는 여자들을 일컬어 ‘된장녀’라고 비꼬아 얘기한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아름답고 고급스런 의상과 가방, 맛있는 먹거리를 탐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명품을 사는 것은 욕망을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어느 정도 명품이나 좋은 것을 원하는 욕망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문제는 ‘명품’의 진정한 뜻도 모른 채 그저 브랜드에만 급급해 그것을 좇는 것이다. 명품이란 ‘장인정신의 산물’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까다로운 공정을 거치고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를 통해서 탄생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오랜 시간을 거쳐야 뛰어난 기교를 발휘할 수 있다는 ‘숙능생교’를 통해 진정한 명품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지 알려드리고자 한다.

 

 


 

금주의 한자 ‘熟能生巧숙능생교’에서

 

‘熟숙’은 ‘숙련되다’는 뜻이다. 익숙하게 잘 하는 것을 ‘능숙能熟’이라 하고, 연습을 많이 해서 능숙하게 익히는 것을 ‘숙련熟練’이라 하며, 친하여 익숙한 것을 ‘친숙親熟’이라 한다.

 

‘能능’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능可能’은 ‘-할 수 있다’는 말이고 ‘능소능대能小能大’란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가리지 않고 모든 일에 두루 능한 것을 말한다.

 

‘生생’은 ‘생기다’, ‘나다’는 뜻이다. ‘생산生産’은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고, ‘출생出生’은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특히 귀인이 태어나는 것을 ‘탄생誕生이라 한다.

 

‘巧교’는 ‘기교’라는 뜻이다. 뛰어난 솜씨를 ‘기교技巧’라 하고, 솜씨나 꾀가 재치 있고 약삭빠른 것을 ‘교묘巧妙’라 하며, 여러모로 생각해낸 꾀를 ‘계교計巧’라 한다.

 

‘熟能生巧숙능생교’는 ‘숙련되면 기교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로, 오랜 기간의 수련을 거쳐야 뛰어난 기교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성어는 북송北宋 때의 문인 구양수가 쓴 〈매유옹賣油翁〉이라는 글에서 취한 것이다. ‘매유옹’은 ‘팔 매賣’, ‘기름 유油’, ‘늙은이 옹翁’으로서 ‘기름 파는 노인’이라는 뜻인데, 〈매유옹〉은 《귀전록歸田錄》에 들어 있으며, 《귀전록》은 구양수의 문집인 《구양문충공집歐陽文忠公集》에 수록되어 있다.

 

구양수歐陽修(1007-1072)는 북송 때의 문인이요 역사가이다.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술에 취한 노인이라는 뜻의 ‘취옹醉翁’이며, 말년에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칭해졌다. 지금의 강서성에 속하는 길수吉水 영풍永 출신이다. 당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정사인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에 참여했고, 독자적으로 《신오대사新五代史》를 집필했다. 벼슬이 재상 다음가는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로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이란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둘 다 정식국호는 ‘송’이다. 960년에 조광윤趙匡胤(927-976)이 세운 송나라는 경성이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인 변량汴梁이고, 1126년에 금나라에 의해 변량이 함락된 후 흠종欽宗 조환趙桓(1100-1156)의 동생 조구趙構(1107-1187)가 황제로 즉위하고 2년 후에 정한 경성은 지금의 항주杭州인 임안臨安이다. 변량이 상대적으로 북쪽이고, 임안이 남쪽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송을 구분해서 북송과 남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야기는 중국 북송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북송北宋 때 활을 아주 잘 쏘는 진요자陳堯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숙공康肅公이라고 불렸으며 당시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확실히 진요자 만큼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득의양양했으며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진요자가 집안 정원 안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쏘는 화살마다 거의 과녁에 명중해서 보는 사람들 모두가 환호하며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그 때 기름을 파는 한 노인네가 어깨에 멘 기름보따리를 땅에 내려놓고 매우 깔보는 듯한 눈초리로 진요자가 활 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은 그의 활쏘기 실력에 대해 별거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다가 가끔씩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곤 했다. 이윽고 노인이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거 뭐 특별할 것도 없구먼!”

 

진요자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해서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도 활을 쏠 줄 아시오? 내 화살 솜씨가 별거 아니란 거요?”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활쏘기는 훌륭하오. 허나 내가 활을 쏠 줄은 모르지만 이것은 결코 특별할 것이 없으며 단지 손에 익었을 뿐이지요.”

 

진요자는 더욱 성이 나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내 활쏘기 솜씨를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노인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 노인에게 어떤 절정의 기량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대로 질문을 했더니, 다만 노인은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기름 따르는 기교를 가지고서, 나는 이 점을 알 수가 있소.”

 

노인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조롱박 하나를 꺼내서 땅에 세우고, 다시 동전 한 개를 꺼내 조롱박의 입구 위에 얹었다. 그런 후에 나무 국자로 기름통 속에서 기름을 퍼서 천천히 따랐다. 기름은 동전의 네모진 구멍 속으로 마치 한 줄기 직선처럼 곧장 조롱박 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한 국자의 기름이 모두 다 들어갔지만 조롱박 입구의 동전에는 여전히 반 방울의 기름도 묻지 않았다. 이 때 노인은 고개를 들고 진요자에게 말했다.

 

“이것도 뭐 특별한 기량은 아니고 단지 숙련되어서 기교가 생긴 것일 뿐이외다.”

 

진요자는 노인의 기름 따르는 숙련된 솜씨를 보고서 마음속으로 많은 것들이 분명해져 웃으면서 노인을 집 정원 밖으로 내보내줬다.

 

 

 

이 고사는 어떤 일을 막론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반복해서 실천하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숙련된 기교를 익히고 요령을 터득할 수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한걸음 나아가, 기술이나 솜씨는 숙련되면 기교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므로 스스로 뽐낼 것은 없다는 점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구수한 된장찌개를 맛있게 해치운 기억,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밥과 함께 우리의 가슴에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사랑이 한 가득 채워졌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내에게서 받은 첫 번째 밥상.

 

밥은 뜸이 덜 들어서 돌을 씹는 것 같고, 콩나물국은 또 왜 이리 싱거운지....

 

아내 몰래 소금을 뿌리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결혼 후 스무 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밥상에 놓여 있는 먹음직스러운 잡채와 쇠고기로 맛을 낸 미역국으로 상다리가 휘청거린다.

 

그야말로 아내의 숙능생교는 그렇게 밥상위에서 만들어졌다.

 

 

 

【단어】

 

熟(숙): 익다. 익숙하다. 숙련되다. /(연화발)부, 총15획, shú/

 

能(능): 능하다. -할 수 있다. /月(육달월)부, 총10획, néng/

 

生(생): 나다. 생기다. /生(날생)부, 총5획, shēng/

 

巧(교): 기교. /工(장인공)부, 총5획, qiǎo/

 

 

 

【출전】

 

陳康肅公堯咨善射, 當世無雙, 公亦以此自矜. 嘗射於家圃, 有賣油翁釋擔而立, 睨之, 久而不去. 見其發矢十中八九, 但微頷之. 康肅問曰: “汝亦知射乎? 吾射不亦精乎?” 翁曰: “無他, 但手熟爾.” 康肅忿然曰: “爾安敢輕吾射!” 翁曰: “以我酌油知之.” 乃取一葫蘆置於地, 以錢覆其口, 徐以杓酌油瀝之, 自錢孔入, 而錢不濕. 因曰: “我亦無他, 惟手熟爾.” 康肅笑而遣之.

 

- 《귀전록歸田錄》 〈매유옹賣油翁〉.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4. 06:00






 

 

 한자공부

不恥下問 불치하문

 

 

 

 

 

어떤 직장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부하들이 상사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잘 모르겠는데, 좀 가르쳐주지.’가 1위였다고 한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질문하는 자세만 있으면 환영받을 수 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이제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는 시대는 지나갔나 보다.

 

오늘은 모르는 걸 모른다 하고, 아는 걸 안다고 하는 공자의 얘기를 할까 한다. 바로 ‘불치하문’이다.

 

 

 

‘不불’은 ‘아니다’는 뜻의 부정부사이다.

 

‘恥치’는 ‘부끄러워하다’는 뜻이고, 본문에서는 ‘부끄럽게 생각하다’로 해석한다. 흔히 ‘치욕恥辱스럽다’ 혹은 ‘수치羞恥스럽다’ 라고 할 때 사용한다.

 

‘下하’는 ‘아래’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아랫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학문이 부족한 사람을 말한다.

 

‘問문’은 ‘묻다’는 뜻으로 ‘의문疑問’, ‘질문質問’이나 ‘문답問答’이라는 표현에 쓰인다.

 

즉 ‘불치하문’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능력이나 학식이 자신만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을 수 있으므로,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겸허한 자세로 배움을 좋아한다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이 말은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온다.

 

《논어》는 유가儒家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공자의 언행과 사상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물론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나 혹은 제자의 제자 손에 의해 기록 정리된 것인데, 총 20편으로 구성돼 있으며 편의 제목은 해당 편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두 세 글자를 취해서 붙였다. 예를 들면 제1편 학이學而는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에서 따온 것이다. 해석하면,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 하겠다.

 

중국 춘추시대에 활동했던 공자孔子(서기전551-서기전479)는 위대한 사상가요 정치가이며 교육자로서 유가학파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서 노魯 나라 출신이다.

 

그는 당시에 무너진 정치질서를 회복하고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녔다. 이 말은 철환천하轍環天下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수레 철轍’자와 ‘돌 환環’자로 구성된 이 ‘철환’은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다‘라는 뜻이고 ’천하天下‘는 당시의 중국 전체를 말한다.

 

공자가 한 나라에 도착하면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이 급히 다른 나라로 떠났다고 해서 ‘공석불가난孔席不暇暖’이란 말도 생겼다. ‘겨를 가暇’자에 ‘따뜻할 난暖’자. 당唐 나라 때의 대문장가 한유韓愈가 〈쟁신론爭臣論〉이란 글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줄여서 ‘공석孔席’ 혹은 ‘겨를 가暇’자를 빼고 ‘공석불난孔席不暖’이라고도 쓴다.

 

훗날 공자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일러 성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자는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학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공자가 성인이라고 일컫는 노魯 나라 주공周公의 사당인 태묘太廟에 가서 제례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모르는 것을 질문했는데 거의 모든 일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등 뒤에서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누가 이 사람보고 예를 안다고 했어? 아무 것도 모르고 무엇이든지 물으려고 하려고만 하잖아!”

 

공자는 뒤에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묻는 것, 이것이 바로 예이다.”

 

그 시절 공어孔圉라고 하는 위衛 나라의 대부가 있었는데, 그는 겸허하게 학문을 좋아했으며 사람됨이 정직했다. 당시 사회 습관으로 최고 통치자 혹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에게 별도로 호칭을 달아줬는데 이것을 시호諡號라고 한다. 이 습관에 따라 공어가 죽은 뒤에 그에게 ‘문文’이라는 시호를 수여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공문자孔文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공子貢(서기전520-서기전456)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공자의 제자는 3천 명에 달했고 그 중에 주周 나라 때의 교육 과목인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고 한다. 육예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는데 예는 예의,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몰기, 서는 글쓰기, 수는 산수를 가리킨다.

 

또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 10명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자공은 외교사령 즉 외교적인 언사에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졌다.

 

자공의 성은 단목端木이라는 복성複姓이고 이름은 사賜로서 춘추시대 위衛 나라 사람이다.『논어』에서 공자와 제자의 문답 중 그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영리하고 이해력이 뛰어나 공자로부터 ‘지난 것을 말해주면 올 것을 안다’, ‘그의 현명함이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상술에도 뛰어나 큰 부를 축적하였다고 전해진다.

 

자공은 공어에게 부족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스승 공자에게 가서 여쭈었다.

 

“스승님,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민첩한데다 배움을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그를 일러 ‘문’이라고 한 것이다.(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즉 공어가 총명하면서도 또 배우는데 부지런하며, 지위가 자신보다 낮거나 학문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으로써 그의 시호를 삼았다는 것이다. 시호를 정하는 법인 시법諡法에 의하면, ‘근학하문勤學下問’ 즉 부지런히 배우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문文’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공문자의 시호가 정해진 이유를 설명한 것이지만 사실 공자 자신의 학문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의미의 ‘(三人行삼인행에 必有我師焉필유아사언’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말은 어떤 사람에게든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이다.

 

공자의 불치하문하는 태도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른바 ‘공자천주孔子穿珠’이다. ‘뚫을 천穿’자, ‘구슬 주珠’를 쓰는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하면 ‘공자가 구슬을 꿰다’인데, 공자가 시골 아낙에게 물어 구슬을 꿰었다는 뜻입니다. 고사는 이러하다. 공자가 구슬을 선물 받았는데, 그 구슬은 희한하게도 구멍이 아홉 번 굽어졌다. 공자가 이리저리 궁리해서 열심히 구슬에 실을 꿰어보았으나 너무 어려워서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어느 날 공자가 진陳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뽕을 따는 아낙네들을 만나자 그 구슬 생각이 났다. 이 아낙네들이 혹시 구슬에 실을 꿰는 방법을 알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공자가 질문을 하자, 한 아낙네가 대답했다.

 

“차근차근히 생각하고, 생각을 차근차근하게 하세요.”

 

공자가 아낙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는데, 발밑에 기어 다니는 개미들을 보고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개미허리에 실을 묶고 구슬의 한 쪽 구멍으로 들어가게 하고, 반대쪽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는 것이었다. 그러자 개미는 꿀 냄새를 맡고 계속 구멍으로 들어가 이윽고 구슬의 다른 구멍으로 나왔다.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조정사원祖庭事苑》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공자는 학식이 없는 아녀자에게 거리낌 없이 모르는 것을 물어 알았던 것이다.

 

‘耕當問奴경당문노, 織當問婢직당문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밭갈이는 마땅히 사내종에게 묻고, 길쌈은 마땅히 계집종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학식이 아무리 뛰어나고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세상일을 다 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이 닥치면 학식 불문, 나이 불문, 지위 불문, 시간과 장소 불문하고 묻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공자의 또 다른 명언이 떠오릅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농경사회였다. 경험과 연공서열이 금과옥조처럼 귀히 여겨지던 시대에 굳이 ‘불치하문’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 듯 보인다. 오히려 이 사자성어는 지식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한다.

 

“어이, 김대리, 엑셀에서 데이터를 정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

 

“어멈아, 휴대폰 문자에 이모티콘은 어떻게 넣는 거지?”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더욱 부드럽게 하고, 고부간의 갈등을 더욱 완화시키는 비결, 바로 ‘불치하문’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단어】

 

不불: 아니다. 부정부사. /一(한일)부, 총4획, bù/

 

恥치: 부끄러워하다. /心(마음심)부, 총10획, chǐ/

 

下하: 아래. 아랫사람. /一(한일)부, 총3획, xià/

 

問문: 묻다. /口(입구)부, 총11획, wèn/

 

 

 

【출전】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논어論語》〈공야장公冶長〉.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3. 10:00




 

 

三顧草廬 삼고초려

 

 

 

 

 

최고 경영자를 뜻하는 CEO는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도 같다. 능력 있는 CEO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경쟁력이 요구되는데, 100대 기업 CEO들은 평균 새벽 5시 37분에 기상을 하며 근무시간의 40% 이상은 현장에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인재를 보는 눈과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야말로 CEO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 하겠다.

 

예전에 한 증권 회사 사장이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 멀리 해외로 ‘인재 찾아 삼만 리’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는데, 과거에도 흙속에서 진주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긴 마찬가진가 보다. 인재를 알아보고, 그 인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던 유비의 이야기, 함께 만나보자.

 

 


 

금주의 한자. ‘三顧草廬삼고초려’에서

 

‘三삼’은 아시다시피 숫자 3인데, 본문에서는 ‘세 번’이라는 뜻이다.

 

‘顧고’는 ‘돌아보다’는 뜻인데, 여기서 ‘방문하다’는 뜻이 나왔으며 본문에서도 이 뜻으로 사용되었다. ‘고객顧客’은 ‘찾아오는 손님’이란 말이다.

 

‘草초’는 ‘풀’이라는 말이다. ‘뿌리 근根’자, ‘나무 목木’자, ‘껍질 피皮’자로 이루어진 ‘草根木皮초근목피’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는 뜻으로 나쁜 음식이나 한약재를 말한다.

 

‘廬려’는 ‘오두막’을 말하니, ‘초려’는 바로 ‘초가집’이란 뜻으로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 된다.

 

그래서 ‘삼고초려’는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진심으로 예를 갖추어 남을 맞이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제갈량諸葛亮(181-234)의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며, 그 이야기는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약 1330-약 1400)이 지은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에 자세하다. 〈출사표〉는 위魏 나라를 정벌하러 떠나기 전에 직접 후주後主 유선劉禪(207-271)에게 올린 표문이다.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국충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천고의 명문인 이 〈출사표〉는 서진西晉 때의 사학가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제갈량전諸葛亮傳〉이나 《문선文選》 등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동한 즉 후한 말엽, 유비劉備(161-223)는 조조曹操(155-220)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형주荊州의 유표劉表(142-208)에게 몸을 의탁했다. 훗날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인재를 널리 구해야겠다고 다짐하고 형주의 저명인사 사마휘司馬徽(?-208)를 찾아가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청했다. 사마휘는 이렇게 조언했다.

 

“이 지역에 복룡伏龍과 봉추鳳雛라는 사람이 있는데 둘 중에 하나만 얻어도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소.”

 

유비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본 결과, 복룡이 바로 공명孔明이라는 자를 쓰는 제갈량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양양성襄陽城 서쪽 이십 리 떨어져 있는 융중隆中이란 곳에 은거해서, 초가집에 살며 직접 농사를 짓고 역사서에 정통해 있는 걸출한 인물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곧 자신의 결의형제인 관우關羽(?-219)와 장비張飛(?-221)를 데리고 융중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 날 공교롭게도 제갈량이 외출하고 집에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며칠 후에 유비는 다시 관우, 장비와 함께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설을 무릅쓰고 제갈량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제갈량은 이번에도 친구와 함께 한가롭게 외출을 하였다. 유비는 할 수 없이 편지 한 통을 써서 남겨두었다. 내용은 자신이 제갈량에 대해 무한한 경의를 갖고 있으며, 아울러 제갈량에게 자신이 나라의 위험을 구하는데 도와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다시 얼마가 지난 후에 유비는 자신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특별히 사흘 동안 술과 고기를 삼가고 채식을 했으며 아울러 출발하기 전에 목욕을 하고 의복을 갈아입고 세 번째로 제갈량을 방문했다. 이 때 제갈량은 잠을 자고 있었다. 유비는 감히 그를 귀찮게 하지 않고 공경스럽게 섬돌 아래서 인내심을 갖고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제갈량은 유비의 성심성의에 감동을 해서 유비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 날 이후로 제갈량은 유비의 최고 모사謀士가 되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후 자신과 그의 사이를 물고기가 물을 만난 사이라고 말했는데, 이로부터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이 나왔다.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물고기는 물을 떠나 잠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친밀한 관계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훗날 제갈량은 유비를 도와 동쪽에 위치한 손권孫權(182-252)의 오吳 나라와 연합해서 북쪽에 위치한 조조의 위나라를 공격하여 형주와 익주益州를 점거한 후 촉한蜀漢을 세워 오나라, 위나라와 함께 삼국정립의 국면을 형성했다.

 

 


 

이 성어는 달리 ‘草廬三顧초려삼고’, ‘三顧之禮삼고지례’라고도 하며, 줄여서 ‘三顧삼고’라고도 한다.

 

 

 

세속적인 가치나 일신의 안락함 보다는 장래성 있는 미래에 투자했던 공명의 이야기. 요즘으로 치면 대기업의 임원 자리를 마다하고 영세 벤처기업에 뛰어든 거라고도 볼 수 있다.

 

눈보라가 휘날릴 때 이십 리 길을 고생하며 스무 살이나 어린 공명을 찾아갔던 유비 또한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은 여러 번 공을 들여 ‘진심’을 보여야만 얻을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준 진정한 리더라 하겠다.

 

이 두 사람을 통해 리더는 인재를 필요로 하고 인재는 자신을 알아준 리더를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다한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단어】

 

三(삼): 3. /一(한일)부, 총3획, sān/

 

顧(고): 돌아보다. /頁(머리혈)부, 총21획, gù/

 

草(초): 풀. /(초두머리)부, 총10획, cǎo/

 

廬(려): 오두막집. /广(엄호밑)부, 총19획, lú/

 

 

 

【출전】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 『삼국지三國志』「제갈량전諸葛亮傳」(「출사표出師表」).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2. 08:00




 한자공부

漁父之利 어부지리

 

 

 

 

 

금주의 한자 ‘漁父之利어부지리’에서

 

‘漁어’는 ‘물고기를 잡다’는 뜻이다. ‘그물 망網’ 자와 결합된 ‘漁網어망’은 ‘고기잡이 그물’을 뜻한다. ‘豊漁풍어’와 ‘凶漁훙어’란 말이 있다. 年풍년, 凶年흉년과 같은 구조인데, ‘풍성할 풍 자와 결합된 ‘豊漁풍어’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다’는 뜻이고, ‘흉할 흉凶’ 자와 결합된 ‘凶漁흉어’는 ‘물고기가 아주 적게 잡히다’는 뜻이다.

 

‘父부’는 ‘아비 부’ 자로서 ‘노인에 대한 존칭’이다. ‘아비 부父’ 자를 쓰는 ‘漁父어부’와 ‘지아비 부夫’ 자를 쓰는 ‘漁夫어부’는 같은 뜻인데, ‘아비 부’ 자를 쓰는 ‘漁父어부’는 ‘늙은 어부’라는 뜻이다.

 

‘之지’는 구조조사로서 ‘…의’라는 뜻이다.

 

‘利리’는 ‘이득’이라는 말이다. ‘해칠 해害’ 자, ‘얻을 득得’ 자, ‘잃을 실失’ 자로 구성된 ‘利害得失이해득실’은 이익과 손해, 얻음과 잃음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어부지리’는 글자그대로 ‘어부의 이득’이라는 뜻으로, 쌍방이 서로 다투는 사이에 제삼자第三者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利得을 챙긴다는 말이다. 이 말은 쌍방이 서로 대치하며 물러서지 않다가 결과적으로 둘 다 모두 피해를 입음을 비유할 때도 쓰인다.

 

이 고사는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2〉에 나오는데, ‘전국시대의 책략’이라는 뜻의 《전국책》은 중국 전국시대 각 나라들의 역사 정황을 기록한 중요한 국별체國 역사서로서 당시와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역사산문歷史散文의 걸작傑作이다. 이 책은 전국시대의 유세객遊說客들과 종횡가縱橫家의 정치주장과 책략策略, 전설傳說을 모은 것이다. 전국시대 초기부터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망시킬 때까지 약 2백40년 동안, 동주東周 및 진秦, 제齊, 초楚, 조趙, 위魏, 한韓, 연燕, 송宋, 위衛, 중산中山 각 나라의 일을 수록하였는데, 12책策, 3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4백97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전국책》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한 사람에 의해서 또 어떤 한 시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전국책》의 성립 시기는 전국시대 말엽이나 한대漢代 초기로 보며, 유명한 경학자經學者요, 목록학자目錄學者, 문학가인 유향劉向(서기전 77- 서기전 6)이 교정校訂하고 최후로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합종연횡合縱連衡이나 원교근공遠交近攻 등의 외교정책外交政策이 이야기로 실감實感나게 등장한다. 원래 ‘세로 종縱’ 자는 ‘좇을 종從’를 쓰기도 하며 남북을 가리키고, ‘가로 횡橫’ 자는 ‘저울대 형衡’ 자를 쓰기도 하며 동서를 뜻한다. 합종과 연횡은 서로 반대되는 외교정책이다. ‘합할 합合’ 자와 ‘세로 종縱’ 자로 구성된 ‘합종合縱’은 소진蘇秦이 여섯 나라 제후諸侯들에게 남북으로 연합해서 서쪽의 강대한 진秦 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외교정책이고, ‘잇닿을 련連’ 자와 ‘가로 횡橫’ 자로 구성된 ‘連橫연횡’은 진나라의 재상 장의張儀(?-서기전 310)가 제창한 외교정책으로서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의 합종 정책을 깨뜨릴 목적으로 여섯 나라의 각 제후들에게 이익으로 꾀어 진나라와 친선親善 관계를 맺도록 한 후에 다시 각개격파各個擊破를 하여 천하통일天下統一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소진과 장의는 모두 귀곡자鬼谷子라 불리는 왕후王詡(서기전 400-서기전 320)의 제자이다. ‘멀 원遠’ 자, ‘사귈 교交’ 자. ‘가까울 근近’ 자, ‘칠 공攻’ 자로 구성된 ‘원교근공’은 먼 나라와 친교親交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중국의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강대한 일곱 제후국, 즉 제齊 나라, 초楚 나라, 진秦 나라, 연燕 나라, 한韓 나라, 위魏 나라, 조趙 나라 등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서로 공벌攻伐을 하여 전쟁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칠웅’의 ‘수컷 웅雄’ 자는 ‘강국’을 뜻한다.

 

조 나라가 연 나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역사상 유명한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에게는 집안 아우인 소대蘇代라는 이름을 가진 유세객이 있었다. 참고로 소대의 아우는 소려蘇厲인데, 이렇게 소진, 소대, 소려 세 사람의 종횡가를 ‘삼소三蘇’라고 부른다. 삼소라는 명칭은 북송 때에도 있었는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대문장가 소순蘇洵(1009-1066), 소식蘇軾(1037-1101), 소철蘇轍(1039-1112)의 삼부자三父子도 삼소라고 부른다.

 

당시 연 나라 소왕昭王의 부탁을 받은 소대는 조 나라 혜문왕惠文王(서기전 약 308-서기전 266)을 알현하고 혜문왕에게 연 나라를 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소대는 혜문왕에게 다음과 같은 우언寓言 고사 하나를 이야기했다.

 

 

 

오늘 제가 역수易水(하북성 역현易縣에 있음)를 지나오는데, 말조개가 날이 맑게 개이자 양쪽의 딱딱한 조가비를 한껏 벌리고 강가의 모래톱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한 도요새가 이 말조개를 보더니 재빠르게 부리를 말조개의 조가비 속으로 뻗어서 살을 쪼았습니다. 말조개는 황급히 딱딱한 조가비를 닫아 도요새의 부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도요새는 조갯살을 먹지도 못하고 부리가 물려 있게 되자 말조개를 위협하며 말하였습니다.

 

“좋아, 네가 조가비를 벌리지 않는다면 기다리겠다. 오늘 비가 내리지 않고 내일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너를 말려 죽이겠다!”

 

말조개는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이 대꾸하였습니다.

 

“좋지, 네 부리는 이미 나에게 물려 있어. 오늘 뽑아내지 못하고 내일도 뽑아내지 못하면 너를 굶겨 죽일 거야!”

 

바로 이렇게 말조개와 도요새는 강가의 모래톱에서 서로 고집부리며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그들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육체적으로 힘이 빠졌습니다. 때마침 한 늙은 어부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들이 죽기 살기로 한데 얽혀서 누구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손쉽게 그들을 함께 잡았습니다.

 

 

 

소대는 이야기를 다 마친 후 혜문왕에게 말했다.

 

“만일 조 나라가 연 나라를 공격하면 연 나라는 온 국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라 쌍방이 반드시 장기간 서로 버티며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강대한 진秦 나라가 곧 어부처럼 앉아서 그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중하게 고려하셔서 다시 결정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소대의 말을 다 들은 후에 조 나라 혜문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옳은 말이오.”

 

혜문왕은 소대가 한 말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연 나라에 대한 공격 계획을 중단했다.

 

 

 

이 고사에서 어부지리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나왔는데, 다른 표현으로 ‘부父’ 자 대신에 ‘사람 인人’ 자를 쓴 ‘漁人之利어인지리’, ‘늙은이 옹翁’ 자를 쓴 ‘漁翁之利어옹지리’ 또는 조사 ‘지之’ 자 대신에 ‘얻을 득得’ 자를 써서 ‘漁人得利어인득리’, ‘漁翁得利어옹득리’라고 하며, 줄여서 ‘漁利어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또 이를 말조개와 도요새의 다툼이란 뜻으로 ‘말조개 방蚌’ 자와 ‘도요새 휼鷸’ 자, ‘다툴 쟁爭’ 자를 써서 ‘蚌鷸之爭방휼지쟁’ 또는 ‘서로 상相’ 자를 써서 ‘鷸蚌相爭휼방상쟁’이라고도 한다.

 

유사한 성어로, ‘개 견犬’ 자와 ‘토끼 토兎’ 자를 써서, 개와 토끼의 다툼이란 뜻의 ‘犬兎之爭견토지쟁’이란 말이 있는데 이 고사도 어부지리와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어】

 

漁(어): 고기 잡을 어. /(삼수변)부, 총14획, yú/

 

父(부): 아비. /父(아비부)부, 총4획, fǔ/

 

之(지): 구조조사. /丿(삐침)부, 총4획, zhī/

 

利(리): 이익. /(선칼도방)부, 총7획, lì/

 

 

 

【출전】

 

趙且伐燕, 蘇代爲燕謂惠王曰: “今者臣來, 過易水, 蚌方出曝, 而鷸啄其肉, 蚌合而拑其喙. 鷸曰: ‘今日不雨, 明日不雨, 卽有死蚌.’ 蚌亦爲鷸曰: ‘今日不出, 明日不出, 卽有死鷸.’ 兩者不肯相舍, 漁者得而幷禽之. 今趙且伐燕, 燕趙久相支 以弊大衆, 臣恐强秦之爲漁父也, 故願王之熟計之也.” 惠王曰: ‘善.’ 乃止.

 

-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2〉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1. 08:00



 

 

 자성어

一葉蔽目일엽폐목

 

 

 

 

 

금주의 한자 ‘漁父之利어부지리’에서

 

‘一일’은 숫자 1이다. ‘아침 조朝’ 자, ‘저녁 석夕’ 자와 결합된 ‘一朝一夕일조일석’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이란 뜻으로 매우 시간이 짧음을 형용하는 말이다.

 

‘葉엽’은 초목의 잎을 말한다. ‘글 서書’ 자와 결합된 ‘葉書엽서’는 원래 나뭇잎에 쓴 글로 편지를 말했지만 지금은 우편엽서를 가리킨다. ‘황금 금金’, ‘가지 지枝’, ‘구슬 옥玉’ 자와 결합된 ‘金枝玉葉금지옥엽’은 ‘황금 가지와 옥 잎’이란 뜻으로 왕의 가족이나 귀한 자손을 뜻한다.

 

‘蔽폐’는 ‘가리다’는 뜻이다. ‘숨길 은隱’ 자와 결합된 ‘隱蔽은폐’는 ‘덮어 감추다’ 혹은 ‘가리어 숨기다’는 뜻이고, ‘가릴 엄掩’자와 결합된 ‘掩蔽엄폐’는 ‘가리어 숨기다’는 뜻이다.

 

‘目목’은 ‘눈’이다. ‘예도 례禮’자와 결합된 ‘目禮목례’는 ‘눈으로 하는 인사’를 말하고, ‘아니 불不’, ‘참을 인忍’, ‘볼 견見’ 자와 결합된 ‘目不忍見목불인견’은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일엽폐목’은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다’는 뜻으로, 눈앞의 작은 사물에 가려져 사물의 진실적 상황 및 주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데 쓰인다. 또 국부적이고 일시적인 상황에 미혹돼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함을 비유하는데도 쓴다.

 

 


 

이 성어는 《할관자鶡冠子》〈천칙天則〉편에 나온다.

 

책명에서 ‘할’을 ‘갈’로 읽어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관자’로 부르기도 하나 《광운廣韻》 등의 운서韻書를 살펴본 결과, ‘할’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할관자》의 저자는 중국 전국시대 초楚 나라의 은사隱士 할관자로 전해진다. ‘할관鶡冠’은 할새의 깃털로 장식한 관冠을 말하며, 은자隱者의 관으로 일컬어진다. ‘새 조鳥’ 자를 써서 ‘할조관鶡鳥冠’ 혹은 ‘닭 계鷄’ 자를 써서 ‘할계관鶡鷄冠’이라고도 한다. 그는 깊은 산속에 살면서 할새의 깃털로 관冠을 만들어 쓰고 다녔기 때문에 존칭해서 할관자라고 불렸다. 그의 사상은 주로 도가 사상에 속한다.

 

재밌는 건, 할새라는 새는 꿩처럼 생겼는데 크기도 큰 편이며 색깔이 황흑색을 띠고 꼬리 깃털이 각이 져서 마치 관冠처럼 생겼다. 제 무리를 사랑하는 성질이 있지만 침입을 당하면 곧장 달려가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싸운다고 한다.

 

 

 

오늘 전하는 ‘일엽폐목’의 이야기는 중국 삼국시대 위魏 나라 학자 한단순邯鄲淳(약 132-221) 이 쓴 《소림笑林》이라는 책에 나오는데, 이 책은 중국 최초의 소화笑話 즉 우스운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으로, 중국 해학諧謔 소설의 시초로 평가된다. 원서는 이미 실전되었지만, 노신魯迅(1881-1936)이라는 유명한 문학가가 《고소설구침古小說鉤沈》이라는 책에 비교적 완벽하게 집록해 놓았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옛날 중국 초楚 나라에 한 가난한 서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책 읽는 일만 좋아해서 세상일에는 어두운 책벌레였다.

 

어느 날 그가 전설적인 방술서인 《회남방淮南方》이란 책을 읽고 있다가, 갑자기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보았다.

 

“만일 사마귀가 매미를 잡을 때 쓰는 은신용 나뭇잎을 얻으면 자신의 몸을 은폐할 수 있어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서생은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 나뭇잎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날부터 그는 온종일 숲속을 들락날락하면서 사마귀가 매미를 잡을 때 자기 몸을 가리는 나뭇잎을 찾았다. 마침내 얼마 후 사마귀가 나뭇잎 아래서 자기 몸을 감추고 있다가 매미를 잡는 것을 발견하고 그 나뭇잎을 땄다. 그런데 서생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서, 사방에 가득 널려있는 낙엽들과 한데 뒤섞여버렸다. 서생은 한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삼태기 하나를 가져와서 그곳에 있는 낙엽들을 모두 담아서 집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서생은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낙엽들 중에서 어떻게 몸을 감출 수 있는 나뭇잎을 골라낼 수 있을까?”

 

서생은 하나하나씩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거기 있는 나뭇잎을 하나 들어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볼 수 있소?”

 

아내가 대답했다.

 

“볼 수 있어요.”

 

그가 다른 나뭇잎을 들고서 다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보이오?”

 

아내가 인내심을 갖고 대답했다.

 

“보여요.”

 

이런 식으로 그가 나뭇잎을 하나씩 들고서 보이냐고 물을 때마다 아내는 놀랄 정도의 인내심을 나타내며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하고나자 나중에 너무 귀찮아진 아내는 그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보이지 않아요!”

 

서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는 곧바로 나뭇잎을 들고 거리로 가서,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가게 주인 앞에 서서 손을 뻗어 가게 안의 물건을 집어서 나갔다.

 

가게 주인은 너무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 그를 붙잡아 관아로 끌고 갔다. 관원은 뜻밖에 어떤 사람이 백주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데 남의 물건을 훔쳤다는 말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져 곧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서생으로부터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관원은 한바탕 크게 웃으며 그를 처벌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성어는 ‘막을 장障’ 자를 써서 ‘일엽장목一葉障目’이라고도 한다. 또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면 태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一葉蔽目일엽폐목, 不見泰山불견태산’이라고도 한다.

 

《할관자》 〈천칙〉편에는 이 성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귀는 듣는 것을 주관하고, 눈은 보는 것을 주관한다.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리면 태산이 보이지 않고, 콩 두 알이 귀를 막으면 우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단어】

 

一(일): 1. 하나. /一(한일)부, 총1획, yī/

 

葉(엽): 잎. /(초두머리)부, 총13획, yè́/

 

蔽(폐): 덮다. /(초두머리)부, 총16획, bì/

 

目(목): 눈. /目(눈목)부, 총5획, mù/

 

 

 

【출전】

 

夫耳之主聽, 目之主明, 一葉蔽目, 不見太山, 兩豆塞耳, 不聞雷霆.

 

-《할관자鶡冠子》〈천칙天則〉.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20. 02:30

 

 

 재미있는 한자

武陵桃源무릉도원

 

 

 

 

금주의 한자 武陵桃源무릉도원에서,

 

‘武무’는 ‘文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병기와 전쟁에 관한 일을 가리킨다. 이 글자를 보통 ‘호반 무’ 자로 훈을 하는데, ‘호반虎班’이란 무관의 반열을 말한다. ‘범 호虎’ 자는 ‘용맹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무인武人’을 가리킨다. 옛날에 임금이 조회朝會할 때 관원들은 문관과 무관이 각기 동서 두 열로 나뉘었는데 이것을 양반兩班이라고 부른다. 즉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인 양반이라는 말은 원래 이 문무관원을 가리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武器무기’, ‘武人무인’, ‘武士무사’, ‘武藝무예’란 말에 이 ‘호반 무武’ 자가 들어 있다.

 

‘陵릉’은 ‘높은 언덕’을 말한다. ‘陵谷之變능곡지변’이란 말이 있는데, ‘골짜기 곡谷’, 구조조사 ‘지之’, ‘변할 변變’ 자로 구성된 이 말은 ‘언덕과 골짜기의 변화’, 즉 높은 언덕이 깊은 골짜기로 바뀌고 깊은 골짜기가 높은 언덕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심하게 바뀌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桃도’는 ‘복숭아나무’를 말한다. ‘꽃 화花’ 자를 붙인 ‘桃花도화’는 ‘복숭아꽃’을 말한다. ‘하늘 천天’ 자를 쓰는 ‘天桃천도 복숭아’는 하늘나라에서 나는 복숭아를 말하고, ‘누를 황黃’ 자를 쓰는 ‘黃桃황도’는 속살이 노란 복숭아를, ‘흰 백白’ 자를 쓰는 ‘白桃백도’는 흰 복숭아를 말한다.

 

‘源원’은 ‘물의 근원’ 즉 물의 흐름이 처음 시작되는 곳을 말하는데, 원래는 ‘삼수변’이 없는 ‘原원’자를 쓰다가 물을 강조하기 위해 ‘삼수변’을 덧붙였다. ‘물 수水’ 자를 붙여 ‘水源수원’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경기도 수원시는 ‘삼수변’이 없는 ‘水原수원’을 쓴다.

 

그래서 ‘무릉도원’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 혹은 이상 속의 아름다운 곳을 비유할 때 쓰인다. ‘桃源境도원경’ 또는 ‘武陵源무릉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릉도원’은 ‘무릉의 도원’이라는 뜻인데, ‘무릉’은 지금의 호남성 상덕시常德市 부근에 있던 군郡 이름이며, ‘도원’은 ‘도화원桃花源’의 줄임말로서 도연명陶淵明의 명문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복숭아꽃 숲이 수원에서 끝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도화원은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곳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상향을 가리키기도 하며, 지금의 호남성 도원현 서남쪽의 도원산 아래에 도원 또는 도원동桃源洞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도연명이 기록한 도화원의 유적지라고 한다.

 

이 말은 또 ‘세상 밖의 도원’이라는 뜻으로 ‘世外桃源세외도원’이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중국 동진東晉 때의 대문학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도화원기」에서 나왔다.

 

도연명(365-427)은 이름이 잠潛, 자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이며, 집 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호를 ‘다섯 오五’, ‘버들 류柳’ 자를 써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했다. 벼슬이 팽택령彭澤令에 이르렀을 때 봉급인 오두미五斗米 즉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히길 원치 않아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갔는데, 이 때 그의 심경을 읊은 글이 바로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농촌에 간 후 그는 직접 밭갈이를 하고, 시와 술을 즐겼다. 그의 시는 진솔하고 자연스러우며 대부분 산수와 전원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또 그가 지은 산문이나 사부詞賦 등도 질박하고 유창하다. 죽은 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고 불렀으며, 후세 시인들의 창작에 매우 큰 영향을 줬던 인물이다.

 

도연명은 57세 때 〈도화원기〉라는 유명한 글을 한 편 썼는데, ‘기記’는 문체의 한 종류로서 사물을 서술한 문장을 이른다. 원래는 〈도화원시〉라는 제목의 시 앞부분에 있어 이 시의 서문에 해당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호남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겪은 기이한 일을 적고 있다.

 

 

 

태원太元(376-396) 연간에 있었던 일이

다.

 

어느 날 어부가 나룻배를 타고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갑자기 시내의 양쪽 푸르른 풀밭 옆에 다른 나무들은 일절 없고 복숭아나무들로만 꽉 찬 수백 보 넓이의 숲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향내 나는 꽃들은 곱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꽃들이 분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어부는, 계속 배를 저어 이 숲의 끝까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복숭아꽃 숲은 물이 처음 흘러나오는 곳에서 끝났는데, 좀 더 들어가니 얼마 가지 않아 앞에 산이 나왔고 산허리에 작은 동굴 입구가 있는 것을 보았다. 동굴 입구는 마치 빛이 있는 듯 보였는데, 어부는 호기심이 생겨나 배에서 내려 동굴로 올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부가 막 동굴 입구로 들어서니 안이 너무 어둡고 좁아서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였지만, 다시 수십 걸음을 걸었더니 길이 갑자기 확 넓어지면서 밝아졌다.

 

그곳은 땅이 평평하고 넓었으며, 한 줄 한 줄 집들이 매우 가지런히 배열돼 있고 비옥한 들판과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많은 뽕나무와 대나무가 있었다. 밭 사이의 길은 동서남북으로 나 있어 사통팔달하였고 닭울음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판에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경작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었고 남자와 여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바깥사람들과 같았으며, 노인과 아이들은 매우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 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이 어부를 발견하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어부는 하나하나 상세하게 그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어부를 자기 집으로 가자고 청해서 술을 내오고 닭을 잡아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달려와서 바깥소식을 물었다. 아울러 자기네 조상이 진秦 나라 때의 전란을 피하기 위해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이 외부와 단절된 곳으로 왔으며 그 후로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아 마침내 바깥사람들과 왕래가 끊어졌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어부에게 지금이 어느 왕조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시기가 비교적 먼, 삼국시대 조조曹操(155-220)의 아들 조비曹丕(187-226)가 세운 위魏 나라와 사마염司馬炎(236-290)이 세운 진晉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시기가 가까운 유방劉邦(서기전 221-서기전 189)이 세운 한漢 나라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어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음을 말해줬더니 그들은 모두 매우 놀라며 탄식했다.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모두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며칠 후에 어부는 서운해 하면서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 마을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곳 상황을 외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소이다.”

 

어부는 그곳을 나와서 자신의 배를 찾아 타고서 왔던 길을 따라 돌아오며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무릉군의 집으로 돌아온 어부는 태수를 알현하여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알렸다. 어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태수가 즉시 사람을 보내 어부를 따라서 그곳을 찾아가게 했지만, 전에 해 놓은 표시를 찾다가 그만 방향을 잃어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남 남양군南陽郡에 사는 유자기劉子驥(이름은 인지驎之, 자는 자기子驥)라는 고상한 명사가 있었는데 이 일을 전해 듣고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찾아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실행을 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일도 있었다. 그 이후로 마침내 이 도화원을 찾는 길을 묻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데, 도연명은 여기서 인간이 갈 수 없는 이상향인 무릉도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Utopia)도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단어】

 

武무: 무인. /止(그칠지)부, 총8획, wǔ/

 

陵릉: 언덕. /(좌부변)부, 11획, líng/

 

桃도: 복숭아나무. /木(나무목)부, 총10획, táo/

 

源원: 근원. /(삼수변)부, 총13획, yuán/

 

 

 

【출전】

 

晉太元中, 武陵人, 捕魚爲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逢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美, 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林盡水源, 便得一山. 山有小口, 髣髴若有光, 便捨船, 從口入.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美池竹之屬, 阡陌交通, 雞犬相聞.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黃髮垂髫, 並怡然自樂.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雞作食.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訊. 自云, “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來此絶境, 不復出焉, 遂與外人間隔.” 問今是何世, 乃不知有漢, 無論魏晉. 此人一一爲具言所聞, 皆歎惋.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後遂無問津者.

 

- 도연명陶淵明, 〈도화원기桃花源記〉.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9. 05:00




 

 

구밀복검

口蜜腹劍

 


 


금주의 한자 ‘口蜜腹劍구밀복검’에서

 

‘口구’는 ‘입’을 말한다. 우리말에서 ‘입에서 나는 나쁜 냄새’ 즉 ‘입구린내’는 ‘냄새 취臭’ 자와 결합된 ‘口臭구취’라고 표현하고, ‘말솜씨’는 ‘말 잘할 변辯’ 자와 결합된 ‘口辯구변’ 또는 ‘말씀 언言’ 자를 쓰는 ‘言辯언변’이라는 말을 쓴다.

 

‘蜜밀’은 ‘꿀’을 말한다. ‘벌 봉蜂’자와 결합된 ‘蜜蜂밀봉’은 ‘꿀벌’을 말하고, 글자의 순서가 바뀐 ‘蜂蜜봉밀’은 ‘벌꿀’을 말하는데, 이렇게 한문은 글자의 배열 순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 유의해야 하겠다.

 

‘腹복’은 ‘배’를 말한다. ‘抱腹絶倒포복절도’란 말이 있다. ‘안을 포抱’ 자를 쓰는 ‘포복’은 ‘배를 안다’는 뜻이고, ‘끊을 절絶’, ‘넘어질 도倒’의 ‘절도’는 ‘기절해서 넘어지다’는 뜻으로, 배를 끌어안고 넘어질 정도로 몹시 웃는 것을 말한다.

 

‘劍검’은 ‘칼’을 말한다. ‘칼’에는 ‘검’과 ‘도刀’가 있는데. ‘검’은 날이 양쪽에 있는 칼이고, ‘도’는 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이다. 그래서 ‘과일 깎는 칼’을 ‘果刀과도’라 하고 ‘과검’이라 하지 않으며, 부엌에서 쓰는 칼 즉 ‘식칼’을 ‘食刀식도’라 하고 ‘식검’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구밀복검’은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는 뜻으로, 입으로 꿀처럼 달콤하게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뱃속에는 남을 몰래 해치는 음모를 품고 있음을 비유해 하는 말이다.

 

 

 

이 성어는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펴낸 《자치통감資治通鑑》이란 책의 〈당기唐紀〉편 현종천보원년玄宗天寶元年 조에 실려 있다.

 

唐紀당기는 당 왕조의 기록이란 뜻이다.

 

玄宗현종(재위 712-756)은 당 나라의 황제로 이름은 이륭기李隆基(685-762)이다. 처음에는 유능한 재상을 임용하고 잘못된 정치를 고쳐서 역사상 유명한 ‘개원지치開元之治’ 즉 개원 연간의 치세治世를 이뤘으나 나중에는 이림보 같은 소인小人을 신임해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 즉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미인인 양귀비楊貴妃(719-756)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안록산安祿山(703-757)과 사사명史思明(703-761)이 일으킨 반란, 소위 안사安史의 난亂을 초래해서 당 왕조를 쇠퇴하게 만든다.

 

천보는 당 현종玄宗의 연호로서 742년에서 756년까지 15년간이다. 연호는 황제의 해를 기록하는 이름으로 한 나라 무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년은 ‘으뜸 원元’자를 써서 ‘원년元年’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천보 원년은 천보 1년으로 서기 742년을 말한다.

 

 

 

‘도울 자資’, ‘다스리 치治’, ‘통할 통通’, ‘거울 감鑑’ 자로 구성된 책명 ‘자치통감’이란 말은 당시 황제인 신종神宗 조욱趙頊(1048-1085)이 이 책을 가리켜 ‘지난 일을 거울삼고 있어서 치도治道 즉 정치 방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통감’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데, 사마광이 19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서 완성한 2백94권의 장편 역사 대작이다. 이 책은 각 왕조王朝의 ‘기전체紀傳體’ 단대사斷代史를 종합하고 편년체編年體 방식으로, 주周 나라 제32대 왕인 위열왕威烈王 희오姬午(?-서기전 402)이 진晉나라 3경卿(즉 한韓씨, 위魏씨, 조趙씨)을 제후諸侯로 인정한 기원전 403년부터 오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시영柴榮(921-959) 때인 959년에 이르기까지 장장 1천3백62년간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연대와 역사적 사실을 결합해서 시대 순으로 서술한 이 책은 역사의 발전이 매우 명백하게 서술돼 있을 뿐 아니라 중대한 사건의 전후 인과因果 및 각 방면의 관련 사건에 대해서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후에 이 책이 너무 방대尨大하여 열람閱覽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종의 다이제스트라고 할 수 있는 북송 때 강지江贄의 『통감절요通鑑節要』와 남송 때 주희朱熹(1130-1200)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원추袁樞(1131-1205)의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이란 책들이 나와서 널리 읽혔다. 조선시대부터 『통감』이라고 하면 강지의 책 『통감절요』를 말하는데, 강지의 호가 소미少微이기 때문에 이를 『소미통감절요』라고도 부른다.

 

 

 

이야기는 당 나라 천보 5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림보李林甫(683-753)는 중국 당 나라 현종 이륭기 때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중서령中書令’이었는데, 이는 재상宰相의 직위였다. 이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 글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러나 인품을 논한다면 철저하게 악질惡質이었다. 그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여 재능이 자기보다 앞서거나 명성이 자기보다 높은 모든 사람들을 해쳤다. 권세와 지위가 자기와 대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척하고 공격했다. 그는 당시 황제인 현종 이륭기에게 온통 아첨阿諂을 통해 신임을 얻는 재주를 가지기도 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륭기에게 다가갔으며 아울러 이 수법으로 현종이 총애하고 신임하는 비빈妃嬪들과 심복心腹 태감太監 즉 내시內侍들의 비위를 맞춰 그들의 환심과 지지를 얻었으며 이로써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이림보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 겉으로는 더할 수 없이 상냥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이며 온통 감동적인 선의의 말들을 했지만, 실제로 그의 성격은 매우 음험하고 교활하여 언제나 은밀히 남을 해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보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성실하고 간절한 모습으로 가장하여 동료 대신 이적지李適之(694-747)에게 말했다.

 

“화산華山에 엄청난 양의 황금黃金이 매장埋藏되어 있는데 만일 개발해서 채굴採掘해낼 수 있다면 나라의 재정財政을 대대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오. 안타깝게도 황상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시다오.”

 

이적지는 이것이 정말인 줄 알고 황급히 달려가 현종 이륭기를 알현謁見해서 한시라도 빨리 화산의 금광을 채굴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륭기는 이적지의 말을 듣자마자 매우 기뻐하며 즉시 이림보를 찾아서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런데 이림보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일은 제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화산은 제왕의 풍수風水가 집중돼 있는 곳인데 어떻게 함부로 채굴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황상皇上께 채굴하라고 아뢰었다면 아마도 좋은 뜻을 품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제가 여러 차례 이 일을 황상께 아뢸 생각을 하였으나 단지 일을 열 수 없었을 뿐이옵니다.”

 

현종 이륭기는 이림보의 말에 감동을 받고 그가 진정으로 임금에게 충성忠誠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신하로 생각했으며, 반대로 이적지에 대해서는 크게 불만을 갖고 점차 그를 멀리하게 됐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이림보는 이 특수한 ‘재능’으로 줄곧 19년 동안이나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후에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펴낼 때 이림보를 평가하여 그가 입에는 꿀을 달고 있지만 뱃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실제에 아주 부합한 말이다.

 

 

 

이 성어는 원래 좀 더 구체적으로 ‘있을 유有’ 자를 넣어서 ‘口有蜜腹有劍구유밀복유검’이라고도 한다.

 

이 성어는 우리 속담의 ‘웃음 속에 칼이 있다’와 같은 의미인데, 이 속담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여럿 있습니다. ‘웃을 소笑’, ‘가운데 중中’, ‘있을 유有’, ‘칼 검劍’ 자로 구성된 ‘笑中有劍소중유검’, ‘검’ 자 대신에 ‘칼 도刀’ 자를 쓰는 ‘笑中有刀소중유도’, ‘笑中刀소중도’가 있고, ‘속 리裏’, ‘감출 장藏’ 자를 쓰는 ‘笑裏藏刀소리장도’도 많이 쓰인다.

 

또 ‘범 호虎’ 자를 쓰는 ‘笑面虎소면호’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호랑이의 성격이 흉악하고 사나워서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생겨났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흉악한 사람을 비유하는데 쓰인다.

 

 

 

【단어】

 

口구: 입. 口(입구)부, 총3획, kǒu

 

蜜밀: 꿀. 虫(벌레충)부, 총14획, mì

 

腹복: 배. 月(육달월)부, 총13획, fù

 

劍검: 칼. (선칼도방)부, 총15획, jiàn

 

 

 

【출전】

 

李林甫爲相, 凡才望功業出己右及上所厚、勢位將逼己者, 必百計去之; 尤忌文學之士, 或陽與之善, 啖以甘言而陰陷之. 世謂李林甫“口有蜜, 腹有劍.”……

 

李適之性疏率, 李林甫嘗謂適之曰: “華山有金, 採之可以富國, 主上未之知也.” 他日, 適之因奏事言之. 上以問林甫, 對曰: “臣久知之, 但華山陛下本命, 王氣所在, 鑿之非宜, 故不敢言.” 上以林甫爲愛己, 薄適之慮事不熟, 謂曰: “自今奏事, 宜先與林甫議之, 無得輕脫.” 適之由是束手矣. 適之旣失恩, 韋堅失權, 益相親密, 林甫愈惡之.

 

-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 현종천보원년玄宗天寶元年 조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8. 10:00




 

 

사자성어

千慮一得천려일득

 

 

 

금주의 한자 ‘천려일득千慮一得’에서,

 

‘千천’은 숫자 1000이나 여기서는 매우 많음을 뜻한다. ‘千載一遇천재일우’란 말이 있는데, ‘천 년에 한 번 만나다’는 뜻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형용하는 말이다. 여기서 ‘실을 재載’ 자는 ‘해 년年’, ‘해 세歲’ 자와 같은 뜻이고, ‘한 일一’ 자는 ‘한 번’, ‘遇우’는 ‘만나다’는 뜻이다.

 

‘慮려’는 ‘생각하다’는 뜻이다. ‘헤아릴 고考’ 자와 결합된 ‘考慮고려’는 ‘깊이 생각하여 헤아리다’는 뜻이고, ‘깊을 심深’, ‘꾀 모謀’, ‘멀 원遠’ 자로 구성된 ‘深謀遠慮심모원려’는 ‘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을 말한다.

 

‘一일’은 숫자 1로서 ‘한 번’을 말한다. ‘얼굴 면面’, ‘같을 여如’, ‘옛 구舊’ 자로 구성된 ‘一面如舊일면여구’는 ‘한 번 만났으나 오랜 벗처럼 친밀해지다’는 뜻인데, 여기서 ‘얼굴 면’ 자는 ‘만나다’는 뜻이며 이 글자 대신에 ‘볼 견見’ 자를 써서 ‘一見如舊일견여구’라고도 한다.

 

‘得득’은 본래 ‘얻다’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타당하다’, ‘정확하다’는 뜻이며 ‘타당한 것’이란 명사로 사용되었다.

 

즉 ‘천려일득’은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타당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서,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면 그 과정에서 언제나 한 가지 정도는 타당한 것이 나올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견에 대해 겸손함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이 말은 《안자춘추晏子春秋》〈잡하雜下〉편에 나온다. 《안자춘추》는 《안자》라고도 하는데, 주周 나라 때 안영晏嬰(서기전 585-서기전 500)의 저작이라고 돼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뒤인 전국시대戰國時代(서기전 475-서기전 221) 말기의 작품이다. 이 책에는 안영의 언행言行이 기술돼 있는데, 여러 고서古書 속에 흩어져 있는 관련 기록과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고 내용은 주로 군주君主에게 간언諫言하는 것과 군주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서기전 770-서기전 476)의 이야기이다.

 

안영은 제齊 나라의 정치가이다. 안영은 제나라의 대부였던 아버지 안약晏弱(서기전 635-서기전 556)이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벼슬을 승계하여 제나라의 경卿이 되어 영공靈公 강환姜環(재위 서기전581-서기전 554), 장공莊公 강광姜光(재위 서기전 553-서기전 548), 경공景公 강저구姜杵臼(재위 서기전 547-서기전 490) 등 3대에 걸쳐 상국相國을 역임했다. 상국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즉 임금 한 사람의 바로 아래면서 만백성의 위에 있는 자리로, 지금으로 말한다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높은 직위이다. 안영은 사람됨이 정직正直했고 벼슬을 하면서는 매우 청렴淸廉했으며 아주 검소儉素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를 매우 존경했다. 특히 공자孔子는 그의 품행과 절조가 고상하기 때문에 그를 형으로 모시려고도 했다.

 

어느 날 안영이 막 점심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경공이 보낸 사람이 그를 만나러 왔다. 안영은 상대방이 임금이 보낸 사람이라 특별 대접을 하느라고 즉석에서 그에게 자기의 밥과 반찬을 반반씩 나눠 주면서 함께 점심밥을 먹었다. 물론 그는 이 식사로 배가 부를 수 없었다.

 

경공은 이 일을 알고 난후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국의 집안이 이렇게까지 가난할 줄은 짐이 이제껏 알지 못했노라. 이것은 짐의 잘못이다!”

 

말을 마치고 경공은 사람을 시켜 안영에게 천금千金을 보내면서 안영이 손님을 접대하는데 쓰도록 했다. 그러나 뜻밖에 안영은 받기를 원치 않고 가져온 사람 즉 사자使者에게 도로 돌려보냈다. 경공이 사람을 시켜 다시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 경공이 사람을 시켜 세 번째로 보내왔을 때 안영이 사자에게 말했다.

 

“전하殿下께 잘 아뢰어 주시오. 나는 결코 빈곤하지 않소이다. 전하께서 나에게 내린 봉록俸祿만으로도 내가 우리 집안사람들을 먹이고 손님들을 접대하는데 충분할 뿐 아니라 곤궁困窮한 백성을 돕는데도 쓸 수 있소. 그러니 나는 전하께서 별도로 내리시는 하사금下賜金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소!”

 

사자도 매우 난감難堪해서 안영에게 사정했다.

 

“상국, 저는 전하의 명을 받들고 이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상국께서 이번에도 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절더러 어떻게 돌아가서 전하께 아뢰란 말씀입니까?”

 

안영은 생각을 좀 해 보더니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당신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서 직접 전하께 사양한다는 말씀을 드리겠소.”

 

궁궐로 간 안영은 경공을 알현謁見하고 자신에게 베풀어준 후한 사랑에 감사드리고 아울러 신하의 한 사람으로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으면 됐지, 과다한 재물을 가질 수는 없으니 전하께서 자신에게 특별히 내리는 상을 받도록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뜻을 아뢰었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는 안영을 더욱 존중했고 그래도 그에게 천금을 하사하려 했다. 경공은 하나의 예를 들었다.

 

“옛날 우리 제 나라의 현명한 재상인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을 위해서, 그 분을 당시 각 제후국 최초로 맹주로 만들어 대공을 세웠소. 환공은 보답하기 하기 위해서 그에게 수많은 봉토封土를 상으로 하사하셨는데 관중은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받았소. 그런데 상국은 어째서 사양한다 말이오?”

 

안영이 대답하였다.

 

“저는 이러한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인도 천 번을 생각하면 언제나 한 번의 실수는 있기 마련이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을 생각하면 언제나 한 번의 타당함은 있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관중은 이 일을 생각하는데 실수를 한 듯하고, 저는 비록 어리석지만 이 일은 정확하게 처리한 듯합니다.”

 

경공은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서 마침내 상을 거두었다.

 

 

 

이 성어는 원래 이러한 말에서 나왔다.

 

“聖人千慮성인천려면, 必有一失필유일실하고 愚人千慮우인천려면, 必有一得필유일득이라.” 즉 성인이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실수가 있기 마련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타당한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千慮一失천려일실’이란 말도 나왔는데, 이 말은 ‘성인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실수가 있다’는 뜻으로서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수많은 생각을 하다보면 언제나 실수할 때가 있음을 의미한다.

 

【단어】

 

千천: 1000. 천. 十(열십)부, 총3획, qiān

 

慮려: 생각하다. 心(마음심)부, 총15획, lǜ

 

一일: 1. 한번. 一(한일)부, 총1획, yī

 

得득: 얻다. 타당하다. (두인변)부, 총11획, dé

 

 

 

【출전】

 

晏子方食, 景公使使者至. 分食食之, 使者不飽, 晏子亦不飽. 使者反, 言之公.

 

公曰: “嘻! 晏子之家, 若是其貧也. 寡人不知, 是寡人之過也.” 使吏致千金與市租, 請以奉賓客. 晏子辭, 三致之, 終再拜而辭曰: “嬰之家不貧. 以君之賜, 澤覆三族, 延及交遊, 以振百姓, 君之賜也厚矣! 嬰之家不貧也. 嬰聞之, 夫厚取之君, 而施之民, 是臣代君君民也, 忠臣不爲也. 厚取之君, 而不施于民, 是爲筐篋之藏也, 仁人不爲也. 進取于君, 退得罪于士, 身死而財遷于, 是爲宰藏也, 智者不爲也. 夫十總之布, 一豆之食, 足于中免矣.”

 

景公謂晏子曰: “昔吾先君桓公, 以書社五百封管仲, 不辭而受, 子辭之何也?”

 

晏子曰: “嬰聞之, 聖人千慮, 必有一失; 愚人千慮, 必有一得. 意者管仲之失, 而嬰之得者耶? 故再拜而不敢受命.”

 

- 《안자춘추晏子春秋》〈잡하雜下〉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7. 13:30

 

 

 

소백산의 추억

 




 

대학교를 다닐때 일이었습니다. 

동아리 하계 M.T 답사차 선발대로 소백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소백산으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버스에서, 커브를 돌때마다 이리저리 몸이 쏠리고 심지어 날라다니는 것에 당황하면서도 그 상황이 웃겨서 우리는 탄성을 지르고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버스 안을 둘러보니 자리에 앉으신 어르신들은 '무슨 일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평온하게 앉아있었습니다. 무안함에 서로의 얼굴만 보며 키득거리다가 드디어 소백산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저에게 소백산은 놀라움으로 다가 왔습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과 우뚝우뚝 선 바위들. 하늘을 가릴 듯 울창한 수풀.

밤이 되자 산 기슭에는 어둠이 가득 메워졌고, 머리 위로는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인공적인 불빛이라고는 없는 산에서는 코 앞으로 내민 주먹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짙었습니다. 그 침묵사이로 들려오는 물 소리는 너무나 신비로웠습니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흘러서 어른이 되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탁 트인 무량수전의 뜨락에 서서 마치 바다처럼 너른 소백산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름다운 능선들 어느 곳이 바로 대학생때 가보았던 소백산의 그 자락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또한, 안동의 하회마을과 병산의 서원과 임청각의 우물이 그 소백산 줄기가 굽이쳐 멈춘 곳에 자리잡은 우리네 오랜 삶의 터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산. 그리고 사람.

 

내내 같은 굴곡의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는 높은 산마루로 떨어진 빗방울이 계곡을 타고 흐르며 개울이 되고, 다시 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듯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을 쉼없이 도는 수레바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모든 강이 흘러 멈추는 바다는 생명의 고향이자 동경으로 불리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은 저 대자연속에서 왔다가, 다시 대자연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신 태상종도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6. 08:38




 

 

왜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해질까요?

 

 

 






"와.. 바다다!"

 

"너 왜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지는지 알아?"

 

"글쎄..? 갑자기 그 노래 생각나는데?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 ♪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가면.. 이 노래도 있지;;"

 

"후훗 그러고보니 그 노래들도 웬지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치? 왜 마음이 편안해지냐면..."

 

"와.. 유성이다."

 

"대자연앞에 서면, 난 그저 작은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다는걸 인정하게되면서 겸손해지기 때문이야.."

 

"응...?"

 

"가끔 힘들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잖아. 어머니. 고향에 계신 어머니말야. 그럴때 어머니 곁에서 그냥 얼굴만 바라봐도 상처 받았던 마음이 치유되고 편해져서 그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이유 같은거야"

 

"음.. 왜 그런걸까?"

 

"글쎄... 엄마는 내가 똥싸고 코 흘리던 철부지 애기때부터 내 못난거, 바보같은 거 다 본,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잖아. 그래서 엄마 앞에서는 편하고 겸손해지는거 아닐까?"

 

"응 맞어 칠순이 넘은 노인도 어머니 앞에서는 아기가 되잖아. 갑자기 엄마 보고 싶다...."

 

'우리에게 신神은 그런 존재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5. 05:00






 

 아프리카 아이들의 실험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 연구하던 중이었습니다. 하루는 부족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게임을 제안했습니다.

 

나무 옆에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놓고 누구든지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주겠노라 한 것이지요. 


 


인류학자의 말이 통역되어 전달되자마자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은 채로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 입안 가득 과일을 베어 물고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인류학자가 아이들에게 "누구든 일등으로 간 사람에게 과일을 몽땅 주려고 했는데 왜 손 잡고 함께 달렸지?"고 물어보자 아이들의 입에선 "UBUNTU"라는 단어가 합창하듯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 있나요?”

 

- UBUNTU는 아프리카 코사(Xhosa)어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4. 02:30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일 중에 하나가 '스마트폰을 통해서 뉴스를 읽는 것'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육하원칙에 의해 쓰여진 비슷한 문체의 기사들.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지 오래인데, 문제는 머리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간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송지나 작가가 썼던 고 김종학PD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다녀왔습니다'로 시작되는 그녀의 추모 글.

 

왠지 마음을 적시는 글에 정신을 뺏겨서 그녀의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바드 대학의 한 교수는 '말이 많은 부모'와 그렇지않은 부모를 비교해서 그들 자녀의 뇌속에 생기는 시냅스의 차이점을 연구해놓았습니다.

 

결론은 대화가 많은 부모의 자녀에게서 훨씬 더 많은 시냅스들이 정리되어 있고 연결되어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수십년동안 자녀는 부모와 함께 살아갑니다.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듣는 '말'을 통해서 자녀들은 어휘력과 사고력을 배우게 됩니다.

 

'비 온다. 빨래 걷어라' 하는 어머니의 말보다, '해가 짱짱한데 비가 오네, 여우가 시집 가는가보다'하는 말에 아이들의 사고력과 어휘력이 훨씬 더 발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3. 08:22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라! TED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이름은 류지현입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만 현재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면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냉장고를 지나치게 신뢰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습관 때문에 사라지고 있는 음식저장에 관한 전통 구전지식을 향한 제 열정을 여러분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특별히 오늘은 제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라(save food from the fridge)'를 소개하려고합니다.

 

프로젝트 이름이 왜 “save food from the fridge”일까요? 첫째로 '음식을 낭비되는 것에서 구하자'는 의미입니다.

 

유럽을 보자면 구매한 식재료의 30%가 그냥 버려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냉장고 사용을 들 수 있는데요. 냉장고에 사온 식재료를 다 집어넣고는 뭐가 있는지 잊어버리고는 하죠.

 

두 번째 의미는 '음식이 맛과 영향을 잃지 않도록 구하자'라는 것입니다. 냉장고에 보관하는 많은 채소와 과일들은 실제로 냉장고 안의 차가운 온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이런 지식들을 잘 모르죠.

 

냉장고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알고 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식재료를 관찰하고 그들의 특성을 이해하며 자신들만의 지식과 방식을 개발할 수 있었죠. 저는 사람들과 그들이 먹는 음식 간의 관계를 다시 가깝게 되돌려놓고 싶습니다.

 

그동안 할아버지 할머니들 혹은 농부들을 대상으로 조사해왔는데요. 그중에서 몇몇 지식들은 우리의 부엌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물건으로 디자인 했습니다.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할 수 있는 물건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을 지식전달에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몇몇 예를 보여드릴께요. 감자와 사과를 함께 보관하면 사과에서 나오는 가스덕에 감자를 좀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감자는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서랍 안쪽에 넣고요. 사과는 그 위쪽으로 나 있는 구멍에 넣습니다. 이 구멍을 통해 사과의 가스가 감자와 소통을 하는 것이죠.

 

이 방식으로 감자를 더 오래 보관하면서도 예쁜 사과의 모습을 감당할 수도 있는 것이죠.

 


두 번째로 뿌리 채소를 보관할 때 보통 뉘여서 보관하는데요. 실제 뿌리채소들이 누워 있으면 다시 서려고 에너지 에너지를 더 쓴다고 합니다. 항상 살아왔던 자세이기 때문이죠.

 

모래를 이용하면 뿌리채소를 세워 보관할 수 있습니다. 모래는 과거 농부들이 작물을 보관하는 데 이용하던 중요한 재료였습니다.

 

모래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는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채소들이 서로 부딛쳐 상처를 내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가지, 호박, 오이 등은 보통 채소라고 생각하지만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입니다. 즉 일반적인 과일들이 가지고 있는 '냉장고에 있으면 안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박은 영상 7도 이하에서는 냉방병에 걸립니다.

 

냉장고 안이 보통 영상 0~4도 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런 채소들을 냉장고에 보관하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맛도, 영양도 잃게 됩니다.

 

우리가 겨울에 하루종일 밖에 서 있으면 감기에 걸리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어요.

 

채소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달걀의 경우 슈퍼마켓에서 기껏 냉장고 밖에 있는 것을 사와서는 집에 오면 냉장고 안에 넣습니다.

 

하지만 달걀 표면에는 수백만개의 작은 구멍이 있기 때문에 냉장고 냄새를 다 흡수합니다. 달걀을 냉장고에 넣는 건 그리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거죠.

 

냉장고 밖에 보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채소나 과일과는 다르게 달걀은 겉에서만 봐서는 상했는지 알 수가 없죠.

 

보시는대로 물그릇을 이용하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달걀을 물에 넣어봤을 때 가라앉으면 신선한 것입니다. 뜨면 상한 것이고요.

 

디자인 오브젝트를 만드는 것 외에도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방문하셔서 다른 사람들이 공유한 지식들도 확인하시고 알고 계신 지식도 공유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2. 02:00




[TED] 의식, 최후의 개척지 

강연을 시작하며: 나는 왜 요기가 되었나




 


 

고맙습니다. 메리가 제 이름을 부를 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도 그보다 더 잘 발음할 수 없었을 겁니다. (웃음)

 

약 25년 전, 저는 의과대학 졸업학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꽤 오랫동안 제 직업 선택에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친절한 작은 할머니의 피를 뽑으러 갔는데 정맥 대신에 동맥을 건드렸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방에 피가 뿜어 나올 때 저는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맞아. 넌 확실히 직업을 잘못 찾았어.” (웃음) 따라서 관계된 모든 것들의 이익을 위해, 저는 학교를 중퇴하고 대신 요기가 되었습니다. (웃음) (박수)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제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여러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요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개념, 즉 내면의 우주, 내면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와 외부의 우주, 우리 외부의 모든 것에 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우주를 지구의 크기라고 하면 우리 지구는 핀 머리 크기의 약 10억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런 핀의 10억분의 1 크기란 말이죠.

 

 

저는 지금 핀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제 소품이에요. (웃음) 자, 보시죠. 같은 핀입니다. 실제로는 같은 핀입니다. 이런 핀들 중 하나의 10억분의 1크기인 거죠 우주가 지구 크기라면.

 

 

그런데 핀 머리의 십억 분의 일 크기는 모래 입자의 약 백만 분의 1 정도 또는 원자의 평균 크기 정도입니다. 둘 중 선택하세요.

 

 

어쨌든, 아이디어는 그것이 우주의 크기에 비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작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크기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되나요? 저는 이것이 우주의 크기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복잡한 우주는 어떤 의도도 없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전화기와 노트북 컴퓨터가 설계 또는 제작한 사람 없이 갑자기 생겼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물학자 루퍼트 쉘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적을 공짜로 주면 우리가 그 나머지를 설명해 주겠다.’라는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웃음) “그 하나의 기적이란 무로부터 한 순간에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수천 년 동안 요가 과학이 말해온 결론,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어 갈 우주에 대한 설명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본질과 의도는 우리가 보통 마음과 감각으로 느끼는 물질적 실재보다 더 깊은 실재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실재는 의식(consciousness)입니다.  모든 사람과 만물에 내재된 보편적인 행복한 인식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여러분 마음의 본질이듯이, 우주 의식은 전체 우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만물 안에 존재하며 만물은 그 안에 존재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은 의식의 일부이며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우주를 물질주의적으로 보는 세계관 vs.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세계관

 


그러나, 그 이유를 지금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현대 세계관에서는 더 고차원적인 의식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현대과학은 현실을 매우 기계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물질, 공간이 모두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떨까요? 

 

만약 모든 면에서 의식이 지금 우리 현실의 구성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고차원적 현실이라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매우 심각한 단점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아주 실질적인 이점을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주를 임의적이고, 기계적이며, 감각이 없다고 보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소외되고, 외롭고, 두려워하고, 우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문제들 속에서 그것을 너무 자주 봅니다. 물질주의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낙관론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행복한 의식을 가진 우주에서, 우리는 사람들과 세상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랑받고, 희망적이고, 행복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스승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께서는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고 무력하지 않다. 별을 인도하는 힘이 당신을 인도한다.”

 


그래서 저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세계관보다는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서 성취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세계관을 인정하려고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면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다

 


우주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세계관의 이점은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들 중 어느 것 보다도 유효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의 본질은 의식이라는 전제는 우주의 본질이 물질이라는 전제와 마찬가지로 유효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는 감지되고 다른 하나는 감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과학적 측정을 통해 물질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의식은 내면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우리 자신 안에서 찾아야 만합니다.

 


나살 우템이라고 불리는 수피 신비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며칠 동안 터키에 있는 그의 고향에 실제로 머물렀죠. 그의 기괴하고 유머러스한 가르침의 방식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그가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가로등 아래에서 열쇠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내 집 열쇠를 찾고 있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어디에서 그것을 잃어버렸나요?”그녀가 물었습니다. “집안 어딘가에서요.” 행인은 당연히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집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왜 밖에서 찾고 있나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집안이 어둡기 때문이에요.” (웃음)

 

 

 

우리는 올바른 것을 올바른 장소에서 찾아야합니다. 비록 거기서 그것을 찾기가 어렵더라도 말이죠. 겉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속은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식은 내면에 있으므로 내면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머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게 함정입니다.

 

 

의식은 우리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구를 생각해보십시오. 방의 전구는 주위에 빛을 비출 수 있지만 그것을 빛나게 하는 힘, 전기에는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주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의식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고의 정상적인 기능과 말을, 심지어 생각 자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핵심은 생각은커녕 말조차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데카르트의 이 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요가 철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멈추었을 때 나는 진실로 존재한다.” (웃음)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거나 과학적으로 무언가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며, 마음의 문제는 생각으로 파헤쳐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과학으로는 결코 인간이란 무엇인지의 핵심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내부의 가장 깊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본질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고차원적 실재로 규정한 과학자들

 

 

 

지금쯤이면, 여러분은 제 말씀이 조금 실체가 없고 뉴에이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웃음)

 

 

그래서 의식을 더 고차원적 실재일 것이라고 인정한 과학자들에 대한 간단한 예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합니다.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끝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웃음)

 

 

 

양자이론의 아버지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의식이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물질을 의식의 파생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가정한다.” 이것은 양자론의 선구자가 한 말입니다.

 

 

 

얼마 후,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James Jeans)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식의 흐름은 비물질적 실재로 향하고 있다. 우주는 위대한 기계보다는 위대한 생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설득력을 드리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웃음)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감정은 신비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모든 과학의 근원이다. 

 

 

무한의 우주 안에서 드러나는 최고 이성의 힘을 지닌 존재에 대한 깊은 감정적 확신이 내가 신에 대하여 지닌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더 높은 의식을 실제로 경험 한 현대 과학자의 예를 들어주고 싶습니다.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 박사는 많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뇌가 의식을 창출한다고 믿어온 신경과학자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매우 드문 뇌 감염에 걸려서 일주일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시 그는 임상적으로 뇌사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조되고 깨우친 의식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7일간의 혼수상태 동안 나는 완전히 의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평화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놀라운 세계를 여행했다. 나는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엄청난 경험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 박사는 이제 뇌 과학계가 “유치원에서 졸업”하고 뇌가 현실을 창출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명상: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체험을 통해 고차원적 의식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

 

 

 

이제 다행스럽게도 여러분과 저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개인적으로 의식을 확인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명상이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상은 의식이 순수하게 직접적인 내적 경험에 의해 구체화되는 직관적인 과학입니다. 명상을 통해, 지금 이 방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나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실재하는 고차원적 의식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저는 방 전체가 인식과 행복으로 진동하는 의식의 장으로 가득 차있다고 느꼈던 특별히 빛나는 명상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하고 실감났습니다. 당시 그것은 마치 칼로 자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당시에는 너무나 현실과 같아서 저는 아직도 그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상을 통해 우리를 궁극적으로 의식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그런 많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금 명상을 통해 더 높은 의식을 경험해보면 어떨까요? 함께 해 볼까요?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늘 여러분이 명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동안 여러분이 눈을 감아 주시길 권합니다.

 

 

숨 쉬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세요. 물론 긴 하루였을 테지만요.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십시오. 자신의 중심을 느껴보십시오. (음악 재생 시작)

 

 

이제 여러분이 완전히 평화롭게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가득한 평화와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주위에 가득한 무한한 행복을 느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그 무한한 행복에 합류하는 것을 느껴 보세요. 여러분의 인식 감각이 여러분을 둘러싼 무한한 인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의식이 주변의 무한한 의식과 합쳐지고 있다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과 하나 되는 느낌. 여러분이 그것과 하나라고 느껴보십시오. 여러분이 무한한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몇 초간 계속하십시오.

 

 

 

좀 더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셨나요? 그런가요? 아닌가요? (청중: 네.)

 

 

어쨌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의식이 전체 우주의 의식과 하나라는 가능성에 대해 지금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의식이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을요. 또한 그것은 진짜이며, 정말로 노력한다면 느낄 수 있다는 것을요.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뿐만 아니라 여러분 존재의 핵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현실이 더 보편적인 현실임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의식 안에서 더 큰 의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감, 존재감을 더 확장할수록 우리는 모든 존재에 더 큰 연결감을 느낍니다.

 

 

더 행복해지고, 덜 두려워하고 덜 외롭습니다. 만물이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가 만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내면을 향한 탐구는 모든 사람들, 동물, 식물 ... 모두의 포용을 용이하게 합니다. 행성, 다른 행성의 사람, 동물 및 식물도요. 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주 전체입니다.

 

 

 

저는 의사소통 및 운송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이 더 좁아지는 것처럼 명상 기술의 발전으로 우주도 더 좁아질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은 개인의 존재감각, 즉 그의 가슴이 원하는 바에 머문다.” 슈리 슈리 아난다무르티

Posted by 천연감성
잡학2017. 7. 11. 18:02




 

 

서양철학사상

인식론

 

 

 

1. 인식(認識, Episteme)이란 무엇일까?

 

一切(일체)가 惟三神所造(유삼신소조)오

(만유의 일체가 오직 삼신이 지은 바다)

 

心氣身(심기신)이 必修相信(필수상신)이나 未必永劫相守(미필영겁상수)하며

(마음과 기운과 몸은 반드시 서로 의지해 있으나 영원토록 서로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靈智意三識(영지의삼식)이 卽爲靈覺生三魂(즉위영각생삼혼)이나 亦因其素以能衍(역인기소이능연)하며

(영식 지식 의식의 세 가지 앎[삼식]은 영혼 각혼 생혼의 세 가지 혼을 생성하지만, 이 또한 삼식三識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 뻗어 나간다)

 

形年魂(형년혼)이 嘗與境(상여경)으로 有所感息觸者(유소감식촉자)오

(육신과 목숨과 혼이 주위 환경과 접하는 경계에 따라 이른 바 느낌과 호흡과 촉감이 있게 되는 것이고)

 

而眞妄相引(이진망상인)하야 三途乃歧(삼도내기)하니라.

(성명정性命精의 삼진과 심기신心氣身의 삼망三妄이 서로 이끌어 감식촉感息觸의 삼도三途로 갈라진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1) 어떤 앎들이 있을까?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모두가 끝없이 닥쳐오는 문제에 직면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들은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해 각기 어떻게 대처하여 생존해 가는 것일까? 여타의 생명체와 인간의 대처 방법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여타의 생명체는 문제에 대해 본능에 의존하여 대처하지만, 인간만은 본능과 더불어 궁리와 생각에 의존하여 문제에 대응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인간의 궁리와 생각, 이것에 관련하여 과학의 천재요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팡세Pensees』에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도 가장 가냘픈 한줄기 갈대와 같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했다.

 

급변하는 생존환경에 직면하여 인간은 궁리와 생각을 통해 삶의 보존과 질적인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도모해 왔다. 궁리와 생각을 통해 얻어낸 것은 다름 아닌 앎이라고 하는 것, 즉 지식이다. 그래서 앎(지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삶의 본질적인 방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릇되게 하거나 미궁으로 빠져들게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E 384~322)가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욕망한다”고 말했던 것을 되짚어 보면, 인간은 모르는 것을 열광적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진실을 파악하고 그릇된 앎을 바로잡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 노력하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많이 알아라, 그러면 선善해진다”는 말은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BCE 470~399)의 말이다.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해 보면 사람이 무지無知하면 할수록 악惡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속담에는 “알면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삶의 여정을 돌이켜 보면, 교묘하게 도둑질하는 것도 알아야 할 수 있고, 개과천선改過遷善도 알아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만인에 베푸는 선행도 알아야 행할 수 있고, 근사하게 사는 것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도대체 이러저러한 앎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것일까?

 


앎이 나오는 통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안다’란 말을 아주 다양한 방식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을 갖고 있고, 앎은 곧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지식을 망라하여 그것이 생겨난 통로를 세별해 보면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된다. 소위 외부와의 직접적인 감각[오관五官: 눈, 귀, 코, 혀, 피부]을 통하여 생겨난 지식, 감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서 얻어 내는 지식, 감각과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제3의 지식, 즉 대상들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의 지식이 그것이다.

 

첫 번째는 소위 감각을 통한 경험적 지식을 꼽을 수 있다. “손을 불에 가까이 대면 뜨겁다는 것을 안다”, “똘똘이는 자신의 키가 180cm임을 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을 안다”, “대전에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사과는 빨갛다는 것을 안다” 등과 같이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 그것이다. 나아가 “나는 지금 배가 몹시 아프다는 것을 안다” 등과 같은 심정적인 사건에 대한 지식, “불이 나면 연기가 남을 안다”와 같이 원인과 결과에 대한 탐구로 얻어낸 과학적 지식, 지나간 역사적인 사실이나 사건 사고와 같은 앎도 기원을 추적해 가면 감각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험 관찰을 통해 획득한 것이거나 역사적인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알았던 지식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소위 이성을 통한 직관이나 추론적 지식이다. 경험적으로 획득된 지식이 아닐지라도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과 소나무는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안다”, “까투리는 암꿩임을 안다” 등과 같은 지식은 이성의 사유를 통한 직관이나 추론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수학적 지식, 논리학적 지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근원이 있음을 안다”와 같은 형이상학적 지식, “나는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안다” 등과 같은 가치론적 지식 또한 자유나 선악이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성적 지식에 넣을 수 있다.

 

세 번째는 감각을 통한 경험적 지식도 아니고 추론을 통한 이성적 지식도 아닌 깨달음을 통한 영적 지식이다. 경험적 지식은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고, 이성적 지식은 감각적인 경험이 아닌 정신적인 사유를 통해 추론해서 나온 것이지만, 깨달음을 통한 영적 지식은 양자를 넘어선 신적神的인 세계에 대한 앎이다. 영적 지식은 감성의 눈으로 봐서 아는 것도 아니고, 이성의 눈으로 봐서 아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깨달음을 통한 앎은 제3의 영적靈的인 눈으로 봐야 한다. “의식의 스펙트럼”을 말하면서 종교적인 의미를 풍부하게 역설한 켄 윌버Ken Wilber(1949~ )는 관조觀照의 눈을 제시한다. 관조의 눈을 통해 얻어낸 영적 지식은 현묘玄妙한 신의 존재, 불가에서 말하는 중도실상中道實相, 유가에서 말하는 시중지도時中之道, 도가에서 말하는 시공時空이 멈춰버린 무無에 대한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재存在와 인식認識은 불가분의 관계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되든지 이성적 직관을 통해서 알게 되든지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되든지 간에, 앎에는 앎의 대상 이 일단 주어져야 하고, 이들에 대한 앎은 확실성의 정도가 매겨질 수 있다. 대상에 따라 확실하지 않은 지식에서부터 가장 확실한 지식에 이르기까지 등급이 있음을 최초로 역설한 철학자가 있는데, 바로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학적으로 체계화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BCE 427~347)이다. ‘실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가 된다’는 이념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플라톤은 대상에 대한 확실성의 정도에 따라 앎을 분류한다. 여기로부터 그는 존재란 곧 인식일 수 있음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대상에 대한 앎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앎을 갖게 되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대상에 대한 탐구는 소위 존재론적 탐구의 영역에 속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앎을 얻게 되는가의 문제는 인식론적 탐구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존재론存在論(ontology)과 인식론認識論(epistemology)은 불가분의 관계가 될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가 참되지 못하면 앎도 불확실하게 되고, 참되게 존재하는 것이라면 곧 참된 인식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앎의 대상을 구분해 보면 크게 세 측면, 즉 없는데도 있다고 믿고 있는 것(허구), 생성변화하면서 항시 유동하는 것(감각의 대상들), 항상 그대로 존속하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이에 대응해서 앎의 획득과정은 신체적인 감각을 통해 감성으로 아는 것, 감각과 사유의 합작으로 아는 것, 지성의 논리적인 추론이나 직관을 통해 아는 것, 관조를 통한 영적인 깨달음으로 아는 것으로 구분하여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인식이 대응해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는 플라톤은 우선 참된 진리인식과 그렇지 않은 앎(지식)을 구분한다. 유동적이며 확실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앎과 고정적이며 영원한 존재에 대한 앎이 그것이다. 그는 전자의 경우를 억견臆見(doxa)이라 했고, 후자의 경우를 인식認識(episteme)이라 했다. 억견은 앎의 대상이 없거나 유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진리가 아닌 것이고, 인식은 앎의 대상이 고정적인 존재로 확실하고 영원한 진리라는 얘기다.

 

억견은 감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실하지 않은 앎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망상妄想(eikasia)이고, 다른 하나는 의견意見(pistis)이다. 망상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환영과 같은 대상에 대한 앎이고, 의견은 항상 유동 변화하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사물에 대한 앎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데 있는 것처럼 주관적인 상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망상이다. 캄캄한 산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멀리에 빤짝거리는 불빛을 보고 도깨비불로 알고 있거나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것을 보고 폐렴에 걸린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망상에 속하는 앎이다. 감각으로 경험하는 대상들에 대한 앎은 의견이다. 이는 물이 담긴 유리컵 속에 꽂혀 있는 젓가락을 보고 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든가, 여름에 은행나무 잎이 파랬다가 가을이 되어 노랗게 물들어 변화했는데, 은행나무 잎이 파랗다고 알고 있는 경우들이 의견이다. 감각을 통한 앎은 대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모두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인식은 순수 이성적인 사유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확실한 앎을 뜻하는데, 감각이 아니라 이성적인 논증이나 직관, 혹은 영적인 깨달음과 같은 앎이 여기에 속한다.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앎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이성적 사고를 통해 증명하여 얻어내는 논증論證(dianoia)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영적인 깨달음, 즉 순수 이성의 관조적 직관直觀(noesis)이다. 논증이란 감각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지만 순수 사유를 통해 추론하여 아는 지식이다. ‘같음’은 ‘다름’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거나,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든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임을 아는 경우, 사물의 실체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定義 등도 모두 이에 속하는 지식이다. 관조적 직관은 순수 이성을 통해 항존하는 근원의 존재에 대한 신적인 깨달음, 즉 형이상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데아Idea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플라톤은 이 두 종류의 앎만이 진정한 진리인식이라 했다.

 

플라톤이 제시한 진리인식은, 엄격한 의미에서 말해볼 때,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앎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올바른 인식은 논증적인 것과 이데아에 대한 앎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감각을 넘어서 있는 수학적인 대상이나 사물로부터 추상화된 보편 개념, 혹은 근원의 존재에 대한 것만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앎 또한 확실하고 불변하는 인식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평소에 ‘안다’는 말을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하면서 앎이 모두가 인식이 되는 것처럼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학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식은 아주 느슨한 의미의 앎, 혹은 넓은 의미의 지식을 통칭하는 것 같다. 만일 지식이 곧 인식이라는 생각을 근저에 깔고서 어떤 대상이나 사태들에 대하여 우리가 안다고 말한다면, ‘안다’고 할 때 그 앎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지, 얼마나 알 수 있는지, 나아가 엄격한 의미의 인식으로 진리眞理의 반열에 들어올 수 있는 앎인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무엇에 대해 ‘안다’고 할 때 그 주장이 타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면, 그 앎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진리인식으로 통용돼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분야에서 탐구된 앎들이 어떻게 진리인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여러 학문에서 ‘인식한다’고 하는 다양한 진술들을 검토하고, 각각의 주장에 대하여 무엇을 타당한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살피며, 어떤 의미에서 진리인식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이 진정으로 진리인식인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앎의 의미, 앎의 근거, 앎의 기준 등을 따져 묻는 것은 철학의 한 분야, 즉 인식론(epistemology)에서 탐구된다고 할 수 있다.

 

2) 진리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감각적 사고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은 바로 앎이다. 앎을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첫 번째의 관문은 이른바 감각기관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생겨난 앎은 바로 감각感覺(sense)이기 때문이다. 만일 감각기관이 마비되기라도 한다면 감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인 앎은 전혀 없을 것이다. 시각장애나 청각장애가 그러한 예들이다. 만일 태어날 때부터 감각기관 전체가 마비된다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감각을 통한 어떠한 앎도 형성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게 된다.

 

일차적인 앎을 제공하는 감각은 크게 두 가지 경로로부터 나오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외적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 감각’이다. 외적인 감각이란 오관(五官, 즉 눈, 귀, 코, 혀, 피부)을 일컫는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유발한다. 눈으로는 시야에 전개되는 것을 보며, 귀로는 모든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으며, 혀로는 사물의 맛을 보고, 피부의 접촉으로는 부드럽고 단단한 것을 감지한다. 반면에 내적 감각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따라 느끼고, 바라며, 의도하는 것들을 총칭한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어떤 때는 귀찮고 슬프며 우울함 등을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은 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감각은 곧 앎이 되는데, 이러한 앎을 우리는 인식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감각은 우리가 인식을 얻는 데에 기초적인 조건으로서의 수단은 될지언정 확실한 앎을 제공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것’을 감각했을 경우 이는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단순히 어떤 감각적 영상 내지는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빨간색’, ‘둥근 모양’, ‘먹음직스러움’ 등은 단순히 감각에 의한 영상 내지 표상이며, 이것만으로는 인식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다양한 감각적 영상 내지 표상들을 정리하고 조직하여 어떤 판단이나 명제로서의 “지각知覺(perception)”에 이르러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곧 지식이요, 그것은 판단이나 명제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이것은 사과이다”와 같은 명제가 그것이다.

 


감각지각은 진리인식인가?

그러면 감각으로 지각된 개별적인 판단이나 명제는 모두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또한 앎(지식)은 될지언정 모두 인식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앎이 진리인식의 규준을 통과하려면 ‘보편성普遍性’과 ‘항구성恒久性’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을 검토해 보자.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대화편 『테아이테투스Theaetetus』, 151e~152b에서 진리론을 검토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BCE 485?~410)의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소개하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 무엇이든 내가 아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나타내 보인 그대로이며, 네가 아는 것은 그것이 너에게 나타내 보인 그대로이다. … 너와 나는 인간이다. … 그러므로 어떤 것을 인식하는 자는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며, 지각은 인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인용문이 말해주듯이 프로타고라스는 각자 개별적인 감각지각이 곧 인식이요 진리임을 천명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감각지각이 정말 진리인식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정적인 비판을 가한다 : 만일 ‘인식’과 ‘지각’이 동일한 것이라면, 어떤 자의 꿈속에서 가지는 지각이나 정신 이상자가 가지는 지각이나 혹은 무지한 자가 가지는 지각이나 모두 인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상식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심지어 개별적인 감각지각에 나타난 것이 모두 인식이라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주장에 근거해 볼 때, 어떤 자는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것이 ‘사과’라고 할 것이고 어떤 자는 ‘토마토’라고 판단하여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빨갛고 둥근 모양의 먹음직스런 것은 ‘사과’이면서 동시에 ‘토마토’라는 귀결이다. 이런 주장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감각지각은 객관적으로 ‘보편성’과 ‘항구성’을 확보할 수 없다. 결국 감각지각이 진리인식이라는 주장은 부당하다. 왜 그런 것일까? 만일 참된 지식 즉 인식이 성립하려면 두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불변적이고 항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대상을 탐구하는 주체 또한 불변적인 확고한 인식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세계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이다. 또한 개별적으로 감각지각을 하는 주체는 그 능력에 있어서 천차만별이고, 주관적인 감정 상태가 일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개별적인 감각지각에만 의존한다면 결국 참된 진리인식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개별적인 감각지각은 회의론에 봉착한다는 견해

심지어 인식이 개별적인 감각지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란 없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인식이 개별적인 감각지각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결국 회의론(scepticism)에 빠지게 된다는 입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극단적으로 설파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인 고르기아스Gorgias(BCE 485~385)이다. 그의 극단적인 회의주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참된 실재란 없다.”(감각적인 대상들은 항상 유동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인식은 고정적이고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주관이 다른 각자는 주관대로 받아들이므로 보편적인 인식일 수 없다)

 

이와 같은 개별적인 감각에 직접 주어지는 지각만이 진리인식일 수 있다는 주장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진리에 대한 회의론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심지어 진리인식이 전적으로 감각적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판단, 즉 “지구는 몇 백억 년 전에 생겨났다”고 하는 과학적 지식이나 “전지전능한 절대자는 우주세계를 권능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종교적인 명제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어떻게 인가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도 발생한다. 일련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인식인가에 대한 방법적 통찰을 개괄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식의 필연적 진리와 우연적 진리

먼저 학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진리의 의미와 기준을 검토해 보자. 직접적인 감각지각으로 아는 것이든 감각을 넘어서 있는 것들을 이성적 직관으로 아는 것이든, 이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가질 때에만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일련의 이런 내용들에 대한 진리성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인식론에서 다뤄져야 할 중요한 과제라 본다. 즉 참된 앎의 의미, 근거, 기준 등을 따져 묻는 것이 인식론의 분야가 되기 때문이다.

 

인식에 대한 문제는 최소한 언표 형식의 판단 내지 명제 차원에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인식이 성립하는 형식적 장소는 판단이나 명제에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과”, “사람”, “귀신” 등은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만으로는 허위인지 아닌지, 진리에 대한 인식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사과는 빨갛다.”, “그는 거짓말쟁이다.”처럼, 주어에 대한 서술 형식을 갖춘, 판단 내지 명제의 형식으로 주어져야만 주장이 성립되고, 주장에 대한 진리인식의 문제를 따져볼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럼 어떤 판단(명제)이 진리인식이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먼저 대표 격으로 전통적으로 논의된 주장, 즉 항상 참일 수 있다고 하는 “필연적 진리”와 개연적으로 참일 수 있다고 하는 “우연적 진리”에 대하여 검토해 보자.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대부분은 감각지각에 의존해서 유용하게 살아간다. 즉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앎이나, 이런 앎으로부터 이루어진 지식을 가지고 현실적인 삶을 편리하게 영위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이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네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 “대전에는 지금 비가 몹시 내리고 있다”, “네가 찾고 있는 여자는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부여는 백제의 옛 수도이다” 등은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 얻어낸 앎에 속한다. 반면에 감각지각으로부터 얻어낼 수 없는 앎도 우리는 진리로 받아들여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에 둘을 더하면 셋이 된다”,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 “99에다 75를 더하면 174가 된다”, “총각은 장가를 가지 않은 건장한 청년이다”,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욕망한다” 등이 그것이다.

 

진리의 측면에서 볼 때, 감각지각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앎과 이성의 추론을 통해 얻어내는 앎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와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이들 두 진술들 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 : 우연적 진리, 경험적 또는 후천적 지식, 종합적 명제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 : 필연적 진리, 논리적 또는 선천적 지식, 분석적 명제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라는 진술은 감각으로 관찰 가능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관찰될 수 있고, 조건만 맞으면 똘똘이가 과연 언제 어디에서 청바지를 입고 있는지가 사람들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명제이다. 이 진술은 똘똘이가 항상 청바지를 입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혹은 똘똘이의 기분이나 어떤 상황에 따라 청바지를 입거나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에 따라 제약을 받는 ‘우연적인 진리’라 한다.

 

반면에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진술은 사정이 다르다. 이 진술은 관찰 가능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실들에 의존함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항상 참인 그런 명제이다. 즉 정사면체는 현실적인 사물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과는 관계없이 항상 또는 ‘필연적’으로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진술은 ‘필연적인 진리’라 한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후천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적절한 검증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명제이다. 즉 이러한 진술은 과연 똘똘이가 언제 어디에서 청바지를 입고 있는지가 경험적으로 관찰되고 검증되어야만 그 진리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명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명제는 진술을 구성하는 낱말들이나 그 의미만을 검토하는 것만으로 그 진리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후천적으로’ 확보되는 인식이다.

 

반면에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와 같은 진술은, 정사면체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4개의 모서리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진리성을 결정하기 위해서 경험적으로 관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진술에 대하여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이 진술에 사용된 낱말의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와 같은 진술의 진리성은 ‘선천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인식된다고 말한다.

 

만일 똘똘이가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진술이 참임을 입증하기 위해 보증자로서의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똘똘이가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든지 혹은 주장에 대하여 부인하는 자를 직접 데리고 가서 관찰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진리임을 확인하면 된다. 이러한 진술을 ‘종합명제’라 한다. 그러나 ‘정사면체’에 관한 진술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단지 ‘정사면체’라는 말이 정의되는 방식이 그러하다고 지적할 뿐이거나 아니면 ‘정사면체’의 낱말을 이해시키면 된다. 이는 마치 ‘삼각형’이 왜 세 개의 선분으로 이뤄져 있느냐를 입증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진술은 ‘분석명제’라 한다.

 

‘종합명제’인지 ‘분석명제’인지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방식은 각각의 진술을 부정했을 경우 자기모순에 빠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별하면 된다. 종합적 명제의 경우, 만일 어떤 자가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를 잘못 판단하여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지 않다”라고 부정해도 이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석명제의 경우,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다”는 명제를 부정하면 “모든 정사면체는 길이가 같은 4개의 모서리로 되어 있지 않다”고 진술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모순을 범하게 된다. 자기모순에 빠졌음을 모른다면 이는 ‘정사면체’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결과이든지 아니면 주장하는 자가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면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결과일 것이다.

 

분석적 명제를 부정할 경우에 자기모순에 빠지는 까닭은 주어 속에 주장된 것이 술어 속에서 부인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합적 명제의 경우 이를 부정해도 아무런 모순이 생기지 않는 까닭은 주어와 술어의 뜻이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합적 명제의 경우 똘똘이가 청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청바지를 입고 있지 않다고 하면 이를 검증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모순을 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석명제의 경우 정사면체에서 네 개의 모서리를 부인하게 되면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짐은 틀림없다.

 

 

이 밖에도 아직까지는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그래서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종합 명제들도 있다. “은하계 어딘가에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있다” 등과 같은 진술은 아직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기술의 발전도 안 되어 있고, 또한 이 진술의 진위眞僞를 결정하는 데에 필요한 감각지각을 현재로서는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진술들은 본성상 종합적이고 후천적인 명제로 여길 수 있겠는데, 아직은 참과 거짓을 가릴 능력이나 방안이 없어서 못할지라도 원리적으로는 검증될 수 있는 종합명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종합명제도 분석명제도 아닌 진술들도 있다. “나는 존재하고 있다”는 진술은 내 입장에서는 분석명제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종합명제일 수 있다. 게다가 “내 눈에 심한 통증이 있다”와 같은 심리적인 사건을 기술한 명제도 있다. 그리고 종합명제에도 분석명제에도 속하지 않지만 명백히 참과 거짓이 가려질 필요가 있는 진술들, 즉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도덕적인 올바른 규칙이 있다”라든가 또는 “마음의 과정은 뇌의 과정과 동일하다”와 같은 철학적 진술들도 있다. 더욱 어려운 작업은 “명제의 자격을 갖춘 모든 진술이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다”는 판단들이다. 이러한 진술들은 종합명제에도 분석명제에도 명확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 진위를 가리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진리인식의 두 기준, 대응설對應說과 정합설整合說

탐구의 과정에서 얻어낸 종합명제와 분석명제에 관한 인식은 진리일까 아닐까? 즉 무엇이 진리이고 아니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전에 ‘진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입은 삐뚤어져 있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진리다. 즉 진리는 존재에 대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식과 그 대상이 일치해야 진리가 됨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면 지성 안에 앎으로 있는 인식을 말해야 하고, 인식은 곧 대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로부터 대상 = 인식 = 진술(말) = 진리가 됨을 알 수 있다.

 

대응설과 정합설

대상과 인식이 일치하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면, 대상과 인식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전적인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를 뜻하는 ‘대응설對應說(correspondence theory)’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판단과 판단간의 일치를 뜻하는 ‘정합설整合說(coherence theory)’의 입장이다.

 

대응설적 입장의 진리관은 두 측면으로 나누어 말해 볼 수 있다. ‘감각적 모사설’과 ‘이성적 모사설’이 그것이다. 감각적 모사설에 따르면, 감각적 경험을 통한 인식, 즉 종합판단이 실제적인 대상과 일치하면 진리라는 것이다. “똘똘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고 했을 때, 감각적으로 똘똘이가 실제로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 진리가 된다는 것이 그 예이다. 경험주의 인식론은 이러한 감각적 모사설의 진리관을 견지한다. 감각적 모사설의 진리를 주장한 철학자는 대표적으로 영국의 경험론자, 로크J. Locke(1632~1704)를 꼽을 수 있다.

 

 

경험주의 인식론에 기반을 두고서 나오는 학문, 소위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심리학이나 사회과학 등의 진리관은 감각적 모사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 분야는 개별적인 사례들의 실험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검증하여 판단의 진리성을 확보하고, 이로부터 귀납적 추리 방식을 통해 보편적인 진리성을 형성하여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까마귀는 검다.”, “저 까마귀도 검다.” 등 수차례의 경험적 관찰을 통해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판단하고, 결국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보편적인 판단을 추론해 낸다.

 

이성적 모사설에 따르면, 이성적 사유의 직관을 통한 인식, 즉 분석적 판단은 자명하기 때문에 명증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라고 한다.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루어진 다각형이다.”는 판단이 그 예이다. 수학이나 기하학적 진리는 근본적으로 분석적 판단에 속하는 것들이다. 감각이 아닌 이성을 통한 합리주의 인식론은 이러한 이성적 모사설의 진리관을 견지한다.

 

이성적 모사설의 진리를 주장한 철학자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말한 플라톤Platon(BCE 427~347)과 이성적 사유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근대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데카르트R. Descartes(1596~1650)가 대표적이다. 플라톤은 감각적 현상의 배후에 본질적인 이데아가 실재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순수이성의 예지적인 직관(noein)에 의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수학과 기하학적 명제들이 경험으로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하고, 이들에 대한 진리인식이란 오직 순수 이성의 직관에 의해 그 자체로 선명한 명증적 진리라고 했다.

 

그럼 정합설적 입장의 진리관은 무엇인가? 정합설은 진리의 근거를 사물과 지성간의 일치에서 찾지 말고 자명한 상위의 관념이나 판단을 전제하고, 이것과 새로운 판단이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자명한 판단이 주어지고, 새로운 판단이 이것과 맞아 떨어지면, 즉 아무런 모순 없이 일치관계에 있으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때 일치관계의 여부는 모순 여부를 판가름하는 ‘모순율’과 그에 기초한 연역의 규칙이다.

 

 

만일 누군가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죽지 않는다.”고 말했을 경우, 이 주장이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당장 판가름하는 작업은 대응설의 입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바마 대통령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진술은 이치를 따져 보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장 드러난다. 연역규칙에 근거한 정합설이 그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죽는다, 오바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바마는 반드시 죽는다.”의 연역추리에서 보듯이, “오바마 대통령은 죽지 않는다.”는 판단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에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 거짓임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연역추리의 규칙에 따르면, A와 B가 동일하고, B와 C가 동일하다면, A와 C는 동일하다. 삼단추리의 연역규칙은 이성의 선천적 규칙으로 보편적이다. 연역에 의한 정합 여부는 감각적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논리적인 이성의 사유로써 판정한다. 이와 같이 정합설적 진리관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이성이 보장하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의 확고한 근거와 기준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대응설과 정합설의 진리관 비판

분석적 판단을 선호하는 진영과 종합적 판단을 선호하는 두 진영은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면서 체계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럼에도 대응설적 진리관과 정합설적 진리관은 나름대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진리관은 각기 어떤 문제가 숨어있던 것일까?

 

<대응설의 비판적 검토> :

첫째, 지성의 관념과 사물의 일치를 진리로 간주하는 대응설적 진리관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한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 입장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각자의 나름대로 판단한 것이 진리라고 할 수 있어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는 것이 진리라는 주장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책상 위에 실제로 빨간 사과가 있을 때, 빨강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이나 색약이 있는 사람은 “이것은 빨간 사과이다.”는 판단을 알지 못할 수 있거니와, 주변의 빛의 밝기에 따라 사과의 색깔이 달라져서 일정한 빨간색의 사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특정의 판단이 사물과 일치하는지의 여부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판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진리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둘째, 대응설적 진리관은 사물과 판단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관념과 판단의 일치가 될 수 있고 결국 영국의 경험론자 버클리G. Berkeley(1685~1753)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흘러갈 여지가 있다. 요컨대 “이것은 빨간 사과이다.”라고 할 경우, ‘이것’은 책상 위에 실제로 있는 빨간 사과를 가리키는 것이고, “빨간 사과이다.”는 판단은 이미 알고 있는 사과에 대한 관념이다. 대응설은 관념 밖에 있는 사물의 ‘이것’과 관념으로 알고 있는 빨간 사과가 일치하므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지성 안에 있는 관념을 말하는가 아니면 지성 밖의 책상 위에 실제로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가이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사물과 관념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대응설은 곧 관념과 관념의 일치를 말하는 꼴이 된다.

 

셋째, 이성의 예지적 직관으로만 파악된다고 말한 플라톤의 이데아는 지성 밖에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아에 대한 인식은 진리인지 허위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게 된다. 이성으로 파악한 이데아들은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대응설은 확실한 진리관이 될 수 없다.

 

넷째, 인과적 지식이나 심리적인 지식은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대응점을 찾을 길이 없다. 요컨대 “주먹으로 뺨을 때리면 고통스럽다.”는 판단이나 “불이 나면 연기가 난다.”는 판단에서 주먹으로 때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거나, 불이 났는데도 연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또한 하루에도 수천 가지의 새로운 생명체가 창조되고 소멸하는 자연계에서 미래적인 사건에 대한 판단은 확인할 수 없게 된다. “현생 인류는 장차 소멸하고 새로운 종의 인간이 등장할 것이다.”는 판단이 그것이다.

 

 

다섯째, 감각적 관찰을 바탕으로 하는 대응설적 진리관은 현실 체계의 관찰 가능한 것들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연적’이고 개연적인 진리를 내세울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이유는 현실 세계의 관찰 가능한 것들이란 잠시의 정지도 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이들을 근거로 진술이 확정되면 어떤 때는 참이었다가 다른 순간에는 거짓이 될 수 있어서 보편적인 진술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식이 감각적 관찰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자들은, 비록 감각 지각에 근거한 판단이 틀리고 종종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식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감각적 경험의 세계이고 지식 또한 이곳을 떠난 것은 공허한 것이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가지고 이를 살아가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합설의 비판적 검토> :

앞서 논리학의 정언적 삼단론의 추리에서 보듯이, 정합설은 판단과 판단의 일치 여부, 즉 상위 판단인 대전제를 깔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판단이 논리적으로 추론되어 나오는 것을 진리로 판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상위 판단인 대전제에 있다. 대전제의 진리성을 판정받으려면 더 포괄적인 상위 판단이 요구되고, 결국은 최초의 상위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상위 판단의 진리성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판단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과 정합되기 때문에 진리성이 확보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판단은 “모든 동물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과 부합하기 때문에 진리이다. “모든 동물은 죽는다.”는 판단은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상위 판단에 부합된다. 그런데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진술은 최종적인 상위 판단이다. 이 판단의 진리성은 확보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상위 판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상위 판단의 진리성은 확보될 수 없다. 그렇다면 최고의 판단인 대전제로부터 연역하여 가장 하위에 있는 판단의 진리성은 논리적으로 확보되지만, 최고의 판단인 대전제의 진리성은 확실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추론되는 모든 하위 판단의 진리성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맹점 때문에 정합설의 진리관 역시 비판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합설과 대응설의 보완적 검토 :

먼저 정합설은 무엇의 도움으로 진리관이 확보될 수 있는가에 대해 검토해 보자.

 

정합설의 진리관은 상위 판단과 새로운 판단간의 일치관계가 연역추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고 필연적인 진리를 확보해 준다. 그러나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이 되고 있는 경험의 과학적 사실에 대한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상위 판단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적 내용의 진리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경험에 의한 객관적 사실에 도움을 받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바로 대응설의 하나인 감각적 모사설의 진리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일 “이 까마귀는 검다.”의 상위 판단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것인데, 상위 판단의 진리성은 “이 까마귀”도 검고, “저 까마귀”도 검으며, 과거의 “그 까마귀”도 검었다는 사례들을 검증함으로써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합설적 진리관의 보편성과 경험적인 대응설의 기준, 즉 감각적 경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사실적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함축한다.

 

상위 판단인 공리와 정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수학이나 기하학과 같은 순수 이론적인 체계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두 점을 잇는 직선은 두 점 간의 최단거리이다.”와 같은 정합적 진리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그것은 대응설적 진리관의 하나인 이성적 모사설이 뒷받침해 줄 수 있다. 적어도 정상적인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성의 직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수학의 이론적인 공리나 정리는 이성적 직관에 의해 자체로 명증적 진리와 더불어 이로부터 논리적 연역에 의해 그 진리성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응설에서 감각적 모사설의 맹점은 무엇의 도움으로 진리관이 확보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자. 감각적 경험으로 얻어낸 개별적인 판단으로는 과학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개별적인 지식이 학문의 일반적인 지식이 되려면 그것이 뜻하는 모든 대상이 감각적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여기로부터 창안해 낸 것이 소위 귀납추리(induction)이다.

 

귀납歸納이란 구체적인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경험될 때, 이 사례들을 바탕으로 같은 조건이 주어지면 앞으로도 그런 사례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일반화하는 방법이다. 이는 감각적 지각의 사례들을 토대로 하여 경험적 지식을 획득하고, 그 지식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부의 사례로부터 보편적 법칙성을 부여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논리적 비약을 동반한다. 이것을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이라 한다.

 

그렇다면 귀납적 비약은 정당한 것인가? 만일 귀납적 비약이 치명적인 약점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그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개별적인 판단에서 보편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 귀납법은 그 기반부터 무너질 것이고, 개별적인 감각적 경험 지식으로부터 일반화하는 작업은 애초부터 타당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귀납적 비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서 ‘자연의 한결같음(the uniformity of nature)’이라는 원리가 제시된다. 이 원리에 관련해서 밀J. S. Mill(1806~1873)은 우주의 모든 현상에 대해서 일정한 조건 하에 일어난 개별적인 사례가 현재나 미래에도 같은 조건이 주어지면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연의 진행 과정은 한결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한결같음’은 실험적 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획득한 인식이 보편적인 진리명제(귀납추리)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학문의 진보 :

합리주의 인식론은 진리의 근거가 순전히 합리적인 이성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경험주의 인식론은 개별적인 감각적 지각에 근거한다고 설파한다.

 

‘필연적으로’ 참인 진술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식’일 수 있음을 고집하는 합리주의자들은, 항상 참일 수 있는 명제들만이 진리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진리관이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명제들보다 항상 우위에 있음을 단호하게 제시한다. 왜냐하면 필연적인 진술들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항상 참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세계의 지각을 참고할 필요가 없고, 조금이라도 의심될 수도 없는 그래서 결코 틀린 것으로 증명될 수 없는, 그런 확실한 인식만이 진리라는 명칭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합리주의 입장에서 인식론을 전개하는 자들은 확실성의 진리 인식이란 말을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사용하기를 거부한다. 그 근거로 감각의 대상들이란 변화하는 것들이어서 진리의 항존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느 순간에는 삼각형의 물체였던 것이 다른 순간에는 변화되어 사각형의 물체로 바뀐다면, 이에 대한 진술은 “이 물체는 삼각형이면서 사각형이다”라는 상반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경험주의자들에게도 사정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것이 확실한 인식이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분석명제와 같은, 현실적으로 검증될 수도 발견될 수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인식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또한 그들은 합리주의 인식이 필연적인 진리임을 인정하나 그들의 진술이 단순히 낱말을 정의하는 것이기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지만, 인류가 알아야할 지식의 증가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필연적인 인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수학이나 논리학의 영역인데, 이는 곧 여러 공리와 정리들로부터 출발해서 논리적인 추론과 관계들을 여러 방식으로 풀어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 + 3 = 5”의 경우처럼, 이 진술은 정의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참이 될 뿐이다. 그래서 오류를 범하지 않고 확실성을 얻어낼 수 있는 영역은 오직 수학과 논리학에 국한될 뿐이고, 과학적 지식의 증가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학문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는 개별적인 감각적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이성적 사유의 비판을 통해 누구에게나 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양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특히 학문의 체계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 인식론은 대응설이 말하는 감각적 경험만으로도, 정합설에 기초하는 이성적 사유만으로도가 아닌 감성과 이성, 감각과 이성적 직관의 협력으로 축적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온전한 학문적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합리주의 방식과 경험주의 방식 중에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방식을 종합해야 한다. 귀납적 방식을 통하여 얻어낸 일반적인 진술은 학문적 체계의 보편성을 확립하는 연역적 방식을 통하여 학문적 진리체계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사에서 볼 때, 새로운 경험적 자료들을 진리인식의 위상으로 끌어올리는 귀납, 사실들이 모순 없이 체계를 성립시키는 연역의 정합적 체계화, 이 양자의 융합은 새로운 진리인식의 학문적 체계화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진리의 개방성을 통해 우리는 학문의 발전과 진보의 행보를 거듭해 나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7. 1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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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의 관계

 

 




외교 관계

한국과 수단은 1976년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1977년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77년 4월에 주수단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고, 1990년 11월에는 주한 수단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3년 3월 니메이리Gaafar Nimeiri 대통령의 방한과 1984년 10월 타예브El Tayeb 제1부통령의 방한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돈독해졌으며, 여러 분야의 협력관계가 증대되고 있다.

 

경제문화 관계

한국의 대對수단 교역량(2016년 11월 기준)은 수입이 0.1억 달러, 수출이 1.39억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목은 동,연, 알루미늄 스크랩, 식물성액즙 등이고, 주요 수출품목은 자동차 및 부품, 건설중장비, 정밀화학원료, 전자부품 등이다.

 

향후 대對수단 진출 유망 분야로는, 먼저 수출유망품목으로 건설중장비 및 자동차부품, 승용차, 화물자동차, 배터리 등 자동차관련 품목이나, 원활한 교역 환경 조성에 따른 소비재 및 경제개발을 위한 기자재 분야의 수요 증가가 전망된다. 또 소비재 분야에서는 화장품, 축전지, 금고, 금전출납계(POS시스템...) 등 저품질의 중국산 제품을 기피하는 소비층 공략이 필요하며, 품질 및 경쟁력 있는 가격대의 제품을 선호하는 성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농·축·광산업 기자재 분야에서는 수단의 광활한 옥토를 활용한 농업 및 축산업 개발 수요의 증가세에 주목하여 트랙터, 콤바인, 이양기, 경운기, 발전기, 관계시스템, 태양광 시스템, 축산 영양제, 항생제 등을 집중 공략할 필요가 있다. 기타 각종 의료용 소모품, MRI, 심전계 등 한국산 의료기기에 대한 선호도도 높은 편이며, 수단 정부의 행정 자동화 및 투명화를 위한 전자정부 시스템 도입 수요에 대비하여 IT시스템 관련 분야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와 수단 간에는 1978년 6월에 무역 및 경제기술협력 협정, 1979년 10월에 문화 협정, 1993년 11월에 의료협력 협정, 2004년 5월에 체육·청소년교류 협정, 2004 9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을 체결하였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수단에서 9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또한 1974년 이래 수단 기술연수생 약 60명이 방한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한국의 섬유기술자 등 10명이 수단에 파견되어 기술지원을 실시하였다. 또한 수단에는 1978년부터 한·수단친선협회가 구성되어 있고, 양국 의원들 간의 한·수단의원친선협회도 1983년에 구성되었다.

 

2016년 현재 수단 내 한국 교민은 60여 명이며, 주요 진출 업체로는 삼성 및 LG지사, 대우 관련 합작회사 등이다.

 


북한과의 관계

수단은 1969년 4월 북한과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같은 해 6월 21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수단은 북한에 원면아라비아고무 등을 수출하고, 북한으로부터 면직·문방구 등을 수입하는 소량의 통상관계가 있으며, 북한이 수단에 청소년회관 건립지원 무상원조를 제공한 바도 있다.

 

수단의 대북한 관계는 중국의 태도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아 왔다. 1992년 7월 주수단 북한대사관이 폐쇄(주이디오피아 대사가 겸임)된 이후 명목상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실제 교류는 활발하지 않은 실정이다. 2014년 10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수단을 방문한 바 있으며, 수단 내 친북한 단체로는 수단-북한 친선협회와 코리아 클럽이 있다.

 

수단과 북한 간에는 1969년 4월에 문화 협정과 과학기술협력 협정, 통신기술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0년 8월에 경제·문화 기술원조 협정, 1978 3월에 항공운수 협정을 체결하고, 1999 5월에 수단·북한 외무성간 협조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Posted by 천연감성
세계정보2017. 7. 9. 17:48




 

 

아프리 수단의

관광명

 

 




그랜드 모스크 카르툼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진 지 약 100년이 넘으며 적색암으로 지어져서 매우 아름답다.

 

옴두르만 시장Souq Omdurman 수크Souq는 아랍어로 시장을 의미한다. 옴두르만 시장은 수단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구역은 수공예품을 파는 구역으로 영어로도 간단한 의사 소통이 가능하며 흥정만 잘하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제품을 구할 수 있다. 옴두르만 시장은 내부로 들어가면 골목이 매우 좁고 사람이 많아 도난의 위험이 있으므로 방문 시 가급적이면 귀중품은 지참하지 않고, 현금은 잘 보관하여 도난에 주의해야 한다. 시장을 방문 후, 매주 금요일 밤 5시 옴두르만의 Tomb of Sheikh Hamed el-Nil 근처에서 열리는 Halgt Zikr라고 불리는 수피댄스를 보아도 좋다. 초록색과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기도를 드리고 알라를 찬양하며 춤을 추는데, 6시쯤부터 dervish들이 팔을 벌리고 맨발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흰색, 초록색, 호피무늬 옷들이 쫙 펴지고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다.

 

게벨 바르칼Gebel Barkal 카리마는 카르툼에서 약 4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리마에 가면 꼭 가야 할 곳은 게벨 바르칼과 그 주변에 있는 피라미드들이다. 게벨 바르칼은 과거에 이집트인들이 쿠시Kush 왕조를 정복하고 자신들의 신 아문Amun이 태어나고 살고 있는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현재는 고대 나파탄Napatan 유적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게벨 바르칼의 높이는 약 98m이고 위가 평지이며 올라가는 시간은 약 15분 정도 소요된다. 예전에 무역상이 주요 기점으로 활용하였다고 하며 외관이 코브라 모양이다. 누비아 영토로 알려진 건조 지역과 나일 강변 양쪽에 자리 잡은 5군데의 고고학적 유적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가 60km를 넘는다고 한다. 게벨바르칼, 엘쿠루, 누리, 사남, 주마등의 유적은 쿠시 2번째 왕국의 나파탄 문명과 메로에 문명을 보여준다.

 

낙타 사막 탐험 카르툼에서 북부의 카리마까지 약 400km에 달하는 사막을 낙타와 함께 탐험한다. 여행은 약 11일간에 걸쳐서 이루어지며 야간에는 텐트에서 잠을 잔다. 날씨 여건상 프로그램은 매년 3월에 운영된다. 메로에 피라미드 입구에서도 적은 비용으로 낙타를 타고 피라미드 근처를 돌아볼 수도 있다.

 


동골라Dongola 카르툼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수단 북쪽 주의 주도이다. 한때 고대 누비아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1964년부터 폴란드에 의해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고대 동골라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집트와 연관된 유적지가 많고, 현재도 계속해서 유럽 고고학자들의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그중 수단 북부 나일 계곡에서 6세기부터 약 900년 동안 번성했던 마쿠리아 왕국의 수도 ‘동골라’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미스터리 지하실’이다. 이 지하실에는 흰색 벽에 검은색 잉크로 그리스어와 고대 이집트 남부의 언어가 쓰여 있다.

 

누비아Nubia 사막 수단의 북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사하라 사막의 동단에 위치한다. 누비아 사막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은 누비안들로 불리는데. 그들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크고 다양하게 받았다. 수단의 관광 지역인 메로에, 동골라 지역을 방문하면 누비아 사막을 경험할 수 있다. 카리마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누리에 누비아 왕들의 피라미드가 남아있다. 누리의 피라미드는 작은 규모지만 고운 모래 위에 있는 피라미드들로 아름답다.

 

메로에Meroe 카르툼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로서, 차량으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수단에는 총 216개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중 57개가 메로에에 있다. 근방의 나가Nagga 신전과 함께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메로에의 피라미드는 절반 이상이 꼭대기 부분이 폭파되어 있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탐험가 페를리니가 피라미드의 금을 꺼내기 위해 폭파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금들은 현재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프리카에는 두 개의 고대 문명이 확인되었는데, 이집트 문명과 메로에를 중심으로 하는 쿠시 왕국 문명이다. 쿠시 왕국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파라오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반대로 기원전 1000년경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고 레바논, 현재 수단의 카르툼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강국이었다.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호령했던 역사가 한국인에게 자랑스럽듯, 쿠시 왕국의 역사는 수단인들에게 큰 자부심과 긍지의 역사로 남아 있다.

 

메로에 방문을 원할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드라이버를 동반한 렌터카를 이용한다. 메로에는 사막에 위치해 있어 주변에 이렇다 할 숙박 업소가 없기 때문에 여행사에서 메로에 근처에 텐트 형태의 숙소를 마련해 놓고 있다. 날씨 문제로 5월 6일부터 10월 1일까지는 텐트를 폐쇄한다.

Posted by 천연감성